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지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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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학교 지하에는…
임연수 양식장이 있대.
정인은 컨테이너 박스에 몸을 기대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도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임연수 조림, 임연수 구이, 카레 임연수까지. 한 달에 네 번,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점심급식에 나오던 임연수 요리가 급기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나오기 시작하자 모두들 분명 학교 지하에 임연수 양식장이 있는 건 아니냐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시작한 말이었으나 학생 회장 선거를 앞두고 회장 후보들이 하나같이 공약으로 임연수를 없애겠다는 말을 꺼내면서부터는 서서히 그 터무니없는 말을 믿는 아이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학교 뒤편의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구가 붙어있는 철문 뒤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을 것이며, 이따금 그 문에 귀를 대보면 물소리가 들린다는 증언도 사실인 것 마냥 학교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물론 학교 지하에 양식장이 있든, 없든,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설령 그 양식장이 임연수가 아닌 고등어의 것이라해도 관심없었다.
생선이라면 질색하는 나는 그 어떤 생선이 나와도 통째로 잔반통에 넣어버리는 타입이었다. 가끔 돈까스처럼 생겨서 사람을 기대감에 부풀게 만드는 생선까스만 아니라면 상관없다. 차라리 누가봐도 임연수인 편이 더 솔직하고 좋았다.
"우리 한 번 확인해보자."
정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나름 진지하게 꺼낸 듯한 그 말에 옆에 있던 성원이 피식 웃어보였다.
넌 그런 말을 믿냐.
성원의 타박에 정인은 고개를 저으며 제 주장을 이어나갔다. 충분히 신빙성 있는 소리라며 거듭 우리를 설득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성원의 생각에 가까웠다.
이 좁은 학교에 무슨 양식장이 있다고. 성가시다는 듯이 자리를 뜨려는 우리를 정인이 붙잡았다. 정인은 철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란색 바탕에 검게 쓰인 글씨, '관계자외 출입금지'가 우리 쪽을 조롱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긴 하잖아."
"그냥 기계들 들어있겠지. 그게 아니면 창고로 쓰이던가."
"나, 예전에 경비 아저씨가 저기 들어가는 거 봤어. 창고는 아니었다고. 정말 애들 말대로 계단이 있었다니까."
정인의 말에 교실로 돌아가려던 성원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인은 이때다 싶었는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말했다. 정말 계단이 있었다고.
계단이 있다해서 임연수 양식장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원래 들어가지 말라는 곳이 가장 들어가고 싶은 법이다. 나는 굳게 닫힌 철문을 노려보았다.
이 학교에 온 지도 3년. 학교에 있을 법한 왠만한 비밀장소들은 다 섭렵해온 우리였다. 주로 정인의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덕에 많은 아지트들을 얻어낸 것도 사실이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우리가 점심시간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컨테이너 박스의 뒤편이었다.
건물 덕에 삼면이 막혀있고, 좁은 틈만이 유일한 출구라 볼 수 있는 곳. 분리수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와는 달리 바깥이니 갑갑하지도 않았다. 다만 앞을 가리고 있는 컨테이너만 치우면 밖이랑 뚫려있는 것과 매한가지니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새로운 아지트가 될 수도 있잖아. 들어가보자."
그런 면에서 정인은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흔들어 놓고 있는 셈이었다. 아까 전만해도 정인을 비웃던 성원은 어느새 정인의 화려한 말솜씨에 현혹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정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들어갈 건데?"
대책이 없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정인은 기다렸다는 듯 술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경비원 아저씨한테 열쇠가 있는 걸 봤고, 그걸 어디에 걸어놓았는지까지 몰래 보고 왔으니 그것만 잘 빼오면 된다는 소리였다.
말이 쉽지, 나는 나지막이 중얼댔다.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이긴 했으나 걸리면 끝장이다. 호기심에 그랬다고 하더라도 반성문을 쓸 게 뻔했다. 물론 그 반성문이 진심을 0% 담은 의미없는 문장들의 나열이라 할 지라도 그 문장들을 지어내는 것만큼이나 귀찮은 일이 또 없었다.
"경비 아저씨가 점심 드실 때 가끔 문 열어놓고 나가신다니까. 그 때 슬쩍, 어때?"
"언제 그런 거까지 알아봤냐? 니 그러다 커서 소매치기 되는 거 아냐?"
성원이 감탄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정인은 뿌듯한 듯 어깨를 쭉 핀다. 말의 내용으로 봐선 전혀 좋은 말이 아닌데 대체 왜 좋아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눈길로 정인을 바라보았다.
정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눈빛의 의도를 알아챈 모양인지 화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넌 정말 안 갈거냐. 정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러다 삐지면 족히 일주일은 간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래, 가자. 나도 궁금하긴 하다. 저기 뭐가 있는지."
내 말에 정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하여간 단세포다.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정인의 뒤를 따라 교실로 향했다.
잔뜩 신이 난 모양인지 정인의 발소리가 스타카토처럼 끊어졌다. 나는 그 모습이 어이없어 웃음을 흘렸다. 발을 질질 끌며 도착한 교실에는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우리반 여자애들 셋만이 남아있었다. 정인은 자신의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짝인 성원은 책상 서랍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유렵의 도시가 그려진 몽환적인 배경의 노트였다. 성원은 노트 한 장을 찢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경비 아저씨가 정확히 몇 시쯤에 점심을 드시는지 알아?"
" 12시에서 12시 반. 조금 일찍 드셔."
성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볼펜으로 종이 위에 숫자를 휘갈겨썼다. 성원이는 전혀 의미없어 보이는 메모를 자주 하곤 했다. 그 열정을 수업시간에 썼더라면 성적이 올랐을텐데. 나는 성원이 단 한 번도 필기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들의 점심시간이 12시 반부터니 12시에서 12시 반이면 4교시를 할 시간이었다. 설령 그 시간에 경비 아저씨가 자리를 비운다 하더라도 열쇠를 구할 길이 없었다. 성원은 잠시 턱을 괴고 있더니 내 고민을 읽은 듯이 말을 내뱉었다.
"점심 시간 말고 자리 비우시는 시간 없어?"
"우리 하교할 때. 저녁 드시러 잠시 자리 비우시던데. 확실하진 않지만."
지난 번에 집 가다가 비어있는 걸 봤다며 정인은 덧붙이며 말끝을 흐렸다. 확신과는 거리만 먼 태도였으나 밑져야 본전이라며 정인은 상기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장난기가 흐르는 정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어이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인은 그런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솔직히 너도 지금 엄청 신나지?"
"그래, 그러니까 들키지나 말자."
"걱정마. 이 몸이 좀 날렵하잖냐."
날다람쥐처럼 날렵하기야 하지. 매번 계주 때마다 남들보다 긴 다리로 운동장을 내달리는 정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그의 말에 수긍했다. 다만, 내가 그 날렵함을 따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인의 말대로라면 경비 아저씨가 그 철문에 자주 들어가는 편은 아닌 것 같으니 열쇠를 몰래 챙겨나와서 연휴가 끝나고 돌려주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걸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성원은 제 자신만 알아볼 법한 글씨체로 열심히 우리의 계획을 받아적었다. 한참을 메모에 집중하고 있다가 툭 소리나게 펜을 내려놓은 성원은 내 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준비물은 뭐가 필요할까?"
