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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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끝없는 눈물을 흘리다 깨어보니
내 이불 속엔 눈사람이 누워있다.
새하얀.
두터운 이불로 덮어도
훤히 드러나는
모두가 원하는 원만한 곡선

 

제 자리를 빼앗긴 나는
뿌드득 뿌득
눈들의 비명 위를 걸으며
내 자리에 누운 눈사람에게
이봐 거기는 견딜만 한가
큰 소리로 외친다

 

공허한 정적 위를 누비며
아차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보지만
뜨겁고 열렬한 더위에
희고 완만한 곡선은 흔적도 없이.

 

축축해진,
허나 금방 보송해질 이불을 토닥인다
그리 스러질 거면서 뭐 그리 급했어
눈들이 꿈꾸는 따뜻한 이부자리는
눈들이 견딜 수 없는.

 

이봐 나는 자네를 잃었어
허울뿐인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눕는다.
온기에 기대 눈을 감는다
뿌드득 뿌득
눈들이 이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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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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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꿈을 꾸지

고막을 뚫고 지나가는 건

불규칙 속의 규칙들과 제 나름대로의 미

 

carpe diem

carpe diem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 한

세상에, 도대체 누가 현재가 아닌 삶을 살 수 있지?

미래가 있는 배부른 자들의 노래

꿈조차 꿀 수 없는 노래

 

있지

오늘 수입은 최저 시급도 못 받는 편의점의 여섯시간

17º의 보일러도 덜덜 떨리는 집세와

시들어 빠진 당근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식사

그리고 꿰매고 꿰매 너덜너덜해진 양말 세 켤레

 

carpe diem

carpe diem

노래는 꿈을 꾸지

고막을 뚫고 지나가는 건

미래를 아는 배부른 자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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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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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흑, 다시 흑
gkrtod
영어도 한글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것에 갇혀
다섯시 반, 두시, 다시 다섯시 반
아침과 아침. 밤은 어디에 있지?

 

너는 내가 누군지 아니?
누구의 이름도 아닌 초록빛
작고 단단한
심장을 찌르지 못하는 은색 핀

 

다이아몬드가 되지 못한 흑연으로
희고 보드라운 벨벳을 찢어
검붉은 웃음이 흘러나오지 않는 건
enfudna
부기맨한테 잡혀서 그래

 

사각
열정이 사그라지는 소리와
1등과 기억되지 않는 꼬리와 룸메
맞닿은 온기 사이의 시베리아
서로를 찢고 던져야 하는 강력한 스파이크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불량 어린이들의 방

 

wnrrhtlvdj

 

이건 시?
한탄?
아니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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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미지를 보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서술하시오 (1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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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뒤뜰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8살의 초여름,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이던 그 순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사과나무는,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이자 삶의 이정표가 되어 내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흘러간 세월만큼 줄어든 생명력에 조만간 베여나갈 처지가 되었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사과나무는 어린 나의 친구이자, 비밀기지이자,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나무를 사랑했었다. 이삿짐을 싸며 시작된 한 달 반의 여름방학을 온전히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한낮에 나뭇가지에 누워 맞던 시원한 바람은 어찌나 달콤했던지.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게 상처를 받아 눈물을 흘려도, 사과나무 위에서만큼은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나무는 나의 행복이었고, 내 삶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의 행복은 또다시 작은 침략자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내가 사과나무에 대한 자랑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지만 않았어도, 아니 애초에 엄마가 여자는 나무 위에서 놀면 안 된다는 말만, 아니 아빠가 불쌍한 동생을-고모와 할머니가 사준 장난감을 두 팔에 가득 끌어안고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놀아주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장난감에 절어 있던 남동생이 내 사과나무를 탐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의 행복도 계속 이어졌겠지. 하루하루가.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나는 또 내가 원하는 한 가지를 빼앗겼다. 처음의 시작은 잎사귀 몇 개였다.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잎사귀를 뚝 떼어 들고 도망치던 동생은 가지를 탐냈고, 퇴근하던 아빠의 손으로 가지를 꺾어 든 다음에는 채 익지도 않은 열매를 탐냈다. 그다음은 나무 그늘, 그다음은 내가 누워 자던 굵은 가지, 그다음은 나무. 나는 태연히 내 가지에 올라 나뭇잎을 떼어내는 동생을 보며 치밀어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 부러 나뭇가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거친 나무껍질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것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나는 그때의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인자함으로 동생을 달래 내려보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 애인 모든 것을 가졌으니-고모와 할머니가 사주던 장난감들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까지도!- 나무 하나쯤은 내게 양보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10cm도 되지 않을 손으로 가지를 부수고 잎사귀를 찢어발기며 해맑게 웃고 있던 동생과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동생의 가슴을 떠다밀었다. 쿵 소리를 내며 동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엔 한 방울의 피도 스며들지 않았다. 뛰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철부지 동생을 위해 깔아둔 이불이 내 손바닥만큼이나 두툼했으니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은 정확히 3초 후에 그 애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버선발로 달려온 고모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바닥으로 내려오기 무섭게 주름 잡힌 양손에 양 뺨을 얻어맞았다. 양 볼이 붉게 아려왔다. 거기에 오른쪽 뺨에 한 대를 더한 것은 다름 아닌 아빠였고, 눈물 흘리는 나를 잡아끌어 다락에 가둔 것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3일간의 감금 생활 동안 나는 유난히 사과나무가 잘 보이던 작은 창가에 기대 앉아, 나뭇잎을 찢어 흩뿌리는 남동생을 지켜보아야했다.

어린 가슴에 분노와 억울함이 차올랐다. 감금 생활이 끝나자마자 나무에 올라간 것은 어찌 보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수, 복수. 내 사과나무를 탐내는 몰상식한 동생에게 보여줄 만한 완벽한 소유권의 증거. 나는 나의 몸무게를 버틸 수 있으면서도 가장 높이 있는 가지에 올라 그중 가장 높은 사과에 굵은 노끈을 동여매었다. 아빠가 오르기엔 가지가 너무 약하고, 동생이 오르기엔 아무리 올라도 손이 닿지 않을. 말 그대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만의 영역표시였다. 그 뒤로  일주일 동안 남동생의 울음 섞인 투정이 온 집안에 퍼져나갔다.

이쯤 되면 쉽게 예상할 테지만 노끈을 당장 풀어내라는 그 투정은 그 누구도 이뤄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떨어트리는 것은 남동생의 자존심에 걸맞지 않았다. 누나가 올라가서 묶었으니 아빠도 올라가서 풀어야 한다는 게 동생의 논리였다. 당연한 이치처럼, 아빠는 그 투정을 들어주지 못했다. 엄마도, 고모도, 남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던 할머니마저도. 제풀에 지쳐 나무를 등지던 동생을 보며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겼다. 이긴 거다. 이긴 거였다.

그 뒤로는 행복의 연속이었다. 나는 가지에 올라 내게 승리를 안겨준 흰 노끈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도 하고, 동화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기도 했다. 장마가 쏟아지던 날에는 우비를 쓰고 나무 주변의 웅덩이에서 그림자와 술래잡기를 했다. 사소하고 매우 단순한 놀이들이였지만 사과나무와 함께 있을 때면 지루한 방학은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방학이 흘러갔다. 어느덧 개학이 찾아와버렸다. 새 학교에서의 새 학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던 첫날, 나는 요란한 울음소리로 아침을 열었다. 사과나무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연하게 나는 아빠에게 뒷목이 잡혀 승용차의 뒷칸에 구겨넣어졌고, 오래 세차를 하지 않아 더러워진 창문 너머로 사과나무를 쳐다보며 나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퉁퉁 불은 눈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참 우습게도, 내가 사과나무에 오르지 않게 되기 까지는 딱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새학기가 시작한 그 날부터, 세상이 떠나갈 듯이 울던 그날의 아침으로부터 고작 7일. 그날의 슬픔과 달콤했던 승리를 잊기까지 고작 7일이 걸린 거였다. 어린 나를 흔드는데 필요한 것은 매우 단순했다. 나를 챙겨주는 친구와, 예쁜 스티커를 선물해주던 선생님과, 교실 뒷편의 놀이터 사물함에 가득 들어있던, 집에서 가져보지 못한 형형 색색의 장난감들. 8살, 외로움에 지쳐있던 나를 흔드는데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거친 나무껍질을 매만지던 순간들이 잊혀져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흐려진 추억 위에 올라선 나는 그저 하나의 아내, 새댁, 아줌마. 단지 그것이 되어있을 뿐이다.

벨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다, 퍼져나가다, 강렬하게 바뀐다.

"첫째야~ 전화 받아라~"

멀찍이서 울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입으로 내 이름을 듣기까지 도대체 몇년이 흘러야하는걸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든다. 배경을 반쯤 채운 익숙한 전화번호에 움찔, 손이 멈춘다. 휴대폰에 저장되어있지는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사과를 동여매었던, 그때의 노끈과 같은 사내의 번호였다. 내 뱃속에 자리잡은 생명의 아빠였고, 나의 보호자였던 그 인간. 이제는 작별을 고할.

다시 목소리가 울린다.

“시끄럽다!! 전화 빨리 받아라!!”

나는 애써 태연하게 휴대폰의 볼륨을 줄여 소파의 쿠션 밑에 숨겨버린다. 대답한다.

“스팸이야, 안받아도 돼”

“아유 요즘 스팸은 뭐 그리 자주 온다냐. 영수도 스팸 때문에 아주 미치겠다고 그러더만. 아유 내새끼 타지가서 고생하는거 볼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퍼……”

엄마는 이혼서류를 들고 찾아온 부푼 배의 나를 3시간 동안 문 밖에 세워놓고, 미리 뽑아온 두둑한 용돈 봉투를 건낼때까지 문을 잠궈두며 술먹고 엄마의 신용카드를 훔쳐 달아난 남동생을 걱정한다.

