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노력, 눈물, 절망, 후회,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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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실 책상에서 풍겨나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사각사각 깎여가는 생명을 따라
까맣게 타들어가는 또 하나의

 

울려오는 종소리에 숨어
땅으로 들어가는 저 미세한 또 하나의

 

빨강 그리고 검정 부드러운 산 속에서
홀로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파란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벼락에
회색 세상이 젖어드는 또 하나의

 

뚝뚝 떨어지는 냉기 사이로
남몰래 숨어든건 뜨거운 또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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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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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을 전해주세요

저 멀리 아득한 그 곳에는

푸름을 모르는 이들이 가득하답니다

일렁이는

밀려오는

흘러가는

저 높이 어딘가의 저 푸름도

그 어떠한 푸름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하얀 공백 속에 살고 있는 이들만이

아스라히 저 멀리

그 곳에 있답니다

그들에게 푸름을 전해주세요

함성과 기쁨의 눈물을 전해주세요

흩날리던 푸름과 하나의 열정을 전해주세요

펄럭이던 하나의 깃발을 전해주세요

온전히 온전해진 대지의 푸름을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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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난 별이 될 거야

은하수 따라 이리저리 출렁

반짝이는 빛들을 따라 이리저리 반짝

저 멀리 어딘가 모두가 가는 곳에 다다르면

알싸한 푸른 빛이 두 볼에 와닿으면

저 멀리 보이는 건 동그랗고 작은 초록 알갱이

있지 끝이 없는 곳에 가서

있지 나는 별이 될 거야

저 하늘 멀리서 한번 반짝

반짝 거리고선

다시 달려갈테지

초록색 알갱이를 향해

멈추지 못하는 마라토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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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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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어.
너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어.
-분명 우산을 챙겼었는데 가방은 텅 비어있어서 별 수 없이 빗속을 뚫고 달렸어. 비에 젖어 질척해진 흙이 신발이랑 바지에 잔뜩 들러붙었어. 그날따라 택시가 안 잡혀서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거기에 네가 있었어.
창밖의 저녁노을이 열린 창문을 따라 아스라이 흘러들어왔어. 왠지 모르게 심장이 계속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네 목소리가, 그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메웠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상태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며 너는 돌처럼 굳어졌었지. 솔직히 난 네가 나한테 화를 낼 줄 알았어. 막 닦은 듯 반짝반짝 했던 바닥에 내 신발자국만 가득 남았으니까.
너는 조용히 속삭였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너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 얇고, 잔잔하게.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해줬잖아
네 입술과 같은 모양으로 내 입술을 움직였어. 서로의 입이 하나의 문장을 그려냈어.
– “우산 드릴까요?”
너의 눈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지. 약간의 침묵을 뒤로 하고 너는 다시 말했어.
-이미 다 젖어버렸는데 말이야. 하긴, 그때 내가 한 말이 더 가관이었지, 뭐라고 했더라??네 손이 목덜미를 쓸며 내려갔어. 천천히 울리는 내 목소리가 살을 쓸어내리는 소리를 덮었어.
-우산은 필요 없는데……. 혹시 드라이기 있어요?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어. 웃음이 전염되듯 너도 함께 웃었지.
-눈앞에 생생해, 서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결국 큰소리로 웃어버린 우리가
연이어 말을 하는 네 표정이 즐거운 추억으로 빛났어. 너는 계속해서 기억을 이어나갔지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몸을 돌려서 계산대 쪽으로 가버리는 거야, 아무 말도 없이. 기분 나빠진 건가 하면서 혼자 주눅 들어 있었는데 네가 수건 몇 장이랑 큰 담요를 한 장 들고 나왔어. 그리곤 맑게 웃어 주면서 말했었지. “일단 이걸로 대충 닦아 봐요. 그렇게 젖은 옷은 드라이기로 아무리 말려도 안 마를걸요??”라고, 쭈뼛쭈뼛하면서 받아들고선 얼굴의 물기 먼저 닦았지. 수건에 얼굴을 묻자마자 올라왔던 자몽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넌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뒷목을 잡고선 네 쪽으로 훅 끌어당겼어. 너의 가냘픈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질거렸어. 씁쓸한 약냄새가 코끝을 스쳐지나갔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넌 그렇게 한참동안 내 귀를 간질이다 다시 환하게 웃으며 날 놓아주며 말했지
-이 냄새 진짜 좋아, 다른 여자들이 이 향수 안 썼으면 좋겠어. 이 냄새 맡을 때마다 계속 네 생각난단 말이야.
네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너한테 물었어.
-이 냄새가 그렇게 좋아? 나 이제 향수 바꾸려했는데, 자몽은 어려 보이려 애쓰는 것 같아서 이제 싫어.
내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너는 그 검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어색하듯 바라보니까 빙긋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
-네 냄새라서 좋은 거야, 무슨 향이든 다 좋아.
그 바보 같은 웃음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말했어.
-뭐야 그게 바보 같아, 그럼 내가 담배연기 풀풀 풍기면서 와도 좋아할 거야??
고민하듯 찡그려지던 미간이 이내 펴지며 환히 웃었어.
-그럼 네가 다른 냄새가 좋아질 때까지 향수가게 데리고 다니면 되지,
뿌듯한 표정을 짓는 네가 너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었어.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속삭인 목소리에 너도 빙긋 웃었어.
-맞아, 그때도 이렇게 네가 내 머리 쓰다듬고 있었지, 정확히는 수건으로 내 머리를 닦아준 거였지만.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추억을 끄집어냈어.
-기껏 수건까지 가져다 줬는데 말이야, 물기도 제대로 못 닦을 줄 누가 알았겠어. 머리는 닦을 생각도 안했었지 너?? 아무리 몸을 열심히 닦아도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옷이 계속 다시 젖었는데.
-진짜 그땐 아무 생각도 없었어. 그냥 너무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빨리 닦고 뭐라도 사서 나가려고 했었지.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로 닦고 있었는데 계산대에 서있던 네가 한숨을 쉬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수건을 빼앗아가서 난 엄청 당황했었다고,
그 말에 내가 내 기억들을 덧붙였어
-봄이라 해도 그날은 유달리 춥던 날이라 금방 감기 걸릴 텐데 미적미적 닦고 있으니까 답답하지 안 그래??
내가 동의를 구하듯 너를 바라보니까 너는 내 말이 다 맞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어.
-그래도 내가 열심히 닦아줘서 금방 다 닦였잖아. 키 차이가 너무 나서 내 팔이 너무 아프긴 했었지만.
-네 손이 엄청 빨랐었지
너는 조용히 속삭였어,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날 보며 환히 웃었지.
-그랬어서 다행이야, 네가 조금만 더 오래 내 머리를 말려줬다면 뭔 일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음흉한 표정을 지어내는 네 목소리가 너무 순진무구해서 피식 웃었어. 네가 덧붙였지
-자몽향기가 그렇게 아찔하게 느껴질 줄 누가 알았겠어, 끌어안고 싶어졌다니까 갑자기.
장난 어린 표정으로 “그때 확 안아버릴 걸 그랬나.” 라며 중얼거리는 너의 볼을 콱 꼬집어버렸어. 아픔에 칭얼대는 널 흘겨보듯 바라보며 말했지
-안기면 안아준대?? 내가 요즘 얌전히 춤만 춰서 까먹은 모양인데, 나 주짓수 퍼플벨트인거, 잊었어?? 자몽향 맡으려다 바닥에 패대기쳐졌을걸??
슬쩍 볼을 놓자마자 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네가 날 째려봤어. 그리고 삐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지
-그냥 장난이지 장난, 나 그렇게 변태 아니거든??
그 모습에 쪽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가 꼬집었던 볼에 입을 맞췄어, 가뜩이나 붉어진 볼이 더 붉어졌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슬쩍 몸을 뒤로 빼는 네 모습에 내가 싱긋 미소 지었어,
-심술궂어……,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리는 네가 너무 좋아서 네 얼굴을 가린 두 손에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어,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내 손을 따라 끌려 내려오는 손 사이로 보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나도 모르게 깔깔 큰 소리로 웃어버렸지. 그 소리에 넌 터져버릴 것 같이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오르며 다시 얼굴을 가리려 손에 힘을 줬어. 나도 널 따라 손에 힘을 주고선 네 손이 못 올라가게 막아버렸지. 장난스럽게 너에게 물었어.
-우리 현이 감기 다 안 나았나보네, 얼굴이 후끈후끈해.
-누구 때문인데……,
고개를 돌려버리며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네가 순간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황급히 너를 달랬어. 다행히 금방 풀어져선 다시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널 보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지. 창밖을 보니 벌써 밤이 되어 있었어, 잠깐 죽만 전해주려던 게 너무 늦어져버리자 한숨을 쉬며 일어났어.
-가는 거야??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애달프게 날 바라보는 네 시선에 피식 웃으면서 시간을 확인했어. 어차피 버스도 다 끊겨버렸을 시간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너의 옷장에서 네 잠옷을 꺼내들었어. 그리고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너에게 말했지.
-이 늦은 시간에 내가 집까지 걸어가길 원하는 거야??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너에게 기다리라 하고선 화장실로 들어갔어. 한 화장은 없었지만 하루 종일 쌓였을 먼지가 찝찝하게 느껴졌어. 머리를 올려 묶고 막 물을 틀려는 순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어. 언뜻 보이는 익숙한 이름에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지. 전화가 끊기고 다시 울리는 메시지 알림 음에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확인했어.
너 어디야
진짜 정신 나갔지
전화 받아
상 치르고 싶은 거야?? 그 상태로 어딜 나가 나가긴
-말 안 해도 아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껐어, 점점 심해져오는 가슴 통증에 알약을 꺼내 삼켰어. 끊임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물에 얼굴을 묻었어. 끊어내야 하긴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어. 오늘 만큼은, 아냐 오늘이어야했지만. 그랬지만. 오늘 밤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내 심장에게 변명했어.
-지금 말해도 집에도 못갈 텐데. 나 집엔 가야할 거 아냐
아무도 못 들을 혼잣말을 내뱉고선 난 다시 물속에 내 얼굴을 묻었어. 얼굴을 구석구석 과할 정도로 닦아내고서야 달아오른 얼굴이 진정이 됐어. 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고 화장실을 나서자 기다리다 지쳐 잠들어버린 네가 보였어. 나도 모르게 풀어지는 긴장감에 네가 깨어버릴까 일부러 조심조심 걸었는데 어느새 깨어버린 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지. 왠지 모를 미안함에 얼른 걸어가서 침대에 앉았어. 네 온기가 침대 전체에 가득했지.
-얼른 자
이불을 꼭꼭 덮어주며 등을 토닥였어. 며칠을 잠을 설쳤다는데, 괜히 방해하기 미안했어. 잠에서 깨려고 억지로 눈에 힘을 주는 네 모습에 또 웃음이 터져버렸어.
-뭐가 웃겨……, 내가 웃겨??