"그거 잠깐 들어가는데 준비물은 무슨. 캠핑 가냐? 이것저것 챙기게."
지극히 현실적인 내 답변에 성원은 축 늘어진 시금치처럼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후레쉬나 하나 챙겨갈게.
그런 성원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인이 한 마디 던졌다.
학교 지하에 들어가는 건 내일로 정했다. 내일 모레부터는 주말이기도 했고, 그 다음주는 가을방학이라며 내리 쉬었다.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어하는 정인이 그 긴 연휴를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할 리 없었다.
정인은 짧은 회의를 마치고 점심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호기심이 과해도 문제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삐걱거리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면서.
[2]
냉정하게 말하면 뭐가 있을 확률보다 없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럼에도 어쩐지 설레는 마음에 남은 시간은 자연스레 흘러갔다.
"만약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할거야?"
"들어가보고 괜찮으면 아지트로 써야지. 요즘은 열쇠도 복제 가능하다더라."
능청스런 정인의 말에 성원은 그건 범죄이지 않냐고 타박을 던졌다.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네.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댔다.
학교에 남은 아이들이 하나 둘 하교하고 주변이 조금 잠잠해지자 우리는 1층의 경비실로 향했다. 창문의 열린 틈으로 바람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열심히 돌아보았다.
경비실의 문은 살짝 열려있었다. 그 틈으로 교통상황을 알려주고 있는 라디오 소리가 새어나왔다. 정인은 문 앞으로 다가가 경비실 안을 살폈다.
그 순간,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경비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인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종종걸음으로 보건실 앞으로 뛰어갔다. 한 발 뒤로 물러서있던 우리도 화장실로 뒤늦게 몸을 피했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는 소리만 들렸을 뿐 아저씨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빼곰히 고개를 내민 우리는 정인이의 손짓에 조심스레 나와 보건실 문 앞으로 향했다.
 "도대체 언제 나가시는 거야?"
성급한 성원의 말에 정인은 우선 기다려보자며 나직히 말했다. 그렇게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으로 보건실 앞을 얼짱거린지 5분이 지나서, 전화 소리가 멎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경비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경비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으며 아저씨는 휴대전화를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은채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괜히 보건실 앞에 걸린 건강 게시판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성원은 잠시 우리에게 머무른 아저씨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의미없는 소리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왜 담배를 피면 안되나요? 아…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처음 알았네."
 "시끄러. 더 티나니까 좀 조용히해. 넌 다 알면서도 피잖아."
성원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이 곧바로 목소리를 낮춘 정인의 타박이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반은 갈 것을.
다행히도 아저씨는 별로 개의치 않았던 모양인지 우리를 등지고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살며시 열려있는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인은 반짝이는 눈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성원은 걸리면 어떡하냐고 중얼대며 문앞에서 주변을 계속 두리번대고 있었다. 나는 짜증을 내며 녀석을 경비실 안으로 밀어버렸다.
경비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과 그 앞을 가리고있는 아이보리색 칸막이였다. 그 옆으로는 아저씨의 옷가지들이 걸려있는 옷걸이가 있었는데, 대충 걸어놓은 티가 나는, 후줄근한 모양새였다.
정인은 말없이 아이보리색 칸막이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튀어나온 세 개의 못에 조그마한 열쇠들이 걸려있었다. 나는 그 중에 '지하'라는 라벨이 붙어있는 열쇠를 조심스레 빼내었다.
이거 맞지?
짧은 내 물음에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가운 열쇠를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순간, 밖을 둘러다보고 있던 성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누구 오는 거 같아."
 "뭐? 아저씨 방금 나가셨잖아."
성원의 말대로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파리하게 질린 성원은 황급히 소리 죽여 경비실의 문을 닫았다. 급한 대로 책상 밑에 숨은 나와 정인은 숨 죽인채 성원의 눈치를 살폈다. 툭 건드리면 부서질 듯이 위태로운 정적 속에 나는 문 너머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 아프지도 않은데 보건실에 찾아오는 애들이 그렇게 많아요."
 "수업 안 들으려고 그러지."
정확히 아시네.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말에 조용히 중얼대는 정인을 노려보며 눈치를 주었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여도 들리면 큰일이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으로 제 입을 막아보였다.
보건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멀리서 쾅,하고 보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책상 아래서 굽혔던 몸을 펴고 일어났다. 밖을 힐끔 바라본 성원이 나와도 될 것 같다며 손짓했다. 우리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경비실을 나왔다. 처음 우리가 들어왔을 때의 틈만큼 문을 살짝 열어두고서.
학생들이 하교한 뒤의 학교는 적막했다. 우리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뒤편의 철문으로 향했다. 성원은 큰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누가 오고 있지는 않은지 열심히 살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외에는 정적이 흐르자 성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엔 군졸들이 늘어서있는 성벽처럼 견고해보이던 철문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주섬주섬 꺼냈다.
열쇠구멍에 맞춰 열쇠를 넣자, 삐걱거리며 열쇠가 돌아갔다. 정인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쇠가 내는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문이 열렸다.
캄캄한 어둠이 저 아래서부터 우리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정인의 말대로 정말 계단이 있었다. 그 끝에는 또 하나의 작은 문이 캄캄한 어둠 속에 숨어있었다. 이 정도라면 양식장이 없다하더라도 꽤 넓은 공간임은 분명했다.
칠흑같은 어둠이 금방이라도 우리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으스스했는지 정인은 준비해두었던 손전등을 꺼냈다.
"야, 무슨 동굴 탐험 같아."
끼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자 어둠은 한층 깊어졌다. 손전등이 내는 미약한 빛만이 계단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성원은 살짝 무서운 듯 내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앞서 나간 정인이 두 번째 문을 열자 좁은 방 하나가 나왔다. 손전등으로 벽을 훑었지만 또다른 문은 없었다. 아마도 마지막 방인 듯했다.