‘뭘 더 기대해’

나는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어릴적 사과를 바라보던 그 시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 배를 내려다본다.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바닥에 내려놓은 캐리어를 열어 가득 쌓인 옷가지를 이리저리 헤집는다. 가지런히 정리된 옷가지가 다 흐트러지고나서야 목표물을 발견한 내 오른 팔은 이내 누런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든다. 문득 햇빛을 받아 누래졌던, 그때의 노끈이 떠올랐다. 겨우내 먹을 사과말랭이를 만들기 위해 풀어내야했던, 둥그래야할 사과의 형태에 끼어들었던, 사과에 깊이 파고들어 결국 잘라내야했던, 그때의 그 노끈. 그리고 노끈이 빠져나간 뒤에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투명한 노끈에 묶여 날씬한 허리가 생긴 붉은 사과. 나는 누런 봉투를 열고 오늘 아침에 새로 산 볼펜과 주머니에 넣어둔 도장을 꺼내든다. 어제 저녁 길길이 날뛰던 노끈은 제 풀에 지쳐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나 또한 이 서류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음으로써 ‘마누라’와 ‘새댁’과 ‘아줌마’라는 노끈과 작별을 고할 예정이었다. 사각거리는 볼펜 소리가 스러질 때, 나는 나를 묶던 노끈들과 작별을 고했다. 나는 자라난다. 누군가의 아내도, 딸도, 아줌마도 아닌 온전한 김채린의 모습으로. 초여름의 매미가 우렁찬 사랑노래를 부른다. 뒤뜰에선 여전히 사과가 자라나고 있다.

*

 

*

 

*

허허 주제 따위는 제가 먹어치우겠습니다 냠냠.

원래는 노끈에 묶이다→보이지 않는 틀에 갇히다→자기도 모르게 정형화 되어버린 삶-이 주 키워드였는데……

아무래도 머리에서 손으로 가는 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던 것 같군요. 예상점수 13점을 주겠습니다.