비몽사몽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네 모습에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어주다 네 손을 꼭 잡았어. 졸려하면서도 헤실헤실 웃어버리는 네 모습에 순간 흔들렸지만 심장이 욱신욱신 아파오자 정신을 차렸어. 내일은 우리가 헤어져야 했어. 헤어질 날이었어.
나는 그 순간을 되새겼어. 우리가 평생 함께해야할 이유가 아닌,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들은. 그날, 그 시간 속의 그 순간을.
나는 진료실의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검사에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가 내 귓전에 울렸어.
-암이에요.
순간 코끝을 찔러오는 소독약 냄새 덕에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오는 걸 부여잡으면서 다시 물으려는데, 잔잔한 담담 의사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진료실 안을 울렸어.
-폐암 말기에요. 여기 보이시죠??
레이저 포인터를 따라 고개를 돌렸어. 벽에는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사진이 걸려있었고, 내 이름이 적혀있는 내 폐 사진에는 이것저것 흉한 덩어리들이 붙어있었지. 믿을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의사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안 그래도 아픈 내 가슴을 찔러왔어.
-지금 전이가 많이 된 상태라서 수술이 어려울 수 있어요. 차트에는 비흡연자라고 되어있던데, 정말 비흡연자 맞으시죠?? 비흡연자분이 이렇게까지 증상이 심각한 경우는 흔치 않거든요. 폐암이 증상 없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지만 이정도면 꽤 증상이 심하셨을 텐데……, 정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셨어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소리라도 버럭버럭 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내 머리가 너무 차분하게 느껴졌어. 아마 예상하고 있던 거겠지. 요즘 너무 행복했으니까.
-치료 받으면 얼마나 살 수 있어요??의사선생님의 표정이 굳어졌어.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셨지
-선생님 저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울려나왔어.
-수술이 성공적으로 된다 해도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재발 가능성도 높고요.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바로 항암치료 들어가고 수술 들어간다면 최소한 1년, 아무런 치료 없이 방치하시면 3달 남짓일 겁니다. 진통제로 버티시기도 점점 어려워지실 테고요. 치료일정 잡으시겠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 현실이 아닌 것 같았어. 이제 겨우 행복해지려 했는데, 다시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똑바로 마주봤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지
-저 치료 안 받을게요 선생님,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던 것 같아.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소리가 진료실 안을 울렸어, 그리고 목소리가 내게 말했지.
-진통제는 일단 한 달 치 처방해드릴게요, 일단은 하루 3번이지만 아프지 않으실 때는 안 드셔도 되고요, 아프실 때마다 드시는 것도 안 됩니다. 약이 독하니까 밥도 꼭 챙겨 드시고요. 시한부 판정 받고 나가셔도 건강해지셔서 돌아오시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자연 치료법도 좋으니까요, 최대한 매연들 피하시고 여유가 되시면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시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그 뒤로도 뭔가 말씀하신 것 같았는데 기억은 나질 않아. 그냥 얌전히 처방전 받고, 진통제 받고, 평소처럼 버스타고 집에 와보니까 어느새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어. 나 많이 억울했나봐. 근데, 근데 말이야. 내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보다 더 슬펐던 건. 나 진짜 아무에게라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연락할 사람이 없더라. 생각나는 건 너였는데 너에게 연락을 할 순 없었어. 알잖아, 나 어릴 때부터 신기할 정도로 감이 좋았던 거. 너에게 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잘 느껴져서. 잘 떠올라서. 너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어. 그날 그냥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지. 새삼스럽게, 일찍 죽어버린 엄마가 원망스러워졌어.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 잠은 오지 않은데 밤은 너무 길었지. 나도 모르게 계속 뒤척거리니까 네가 잠에서 깼어, 비몽사몽 정신도 제대로 못 차렸으면서
-왜 안자아?? 빨리 자……, 피곤하면 안 돼…….,
내 걱정만 하는 널 보니까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널 두고 나 혼자 가지,
생각만 더 깊어졌어, 서로의 손에 손가락을 걸고 했던 그 약속, 우리의 앞날이 영원할 거라는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으려나봐. 우리에게 영원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나 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는데 억지로 닦아냈어. 계속 끊임없이 흘러서 슬며시 침대에서 일어났어, 어느새 쫓아와 내 옷자락을 붙잡는 손을 조심조심 풀어내며 속삭였어
-어디 안 갈게, 자고 있어.
그 말 한마디에 안심이 된 건지 사륵 풀리는 손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숨어버렸어. 변기에 쪼그려 앉아 숨죽이고 울어야하는 내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어. 왠지 모르게 목이 갈라지면서 기침이 나왔어, 쿨럭쿨럭 소리가 비집고 밖으로 나가서 너를 깨울까봐 입으로 막아가며 겨우 기침을 삼켰어. 기도를 가르며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을 뱉어내니까 어느덧 내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어, 고통의 흔적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어.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입술을 짓씹었어. 세면대를 타고 내려가는 붉은 선혈들이 내 미래일 것 같아서 무서워졌어. 내 눈물로 피를 씻어내고 나니까 눈가가 너무 흉하게 부어올라있었어. 찬물로 겨우 식혔는데 고이 잠들어 있는 네 모습을 보니까 다시 눈물이 흘렀어.
-어떡해 현아?? 응??
이미 잠들어버린 너에게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했어. 한참을 그렇게 널 보며 숨죽여 울다가 겨우 자리에 누웠어. 나도 모르게 감긴 눈에 또 다른 밤이 찾아왔어. 문득 눈을 떴을 때, 너는 날 보며 웃고 있었지.
-잘 잤어?
너의 물음에 나는 그냥 피식 웃었어. 그리고 손을 뻗어 널 끌어안았어. 훅 딸려온 네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질였어. 두근두근 거세진 너의 심장소리가 내 심장을 울려왔어.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전해져오는 통증에 나는 몸을 일으켰어, 네 손이 내 옷자락을 꼭 쥐자 나는 그 손길을 풀어내며 말했어.
-씻고 올게,
너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이내 내게 빨리 다녀오라고 말했어. 나는 슬며시 웃어주고선 방을 나섰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밀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어, 위험했어, 더 있다간 오히려 너에게 상처를 줄 뿐일 텐데. 뜨거운 물줄기가 내 온 몸을 감쌌어, 바닥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수증기가 찬 공기만 맴돌던 욕실을 가득 메웠지. 몸을 다 씻고 나서도 김이 서린 거울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물을 끄고 나왔어.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와 보니 네가 드라이기를 꺼내들고 기다리고 있었지.
-네가 말려주게?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너를 보면서 나는 네 앞에 가서 앉았어. 위잉 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적당한 바람이 기분 좋았어. 머리칼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네 손가락이 기분 좋았어.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머리만 말리다가 너는 내게 말했어.
-어제 잠은 잘 잤어?? 좀 설치는 것 같던데
-아아 베게가 내 베게가 아니라서 그래, 내가 베게에만 좀 예민하거든.
-흐음 그렇구나.
그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흘렀어. 이때야. 지금 꼭 말해야 해. 속으로 담아둔, 그동안 연습해왔던 한 마디를 꺼내려는 순간 너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왔어.
-슬아, 우리 결혼할까?
순간 몸이 굳었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도 말해야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어. 드라이기 소리마저 울리지 않는 방엔 음산한 침묵만이 맴돌았어. 너는 한숨을 쉬더니 다시 드라이기를 켜서 머리를 말렸어. 위잉 소리가 방 안을 울렸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어. 네가 머리를 다 말리자마자 어떻게 방을 나서긴 한 거 같은데. 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아. 나는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어. 버릇처럼 불러준 주소로 달려가자마자 지연이가 날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지연이에게 된통 혼나야 했어. 지연이가 말했지
-너 진짜 제정신이야?
라고. 나도 알아,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욕심내면 안됐던 거였는데 또 욕심을 내버린 거야.
-한슬! 제발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그렇게 미련하게 버틸 거야?
나는 혼이 나간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어.
-현이가 나랑 결혼하재
지연이가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어.
-뭐? 뭐라고?
나는 다시 말했지, 또박또박 한자 한자에 힘을 실어서.
-현이가 나랑 결혼하재.
지연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어. 나는 그 손길에 이끌려 정처 없이 흔들렸어. 머리가 뱅글뱅글 어지러웠어. 욱신욱신 아파왔어.
-야 한슬! 설마 알겠다고 한 건 아니지, 설마 알았다고 했어? 결혼 하겠다고?!!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어. 지연이의 손이 스륵 풀려 떨어졌어. 지연이는 머리를 마구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어. 그리고 말했어.
-당장 가서 말해.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어. 있는 힘껏 저었지. 지연이가 계속 내 손목을 잡고 끌었는데 내가 온 힘을 다해서 뿌리쳤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심장을 찔렀어
-말 안하면, 그냥 결혼이라도 하게? 숨긴 채로 살게? 그 애도 알 건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래도 남친 인데. 3년을 만났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어.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었어.
-내 입으로 말 못해, 어떻게 말해. 지 잘못도 아니면서 후회만 할 거 뻔히 아는데, 자기 탓으로만 돌릴 게 뻔히 보이는데……,
그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제 멋대로 흘러내렸어.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어. 결국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어. 안 그래도 아프던 가슴이 더 찢어질 듯 아파 와서 숨이 안 쉬어졌어. 너무 아파서 바닥에 나뒹구니까 지연이가 알약 몇 개를 가져다줘서 생으로 씹어 삼켰어. 찬 냉수를 몇 잔을 들이켜도 입 안에 쓴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어. 지연이가 다시 말했어.
-말 안 할 거면 헤어지기라도 하던지
나는 힘없게 고개를 들어서 지연이를 바라봤어. 지연이는 다시 거칠게 한숨을 쉬더니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어. 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하나 건네주더라.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라이터로 겨우겨우 불을 붙여서 쭉 빨아들었어. 처음 경험해보는 매캐한 연기가 기도를 타고 내려갔어. 목이 쓰라리게 아파오는데 하나도 안 아팠어.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주룩주룩 눈물만 흘렸어. 계속해서 눈물만 흘렸어. 끊이지 않는 불이 필터까지 다 태워버릴 때까지.
폐암 말기래. 참 어이없게도 내가 그 병에 걸렸다더라. 매일 담배만 피우던 아빠도, 그 옆에서 끈질기게 버텨오던 엄마도 안 걸렸는데, 평생 담배 한번 안 피워본 내가 그 병에 걸렸다더라.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럴 힘도 안 나왔어. 어쩌면 이미 눈치 채고 있었을지도 몰라, 평생 담배연기를 피하며 살아왔어도 말이야.