곰팡이가 서린 벽에서는 지하 주차장의 냄새가 났다. 정인은 시원하다며 좋아했지만 성원은 빨리 나가고 싶은지 영 떨떠름한 얼굴로 서있었다.
"생각보다 별로야. 너무 칙칙하지 않냐. 나 어두운 거 싫어하는데."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난."
성원의 말에 대꾸하며 나는 좁은 방 안을 살폈다. 기계도 딱히 없었고, 창고로 쓰이는 건도 아닌 모양인지 잡동사니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구석에 놓인 파란 물탱크 뿐이었다.
두 팔로 안아도 채 안기지 않는 꽤 커다란 물탱크에 괜히 호기심이 생겼는지 정인이 먼저 다가갔다.
물탱크 근처에서는 물 비린내가 났다. 그 냄새에는 수산시장에서나 맡을 법한 바다의 짠 기운도 섞여있었다.
"물탱크에서 원래 이런 냄새가 나나?"
뒤에 서있던 성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내뱉었다.
성원의 말을 듣고선 정인이 물탱크 뚜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쪽으로 향한 눈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열어 보자.
나는 정인이 잡은 뚜껑의 반대쪽을 잡았다. 혼자서 열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큰 뚜껑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동시에 힘을 주어 가볍게 뚜껑을 옆으로 들었다.
그 순간,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미끌거리는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그것이 내 발등 위로 툭 떨어지고나서야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물러났다. 고통스러운듯 힘차게 몸부림치는 새카만 물체를 보고 정인은 믿을 수 없다는듯 나지막이 내뱉었다.
임연수.
저거 다 임연수야.
정인은 손전등으로 물탱크 안을 비췄다. 어둠 아래서 몸을 감추고 있던 임연수들이 빛에 놀란 모양인지 좁은 물탱크 안을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누런 빛깔에 난 검은색 줄무늬가 빠르게 회전하며 위협적인 몸짓을 보여주고 있었다. 급식에 사용된 뒤 남은 임연수 같다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저렇게 좁은 데선 오래 못 살텐데."
정인은 안타까운 얼굴로 삶의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임연수들의 가련한 몸부림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성원을 돌아보았다. 성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미끌거리는 생명체들이 저리도 좁은 공간에 가득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에 질겁한 표정이었다.
바닥에는 아까 밖으로 뛰쳐나온 임연수 한 마리가 힘겨운 발악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끄러운 감촉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서서히 힘이 없어지는 몸짓이 안쓰러워 나는 손을 뻗었다.
으… 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그것을 다시 물탱크 안에 돌려보냈다. 그것은 다시 힘찬 물질을 시작하며 다른 임연수들 사이로 섞여들어갔다.
그 때, 바로 뒤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성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정인아, 빨리 나가자."
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뚜껑의 한 쪽을 들려올렸다. 오랫동안 있기에는 코를 찌르는 물비린내가 영 별로였고, 임연수 양식장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두고두고 떠들어댈 모험담도 생긴 셈이었으니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정인은 성원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너 핸드폰 있냐? 이런건 인증샷을 남겨야 애들이 믿지."
"난 투지라서 집에 두고 다니잖아."
"아, 맞다. 유민준, 너가 좀 찍어봐. 넌 폰 있을 거 아냐."
시험기간이라 폰을 뺏겼다던 정인이었다. 나는 흔쾌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건넸다. 내가 손전등으로 물탱크를 비추는 사이, 정인은 브이까지 해가며 임연수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카메라 소리가 적막한 지하를 타고 울려퍼졌다.
사진까지 찍고나자 적성이 풀렸는지 정인은 나가자며 내 쪽을 보곤 손짓했다. 성원은 정인의 말에 안색이 밝아지며 손전등을 낚아채곤 문 쪽으로 냅다 달렸다. 간신히 그 뒤를 따라잡은 나는 문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던졌다.
"야, 그렇게 무서웠냐?"
"무서운 게 아니라 징그러운 거야. 난 임연수가 그렇게 징그러운지 몰랐어."
"생선이 징그럽기는 무슨."
하여간, 핑계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댄 내 말에 성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이 뻑뻑한 모양인지 잘 열리지 않는지 몇 번 문고리를 돌리던 성원의 얼굴에는 잠시 뒤 당혹한 빛이 가득 찼다.
"야, 이거 안 열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안에서 안 열리는 문이었으면 경비 아저씨는 어떻게 나왔는데."
다급한 성원의 말에 나는 인상을 쓰며 내뱉었다.
하지만 성원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미동 없는 문에 나 역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뒤늦게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정인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갑자기 파리한 안색이 되었다. 뒤이어 목 메는 목소리로 정인이 내뱉은 말은 나조차도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담고 있었다.
"경비 아저씨는… 문을 열어두고 들어가셨는데."
"야, 미친 놈아.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문이 고장났을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풀이 죽은 목소리로 꺼내는 정인의 말에 성원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릴 틈을 내주지 않았다. 성원은 화를 내며 온몸을 문에 내던졌다. 그럼에도 문고리는 미세한 진동만 보일 뿐이었다. 성원은 왼쪽 어깨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며 주저앉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노려보던 어둠은 거대한 입을 벌려 우리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앞에 기대어 앉으며 등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 속에서 차가운 현실을 인지했다.
우리는 완전히 갇혔다.
[3]
차갑고 눅눅한 지하실에서 정인이 가장 먼저 꺼낸 대책은 외부와의 연락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락처에서 단축번호 1번을 누른 나는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곧이어 돌아온 것은 이어지기도 전에 뚝 끊어져버리는 전화 신호음뿐이었다.
정인은 내 휴대전화의 화면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왜 엄마가 안 받으셔? 그럼 딴 데 걸어봐."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제야 나는 잠시 망각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굳게 닫힌 철문 가까이로 가 다른 곳에 전화를 연결해봐도 여전히 같은 상황만 반복될 뿐, 진전이 없었다. 나는 차마 이 절망적인 현실을 솔직하게 말해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힘없이 철문에 등을 기대자 정인은 답답했는지 내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야, 뭐가 문젠데. 왜 이거 전화가 안돼."
"내 폰… 원래 그랬잖아."
지하나, 엘레베이터나, 건물 안에만 들어가면 먹통되는거.
힘없는 목소리로 나는 차디찬 현실을 내뱉었다. 이따끔 전화가 안 터진다고 늘상 투덜거리는 내 말을 들어왔으니 정인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보내며 정인은 되물었다.
"문자도 안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터도 안되는데 문자는 무슨. 나는 자조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정인은 인상을 쓰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딴 건 대체 왜 들고 다니냐? 전화도 안돼, 문자도 안돼, 무슨 공기계야?"
반박할 말이 없어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잠자코 쭈그려앉아있던 성원은 정인의 말투가 거슬렸는지 그를 노려보았다.
"애당초 니가 여기 들어오자고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었잖아. 짜증은 왜 니가 내는 건데."
