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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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를 위하여

 

알레그레토 조금 빠르게 집에 가는 버스에서는 머리를 여러 번 박았다 잡을 손잡이도 없이 부서지는 풍경들 또 얼룩을 지울 비누도 없이 까매지는 손가락들 바닥도 없이 버스가 덜컹거렸다

 

언니 고백합니다 난 목소리가 진절머리 나요 조장과 주장 사이에서 들춰지는 치맛자락과 깨물수록 생기가 도는 피부 발음이 뭉개지는 순간마다 몰래 사람을 죽여왔어요 밤마다 인어공주의 비늘을 물어뜯고… 난 스쳐 지나는 모든 것들에게 마지막 넘버를 불러 주려고요

 

메조 피아노 조금 여리게 레슨실에 들어가면 뻣뻣한 몸을 억지로 말아 발가락을 빨았어요 허벅지의 튼살을 핥았어요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던 음표들은 순식간에 우스꽝스러워집니다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짚으면서 다리를 높이 차면서 차례차례 고꾸라집니다 찌웠다가 뺐다가 하는 가슴살과 딱 만지기 좋은 볼살을 사분의 삼박자로 밟으면서 음표들이 왈츠를 춥니다 언니 나는 울렁거렸습니다

 

척추에 높은음자리를 새기고 살고 싶었어요 꼿꼿하게 치솟다 휘어지며 돌아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니 나 딱 발끝부터 목구멍까지가 가려워요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레몬즙을 마셔요 스케르찬도 익살스럽게 치달았다가 포코 아 포코 미세하게 떨어진다 왈츠가 탱고로 바뀌면 나는 눈을 감고 삼십이분음표로 폭주합니다 포르찬도! 스포로찬도! 제길 못 하겠어요

 

레슨실에선 허밍이 멈추지 않아요 귓바퀴를 회전하는 숨이 오선을 뿌옇게 가리고요 리타르단도 리타르단도 점점 느리게 목덜미에 미끄러져요 쉬 집중하렴

 

언니 나는 밤마다 재를 뒤집어쓰고 콜록거려요 노래를 부르느라 콜록거려요 이 무대에 커튼콜은 없다고 전해 줘요 그럼 다 카포.

 

 

 

*학계에서는 ‘엘리제를 위하여’의 원래 명칭이 ‘테레제를 위하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그녀가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인가에 대한 논의와도 관련이 있는데, 그에 대한 힌트는 베토벤 사후 발견된 몇 장의 편지가 유일하며 그나마도 모호한 이니셜을 사용하는 등 고의로 여성의 정체를 흐리고 있다. ‘엘리제’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엘리제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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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 프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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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 프시케

 

긴팔을 꺼내 입을 때 쯤 나비가 죽었다

그 때도 이런 계절이었지 우리가 처음으로 나비를 삼켰을 때 말이야

잔잔한 위협 속에 서로의 나비를 맡기고도 우리는 용감했다 우리는 손가락이 열 개나 있었고 그 열 개를 다 깍지 낄 수 있었고 그래서 어디까지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팔 월 삼십일 일에서 구 월 일 일이 될 때 계절은 갑작스럽게 변한다

미처 긴팔을 준비하지 못 한 나는 뒤떨어지고 팔다리를 마구 흔들며 에스오에스를 보내고

 

너는 몹시 재빠른 사람 이번에도 잽싸게 나비를 토하곤 중얼거렸다

더듬이 하나가 모자라 그런데 고작 더듬이라니

 

지난 여름 머랭 쿠키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을 빨면서 나는 다정하게 반박했다 죽음에 사소하게 가까워지겠지 으음 그러니까 달콤하게 그런데 네 손가락에 묻은 그건 계피니? 난 좀 씁쓸한 게 먹고 싶어

 

나비가 용감하게 그러나 무탈하지 않게 날아오른다 위협이 허리를 말고 둥글게 기다리는 하늘로 있잖아 소나기의 방향으로 여름이 진 날을 기억하니 그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였는지 몰라 (나비를 안락사한다니 들어본 적도 없어) 알면서도 그 물에 나비를 풀어주지 못 했지 간간히 익사하는 나비의 눈을 바라보다가 나도 같이 떠내려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너무 바빴다