솔직하게 말했으면 달라졌을까? 너는 여전히 날 보며 웃어주고 있겠지. 다만 내가 병실에 누워있고, 너는 내 옆에 앉아 있겠지. 내가 아픈 걸 알면 너는 네 아픔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며 떨쳐내고 일어날 거야, 하루 종일 내 손만 잡아주겠지. 내가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차가워진 내손에 핫팩을 들려주겠지. 너는 그런 애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왔어,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눈물이 계속 흘렀어, 날 따뜻하게 안아주는 지연이가 있었지만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보였어, 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어. 절대, 절대.
-더 오래 끌면 더 힘들어질 거야
지연이의 목소리가 내 아픈 심장을 찔러왔어. 말해야지 말해야지, 용기를 냈는데 용기가 나지지 않았어. 3년이란 긴 시간을 지워버리기엔 3달은 너무나 짧은데, 하늘은 날 도와주지 않았어. 도와주지 않겠지.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어, 끊임없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어. 나는 너를 밀어내야 하는데, 너는 한결같이 내게 다가왔어
-마셔
한참을 그렇게 머물러 있었나봐. 뜨거운 머그잔에서 나오는 온기가 손을 타고 온 몸에 퍼지는 것 같았어. 호호 입김을 불어 억지로 물을 식혔어. 미적지근해진 물을 겨우 삼켰지.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겨우 핸드폰을 다시 들었어. 주소록을 찾지 않아도 거침없이 눌러지는 키패드에 문득 몸이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전화를 걸었어.
-딸깍, 슬이 남편입니다, 무슨 볼일이시죠??
통화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보나마나 핸드폰만 부여잡고 있었을 네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계속 울려왔어
-여보세요?? 슬이야, 슬아?? 무슨 일 있어??
눈가가 뜨거워졌어. 약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슴이 다시 욱신욱신 아파왔어. 네 목소리가 다시 날 흔들기 전에 얼른 굳어진 입술을 움직였어.
-스ㄹ…….
-우리 그만하자
수화기 너머로 굳어진 네 얼굴이 보이는 듯 했어. 놀랄 때마다 버릇처럼 갈라지는 목소리가 어김없이 울려왔어
-싫어
-헤어지자 현아
-싫어……,
떨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어. 더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았어.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꼭 쥐었어. 일부러 차갑게 내뱉어버렸어.
-지금까지 너한테 받은 것들, 내일 택배로 보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돌려주지 마……, 안돌려주면 안 돼??
너는 어느새 펑펑 울어버리고 있었어. 겨우 숨을 삼키며 내뱉는 목소리가 아프게 날 찔러왔어. 그 목소리로 나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내 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내가 남길 건 추억뿐이야. 더 질질 끌면 추억도 못 남겨.
-슬아……, 슬아……,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네 어깨가 눈에 선했어, 달려가서 끌어안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지마 응? 갑자기 왜……., 아냐 그냥 내가 다 미안해, 미안하니까……, 우리 만나서 이야기해. 만나자 지금. 내가 갈게. 너에게 갈게.
순간 모든 생각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어서 다리가 근질근질 해왔는데, 벌떡 일어나기 까지 했는데, 욱신거리는 심장 덕에 정신을 차렸어. 부들부들 떨리는 휴대폰에 한 단어를 전해 보냈어.
-미안
뚝 소리와 함께 너의 소리가 끝났어. 힘이 풀린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떨어졌어.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외면했어, 나도 모르게 뻗어가는 손을 지연이가 막았어. 우웅 진동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꺼졌어. 뚝, 기억이 끊겼어.
몇날 며칠을 텅 빈 껍데기로 지냈어, 눈을 뜨고 제때 약을 먹고, 제때 밥을 먹고, 제때 자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니까 네가 보고 싶어졌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어. 담배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던 지연이가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 내가 신발장에 다가서자 지연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낚아챘어, 팔이 아픈 걸 느낄 새도 없이 쿵 엉덩방아를 찧었어. 아프더라. 가슴도, 팔도, 엉덩이도, 다 아파서 신발장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어. 한참을 그렇게 울었어. 묵묵히 내 등을 두드려주던 지연이도 울었어.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야 우리가 이별했다는 게 실감이 났어, 내가 널 끊어냈다는 게 느껴졌어. 우리가 끝나버린 게, 다신 널 볼 수 없단 걸 깨달았어.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지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눈을 떴어, 겨우 몸을 일으키자마자 책상에 앉았어. 오래전부터 모아오던 편지지를 꺼냈어. 뭐라도 써야했어. 뭐라도 남겨야했어. 미친 듯이 종이를 채워나갔어. 텅 비어있던 휴지통에 하나 둘 구겨진 종이들이 채워졌어.
뭐라고 시작해야할까, 안녕이란 말을 할 순 없었어, 뭔가 우리의 미래가 남아있을 것 같아 보이잖아. 수많은 단어들이 생각났지만 하나도 적을 수가 없어서 겨우 네 이름을 적었어.
-이현. 앞으로 이 이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아 현아.
고작 한 줄을 썼을 뿐인데 눈물이 너무 흘러나와서 편지지를 치웠어. 미친 듯이 울다가 다시 편지지를 꺼내 이어 썼지.
-나쁘게 말해서 미안해.
문장들이 끊겨갔어, 뭐라고 말해야 네가 날 이해할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그 가련한 여주인공의 모습이 내가 되자 겨우 이해할 수 있었어. 내 비참한 마지막을 너에게 보일 순 없었어. 그 모습까지 보인다면 넌 절대 날 떠나지 못할 걸아니까. 평생을 후회할 걸아니까
-그렇게 차갑게 널 밀어내놓고 다시 이렇게 널 붙잡아서 미안해.
손가락이 욱신거릴 때까지 편지를 썼어. 눈물이 흐르든 흐르지 않던,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어.
-너의 맑은 웃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어. 어두운 창밖으로 눈이 끊임없이 내렸어. 뭔가에 홀린 듯이 창가에 다가서니까 네가 보였어. 고개를 들어 올린 너와 눈이 마주쳤어. 상처받은 네 눈동자가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어. 손이 부득부들 떨려왔어. 삑삑 현관소리와 함께 들어온 지연이와 눈이 마주쳤어 뭐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밖에 지연이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더니 밖으로 나갔어. 실랑이 소리가 들리더니 지연이 혼자 문을 열고 들어왔어. 네가 문을 뚫고라도 들어오길 기대했나봐. 그랬다면, 네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걸 털어놓았을 텐데. 날 기억해달라고 애걸했을 텐데, 네가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돌려서 집 안으로 들어갔어. 세수도 안하고 양치도 안한 채로 침대에 누웠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어. 뜨끈한 온기가 원망스레 내 폐를 쿡쿡 찔러 들어왔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너는 집 앞에 서있었어. 망부석처럼 한참을 서 있다가 지연이가 화를 내며 나가면 떠돌이 개처럼 쫓겨났지. 고마우면서도, 두근거리면서도,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
홀로 남아있던 시간동안, 그 외로웠던 순간들 속에서 난 네가 보고 싶어질 때 마다 글을 썼어, 손가락에 굳은살이 잡혀버렸어. 이젠 네가 안 좋아할 지도 모르겠어, 손가락이 울퉁불퉁하니까.
-나 좀 있으면 죽는다더라. 정말 어이없지,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우리의 영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나봐. 그저 공중에 스러질 꿈같은 것이었나 봐. 깨어나면 사라지는.
여기까지 쓰고 편지지를 접었어. 억지로 걸음을 떼어 침대에 누웠어. 3달, 3달 동안 정리해야 할 게 너무 많았어. 밤을 새워 기억을 쏟아내는 날이 늘어날수록, 먹어야하는 약이 늘어났어, 항암치료 항암치료, 약을 먹는 것도 너무 괴로운데 어떻게 그 치료를 견디는지 상상하기도 힘들었어. 그렇게 빼고 싶었던 살이 쭉쭉 빠져나가니까 이젠 어떻게든 살을 찌우고 싶어졌어. 뭘 먹어도 토해내는 통에 이루진 못했어.
-솔직히 아직 살고 싶어, 살아서 내년의 봄을 보고 싶어. 내년의 벚꽃을 보고 싶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찬란한 사월의 봄을 다시 보고 싶어.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힘들면 힘들다. 곧이곧대로 말했으면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을까? 조금 추한 모습 보이더라도 다 나아서 지금 환하게 웃고 있었을까? 하지만 진짜 아프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어, 평소에 너무 아프게 살아왔으니까. 찌릿찌릿한 통증 따위 느껴지지도 않았어, 속이 너무 곪아버려서. 암도 마음 놓고 자라났나봐.
옷장 안에 처박혀있던 낡은 카메라를 꺼내들었어. 팔에 힘이 없어서 그런지 삼각대에 연결하는 단순한 작업에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 겨우겨우 카메라를 설치하자 밤이 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어. 다음날 일찍 일어나자마자 이빨이 딱딱 부딪힐 만큼 차가운 물로 온 몸을 씻었어. 머리칼이 딱딱하게 굳었어. 너랑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던 화장을 다시 했어. 네가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치마도 입고, 내 마지막 모습이 아픈 환자인건 싫어서. 그래서. 한참을 거울 앞에 머물러 있다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카메라 앞에 앉았어.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갔어. 나의 마지막 시간들을 담았어.
수북이 쌓인 편지지들을 곱게 접어 봉투에 담았어. 그동안 모아놓았던 사진들도 전부 함께, 내 마지막 모습도,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니까 후련해졌어. 해탈이라는 게 이런 걸까
-슬아
나를 부르는 지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어.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집 앞에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어.
-금방 갈게
내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져버렸어.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천천히 나의 흔적들을 담았어. 커다란 봉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앉았어, 소독약 냄새 가득한 병동에서의 일주일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었어. 나 혼자 마무리 할 생각이었어. 띵 맑은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 깜빡깜빡 빛이 들어왔어. 익숙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며 너에게 말을 했지
-기록을 남기는 것도 마지막이야
잠깐의 정적이 흘렀어. 예약시간까지 겨우 1시간 남짓 남았을 뿐이었지.
-네가 이 영상까지 볼 때면, 나는 이미 온 세상을 탐험한 뒤일 거야.
억지로 입 꼬리를 밀어 올리며 웃었어. 목소리가 떨렸어
-평생 꿈이 죽어서야 이루어진다니까 조금 슬프네.
고개를 들어 지연이를 바라봤어, 변함없이 부드러운 눈빛이 나를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어. 용기를 내서 다시 카메라를 바라봤어.
-마지막까지 고집 부려서 미안해. 내 몫까지 행복해지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불가능하단걸 나도 아니까. 하지만 적어도, 언젠가는, 단 하루만이라도. 나를 잊고 행복하게 웃는 날이 있었으면 해. 나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생겼으면 해. 너는 바보니까, 금방 잊을 수 있을 거야.
문득 속에서 다시 울컥하고 올라왔어. 꾹꾹 눌러온 진심이 밀려올라왔어. 다시 터지려는 울음을 꾹 누르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어.
-사실 날 잊지 말아줬으면 해, 사실 죽는다는 거 엄청 무서워, 나. 금방 잊혀질 것 같아서. 왠진 모르지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금 너무 무서워.
뜨거운 감각이 부드럽게 볼을 타고 내려갔어.
나를 재촉하는 지연이의 손이 보였어.
-나 이제 가야해, 이런 영상도 이제 마지막이야. 네가 너무 힘들어하면 전해주라고 지연이한테 부탁해놨어, 지연이 약속 꼭 지키는 거 알지? 난 이 영상이 너에게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너에게 간다면,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날 위해서 제발 행복해줘.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 구겨진 치맛자락을 곱게 폈어. 그리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어.
-안녕
나는 천천히 카메라를 껐어, 익숙하게 메모리카드를 꺼내서 봉투 안에 넣었어. 3년이 이렇게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시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폴을 잔뜩 칠해서 단단히 닫아버렸어. 큰 봉투 안에 다시 넣고, 더 큰 봉투 안에 다시 넣었어.
-이젠 진짜 안녕이네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흐트러지려는데, 익숙한 메아리가 울렸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서 봉투를 놓쳐버렸어.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아버렸어.
-안녕
네 목소리가 텅 비어버린 날 울렸어.

