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바치
(여름이 끝나는 날 보낼)편지 [1]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건 늘 부산스럽게 전등 주변을 맴도는 모기의 앵앵거림이야. 여름의 시작이 빠르다는 건 이 동네를 빨리 뜨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너도 알다시피 내가 여름을 싫어하잖니). 그리하여 여름은 항상 좋은 점이 너의 살구색 민소매밖엔 없는 그런 계절이었지. 아참, 수박도 있었다(태양의 권위라는 게 주로 강제적이기에 햇볕에 취약한 할머니들 대신 차지한 평상에서 우리는 수박 대신 수박바를 여름 내내 베어물고는 하였으니까). 너는 알기나 하니? 수박(바)물이 네 가슴팍에 떨어져 너를 더욱 진한 살구색으로 물들일 때마다 나는 발가락에 비정상적인 한기를 느끼고 냉장고 속 진짜 수박은 가끔씩 비과학적으로 불어터지곤 하였던 것을. 나라고 네 가슴을[…]

(여름이 끝나는 날 보낼)편지
/ 2021-10-11
갖바치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1]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나에게 웃어 주지도 말길.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 나에게 말을 걸지도 말길.   나를 비웃고 조롱하겠다면, 내 눈에 보여지지도 말길.   기어이 나를 미워하겠다면, 나와 같은 세상에 살지도 말길.   그 무엇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났으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 2021-09-18
갖바치
나의 소원 세 가지라 함은 [1]

첫째는 너의 사랑 둘째는 공중부양 그래서 나는 지금 하늘에 있단다 얘야   하늘은 당연히 네 목구멍보다 광활하여 덜 아름다움에도 더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고   구름을 바라보며 네 입김을 생각하는 나를 언젠가 너는 중증이라 하였다   내가 널 사랑하므로 너는 나보다 예쁘고 내가 널 섬김으로써 너는 하늘보다도 아름다우며   나는 새를 날아서 잡아 너에게 바치는 상상은 언제나 내 숭배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첫째는 너의 사랑 둘째는 공중부양 셋째는 너를 위해 남겨두었단다 얘야

나의 소원 세 가지라 함은
/ 2021-09-13
갖바치
집행 [1]

너를 물에 씻으니 녹아내린다 아마 너는 사탕가루로 된 솜사탕인가 보다 물에 잠긴 신체의 말단부터 천천히 사라진다 아래쪽이 가루가 되어 녹고 그럼 위는 다시 아래가 되고 그리고 녹고… 너는 네가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놓아야 하는 것을 놓지 않았거나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였거나…… 나를 사랑하여 네가 사라지는 게 아니기를 바란다 너는 네 집행관이 나라서 기쁘다고 말하고 가슴까지만이 아직 물에 녹지 않아 욕조를 둥둥 떠다니면서 웃는다 샤워기를 대고 물을 뿌려야만이 네 얼굴을 울상으로 흘러내리게 만들 수 있고 그 때문에 거꾸로 뒤집어진 네 속이 보일까봐 나도[…]

집행
/ 2021-09-08
갖바치
매일 11시 반마다 (하는 생각) [1]

분명히 감았는데 왜 머리가 가려울까   사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고 인류가 핵폭탄보다 먼저 발명했어야 했던 것은 자동으로 머리 말려 주는 기계이다   안 말린 머리에선 푹 젖은 물과 샴푸 냄새가 난다   머리에서 샴푸 향이 진하게 나면 제대로 안 헹군 거라던데   샴푸를 들이부었어도 머릿결은 여전히 거칠다   '계면활성제 듬뿍 들어간 샴푸를 쓰시나 봐요' 이것은 머릿결이 좋은 사람을 보면 비겁하게 속으로 내가 하는 말   화학 물질 조금 들어간 샴푸를 쓰는 것에 기뻐해야 할까 스위치를 풀로 올려도 드라이기 바람은 약하다   …   !   방금 바람에 손가락을[…]