 

싱그럽기 위해 발버둥 쳤던 많은 날들 때문에 우리는 조명이 없는 곳에서만 안부를 물었고 결코 서로를 위로 할 수 없었지 내가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으레 너도 위로가 필요했으므로

 

여름엔 안부의 무게가 늘어지게 더웠는데

 

여전히 더듬이의 행방이 묘연했다 네 배를 가르지도 못 하는데 나비가 시든다 우리는 엇박으로 웃는다 아주 크게 나비는 날개를 둥글게 접어 목을 조이고 그물을 뒤집어 쓴 우리는 불행하게도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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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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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 레퀴엠

 

거북이와 달팽이, 연아

나는 어쨌거나 등에 보금자리를 지고 다니는 것이 되고 싶었어

그럼 조금 느려도 상관없지 않았겠니 내 등 뒤에 늘 집이 있다면

 

무의미가 정말 무의미했다면 무의미라는 이름을 가지지는 못했을 거라고

탁하게 떨리던 내 손을 네가 잡았을 때도 연아, 너는 알았을까

누군가와 함께 조각나기 위해

금요일이면 일부러 흘렸던 여러 켤레의 유리 구두를

그리고 나는 우리의 맞닿은 손바닥을 손목 째로 잘라 버리고 싶었다는 것을

 

아아 스노우화이트 스노우화이트 눈처럼 창백한 손목

에델바이스의 음에 맞춰 불렀던 노래를 기억하지만 곧 난 긴 그림자를 가진 어른이 될 거야

긴 그림자의 좋은 점은 옅다는 것 밖에 없어 그래, 차라리 하루 빨리 옅어졌음 했어

독사과를 먹는 역보단 독사과가 매력적이지 않겠니 그런데 그러지 못 할 테니까

 

어제 나는 길고양이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다

그 노랗고 길쭉한 동공에 비치는 금을 보았어

우리는 모두 금을 밟으면 죽는다는 것을 연아, 너는 알았을까

단발마로 죽는 사람들 글쎄 그게 시늉이 아니었지 뭐야

 

연아, 만약 우리가 다시 한 번 이곳에 던져진다면

그 때는 긴 인사를 나누자

십 분을 만난다면 팔 분을 인사하고

이 분 동안 모자장수의 빈 찻잔을 홀짝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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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워터(Lime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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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워터(Lime water)

 

외국산 물을 사선 늘 죄 버려버리는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곧잘 노래를 불렀다 비명을 닮은 아리아였다 나는 하나의 목소리로 소프라노 파트를 트럼펫을 바이올린을 비올라를 첼로를 클라리넷을 바순을 큰북을 불렀다

 

이조에 이조를 잇달아 시미라레솔도파

화음에 화음을 쌓아서 파도솔레라미시

 

로컬마트에서 산 외국산 물은 끝까지 먹은 적이 없이 석회의 쾨쾨한 맛이 넘어가면 리듬에 맞춰 울렁이는 목젖과 편도와 식도와 위와 소장과 대장 머리카락 한 올 마저 중력을 거슬렀을 때 위액은 상큼하지도 새콤하지도 않았다

 

두두두두두두두 부유할 때 부유할 때

 

노인의 목소리는 최초로 부드러웠다 그의 손길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을 때 똑단발은 한 번 걸리는 일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아가, 연말에 보자 노인이 내 단발을 귀 뒤로 넘기곤 속삭였을 때 나는 잘린 목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주름살이 파충류의 외피처럼 거칠었다

 

목 잘린 목련이 여우비처럼 내린다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내가 목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너도 입도 없이 음식을 먹었다

우리는 뱉었던 것을 먹고 또 뱉기를 반복했다

 

밤마다 노래를 불렀지 비명 같은 아리아를 그런 것을 듣고 자란 너는 한동안 비명밖에 지르지 못했다 제대로 넘긴 적 없었던 외국산 물이 한나절에 걸쳐 아래로 쏟아지는 동안 우리는 내내 같은 줄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푸른 옷이 싫어 쫓겨난 네가 푸르스름한 배냇저고리를 입고 비명을 질렀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한 장 서류를 손에 쥐고 올려다 본 하늘 기시감에 시달린다