"야, 좋다면서 따라올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 탓이야?"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성원은 목소리를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앞을 막아섰다.
여기서 싸웠다가는 정말 죽도 밥도 안된다.
나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과연 있기나 할 지 의문이었지만.
성원은 내 중재에 정인을 노려보기만 할 뿐 치켜올리고 있던 주먹을 내렸다. 정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 한 마디 없이 성벽처럼 견고해보이는 철문을 열기 위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각종 방법들을 시도했다. 무작정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보고, 온몸을 던져 철문에 부딪혀도 봤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질 때까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던 우리가 얻어낸 건 겨우 처참한 결과였다. 우리의 운명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진 망가진 문고리를 노려보며 나는 나지막이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이따금 남아 있는 힘으로 문을 흔들어보는 나와 정인과는 달리 성원은 이미 기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나는 시계로의 용도 외에는 쓸 일 없는 휴대전화를 꺼내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3일이 지났다. 체감 상으로는 일주일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손끝까지 기운이 없을 정도로 허기졌고, 목이 탔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3일이 지났다는 건, 적어도 일주일이 넘는 기간을 여기서 더 갇혀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왜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을까. 정인은 어제부터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그 해답이야 알고 있었다. 하교 후에 느닷없이 사라진 아이들이 학교 지하실에 갇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테니, 쓸데없는 곳들만 열심히 뒤지고 있을 테지.
나는 자조섞인 한탄을 내뱉으며 옆으로 누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아침을 거른 적 없던 내가 무한정으로 이어질 공복을 견뎌낼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밥 한 끼보다도 절실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타들어 갈 것 같은 목을 어루만지며 마른 침을 삼켰다. 물이 이토록 절실한 건 처음이다. 나는 머리를 감싸쥔 채 주저앉았다.
그 순간, 바로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성원이었다. 그나마 저 멀리에서 닿을 것만 같던 희망이라는 광원이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자 성원은 가장 먼저 무너졌다. 어제부터 내리 저렇게 울고 있었다. 정인이 다가가 조금 조용히하라며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어도 오히려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성원에 정인도 별 수 없었다.
정인 스스로도 벌어진 이 상황에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는지 말없이 앉아있는 우리의 눈치를 보곤 했다. 괜히 문을 발로 차며 짜증을 내다 성원에게 한 대 맞은 뒤로는 더 그랬다.
 "어떡할거야. 방학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간 우리 진짜 죽어."
나는 나지막이 현실을 읊조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정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늘 생기가 넘치던 눈에는 이제 공포만이 서려있었다.
방학이라해봐야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처럼 긴 것도 아니기에 긴 연휴의 일종일 뿐이었으나 열흘이 넘는 시간이다. 물 한 모금도 구할 수 없다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내 말에 정인은 눈을 깜빡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목이 메인 듯 살짝 걸리는 목소리로 정인은 대책을 내놓았다.
 "물은 있잖아. 물탱크에…"
 "야, 그건 바닷물이잖아. 더 빨리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바닷물을 먹었다간 더 갈증이 날 게 분명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 재난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강구해냈던 방법 하나가 떠올랐으나 차마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가방에는 빈 물병만이 들어있었다. 나는 체육 시간에 소중한 물을 전부 털어넣어버렸던 3일 전의 내 자신을 저주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무력한 상태로 앉아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던 성원은 이따금씩 울먹이며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때, 후두둑하는 소리가 철문을 타고 고요한 지하실에 울려퍼졌다. 미세한 그 소리는 여러 번 반복되며 점점 거세어졌고, 나는 뭔가가 홀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계속 주저앉아 있던 정인도 내 인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뒤이어 우리의 얼굴에는 환희가 차올랐다.
비다…
정인은 생기를 되찾은 눈으로 철문의 틈으로 가늘게 들이치는 빗줄기를 올려다보며 감격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왔다.
물을 받아야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있을지, 그 기약조차 없었기에.
정인은 문틈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마셔보려 애를 썼으나, 좁은 틈으로 흘러내린 물방울들은 턱을 타고 흐를 뿐이었다. 나는 정인을 옆으로 밀쳐내며 물통을 틈에 갖다댔다.
아주 조금씩, 물병 안으로 생명의 구슬들이 굴러들어왔다. 성원은 초췌해진 얼굴로 내 뒤로 다가왔다.
 "태풍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한 며칠, 쉬지않고 비만 내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상 상황을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으나 고맙게도 비는 계속 내렸다.
후두둑하는 빗소리가 경쾌한 음악처럼 철문을 때릴 때마다 우리는 마른 입술을 적시기 위해 물을 조금씩 나눠마시고 다시 문틈에 빈 물병을 올려놓기를 반복했다
조금이나마 생기는 찾았지만 모두들 피해갈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
간신히 며칠의 시간은 더 벌었지만 여전히 달래지지 않는 허기는 그대로였다.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버틴다해도 정신이 버텨줄 지도 의문이었다. 성원은 다시 마른 눈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정인은 쓰러지듯 잠만 잤고.
나는,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만 틈 사이로 기대어 바라보았다.
[4]
더 이상 시간을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가뜩이나 맛이 간 휴대전화는 이미 전원이 꺼진지 오래였다.
일주일은 지났을까. 나는 더 이상 내 몸뚱이가 아닌 것 같은 손가락을 까닥여보았다. 미치도록 밀려오는 허기만이 현실을 실감하게 했다.
이제 더 이상 비조차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담아두었던 물 한 병만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배고파… 엄마 보고 싶어…"
자고 있던 성원은 정신이 들었는지 혼잣말로 칭얼댔다. 나는 귀를 막으며 녀석의 등을 발로 찼다. 저 소리를 한 삼백 번은 했으리라. 짜증나는 건 정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정인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직까지 일어날 기운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며 나는 엎어져 누웠다.
 "야, 왜 우리가 그 생각을 못했지?"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내뱉는 정인의 말에 나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점을 잃은 정인의 눈동자에는 오늘따라 이상한 힘이 서려있었다.
