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콜론
목록

출발:
 
과학자들은 그 병의 이름을 ‘세미콜론’이라고 붙였다. 최초 발병자나 발병원인조차 밝혀진 바가 없지만 악명만큼은 무척이나 발이 빨랐던 병. 발병 시 생존율은 고작 3.2퍼센트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의 본명本名은 전쟁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병의 감염 방식이 단순히 호흡기나 신체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 병의 악명을 키우는 데에 큰 몫을 했다. ‘세미콜론’은 오로지 특수한 호르몬의 접촉을 통해서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지, 어째서 병원체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지, 이것이 그저 새파란 꿈은 아닌지가 차례로 논의되었다. 부정과 확인과 외면과 대응책이 두서없이 오갔다. 특수 호르몬을 통한 감염 역시 수많은 가설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세미콜론이라는 특수한 병명과 비현실적인 발병 증상만이 병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들이었다.
 
증세:
 
감염된 사람들의 행동은 감염 이후 7~8일 동안 그 속도가 급격히 저하된다. 감염된 사람들은 어지럼증과 멀미, 구토를 동반한 극도의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며, 이는 평균 통계 상 증상이 시작된 후 약 일주일 동안 지속된다.
 
이후 알 수 없는 어떠한 현상에 의해서 -이 대목부터는 통계적인 병의 증상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온전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밝힙니다- 발병자의 몸은 점점 수축된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온몸은 약 70분의 1의 굵기로 얇아지고, 성인 여성의 경우 무려 100분의 1 굵기로 수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극도의 수축은 온몸의 모든 기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호흡기관과 소화기관, 배설 기관에 속하는 내부 장기들 역시 모조리 수축된다. 발병자를 약 한 달 동안 관찰한 미국 N대 화학과 교수 브라이언 테일러(39) 박사 외 여덟 명의 연구원 측은 발병의 시작을 기준으로 15.7일이 지난 시점에서 발병자들이 갑자기 수축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보고서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들을 적었다. 약 한 달이 지나자 그들의 몸은 더 이상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머리와 팔다리는 이미 조금의 기능도 할 수 없어보였어요.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이전에…… 입체성을 잃어버린 존재 같았습니다. 마치 평면을 보는 것 같았단 말입니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발병자의 상태는 지속되었다. 다만 그들은 몸이 지나치게 수축되었을 뿐, 배설이나 호흡 등의 작은 신체 작용을 하는 데엔 능숙했으며(물론 몸을 움직이거나 음식물을 씹거나 하는 신체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특수 제작된 링거로 조달되는 영양분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해야만 했다.) 면역력도 유지되어 자연사하지 않는 이상 병에 의해 생명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얇아졌을 뿐, 유기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임은 분명했다.
 
발병 후 약 49일이 지나기 전까지의 그들은 그랬다.
 
48일째의 관찰을 마치고 발병자들을 격리시킨 채 퇴근한 테일러 교수와 여덟 명의 연구원들은 다음날 아침 격리실이 통째로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환자가 자의를 가지고 도주했을 가능성과 병사 후 급속도로 분해되었을 경우를 두고 확률을 따져보던 연구원들은 순간 그 자리에서 발병자 소실 사건의 원인을 똑똑히 목격한다. 그들의 눈앞에 둥둥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주 얇고 가늘며- 새까만 선들이었다. 부유하는 선들을 채취해 분석해 본 테일러 교수는 마침내 ‘세미콜론’ 병의 증세에 관해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했다.
 
이 병은 차원을 역행하는 병입니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평면에서 선으로. 선에서 점으로. 발병자들의 패턴은 약 한 달의 시간을 기점으로 분명히 변해가고 있었다. 관찰 종료 후 테일러 교수 외 여덟 명의 연구원들은 언론에 이렇게 발표했다. 이 병은 사람을 무(無)로 되돌리는 병입니다. 점에서 선. 선에서 평면. 평면에서 입체.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이 창조되는 것은 차원의 성장과 같은 궤도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현재 3차원과 4차원 사이 어딘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병은 그런 인간의 형태를 2차원, 1차원,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의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이 실험 끝에 저희 연구팀 측에서 얻어낸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 병의 치료제는 끝내 만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현재 이 병은 불치병입니다. 두 번째. 이 병에 걸린 이상 평면까지의 변형은 누구나 진행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진행은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릅니다. 관찰 당시 관찰 대상, 즉 병의 감염자 열여덟 명 중 단 한 명만이 일차 변형 이후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병은 걸리는 무조건 죽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발병자들은 일어나거나 걷거나 웃고 떠드는 신체 활동만은 할 수 없겠지요.
 