 

석회가 잔뜩 녹은 텁텁한 물이 증발하고 다시 내려서 고인다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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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굴개굴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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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굴개굴 아리아

 

그날은 블라인드 저편의 햇빛이 실선무늬로 잘게 부서졌고 엄마는 줄무늬 옷을 못 견뎌 죽었다. 냄새가 나, 냄새가 아빠는 자신의 입냄새를 채 맡지 못 하고 엉뚱하게도 오븐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얘 이리 와 봐라 고기 썩는 냄새가 나잖니? 그런데 통 어디서 나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 고기는 없어요 아빠가 죄 믹서기에 갈아버렸잖아요 울긋불긋하고 거무죽죽한 것을 탓하듯 부침가루도 희게 뿌렸잖아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소금을 뿌려댔잖아요 고기전이 잘 되었다며 동네 사람들에게도 가져다 주었는데 기억하지 못 하세요?

 

아빠가 씽크대 하수구에서 얼굴을 떼자 불콰했다 손톱발톱도 죄 검붉었다 표백에 실패한 얼룩진 말들을 도로 삼킨다 목구멍이 시렵다 눈동자의 우물을 생각한다 우물에는 개구리가 *옵 오압 옵 오압 울었다 어리고 재빠른 녀석이다 녀석이 뒷다리를 아치형으로 굽히고 뛰어오르면 눈동자에 물이 튀었다 개구리에 관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눈동자에 살았다 동네 사람들의 개구리는 비대했다 그들은 뒷다리를 이리 저리 비틀어 보다 자주 주저앉곤 했다 크게 울어대지만 오오옵 오아압 오오옵 오아아압!! 오랫동안 그 소리를 들어온 동네 사람들은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었다 다리를 잃은 개구리의 존재는 잊힌다 그것 역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빠가 기어이 털 몇 가닥을 찾아내었다 소주병 막걸리병 동동주병 밑에 밀가루 부침가루 맛소금 밑에 끈적하게 엉켜있는 검은 털 보아 분명 고기가 있다니까 검은 털을 손가락에 칭칭 감고 아빠가 웃었다 안쪽까지 죄 누런 치아를 손톱으로 후볐다 가끔 나는 몽마를 보았고 베개가 흥건해질 때까지 땀을 흘렸다 그럴 때 마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 나무껍질 같은 손 알아들을 수 없는 자장가를 부르던 흘러내리던 머리칼 어젯밤 몽마는 내 눈꺼풀을 꿰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이 사이에 검은 털을 끼워 넣고 고기조각을 빼낸다

 

옵 오압 옵 오압 개구리는 자란다 나는 그들처럼 귀가 멀어버릴까 두려워 손톱을 짓씹는다 표백되지 않은 숨을 가두어 폐로 되돌린다 햇빛이 내내 실선으로 비친다 블라인드를 거둘 손을 잃은 사람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천천히 팽창한다 신음 같은 옵 오압 소리가 끊길 듯 삐걱인다 초고음으로 펑! 개구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얘야 넌 썩은 고기 같은 건 본 적도 없을 거야

그날은 내내 끼익거리던 블라인드가 고장 났고 아무리 매달려도 말려 올라가지 않는 줄을 엄마는 목에 걸었다

 

* ộp oạp : 개굴개굴. 베트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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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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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

 

여자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의존성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을 지나치게 갈구하고, 관계로부터의 두려움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여자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데굴데굴 굴린다. 그러다 문득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은 핸드폰을 자꾸만 열어 본다. 여자는 노트북을 켜고 한글 파일을 실행시킨다. 내일 자정에 방송될 라디오 프로그램의 대본을 작성한다. 모든 것에는 냄새가 있어요. 겨울바람 냄새, 길거리의 분식 냄새, 음, 그래요 사람의 체취도 있겠네요. 저는 감정에도 냄새가 있다고 믿습니다. 좋아요, 사랑을 예로 들어 볼까요. 제가 하는 사랑에는 상쾌하고 유독(有毒)한 아세톤의 냄새가 납니다. 또 다른 예로는… 여자는 불현듯 다시 휴대폰을 쳐다본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우리의 모든 소마앙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니임은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어어없네