더 쓰기도 창피하니 그럼 이젠 다시 도망을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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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죽여야만 했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너를 죽여야, 아이야 내가 너를 죽어야, 죽여야 우리가 살았기에. 우리는 너를 죽여야만 했다.
네가 태어나지 않은, 네가 태어나기 수십년 전의 그 시절 동안. 우리는 낯선 땅의 이방인이었다. 선조의 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던 어린아이는 노인이 되어 뜨거운 모래 속에 묻히었고, 그 노인의 품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그저 옛 신의 이름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었다.
‘야훼여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우리는 매일 밤을 부르짖었다. 애굽인들의 멸시와 조롱을 견디며 길을 걸을 때도, 천대와 핍박을 받을 때도. 지푸라기를 주워 모아 벽돌을 만들고, 내 신을 배반하고 다른 신의 형상을 빚어야 했을 때도, 우리는 끝없이 부르짖고 부르짖었다.
‘우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부르짖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만의 땅에 얹혀사는 우리는 그저 이방인, 하나의 버러지, 퍼져가는 곰팡이, 단지 그뿐이었기 때문에. 애굽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선 힘겨운 노역의 땀을, 차디찬 달빛 아래에선 끝없는 눈물의 기도를. 우리는 그런 삶을, 그런 순간들을 살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넌 우리에게 축복이었지만, 아이야 우리가 너를 가졌을 때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했다. 하필 왜 지금일까, 하필 넌 왜 지금 우리에게 찾아온 걸까. 너를 임신한 나날이, 그 하루하루, 그 열 달이 내겐 너무나 긴 아픔이었다. 낳아봤자, 너를 낳아봤자, 너는 살지 못할 텐데. 너는 빛을 보자 마자 죽을 텐데. 파라오의 살상령이, 갓난 사내아이를 전부 죽이라는 그 끝없이 잔혹한 명령이 너의 목을 노리고 있었기에. 사내아이 일 수밖에 없는 너의 태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무저갱의 불구덩이 속에 빠져들었다.
‘오오. 제발 자비로우신 야훼께서 너를 거두어 주시기를’
날로 부풀어가는 배를 끌어안고 나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오오. 제발 이 불쌍한 영혼을 기억해주시기를’
할아버지의 입에서 부모의 입으로 전해져 온 그 신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신이시여 제발’
히브리인은 애굽인들에게 자라나는 종양과도 같았고, 끝없는 우리 민족의 성장은, 그들에게 하나의 악몽을 선사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꿈을 부수러 왔었다. 네가 차라리 여자아이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불행히도 너는 사내아이였다. 그 말은, 부모의 손으로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가야 넌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네가 그리도 맑게 웃었던 거니.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이 떨어졌을 때, 작은 단도를 들고 네 앞에 선 날 향해, 널 죽이려던 날 향해 환히 웃던 네 모습은 아직도 내게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미가 이래서 무서운 걸까, 나는 도저히 너를 죽일 수 없었다. 내 옷자락을 붙들고 선,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흘리던 너의 누이와 형이. 네가 아니라면 그들이 죽어야 했는데.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너를 숨기기로 했다.
“당신이 진정 미친게로군! 아이를 숨기다 들키면 온 가족이 죽는다는 걸 정녕 잊은 게요!!”
남편의 날카로운 비판의 내 귀를 찔러 쪼갰다.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나를 빤히 쳐다보던, 네 누이의 그 동그란 눈동자가, 그 속에 깃든 두려움이 내 심장을 후벼 팠다. 나는 너의 어미였고, 미리암의 어미였으며, 아론의 어미였다. 내가 그 누구를 포기할 수 있을까.
“3달, 3달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그 말 만을 던진 채 너에게 젖을 물렸다.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뱉던 너는, 이내 너의 누이가, 너의 형이 그러하였듯 열심히 너의 빈 속을 채웠다. 모순적이게도, 비어가는 내 속을 느끼면서도, 채워져 가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처음 한 달은 기묘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야훼를 믿는 산파들이 번갈아 가며 너를 돌보아주었고, 노역에 불려가지 않은 장정들은 너를 숨길 은신처를 만들어주었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에서 너를, 차디찬 달빛 아래에서 너를. 모두가 너를 안고 기쁨의 찬송을 불렀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자진해 너를 끌어안고, 제 아이에게 주어야 했을 젖을 너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이 날이 갈수록 고와져, 우리는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참 신기하게도, 행복했다. 그 다음 달은 점점 잦아지는 너의 울음에 밤을 자주 새우게 되었지만, 지나가는 애굽 군인들에 심장이 멎을 뻔했던 순간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아이야 우린 행복했다. 갓난아이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사라진 우리 히브리의 지역에서, 오직 너만이 우렁찬 울음소리를 울리었다.
마지막 달이 되자, 우리는 하루하루가 지옥같이 고달팠다. 너를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들이 다가와서는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너를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별은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단지, 단지, 우리와 같은 부모들이 너무나 많이 늘어나 버린 탓이었다. 애굽 군인들의 조사는 날이 갈수록 잦아졌고, 너는 바닥 아래 조그만 은신처에서 미리암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날들이 점차 늘어갔다. 엉엉 우는 너의 입을 틀어막아야 할 때면,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기 위해 애써야 했다.
‘불쌍한 내 아이, 불쌍한 내 아가. 야훼여 어찌하여 이 아이를 지금 내게 주셨습니까’
입으로 지은 죄는 쌓이고 쌓여, 결국 약속한 3달의 기한이 찼다. 집 밖에는 애굽 군인의 횃불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너의 아비는 일주일 전부터 갈대를 엮어 상자를 만들고, 역청과 나무진을 발랐다. 붓을 움직이고, 움직이는 순간 속에 또 하나의 눈물이 섞여 들었다. 고약한 냄새가 온 방을 채웠지만, 코의 욱신거림 보다는 마음의 아픔이 더 커서, 나는 네 아비를 재촉해 몇 번의 역청을 덧발라 말렸다. 물이 새지 않도록, 물이 새지 않도록. 너를 나일강에 떠내려 보낼 수 있도록. 아아 그 작은 상자가 내겐 얼마나 끔찍해 보이던지. 그 작은 관이, 얼마나 내 마음을 찔러 쪼개던지. 나는 가끔 내 품안에서 열심히 젖을 빨던 네가 죽은 것만 같아, 부러 너를 몇 번 꼬집어 보곤 했다. 너를 상자에 넣어 살리는 것이 아닌, 죽여 관에 가두는 것이 될까 두려웠기에.
아이야 너를 보내기 전날 밤. 너를 보내야 하는 그날의 새벽. 너를 보내야 하는 그날의 아침. 나는 그 모든 순간 동안 눈물을 흘렸다. 내 배로 품어 낳은 아이를, 저 차디찬 강물에 내어보내야 하는 그 기분을, 그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나 말고 또 아는 이가 있을까. 혹여나 비명을 지르면 군인이 들어올까, 너를 끌어안다가 군인이 들어올까. 나는 그저 고이 잠든 네 곁에 쓰러지듯 앉아, 소리 없는 울음을 내어 쏟으며, 야훼를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야훼시여, 그대가 우리를 빚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우리를 이 애굽으로 이끌어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시오. 이 아이를 지으신 이가 당신이시니 이 아이를 당신께 돌려드리겠습니다. 데려가십시오. 당신의 손에 돌려드립니다”
그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딱딱한 모래로 다진 바닥이, 뜨거운 눈물에 움푹 패이고야 말았다.
결국 아침은 밝았다. 부드러운 천으로 너를 싸매 품에 숨긴 채, 아론과 미리암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 작은 네 개의 발은 뜨거운 돌길 위를 가볍게 뛰어갔고, 너를 떼어놓을 수 없는 나의 발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불행에서 도망쳤어야 했는데, 발걸음이 느려 불행에 붙잡히고 말았다. 날카로운 칼날과, 너의 저승의 사자와, 그래, 애굽 군인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거기 멈춰!! 품에 든 것이 무엇이냐!!”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찌해야 하지, 어찌할까. 너를 상자 속에 숨기지 못했는데, 아직 널 강가에 띄우지 못했는데, 그날따라 애굽 군인들의 창이 어찌나 날카로워 보이던지. 그 창이 붉게 물든 것 같은 환상에 나는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나는 이성적이지 못했고, 어른스럽지 못했다. 오직 품 속의 너를 더 꼭 끌어안으며 네가 울지 않기를 야훼께 빌다가도, 네가 저 날카로운 칼날에 찔린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 뜨거운 바위에 내 머리를 부딪히리라는 끔찍한 상상으로 두려움을 덮었다.
“품에 든 것이 무엇이냐니까!!”
우악스러운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몸이 바닥을 향해 내려 앉으려던 그 순간, 아론이 내 앞으로 나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엄마! 이리 주어요!!”
아론은 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드는 척하고선 쏜살같이 돌길을 달려나갔다. 그 재빠른 발 놀림에 군인들의 날카로운 발길이 아론을 뒤쫓았다. 나는 그 거친 발길에 떠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아론이 걱정되어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이내 온 힘을 끌어내어 심장이 터질 듯이 달렸다. 왼 손 가득 쥐었던 미리암의 손이 땀에 미끄러지는 것도 모른 채,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강가로, 강가로. 나일의 품으로.
거친 숨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또 다른 군인들의 발걸음이 나의 뒤를 쫓아왔다. 너와 작별도, 밤새 고심하고 고심한 축복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저 너에게 입을 한 번 맞춘 후, 상자에 너를 넣어 뚜껑을 닫았다. 차디찬 나일에 나의 발을 담그고, 무릎을 담그고, 허벅다리를 담그며 너를 물 위에 띄워 보냈다. 역청을 칠해 검게 물든 그 갈대 상자가, 언젠가 한 번 보았던 애굽 인들의 관과 꼭 같아 보여서. 가슴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요란히 뛰어 댔다. 혹여나 네가 운다면, 네가 그 목소리로 나를, 이 어미를 찾는다면. 당장에 나일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그저 하염없이 흘러가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너는 울지 않았다. 그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고요히 드넓은 나일의 물살 속으로, 너는 정처 없이 흐르고, 흘러갔다. 자박거리는 작은 발걸음이 나를 떠나 어딘가로 흘러갔다.
하루해가 지고 난 뒤에야 강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애굽 군인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아론과 달리다 손을 놓쳐버린 미리암의 실종 소식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어 버린 오른 품과, 땀으로 흥건한 왼 손을 돌아보았다. 치마 밑단은 수년을 입은 듯 헤졌고, 튼튼히 꼬아 만든 샌들은 여기저기 흉하게 구겨지고 찢긴 채, 깨진 발톱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를 바로 하기도 전에, 남편의 손길에 이끌려 은신처로 들어갔다.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그 누구도 몰라야 하는 사실에 대해 나는 끝없이 혼나고, 또 혼났다.
“그대는 어미가 아니오?? 미리암과 아론은 그대의 자식이 아니오?? 어찌……, 어찌 저 불쌍한 아이들을 잊을 수가 있단 말이오!!!”
잊어버리다니, 나는 이 날을 평생 자책하며 살았다. 세상에 내가 내 자식을 잊어버리다니. 너를 살린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하나를 살리기 위해 둘을 죽일 뻔 했다니. 네가 나와 함께한 시간보다, 그 둘과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긴데. 그 아이들을 사랑한 시간이 훨씬 긴데. 세상에 내가 그 아이들을 잊어버리다니. 마법이라도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사라진 미리암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나가던 히브리인들이 발견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매맞아 죽을 뻔했다는 아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소리없이 울부짖었다. 설령 너를 잃었더라도 나는 어미여야만 했으니.
남편의 매서운 꾸짖음이 끝난 뒤 나는 고이 잠든 아론을 끌어안고 조용히 눈물의 기도를 삼켰다.
‘떠나보낼 수 없는 이를 떠나보내게 하셨으면, 떠나간 이를 지키십시오’
다행히 미리암은 사흘이 지난 뒤에 돌아왔다. 행복에 찬 미리암의 입술이, 그녀가 가지고 온 가장 아름다운 소식을 내게 전해 주었을 때, 나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나일강은 너를 애굽의 공주에게 데려갔고, 너의 아름다움에 빠진 애굽의 공주가 너를 양자로 들이기로 했다는 그 소식은, 너에게 젖을 먹일 유모가 바로 내가 되었다는 그 소식은. 세상의 그 모든 행복을 몰아오더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참 신기하지. 나는 이미 온 마음으로 너를 버렸는데도. 그 사흘이라는 시간동안 돌아오지 않는 미리암을 위해 기도하며, 이젠 놓아버린 너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미의 정이 다시금 나를 너에게로 끌어갔다. 나일이 너를 품었다. 아니, 야훼께서 너를 건지신게다. 모세, 모세, 강에서 주워진 아이. 이름을 받지 못한 너는 평생 애굽의 이름을 달고 살게 되었지만, 괜찮았다.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닌 애굽의 왕자였지만, 괜찮았다. 괜찮았다. 너는 살아있었고, 내게 보여주던 그 웃음을 여전히 띄고 있었다. 너는 공주의 사랑을 받으며, 애굽의 역사를 배웠고, 애굽의 지식을 배웠다. 점점 나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날카로워졌지만. 괜찮았다. 네가 완벽히 젖을 떼던 그날, 그날 이후로 나는 수년간 너를 마주하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이따금 쏟아지는 나일의 폭우에 벽이 무너져 내리는 우리의 삶보다는, 화려한 애굽의 궁전이 너에겐 더 걸맞았으니까. 아이야 너는 아름다운 아이였으니까. 네가 살아 숨쉰다는 사실 만으로 나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설령 네가 더러운 히브리인이라며 나를 경멸하게 되었더라도.
그동안의 단절이 지난 후 내가 다시 너의 소식을 들은 것은 네가 애굽인 하나를 때려죽인 뒤였다. 히브리에게도, 애굽에게도 외면당한 네가 또다시 이방인이 되어 사막으로 도망쳤다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다시 야훼의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나는 힘없는 이방인이었고, 너의 어미도, 너의 가족도 아닌 그저 젖을 먹이던 히브리인일 뿐이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야훼를 불렀다. 곱던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하고, 새하얀 빛깔로 물들기 시작할 때까지, 너의 형 아론이 하나의 노인이 되었을 때까지 나는 끝없이 너를 위해 야훼께 부르짖었다.
“어머니, 잠시 쉬세요, 너무 많은 말을 하셨어요.”
오오. 아들아, 네가 지금 내 앞에 있으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니. 야훼께서 너를 건지셨다. 아론이 야훼가 자신의 꿈에 나왔다고 말할 때도, 네가, 내 아들 모세가 히브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꿈에서 깨기 위해 야훼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너는 지금 내 앞에 있다.
아들아 네가 야훼를 대신하여 행한 수많은 기적을 기억한다. 피로 물든 나일강, 개구리로 뒤집힌 애굽, 죽어가는 소들, 쏟아지던 메뚜기와 우박, 죽어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애굽 군인의 온몸에 돋아나던 종기, 애굽을 뒤덮은 어둠과 애굽인들의 가슴을 찢는 울음소리까지. 아이를 잃은 어미의 눈물을 나는 들었단다. 아아, 내 울음이 그 울음이 아니니 이 얼마나 아름답니.
“제가 잠시 물을 떠 올게요 어머니. 드신 다음에 말씀을 이으세요”
내 삶은 내가 안다. 야훼께 갈 시간이 되었어. 내 아들 모세가 야훼의 대리인이 되었고, 그의 손으로 홍해를 갈랐으니 내 무엇을 더 바랄까. 그저 끝없는 미안함과 후회가 내 마지막 발목을 부여잡았을 뿐이다. 너를 나일에 떠내려 보낸 것조차 야훼의 뜻이지만, 너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그 순간이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아이야, 모세야.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해 아직도 애굽 공주가 지은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너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어찌나 아프던지. 아이야, 미안하고 미안하단다.
“그런 말씀 마세요. 가나안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어머니. 제발 조금만, 조금만 기운을 내세요”
나의 죽음은 나의 선조들이, 너의 아비가 그러하였듯 뜨거운 모래 아래서 썩어질 것이다. 흩날리는 모래와 같이 모든 사막을 떠돌겠지. 나는 그런 마지막을 택하겠다. 내 아이, 내 아이야. 나는 너를 죽여야 살았고, 죽여야만 해서 너를 살렸다. 이제 야훼의 은총이 나의 마지막을 거두시길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오오. 야훼시여, 저는 어머니를 모르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 고작 수십 일을 함께하였다니……”
너에겐 수십 일이었지만, 나는 일생으로 너를 품었다. 야훼여 저 아이를 돌보소서
“샬롬, 평안 있어라. 아름다운 아이야”

아이를 죽여야만 했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너를 죽여야, 아이야 내가 너를 죽어야, 죽여야 우리가 살았기에, 우리는 너를 죽여야만 했다.
우리는 너를 죽여야 해서, 나는 나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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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설명
야훼-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히브리 방언
애굽-이집트의 방언
역청-배를 만들 때, 물이 새지 않게 하기 위해 바르던, 악취가 심한 나무진 같은 물질

무저갱-지옥 중 가장 깊은 곳, 성경에 따르면 사탄조차 두려워하는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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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신고만 하고 다시 도망칩니다 총총 – 292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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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것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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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을 보지 않았다. 아니 책을 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보기 싫어서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볼 수가 없어서 보지 못한 거니까. 19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순간들을 살아오며 이렇게까지 책에서 멀어진 것은 또 처음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혼란스럽다는 나의 상태를 밝혔으니, 평소의 내가 아니고, 평소의 내 글이 아니기에 읽어 달라 부탁할 수조차 없을 이 글을 이젠 써내려야한다. 내 혼란의 원인을 밝힐 시간이다.