*
*
*
옛 글을 올리는 대신 2개의 글을 올려요. 6월에 올릴 두번째이자 마지막 글인 '안녕'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글틴에 올리는 이야기는 다 하나같이 우울한 이야기 뿐인 것 같네요. 요즘엔 나름 즐거운 이야기도 많이 쓰고 있는데. 아마 몇 년 전의 저는 꽤나 불행했었나봐요. 아니면 공감능력이 뛰어났던지. 이 글 역시 조금 오래 된 글이지만 그저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래요. 이왕이면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식상한 고민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면, 새로운 글로 찾아올 수 있겠죠. 그럼 그때 다시 뵈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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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안에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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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녀인 마냥 변덕스러운 바람이 이내 싸늘한 기운을 몰아온다.

온몸을 감싸 안는 서늘한 바람에 너는 몸을 부르르 떤다.

휘청, 순간 잃어버린 중심에 너는 서둘러 너의 두 발에 힘을 준다. 너는 발가락이 얼어 불그스름한, 너의 조그마한 맨발이 꽉 찰만한 좁은 공간에 올라서있다, 너는 그 맑은 두 눈동자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새벽을 바라본다. 하얀 눈 사이로 서서히 올라오는 주홍빛 새벽 놀을 바라본다. 다시 한 번 얇은 너의 옷자락을 휘날리는 바람에 너는 다시금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너는 두 손으로 추위에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는다.

"춥다……,"

갈 곳을 잃은 너의 목소리는 차디찬 바람에 흩어진다. 문득 느껴진 공백에 너는 주위를 둘러본다. 하늘을 가득 메운 눈보라 사이로 익숙한 보라색 슬리퍼가 보인다. 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깃든다.

너는 말한다.

"왜 그렇게 서있어??"

그러자 보라색 슬리퍼가 움찔거린다. 너는 일부러 큰 원을 그리며 몸을 돌린다. 디딜 곳을 잃은 발이 허공으로 꺼진다. 다급한 발자국과 함께 사라진 보라색 슬리퍼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너의 얇은 옷자락을 끌어당긴다. 탁, 너의 맨발이 시멘트에 거칠게 부딪힌다. 얼어버린 두 발에 둔탁한 통증이 밀려들어온다. 왠지 모를 즐거움에 너는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를 낸다. 너의 옷자락을 잡은 익숙한 손길이 부르르 떨린다.

"춥지 않아?? 양말도 안 신었잖아."

네가 말했다.

"잠바도 없이 돌아다니는 너보단 안 추워"

눈보라를 뚫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너는 다시 맑은 소리로 웃는다.

"거짓말"

너는 이어서 말한다.

"나보다 추위 훨씬 많이 타면서"

보라색 슬리퍼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도 난 눈보라에 갇혀있지 않잖아"

다시금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미 꽁꽁 언 뺨이 차갑다 못해 아려온다. 눈발은 휘날리지 않는다.

"그렇지"

너는 두 팔을 펼친다.

"나의 계절은 겨울이지"

어딘가에 있을 따스한 손을 찾아 차갑게 얼은 너의 두 손을 내민다.

"너의 계절은 여름이고"

갑작스레 만난 온기에 사르르 너의 두 손이 녹아간다. 뻣뻣하던 관절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보라색 슬리퍼의 손을, 아니 재민의 손을 움켜쥔다.

"그런데 이 세상의 계절은 봄이야"

언젠가 거울에 떠오르던 너의 미소를 생각하며 너는 활짝 웃는다.

"왜일까?"

탁, 너는 다시 재민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그러지 마"

재민의 목소리가 너의 귓전을 울린다.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 있는 물기 섞인 목소리.

"왜 나는 겨울에 머물러있는 걸까?"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가 너의 두 발을 얼린다. 목소리가 떨린다.

"나도 너처럼 여름이고 싶었는데"

다시금 얼어가는 손을 움직여 얼굴을 가린다.

“나도 너처럼 봄을 보고 싶었는데”

너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린다. 이윽고 너의 손은 재민의 손에 힘없이 끌려 내려간다. 멈춘 채 움직이지 않는 흰 눈송이 사이로 너를 닮은 갈색 눈동자가 보인다. 너는 온 힘을 다해 뿌리치며 날카롭게 소리 지른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마!!"

정적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너는 쥐어 짜내듯이 소리친다. 너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섞인다.

"그딴……, 눈으로 날 보지 말라고!!"

"내 눈이 어떤 눈인데"

재민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너는 다시 그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니 노려보며 말한다.

"그 눈, 그 눈!! 내가 불쌍해 미치겠다는 눈,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 왜 그딴 눈으로 날 보는데? 너의 눈에 담겨있던 여름은 어디로 흩어지고 왜 동정이 담겨있는 건데?? 어!?!!?"

깜빡, 갈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런……,"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끊으며 너는 다시 울부짖는다.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모든 게 사라진 지금 내가 너한테 그딴 시선이나 받아야겠어?? 네가 수백 번이나 내뱉었을 그 말대로 네가 날 사랑했다면, 이해했다면!! 그딴 눈으로 날 보면 안 되는 거지, 그런 식으로 보면 안 되는 거지!!!"

굳어버린 손 마디 마디가 억지로 움직이며 둔탁한 비명을 내지른다. 눈에 파묻힌 재민의 가슴을 너는 사정없이 내리친다.