 

여자는 홀로 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토해내는 방법을 알아내었을 뿐이다. 노트북 자판이 얼마나 더 닳아 없어져야 그만 하게 될까. 독을 토하는 것처럼 글을 쓰고 나면 그녀는 으레 잠든다. 그녀는 자신이 간밤에 어떤 글을 썼는지 기억하지 못 한다. 여자는 책상에 얼굴을 묻고 노트북 자판을 다시 한 번 본다. 몇 가지 글자가 사라져 판별할 수 없다. ㅅ,ㅏ,ㄹ, ㅇ, ㅁ,ㅣ,ㄴ,ㅎ,ㅐ와 같은 글자들이 그렇다. 여자는 사라진 글자들을 쳐 본다. 보지 않아도 여자는 그런 글자들을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 아직 잃지 않은 단어들에 안심하는가 싶더니 금세 얼굴이 불안하게 일그러진다. 여자는 아세톤을 집어 들고 자판의 글자를 지운다. 알싸한 아세톤 냄새가 나는 노트북을 여자는 벤다. 눈을 감는다. 이어폰 너머로 반복 재생한 찬송가가 흘러나온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어 오늘 그가 놀라운 일으을 이루우시는 것 보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암 없네

 

여자에게는 종교가 없다. 그렇지만 여자는 종종 찬송가를 듣는다. 여자는 절대자의 절대적인 힘을 사모한다. 그렇지만 여자는 절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여자는 책임지는 것보다 책임 지어 지는 것을, 보살피는 것 보다 보살펴지는 것을 좋아한다. 여자는 유일자 앞에서 연약하고 무력한 스스로를 온전히 내놓을 때 안도하면서, 동시에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 그리고 가끔 여자는 그런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신이 다른 환자들보다 조금은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여자는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앎을 통해 한 발짝 앞서나간 병자가 되었다. 여자는 관계에 스스로를 빠트리기만 하는 다른 환자들과는 다르게, 제 발로 낭떠러지까지 걸어가 자신을 밀어줄 누군가를 가련하게 기다린다. 그러나 정작 물에 빠지면 발버둥 치며 상대를 탓한다. 가련하게. 여자가 셀 수 없는 ‘사랑’을 밤낮없이 아세톤으로 지워내는 것과 같다. 여자의 이름은 다혜다.

 

다혜

 

다혜의 ‘다’는 ‘많을 다’, ‘혜’는 ‘지혜 지’를 쓴다. 다혜는 자신이 가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악하게 구는 것이 다 이름 덕이라고 생각한다. 다혜에게 이름을 지어준 부모는 그녀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이혼 했고, 그 후 다혜는 한동안 엄마와 살았다. 엄마는 아침이 되면 환하게 화장을 하고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엄마의 옷장에는 옷이 많았지만 엄마는 늘 검거나 흰 정장만 입었다. 다혜는 엄마가 입지 않는 옷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가슴까지 파인 붉은 드레스나 노랑, 보라 블라우스가 마음에 들었다. 엄마가 일을 하러 나가면 다혜는 그런 옷들을 꺼내 입었다. 아래로 늘어져 질질 끌리는 붉은 드레스 위에 무릎 까지 오는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다혜는 자주 넘어졌다. 다혜는 세 걸음에 한 번 꼴로 넘어지곤 했는데,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이 부드러우면 부드러울수록 더 자주 넘어졌다. 아름다운 옷, 그러나 발바닥과 실크 사이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실패하는. 부드럽고 편안할수록 불안한 발자국을 딛는. 그래서 자꾸만 넘어지고 마는. 그러니까, 다혜는 이런 옷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 옷처럼 평생을 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 했겠지만. 엄마의 옷을 입고 실컷 논 후에는 먼지투성이가 된 것들을 몇 번 털어 다시 옷걸이에 거는 것으로 놀이를 마무리 했다.