당국은 최대한 빨리 이 병의 발병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제 제조에 온 국력을 쏟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단 한 줄의 소명 발표와 함께 그 날의 기자회견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세미콜론:
 
이 병의 이름을 붙인 사람 역시 테일러 교수다. 그는 선과 점으로 분해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몇 편의 스케치를 남겼는데, 그 그림들이 꼭 기호 세미콜론(;)과 닮아 있었던 것이 병명의 유래가 되었다.
 
원인:
 
병원체도, 병의 원인도 규명되지 않은 채 세 달이 지났으며, 전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세계 각국의 시민들은 뾰족한 비난의 화살들을 무능한 정부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 통칭 한국이라고도 한다. 현재 유일한 분단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의 정부에는 아무런 비난도 가해지지 않았다. 최근 당선 소식을 알린 n대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 세 명이 지난 달 세미콜론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정이 비슷해 행정이 마비된 국가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병의 원인이 밝혀진 것은 최초 발병으로부터 이미 다섯 달이나 지난 후였다. 미국 외 18개국의 합동 연구팀은 지난 다섯 달의 연구 경과를 발표하면서 세미콜론 병의 감염 이론을 증명해보였다. 그들은 과거 세미콜론 병의 가장 유력한 감염원 후보였던 특정 호르몬을 발견해내면서 호르몬 감염설을 증명해내었다. 그들은 세미콜론의 감염 원인이 되는 호르몬에게 ‘phobia(포비아; 두려움, 공포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공포증.)’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연한 공포. 깊어지는 두려움 속에서 커져오는 강박. 그것이 세미콜론 병에 대한 인류가 내린 간단하고 명확한 정의였다.
 
또한 그들은 인간이 포비아를 분비하는 세 가지의 상황을 제시했다. 극도로 흥분 했을 때(그들은 흥분의 근거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성적 흥분과 분노 모두 포함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극도로 우울할 때. 그리고 극도의 연애 감정을 느낄 때.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럼 어떠한 감정도 가지지 말라는 뜻인가요? 그저 기계처럼 연산과 동작 명령에 의해 살아가야만 이 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테일러 교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침묵이 시선 밑으로 자욱하게 깔렸을 때,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phobia:
 
다행히도, 인류의 멸망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 호르몬의 이름이 가진 또 다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미콜론 병을 유발하는 이 호르몬은 극도로 흥분할 때나 극도로 우울할 때엔 감염 확률이 0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적은 극소량만이 분비됩니다. 그러나 극도의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위험합니다. 병의 전염이 가능할 만큼의 많은 양이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이 이성일 때 호르몬은 분비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이 동성일 때. 그 호르몬의 분비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따라서 병에 걸리는 대상은 오로지 동성애자뿐입니다.
 
좌중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이후:
 
세계 각국의 정부는 동성애자들에게 신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동성애자들은 국가에 등록되어 주기적으로 주거지와 감염 유무 검사지를 제출해야만 했다. 그들에겐 조금의 비밀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들의 새빨간 속살은 깡그리 드러났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더 이상의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해 자살률이 병의 발병률을 넘어섰다.
 
