원숙함에의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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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2일, 잠실 롯데 콘서트홀에서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독주회가 있었다. 나는 힘겨운 수험 생활에 지칠 때면 힐러리 한이 연주한 바흐의 샤콘느를 들었다. 단정한 음색과 안정된 기교가 전달하는 질서정연한 슬픔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름의 역경 속에서 갖게 된 애정 탓인지, 바이올린의 거장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져 결국 연주회의 티켓을 구매했다. 빈곤한 지갑 사정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좌석에 앉지는 못했고, 2시간의 연주회 내내 그의 등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만족했다. 항상 이어폰 너머로 접하던 이를 직접 보고, 그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회는 내게 두 가지의 감정을 선사했다. 첫 번째 감정은 경이였다. 힐러리 한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입장하는 순간 비치던 그의 옆모습을 보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 올라왔다. 미소 띤 얼굴로 넓은 무대로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 단단해 보였다. 나는 그가 첫 소리를 내는 순간까지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두 번째 감정은 괴로움이었다. 사실 이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내 수험 생활을 지탱해주었다는 개인적인 서사에서 비롯되는 감동은 힐러리 한이 첫 음을 내는 순간까지만 지속되었다. 나는 힐러리 한의 연주에서 아무런 감상을 느낄 수 없었다. 내 가슴에서 오롯하게 우러나오는 생각을 갖고서 그의 음악에 임하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투브에 연주회의 곡목을 검색해서 들어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나는 두 시간 동안의 공연 내내 왼쪽에 앉은 관객의 외투 스침소리에 괴로워야 했고, 오른쪽에 앉은 관객의 코먹는 소리에 고단해야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서 8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마음에는 망연자실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던 힐러리 한의 연주를 두 귀로 직접 들었는데도 머리에는 박힌 게 없었다. 각종 클래식 커뮤니티에 감상을 검색해보았다. 콘서트를 갔다 온 모든 사람들이 힐러리 한의 연주를 두고 길이 남을 거장이라며 기립박수를 쳤다. 왜 나는 그의 음악에서 감동을 느낄 수 없었을까? 나는 뭐가 부족했을까?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채 회장에 들어갈까, 그런 걱정에 티켓을 구입하자마자 프로그램에 올라와 있는 곡목을 공부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흐의 파르티타를 들었고, 그 비평을 찾아보았다. 그 무엇도 내 감상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생각에 강남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허망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것이 아닌 감상을 마치 내게서 비롯된 오롯한 사유인 양 그렇게 떠들었다. 힐러리 한이 스타일을 바꾼 느낌이었어요. 왜, 그 사람은 되게 기계적인 연주의 정석이잖아요. 정경화랑은 대조적으로요. 그래서 그 질서정연한 맛이 좋아서 평소에 그분의 연주를 선호했는데, 특히 바흐 말이에요, 이제는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포르테가 대담해지고 주제의 강조가 극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이들일수록 자신이 여태껏 추구해온 방향을 틀기는 어려운 법인데 그 분이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목도한 제가 행운아네요. 되게 문학적인 모멘트, 음 에피파니? 를 목격한 거나 다름없잖아요.

고리타분한 표현. 지켜지지 않는 문법. 성긴 구성. 허술한 내용.

내 빈곤한 언어를 저주한다. 내 얄팍한 이해를 증오한다. 내 가난한 안목을 혐오한다. 그날 밤, 눈을 들어 내가 가진 궁핍한 자산들을 끌어 모아 보았다. 맥락의 수긍 없이 단순하게 반복하는 지식, 치밀한 논증이 없는 결론, 책들이 바스러지는 서재, 어릿광대처럼 허풍 섞어 늘여놓던 내 모습까지. 무지의 선율을 노래하는 혓바닥을 잡아 챈 다음 손가락 끝으로 혀뿌리를 더듬고 어두운 목구멍 안을 헤집어보면 검은 기름때가 낀 오물을 끄집어 낼 것 같다. 형체가 되다 못한 부스러기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자석이 고장나버린 나침반과 같아서, 내가 황량한 길을 헤쳐 나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나침반을 망가뜨린 건 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이 빠른 물살처럼 밀려들어온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만 싶다.

방의 서재에 꽂혀 있던 민음사의 햄릿. 그 책등에 박제된 셰익스피어의 눈이 나를 향했다.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던 햄릿. 그 선택지 앞에서 구차한 시간을 이어나가는 나를 본다. 햄릿은 제 죽음을 완성했는데,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셰익스피어의 시선이 계속 따라온다. 우울감이 나를 진득한 늪으로 끌어내린다. 오욕에 찬 생을 어떻게든 변제하고자 하는 추악한 탐심은 혀를 날름거리며 내가 명예의 명패를 갖도록 닦달한다. 이 욕심이 불순한 동기임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내 자신에게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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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수능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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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15~16

 

지난 12년, 그 중에서도 이번 1년은 유난히 고통스러웠다. 육체도 정신도 모두 고달파서, 그래서 내가 영원히 고통 속으로 침전할 줄 알았다. 그동안 나는 스트레스성 두드러기로 인해 매일 밤마다 온몸을 긁어야 했고, 병원에서 임시방편으로 처방한 약을 먹어야 했다. 계속 앉아있던 탓에 척추는 뒤틀렸으며, 더 이상 내 허리를 뒤로 젖힐 수 없게 되었다. 체력은 내 육신을 떠받치는 것으로 그 쓸모를 다했다. 움직이는 일이 없으니 육체는 물 먹은 솜인 것 마냥 불어났다. 자유로운 정신이 살로 이루어진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 매 순간이 답답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마다 갈빗대 아래의 가죽을 가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된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날카로운 메스가 뱃가죽을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가 그 안의 장기를 하나씩 빼내, 종내에는 붉은 살덩이 몇 점으로 환원될 내 존재를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나를 이루던 것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의미 없는 자유를 누릴 영혼을 상상했다. 뒤틀린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내 12년의 공교육은 막을 내렸다. "막을 내렸다"고 표현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수능을 치르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영영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던 탓이다. 그토록 내 정신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미성년의 삶이 이제는 정녕 그 뒤통수를 보이고 있다. 이내 나는 비로소 강압적인 의무에서 탈피해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제도교육 12년의 종착지가 있었고, 동시에 12년의 내 인생에 대한 구속이기도 했던 그것은 비로소 끝을 맞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1789년의 정신을 만들어 낸 파리의 민중들처럼 내 자신에 대한 자유를 쟁취해 낸 셈이다.

시험을 마친 후에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제 2외국어 과목까지 다 보고 나니, 태양은 산 너머로 이동한 지 오래였다. 버스 창 너머로 휙휙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 라 단조를 들었다. 그 특유의 딱딱하고 절도 있는 리듬, 바로크 음악의 단아한 화음 진행이 피아노의 청명한 소리와 어울려 내는 소리가 질서정연했다. 선율이 내게 선사해주는 그 질서감에 안정감이 들어,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도 계속 그 곡을 들었다.

주황색으로 빛나는 가로등 불빛을 맞으면서 기숙사가 있는 산 위를 올라갔다. 내 두 발로 경사를 밟아 올라갔다. 그러면 나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기도를 홧홧하게 태우는 숨을 뱉었다.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시험이 끝나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롤랑 바르트를 뒤적거렸다. 단테의 신곡 첫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소설을 창작하는 재료가 되는지에 대해 전개되는 아이디어가 피어나는 꽃처럼 고매했다. 텍스트를 훑은 다음에는 피아노를 쳤다. 1학년과 2학년이 모두 빠져나가고, 귀사한 3학년이 한 줌이 되지 않는 학교에서였다. 부조니가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샤콘느의 음색은 아무도 없는 넓은 강당을 오롯하게 채워서, 뼈가 욱신거리도록 아름다웠다. 피아노를 치고 나서는 침대에 누워 잤다. 그렇게 새벽에 깨서 내가 자유를 얻어내고 행한 일을 손으로 꼽아보니, 마침내 얻어낸 자유는 보잘 것 없고, 너무나 사소해고,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나는 더더욱 슬퍼졌다. 이토록 사소한 자유를 얻지 못해서, 마음 놓고 글을 읽을 여유가 없어서, 건반을 두드려 보지 못해서.