그날은 옷을 다시 정리하는 것을 잊은 채 잠들었다. 어릴 적부터 어스름을 곧잘 눈치 채던 다혜는 아무도 깨워주지 않았지만 눈을 떴다. 벽 너머에서부터 7시에 시작하는 만화영화의 소리가 들렸다. 다혜는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깜빡였다. 벽 너머에서 이번에는, 티비를 끄고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혜는 문득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리되지 않은 옷들을 보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언제 엄마가 와서 나를 혼낼지 몰라. 다혜는 내내 눈을 깜빡였고, 두려움에 무릎을 더 세게 끌어안았지만 어쩐지 옷을 치우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곧…. 이제 곧 엄마가 오면…. 다혜는 몇 시간을 거리의 고양이처럼 둥글게 떨었으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며, 다혜는 더 이상 엄마가 무섭지 않다고 느꼈다. 무언가가 다혜의 안에서 끊어졌다. 그건 전지전능하다고 믿었던 신이 뒷방에서 돈을 세는 모습을 우연히 본 신도와 같은 충격이었다. 다혜는 조금 더 대범해지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자 뜯지 않은 캔 맥주와 소주가 보였다. 다혜는 술을 몽땅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다혜는 찬장을 열어 가장 화려한 컵을 찾았다. 스테인드글라스 마냥 여러 가지 색을 칠해놓은 컵을 꺼내 술을 한 가득 채웠다. 처음 마셔 본 술은 쓰고 맛없었지만 다혜는 중간에 결정을 바꾸지는 않기로 했다. 난 한 번 결정한 건 번복하지 않아. 엄마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혜는 ‘번복’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지만 어쩐지 앞으로는 엄마와 아빠가 싸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혜는 그 때도 똑똑한 어린이였다.

눈을 뜨니 다혜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전날 다혜가 어질러놓은 것은 전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붉은 드레스와 노란 블라우스도, 널브러진 맥주 캔과 화려한 컵도 모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엄마의 옷장을 열자 검은 정장이 하나 비어있었다. 다혜는 문득 자신만 엉뚱한 곳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 식탁 위에 전화번호부를 뒤져 숙모의 번호를 찾아냈다. 그날부터 다혜는 숙모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사촌언니

다혜의 영특함은 숙모집에서 더욱 빛났다.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한 다혜와, 남들보다 조금 더 멍청한 사촌 언니가 함께 살았기 때문이었다. 다혜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벌써 중학생이었지만 지능은 초등학교 저학년만도 못 했다. 사촌 언니는 학교에 가는 날 보다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숙모는 다혜가 처음 온 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사촌 언니의 방으로 데려갔다. 오후 세 시였다. 그녀의 방은 불이 꺼져 깜깜했고 누군가의 숨소리만 흐느끼듯 들렸다. 네가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렴, 숙모는 그렇게 말했다. 다혜는 2시에 학교를 마치면 누구보다 빨리 집에 돌아왔다. 다혜는 모자란 사촌 언니가 마음에 들었다. 손으로 하는 자잘한 일들에 유독 서툴렀던 그녀에게 땅콩을 까 주면, 그녀의 흐릿한 눈이 다혜를 향해 의심 없이 접혔다. 사촌 언니에게 그녀는 유일한 친구였다. 유일한. 다혜에게 그건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유일한 존재를 가지는 것. 그건 사랑에 대한 그녀의 불안과 집착을 한 번에 종식시키는 다분히 마법적인 언어였다. 사촌 언니는 대체로 그런 다혜의 완벽한 동반자였지만, 그럼에도 다혜는 가끔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가끔 사촌 언니의 그림 일기장에 모른 척 물을 쏟았고, 그런가 하면 따돌림 당해 울고 있는 그녀에게 땅콩을 내밀기도 했다. 다혜를 보며 웃는 그녀의 눈을 보며 다혜도 활짝 웃었다. 그러나 완벽했던 두 아이의 공생관계는 한 순간에 끝났다. 사촌 언니가 한 명의 남자를 데리고 왔을 때. 가끔 다혜를 보며 접히던 눈이 그 남자를 향해 완전한 초승달을 이루었을 때. 다혜는 설명 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한 움큼의 땅콩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니 이미 거실 바닥은 땅콩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저걸 다 내가 던진 거야?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얼굴은 땀으로 젖어 흥건했다. 다혜가 겨우 고개를 들어 사촌 언니의 눈을 마주했다. 언니, 저걸, 다, 내가, 한 거야? 그녀가 두려운 눈을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 눈동자를 마주 보던 다혜는 소름이 끼쳤다. 목 뒤로 식은땀이 벌레 기어가듯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마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의 것 같았다. 마치 다혜 자신이 사촌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공포가 옮고 있었다. 다혜는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고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으, 으아아아악!!!! 다혜는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전봇대를 잡고 헛구역질을 하면서, 다혜는 처음으로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숙모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땅콩을 줍고 있었다. 퇴근을 막 한 참인지 화장도 지우지 않은 얼굴로. 다혜는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곤 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땅콩을 주웠다. 그녀가 땅콩을 양손에 한 가득 주운 채로 숙모를 보고 웃었으나, 숙모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집 근처 중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던 다혜가 급작스럽게 기숙사제 공립학교에 진학하기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사촌 언니,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촌 언니, 사촌 언니, 사촌, 언니, 사, 촌, 언, 니. 몇 년을 불러왔던 호칭을 하나하나 해부해 곱씹는다. 혀 끝에서 익숙한 땅콩의 맛이 난다. 어딘가 쌉쌀했다.