평소의 나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질적인 버릇이 많다. 유독 글과 관련되면 더욱 심각해지는 그것들을 먼저 밝혀야 나의 이 긴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나는 내 부끄러운 고집들을 하나하나 적어보려고 한다.

그 중 가장 먼저 꺼내 놓을 버릇은 책을 읽을 때 작가의 이름을 보지 않는다는 것. 수많은 책을 읽었고, 읽으면서도 시험기간에 점수를 위해 외워야하지 않는 이상은 작가의 이름을 보지 않게 하는 이 버릇은 작가의 이름뿐 아니라 책이 나온 출판사도, 출판 연도도, 심지어는 제목조차 읽지 않고 책을 펼쳐들게 한다. 이런 괴이하고 특이한 버릇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으레 내게 물어보곤 한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그럼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글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보지 않노라고 답한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답이다. 좋아하는 글이, 문체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찾게 된다. 눈으로 가까워진 글은 한번쯤 따라 써보고 싶게 되고, 같아지고 싶어진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의 문체는 사라지고, 이것저것이 섞여버린 그 어떠한 것만이 남는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마음이 생기는 순간부터, 나의 글은 사라진다고 생각했었고, 그랬었기에 부러 보지 않았다.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읽지도 않았다, 매일 정해놓은 글을 쓰는 날이 돌아올 때면 그 어떠한 글들도 읽지 않았다. 문학시간이면 배우는 여러 아름다운 문장들도 기억 속에서 없애기 위해 부러 수업을 듣지 않고, 글을 다 쓰고 나서야 허겁지겁 밤을 새워가며 진도를 따라갈 때도 있었다. 이 또한 어째서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똑같이 대답했다. 내가 글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같은 책을 한 달에 3번 이상 읽지 않을 때도, 3번 읽은 책은 적어도 6주의 텀을 두고 읽을 때도, 내가 쓴 글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때도, 한번 써내려간 글은 다시 손대지 않는 고약한 버릇이 생겼을 때도. 나는 이 모든 게 내가 글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물론 이쯤 읽으면 예상할 수 있듯이 그것들은 글을 사랑해서 생긴 버릇이 아니다.

내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그래 조금은 모자란 7살의 어린아이에서부터 지금까지 숨을 쉬듯 책을 읽으며 살아온 나는, 4년 전 새롭게 정한 규칙들 속에서 제 나름대로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글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그 순간부터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3달 전 쯤 평소 문학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선생님께 자잘한 고민들을 꺼내 놓다가 글틴이라는 사이트에 대해 듣는 것과 동시에 글을 올려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날로부터 거진 10년을 글을 쓰며 살아왔고,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글을 보여주며 살아왔지만 최근 4년간 내가 쓴 글을 내가 아닌 남들에게 보여준 경험을 꼽는다면 한 손만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희박한 내가. 내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에게까지도 잘 보이지 않는 내가, 그런 내게 누군지도 모르는 남들에게 글을 보여주는 사이트를 이용하라니, 이 보다 어려운 숙제가 또 있을까.

원래 복잡한 일은 쉽게 피해버리는 나에게 처음 다가온 글틴은 ‘아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올리긴 해야겠구나’ 정도의 존재였고 그마저도 금방  기억 속에서 하얗게 지워질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내게 글틴의 존재를 알려주신 선생님은 유하고 부드러우시지만 정하신 한 가지는 꼭 이루고 마시는, 그런 끈기와 인내가 넘쳐나시는 분이셨고 나는 그런 선생님을 존경했기에 선생님의 조언은 꼭 듣고 싶었다. 그래서 노트 어딘가 끄적여놓았던 수필 하나를 올리는 것으로 학생으로써의 본분을 다했다. 그 뒤로 다시금 기억 속에서 흐려지던 글틴이 몇 건의 메시지로 찾아온 것은 내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사건 중 하나였다.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칭찬을 좋아하고, 그렇게 예쁨 받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내겐 글과 관련된 긍정적인 것들이 너무나도 어색하다. 칭찬도, 상도. 그 어떠한 것들도 글과 관련되어있다면 익숙하던 모든 것이 갑자기 너무나 낯설어져 평소처럼 예쁘게 웃어 보일 수가 없다. 흔하게 던져지는 말들에도 온 몸이 굳어버린다. 그런 내가 월장원 당선을 알리는 문자를 처음 보았을 때의 반응이 어떠했겠는가. 처음엔 불신했고, 두 번째엔 당황을 감추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방 안 이곳저곳을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현실을 외면했다. 결국 그런 나를 침대에 눌러 앉히고 나대신 문자를 다시 확인하던 친구가 메일 창까지 열어 내게 거짓이 아님을 일러주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고작 한 번 올렸을 뿐인 그 글로 또 다시 인정받아버린 것이었다. 후회가 한 가득 밀려왔다.

사실 나는 글로 칭찬 받는 것이 두렵다. 받아본 적이 없어서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정과 칭찬이 과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 인생의 반 이상을 글을 쓰며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인정과 칭찬은 내 인생 중에서 마치 엄마의 사랑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들 중 하나였다. 아직도 나는 자타공인 글쟁이이고, 한창 글을 쓰던 중학교 2학년 때 까지는 달을 걸러 한 번씩 상을 받거나 계절을 걸러 한 번씩은 시상대에 올랐었으니, 더 큰 상을 받는 것이라면 모를까. 글에서의 실패는 지루할 때면 흔히 하던 여러 공상들 속에서도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의 내 자만심은 상장이 쌓여가는 속도의 제곱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칭찬을 받고 싶어 수많은 글을 쓰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런 내가 친구의 칭찬과 환대에 홀려 N사에서 웹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14살의 겨울이었다.

스토리를 구상하고, 내용을 적어내려가기까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에 처음 올린 1화의 반응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미적지근했지만 점점 독자가 늘어나가기 시작했고 8화를 올렸을 때는 첼린지리그 중 베스트로, 15화를 올리기도 전에 베스트리그에 올라갔다. 내 연재 사실을 알던 몇 안 되던 친구들은 너는 천재가 분명하다며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다음의 스토리 진행상황을 물어봤고, 나는 그런 내게 주어지는 찬사가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베스트리그에 오른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내 거만은 하늘을 찔렀다. 정말 어리석게도 그때의 나는 오직 나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정도로 글을 잘 쓰면 조금 안 써도 되겠다고, 예전처럼 편히 책이나 읽어도 되겠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재미가 붙어 매주에 두 번씩 올리던 글은 점점 이런 저런 핑계로 미뤄지기 시작해 결국 한 달에 한 번 올릴까 말까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매일 아침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이던 노트는 여기저기 내던져져 4년을 넘게 찾았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배부른 자만심과 어리석음에 게을러졌고, 둔해졌으며. 더 이상 글을 사랑하지 않았었다. 그때의 글은 그저 나에게 찬사와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대체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였다. 어리석어도 행복했었고, 어리석은 자가 흔히 그러하듯 나는 내 자신이 현명하다 여겼기에 내 멋대로 사는 삶을 이어나갔다. 결국 개인 사정상 당분간 연재를 중지하겠다는 무책임한 문장 몇 개를 적어놓은 채 나는 소설을 삭제했고, 공지를 올린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내가 벌린 모든 일에 대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공지를 올리고도 거의 세달 만에 열어본 쪽지 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엔 연재가 늦어진다며 아프신 것이 아니냐는 둥에 걱정스런 말투들로 시작된 쪽지는 점점 날이 서기 시작해 작은 욕설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내 모든 걸 깎아내리는 독들로 변해있었다. 삭제하고 삭제해도 줄어들지 않는 욕설들에 지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계속해서 써오던 계정을 삭제했고, 핸드폰을 바꿨으며,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 그 어떠한 노력도, 변명도 하지 않고 도망친 뒤로 4년이 지났다. 불안정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계정을 삭제한 뒤로 반년 정도는 글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나 내 글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것을 보니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졌었다. 하지만 글과 멀어지면 그동안의 나의 삶이 사라질까 무서워 연필 대신 책을 부여잡았다. 당시 학교 도서관에 있던 수천 권의 책을 모두 읽고 난 뒤에야 겨우 연필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때 써 내렸던 문장들은 더 이상 내 글이 아닌 이리저리 섞인 그 어떠한 것이었고 나는 그것이 두려워 모든 대회 활동을 중지했다. 아무리 글을 써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할까 겁이 났고, 글로 온 세상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던 나의 야망찬 꿈은 그저 하루 한 번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는 백수의 삶으로 변했다. 나는 상처받았었고, 울었었고, 그랬기에 나를 지키고자 했다. 내게 상처를 준 것들로부터.

그때부터 규칙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몸이 익힌 버릇을 없애는 건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버릇을 들이고 나니 상처받는 일이 없어졌다.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지 않으니 실망 받을 일이 없었고, 책을 제한해가며 읽으니 남의 문장을 따라할 일도 없었다. 글을 정해 쓰니 내가 정한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고, 매일 책을 읽으니 글과 멀어질 일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 어릴 적의 열정을 찾기보다는 그저 그럭저럭 글을 이어가는 삶을 선택했다. 칭찬도 원망도 없는, 미적지근한 인생을.