 

운동장으로 나갔다. 1학년과 2학년이 모두 빠져나가고, 기숙사로 귀사한 3학년이 한 줌이 되지 않았던 덕에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가운데서 까맣게 물든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암색 구름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자그마한 빛으로 표상되는 인공위성은 부지런하게 하늘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고개를 젖혀 어두운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빛의 공해에 가려졌을 이들의 흔적을 좇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겹겹이 싸인 별들의 장막이 내 몸을 스르르 감싸 안았다. 기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깊은 밤하늘과 내 존재가 합일되는 느낌이었다. 그 신비롭고 묘한 체험을 논리적인 언어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세인들은 신이 이룩한 질서로써의 세계에서 살았고, 근대인들은 국가의 울타리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했다. 현대에 살고 있는 나는 그 어떤 견고한 테두리의 수혜를 받지 못한다. 내게는 내 불안정한 존재를 지탱해 줄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 우주적인 하늘을 보며 안정감을 느낀 건 그러한 탓에서 비롯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내가 수능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며 바흐를 들었던 건, 그에 깊은 질서를 느낀 건 내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시간에 불안을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보편적이라고 취급되던 학창시절이 그 끝을 고했기 때문에 그런걸지도 모른가. 내가 이야기의 전개가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하나의 극을 꿈꾸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사소한 자유가 성기게 엮인 태피스트리를 더듬고 있는 셈이다. 내 청소년기의 가시나무 울타리가 되어준 입시는 종결되었다. 나는 그 울타리를 걷었고, 이제 그 자리에는 그동안 박탈당했던 자유가 머리를 내밀 것이다. 그 깨달음이 애틋했다. 내가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 나 스스로가 누릴 자유. 이제 나는 그 식물을 거둬들이고 실을 짜내 촘촘한 태피스트리를 엮을 것이다. 아직 형태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직조물에 무슨 문양을 새길 지는 오롯한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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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으로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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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으로, 딸에게

작년은 내가 처음으로 너를 자각했던 때란다. 지상에 떨어진 내가 낙원에 있을 너를 느낀다는 건 곧 내 존재가 그만큼 상처입고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환경에 종속된 인간은 그를 둘러싼 세계가 위태로워지고 휘청거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 존재의 오롯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야. 용서를 하나 구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자각했던 그 순간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내가 두려웠던 탓이야. 그 어떤 생각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심지어 일종의 박탈감마저 느끼는 상황에서 내가 이성을 잃고 존재를 난도질할까 두려웠단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게 편지를 쓰고 있지. 조금 모순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시간이 일정 지난 오늘의 나는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어. 비수 같은 말을 품고 우리 모두를 훼손하는 일은 없을 거야. 또, 요새 하는 생각들을 종합해보니 네게 꼭 전해야할 것 같은 메시지가 있더구나. 주목적은 그거야. 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나는 조금 독특한 버릇이 있어. 이걸 버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밀한 속내를 터놓고 깊이 대화해본 이가 없으니 일단은 버릇이라 칭할게. 내 버릇은 내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여긴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거야. 일상생활을 하다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나는 그것들을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해. 그렇게 기억은 내 마음 속의 양분이 되지. 그것이 과연 성장을 위한 양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해. 생각은 주로 기억 당시의 내게 아쉬웠던 것, 내 부족했던 것을 초점 삼아 흘러가. 왜 나는 그때 아버지께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무력하게 눈물만 흘려야 했을까? 왜 나는 나를 몰아세우는 어른들의 앞에서 입을 제대로 열 수 없었을까? 생각의 흐름은 빠른 물살과도 같아서, 그렇게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여태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초등학교 때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나를 윽박질렀던 선생님, 계산 과정에서 바보 같은 실수를 계속 한다고 내 손등을 회초리로 때리던 학원 선생님, 수학 시험에서 실수로 세 개를 틀렸다고 나를 연신 없는 사람 취급하던 엄마…. 물론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춥고 그늘진 건 아니야. 그렇게 평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그렇지만 칼날 같은 경험들을 떠올리기 시작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음, 생각의 연속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만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야. 나 스스로에 대해서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거든.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사고작용을 거치며 어른이 나를 꾸중하는 때 극단적인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어른이 나를 훈계하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예리한 두려움을 느껴. 저 사람이 곧 나에게 윽박지를 거라는 생각, 그래서 내 인격이 갈래갈래 찢어질 것 같다는 생각. 그러면 무력감이 차오르며 눈물부터 뚝뚝 떨구더라. 내가 타인과 토론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이 탓이 클 거야. 상대와 내가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발언력과 비판에 쉽게 휩쓸려버리거든.
스스로를 되짚어보며 발견했던 것 중에 가장 큰 소득은, 내 공포의 근원을 마주한 거야. 왜 나는 어른들이 나를 억압적으로 몰아갔을 때 내 정당성을 내세우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았어. 그랬더니 나온 결론은 내가 권위적인 환경에 계속 노출되며 성장했던 게 원인이라는 거였어. 우리 집은 전통적인 한국 가정 상이야. 내가 장녀이고 내게는 남동생이 없기 때문에 자식들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차이가 없을지는 몰라. 하지만 부모님의 성향은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이야. 그래, 아들이 없는 가부장적인 가족.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어. 부모님이 나보고 눈물이 많다고, 유약한 영혼이라며 꾸중했을 때, 내가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변명이 하나 생긴 거니까. 내 정신이 나약한 게 아니며 내 눈물은 거듭된 무력감을 학습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지. 솔직히 말해서 변명이라는 표현도 우스워. 실제로 내가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내 의사를 밝히는 순간 엄습하는 공포감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하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내 어머니가 자주 입에 담는 말이 있어. “그래도 뉴스를 보면 막 얻어맞고 뼈가 부러지고 멍이 드는 그런 애들 있지 않니. 그런 가정을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행복한 거야.”
아이를 학대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이상한 사고가 아닐까? 자신의 모습을 가장 최악의 경우와 비교하고 안심 하는 것은 표본을 잘못 선택한 거니까. 타인의 가장 깊은 어둠을 가져와서 스스로의 인격에 위안을 얻는 게,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있을까? 인간의 가장 저열한 상태와 자신의 최상의 상태를 비교하면서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허울뿐인 만족이겠지. 그런데 왜 내 부모님은 자녀에게 폭력을 휘둘러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는 걸까? 그러더니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어.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밀려오는 분노가 말이야. 내가 아이의 인격을 지금보다 더 존중해주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극도로 소심한 성정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음식점에서 종업원의 눈치를 심하게 보지 않아도 되었을까? 어른들에게 내 의사를 떳떳하게 밝힐 수 있었을까?
나는 인정해야 했어. 나 자신의 존재를 내 의지 하나만으로 오롯하게 구축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내가 지금의 내 가족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면서 대단히 많은 것들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래, 나는 내 부모님이 표현하는 대로 유약한 인간일 수도 있어. 타인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괴로워하니까. 그리고 나는 내 평생을 걸쳐 괴로워해야 하겠지. 타인에게 휘둘리는 영혼을 안고, 여태껏 타인이 내 영혼 위에 남겨놓은 상흔을 더듬어야 하니까 말이야. 그러므로 이건 내 존재의 뿌리에 깊숙이 박힌 원죄인 셈이야. 내가 지금의 가정에서 태어난 순간, 죽는 날까지 어깨 위에 이고 가야할 그런 무게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나는 네 존재가 두려워졌단다. 내 물렁한 정신은 나의 부모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병적인 가치관을 학습했을 텐데, 지상으로 현현한 네게 그 가치관을 다시 물려줄까, 그게 너무 무서웠어. 만약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면 꼴에 어버이랍시고 네 탄생을 결정지었다는 자만에 빠져 너에게 휘두르는 지배는 너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까. 울긋불긋한 멍 자국 가득한 존재가 스스로의 상처에 고통 받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을 괴롭히는 데까지 이어진다면. 이 얼마나 잔혹한 재생산이니? 나로 인해 슬픔의 바다에서 홀로 헤엄칠 네 존재를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절로 꺼림칙해져.
내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그런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원죄에 대해 무어라 단언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 도달한 게 하나 있으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어쩌면, 되물림 하는 존재의 부조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내가 너의 존재를 에덴에서 찾은 것도 그 때문이야. 탄생과 성장으로 빚어지는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자유로울 존재, 그런 존재가 에덴에 있지 않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괴로워 할 누군가를 나 자신의 의지를 통해 구원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소망을 접는 거야. 네가 감히 지상으로 내려오길 희망한, 그 오만한 욕심을 접는 것. 이 이야기는 네게 편지를 쓴 목적이기도 해. 네게 보내는 이 편지가 네 순수한 정신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알면서도 그를 감수하는 의도이기도 하고.
이건 너에게 보내는 나의 부탁이자 선언이야. 영원히 너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각오지. 그러니 이름 없는 내 자식아. 너에게 당부하니, 선악과는 내가 베어 물었고 지상에서의 고통은 내가 영원히 받을게. 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 이게 네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메시지야. 앞으로 내가 에덴으로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겠지. 너의 존재를 생각할수록 지상에 현현한 네 모습을 멋대로 기대할 테니까.