 "먹을 수 있는 거, 여기 있잖아. 아예 없었던 건 아니잖아."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내뱉은 정인의 말에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지하실의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힘없는 목소리는 웅얼거리며 허공을 갈랐다.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한 것은 다음이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다만 그것을 식량의 일종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뿐. 손질할 도구도, 요리할 불도 없는 이곳에서 살아있는 생선을 먹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정인의 생각은 사뭇 다른 듯했다.
정인은 망설임없이 지하실의 끝으로 걸어갔다. 새파란 물탱크가 살짝 입을 벌린채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인은 뚜껑을 열어젖혔다. 묵직한 뚜껑이 벽에 부딪히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
정인의 눈엔 살기가 서려있었다. 무엇이든 할 것 같은 그 눈에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물탱크의 차가운 감촉이 등에 닿았다. 나는 떨리는 양손을 부여잡았다.​
물탱크를 열자마자 물비린내가 올라왔다. 어둠이 끝내 집어삼킨듯, 자신을 놓아버린 임연수들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녀석들도 먹을 것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편, 살아남은 것들은 여전히 힘겨운 몸부림을 이어나가며 위아래로 헤엄을 쳤다.​
정인은 미친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물 위로 파동이 일자, 놀란 임연수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태풍의 소용돌이처럼 빠르게 도는 임연수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둠속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날렵한 움직임.​
정인은 구석에 몰린 놈을 사정없이 낚아챘다.
정인의 손아귀에 잡힌채 바들거리는 힘없는 몸부림을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전등을 꺼내 물탱크를 비췄다. 반짝이는 바닷물 아래로 노오란 빛깔이 미끄러졌다. 살랑거리는 지느러미로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는 아름다운 몸짓, 나는 그 몸짓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너무도 아름답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실렸다. 나는 웃음을 흘리며 정인을 따라 물탱크 안에 손을 넣었다. 빠르게 일어나는 아름다운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한 놈을 두 손으로 잡아채 바닥으로 던졌다.
녀석은 어둠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나는 쉴새없이 몸부림치는 녀석을 발로 눌렀다. 힘을 싣자 미세한 진동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기운 빠진 녀석을 들어올렸다. 녀석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생명력, 타투처럼 새겨진 검은 줄무늬, 그 미끈거리는 촉감마저도 아름답다.
그리고, 정말.
맛있어보였다.
[5]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생선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임연수라 답할 것이다.
살아있는 그것의 몸부림이 입안을 타고 전해지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또 없을 거라고.
나는 혀끝에 걸리는 가시를 뱉어내며 정인에게 말했다. 눈 주위가 검게 변한 초췌한 얼굴로, 정인은 임연수를 입에 문 채 실실 웃었다.
성원은 겁에 질린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더니 철문 구석에 가서 토를 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올라오는 것은 위액뿐이었다. 속이 쓰린지 울상이 되어 힘없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치던 성원은 한참이 지나서 우리가 있는 쪽으로 기어왔다.
차마 살아있는 것을 입에 넣을 수는 없었는지 성원은 덜덜 떨며 정인의 팔을 움켜쥐었다. 정인은 성가시다는 얼굴로 임연수의 살점을 성원에게 던져주었다. 평상시였으면 정인의 태도에 열을 올렸을 성원도 배고픔 앞에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성원은 바닥에 떨어진 살점을 떨리는 손으로 주워 입안에 넣었다.
나는 연어를 잡는 한 마리의 곰처럼 날쌔게 임연수를 낚아챘다. 하루의 한 마리씩. 생존을 위해 암묵적으로 정한 규칙이었다. 나는 기운이 빠진 임연수를 크게 입을 벌려 한 번에 물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가시들이 입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먹게 되더라도 입에 물고 있는 편이 행복했다. 정인은 턱에 흐르는 피를 셔츠로 닦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초점을 잃은 동공이 나직이 말했다.
"누가 오고 있어…"
저벅거리는 발소리. 그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퍼지자 계속 엎어져있던 성원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못 가 앞으로 고꾸러진 성원은 철문 앞까지 네 발로 기기 시작했다.
"오늘 보니까 열쇠를 잃어버려서…"
"아, 저한테도 열쇠가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오늘도 임연수가 들어온다고 해서, 우선 전에 남았던 걸 치워야하는데."
경비원 아저씨와 어떤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철문을 진동시키며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성원의 눈빛이 한층 타올랐다. 갈라진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는지 성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살려주세요…를 반복하는 대신 주먹을 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성원은 철문을 두드렸다. 그간 쓰러져있던 것이 이 순간을 위해서라는듯 성원은 안간힘을 쓰며 철문을 두 손으로 내려쳤다.
살기 위한 아름다운 몸부림.
성원은 임연수와 닮아있었다.
밖에서 당황하는 말소리와 열쇠를 급히 꺼내 구멍에 꽂는 쇳소리가 뒤섞이고, 이내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둬놓았던 철문이 잔인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성원은 문이 열리자마자 스르르 옆으로 쓰러졌다. 행정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는 뛰어들어와 쓰러진 성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안쪽에 있던 우리들과 눈이 마주쳤다.
정인은 와이셔츠 끝을 입으로 잡아뜯으며 실실 웃고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경악의 빛을 읽었다. 어쩌면 우리를 버리고 나가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왈칵 겁이 났다.
나가지 못한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내가 입에 물고 있는 이 임연수처럼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불쌍해보여야 했다. 나는 눈을 감으며 물고 있던 임연수를 뱉어냈다.
정인은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정인의 옆구리를 세게 발로 찼다. 정인은 해파리처럼 힘없이 엎어졌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정인을 향해 뛰었다.
경비아저씨까지 뒤따라 들어오면서 활짝 열어둔 문 탓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또다시 시야를 가렸다. 어둠에 익숙해져버린 눈은 과부하에 걸린 듯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 난 그 새하얀 빛 끝에 삶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나는 미련없이 그 정신을 놓았다.
이제, 나갈 수 있다.
*지난 번에 해주신 조언, 정말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색다른 소재로 글을 써봤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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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의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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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의 너에게