완행:
 
열 손가락을 꼽아보아도 다 세지 못할 만큼 많은 시간들이 지났다. 막대사탕을 좋아하던 소년 a는 어느덧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 되었고, 그의 키는 이미 그의 조그만 기원을 훌쩍 넘어선지 오래였다. 그는 대학교를 막 졸업한 취업 준비생이었다. 그에겐 넘쳐 쏟아질 만큼 충분한 자유가 있었다. 명문대를 졸업한 그는 욕심 없이 적당히 이름이 알려진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는 업체에서 주문 받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보완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의 주기가 불확실한 대신 월급은 제법 되었다. 그는 그 돈으로 많은 것들을 먹고 누리며 살아갔다. a는 그의 또래들보다 충분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자신의 적당하고 행복한 삶에 만족해하며 주말의 늦은 밤,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그는 곧바로 해고를 통지받았다. 사유는 명료했다. ‘세미콜론’ 병에 대한 감염 의혹.
 
내막:
 
a가 두통과 어지럼증을 동반한 멀미 증세를 겪은 것은 닷새 전부터였다. 약을 처방받아 먹어보기도 했지만, 그의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두통과 어지럼증은 점점 극심해져, 끝내는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주말에 대학병원에 가 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몇 번 그의 차트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마 계속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큰 병인가요? a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의사에게 물었지만, 의사는 끝내 제대로 된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조용히 병원을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a는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받았다. 그의 검진 결과는 그보다 회사 측에 더 빨리 날아갔다. 복잡한 용어들과 통계 수치들로 어지러운 검진 결과지에서, 단 한 개의 문단만이 눈에 띄었다. ‘세미콜론’ 감염 반응 수치 평균 이상. ‘세미콜론’에 감염되었을 위험이 있으니 정기검진을 요망함. 부장은 a에게 직접 검진 결과지를 건네주었다. 아무리 우리에겐 감염 위험이 거의 없더라도,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계속 업무에 투입하는 건 우리 사정엔 무리가 있네. 자네가 동성애자라는 것. 그 때문에 아득히 높은 사망률을 보유한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 이건 우리에게 업무를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에게도, 우리 측에게도 유익한 정보가 아니지 않나. 부장은 끝내 유감이라는 말 한 마디조차 덧붙이지 않았다. a는 떨리는 손으로 검사 결과지를 건네받았다. 입은 심한 경련으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a는 말을 더듬었다. 저는, 저는.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요. a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재조립하기에도 벅찰 만큼 그는 흩어져버렸다. 그는 곧바로 회사를 나와 시내버스에 탔다. 다리엔 조금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가는 버스 창가에서, 교인(敎人)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교인:
 
동성애자들은 자비로운 하느님이 인류를 만드실 때 생긴 유일한 오점입니다. 그들은 성욕만으로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더러운 개체들입니다. 이젠 신께서 타락한 그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계십니다. 차원의 역행이라니! 이것이 자애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전능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야 신께선 더럽고 불경한 죄인 무리를 무(無)로 되돌리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순리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전후 무후한 사태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그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 아니라면, 이 거대한 재앙의 뿌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력:
 
그가 스스로 그의 정체성을 깨달은 것은 먼 과거의 일이다. 어려서부터 그는 이미 그가 남들과는 다른 성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남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여자 아이들과 사귀고 기념일 선물을 나누며 행복해했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장면들을 응시하며 a는 뚜렷이 깨달았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나구나. 그는 남들과는 달리 이질적인 자신의 지향성을 확신했다. 그가 그의 내력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그와 절친했던 동급생 b에게서 특별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섣불리 단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b의 말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몇 번이고 b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b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이 감정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하고 싶을 만큼 억울하고 강하게,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 b가 품을 감정이 어떨지,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앓는 사랑과 b가 받을 상처의 크기를 저울질했다. 그저 덧없는 생각만 반복하다가, 그는 끝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b와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후에 b가 보낸 ‘왜 연락 끊고 사냐’는 한 줄의 문자가 a에게 닿았을 때, 그는 세 시간 동안 답변을 고민하다가 짧은 답장을 보냈다. 너한테 미안해서. 나 사실 너를 좋아하는데, 라는 말을 꾹 눌러 삼키면서, 그는 휴대폰 자판을 힘주어 눌렀다. 너한테, 그냥 미안해서. 그러나 왜냐고 묻는 b의 답장이 왔을 때, a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국 b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나 너 좋아해, 근데 그게 너무 미안해. 그 날 하루 종일 b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a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의 직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b는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은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막을 내렸다.
 