처음 2년은 나름 괜찮았다. 진작 이럴 걸이라는 생각에 난생 처음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매워나갔다. 글을 보여주지 않아 칭찬을 받지 못하니 내가 잘 하고 있나 매일매일이 불안했고, 더 이상 열정에 불타지 않으니 붙잡을 꿈조차 사라진 듯 해 걱정에 밤을 지새웠다. 울며 새벽을 마주하는 날들이 늘어가던, 이젠 아무도 날 책임져주지 않을 성인에서 고작 한 발짝이 남았을 뿐인 고 3의 내가, 5월의 내가, 그런 내가. 글을 올렸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던 글틴에서 월장원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밀려들어왔을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당황스러웠고, 어색했고, 내가 그동안 헛짓을 한 게 아니었다는 기분에 행복했고, 이젠 다시 열정어린 나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휩싸였지만. 또 다시 가라앉을까 두려워 나는 또 다시 울었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메일엔 긍정적인 답신만을 적었지만, 나는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는 글틴에서, 제멋대로 기대를 잔뜩 부여한 채 압박감에 흔들리며 글을 썼다. 최근의 글들이 너무 못나보여 폴더를 뒤져 건진 글들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그런 글들은 쉽게 잊혀졌다.

제대로 된 글을 써내지 못할 수록 불안해졌고, 결국 시험을 핑계로 글을 피했다. 노트북에서 조금씩 자라가던 글들을 유에스비에 옮겨 집 안 상자 어딘가에 처박아버렸고, 노트 이곳저곳 끄적이던 글들을 찢어버리는 순간들도 생겨났다. 나는 과거가 반복될까봐 두려웠다. 글틴에서 욕을 들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웠다. 진정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찾고 다시 침착하게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당분간 글을 놓아야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글을 놓기엔 당장 눈앞에 다가온 성인에 내가 글이 아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억지로 부여잡았다. 그렇게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12년간 내 곁을 지킨 글은 그리 쉽게 내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글을 외면하기 위해 억지로 일들을 만들어 글에서 회피했다. 시험기간이 아닌데도 하루걸러 한 번씩은 밤을 새웠고. 독후감을 위해 억지로 책을 펼칠 때면 속이 미칠 듯이 울렁거려서 글을 읽은,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중에서 처음으로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덮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나마 진정이 된 듯싶어 노트북을 펼쳐보기도 했지만, 몇 글자 써 내리기도 전에 ‘이 글로는 인정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워버리자 글을 놓을 수도, 그렇다고 해서 망작이 될 것이 뻔한 글을 쓸 수도 없었었던 나는 노트북의 전원을 꺼버리는 것으로 점점 밀려오는 두통을 잠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면 바빠지는 생기부 시즌 덕에, 깊은 생각 없이, 글 없이, 책 없이 한 달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 오직 그거 하나 뿐.

고작 나는 이 정도에 흔들렸고, 이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이정도로 힘들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걱정일 수 있겠지만 나름대로 일생을 좌지우지할만한 큰 문제니 가볍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지금의 나는 어떠하냐고 묻고 싶어진다면(그럴 일이 없을 수도 있지만) 먼저 선수 쳐서 책을 봐도 울렁거리진 않지만 아직 책은 조금 꺼려지는 정도라고 답해놓겠다. 그 정도의 사실이 내겐 현실이니까. 사실 이 글도 다시 훑어볼 자신이 없어 그저 생각이 이어지는 대로 글을 쓰는 중이다. 글을 읽는 이들에게 먼저 사과의 한마디를, 혹여나 불안이 옮겨갔다면 사죄의 인사를. 제대로 된 결말이 없이 그저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삶을 살며 나는 작은 꿈을 하나 꾸고 있다. 매일 밤 엄마가 기도하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해서, 내게 다시 처음 스스로 책을 읽어 내리던 순간의 열정을 선물해주는. 소박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나는 이렇게 꿈을 꾸고, 이렇게 글을 써 내렸으며, 또 앞으로 한동안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삶을 살 것이다.

만약 나의 이런 허황된 꿈이 이루어져 다시금 내게 열정이 돌아온다면, 그땐 글틴에 내가 가장 아끼는 소설 하나를 올리고 싶다. 내가 써 내린 글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글을. 부디 9월이 지나기 전에 다시 돌아올 수 있길.

이렇게 나는 작고도 무거운 소원 하나를 올려놓고 내가 아닌 학생이 되기 위해 떠난다.

 

 

 

-익명의 긍정성에 대해 동의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런 일로 익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다니, 정말이지 하루 종일 모순적인 일들만 잔뜩 반복되는 것 같네요. 예, 뭐 저는 이렇게 살았고 당분간도 이렇게 살 것 같습니다. 어릴 적의 내 꿈대로, 정말 내가 행복하기 위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시간과 생각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당분간 저 멀리 도망쳐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마음 편하게 책도 읽고, 가끔 쓰고 싶으면 글도 조금 끄적여보고, 좋아하는 작가님도 몇 분 만들어 오겠습니다. 머리맡에 놓을 책들도 몇 권사고, 틈틈이 살도 좀 빼보고요. 변명은 위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놨으니 이젠 그만 사라져보도록 할게요. 마치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썩어가는 호박은 잠시 사라지겠습니다. 아름다운 마차가 되어 돌아오면 그때 여러분을 제 글에 태우도록 할게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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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 노력, 눈물, 절망, 후회,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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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실 책상에서 풍겨나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사각사각 깎여가는 생명을 따라
까맣게 타들어가는 또 하나의

 

울려오는 종소리에 숨어
땅으로 들어가는 저 미세한 또 하나의

 

빨강 그리고 검정 부드러운 산 속에서
홀로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파란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벼락에
회색 세상이 젖어드는 또 하나의

 

뚝뚝 떨어지는 냉기 사이로
남몰래 숨어든건 뜨거운 또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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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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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을 전해주세요

저 멀리 아득한 그 곳에는

푸름을 모르는 이들이 가득하답니다

일렁이는

밀려오는

흘러가는

저 높이 어딘가의 저 푸름도

그 어떠한 푸름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하얀 공백 속에 살고 있는 이들만이

아스라히 저 멀리

그 곳에 있답니다

그들에게 푸름을 전해주세요

함성과 기쁨의 눈물을 전해주세요

흩날리던 푸름과 하나의 열정을 전해주세요

펄럭이던 하나의 깃발을 전해주세요

온전히 온전해진 대지의 푸름을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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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난 별이 될 거야