 

[1]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오는 5월의 아침이었다. 의진은 거실에서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벨소리에 잠이 깼다. 거추장스럽게 내려온 수면바지를 질질 끌고서 의진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전화였다. 요즘 시대에 필요한 전화가 집전화로 걸려오는 일은 거의 없기에 의진은 짜증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여론조사 전화가 아니라면 스펨 전화다. 의진은 반쯤 확신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의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수화기 너머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의진은 짧게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망설이는 듯 말끝을 흐리는 물음이 돌아왔다.

 

"아저씨는 누군데요…?"

 

아저씨라는 말에 의진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저씨라니, 겨우 스물 둘인데.
하지만 생판 처음 마주하는 아이와 그런 논쟁을 벌일 만한 여력은 없었기에 의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잘못 전화한 것 같은데. 끊을게."

 

이른 아침에 자신을 깨운 전화가 고작 어린 아이에게서 잘못 걸려온 전화라는 사실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의진은 바지를 질질 끌며 부엌으로 향했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그는 또다시 울려퍼지는 전화벨에 거실쪽을 돌아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캐논 변주곡. 이번에도 집전화였다.
의진은 물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선 전화기로 향했다. 오늘따라 사뭇 묵직하게 느껴지는 전화기를 집어든 의진은 여보세요,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한숨을 내뱉었다.

 

"또 너야? 잘못 걸었다니까."
"잘못 건 거 아니에요. 이 번호 맞는데요…"

 

그러면서 혀 짧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번호를 부른다. 번호가 틀리다면 고쳐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아이가 부른 번호는 의진의 집전화번호가 맞았다. 처음부터 잘못 받아적은 거 아니냐는 의진의 핀잔에 아이는 큰 소리로 우기기 시작했다.

 

"아닌데요. 이거 저희 이사갈 집 번호란 말이에요."

 

전화기를 들고있던 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누가 버젓이 쓰고 있는 번호를 이사갈 집에서 쓰겠다니.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기에 의진은 실수로 잘못 받아적었겠거니 했다.

"너가 잘못 알고 있는 거겠지. 이거 우리집 전화번호거든. 자꾸 시끄럽게 울리니까 그만 전화 걸어. 알았지?"
"시른데요. 저 제대로 알고 전화한 거예요."

당당하게 늘어지는 아이의 말에 의진은 인상을 팍 썼다. 아침부터 얼굴도 모르는 아이와 의미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의진은 이렇게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이대로 전화를 뚝 끊어버려도 또 전화가 올 것이 분명했기에 의진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던졌다.