"미워, 미워 죽겠어!! 곁에 있어준다고 했으면서, 이 눈보라 속에 버려두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네가 너무 미워, 그 사라진 너를 찾아내지 못한 내가 증오스러워,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이런 지옥을 겪기 전으로 돌아가서……, 돌아가서!!"

또르르 너의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방울을 느끼며 너는 고개를 들어 갈색 눈동자를, 아니 눈 속에 묻힌 재민을 바라본다.

"죽어버리고 싶어"

너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하염없이 흐느끼며 말한다.

"이런 나를 사랑해??"

다시금 정적이 텅 빈 옥상을 휩쓴다. 너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이젠 질릴 만도 하지’

너는 너의 손안에 가득 쥐여진 폭신한 촉감을 놓아버린다. 방금 전까지 너의 발로 가득 차있던 공간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간다.

"사랑해"

재민의 목소리가 너의 발목을 잡는다. 저벅저벅 슬리퍼 소리가 너의 귓가에 울린다. 너는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억센 두 팔에 붙잡혀버린다. 익숙한 숨결이 너의 귓등을 타고 흘러간다.

"사랑해"

너는 날카롭게 세운 손톱으로 너를 잡은 억센 팔을 쥐어뜯기 시작한다.

"하지 마"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재민의 굳센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점점 더 너를 옭아맨다. 달콤한 사랑의 고백이, 재민의 여름이 끊임없이 너의 귀를 울린다. 등으로부터 타고 올라오는 온기에 너는 소리 지른다.

"그만해!!!"

너의 하얀 목에 찾아온 익숙한 온기에 너는 다시금 굳어버린다. 그 온기는 목에서 목으로, 귀로, 어느새 돌아간 고개의 볼로, 이마로, 너의 눈동자로 옮겨간다.

"사랑해 설희야"

뜨거운 물방울이 끊임없이 너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익숙한 온기는 물방울을 찾아 너의 얼굴 여기저기를 흩어내린다. 따스한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즈음, 너는 눈을 뜬다. 여전히 너는 눈보라 속에 서있다. 재민이 뜨거운 여름의 소년이라고 해도. 너의 눈보라는 멈출 수 없을 터였다. 애석하게도, 재민보다 네가 먼저 그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두 팔에 힘을 실어 재민을 밀쳐낸다. 얼었던 두 발이 다급히 움직이며 너는 바람 위에 올라선다.

"설희야!!"

너는 재민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눈을 감는다. 녹았던 몸이 다시금 추운 바람을 만나 부들부들 떨린다.

"설희야 그러지 마"

물방울은 끊임없이 떨어져 너의 발에 낯선 온기를 가져온다.

"그러지 마 설희야"

너는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는다. 네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로.

"어쩌겠어, 내가 서리인걸."

"……, 뭐?"

너는 깊게 들이쉰 숨과 함께 몸을 돌려 재민을 향한다. 돌아가는 시선 사이로, 하얀 눈송이 사이로, 아니. 세상을 감추는 너의 반점들 사이로 분홍빛 벚꽃나무가 스쳐 지나간다. 너는 말한다.

"벚꽃이 피었으니 서리는 녹아질 차례야"

"야 잠깐……, 설ㅎ……,"

너는 크게 한발 뒤로 내딛는다. 허공 속으로 너의 발이 빠져 들어간다.

"안녕"

너의 팔을 향해 뻗어오는 재민의 손을 뿌리친다. 차가운 바람이 너의 귓등을 때린다. 발을 내딛는 그 순간, 너는 생각했다.

‘이제 진짜 끝이네,’

울부짖는 재민의 목소리가 너의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너는 정신을 잃었다.

*
*
*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 이런 상상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겨울로 보이는 병에 걸리면 어떨까??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볼 때의, 그 시선으로 모든 계절을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라는,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는 상상이죠. 새로운 작품을 올려보고 싶었지만 바쁜 고3이라는 핑계로 다시 예전의 작품을 올려봅니다. 그 작품에서 추가적으로 첨삭은 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미완이지만, 앞으로도 더 써나가야 할 테지만. 3년 묵은 상상이 문득 그리워져서 여기에 내어놓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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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알같은 벚꽃잎이
펑, 펑.
싱그러운 봄바람에 휘날리면
밤같은 머리칼엔 은하수가 펼쳐지고
녹아진 대지에선 초록빛 설렘이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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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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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제

빈 공간에 꾸역꾸역

욱여넣는다

 

흘러가야할 슬픔이 차오른

공허했던 마음은

 

이리 출렁, 저리 출렁

의미없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계속해서 차오르는 가슴에

 

 

숨을 참는다

 

목구멍을 넘어 코를 지나

눈 밑까지 올라온 절망은

 

작은 구멍 하나 찾아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우우우 우우우우

 

비어가는 심장이 소리 지른다

 

텅 빈 방에 가득한 어둠을 밀쳐내며

저 멀리 울려간다.

 

2,  새벽의 후기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들이

흘러가버린 과거의 옹이들이

쿡,

눈꺼풀 속에 박혀와

오늘의 하루를 막는다.

 

3,  사랑에게

 

사랑, 그대는 빛나고

사랑, 그대는 아름답다.

사랑, 그대는 번뜩이며 따스하고

사랑, 그대는 부드러우며 차갑다.

사랑, 그대가 부르는 노래는

사랑, 그것을 잃은 이들을 울린다.

 

4, 무제

 

시간은 흐르고 추억도 흐른다

희망을 잃은 어린 아이의 울음도

차디찬 핏빛 강을 따라 흐른다

스러진 생명의 불길을 머금은 강은

우웅 우우웅 슬픔의 절규를 뱉는다

오늘도 저 검은 하늘엔

하얀 달 하나 둥그러니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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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 밤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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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하늘

저 홀로 빛나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둥실 두둥실 떠올라

세상 천지에

차디찬 빛을 뿌리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구불구불 산 그림자 저 멀리 쫓아내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저 깊고 깊은 산 속,

저 넓디넓은 마을에서

어둠을 틈타 움직이던 흉악한 금수를 드러내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새벽별 뜨기 전

모두가 빠져든 꿈에서 홀로

그래 홀로 나와 우는 장독대의 눈물을 비추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어화둥둥 저 하늘 중심에

떡하니 들어 앉아 온천지를 굽어보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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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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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마음이여

모닥불 같은 사랑은 하지 마라.

 

그대 그 여린 가슴

냉기보다 깊은 상처로 채우고 싶지 않다면

 

찰나의 추위가 두려워

어설프게 피워내지 말 것이며

 

죽어가는 불씨에게

마른가지 하나

넣을 듯 말 듯 애태우지 말 것이며

 

따스함에 취해

순간의 안락함에 취해

눈을 감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추위가 찰나이듯

잠깐의 방심이 찰나이듯

작은 불씨가 온 세상을 집어삼키기도

찰나

찰나이기에.

 

조금 커버린 그댄

더이상 모닥불 같은 사랑은 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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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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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무도 널 깨워주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너의 귀를 가득 메우던 목소리도, 그보다 더 먼저 너의 코끝에서 맴돌던 달큰한 냄새도, 너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손길도, 너의 볼에 짧게 와 닿던 애정 어린 입술도.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낮고 따스한 목소리로, 언제나 다정하게 불리우던 너의 이름도. 애칭도, 그 따스했던 숨결도. 모두 사라져버린 채. 오직 너만이 홀로 남아, 차디찬 어둠 속에 갇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환기를 하지 않아 탁해진 공기가 바싹 말라버린 너의 목을 긁으며 폐로 내려갔다. 너는 거세게 기침을 하며 본능적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물을 찾았다. 침대에서 책상으로, 바닥으로. 정신없이 헤매던 손이 우뚝 멈춰 선다. 어제 물을 떠다놓지 않은 이유를 기억해낸다. 오늘이야말로 너는 죽어야 하니까.

 

스륵, 손에 들어간 힘이 풀리며 자연스레 일으켜졌던 너의 몸은 다시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진다. 너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쉰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비릿한 냄새가 입 안을 맴돈다. 너는 문득 손을 들어 거칠어진 입가를 만져보다 배짝 말라 앙상해진 두 손을 너의 가슴 위에 올린다. 아직까지 끈질기게 뛰고 있는 너의 심장위에 올린다. 눈을 가리면 세상도 사라진다고 믿는 아기처럼. 두 손으로 심장을 가리면 사라질 거라고 믿는 듯이, 멈춰버릴 거라고 믿는 듯이. 꼭꼭 너의 심장을 가린다. 손바닥으로 전해오는 고동이 자장가인 마냥 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너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깜박, 불이 켜진다. 갑작스레 자리를 잃은 어둠은 갈 곳을 잃은 채 흩어진다.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날카롭고 어색한 빛에 너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린다. 다시 깜빡, 어둠이 돌아온다. 너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낮이 사라진 너의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곤 어둠, 슬픔, 공포, 두려움 그리고 어둠, 어둠, 어둠, 흑암뿐이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너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마치 썩어 들어가는 곰팡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자라는 암세포처럼. 천천히, 천천히.

 

그날, 두 개의 불꽃이 바람결에 사그라졌다, 폭설주의보로 마비되었던 교통이 서서히 풀리던 2월의 밤. 화기애애한 저녁식사시간을 흩트리며 울려온 전화 벨소리에 너의 부모님은 얼마 전 새로 산 검정색 차키를 들고 몸을 일으키며 두터운 잠바에 팔을 꿰었다. 어딜 가냐는 너의 투정어린 질문에 살며시 입가에 검지를 들어보이고선 맑은 미소로 집을 나섰었다. 몸을 돌리며 너에게 웃어보이던 순간 허리 언저리에서 풍성하게 찰랑거리던 그 머리카락을 너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막 결혼한 신혼부부인 마냥. 아니 오랜 짝사랑 끝에 마침내 새로 탄생한 초짜 커플인 마냥 조심스럽게 맞잡은 두 손에, 두 얼굴에 어린 맑은 웃음들에 너는

 

“그럼 도넛도 사와! 이번에 새로 생긴데!”