매일 11시 반마다 (하는 생각)
/ 2021-08-17
갖바치
나무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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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나무에서 목을 매셨다   여름이었다 곧이어 나무에는 복숭아가 열렸다 달고 맛있고 아무도 선생님을 내려 주지 않는다 선생님은 복숭아빛 얼굴이었다가 포도빛이 되었다 과학 선생님이 복숭아는 나무에서 열리고 포도나무는 덩굴이라고 말해 주셨다 그러니 얼굴빛을 따라서 복숭아가 포도로 변하는 일 따위는 없다   가을이 되자 나뭇잎은 갈색으로 변했다 여름을 지나면서 우리는 약간씩 키가 컸으며 이제 선생님의 매달린 허리에 머리끝이 닿는다 낙엽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결국에 나무에 달린 것들 중 떨어지지 않은 것은 선생님밖에 없다 그리하여 머리는 놔두고 밧줄에 감긴 목만 퍼렇게 주욱 하고 늘어져 구두를 신은 발이 땅에 닿는 것으로 떨어짐을 대신하셨고 잠자리들은[…]

나무의 역사
/ 2021-07-23
갖바치
곱창 [1]

소곱창을 시키면 염통까지도 구워준다 왜 염통까지도 구워주는가   불에 구워 따뜻하게 만든들 이미 멈춰 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소처럼 일하지도 못한 내가 소를 먹어도 되겠느냐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과   그렇대도 내가 소처럼 일할 것은 또 무엇이겠느냐 하는 그나마 생경한 물음이   위에는 내가 있고 아래는 철판이 있는 그 사이에 공존하였고 곱창은 왜 익지도 않았는데 익은 색인지 알코올을 부어서 번들거렸다   그들의 생전 체온보다 훨씬 더 뜨겁게 불을 붙여도 아까 말했듯이 이미 멈춰 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나는 타듯이 익은 곱창을 씹으며 곱창이 인간으로 따지면 어느 부위인지 정확히[…]

곱창
/ 2021-07-15
갖바치
세상에 무른 것들이 많아서 [1]

잘못을 한 건 뇌 쪽인데 어째서 항상 가슴이 아파야만 하는지   이렇게 말을 하는 너였고 도대체가 세상엔 무른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무른 것들이 많은 만큼 단단한 것도 많았다   단단한 것이 많은 만큼 날카로운 것도 많았다   전부 억지로 입속에 욱여넣다가 너는 목구멍 안쪽을 베였다   이상하게도 네 눈물에선 단맛이 났다 그렇게 울리고만 싶었다   미안하다 네 목구멍 깊숙이는 따뜻했다

세상에 무른 것들이 많아서
/ 2021-06-17
갖바치
그녀의 바다(퇴고) [1]

그녀는 궁상맞게 울어대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고, 그걸 고스란히 뱃속에 흘렸습니다 강이요 호수요 그녀만의 바다였지요   바다는 때때로 깊어졌습니다 그녀가 목구멍 안쪽을 향해 눈물을 흘릴 때였죠 이따금씩 바다의 어둠 아래에서는 심해어들이 다퉜습니다 그럴 때면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나오는 건 언제나 시큼한 냄새가 나는 바닷물뿐. 그러고 나면 심해어들은 어느새 조용해지곤 했어요   바다는 착실히 깊어졌습니다 어느 날, 해수면이 위험할 정도로 높아졌을 때- 그녀는 턱끝까지 차오른 눈물을 모조리 게워내었습니다 지진해일이었죠. 바깥으로 꺼내진 심해어들이 요란하게 팔딱거렸고, 눈 앞에 쏟아진 바닷물에선 시큼함이 섞인 물비린내가 났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녀 자신의 냄새였으며, 그녀는 그걸[…]

그녀의 바다(퇴고)
/ 2021-06-14
갖바치
너는 그런 종류의 사람 [1]

너는 내가 꽃이 예쁘다고 말하면 꽃은 식물의 생식기라고 얘기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너의 핀잔을 들으면 눈을 살짝 흘기면서 슬그머니 꽃을 내려놓곤 했다 꽃향기를 맡거나 얼굴을 부비거나 하면 네가 비웃을 것 같아서   네가 비웃으면 너는 나랑 꽃길을 함께 걸어도 나에게 우스움 그 이상은 느끼지 못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   네가 떠난 날 밤에 나는 공원으로 곧장 달려가서 실컷 꽃냄새를 맡았다 꽃에 얼굴을 부볐다   신축 공원이 보통 그렇듯이 색색의 장미가 가득했다 그중 노란 장미는 꽃말이 이별 하지만 너는 꽃말 따위엔 관심 두지 않는[…]

너는 그런 종류의 사람
/ 2021-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