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바치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2]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 이름에 만족하지 않은다고 어느 소설책에서 보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제 이름을 자주 헷갈려하고 그럴 때마다 제 이름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자꾸 헷갈리는 것은 아닐까 해서 불안해했던 날이 꽤 되었습니다 (한 절반 정도의 확률로 들어맞았습니다)   그런 이유 말고도 제 이름을 싫어하는 것은 제가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의를 담고 불릴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부구에게 불리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름 같은 건 필요없지 않을까- 이런 마음도 있고, 그 세 글자 말이 사람들 입에 담겼던 모든 순간을 씻어내고만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 2021-06-14
갖바치
엘레베이터 [1]

엘레베이터가 멈췄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는데   앞문을 톡톡, 두드리면서 너는 왜 멈춰 있니   나는 멈춰 있지 않다 항상 멈춰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딩동, 갑자기 열리는 앞문 그 길로 되돌아온 집   엘레베이터 안에선 옆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의형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엘레베이터
/ 2021-05-27
갖바치
돌고래가 나오는 꿈 [3]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고 시립도서관 벽면은 종종 내게 말하곤 했다   언젠가 꿈과 장래희망은 다른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었고 실수로 꿈을 장래희망 란에 써서 냈던 날 뒤의 아침엔 늘 목덜미가 축축했다 꿈과 뜬구름은 부당하게도 내게 비슷한 발음처럼 여겨졌는데 너는 꿈을 뜬구름이라 부르고 뜬구름을 꿈이라 말했다 너는 장래의망은 없었으나 장례희망은 있었는데 죽어 돌고래가 되는 게 그것이었기에 나는 늘 너에게 너는 필시 훌륭한 성체 돌고래가 될 수 있으리라고 말해 주어야 했다 돌고래로 회를 떠 먹는 비정상적 식문화를 가진 지역의 해안에 환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너는 대체로 무사할 거야 부디[…]

돌고래가 나오는 꿈
/ 2021-05-23
갖바치
벚꽃놀이 [1]

산으로 벚꽃 구경을 갔다 온갖 꽃들이 신나게 만개했다가 이젠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양손으로 잡아서 그냥 죽고 싶다고 빌었다   바닥엔 떨어진 꽃잎들이 나뒹굴었다 우유에 타먹는 딸기 가루처럼 분홍빛 벚꽃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꽃들의 무덤은 발차기 한 번에도 그렇게 쉽게 날아갔다   꽃봉오리만 남은 벚꽃나무는 진한 빨간색이었고 어쩌면 사랑은 산 중턱에 버려저 있던 안 묶인 콘돔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또 바람이 불어서 바닥에 떨어진 벚꽃잎을 잡았다 이번엔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빌었는데 반 쪽 짜리 꽃무덤 소원이라서 늙어 죽기 전엔 들어줄까 싶었다

벚꽃놀이
/ 2021-05-02
갖바치
간접흡연(퇴고) [1]

이 세상이 재떨이란 걸 알아챈 지는 얼마 안 됐다 날씨가 흐릴 때의 매캐한 구름이 사실 담배 연기라는 건 아무도 모른다   저 하늘 위에서 누군가가 뿜어대는 연기를 마시고 사람들은 점점 쇠약해져 간다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를 빼곤 누구도 그것에 안전하지 못하다 사실 연기에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기뿐이다 누나는 최근에 아기를 잃었다 누나는 충분히 순수하지 못했다   비가 올 때 그게 위쪽에서 뱉는 가래침이란 걸 알아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비가 잔잔히 올 때면 누나나 다른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걷는다 나는 늘 우산을 가지고 다닌다   누나가 아기를 잃은 날에는 진눈깨비가 왔다[…]

간접흡연(퇴고)
/ 2021-04-20
갖바치
이대로 네가 있는 곳을 지나치고는 [2]

집에서 나온다 너를 찾으러 간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차에 타고 아직 다른 사람 없인 출발할 수 없기에 뒷좌석에서 너의 얼굴을 그린다 비가 오기 시작하고 차는 출발한다 너는 보이지 않고 나는 너에 대해서 상상한다 이렇게 비가 오는 밤이면 종종 아직 만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쓰곤 했다   차가 속도를 올리고 자동차 앞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제각기 다른 바깥으로 흩어진다 내가 너를 만나면 널 알아볼 수 있을까   차는 여전히 달리고 빗방울은 저 밖으로 퍼져나가는데 너는 내가 사랑할 누군가인데 나는 그냥 계속 뒤에 앉아 있는다 이대로 네가 있는 곳을 지나치고는 시내를[…]