 

라는 짧은 말로 너의 엄마에게, 아빠에게, 잘 다녀오라 손짓했었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후,’

 

너는 공연히 숨을 길게 내뱉으며 생각했다.

 

‘그날 집에 어떻게 돌아 왔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면바지를 입은 채로 장례식장에 가진 않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오직 검은 고철덩어리와 아스팔트에 새겨진 그을음. 그리고 거칠던 검정색 상복뿐이다.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덮는다. 축축한 이불이 너를 부드럽게 짓누른다. 숨이 막혀온다. 숨이 막혀온다. 습한 공기가 너의 목을 타고 흘러간다.

 

그래, 그건 그저 흔한 사고 중 하나였다. 빠르게 찾아오는 밤에 미처 치우지 못한 눈이 얼어 생긴 사고였다. 언덕길에 있던 트럭이 미끄러져 신호 대기 중이던 5대의 차량을 치어버린, 사망자가 5명에 부상자가 9명이던 사고였다. 누구의 잘못도 물을 수 없는 사고였다. 굳이 죄를 묻자면 갑자기 차가워져버린 날씨의 잘못이었다. 야속한 하늘의 죄였다. 늦은 밤에도 양심적으로 신호를 준수한 너의 부모님의 잘못이 아니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핸들을 무리하게 꺾어 전복되어버린 트럭운전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서 TV소리를 덮으며 요란하게 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믿지 못할 말들에 수면바지에 슬리퍼차림으로 다급히 달려 나간 너는, 검정색 고철덩이로 변해버린 차량 앞에 주저앉아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너는 울 수도, 화낼 수도,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너는 그저 너의 도톰한 수면바지가 축축이 젖어들 때 까지 하염없이 그 차디찬 도로위에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

 

‘그 절차들을 오빠가 다 밟았지. 혼자 외롭게 싸워야 했지.’

 

도와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넌 도와줄 수 없었다. 너는 그저 손을 잡고 끌면 끄는 대로, 말을 걸면 말을 거는 대로, 말하라면 말하라는 대로. 그렇게 움직이는 빈껍데기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너는 너를 덮고 있는 두껍고 축축한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킨다. 새삼스럽게 탁한 공기가 목을 타고 흐르자 따끔한 통증이 연이어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본다.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 사이로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이리저리 흩어져 바닥을 가득 메운 물건들 사이로 깨진 유리 조각이 반짝 빛난다. 애석하게도 너는 죽지 못했고 너의 심장은 여전히 끈질기게 요동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른다. 그 날도, 빠르게 흘러갔다. 놓쳐버린 화살처럼, 쌩하니, 쏜살같이.

 

너는 다시 그날을 생각했다. 어두컴컴한 주변 도로, 4차선 도로를 가득 채우던 커다란 등불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를 울려대던 경찰차, 너의 맨발에 느껴지던 차디찬 아스팔트의 감촉, 너를 가로막던 굳센 팔들. 허공을 가르던 너의 목소리, 사이렌 소리, 그리고 차량 안 이리저리 흩어진 형형색색의 도넛들. 눈을 감았다 뜨니 너는 장례식장에 와있었고 2박 3일짜리 장례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검은 상복을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가지런히 빗어 흰 리본으로 묶은 채 너는 기계처럼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너는 장례식장의 입구에 앉아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너조차도 터져 나오지 않는 울음을 끊임없이 터트리는 이름 모를 친척들을 보며, 넓은 객실 구석에 앉아 어디선가 찢어온 종이 한 장을 펼쳐놓고선 인절미도 아닌 떡에 콩고물을 묻히려 노력하던 익숙한 얼굴들을 보며, 너의 앞에 있는 빈 술잔을 끊임없이 채웠다. 목으로 넘어 들어가는 쓰라린 감각 없이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서, 도저히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 느껴보지 못한 취기를 불러일으키려 너는 끊임없이 마시고 또 마셨다. 애석하게도. 엄마를 닮은 너의 신체에 취기가 돌기엔 설호가 술병을 뺏어들기 전까지 밀어 넣은 몇 병의 소주와 맥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너는 쓰라린 속을 쥐어뜯으며 옆은 미소를 띠고 끊임없는 방문객들을 맞아야 했다. 하얀 가면을 쓴 늑대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장례식이 끝난 뒤엔 뭘 했더라.’

 

문득, 토기가 올라왔다. 너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더 비워낼게 없는데도 몸은 계속 비워내길 원했다. 너는 초록색 쓸개즙이 변기물에 쓸려 내려갈 때 까지 한참을 변기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나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핑 현기증이 돌았다. 아직 기억해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그때, 너는 너의 그 얇은 두 손으로 너의 엄마를 닦았다. 중학생 철없던 시절 이후로 처음 보는 엄마의 몸은 이리 저리 찢겨 마치 너덜너덜해진 인형 같았다. 어릴 적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와 감정으로 찢어버린 친구의 곰 인형 같았다. 그제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똑, 얼어버린 엄마의 몸 위로 너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너는 흰 명주 천으로 너의 엄마를 깨끗이 닦았다. 너의 눈물로, 그 따스한 생명의 흔적으로 사그라진 불꽃의 잔해를 말끔히 닦았다. 흰 삼베옷으로 온 몸을 감싸자 창백해진 피부와 흐트러진 흑발이 오동나무 관 뚜껑에 가려졌다. 어릴 적 부모님이 서로 나눠가졌다던 반지와 목걸이는 차마 태울 수 없어 함께 꿰어 너의 목에 걸었다. 두 생명의 중압감이 너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 했다. 검정색 리무진에 관을 실고 화장터에 도착해 관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야 너는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그락, 목에 걸린 반지들이 다시 소리를 냈다. 너는 나직이 되뇌었다.

 

“걱정 마, 잊을래도 잊을 수 없으니까.”

 

너의 목소리는 메아리조차 치지 않는다. 의미 없이 흩어져버린다. 너는 문득, 시계가 보고 싶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너는 주위를 둘러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째깍째깍 소리를 찾아 몸을 일으킨다. 물건 사이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온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한 신음을 삼키며 주저앉는다.

 

‘아파……,’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출처 없는 아픔이 닫혔던 슬픔의 문을 열어젖힌다. 홀로 이겨내야 하는 아픔이 익숙지 않은데 익숙한 감각이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째깍째깍 소리는 계속 너를 부른다.

 

‘하아’

 

떨리는 숨을 내뱉는다. 이윽고 너는 다시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처참하게 깨진 시계가 널 부른다. 시계는 멈춘 채 소리만을 울린다. 두근두근, 마치 너의 심장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초침이 소리를 따라 떨린다. 빈껍데기가 되어 움직이는 너처럼. 너는 무거운 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붉은 발자국이 너의 흔적을 따라 이어진다. 꽤 깊게 베인 듯 붉은 선혈이 그치지 않고 흐른다. 너는 침대 옆 서랍을 열고 붕대를 꺼내 상처를 엉성하게 감싼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차갑게 식은 두 손에 너의 작은 얼굴을 묻는다. 익숙한 온기가 손을 타고 흘러 너의 무릎을 적신다. 가냘픈 신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 순간, 익숙한 노크 소리가 너의 소리를 덮는다. 기억들이 흐려지기 전에, 되새긴다.

 

화장터에서 정신을 잃은 뒤로 사흘을 꼬박 앓았다. 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세장짜리 부모님의 유언장이 완성된 후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너의 집이, 그날 부모님이 나섰던 그 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던, 직접 가본적은 없는 거창한 빌딩들이, 건물들이, 어릴 적 진로의 날이면 꼭 한 번씩 찾아가던 회사가, 너의 설호의 이름으로 바뀐 후였다. 엄마와 아빠의 숨결이 사라진 후였다. 엄마는, 아빠는, 그 흔한 영상편지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먼 길을 떠났다. 그제야 너는 울었다. 재가 되어버린 부모님을 위해. 스러져버린 그들을 위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고, 탈진해 쓰러지고, 다시 사흘 밤낮을 내리 울고. 너는 너의 검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너의 죄가 없는데도, 아무도 원망할 사람이 없어서 너는 너를 용서하지 못했다. 마치 너에게 죄가 있는 듯이.

 

‘세상과의 단절’

 

그게 너에게 내리는 너의 형벌이었다. 방안에 딸린 화장실에서 씻고 침대에서 자고, 매 끼니마다 꼬박꼬박 방문 앞에 놓여있는 식사들을 버렸다. 그렇게 너의 일상을 버렸다. 불행히도, 항상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는 설호 덕에 영양실조로 다 죽어가다가도 너는 언제나 다시 살아나 그 축축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일주일간 방을 떠나지 않을 만큼 피를 흘리다가도, 누군가의 피를 몸에 담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는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린 두 쌍의 반지가, 두 겹의 목걸이 줄이, 너무나 무거워 너는 고개를 수그렸다. 갈라지다 못해 터져버린 입술에서 새어나온 피가 흰 이불을 물들일 때에도 너는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 사그라져버린 불꽃에, 너는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처럼. 하지만 세상은 너를 그저 슬퍼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네가 3번째로 침대 위에서 깨어나 비명을 지르던 날, 두 번째로 손목에 붕대가 감싸진지 거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창밖으로 곡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려놓고선 유산 한 푼 남겨주지 않은 누나가 야속하다며 농성시위를 벌이던 외삼촌의 소리였다. 내 아들이 내게 이럴 리 없다며 문 앞에서 누워 움직이지 않던 친할머니의 소리였다. 큰 고모의 소리였다. 사촌들의 소리였다. 그 소리들은 네게 나오라고 울부짖었다. 뭔가 잘못되었노라고. 하지만 너는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말했다.