은하수 따라 이리저리 출렁

반짝이는 빛들을 따라 이리저리 반짝

저 멀리 어딘가 모두가 가는 곳에 다다르면

알싸한 푸른 빛이 두 볼에 와닿으면

저 멀리 보이는 건 동그랗고 작은 초록 알갱이

있지 끝이 없는 곳에 가서

있지 나는 별이 될 거야

저 하늘 멀리서 한번 반짝

반짝 거리고선

다시 달려갈테지

초록색 알갱이를 향해

멈추지 못하는 마라토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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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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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어.
너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어.
-분명 우산을 챙겼었는데 가방은 텅 비어있어서 별 수 없이 빗속을 뚫고 달렸어. 비에 젖어 질척해진 흙이 신발이랑 바지에 잔뜩 들러붙었어. 그날따라 택시가 안 잡혀서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거기에 네가 있었어.
창밖의 저녁노을이 열린 창문을 따라 아스라이 흘러들어왔어. 왠지 모르게 심장이 계속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네 목소리가, 그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메웠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상태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며 너는 돌처럼 굳어졌었지. 솔직히 난 네가 나한테 화를 낼 줄 알았어. 막 닦은 듯 반짝반짝 했던 바닥에 내 신발자국만 가득 남았으니까.
너는 조용히 속삭였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너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 얇고, 잔잔하게.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해줬잖아
네 입술과 같은 모양으로 내 입술을 움직였어. 서로의 입이 하나의 문장을 그려냈어.
– “우산 드릴까요?”
너의 눈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지. 약간의 침묵을 뒤로 하고 너는 다시 말했어.
-이미 다 젖어버렸는데 말이야. 하긴, 그때 내가 한 말이 더 가관이었지, 뭐라고 했더라??네 손이 목덜미를 쓸며 내려갔어. 천천히 울리는 내 목소리가 살을 쓸어내리는 소리를 덮었어.
-우산은 필요 없는데……. 혹시 드라이기 있어요?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어. 웃음이 전염되듯 너도 함께 웃었지.
-눈앞에 생생해, 서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결국 큰소리로 웃어버린 우리가
연이어 말을 하는 네 표정이 즐거운 추억으로 빛났어. 너는 계속해서 기억을 이어나갔지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몸을 돌려서 계산대 쪽으로 가버리는 거야, 아무 말도 없이. 기분 나빠진 건가 하면서 혼자 주눅 들어 있었는데 네가 수건 몇 장이랑 큰 담요를 한 장 들고 나왔어. 그리곤 맑게 웃어 주면서 말했었지. “일단 이걸로 대충 닦아 봐요. 그렇게 젖은 옷은 드라이기로 아무리 말려도 안 마를걸요??”라고, 쭈뼛쭈뼛하면서 받아들고선 얼굴의 물기 먼저 닦았지. 수건에 얼굴을 묻자마자 올라왔던 자몽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넌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뒷목을 잡고선 네 쪽으로 훅 끌어당겼어. 너의 가냘픈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질거렸어. 씁쓸한 약냄새가 코끝을 스쳐지나갔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넌 그렇게 한참동안 내 귀를 간질이다 다시 환하게 웃으며 날 놓아주며 말했지
-이 냄새 진짜 좋아, 다른 여자들이 이 향수 안 썼으면 좋겠어. 이 냄새 맡을 때마다 계속 네 생각난단 말이야.
네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너한테 물었어.
-이 냄새가 그렇게 좋아? 나 이제 향수 바꾸려했는데, 자몽은 어려 보이려 애쓰는 것 같아서 이제 싫어.
내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너는 그 검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어색하듯 바라보니까 빙긋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
-네 냄새라서 좋은 거야, 무슨 향이든 다 좋아.
그 바보 같은 웃음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말했어.
-뭐야 그게 바보 같아, 그럼 내가 담배연기 풀풀 풍기면서 와도 좋아할 거야??
고민하듯 찡그려지던 미간이 이내 펴지며 환히 웃었어.
-그럼 네가 다른 냄새가 좋아질 때까지 향수가게 데리고 다니면 되지,
뿌듯한 표정을 짓는 네가 너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었어.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속삭인 목소리에 너도 빙긋 웃었어.
-맞아, 그때도 이렇게 네가 내 머리 쓰다듬고 있었지, 정확히는 수건으로 내 머리를 닦아준 거였지만.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추억을 끄집어냈어.
-기껏 수건까지 가져다 줬는데 말이야, 물기도 제대로 못 닦을 줄 누가 알았겠어. 머리는 닦을 생각도 안했었지 너?? 아무리 몸을 열심히 닦아도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옷이 계속 다시 젖었는데.
-진짜 그땐 아무 생각도 없었어. 그냥 너무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빨리 닦고 뭐라도 사서 나가려고 했었지.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로 닦고 있었는데 계산대에 서있던 네가 한숨을 쉬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수건을 빼앗아가서 난 엄청 당황했었다고,
그 말에 내가 내 기억들을 덧붙였어
-봄이라 해도 그날은 유달리 춥던 날이라 금방 감기 걸릴 텐데 미적미적 닦고 있으니까 답답하지 안 그래??
내가 동의를 구하듯 너를 바라보니까 너는 내 말이 다 맞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어.
-그래도 내가 열심히 닦아줘서 금방 다 닦였잖아. 키 차이가 너무 나서 내 팔이 너무 아프긴 했었지만.
-네 손이 엄청 빨랐었지
너는 조용히 속삭였어,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날 보며 환히 웃었지.
-그랬어서 다행이야, 네가 조금만 더 오래 내 머리를 말려줬다면 뭔 일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음흉한 표정을 지어내는 네 목소리가 너무 순진무구해서 피식 웃었어. 네가 덧붙였지
-자몽향기가 그렇게 아찔하게 느껴질 줄 누가 알았겠어, 끌어안고 싶어졌다니까 갑자기.
장난 어린 표정으로 “그때 확 안아버릴 걸 그랬나.” 라며 중얼거리는 너의 볼을 콱 꼬집어버렸어. 아픔에 칭얼대는 널 흘겨보듯 바라보며 말했지
-안기면 안아준대?? 내가 요즘 얌전히 춤만 춰서 까먹은 모양인데, 나 주짓수 퍼플벨트인거, 잊었어?? 자몽향 맡으려다 바닥에 패대기쳐졌을걸??
슬쩍 볼을 놓자마자 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네가 날 째려봤어. 그리고 삐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지
-그냥 장난이지 장난, 나 그렇게 변태 아니거든??
그 모습에 쪽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가 꼬집었던 볼에 입을 맞췄어, 가뜩이나 붉어진 볼이 더 붉어졌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슬쩍 몸을 뒤로 빼는 네 모습에 내가 싱긋 미소 지었어,
-심술궂어……,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리는 네가 너무 좋아서 네 얼굴을 가린 두 손에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어,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내 손을 따라 끌려 내려오는 손 사이로 보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나도 모르게 깔깔 큰 소리로 웃어버렸지. 그 소리에 넌 터져버릴 것 같이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오르며 다시 얼굴을 가리려 손에 힘을 줬어. 나도 널 따라 손에 힘을 주고선 네 손이 못 올라가게 막아버렸지. 장난스럽게 너에게 물었어.
-우리 현이 감기 다 안 나았나보네, 얼굴이 후끈후끈해.
-누구 때문인데……,
고개를 돌려버리며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네가 순간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황급히 너를 달랬어. 다행히 금방 풀어져선 다시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널 보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지. 창밖을 보니 벌써 밤이 되어 있었어, 잠깐 죽만 전해주려던 게 너무 늦어져버리자 한숨을 쉬며 일어났어.
-가는 거야??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애달프게 날 바라보는 네 시선에 피식 웃으면서 시간을 확인했어. 어차피 버스도 다 끊겨버렸을 시간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너의 옷장에서 네 잠옷을 꺼내들었어. 그리고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너에게 말했지.
-이 늦은 시간에 내가 집까지 걸어가길 원하는 거야??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너에게 기다리라 하고선 화장실로 들어갔어. 한 화장은 없었지만 하루 종일 쌓였을 먼지가 찝찝하게 느껴졌어. 머리를 올려 묶고 막 물을 틀려는 순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어. 언뜻 보이는 익숙한 이름에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지. 전화가 끊기고 다시 울리는 메시지 알림 음에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확인했어.
너 어디야
진짜 정신 나갔지
전화 받아
상 치르고 싶은 거야?? 그 상태로 어딜 나가 나가긴
-말 안 해도 아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껐어, 점점 심해져오는 가슴 통증에 알약을 꺼내 삼켰어. 끊임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물에 얼굴을 묻었어. 끊어내야 하긴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어. 오늘 만큼은, 아냐 오늘이어야했지만. 그랬지만. 오늘 밤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내 심장에게 변명했어.
-지금 말해도 집에도 못갈 텐데. 나 집엔 가야할 거 아냐
아무도 못 들을 혼잣말을 내뱉고선 난 다시 물속에 내 얼굴을 묻었어. 얼굴을 구석구석 과할 정도로 닦아내고서야 달아오른 얼굴이 진정이 됐어. 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고 화장실을 나서자 기다리다 지쳐 잠들어버린 네가 보였어. 나도 모르게 풀어지는 긴장감에 네가 깨어버릴까 일부러 조심조심 걸었는데 어느새 깨어버린 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지. 왠지 모를 미안함에 얼른 걸어가서 침대에 앉았어. 네 온기가 침대 전체에 가득했지.
-얼른 자
이불을 꼭꼭 덮어주며 등을 토닥였어. 며칠을 잠을 설쳤다는데, 괜히 방해하기 미안했어. 잠에서 깨려고 억지로 눈에 힘을 주는 네 모습에 또 웃음이 터져버렸어.
-뭐가 웃겨……, 내가 웃겨??