귀가:
 
a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아주 더디고 무딘 동작이었다. 삐- 하는 짧은 기계음과 함께 도어락이 열렸다. a는 아주 천천히, 신발을 벗어 정돈했다. 오래 걷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맨발이 욱신거렸다. 머리로부터 내려온 통증일까. a는 거실 한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허망함이 밀려왔다. 온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마비된 것처럼 삐걱거렸다. 벌써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일까.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왜 나일까.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어 아무런 번호나 눌렀다. 전원이 막 켜진 텔레비전은 a씨가 누른 번호로 채널을 옮겼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응시했다.
 
뉴스:
 
요즘 아주 거대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병이 있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내며 공포를 몰고 왔던 병, 바로 세미콜론인데요. 이 병에 걸려 현직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국내에서 더욱 큰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명 차원을 역행하는 병, 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이후 동성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 사람들에게만 발병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국가는 발병 위험이 높은 이들 성소수자를 위해 매달 검진 비용과 치료비를 지원해주고 치료제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국가의 정책이 시민들 사이에서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c 기자가 보도해드리겠습니다.
 
네, 여기 현장은 현재 세미콜론 병에 대한 시민들의 시위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호소하는 음성, 소란, 군중, 피켓 위로 짧게 적힌 분노를 연이어 클로즈업하며) 시민들은 세미콜론 병 감염자들에게 지원해주는 지원금과 보조금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제도의 폐지 등을 요구했는데요. 시위 규모는 날마다 점진적으로 불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전환되는 화면, 시위 속의 인파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동작)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과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 왜 세미콜론 감염자들에 대한 국가의 정책에 대해 반발하시는 겁니까?
 
–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혜택입니다. 국가는 동성애자들에게 치료비용이며 검진 비용이며 온갖 돈들을 쏟아 붓고 있어요. 심지어 그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세금을 떼어 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은 정상적인 시민들은 나날이 허리가 굽어가고 있어요.
 
이건 부당한 처우입니다.
 
삑, 소리가 났다. 격앙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던 시민 남자의 모습이 곧바로 화면 속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텔레비전 화면이 어둠에 잠겼다. 전원 버튼에서 손을 떼는 a의 온몸은 굳어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화내고 싶었지만, 그의 온몸은 축 늘어져 도무지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건조함을 느꼈다. 그는 그가 껍데기만 남았음을 깨달았다. 텅 빈 속을 은밀하게 숨기며,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좋을지 잠시 생각했다.
 
결국:
 
a는 끝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서, 아르바이트를 구직하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자연스레 아침은 굶어야겠고… 일단 살아야지. 반드시 살아야지. a는 늘어진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병에 관한 모든 걱정은 일체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한 채, 새까만 어둠에 잠겨 깊은 잠에 들었다.
 
근황:
 
세미콜론의 병을 옮기는 매개체(그것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물질로, 바이러스나 세균의 형태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는 이미 공기 중에 잔뜩 퍼져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동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감염에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그것의 정확한 구조를 밝혀내려면 현 인류의 과학 기술보다 훨씬 발전한 상태의 기술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초자연적인 질병을 신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속행: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같은 대사를 열다섯 번쯤 반복하고 나니 짙은 갈증이 밀려왔다. a는 카운터에 놓인 탄산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바싹 마른 목구멍 속으로 청량한 물줄기가 밀려들어오자 온몸에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갔다. a는 그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편의점 안은 간만에 손님이 없어 한산했다.
 
a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회사에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다음날,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가 붙은 편의점을 본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편의점은 a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다 제시한 시급도 다른 곳에 비해 많았다. 무엇보다 a는 급전急錢에 절박했다. 세미콜론 병의 치료비의 대부분을 나라에서 지원해주기는 했지만, 치료에 드는 전액을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해외에서 개발된 세미콜론의 발병 둔화제는 나라의 보조금을 제외하고도 많은 돈을 내야 살 수 있었다. a는 직장에 다닐 때 꽤 많은 돈을 저축해놓았지만, 둔화제를 먹어가면서 평생을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감정도 연인도 없는 평생을 일반인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기엔. a의 수중에 남은 것들은 하잘 것 없기만 하였다.
 