 

"잘못 전화한 거 맞다니까. 너 이사 가는 집이 어딘데?"

 

의진의 물음에 아이는 곧바로 이사 갈 집의 주소를 술술 말했다. 어른들한테 들은 모양인지 몇 동 몇 호인지까지 꽤나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말을 마치자 의진은 의아함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집 주소였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이사갈 예정도 아니고, 집을 내놓지도 않았다. 13년 째 버젓이 살고 있는 집인데 누군가 이곳으로 이사 올리가 없었다.

 

개인정보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의진은 차가운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장난치면 못 써. 너 이름 뭐야."
"권의진이요. 9살이에요."

 

이제는 하다하다 자신의 이름까지. 의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어이없는 장난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싶어 태연하게 캐물었다. 부모님 성함, 다니는 초등학교, 현재 사는 곳-의진에게는 예전 집이다-까지 물었지만 어김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정답에 의진은 서서히 불안해졌다.

 

어린애가 무슨 수로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아나 싶어서였다.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의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의진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고민하는 동안 그 상황을 알 리 없는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엄마가 오래요. 오늘 엄마랑 영화관 가서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보기로 했어요. 이따가 또 전화할게요!"
"이따 전화하지 않아도 괜…"

 

긴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이는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의진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분명 어릴적에 봤던 영화다. 어디서 새로 개봉이라도 하나. 그러나 재개봉을 한다고 치기에는 불과 어제 영화관을 갔다온 의진이었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는 터라 유명하지 않은 영화까지도 전부 섭렵하며 상영시간표를 외우다싶이하는 의진이 예전에 인상적이게 봤던 영화의 재개봉 일시를 놓칠 리가 없었다.

 

만약에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면 한 번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태산이다. 의진은 밀린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하지만 근사한 레포트를 써내겠다는 마음가짐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여버린 손은 이미 인터넷 검색창에 머물러있었다.
의진은 아이에게서 들은 영화 제목을 검색창에 쳤다.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2005)

 

그 말을 끝으로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재개봉일자도 나와있지 않았을 뿐더러 관련된 최근 뉴스도 없었다.

 

이건 또 무슨 고약한 장난인가 싶어 의진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어린애가 자신에 대한 정보까지 알아내서 이런 장난을… 두 번째 전화가 오면 코치코치 캐물어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내겠다고 다짐하며 의진은 벽에 걸린 시계를 노려보았다.

 

 

[2]

 

 

두 번째 전화는 저녁 9시가 넘어서야 걸려왔다. 어린이날이라 저녁까지 밖에 나가서 놀고 온 모양인지 아침보다는 훨씬 피곤한 듯 지쳐있는 목소리였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거실로 달려나가 전화를 받은 의진은 여보세요, 하는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 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너, 아까 본다던 영화 이름 다시 얘기 해봐."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요. 보고 왔는데 짱 재밌어요! 피터가…"
"그거 2005년에 개봉한 거잖아."
"네, 지금이 2005년이잖아요."

 

해맑은 아이의 한 마디에 순간 의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생각을 모두 비워낸 기분. 다분히 고의적인 장난일까. 의진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장난치지 말고."
"뭐가 장난이에요? 저 장난 안 쳤는데요."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뭐지…하며 거듭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린애의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도 좀 애매한 상황이다. 9살밖에 안되는 아이가 2005년에 개봉했던 영화까지 들먹이면서, 자신의 현 집주소까지 알아내서 이사갈 집이라고 우긴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사기를 칠 마음이라면 모를까,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는 거짓말에 집착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2005년에 의진은 9살이었다. 어린이날에 개봉했던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를 보러 갔었고, 아이가 말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예전 집에 살았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 역시 의진이 9살이었던 해 겨울이었다.

 

아이가 주장하는 얘기가 모두 맞다면 저 아이가 예전의 자신이라는 것밖에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같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진은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찝찝한 기분에 의진은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손을 붙잡고 말을 꺼냈다.

 

"너, 집에 나무상자 있지? 보물 1호."
"네?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사오면서 챙겨오지 못해 밤낮을 울었던 의진의 어릴적 보물 1호. 의진만이 알고 있는 네자리 비밀번호 자물쇠로 잠겨있는 그 나무상자 안에는 의진이 좋아했던 로봇과 딱지, 구슬까지 별의별 장난감들이 들어있었다.

 

그러니 그 안에 든 건 이 세상에서 의진만이 알고 있다.

 

의진은 아이의 장난일거라 반쯤 확신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말해보라고.

 

"메이플 딱지랑 로봇이요! 그리고 미니카도 되게 많은데, 제가 젤 아끼는 빨간색 BMW랑 파란색 벤츠도 있어요.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리는 것 마냥 멀게 느껴졌다. 의진은 혼란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상자 속 내용물과 일치했다.
의진은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뚝 소리가 나며 전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응답이라도 하듯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말하고 있는 와중에 무턱대고 끊어버린 전화이니 아이도 퍽 당황했을 터였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건 의진 쪽이 더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각종 신기한 사연들은 들어봤어도, 그런 사연들에 맞먹는 상황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의진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배고픈 아이가 보채듯 쉴새없이 울려대는 카논 변주곡에 의진은 하는 수 없이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저씨, 왜 갑자기 전화 끊었어요?"
"의진이라고 했지? 하나만 물어보자. 너 이 번호로 전화 왜 한거야?"

 

그 답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의문을 조금은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진의 물음에 어린 의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산타할아버지가 꿈에 나와서… 이사 가는 번호로 전화하면 크리스마스 때 좋은 선물 준댔어요!"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멘트에 의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뭇 황당한 꿈이었지만 그 꿈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통화해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어쩌면 그 꿈이 자신들을 이어주기 위한 매개체는 아니었을까하고 의진은 생각했다.