비몽사몽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네 모습에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어주다 네 손을 꼭 잡았어. 졸려하면서도 헤실헤실 웃어버리는 네 모습에 순간 흔들렸지만 심장이 욱신욱신 아파오자 정신을 차렸어. 내일은 우리가 헤어져야 했어. 헤어질 날이었어.
나는 그 순간을 되새겼어. 우리가 평생 함께해야할 이유가 아닌,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들은. 그날, 그 시간 속의 그 순간을.
나는 진료실의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검사에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가 내 귓전에 울렸어.
-암이에요.
순간 코끝을 찔러오는 소독약 냄새 덕에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오는 걸 부여잡으면서 다시 물으려는데, 잔잔한 담담 의사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진료실 안을 울렸어.
-폐암 말기에요. 여기 보이시죠??
레이저 포인터를 따라 고개를 돌렸어. 벽에는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사진이 걸려있었고, 내 이름이 적혀있는 내 폐 사진에는 이것저것 흉한 덩어리들이 붙어있었지. 믿을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의사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안 그래도 아픈 내 가슴을 찔러왔어.
-지금 전이가 많이 된 상태라서 수술이 어려울 수 있어요. 차트에는 비흡연자라고 되어있던데, 정말 비흡연자 맞으시죠?? 비흡연자분이 이렇게까지 증상이 심각한 경우는 흔치 않거든요. 폐암이 증상 없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지만 이정도면 꽤 증상이 심하셨을 텐데……, 정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셨어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소리라도 버럭버럭 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내 머리가 너무 차분하게 느껴졌어. 아마 예상하고 있던 거겠지. 요즘 너무 행복했으니까.
-치료 받으면 얼마나 살 수 있어요??의사선생님의 표정이 굳어졌어.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셨지
-선생님 저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울려나왔어.
-수술이 성공적으로 된다 해도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재발 가능성도 높고요.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바로 항암치료 들어가고 수술 들어간다면 최소한 1년, 아무런 치료 없이 방치하시면 3달 남짓일 겁니다. 진통제로 버티시기도 점점 어려워지실 테고요. 치료일정 잡으시겠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 현실이 아닌 것 같았어. 이제 겨우 행복해지려 했는데, 다시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똑바로 마주봤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지
-저 치료 안 받을게요 선생님,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던 것 같아.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소리가 진료실 안을 울렸어, 그리고 목소리가 내게 말했지.
-진통제는 일단 한 달 치 처방해드릴게요, 일단은 하루 3번이지만 아프지 않으실 때는 안 드셔도 되고요, 아프실 때마다 드시는 것도 안 됩니다. 약이 독하니까 밥도 꼭 챙겨 드시고요. 시한부 판정 받고 나가셔도 건강해지셔서 돌아오시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자연 치료법도 좋으니까요, 최대한 매연들 피하시고 여유가 되시면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시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그 뒤로도 뭔가 말씀하신 것 같았는데 기억은 나질 않아. 그냥 얌전히 처방전 받고, 진통제 받고, 평소처럼 버스타고 집에 와보니까 어느새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어. 나 많이 억울했나봐. 근데, 근데 말이야. 내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보다 더 슬펐던 건. 나 진짜 아무에게라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연락할 사람이 없더라. 생각나는 건 너였는데 너에게 연락을 할 순 없었어. 알잖아, 나 어릴 때부터 신기할 정도로 감이 좋았던 거. 너에게 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잘 느껴져서. 잘 떠올라서. 너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어. 그날 그냥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지. 새삼스럽게, 일찍 죽어버린 엄마가 원망스러워졌어.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 잠은 오지 않은데 밤은 너무 길었지. 나도 모르게 계속 뒤척거리니까 네가 잠에서 깼어, 비몽사몽 정신도 제대로 못 차렸으면서
-왜 안자아?? 빨리 자……, 피곤하면 안 돼…….,
내 걱정만 하는 널 보니까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널 두고 나 혼자 가지,
생각만 더 깊어졌어, 서로의 손에 손가락을 걸고 했던 그 약속, 우리의 앞날이 영원할 거라는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으려나봐. 우리에게 영원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나 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는데 억지로 닦아냈어. 계속 끊임없이 흘러서 슬며시 침대에서 일어났어, 어느새 쫓아와 내 옷자락을 붙잡는 손을 조심조심 풀어내며 속삭였어
-어디 안 갈게, 자고 있어.
그 말 한마디에 안심이 된 건지 사륵 풀리는 손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숨어버렸어. 변기에 쪼그려 앉아 숨죽이고 울어야하는 내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어. 왠지 모르게 목이 갈라지면서 기침이 나왔어, 쿨럭쿨럭 소리가 비집고 밖으로 나가서 너를 깨울까봐 입으로 막아가며 겨우 기침을 삼켰어. 기도를 가르며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을 뱉어내니까 어느덧 내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어, 고통의 흔적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어.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입술을 짓씹었어. 세면대를 타고 내려가는 붉은 선혈들이 내 미래일 것 같아서 무서워졌어. 내 눈물로 피를 씻어내고 나니까 눈가가 너무 흉하게 부어올라있었어. 찬물로 겨우 식혔는데 고이 잠들어 있는 네 모습을 보니까 다시 눈물이 흘렀어.
-어떡해 현아?? 응??
이미 잠들어버린 너에게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했어. 한참을 그렇게 널 보며 숨죽여 울다가 겨우 자리에 누웠어. 나도 모르게 감긴 눈에 또 다른 밤이 찾아왔어. 문득 눈을 떴을 때, 너는 날 보며 웃고 있었지.
-잘 잤어?
너의 물음에 나는 그냥 피식 웃었어. 그리고 손을 뻗어 널 끌어안았어. 훅 딸려온 네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질였어. 두근두근 거세진 너의 심장소리가 내 심장을 울려왔어.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전해져오는 통증에 나는 몸을 일으켰어, 네 손이 내 옷자락을 꼭 쥐자 나는 그 손길을 풀어내며 말했어.
-씻고 올게,
너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이내 내게 빨리 다녀오라고 말했어. 나는 슬며시 웃어주고선 방을 나섰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밀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어, 위험했어, 더 있다간 오히려 너에게 상처를 줄 뿐일 텐데. 뜨거운 물줄기가 내 온 몸을 감쌌어, 바닥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수증기가 찬 공기만 맴돌던 욕실을 가득 메웠지. 몸을 다 씻고 나서도 김이 서린 거울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물을 끄고 나왔어.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와 보니 네가 드라이기를 꺼내들고 기다리고 있었지.
-네가 말려주게?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너를 보면서 나는 네 앞에 가서 앉았어. 위잉 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적당한 바람이 기분 좋았어. 머리칼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네 손가락이 기분 좋았어.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머리만 말리다가 너는 내게 말했어.
-어제 잠은 잘 잤어?? 좀 설치는 것 같던데
-아아 베게가 내 베게가 아니라서 그래, 내가 베게에만 좀 예민하거든.
-흐음 그렇구나.
그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흘렀어. 이때야. 지금 꼭 말해야 해. 속으로 담아둔, 그동안 연습해왔던 한 마디를 꺼내려는 순간 너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왔어.
-슬아, 우리 결혼할까?
순간 몸이 굳었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도 말해야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어. 드라이기 소리마저 울리지 않는 방엔 음산한 침묵만이 맴돌았어. 너는 한숨을 쉬더니 다시 드라이기를 켜서 머리를 말렸어. 위잉 소리가 방 안을 울렸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어. 네가 머리를 다 말리자마자 어떻게 방을 나서긴 한 거 같은데. 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아. 나는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어. 버릇처럼 불러준 주소로 달려가자마자 지연이가 날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지연이에게 된통 혼나야 했어. 지연이가 말했지
-너 진짜 제정신이야?
라고. 나도 알아,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욕심내면 안됐던 거였는데 또 욕심을 내버린 거야.
-한슬! 제발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그렇게 미련하게 버틸 거야?
나는 혼이 나간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어.
-현이가 나랑 결혼하재
지연이가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어.
-뭐? 뭐라고?
나는 다시 말했지, 또박또박 한자 한자에 힘을 실어서.
-현이가 나랑 결혼하재.
지연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어. 나는 그 손길에 이끌려 정처 없이 흔들렸어. 머리가 뱅글뱅글 어지러웠어. 욱신욱신 아파왔어.
-야 한슬! 설마 알겠다고 한 건 아니지, 설마 알았다고 했어? 결혼 하겠다고?!!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어. 지연이의 손이 스륵 풀려 떨어졌어. 지연이는 머리를 마구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어. 그리고 말했어.
-당장 가서 말해.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어. 있는 힘껏 저었지. 지연이가 계속 내 손목을 잡고 끌었는데 내가 온 힘을 다해서 뿌리쳤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심장을 찔렀어
-말 안하면, 그냥 결혼이라도 하게? 숨긴 채로 살게? 그 애도 알 건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래도 남친 인데. 3년을 만났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어.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었어.
-내 입으로 말 못해, 어떻게 말해. 지 잘못도 아니면서 후회만 할 거 뻔히 아는데, 자기 탓으로만 돌릴 게 뻔히 보이는데……,
그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제 멋대로 흘러내렸어.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어. 결국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어. 안 그래도 아프던 가슴이 더 찢어질 듯 아파 와서 숨이 안 쉬어졌어. 너무 아파서 바닥에 나뒹구니까 지연이가 알약 몇 개를 가져다줘서 생으로 씹어 삼켰어. 찬 냉수를 몇 잔을 들이켜도 입 안에 쓴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어. 지연이가 다시 말했어.
-말 안 할 거면 헤어지기라도 하던지
나는 힘없게 고개를 들어서 지연이를 바라봤어. 지연이는 다시 거칠게 한숨을 쉬더니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어. 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하나 건네주더라.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라이터로 겨우겨우 불을 붙여서 쭉 빨아들었어. 처음 경험해보는 매캐한 연기가 기도를 타고 내려갔어. 목이 쓰라리게 아파오는데 하나도 안 아팠어.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주룩주룩 눈물만 흘렸어. 계속해서 눈물만 흘렸어. 끊이지 않는 불이 필터까지 다 태워버릴 때까지.
폐암 말기래. 참 어이없게도 내가 그 병에 걸렸다더라. 매일 담배만 피우던 아빠도, 그 옆에서 끈질기게 버텨오던 엄마도 안 걸렸는데, 평생 담배 한번 안 피워본 내가 그 병에 걸렸다더라.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럴 힘도 안 나왔어. 어쩌면 이미 눈치 채고 있었을지도 몰라, 평생 담배연기를 피하며 살아왔어도 말이야.
솔직하게 말했으면 달라졌을까? 너는 여전히 날 보며 웃어주고 있겠지. 다만 내가 병실에 누워있고, 너는 내 옆에 앉아 있겠지. 내가 아픈 걸 알면 너는 네 아픔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며 떨쳐내고 일어날 거야, 하루 종일 내 손만 잡아주겠지. 내가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차가워진 내손에 핫팩을 들려주겠지. 너는 그런 애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왔어,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눈물이 계속 흘렀어, 날 따뜻하게 안아주는 지연이가 있었지만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보였어, 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어. 절대, 절대.
-더 오래 끌면 더 힘들어질 거야