지상에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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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소울 3 – 융화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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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고 느끼거나 분석했던 점을 바탕으로 비평을 써 보았는데, 이 게시판의 성격과 잘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게임에 대해서 논의해도 괜찮을까요?

 

게임 – 융화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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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그러나 중학교 때만 해도 이렇게 게임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피시방에 출입하는 동급생들이 자신이 게임에서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상 세계에서의 일을 현실에 데려와 허세 가득한 어조로 떠드는 행태가 아둔해 보인 탓이다. 그런 아이들의 대부분은 거친 욕설이 가득한 언어를 구사했고, 다른 학생들의 건전한 학교생활에 지장을 주었다. 나는 그러한 학생들이 쉽게 보이던 폭력성의 원인을 게임에서 찾았다. 게임은 장르 특성상 여타의 예술 문화와 달리 적극적인 참여자를 필요로 하는 매체인 탓에, 흥미 유발이 중요한 목표점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폭력성이나 무차별적 재미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이러한 매커니즘을 통해 게임의 자극적인 컨텐츠에 노출되며 스스로의 인격을 훼손했다고 보았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프롬 소프트웨어 社의 다크 소울 3을 접하게 된 후 게임에 대한 인식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나는 다크 소울 3을 플레이하는 과정을 통해, 게임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요인이 자극적인 것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중학교 때의 내가 그랬듯, 게임을 본격적인 예술 향유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하위문화'로 취급하는 현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게임이 구현하고 있는 컨텐츠의 고증 정확도나 게임에 몰입하기 위한 세부적인 스토리텔링(즉 세계관)의 구성이 참여자의 적극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단지 '하위'로 치부할 문제는 아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크 소울 3에 대한 감상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1.

일본의 게임 회사인 프롬 소프트웨어가 2016년에 출시한 다크 소울 3은 가상의 중세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모험을 하는 RPG(Role-Playing Game의 약자) 게임이다. 게임의 주요 줄거리 이러하다. 불이라는 에너지를 통해 유지되는 세계인 로드란에 불이 꺼져감으로써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세계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에 수많은 이들이 불을 계승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도 점차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불의 계승에 이미 실패해 한 번 죽었던 주인공을 다시 깨워, 몰락해가는 세계를 어떻게든 되살리고자 한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주인공 시점으로 눈앞의 길을 걸어 나가게 된다.

나는 게임의 전체적인 설정을 영상으로 설명해주는 트레일러를 보고 나서 튜토리얼을 진행했다. 튜토리얼은 게임 조작에 대한 전반적인 감각을 익히게 해주는 단계다. 따라서 비교적 쉬운 난이도로 구성되며, 게임을 처음 접한 플레이어가 게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버거웠다. 적들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내가 조작하는 캐릭터에게 달려올 때는 실제적인 공포를 느꼈고, 제 때에 방패를 들지 못해 적들에게 얻어맞다가 결국 죽었을 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낯선 게임 환경, 불친절한 조작 인터페이스, 조각조각 나뉜 스토리텔링 등, 이 모든 요소가 큰 장벽이었다. 속에서 불만이 타올랐다.

그렇게 불퉁한 표정으로 게임에 임하고 있던 나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있었다. 내가 조작하던 캐릭터가 게임 내에서 등장하는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였다. 그는 고아한 중세 영어를 구사했다. 알고 보니 게임 속의 모든 인물이 항상 thee나 thou로 운을 떼고 있었다. 이 게임을 제작한 회사가 일본을 국적으로 두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정말 대단한 섬세함이었다. 오히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이 멋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나는 게임이라고 하면 상대를 향해 총을 쏘거나 칼을 꽂고, 그것을 공적으로 삼는 폭력적인 매체라고 치부했다. 다시 말해 “교양 없는” 오락이라고 여겼다. 다크 소울 3을 플레이 할 때도, 내가 생각해오던 게임과 별다른 점이 없는 게임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귀로 들려오는 유려한 중세영어가 내 얄팍한 인식을 크게 후려쳤다. 중세 판타지라는 배경이라는 사소한 요소 하나만을 위해 중세 영어로 된 대사 라인을 짠 이 회사는 무슨 철학을 갖고서 게임에 임했을까? 나름 중세 판타지를 표방한답시고 양산된 그 수많은 RPG 게임들이라면 상상도 못 할 노력이었다. 그때부터 이 게임이 도대체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

다크 소울 3은 2011년에 이미 출시된 다크 소울 1의 시리즈다. 이하 전체적인 장르를 논할 때는 “다크 소울”로 칭하고자 한다. 3은 1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로, 1에서 프롬 소프트웨어가 보여 주었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비평가들이 다크 소울 시리즈의 묘미로 꼽는 주요 장점은 바로 융화적인 체험이다. 모든 것이 가상이라는 게임의 원초적 원리에 가장 충실한 답변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는 내가 다크 소울 3을 직접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장점들이기도 하다.