 

의진은 수화기 너머의 아이가 어린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중요한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미래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지금은, 과거를 바꿀 수 있다. 아홉 살짜리 아이라해도 자신이 하는 말을 마냥 흘려듣지는 않을테니.

 

"의진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네, 아저씨."
"아, 아저씨 아니라고. 너도 몇 년 지나면 나처럼 돼. 아니, 그냥 내가 되지."

 

의진은 우겨대면서도 어린애를 상대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저렇게 짜증나는 성격이었다니. 의진은 지금껏 곁에 있어준 주위 사람들이 진심으로 고마워졌다.

 

"내가 무슨 아저씨처럼 돼요. 너무하네, 진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린 자신의 투덜거림을 가뿐히 무시하며 의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진짜 중요한 얘기라는 강조도 다시 한 번 하면서. 정작 아이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지만 말이다.

 

"내가 하는 말 잘 따르면 산타할아버지가 더 좋은 선물 사주실거야, 알겠지?"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아, 내가 전화할게. 나 산타할아버지랑 엄청 친해."

 

어린 의진은 작은 목소리로 알았어요, 하고 대답했다. 힘이 없는 목소리는 영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의진은 우선 말을 꺼냈다.
아홉 살의 의진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초등학교 때 너무 열심히 공부하지마."
"네? 왜요? 어차피 안 하는데."
"아냐. 너 엄청 빡세게 할 거야. 나중에 후회한다, 진짜. 지금 놀아."

 

'나중에 후회한다.'라는 말에 유독 힘이 실려 있었다.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공부 덕에 100점도 곧잘 맞고 칭찬도 받았지만 대학생이 된 지금에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딴 건 몰라도 초등학교 시절의 공부는 정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진이 어렸을 때 유행했던 책 하나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성적이 대학까지 간다는, 그런 내용의 책이었다. 그게 사실이었다면 의진의 친구 용민이는 서울대에 갔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어차피 죽어라 할 공부를 굳이 초등학교 때부터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대를 보내본 의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발 중학교 2학년 때 이상한 판타지 소설 같은 거 써서 흑역사 만들지 말고. 너, 그 땐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거 나중에 보면 이불 찰 거다, 진짜."
"판타지 소설이 뭔데요?"
"차차 알게 될 거야."

 

의진이 무슨 말을 하든 어린 의진에게는 뜬구름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질 것이다. 반 이상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니. 그래도 삶의 어느 순간에서라도 불현듯 떠오르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조언으로 시작된 의진의 말은 점점 예언에 가까워졌다. 사실 예언이 맞았다. 그것도 신용가능한 백퍼센트의 예언.

 

"의진아, 너 고3 때 수능 볼꺼잖아. 그치?"
"네에… 그 시험 말하는 거예요?"
"어, 너 그거 국어 23번 마킹 실수하지 마. 그것 때문에 등급 바뀌어서 재수하지 말고."
"재수가 뭔데요?"
"지금 내 말 안 들으면 네가 나중에 하는 거."

 

그 놈의 국어 23번만 아니었어도! 의진은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재수생 시절을 떠올렸다. 어린 자신이 지금의 충고를 새겨들을 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기억하기를 바라며 의진은 거듭 그 말을 강조했다.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아스팔트 길을 깔아주고 싶은 것이 현재 의진의 마음이었다.
말대꾸를 하면서 짜증나게 굴던 아이었지만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애틋하게 느껴져서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마법 같은 일은 주로 특별한 날에 일어난다. 모든 동심이 깨어나고 동화처럼 신비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어린이날.
이 믿을 수 없는 통화 왠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의진은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2017년이 되면 말이야."
"오, 그 때는 저 어른이에요?"
"그건 그런데,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뭔데요?"
"비트코인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사. 돈이 몇 배로 뛰면 떨어진다 싶을 때 팔고."
"에…?"
"그냥 잔말 말고 사."

 

지금의 로또 번호를 알려준들 아이가 기억할 리 없기에 나름 현실적인 방안을 제공한 거지만 지금 아홉 살을 상대로 무슨 얘기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잘만 되면 인생이 한 방에 바뀌는 건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린 의진은 장난으로 건 통화였겠지만 사실상 설교에 가까운 의진의 주입식 교육을 받게되자 따분했는지 들려오는 대답이 갈수록 건성이었다.
이 전화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아채면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할 거다. 의진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수화기 너머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진의 엄마였다.
이제 자야지,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하루종일 어디에 전화하는가 싶었는지 살짝 짜증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어린 의진은 이 때가 의진의 설교로부터 벗어날 기회라 생각했는지 밝아진 목소리로 가겠다며 외쳤다.

 

"아저씨, 저 자야돼요. 나중에 봐요."
"그래, 아니 잠깐만."

 

전화기를 끊으려던 의진은 괜히 뭉클해져 담아두고 있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 통화가 자신들을 이어주는 마지막 통화라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큰 인생의 굴곡 없이 평범하게 자라온 의진이었지만, 순간 순간을 생각해보면 벽처럼 느껴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먼 훗날, 자신이 그 벽들을 마주했을 때, 다른 말들은 잊어도 좋으니 이 말만은 기억했으면 했다.

 

"멋있는 사람으로 자라줘. 형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으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앞이 캄캄해도 조금만 더 그 어둠을 헤쳐보면서.

 

"약속할게요."

 

어린 의진의 해맑은 목소리에 의진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전화가 끊어져도 내일은 오겠지만 의진은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느낌 속에 스스로를 놓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의진은 모처럼만에 진정으로 의미있다 느꼈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머리맡에서 시계의 째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이날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써 본 단편입니다. 하루 지났지만 올려봅니다. 글틴에는 처음 와보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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