어서 오세요.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a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a는 앉아 있던 의자를 옆으로 밀어 치우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막 들어왔을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석의 라면 진열대나 음료수 코너에 간 모양이었다. a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a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편의점은 작지 않은 번화가 거리에 위치해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늘 한적했다. 이른 아침부터 계속 카운터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a의 눈에 들어온 손님들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주변에 워낙 경쟁사들의 편의점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손님이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a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인터넷에 오른 수많은 가십 기사들을 맥락 없이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 계산이요. a가 한참 온갖 기사를 읽어 내리던 참이었다. 툭 무언가를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와 중저음의 목소리가 연이어 그의 귓바퀴를 때렸다. 번뜩 놀란 a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후:
 
a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몇 줌의 기포처럼 뜨겁게 부풀어 오른 그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루 종일 한 끼의 식사도 하지 않았다. 갓 사온 야채 죽 몇 숟갈을 입에 털어 넣어 보려고 무딘 애를 썼지만, 끝내 모조리 토해내고 말았다. 그는 토사물이 묻은 입가를 휴지로 훑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변기 앞에 주저앉아 몇 차례 더 구토했다. 끝내 다리 힘이 모두 풀려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변기 물을 내리고 화장실 바닥에 퍼지듯 쓰러졌다. 몇 차례의 격렬한 구토 끝에 온몸에 힘이 빠진 a의 시선은 탁했다. 쓰러져 보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리게만 보였다. a씨는 흐려지는 초점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그것은 단 한 순간의 일이었다.
 
회상:
 
그는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손님은 카운터에 컵라면과 작은 이온음료를 하나씩 올려놓았다. a는 차례로 물건들을 계산하면서 손님의 옷차림새를 훑어보았다. 후드 티와 반바지, 까맣게 때가 탄 흰색 운동화.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a는 대충 차려 입은 그의 모양새를 보아 근처에 그의 집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손님은 공손히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결제를 끝마친 a는 손님에게 카드를 되돌려주며 이제껏 푹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올렸다. ‘안녕히 가세요.’ 따위의 지루한 대사로 손님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a씨의 눈동자에 손님의 얼굴이 담긴 것은 매우 짧은 순간이었다.
 
내력2:
 
a가 처음으로 사귄 남자 d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평균은 되는 키, 평범하게 생긴 얼굴, 특별한 것 없이 흔한 성격, 그러나 그들이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져 있었던 예전엔 그런 모습만으로도 a는 d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성소수자들이 소통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루어졌다. 서로가 찍은 사진들을 공유하며 친해진 그들은 어느새 남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은밀한 전부마저 서로에게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즈음에 이르러 그들은 오프라인에서의 연애를 시작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체온을 나누는 날마다 그들은 알록달록해졌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마모되었던 일부를 다시 채워나가는 느낌이었다고 a는 회상했다.
 
연애의 줄거리가 늘 그랬듯 그들의 사랑도 짧고 굵은 결말을 맺었다. 당시 a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고 d는 악착 같이 모으기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지칠 대로 지친 대학생이었다. 결별을 선언한 것은 d씨였다. 공부해야 돼. 이유는 짤막했고 a는 수긍했다. 그리고 그 날 밤 d에게 스물일곱 통의 전화를 건 뒤 축축하게 젖은 침대 위에서 긴 잠에 들었다.
 
결별 이후, d의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걸었던 a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에게 d의 소식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였다. 부고訃告였다. 세미콜론 병의 등장이 처음 보도되고 고작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동일:
 
입가에 묻은 토사물들을 소매 끝으로 문질러 닦으며 a는 화장실을 나왔다. 여전히 눈의 초점은 잘 맞지 않았고 다리는 걷지 못할 만큼 심하게 후들거렸다. a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토하고 난 속이 미친 듯이 허하게 느껴졌다. a는 한 손으로 굶주린 뱃가죽을, 반대쪽 손으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소파 위에 누웠다. 난제難題였다.
 