융화적인 체험이라는 장점을 설명하기 전에 잠깐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다른 장르와 달리 게임이 갖는 독특한 특징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가 게임에 구현된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 업계들이 수익을 벌어들이는 구조도 이 점을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깔고 간다. 가상 세계의 캐릭터를 위한 옷, 전투에서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약, 더 좋은 공격력을 자랑하는 아이템 등,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들을 현금으로 사고파는 이유는 모두 체험성 때문이다. 만일 게임 세계와 유저가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유저에게 이입할 여지를 주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유저와는 아무런 접점을 갖지 못하는 별개의 것이 되고 만다. 반면 게임이 유저를 융화시키는 데 성공하면, 개인은 가상 세계 속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체험하게 되며, 좋은 감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좋은 게임은 이 특성을 어떻게 살리느냐로 결정된다. 어떻게 설득력 있는 서사와 세계를 만들어서 유저를 가상에 융합시킬 것인가? 출시 이후 피시방 점유율을 단번에 사로잡은 게임 “오버워치”의 경우에는 팀 전(戰)의 구조를 통해 융화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파악했다. 승리와 패배라는 명확한 게임의 결과가 존재하고, 이에 자신이 팀에 어떤 이바지를 하느냐에 따라 실체적인 감각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다크 소울의 경우는 오버워치와 조금 다르다. 오버워치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쟁취하는 승리의 재미를 부각한 게임이라면, 다크 소울은 플레이어 홀로 오롯이 진행해야 하는 구조다. 즉 완전한 가상 세계 속에서 플레이어의 융화를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과제가 요구된다.

우리는 위에서 스토리 라인을 살펴보았다. 불이라는 미지의 힘을 통해 생명력이 유지되는 세계. 그러나 불은 꺼져 가고, 주인공은 그 해결책을 찾는다. 양산형 RPG 게임에서 다루는 물린 설정을 벗어던지고 창의적으로 구성한 세계관이다. 바로 이 점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현실 세계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을 계승한다는, 그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목적을 이해하고 게임 세계에 융화될 수 있는가? 그 목적에 공감할 수 있는가?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타인들과 단절된 무인도에서 표류 생활을 하던 주인공은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하나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주며 정을 붙인다. 우리는 윌슨이라 이름 붙여진 배구공과 헤어지던 때 주인공이 보여주던 감정적인 반응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공감을 잘하는 생물인지 파악할 수 있다. 가상 세계에 대한 융합의 문제는 곧 그 세계에 대한 공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익숙해진 환경에 쉽게 이해하곤 한다. 그리고 익숙함에서 비롯되는 공감은 곧 융화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가상 세계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또 하나 발생하게 된다. 경험에서 나오는 익숙함이 공감을 만들게 된다면, 사람들이 게임의 가상 세계에 익숙해질 때까지 게임을 계속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과 배구공의 경우는 주인공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에 발생 가능했던 것이지만, 안온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현대인은 좀 더 강력한 끌어당김이 필요하다.

사실 다크 소울은 인터넷 BJ 시장의 활성으로 인해 이미 큰 명성을 얻은 덕에, 이 점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임의 본원적인 성격으로 들어가 보았을 때,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한 요소들이 있다. 바로 정교한 레벨 디자인이다. 플레이어가 이룩해낸 성취에 맞추어, 그에게 극복 가능한 어려운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레벨 디자인 철학은 다크 소울 1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RPG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다크 소울 1이 나왔던 2011년 당시, 대부분의 RPG 업계는 부드러운 조작을 중심으로 플레이어를 게임에 융화시키고자 했다. 자세한 설명, 실력에 맞게 설정 가능한 난이도 조절, 플레이어의 편의를 봐주는 다양한 게임 장치들…. 그러나 다크 소울은 전혀 달랐다. 당연하다는 듯 난이도 조절 기능은 없었으며, 게임을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고, 필드를 탐방하는 데 필요한 지도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괴롭히겠다는 목적으로 불합리한 어려움으로 똘똘 뭉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튜토리얼을 진행했을 때, 적들이 포진한 필드를 힘겹게 통과하고 겨우 최종 목적인 보스에게 도달했지만 결국 압도적인 무력감을 곱씹으며 패배했다.

그런데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게임의 환경에 점차 익숙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낯선 조작키에 익숙해지고, 공격과 회피의 타이밍을 익히면서 차츰 필드를 쉽게 통과했다. 보스에게 도달하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십여 번의 도전 끝에, 나는 마침내 보스를 쓰러뜨렸다. 보스가 쓰러지자 화면에는 큰 글씨로 HEIR OF FIRE DESTROYED라는 문구가 떴다. 그 순간 성취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심장이 뛰었다. 흥분 속에서 손을 여러 번 쥐락펴락했다.

알고 보니 내 자그마한 성공은 모두 게임사의 정교한 기획이었다. 게임사는 게임을 처음 접한 플레이어가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갈 수 있도록 적들의 수준을 조정한다. 초반의 튜토리얼에서 마주한 보스는 거대한 위압감을 주고,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주인공은 수차례의 죽음을 맞는다. 이는 제작사에서 설계한 난이도로, 플레이어가 난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이다. 인내를 갖고 튜토리얼 보스를 깬 플레이어는 강력한 성취감에 휩싸인다. 즉 게임에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게임에서의 경험이 현실의 감정에 큰 영향을 주면서 가상 세계의 캐릭터와 현실 세계의 플레이어 간에 융합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게임사는 계속해서 레벨을 조정해간다. 플레이어가 첫 번째의 승리에 안심하지 않고 내리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플레이어는 감정적 자극을 받으며 게임을 계속할 동기를 갖고,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게임에 대한 익숙함으로 이어진다.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로스릭의 높은 벽”이라는 새로운 필드를 돌면서였다. 튜토리얼 보스와 똑같은 패턴으로 나를 공격해오는 적이 일개 잡다한 적으로 등장했다. 그때 그 적을 물리치며 들었던 감상은 도대체 이 필드의 보스는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융화를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사실 게임의 초반에 긍정적인 경험을 갖게 되면 이어지는 흐름을 타고 게임에 이입하기는 쉽다. 재미가 있으니 계속 잡고 있다 보면 저절로 몰입하는 것이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정교한 레벨 디자인을 제공함으로써 게임의 유희적 특성을 잘 이끌어냈다. 이미 그것으로 좋은 게임의 역할은 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재미라는 요소 하나만이 다크 소울의 작품성의 시작이자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으로 게임의 작품성을 따진다면 국내 피시방의 게임 점유율을 조사해서 점유율이 높은 순으로 각 게임의 우열을 가려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언급하고 싶은 다른 요소가 더 있다. 스토리텔링과 이미지 디자인의 문제다.