지연이의 목소리가 내 아픈 심장을 찔러왔어. 말해야지 말해야지, 용기를 냈는데 용기가 나지지 않았어. 3년이란 긴 시간을 지워버리기엔 3달은 너무나 짧은데, 하늘은 날 도와주지 않았어. 도와주지 않겠지.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어, 끊임없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어. 나는 너를 밀어내야 하는데, 너는 한결같이 내게 다가왔어
-마셔
한참을 그렇게 머물러 있었나봐. 뜨거운 머그잔에서 나오는 온기가 손을 타고 온 몸에 퍼지는 것 같았어. 호호 입김을 불어 억지로 물을 식혔어. 미적지근해진 물을 겨우 삼켰지.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겨우 핸드폰을 다시 들었어. 주소록을 찾지 않아도 거침없이 눌러지는 키패드에 문득 몸이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전화를 걸었어.
-딸깍, 슬이 남편입니다, 무슨 볼일이시죠??
통화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보나마나 핸드폰만 부여잡고 있었을 네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계속 울려왔어
-여보세요?? 슬이야, 슬아?? 무슨 일 있어??
눈가가 뜨거워졌어. 약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슴이 다시 욱신욱신 아파왔어. 네 목소리가 다시 날 흔들기 전에 얼른 굳어진 입술을 움직였어.
-스ㄹ…….
-우리 그만하자
수화기 너머로 굳어진 네 얼굴이 보이는 듯 했어. 놀랄 때마다 버릇처럼 갈라지는 목소리가 어김없이 울려왔어
-싫어
-헤어지자 현아
-싫어……,
떨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어. 더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았어.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꼭 쥐었어. 일부러 차갑게 내뱉어버렸어.
-지금까지 너한테 받은 것들, 내일 택배로 보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돌려주지 마……, 안돌려주면 안 돼??
너는 어느새 펑펑 울어버리고 있었어. 겨우 숨을 삼키며 내뱉는 목소리가 아프게 날 찔러왔어. 그 목소리로 나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내 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내가 남길 건 추억뿐이야. 더 질질 끌면 추억도 못 남겨.
-슬아……, 슬아……,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네 어깨가 눈에 선했어, 달려가서 끌어안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지마 응? 갑자기 왜……., 아냐 그냥 내가 다 미안해, 미안하니까……, 우리 만나서 이야기해. 만나자 지금. 내가 갈게. 너에게 갈게.
순간 모든 생각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어서 다리가 근질근질 해왔는데, 벌떡 일어나기 까지 했는데, 욱신거리는 심장 덕에 정신을 차렸어. 부들부들 떨리는 휴대폰에 한 단어를 전해 보냈어.
-미안
뚝 소리와 함께 너의 소리가 끝났어. 힘이 풀린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떨어졌어.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지만 애써 외면했어, 나도 모르게 뻗어가는 손을 지연이가 막았어. 우웅 진동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꺼졌어. 뚝, 기억이 끊겼어.
몇날 며칠을 텅 빈 껍데기로 지냈어, 눈을 뜨고 제때 약을 먹고, 제때 밥을 먹고, 제때 자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니까 네가 보고 싶어졌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어. 담배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던 지연이가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 내가 신발장에 다가서자 지연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낚아챘어, 팔이 아픈 걸 느낄 새도 없이 쿵 엉덩방아를 찧었어. 아프더라. 가슴도, 팔도, 엉덩이도, 다 아파서 신발장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어. 한참을 그렇게 울었어. 묵묵히 내 등을 두드려주던 지연이도 울었어.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야 우리가 이별했다는 게 실감이 났어, 내가 널 끊어냈다는 게 느껴졌어. 우리가 끝나버린 게, 다신 널 볼 수 없단 걸 깨달았어.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지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눈을 떴어, 겨우 몸을 일으키자마자 책상에 앉았어. 오래전부터 모아오던 편지지를 꺼냈어. 뭐라도 써야했어. 뭐라도 남겨야했어. 미친 듯이 종이를 채워나갔어. 텅 비어있던 휴지통에 하나 둘 구겨진 종이들이 채워졌어.
뭐라고 시작해야할까, 안녕이란 말을 할 순 없었어, 뭔가 우리의 미래가 남아있을 것 같아 보이잖아. 수많은 단어들이 생각났지만 하나도 적을 수가 없어서 겨우 네 이름을 적었어.
-이현. 앞으로 이 이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아 현아.
고작 한 줄을 썼을 뿐인데 눈물이 너무 흘러나와서 편지지를 치웠어. 미친 듯이 울다가 다시 편지지를 꺼내 이어 썼지.
-나쁘게 말해서 미안해.
문장들이 끊겨갔어, 뭐라고 말해야 네가 날 이해할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그 가련한 여주인공의 모습이 내가 되자 겨우 이해할 수 있었어. 내 비참한 마지막을 너에게 보일 순 없었어. 그 모습까지 보인다면 넌 절대 날 떠나지 못할 걸아니까. 평생을 후회할 걸아니까
-그렇게 차갑게 널 밀어내놓고 다시 이렇게 널 붙잡아서 미안해.
손가락이 욱신거릴 때까지 편지를 썼어. 눈물이 흐르든 흐르지 않던,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어.
-너의 맑은 웃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어. 어두운 창밖으로 눈이 끊임없이 내렸어. 뭔가에 홀린 듯이 창가에 다가서니까 네가 보였어. 고개를 들어 올린 너와 눈이 마주쳤어. 상처받은 네 눈동자가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어. 손이 부득부들 떨려왔어. 삑삑 현관소리와 함께 들어온 지연이와 눈이 마주쳤어 뭐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밖에 지연이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더니 밖으로 나갔어. 실랑이 소리가 들리더니 지연이 혼자 문을 열고 들어왔어. 네가 문을 뚫고라도 들어오길 기대했나봐. 그랬다면, 네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걸 털어놓았을 텐데. 날 기억해달라고 애걸했을 텐데, 네가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돌려서 집 안으로 들어갔어. 세수도 안하고 양치도 안한 채로 침대에 누웠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어. 뜨끈한 온기가 원망스레 내 폐를 쿡쿡 찔러 들어왔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너는 집 앞에 서있었어. 망부석처럼 한참을 서 있다가 지연이가 화를 내며 나가면 떠돌이 개처럼 쫓겨났지. 고마우면서도, 두근거리면서도,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
홀로 남아있던 시간동안, 그 외로웠던 순간들 속에서 난 네가 보고 싶어질 때 마다 글을 썼어, 손가락에 굳은살이 잡혀버렸어. 이젠 네가 안 좋아할 지도 모르겠어, 손가락이 울퉁불퉁하니까.
-나 좀 있으면 죽는다더라. 정말 어이없지,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우리의 영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나봐. 그저 공중에 스러질 꿈같은 것이었나 봐. 깨어나면 사라지는.
여기까지 쓰고 편지지를 접었어. 억지로 걸음을 떼어 침대에 누웠어. 3달, 3달 동안 정리해야 할 게 너무 많았어. 밤을 새워 기억을 쏟아내는 날이 늘어날수록, 먹어야하는 약이 늘어났어, 항암치료 항암치료, 약을 먹는 것도 너무 괴로운데 어떻게 그 치료를 견디는지 상상하기도 힘들었어. 그렇게 빼고 싶었던 살이 쭉쭉 빠져나가니까 이젠 어떻게든 살을 찌우고 싶어졌어. 뭘 먹어도 토해내는 통에 이루진 못했어.
-솔직히 아직 살고 싶어, 살아서 내년의 봄을 보고 싶어. 내년의 벚꽃을 보고 싶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찬란한 사월의 봄을 다시 보고 싶어.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힘들면 힘들다. 곧이곧대로 말했으면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을까? 조금 추한 모습 보이더라도 다 나아서 지금 환하게 웃고 있었을까? 하지만 진짜 아프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어, 평소에 너무 아프게 살아왔으니까. 찌릿찌릿한 통증 따위 느껴지지도 않았어, 속이 너무 곪아버려서. 암도 마음 놓고 자라났나봐.
옷장 안에 처박혀있던 낡은 카메라를 꺼내들었어. 팔에 힘이 없어서 그런지 삼각대에 연결하는 단순한 작업에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 겨우겨우 카메라를 설치하자 밤이 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어. 다음날 일찍 일어나자마자 이빨이 딱딱 부딪힐 만큼 차가운 물로 온 몸을 씻었어. 머리칼이 딱딱하게 굳었어. 너랑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던 화장을 다시 했어. 네가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치마도 입고, 내 마지막 모습이 아픈 환자인건 싫어서. 그래서. 한참을 거울 앞에 머물러 있다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카메라 앞에 앉았어.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갔어. 나의 마지막 시간들을 담았어.
수북이 쌓인 편지지들을 곱게 접어 봉투에 담았어. 그동안 모아놓았던 사진들도 전부 함께, 내 마지막 모습도,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니까 후련해졌어. 해탈이라는 게 이런 걸까
-슬아
나를 부르는 지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어.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집 앞에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어.
-금방 갈게
내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져버렸어.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천천히 나의 흔적들을 담았어. 커다란 봉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앉았어, 소독약 냄새 가득한 병동에서의 일주일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었어. 나 혼자 마무리 할 생각이었어. 띵 맑은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 깜빡깜빡 빛이 들어왔어. 익숙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며 너에게 말을 했지
-기록을 남기는 것도 마지막이야
잠깐의 정적이 흘렀어. 예약시간까지 겨우 1시간 남짓 남았을 뿐이었지.
-네가 이 영상까지 볼 때면, 나는 이미 온 세상을 탐험한 뒤일 거야.
억지로 입 꼬리를 밀어 올리며 웃었어. 목소리가 떨렸어
-평생 꿈이 죽어서야 이루어진다니까 조금 슬프네.
고개를 들어 지연이를 바라봤어, 변함없이 부드러운 눈빛이 나를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어. 용기를 내서 다시 카메라를 바라봤어.
-마지막까지 고집 부려서 미안해. 내 몫까지 행복해지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불가능하단걸 나도 아니까. 하지만 적어도, 언젠가는, 단 하루만이라도. 나를 잊고 행복하게 웃는 날이 있었으면 해. 나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생겼으면 해. 너는 바보니까, 금방 잊을 수 있을 거야.
문득 속에서 다시 울컥하고 올라왔어. 꾹꾹 눌러온 진심이 밀려올라왔어. 다시 터지려는 울음을 꾹 누르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어.
-사실 날 잊지 말아줬으면 해, 사실 죽는다는 거 엄청 무서워, 나. 금방 잊혀질 것 같아서. 왠진 모르지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금 너무 무서워.
뜨거운 감각이 부드럽게 볼을 타고 내려갔어.
나를 재촉하는 지연이의 손이 보였어.
-나 이제 가야해, 이런 영상도 이제 마지막이야. 네가 너무 힘들어하면 전해주라고 지연이한테 부탁해놨어, 지연이 약속 꼭 지키는 거 알지? 난 이 영상이 너에게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너에게 간다면,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날 위해서 제발 행복해줘.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 구겨진 치맛자락을 곱게 폈어. 그리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어.
-안녕
나는 천천히 카메라를 껐어, 익숙하게 메모리카드를 꺼내서 봉투 안에 넣었어. 3년이 이렇게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시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폴을 잔뜩 칠해서 단단히 닫아버렸어. 큰 봉투 안에 다시 넣고, 더 큰 봉투 안에 다시 넣었어.
-이젠 진짜 안녕이네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흐트러지려는데, 익숙한 메아리가 울렸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서 봉투를 놓쳐버렸어.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아버렸어.
-안녕
네 목소리가 텅 비어버린 날 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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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글을 올리는 대신 2개의 글을 올려요. 6월에 올릴 두번째이자 마지막 글인 '안녕'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글틴에 올리는 이야기는 다 하나같이 우울한 이야기 뿐인 것 같네요. 요즘엔 나름 즐거운 이야기도 많이 쓰고 있는데. 아마 몇 년 전의 저는 꽤나 불행했었나봐요. 아니면 공감능력이 뛰어났던지. 이 글 역시 조금 오래 된 글이지만 그저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래요. 이왕이면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식상한 고민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면, 새로운 글로 찾아올 수 있겠죠. 그럼 그때 다시 뵈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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