 

‘내 아들이 내게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어떻게 길렀는데!!’

‘누나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우린 가족이잖아’

‘형님 자녀들 진짜 야속하네요,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꿀떡 삼키고선 친척 생각도 안한대요?’

‘저 것들은 부모 돈 먹으려고 태어난 것들이야, 혹시 몰라, 돈 먹으려고 일부러 죽였는지’

‘저 집 딸 봤어요?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거? 진짜 독해요’

 

원망소리가, 원망소리가, 너의 귀 사이로 파고들었다. 삐용삐용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너의 심장을 찔러 쪼갰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비명을 질렀다.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울부짖었다.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날카로워진 손톱으로 몸을 할퀴고 잡아 뜯어 억지로 손톱이 동글동글하게 깎일 때까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설호가 널 붙잡고 울부짖을 때까지 너는 그렇게 너의 온 몸을 잡아 뜯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듯이.

 

똑똑똑, 나지막한 노크소리가 너의 기나긴 생각을 끊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야”

 

더없이 자상한 목소리가 문을 넘어 너의 방안을 울린다. 너는 여전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깊은 숨소리와 함께 너의 신음을 삼킨다. 다시

 

“희야, 오빠 들어가도 될까?”

 

공허한 방을 울리는 목소리에, 너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너는 무거운 이불을 다시금 끌어올린다. 끼익, 낡은 문이 내뱉은 비명소리와 함께 밀려들어 오는 어색한 온기를 피해 너는 축축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널 쫓아온다. 걸어오다 걸어오다 침대 옆에 멈춰 선다. 미처 이불 속에 숨기지 못한 너의 붕대 감긴 발에 목소리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일어나, 상처 치료하게”

 

너는 움직이지 않는다. 침묵의 정적이 다시금 흐른다.

 

“설희야”

 

너는 움직이지 않는다. 너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 목소리가 아니야. 그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야.’

 

너는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하도 자주 올라와, 속을 비워버린 줄 알았던. 슬픔, 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는다. 슬픔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되새긴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없어.’

 

네가 너의 검은 방 안에 틀어박혔을 때, 설호는 방을 나서야했다. 세상을 거부한 널 위해 세상에 서야했다.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너의 어깨를 톡톡, 다정히 두드려주기도 전에 서로 꼭 끌어안고 마음껏 울어보기도 전에. 설호는 상복을 벗자마자 정장을 꺼내 입고선 법정 앞에 서야했다. 추석 때마다 환한 미소로 맞아주시던 할머니께 뺨을 맞고, 물로 온 얼굴이 흠뻑 젖고, 친척들에게 온갖 욕설을 들어야했다. 엄마와 아빠가 가장 사랑하던 회사가 너와 설호의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 엄마와 아빠의 모든 흔적들이 합법적으로 먼지가 되었을 때, 부모님이 남긴 모든 숙제를 끝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설호는 겨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슬퍼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설호는 이불 속에 숨어있는 널 붙들고 울었다. 한 겨울이라 춥다며 엄마가 꺼내준 이불이 축축이 젖어 들어올 때 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 이불속에서 너도 울었다. 그날,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옅은 신음소리들이 너의 방 안을 채웠다.

 

저벅 저벅 다시 발소리가 울린다. 깊은 숨소리가, 네 것이 아닌 공기의 떨림이 들린다. 이내 오빠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듯, 삐걱 소리와 함께 침대가 기울어진다. 따스한 손길이 너의 발목을 잡는다. 너는 그 손길을 거세게 차버리고선 차디찬 이불 속으로 두 발을 숨긴다.

 

너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누워있다. 몸을 계속해서 웅크리다 보면 이 세상에서 지워질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그 작은 몸을 계속해서 웅크린다.

 

문득 생각이 깊어진다.

 

너의 오빠는 언제나 따스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듯이, 고작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막 태어난 너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늦게 들어오는 부모님을 대신해 칭얼거리는 너를 달래며 밤을 새우던 사람이었다. 가끔 선생님께 사탕이라도 받은 날이면 소중히 주머니에 넣은 채 널 향해 뛰어와 아직 이빨도 나지 않은 너에게 사탕을 까주던 사람이었다. 개를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너를 단단히 품에 안고서야 멀리멀리 도망치던 오빠였다. 너를 지키는 영웅이 꿈이던 오빠였다. 지금도, 세상을 거부한 널 위해 세상을 억지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보 같아’

 

너는 속으로 되뇌었다. 오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너의 귓가에 울린다. 툭, 투둑, 가뜩이나 축축한 이불을 다시금 적셔온다. 물기 젖은 목소리로 오빠는, 설호는 네게 말했다.

 

“이러고 있다고 그 일이 안 일어난 게 되는 건 아니잖아”

 

두터운 손바닥이 널 둘러싼 이불더미를 흔든다, 널 흔든다. 너는 힘없이 흔드는 대로 흔들린다.

 

“희야, 설희야, 설희야”

 

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냥 여전히 몸을 조금씩 웅크리고 있다. 마법이 풀려버린 나무 인형처럼, 사람이 되지 못한 피노키오처럼. 계속해서 널 흔들던 설호는 이내 너의 위에 엎어진다. 묵직한 느낌이 너의 위에 더해진다.

 

“희야……, 제발……, 응?? 아니면 얼굴이라도 보여줘”

 

낮은 흐느낌이 너의 귀를 울린다, 너의 머리를 울린다. 부족한 공기에 너의 머리가 조금씩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너의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너는 몸을 부르르 떤다. 희야 희야 희야, 완벽하지 않은 너의 이름이 너를 덮는다. 물에 젖은 솜처럼 끈덕지게 달라붙는 목소리는 쌓이고 쌓여 너의 숨통을 막는다, 너는 거친 숨을 내뱉는다.

 

“……, 이젠 우리 둘밖에 없어 희야”

 

순간, 너의 머릿속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떠오른다, 한 달인지, 두 달인지 모를, 너를 이 공허한 방 안에 가둔 그 날이. 너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어 기억을 쫓아낸다. 짙은 슬픔의 감정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아픔이, 너의 목을 졸라온다. 그 무거운 목걸이 줄이 점점 조여 온다. 너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 희야?”

 

너는 참다못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핏발이 선 두 눈이 너를 바라본다. 누군가를 닮은 흑색 눈동자가 너를 바라본다. 너는 쉬다 못해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제발 좀 닥쳐, 닥치라고!!!”

 

너의 목소리의 잔상이 흩어진다. 텅 빈 방에 다시금 침묵만이 맴돈다.

 

“이런다고 바뀌는 게 없다는 거 나도 잘 아니까 좀 닥치라고,”

 

너는 다시 한 번 비수 같은 말을 내뱉은 채 고개를 돌려버린다. 다시금 흐르는 정적에, 왠지 모르게 차올라 오는 죄책감에 너는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에 너의 얼굴을 가린다.

 

‘안다고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로만 살 수 있다면.’

 

부들부들 몸의 떨림이 가라앉자 너는 두 손으로 너의 머리칼을 추스르며 고개를 든다. 흑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본다. 그 안에서 너를 본다. 슬픔을 마주하기 싫어 너는 고개를 돌린다.

 

“난……, 난 오빠처럼 못하겠어,”

 

흑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너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손에 묻는다.

 

“희야 그래도 살다 보면……,”

 

너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진다. 비명을 지르는 듯 소리친다.

 

“살다 보면, 살다 보면!!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잊어버리겠지, 그냥 그 순간이 기억에서 지워지겠지,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 기억나는 밤이면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하겠지, 행복하게 웃다가도 죄책감에 휩싸여 다시 울어야 하는 삶들이겠지!! 그게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

 

죽어버린 너의 눈동자가 설호를 비춘다. 굳어진 설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던 너는 절래절래 고개를 젓는다.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다시금 말한다.

 

“아냐 오빠…… 그거 괜찮은거 아니야. 아니라고”

 

너의 몸이 다시 부들부들 떨린다. 아무것도 찢을 수 없는 손톱이 너의 살을 눌러온다. 꽈악. 주먹을 쥔다. 너는 가장 비참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한다.

 

“날 도우려하지마, 동정도 하지 마. 오빠도 알잖아, 내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설호의 입술이 우물우물 벌어진다. 너는 손을 뻗어 그 입을 가로막는다. 우물우물 소리 없이 외친다. 움직이는 입술이 진심을 그려낸다.

 

‘이제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잖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너는 너의 말이 잘 전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설호가 반박하지 못할 것도 알아차린다. 너는 손을 내린다. 흑색 눈동자를 쳐다본다. 이리저리 요동치던 눈동자는 결국 널 피한다. 너는 생각했다.

 

‘죽음’

 

문득, 너의 머릿속에 심장이 멎어버린 네 모습이 떠올랐다. 제때 너에게 달려오지 못한 설호의 모습도. 매일같이 꿈꿔온 순간. 하지만 애석하게도 너는 죽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았다. 세상을 끊어내긴엔 겁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너의 서툰 자살시도는 언제나 설호가 집에 있는 순간에 이루어졌다. 어두운 방에서 다시 눈을 뜰 때마다 내지른 비명 속엔 아직 안도감이 남아있던 거였다.

 

아직, 아직 이었던 거였다. 결국 넌,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거였다. 다시금 익숙한 감각이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너는 황급히 그 감각을 닦아낸다. 뜨거운 눈물에 너의 손이 축축이 젖어든다. 그런 너를 보는 설호의 입술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거리다 멈춘다. 너는 그런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 답답하다는 듯 거센 한숨을 쉬며 다시 너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린다. 비명을 지른다. 발악을 하며 온 몸을 뒤튼다.