프롬 소프트웨어 사의 스토리텔링은 꽤 독특한 편이다. 보통의 RPG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전지적인 시점을 제공하며 가상 세계 내의 모든 설정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주인공에게 대단한 역할을 할당하여 세계의 근본적인 비밀을 풀어내게 한다던가, 사건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과 만남이 있는 스토리를 구성한다던가 하는 기획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 게임의 설정을 활용한 차기작을 기획하지 않는 이상, 게임 본편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내지 못하더라도 다른 부가적인 매체를 활용해서까지 게임의 설정을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되는 특정 캐릭터에 대한 불우한 과거사, 어느 지역에 얽힌 이야기 등의 사소하지만 입체적인 설정은 가상 세계의 설정에 현실감을 더한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세계에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와 정반대의 행보를 취한다. 컨셉 디자인을 모은 아트북을 출판하기는 하나, 그곳에 공식적인 설정은 없다. 오로지 게임 내의 세계에서만 사건과 사건 간의 논리적 유기성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크 소울의 플레이어들은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 컷씬, 아이템에 얽힌 짤막한 설명,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인물 등의 단서를 조합해 게임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추리한다. 제작사가 공식적으로 제공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의 흐름을 설명하는 큰 줄기뿐이며, 그 외의 것들은 플레이어가 스스로 짜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로스릭의 높은 벽” 지역을 통과해 새로운 곳으로 가려 하는데, 갑자기 “차가운 골짜기의 볼드”라는 적이 나타나 주인공의 행로를 저지한다. 불을 계승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플레이어는 왜 적이 난데없이 등장해 탐색을 방해하는지 알지 못한다. 의아한 플레이어는 볼드를 쓰러뜨리고 얻게 된 아이템을 조사할 것이다. 법왕의 좌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템은 아리송한 이야기를 한다. “법왕 설리번이 기사들에게 수여한 마성의 반지. 그 검은 눈동자는 바라보는 이를 홀려 사투로 초대하며 이윽고 기사를 짐승과도 같은 광전사로 전락시킨다. 때문에 법왕은 출정에 이르기 직전에 이를 수여했다고 한다.” 다시 의문이 발생한다. 법왕이라는 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볼드를 파견했을까? 볼드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 차가운 골짜기는 법왕이 다스리던 곳의 지명일까? 이에 대한 세세한 답변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플레이어 홀로 탐색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와 같은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이 작품의 입체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우선, 주인공에 대한 설정을 탄탄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불의 계승에 이미 실패해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다. 흐르고 있던 시간과 단절된 사람이 세계의 역사에 정통하기는 힘들다. 더군다나 그것이 내밀한 욕망이 표출된 갈등과 사건이라면 말이다. 불을 계승해야 한다는 목표밖에 알지 못하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에 발걸음이 바쁜 주인공이 특정 지역의 세력 구도와 권력 관계에 대해서 정통할 수 있을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게임에서의 체험 요소를 강화했다. 레벨 디자인에 대해 논하던 부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가상 세계에 융화되는가이다. 특히나 다크 소울과 같은 RPG 게임은 그런 덕목이 중요하게 요구된다. 보통의 RPG 게임에서 제공하는 전지적 시점은 게임 세계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그 사실이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주인공의 시점을 직접적으로 강화해주지는 못한다. 그 세계에서 살아 숨 쉬는 한 명의 인물이 아니라, 전체적인 세계를 조망하는 절대자의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일개 인간이 세계를 관통하는 비밀을 알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로, 나는 이 가정에 회의적이다. 그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가상 세계의 한계가 드러나며 현실 세계에 대한 자각이 발생한다. 그렇게 가상 세계 밖의 현실 세계에서 게임을 진행하는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조작하던 가상 세계 속의 인물 사이에 괴리가 피어나게 된다.

프롬 소프트웨어 식의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가상 세계를 풍성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사실 다크 소울 3이 갖는 구성은 단순하다. 죽음에서 깨어나 불을 계승하기 위해 여정을 걷는 것이 이야기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주인공은 이 간결한 목적을 위해 탐색을 떠난다. 달려드는 적을 베고, 날아오는 함정을 피하고, 필드마다 흉포한 기색으로 주인공을 맞이하는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도 결국은 전부 다 불의 계승이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담백하고, 달리 표현하면 심심하다. 이를 직접적으로 전달했다면 플레이어는 스토리의 빈약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로드란을 발로 뛰며 맞추어가는 스토리는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한 줌도 되지 않으나, 불의 계승을 둘러싼 다양한 이들의 서사가 입체적으로 풍성하다고 느끼게 된다. 설령 탐색을 통해 확인한 이야기의 실체가 빈약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게임 속의 세계를 열심히 탐험했던 경험은 남는다.

 

디자인 또한 다크 소울 3의 섬세한 구성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기본적으로 다크 소울 3은 멸망하는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주인공의 행색, 주인공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탐색하는 필드, 주인공이 쓰러뜨려야 하는 적 등, 게임의 모든 콘텐츠는 “몰락하는 세계”라는 기본적인 명제를 충실하게 뒷받침한다. 설정과 잘 맞물리는 디자인은 유저를 게임 속의 세계에 쉽게 녹여 내린다. 별도의 부연 설명 없이 직관적인 설명을 통해 세계를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공개된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멋지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캐릭터를 그려낸 직원에게 설득력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훈계한 게임 디렉터의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중세 판타지를 표방하는 이야기답게, 주인공은 칼과 방패를 쓰는 기사다(게임 내에서는 주인공의 다양한 직업군을 선택할 수 있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탓에 게임의 트레일러와 포스터에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선정했다). 그러나 갑옷은 흠집이 가 있고, 갑옷 위에 덧댄 천은 낡고 해어진 지 오래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튜토리얼이 진행되는 필드인 “재의 묘소”는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지만 대체로 탁한 색조를 띤다. 높은 절벽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뿐만 아니라, 황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어, 스러지는 세계의 비극을 엿보게 해준다. 고딕 성당을 참조해서 만든 필드 “깊은 곳의 성당”에서는 뒤틀린 형태의 성직자 적들을 배치해, 한때 고아한 지위를 누리던 종교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퇴락했는지 보여준다. 작중에서 주인공이 쓰러뜨려야 하는 적이자 유력한 종교의 수장인 “엘드리치”는 고상한 황금관을 쓴 미형의 상체 아래에 부패한 고름과 구더기로 이루어진 하체를 갖고 있다. 몰락해가는 세계에서 갖는 권력자의 위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느낄 수 있는 기획이다.

여기서 프롬 소프트웨어의 디자인 철학을 한 가지 더 찾아낼 수 있다. 몰락하는 세계라는 기본적인 설정에 충실하면서도 미형적인 요소와의 융합을 꾀하는 것이다. 사실 게임을 문학적/철학적 맥락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게임은 본래 유희적인 성격이 강한 매체이며,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에서 흥취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쇠락하는 세계라는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흥미를 느낄 수 있지만, 그 침중한 분위기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이어진다면 감정적인 피로를 호소하기 쉽다. 게임 내의 건축물에 활용한 고딕 양식, 성당 필드에 배치된 사실적인 조각상 등은 플레이어의 미적인 감성을 충족시키면서 피로감을 완화할 수 있다. 또, 예술적으로 잘 정제된 이미지를 수용함으로써 한 편의 낭만 비극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체적인 완성도를 드높이는 것이다.

3

다크 소울에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이자, 동시에 플레이어의 융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 장치들을 이렇게 세 가지로 꼽아보았다. 정교한 레벨 구성, 독특한 스토리텔링, 기본 명제에 충실한 디자인까지. 사실 이것 말고도 열거하고 싶은 장점들이 많다. 아름다운 OST, 게임 내에 등장하는 인물을 자유롭게 살해할 수 있는 자유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요소가 아닌, 이야기의 설정에 맞물리는 주인공의 죽음과 부활, 왜곡 없이 맞아떨어지는 필드 내의 길 등 가상을 입체로 세우기 위한 세심한 디테일이 잔뜩 포진해 있다. 이 모든 요인들이 조화롭게 얽히며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비록 화면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생동하는 로드란이.

게임을 즐기는 동안 프롬 소프트웨어의 제작진들이 이 게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처음에 언급했던 중세 영어의 사용 또한 가상 세계에서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려 했던 시도의 일환이리라. 나는 다크 소울 3을 플레이하며 게임이라는 매체를 얄팍하고 조잡한 것으로 치부했던 그동안의 내 생각을 반성했다. 인간의 아이디어가 구성해 낸 가상 세계가 낯선 타인들을 그곳에 초대해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변모시키기까지 대대적인 토의와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그 빛나는 노력을 일탈자의 문화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폭력적인 사고다.

존 로널드 로얼 톨킨의 가운데땅 세계관이 문학의 형태로 출간되었을 때, 온갖 언론사들과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칭송했다. 일개 개인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어느 한 지역의 장대한 신화와 역사를 우뚝 세웠기 때문이다. 그 땅이 흘러온 시간에 공감하고, 땅의 주민들이 살아온 삶에 동감하던 사람들은 톨킨의 세계를 예술로써 연구하고 향유한다.

