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우주 시체詩體
캐롤 부르는 날

시계의 끝이 이 밤의 결말처럼 보이질 않는다 지금이 몇시인지 며칠인지 당최 알 방도가 없다 몇년도인지 후회와 두려움과 괴로움을 동시다발적으로 연주하는 나는 그 무엇도 지휘하지 않고 있으니 춥다 차갑다 어둡고 깊은 이 곳은 내 방의 가장 깊은 심해 수면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숨을 참고는 울컥거리며 터져나오는 침액을 틀어막는다 초점은 풀려 나는 내 시선 끝의 가스등조차 바라볼 수 없다 어째서 애매한 이기심은 슬픔이 될까 나는 죄와 상처를 전부 끌어안은 살인자가 되어간다 덕분에 죽은 공기를 가슴에 꿉꿉히 욱여넣고 나는 조금 더 내가 되곤 한다 매일 눈물을 흘리는 이에게 바닥은 달력이다 그러니 다짐한다 외로운[…]

캐롤 부르는 날
/ 2021-10-14
다중우주 시체詩體
악몽/365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상처를 긁어 머리맡에 고스란히 깔아놓고 잠에 들 때면 오늘 죽은 싱싱한 시체는 신발끈을 붙잡고 도망을 간 우울과 목마름을 쫓아 벼랑 끝으로 떨어진다 무릇 제 꿈에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는 법이므로 그리고 숨을 죽인 나를 향해 늪이 되버린 눅진한 하늘은 벼락을 끌끌 치고 그렇게 무기력해진 위로 뒤에 피로 가득 찬 나를 숨기면서 멎어가는 목울대를 어루만지며 바닥에 쌓인 다른 시체들의 이름을 밝힐 붉은 폭죽이 되어보았다

악몽/365
/ 2021-10-14
다중우주 시체詩體
이해를 바란다

오늘은 말을 아끼지 말자 지금까지 시간을 많이 벌었으니까 사치를 살짝 부려도 괜찮으므로   조금은 나를 알아줬음 한다 이름까진 모르는 불치병이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므로   어쩌면 살거죽 아래의 것들을 보여야만 심장으로 가는 피가 있음을 아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로의 낮이 죽을 때면 각자 상처들을 벌려와   한없이 썩어버린 피를 쏟아내보자 잠시 숨이 멎을 때까지

이해를 바란다
/ 2021-10-13
다중우주 시체詩體
가을바람

사랑을 못 먹고 짙어진 심장병 원인은 추운 가을바람 날 이해 못하는 의사 선생님도 말하길 후유증은 늘 괴롭다더라 그런 식으로 가을의 새빨간 계절감에 병실 속 소년들은 피를 토한다 나뭇잎 하나 둘 쓰라리는 딸국질과 함께 붉은 낙엽이 쌓이고 바닥이나 나무나 맥박은 동일 고로 단풍 져버린 바닥은 누군가의 텅 빈 심장이라 우리는 그걸 외로움이라고 불렀다

가을바람
/ 2021-10-13
다중우주 시체詩體
길을 걷다보면

지금의 날 만든 것들이 나의 옷 나의 태양 나의 시간인 이 길을 걷다보면 문득 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길가의 꽃이 되기를 바라고는 한다 지친 신발을 질질 끌고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뒤를 돌아본 순간들이, 나의 이름으로 피어난다 그 후 길을 걷다가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또 다시 지겹게 뒤를 돌아보며 가끔은 멈춰 서고 무시하고 또 가끔은 간직하길 반복 그러다가 잊은 것들은 잊은 그대로 지나간 것들을 가만히 두고 새로운 바람이 날아와 붙으며 날 잊지 않아줄 누군가의 무언가로 우리 모두는 완성되간다

길을 걷다보면
/ 2021-10-13
다중우주 시체詩體

그저 1초라도 더 낭비하여 제 위로를 챙기는 도망자들의 감정을 사회 혹은 공장의 완벽히 부품으로 기능하는 그 같은 기계는 느낄 수도 없고 느껴서도 안될 터인데 전깃줄이 엉켜 고장난 듯 알콜 냄새 가득한 기름에 취해 길거리를 비틀 비틀 그러다가 관절을 꺾고 멈춘 뒤 고장난 건 세상이라는 결론 이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 둘 셋 끽 작동을 멈춘다

/ 2021-10-10
다중우주 시체詩體
가을을 따라

가을의 중력은 어느 계절보다도 무거워 나뭇잎들은 그 무게를 못 견디고 맥박과 같이 바싹 마르듯이 떨어진다   봄에 누가 누굴 사랑했든 여름에 누가 누구에게 죽었든 그게 전부 무슨 소용이랴   나는 또 다시 느려진 시간과 낙엽들에게 떠밀리듯 심장 박동을 바치며 그 궤적에 따라 연필을 움직이는 편이다   종이 위 묻은 미련을 연필촉으로 눌러 지우면서 말이다

가을을 따라
/ 2021-10-10
다중우주 시체詩體
노인

꼭 나이를 많이 먹어야지만 늙은 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 희끗한 머리카락을 과거에 엮어놓고 살아갈 뿐이다 또 그런 사람들은 반복되는 순간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저 익숙한 만남과 이별과 눈물들에 대해 기시감마저 무뎌진 채로 무덤덤히 침을 묻힐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씩 외로워질 때면 시계 태엽을 당기듯이 하고는 한다 저마다의 후회와 미련을 되새기고 이미 말라버린 손톱 끝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을 긁으며 결국 남는 건 시간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이름 없는 부스럼들을 꿈 삼아 굽은 등 밑에 깔아뉘인 뒤 깎이고 마모되고 닳아빠진 것들을 끌어안은 채 언제 죽을지 모를 심장을 부여잡고 그런 낡고[…]

노인
/ 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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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도시는 바다가 된다 [1]

비가 내리는 날 남들처럼 우산을 쓴다 그치만 난 이미 알고 있다 물속에서 우산을 쓴다고 정수리를 가린다고 젖지 않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쪽으로 젖어드는 것들을 경계해야 하는 물고기들 비가 내리는 날 이 도시는 나의 파스텔 톤 바다이다 지금은 날 억지로 살리는 시간 저마다의 심장을 위해 긁어 벗겨낸 비늘을 주워모아 죽고 싶지 않다고 헤엄친들 우리는 갈 곳이 당최 어딘지도 모르는 길 잃은 여행자의 신분 비가 내리는 날 언제나 그렇듯 익사라는 이름으로 또 어느 때보다 짜디 짠 습기에 묻어가 목 너머로 울컥할 것 같은 소금기를 꾹 참고 삼킨 뒤 숨을 하루[…]

비 내리는 날 도시는 바다가 된다
/ 2021-10-10
다중우주 시체詩體
시계 [1]

반복적으로 어그러지는 숫자를 뒤로하고 난 늘상 붕 떠다니는 결말에 사로잡혀 시간을 잊은 채 살아가기로 한다   무릇 나처럼 시계를 쳐다보기만 하는 한량들에게 시간따윌 셀 이유는 없으므로   그리고 이런 게으름은 뾰족한 시곗바늘이 되고 초침의 끝은 피리 부는 자국이 되어 난 그 궤적을 따라 넋을 잃고 걸어간다   시계에 시선을 사로잡히는 것이 꼭 위태로운 강박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시곗바늘은 그럼 망나니의 칼이고 난 그 종착점에 내 목을 두었다   시계도 어쩌면 내 길잡이로 기능하니 째깍임을 제 비명 삼고 고칠 수 없이 망가질까 싶다   오늘도 그런 것들을 모른 척 하고 시계에게[…]

시계
/ 2021-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