 

인정할 수 없었다. 충분히 괴로운 나날을 보낸 줄 알았는데. 죽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나. 도대체 얼마나 더 괴로워야, 눈을 뜨는 순간을 진심으로 저주할 수 있게 될까. 나는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거였나.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나는 견딜 만해서 살고 싶은 걸까'

 

너는 끊임없이 몸을 뒤틀고 쥐어뜯고 발악한다. 그런 너를 설호의 억센 팔이 잡아 붙든다. 너는 손톱을 세워 설호의 팔을 쥐어뜯는다. 억센 팔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너는 다시 눈을 감는다. 부들부들 떨리던 온 몸이 순식간에 멈춰버린다. 잠깐 끊어진 의식의 끈이 간신히 잡힐 즈음 너는 눈물 젖은 얼굴로 설호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런 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정성스레 닦고 있다. 설호는 너의 영웅이었다. 한설호, 한설희, 처음 배운 글자로 삐뜰빼뜰 서로의 이름을 나란히 써보았을 때, 너와 너의 오빠의 이름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설자돌림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었다. 남들과는 다른 사이가, 오빠의 애정 어린 표현들이 너에겐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너의 인생의 중심이었다.

 

‘아직도?’

 

너는 설호의 손길을 뿌리치며 일어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문가를 가리킨다.

 

“나가”

 

“희야……,”

 

너의 떨리는 목소리에 흑색 눈동자가 다시금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너는 그 눈동자를 외면한 채 다시 소리 지른다.

 

“나가라고!!!! 나가, 나가나가나가나가나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소리를 지른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리는 설호를 바라보며 너는 다시금 칼날을 내뱉는다.

 

“아니면 내가 나갈까?!!”

 

너의 입에서 나온 말에 흑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설호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룩진다. 너는 머리를 추스르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먼지 쌓인 윗옷을 꺼내 억지로 팔에 꿴다. 비틀비틀 너의 몸이 흔들린다. 발바닥이 욱신거린다.

 

“그러네, 내가 나가면 되겠네, 내가 나갈게 오빠. 설마 이 근처에 고층 건물 하나 없겠어??”

 

너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들어 협박한다. 되도 않는 거짓말에 절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뚱아리가 싫어 너는 팔을 꽉 움켜쥔다. 억센 팔이 너의 흔들리는 손을 잡아당긴다, 너는 거칠게 침대 위로 엎어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선 사이로 우뚝 서있는 설호가 보인다. 거대한 슬픔이 보인다. 이내 설호가 말했다.

 

“그만해……, 내가 나갈 테니까.”

 

아팠다. 순간 너도 모르게 눈에 고인 습기에 너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다시 축축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한숨 소리와 주저하는 목소리가 울리다 이내 다시 문이 비명을 지르며 움직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문 두드려, 오빠 방 알잖아.”

 

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이불에 어색하게 남은 설호의 온기에 너는 몸을 움츠린다. 이 집에는 아직 추억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 너는 남아있는 온기를 벗 삼아 깊은 잠에 빠진다.

 

시간감각이 사라진 방에서 너는 다시금 눈을 뜬다. 유리조각이 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너의 눈꺼풀을 파고든다. 너는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뭐지’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긴다, 문득 발을 보니 엉성한 붕대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큼지막한 반창고가 상처를 가리고 있다. 너는 너도 모르는 사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차가운 겨울로 돌아간다. 네 몸을 감싸고 있는 악취에 너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다.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한다.

 

순간 풀려버린 다리에 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얼얼한 통증이 무릎을 감싼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다. 너는 새삼스럽게 올라오는 슬픔을 꾹 눌러 삼키며 천천히 일어난다. 화장실의 문을 연다.

 

탁, 너를 알아채고 환하게 불을 켜는 전등에 너는 눈을 찡그린다. 낯선 빛이 너의 눈을 찔러온다. 너는 애써 거울을 외면하며 물을 튼다. 쏴아 맑은 소리와 함께 따스한 물결이 너를 감싸며 흘러내린다. 톡, 토톡. 부드러운 물결이 오랜 추위에 굳어진 너의 몸을 녹인다. 뜨거운 물에 피어오른 수중기가 거울을 가렸다. 망설이던 너는 희다 못해 창백한 너의 왼손을 뻗어 거울을 닦았다. 희뿌연 거울 속에 너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췌한 얼굴을 본다. 아빠를 닮은 말끔한 눈썹을, 엄마를 닮은 짙은 쌍까풀과 긴 속눈썹을. 아빠를 닮은 높은 코를, 엄마를 닮은 갸름한 얼굴형을, 입술을, 하얀 피부를. 그들을 닮은 너를. 너는 너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지고 어루만지며. 너의 손이 눈물이 아닌 물줄기에 퉁퉁 불어오를 때까지 수중기로 뿌옇게 덮여가는 거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는 온기에 녹은 근육을 쭉 펴며 화장실을 나선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비틀거린다. 흔들리는 시선사이로 말끔해진 바닥이 보인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너는 책상을 향해 달려간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너는 두 팔로 기어 책상의 밑을 본다.

 

아직 남아있었다. 지울 수 없는 행복이.

 

금간 유리 사이로 미소 짓고 있는 어린 네가 보인다. 너를 안고 있는 설호가 보인다. 그런 설호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설호를 닮은 여인이 보인다, 널 닮은 남성이 보인다. 너의 부모님이 보인다. 너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로막는다. 터져 나오지 못한 신음이 입안을 맴돈다. 뜨거운 눈물이 방바닥을 적신다. 너는 비명을 지른다. 굳어버린 손가락 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움직인다. 바닥을 마구 내리친다. 고개를 내젓는다. 너는 익숙한 그 이름, 네가 처음 내뱉은 그 단어를 부르짖는다. 울음에 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단어를.

 

“엄마”

 

너는 다시금 심장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다.

 

“아빠”

 

너는 한동안 그렇게 울며 비명을 질렀다. 겨우 가라앉은 목이 다시금 갈라진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말라버린 너의 입에 다시 비릿한 향기가 감돈다. 그렇게 너는 또 한 번의 어둠을 맞이했다.

 

시간은 째깍째깍 빠르게 흘러갔다. 방 안에 감돌던 냉기는 나날이 조금씩 스러져갔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고통이 조금 옅어지는 듯 했다. 설호는 아빠의 가방을 들고, 엄마의 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했다. 이젠 아빠와 엄마가 앉아있던 사무실에 앉아, 의자 하나를 빼내 더 넓어진 책상에서 엄마가 하던 일들을 하고, 아빠가 만다던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고 한 달 반이 지났다. 너는 여전히 너의 방에 있었지만 일주일 전에는 방의 전구를 갈았다. 휘청거리는 의자에 올라서서 네 손으로 직접 갈았다. 깜빡깜빡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너의 방 안을 가득 메운다. 2주 전에는 축축한 이불은 얇은 봄 이불로 바꾸었다. 침대에 누울 때면 예전의 눅눅한 냄새보다는 삐그덕 침대의 스프링 소리와 함께 사그락사그락 이불소리가 먼저 너의 귓전에 울렸다.

 

한 달 전에는 너의 방을 청소했고, 가족사진을 새 액자에 담아 원래 자리에 걸어놓았다. 한 달반 전부터 너는 일어나 밥을 먹고, 방 문 앞에서 너의 오빠를 배웅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너의 커튼은 변함없이 굳게 닫혀있었다.

 

자연스럽게 떠진 눈에 너는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쭈욱 쭉 몸을 늘리며 스트레칭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불이 꺼져 어두워진 방에서 시계는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다. 방을 가르는 얇은 선에 너는 고개를 돌린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가로등빛인지 햇빛인지 모를 맑은 빛이 내리쬔다, 날카로운 창인마냥 길게 늘어진 빛은 방바닥을 가르며 밝게 빛난다. 너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문득 너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바람에 너는 깜짝 놀라며 몸을 떤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자 너는 달려가 커튼을 움켜잡는다. 차디찬 바람이 너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다. 너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창문은 닫혀있을 텐데’

 

이내 너는 손을 놓고 주춤주춤 물러난다.

 

‘착각이겠지’

 

하지만 왠지 모를 무엇인가가 너를 부른다. 주춤주춤 다시 창문을 향해 다가가지만 이내 몸을 다시 돌린다.

 

‘밤이면 어떻게 해’

 

왠지 모를 두려움에 너는 털썩 주저앉았다, 미련에 다시 일어났다, 저벅저벅 텅 빈 방 안을 맴돌았다.

 

돌아가는 시선 사이로 책상 위에 걸린 액자가 보인다. 어디선가 들어온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엄마의 미소를 본다. 잠시 멈춰있던 너는 이내 몸을 돌려 커튼을 열어젖힌다. 맑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두터운 커튼이 너의 귓전을 스친다. 창밖의 벚꽃나무는 어느덧 자신의 빛을 힘껏 뽐내고 있었다. 이내 너는 창문의 걸쇠를 열고 힘껏 양 옆으로 밀어낸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찬바람에 너는 얼굴을 찡그렸다. 회상도, 아픔도, 이제는 접어둬야 할 날이었다.

 

너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쭈욱 쭉, 온 세상을 너로 채울 듯이. 하염없이 몸을 웅크리던 시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거칠게 열린 문으로 들어온 설호가 무거운 첫 발자국을 떼기까지, 너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때 까지, 너는 계속해서 쭈욱 쭉, 너의 몸을 폈다.

 

 

-작년 겨울, 몰아치는 생각을 따라 폭풍처럼 글을 써낸 후 더없이 부족한 제 솜씨가 부끄러워 제목조차 짓지 못하고 숨겨놓았던 글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연 폴더에 홀로 남아있던 이 글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져서, 이제는 제목이라도 붙여줘야 할 것 같아 글을 올립니다. 부족하지만 아직 움직이고 있는 이 이야기에 걸맞는 제목을 붙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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