나는 다크 소울 또한 톨킨의 작품에 비견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다크 소울은 게임의 시스템이라는 무대를 토대로 복합적인 미적 감각을 체험하게 해주는 예술의 장(場)이다. 로스릭의 건국과 쇠락, 불을 계승하는 용맹한 전사들, 스러지는 세계의 흐름 가운데서 찾는 존재로써의 자신…, 그렇게 이야기와 신화는 로드란의 땅을 타고 흐른다. 2016년에 출시된 다크 소울 3은 올해로 벌써 3년이 되었지만, 게임 속에서 경이로운 경험을 맛본 사람들은 오늘도 로드란을 찾는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과연 게임은 일탈자들만의 문화인가? 다크 소울 3에 대해 분석한 이제는 그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할 수 있다. 게임은 인간의 창의성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혁신적인 예술 장르다. 그 빛나는 아이디어 속에서, 게임을 즐기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경험을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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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물 폐기자 – 현대인의 슬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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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하인리히 뵐의 광고물 폐기자를 읽고 쓴 감상&비평입니다.

 

1.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낯선 작품명에 생소함을 느꼈다보다 많은 정보를 찾고자 인터넷에 검색을 했지만 별달리 나오는 결과가 없었고당혹감만이 밀려왔다나는 문학 분석에 대한 전문적 배움을 수행하지 않은현재 고등학교 과정을 밟는 십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과연 내가 이 이야기를 읽어가며 논리적인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아니면 치명적인 우를 범할지 알 노릇이 없었다작품 옆에 자그마한 글씨로 표기된 여섯 줄의 평론만이 내 북극성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초 회독을 하는 내내나는 그 가이드라인마저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평론은 주인공 화자를 비판의 대상으로 본다그가 독일 사회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고도화된 자본주의 질서에 의해서 황폐한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그 내용에 내가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는 오히려 정반대의 견해로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화자가 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화자는 비록 진심이 결여되어 있지만 자신을 잘 가꾸고다른 사람의 눈에 번듯한 시민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이게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보일 수 있는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아니고선 무엇이란 말인가격정적으로 뒤틀린 악(보다는 차라리 위선이 더 낫지 않은 법이겠는가

직업에 대한 그의 진정성 또한 존경할 여지가 충분했다물론 그의 직업을 통해 수행하는광고물 폐기라는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니다학문을 논하거나 은행권에서 증권 시세를 파악하며 거래를 주도하는 일과 비교한다면 광고물 폐기는 삼류 노동에 불과하다고 평할 수 있다그러나 화자 자신은 그것에 만족하며자기 나름대로 일의 효율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고 거기서 뿌듯함을 느낀다나는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자신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윤리에서 거론했던 천직(Beruf)정신을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통해 볼 수 있었다화자가 하는 광고물 폐기는 아침 8시부터 8시 반오후시간 중 15분밖에 소요하지 않는 단순한 일이지만화자는 그 사소한 일을 위해서도 논문을 쓰고 연구를 수행하니이야말로 천직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겠나 하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를 둘러싼 사회(특히 회사)야 말로 비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사회는 화자가 열심히 연구한 자료를 근무태만의 산물이라 일축해버리며그를 정신이상자라 평하고 심지어는 반사회적 인물이라 평가하기에 이른다즉 사회는 광고물 폐기라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시선으로자신의 편견에 맞게 일을 행하지 않는 화자를 문책하는 셈이다그러니 황폐화된 것은 자본주의가 일으킨 경쟁적 계급 구분 체계 속에서일종의 낙오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리려 드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2.
이번 탐구에서 가장 큰 제약으로 작용한작품에 대한 해석과 연구의 결여는 나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읽도록 했고나는 다양한 방향에서의 접근을 시도했다그러던 과정에 갑자기 평론의 이야기가 스쳤다그러면서 과연 내가 내 시선을 고집해도 될지정녕 그것은 어떻게든 새로운 시선을 제기하고자 했던 내 오만에 불과한 게 아닐지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리하여 나는 다시 단편을 읽어 내렸다

그러면서 발견한 사실들은 나를 크나큰 충격에 빠뜨리게 했다바로 화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인권도덕존재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진지한 생각을 바탕으로 고차원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은 그의 일상 단 한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단지 시간단축을 위한 합리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이 그의 사고의 모든 것이었다나는 그러한 점에서 공포를 느꼈다

화자는 기계와도 같은 인생을 보낸다어떻게든 광고물 폐기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하는 그는 합리의 기계다물론 사람에게는 합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주인공의 문제는 오로지 합리를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그 합리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시간적 여유에도 불구하고주인공은 그 시간을 인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주인공은 다만 다른 사람들이 인간적이다고 여길 것들을 모방하며타인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만 생각하기에 급급하다재야에 은둔하는 학자처럼 보이기 위한 낡은 넥타이출근길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과 퇴근길 한산한 전철에서 보이는 모순적인 미소능숙한 표정관리…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인격적 수양이 아닌 외양을 위해 이루어진다그의 삶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기계다핏빛 윤활유가 사람인 척 가장하고 있지만그것은 기름에 불과할 뿐이다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드문드문 서술되는 그의 감정은 인간으로서의 것이라기보다각각의 상황에 일시적으로 반응하는작용반작용적인 기제와 흡사하다

뵐의 광고물 폐기자를 이렇게 분석하는 내내내 머릿속에는 대학에 진학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떠나가질 않았다사실 보통의 이상적인 의미에서 대학은 심도 깊은 학문 연구의 장이자 동시에 자기 수양의 곳이다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아니 세계의 수많은 대학들의 모습이 어떠한가당장 우리나라만을 봐도좋은 직장을 위해 대학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지처에 황폐한 의식의 소유자들이 널려 있다학위를 따고 취업을 하고그렇게 사회적 지위를 쌓아가지만 진정한 자신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비치는 모습에 급급할혹은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서 고뇌하지 않는 광고물 폐기자들이 이렇게 생산되고 만다

당장의 고등학생들이 하는 공부도 마찬가지다대학에 가지 않으면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지 않기에 학생들은 어떻게든 입학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공부한다그 과정에서 앎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그래서 대학의 본질적 의미는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어떻게 해서든 교양을 위장하려는 광고물 폐기자의 모습에 우리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물론 그들의 가능성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본주의적으로 모범적인” 상에서 우리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 착잡해지고 마는 것이다그렇게 우리는 철학과에 진학해도 경영학과를 복수 전공하며 어떻게든 둘을 엮어서 좋은 자리에 취업하려고 하며거드름과 허례허식의 인문학을 추종하며고된 직장 생활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더라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안하게 된다바로 광고물 폐기자처럼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슬픈 초상이다

붉은 커튼이 처진 안막 안쪽에 마련된 전시실 안에 그림이 걸려 있다합리의 지배에 학대당한 현대인의 슬픈 초상꼼꼼한 붓 터치에 의해 박제된 현대인의 일그러진 얼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화가는 하인리히 뵐우리는 이제 화가가 그린 그림의 대상이 우리임을 알게 되었다