 

지워진 말들

 

다혜는 스물아홉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방송사의 비정규직 라디오 작가로 일하고 있다. 최근 그녀가 맡은 라디오는 사랑과 이별, 만남과 운명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는 심야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피디가 직접 다혜를 지목했다. 강 작가님이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심야 프로그램과 참 잘 어울리는 글을 쓰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별 말씀을요, 했다. 다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노트북 키보드를 떠올렸다. ㅅ,ㅏ,ㄹ, ㅇ, ㅁ,ㅣ,ㄴ,ㅎ,ㅐ 같은 글자들이 지워져 있는 키보드.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것들을 글로 쓴다. 화면을 채운 사랑스러운 글을 다시 읽어 보는 그녀는 구역질과 눈물을 참을 수 없어진다. 그리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아세톤으로 자판을 지운다. 이런 말들은 없어져야 해! 이런 말들을 내 안에서 없애 버려야 해! 지워진 글자들의 사연과 피디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참 잘 어울리는 … 넌 항상 이런 식이야! 너랑 더 만나다간 답답해서 내가 … 이 시간대에는 그런 소재들이 괜찮은데다가 … 꼭 그렇게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야 사귀는 건 아니 … A씨 아시죠? 그분이 강 작가님을 유독 칭찬하시기에 저도… 너는 뭐가 그렇게 늘 불안해? … 사랑을 참 많이 해 보신 분 같더라고. … 그런 식으로 해선 아무도 못 만날 거다. 다혜는 문득 바지 뒷주머니의 짧은 진동을 느꼈다. 그녀는 허겁지겁 휴대폰 화면을 켜고, 문자함에 들어갔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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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용 책자는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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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플라워도 시든다는 걸 알고 있나요

넌 애초부터 시들어있겠다고 했지만 덧대어 시들뿐이랍니다

– 두 배로 아픈 걸까

– 이런, 학생. 우리는 정량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결국 삼차원인 것입니다 따라 말 해 보렴 자, 다같이

-삼차워언

셔터에 남은 검지와 불룩한 중지의 굳은살에 잠시 속았나요

그런 것들은 죄다 가품이랍니다

 

배우지 않은 것들을 쓰려면 배운 것들을 버려야만 하나요

물론이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 필통을 열어볼까요 새것이 아닌 것은 몽땅 버립시다

-아니, 학생. 남은 게 없나? 그것 참 …… 어쩔 수 없군 그래.

투명하게 흐르는 위선에 주의하세요

 

아직도 밑줄과 물결줄을 헷갈려 해서야 쓰나요

아, 벌레무늬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면은 신경 쓰지마세요 곧 지우개 가루와 섞입니다

-어차피 모두의 기침이 모여 이곳의 공기를 만드는 걸요

시침에 함부로 손을 내놓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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