이대로 네가 있는 곳을 지나치고는
/ 2021-04-16
갖바치
고양이 혹은 거미에 대한 삼단논법 [1]

연이는 거미를 좋아한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고양이들이 거미들을 잡아먹는다고 나에게 따지곤 했다 나는 연이에게 말했다 그것은 본능이라고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네가 나를 물어뜯고 내가 너를 할퀴는 것처럼 고양이가 거미를 잡아먹는 것도 본능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연이는 알겠다고 그랬다   연이는 눈이 나쁘다 그러므로 안경을 쓴다 안경을 쓴 연이는 두 개의 눈을 더 가진다 따라서 연이의 눈은 네 개 눈이 네 개인 것은 거미 그러므로 연이는 거미이다 위험천만한 삼단논법이다 나는 연이가 언젠가 나를 잡아먹진 않을까 두려워한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다 나는 고양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역동물이다 두 번째 삼단논법이고 모든 전제는[…]

고양이 혹은 거미에 대한 삼단논법
/ 2021-03-15
갖바치
안경과 산책과 깨달음과 밤하늘과 [1]

집 앞에 나와 산책을 하다가 가끔씩 안경을 벗고 걷는 날에는 늘 세상은 서투른 화가의 풍경화처럼 변해요 거칠게 칠한 길바닥과 어색히 빛나는 불빛들 같은 근시래두 누군가의 풍경은 고흐나 모네의 그림이겠지만 내가 보는 것은 색채에 무지한 아마추어의 캔버스에요 고흐의 눈을 가진 이들은 평생 무시받다가 죽어서야 천금을 받고 팔리겠지만은 나는 그렇지도 못하겠지요 오늘따라 희망 없는 화가의 미숙한 가로등이 못나게 빛납니다   안경을 벗음으로써 얻는 깨달음은 어쩌면 자아성찰이라고두 볼수 있는 것이에요 안경을 손에 쥐고 나면 얇게 썬 돼지 간 두께의 유리알과 두툼하게 잘라낸 돼지곱창만한 입술로 세상을 다 아는 것마냥 굴은 것이 돼지와 크게 다르지[…]

안경과 산책과 깨달음과 밤하늘과
/ 2021-02-18
갖바치
하얀 집과 화장실과 변기 속의 [1]

오빠는 화장실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집은 온통 비누와 같이 하얬습니다 왜 화장실이 좋냐고 물으면 대답해 주지 않았고 노란색을 좋아했습니다 하얀색을 싫어했습니다 왜 하얀색이 싫냐, 고 내가 물으면 흔해서, 라고 답했으며 사실 그의 이름은 세상에서 제일 흔했습니다 어느 날 오빠는 죽었습니다 화장실 속에서 변기에 머리를 박고, 요 남색 제복의 경찰과 노란색 모피코트를 두른 어머니가 찾아왔고 경찰은 빨간색 도장으로 오빠의 죽음에 등급표를 찍었습니다 미성년자의 자살 사인은 익사 그러므로 B- 결국에 오빠는 죽어서도 금빛 메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하얀 바닥에 엎어져 울었고 난 그게 오빠가 불쌍해선지 아님 금메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헷갈렸으며 아무래도[…]

하얀 집과 화장실과 변기 속의
/ 2021-02-16
갖바치
바닷바람(퇴고) [1]

너는 바닷바람을 아니 바다가 왜 우리에게 바람을 보내는지 아니   너는 바다가 된 사람들을 아니 바다에서 태어난 자들의 운명은 바다에서 죽어 바닷속에 묻히는 것으로 끝난다 네가 지금 두 손 가득 뜨고 있는 바닷물 역시 비바람을 헤치고 이곳에 도달했던 뱃사람들의 땀방울이란다   바다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니 그들이 바닷속에 묻히리라 다짐했던 것은 그들 눈에 그곳이 바다 위보다 더 포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다에서 죽으리라 다짐했던 것은 바다 속 깊은 곳보다 바다 위가 더 숨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연인은 매일같이 바닷가에 나와 그들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머리카락이 파도[…]

바닷바람(퇴고)
/ 2021-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