3.
광고물 폐기자를 읽고 분석하고그에 따른 내 생각을 정리하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앞에서 밝히다시피처음에 이 이야기를 읽었을 당시의 나는 화자에게 공감했으며 또한 그를 긍정적으로 평했다나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탈(인간적인 완벽한 합리에 눈이 멀었던 셈이다아마 내 안에 깃든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논리가 나 또한 광고물 폐기자로 만들고 있었던 중이었기에 그랬을 거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입안이 절로 씁쓸해진다평소에 철학과 문학에 대한 필요를 깊이 통감하면서도 정작 내 일차적인 의식은 자본주의의 합리에 젖어서최대효율에 대한 강박에 급급했기 때문이다어떻게 보면 지배질서의 은밀한 제어가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우리 안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도 모른다.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알랭 드 보통은 한국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불행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의 말대로우리는 인지할 수 있다그리고 문제의 인식이란 곧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기도 하다아무리 자본주의가 사람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지언정 인간은 끊임없이 돋아나는 도덕의 가치를 알고 있고신과 같은 초월적 진리를 갈구할 수 있으며존재론적인 고뇌를 할 수 있다그리고 결정적으로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그렇게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기계적 생산 공장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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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부하느라 시 몇개를 검색창에서 뒤적이다 이런 사이트가 있다는 걸 발견했네요. 어렸을 때부터 글을 끼적이는 걸 좋아해서 쌓아둔 일기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타인의 피드백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틴은 정말 좋은 곳인 것 같아요. 현재 고3이라 미성년자까지 약 4개월 남았는데, 이제서야 글틴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참 통탄스럽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즐겁게 이용하려 합니다. 잘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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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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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읽고 상상해본 것을 소설로 써봤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또 그만큼 다양한 순례가 있지만, 모든 순례의 진정한 끝은 곧 도서관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모르는 시절부터 존재하는 도서관은 유한한 생물에게 으레 그렇듯 찬양의 대상이었고, 그렇게 순례의 종착지는 언제나 도서관이 되었다. 모든 종교는 도서관의 존재를 통해 제 신앙을 정당화하고자 했으며, 모든 정치는 도서관과의 연계점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려 애썼다.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로 동서고금의 나이, 인종, 성별을 불문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가 평생 동안 다 쓰지도 못할 펜과 종이를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 어떤 인간이 영원토록 존재할 건물을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도서관은 문명이 발생한 이래로 모든 정치적 권력이 첨예하게 엉킨 곳이었다. 그렇게 권력의 손아귀가 뭉치고 또 뭉치고, 얽히고설키어 결국 이제는 그 누구도 도서관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음심을 품고 군대를 끌고 와 도서관의 몇 층을 훼손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도서관은 그 하찮은 몸짓이 우습다는 양 인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느 곳을 더 넘어서도 뻗어있을 것이었다. 무한한 도서관 앞에서 파괴란 어찌 그리도 부질없는지. 그리하여 유한한 욕망을 품은 탐욕자들은 제 초라한 무기를 내려놓았다. 이후 도서관을 숭배하는 이들이 모여 “도서관 협회”를 만들었다. 명목은 유일무이한 도서관과 그 장서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였다. 갈등 상황을 끝낸 다양한 국가들이 국제기구 도서관 협회의 설립을 도왔다. 국제 사회의 강력한 비호 아래, 도서관 협회는 순례자들을 도왔다. 물론 수면 아래에 어떤 움직임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권력자들이라는 족속들이 언제나 자기가 다룰 수 있는 것 이상의 힘을 원하는 이상, 도서관의 지배를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도서관에 평화가 찾아온 건 사실이었으니, 사람들은 “명목상으로” 누구도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도서관을 자유로이 탐험했다.

 

도서관 협회가 만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에 있는 어떤 책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변증서"라는 이름의 그 책은 자신과 맞는 독자에게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실속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디 재미난 생각을 떠올릴 수 없어 돈벌이가 섭섭한 말재간꾼이 지어냈나보지. 뭐, 그토록 무한한 도서관인데 뭔들 없겠나? 그러나 인생이 필사적인 사람들, 그리고 도서관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소문은 설득력이 없는 미신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이윽고 자기만의 변증서를 찾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변증서를 찾은 누군가는 현자가 되었고, 어떤 이는 어느 국가에서 권력과 부를 보장받았다. 자신만의 변증서를 찾은 이들은 그 모든 영예를 누리며 순례의 종착지를 맞았다. 그런 사람들을 시기하며 성공한 사람의 변증서를 훔치거나 불사르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미 인생의 진리를 찾은 사람들에게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그러자 그동안 도서관의 존재를 막연하게 생각하던 사람들까지 도서관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오롯하게 자신만을 위해 쓰인 책이자 자신의 미래를 위할 수 있는 책. 사람들의 욕망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더 많은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변증서를 찾기 위해 짐을 꾸렸다. 그 탐욕의 방향이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간에 말이다.

 

그 또한 도서관을 향하는 순례자였다. 변증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발아했던 탐심은 이타적인 방향으로 피어난 것이었다. 그는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이전부터 그는 세상의 끝을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의 끝은 불지옥과 영원히 고통 받는 인간들의 모습을 설파하며 자신이 믿는 절대자의 권위를 어떻게든 추켜세우고자 하는 종교인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세계를 장악할 것이라는 계급주의자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것들을 경멸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인도적인 끝을 꿈꿨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 마침내 인간의 이성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이기고 효율성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그렸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세계가 합리 속에서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는 그러한 끝을 설명하는 책이 도서관에 있으리라 믿었다. 소문처럼 들려오던 그 변증서만 있다면 그의 인생은 마침내 엄숙하고도 이성적인 종지부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선택지 하나 정도는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원대한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도서관에 바치는 것은 영광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런 포부를 안고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명확한 순례를 향한 첫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으로 가는 건 삼류 모험서에 나오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여정이 아니었다. 역사상 많은 이들이 순례를 거친 만큼, 온갖 곳에서 도서관을 향한 길이 나 있었다. 그는 마침내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나아가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길이 도서관을 향해 죽 나있었다. 넓은 길 끝에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었다. 하늘로 쭉 뻗어 오른 원통형의 건물은 구름 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은 길 위에 서서 도서관으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대단한 높이에 비하면 매우 작은 입구였다. 과연 저 많은 사람들은 어떤 꿈을 안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걸까?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저기에 한두 명 쯤은 있지 않을까? 그는 가슴 속으로 몰려오는 흥분에 손을 쥐락펴락했다. 이윽고 그는 배낭을 고쳐 멘 후 사람들의 행렬에 섞였다.

 

도서관은 초행자에게 언제나 거대한 압도감을 선사한다. 모든 벽의 길이가 똑같은 정육각형 형태의 층과 같은 두께, 같은 재질, 같은 페이지를 가진 일정한 수의 책이 같은 숫자로 책장에 정갈하게 꽂힌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우주의 질서정연함에 탄복하곤 했다. 중앙에 난 공동(空洞)은 벽의 모양을 따라 정육각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 공동을 둘러싼 철제 난간마저 모두 한 치의 오차 없이 균일했다. 난간의 너머를 바라본 그는 그가 서 있는 층의 밑으로 아득하게 뻗어 나가는 무한한 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광경에 깊게 감명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감상은 곧 짧게 그치고 말았다. 그가 도서관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하게 된 곤경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그를 에워싼 험상궂은 무리는 그의 입에서 절로 나오던 감정을 뚝 그치게 만들었다. 안녕, 형씨?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그는 자기가 생각한 독자들의 모습이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달아야 했다. 순례를 시작하기 이전에 그는 변증서를 탐구하는 자들에 대한 작은 호의가 있었다. 그렇게 도서관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저마다의 욕망이 들끓는 도서관. 당연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좋지 않은 목적으로 도서관을 방문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 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작은 칼도 허리춤에 매고 왔다. 그러나 험상궂은 무뢰배들이 그의 목덜미 아래로 들이미는 쇠붙이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불한당의 목적은 순례의 초행인 이들에게는 언제나 풍족하지만 도서관의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잉크 병 몇 통이었다. 그들은 불쌍한 초행자의 가방을 헤집었다. 떨어져내리는 물건들. 아직 개봉을 하지도 않은 잉크병을 땄다. 병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검은색 잉크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월척이네! 그를 에워싼 불한당들이 낄낄거렸다. 그중 한사람은 아직 따끈따끈한 빵의 포장을 풀어 입에 넣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빵을 뜯어먹는 모습이 야만스러웠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값싼 잉크 몇 병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던 한 사람이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도서관을 계속해서 오르는 이들은 제 변증서를 찾기 바빠, 잉크가 언제나 모자르다고, 그러니 사람을 시켜 잉크를 구해 온다고. 보통 주문자는 입맛이 까다로워 제때에 잉크를 마련해주어야 해서 초행자들의 것을 갈취한다고 말을 마친 남자는 다시 웃었다. 이 불쌍한 얼간이야!

 

물론 도서관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불한당의 무례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이 도서관 협회의 눈 아래에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불운아였다. 그 인위적인 단체가 무한한 도서관을 어떻게 지배하겠는가? 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어도 한 명 쯤은 그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러나 저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기에 바빴다. 아. 그는 낙심했다. 사람들은 불한당과 그 사이에 흐르는 불안한 기류를 눈치 채고 신속하게 발을 물렸다. 도서관 협회의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 협회의 눈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누구도 그들을 강도들을 처벌할 힘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도들은 우격다짐으로 그를 난간으로 몰아넣었다. 죽음과도 같은 공동과 아직 살아있는 그의 생명 사이를 가르는 것은 저 유약한 난간 하나밖에 없었다. 난간 너머로 시커먼 공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한한 깊이를 가진 투명한 무덤이….

 

불한당들은 선심을 베풀어준다는 양 떠들었다. 적어도 왜 죽는지는 알고 죽어야 덜 억울하겠지? 걸걸한 욕설이 섞인 말소리가 그의 고막 주위를 배회했다. 이런 사업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협회는 몰라. 그 우둔한 새끼들이 어떻게 알겠어? 짐을 다 털린 놈들은 저 공동 밑으로 영원히 추락할 텐데! 협회 놈들이 하는 일이라곤 지들의 유치한 정의놀음에 북치고 장고치는 건데. 형씨, 당신 얘기야.

 

이 아름답고 조화롭고 선한 세계에서 정작 자신의 종말은 잉크였다. 필멸자의 종말이란. 비참함 속에서 무력감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 눈물은 제 마지막을 결정지은 것이 몇 통의 잉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비저 나오는 눈물일지도 몰랐다. 흐으, 울음소리가 비저 나왔다. 아, 아무한테도, 입 다물고 살게요, 아, 제발, 목숨만,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 광경을 보던 강도들은 얼굴 위에 비열한 웃음을 그려냈다.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보이는 잔인한 웃음이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합리한 폭력에 대한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저들은 강자이고 자신은 약자인데 별다른 수가 있나. 결국 그의 발끝은 무뢰배들의 자비 없는 손아귀 아래에 미끄러져 내렸다. 다음 순간 그의 발이 디디고 있는 곳은 텅 빈 허공이 되었다.

 

휘이잉! 추락하며 스치는 바람의 그의 귓가에 대고 사납게 울었다. 공황에 빠진 그는 팔다리를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그러나 어부가 땅 위에 던져놓은 물고기가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열심히 퍼덕인다고 해도 다시 물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처럼, 그가 아무리 버둥거리더라도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회할 수 없었다. 이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에서 그 자신은 얼마나 대단한 높이를 떨어져 내릴 것인가? 그렇게 무한한 세월을 가진 공기는 그의 무덤이 될 것이었다. 방울지는 눈물이 그의 머리칼 너머로 함께 떨어졌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는 절망했다.

 

처음 그가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을 난간 너머로 밀어버린 자비 없는 손들을 저주했다. 감시하는 권력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 취해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역겨운 치들은 지탄받아야 마땅했다. 개같은 새끼들! 불한당들의 잔인함을 규탄하던 악담은 더 거슬러 올라가 불한당들의 성장 배경에 참여했을 온 인물을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떨어져 내렸을까, 이윽고 치명적이도록 순진했던 자신의 사고방식 또한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깟 알량한 이상. 밥 먹여주지도 않고 목숨을 구해다주지도 않을 그 엿 같은 이상이 도대체 얼마나 잘났길래, 얼마나 대단했길래? 자신은 한 명의 얼간이에 불과했다. 현실을 모르고 개소리나 왕왕 짖던 애새끼.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는 수치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어디 닿을 데 없는 몸은 공기 속에서 배배 꼬였다.

 

인도적인 세계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라! 그러나 정작 그 질서를 찾기 위해 찾아온 도서관은 또다른 아비규환에 불과한 곳이었다. 무한하다는 것은 곧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 지나치게 순진했던 과거의 자신은 그토록 자명한 진리를 몰랐고, 결국 무지는 그의 파멸을 가져온 셈이었다. 그는 뾰족한 칼로 제 가슴 중앙을 가르고 싶은 충동에 몸서리쳤다. 그는 지독한 자기혐오 속에서 한참을 떨어져 내렸다.

 

도서관의 벽을 밝히는 전등의 빛이 휙휙 지나갔다. 반복되는 광경 속에서 이윽고 지루함이 슬슬 치밀어 올랐다. 뭘 먹지도 못한 배가 연신 꼬르륵 거렸다. 비참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부디 눈을 감은 후 잠에 빠져 있을 동안 자신의 미련한 목숨이 끝나길 소원하면서. 그러나 몸은 낯선 잠자리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 그는 제 숨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차라리 잠을 자면서 이성이 없는 그 순간 목숨이 달아나버렸다면!

 

어느 순간. 하지만 아르키메데스가 그 옛날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깨달음이 그에게 찾아온 것은 어느 순간이었다. 종래에 그는 깨달았다. 그 자신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영혼이었음을.

 

그것은 단순히 그가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영원의 영예를 입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무한의 세월에 제 존재를 걸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제 그의 목숨은 다할 것이었다. 그의 숨이 꺼지고 나면, 그의 몸은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부패한 살점은 점점 뼈에서 분리될 것이고, 허연 뼈는 공기와 마찰하면서 계속해서 부식할 것이다. 그렇게 70kg 남짓한 체중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분자로 분해될 것이다. 그러면 그 분자는 도서관의 공기와 하나 되어 끝없이 뻗어있는 공간을 돌아다닐 것이고, 종래에 그의 존재는 유구한 도서관의 일부가 되어 그 존재 또한 영원하게 될 것이었다! 무한과의 화합. 마침내 그가 꿈꾸던 것. 그는 도서관 이전의 자신이 꿈꾸던 것을 생각했다. 그는 왜 그런 생각을 했던지 생각했다. 그는 그 기저에 유한한 존재로써 갖는 두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초월할 것이다. 이성으로써 완전해지는 존재. 그런 존재들이 가득한 세계. 아, 그는 무한으로써 완전해질 것이다.

 

그는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 어떤 권력자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영원을 한 줌이나마 소유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환희가 그의 마음을 잠식했다. 과연 그들은 알까? 그들의 비이성적인 폭력이 어느 학자에게 완전한 깨달음을 주었다는, 이 기쁜 소식을 알 수 있을까? 더이상 그는 자신을 난간 너머로 떠밀었던 잔인한 손을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불한당들의 발에 친히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 자체가 바로 그의 변증서였다. 아!

 

마침내 모든 기력을 잃은 그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고, 한 줌의 마지막 숨결은 공기의 일부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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