손님의 얼굴은 a의 전 애인이었던 d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죽은 그와 이년 동안이나 식탁 하나를 두고 같은 밥을 먹던 a조차도 차이점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a는 잔뜩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더듬더듬 a의 입이 열렸다. 혹, 혹시, 성함이, 어, 어떻게 되시는지. 손님은 자신의 이름을 t라고 했다. t는 양 뺨에 점이 하나씩 있다는 차이점만 빼고는 완전히 d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을 깊게 응시할수록, a는 자신의 심장이 소리 없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둥둥 파동이 낮게 퍼지며 울렸다. 잊었던 감정들이 중력을 무시한 채로 발끝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a는 참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못 이겨 소파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단언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납작해지는 기분이었다.
 
검색:
 
( …중략… ) 발병 둔화제를 직접 개발해 내 올해의 노벨 의학상 수상자로 가장 유력한 테일러 교수(40)는 이렇게 경고하기도 했다. 이 둔화제는 많은 동성애자들의 목숨을 살리는데 큰 기여를 해낼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세미콜론은 절대 완치되는 병이 아닙니다. 둔화제를 복용하는 중에도 포비아를 분비하는 여러 감정 행위들을 계속 할 경우 병의 증상이 가속화될 위험성이 있으니까요. 다시 한 번 명심하십시오. 화를 내서도, 우울해서도, 무엇보다 다시는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정부는 계속해서 병의 완치를 위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고 소견을 밝힌 바 있다.
 
a는 휴대폰을 툭, 떨어뜨렸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의 근육들과 손으로 감각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a는 체념했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병자처럼 창백한 입술이 조금씩 달싹였다. 그의 발등부터 기어 올라온 감정들이 그에게 천천히 긴 혀를 내뻗고 있었다.
 
무직:
 
그가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호수공원을 찾은 것은 그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 뒤로부터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 일을 하는 동안,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t의 얼굴이 생각났다. 가슴을 둥둥 두드리고 손가락을 꿈틀거리게 하는 복잡한 감정이 그의 얼굴 뒤를 따라왔다. t는 그 이후에도 가끔씩 편의점에 들려 라면과 음료수를 사가곤 했다. 이제 그들은 얼굴을 알아보고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a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살아간다면 둔화제도 소용없이 평면으로, 선으로 점으로 순식간에 퇴화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끝내 그는 앞으로의 생계도 약값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다. 그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일을 그만둔 그는 하루 종일 집 안에 처박혀 텔레비전을 보거나 핸드폰을 뒤적였다. 식사도 밖에서 장을 봐오거나 하지 않고 배달 음식으로만 해결했다. 그는 어디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느 편의점을 가든 t씨를 또 한 번 마주칠 것만 같았고, 편의점이 아닌 다른 곳을 돌아다녀도 또 다른 t씨를 만날 것만 같았다. 그는 차렵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로 누워 깊은 잠에 들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만 일주일이었다.
 
하잘 것 없이 일주일을 보내버리고 나서야 그는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안에서 배달음식만을 먹으며 오늘의 공기도 날씨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은둔생활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일주일 동안 다른 곳에 시선을 줄 틈도 없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탕진하느라, 그는 이제 더 이상 t에 관해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섯 시의 이른 아침, 차가운 물과 함께 둔화제 세 알을 삼킨 뒤, 작은 배낭 하나를 들쳐 매고 집을 나섰다.
 
여기:
 
호수 전망이 좋은 자리에 그는 짐을 풀었다. 돗자리를 깔고, 아침으로 먹을 초코바 하나를 꺼냈다. a는 초코바를 한 입 크게 깨물며 느긋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코끝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돗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드리운 나뭇잎들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기분 좋게 쾌청했다.
 
공원은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가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로를 달리며 새벽 운동을 다니는 사람들을 목격했을 뿐이었다. a는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깥의 공기와 기분 좋은 물비린내에 상기된 얼굴로 초코바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끈적끈적한 달콤함이 잇몸 사이를 꿰뚫고 혀끝으로 죽 퍼졌다. a는 상쾌한 감각을 연이어 씹어 넘길 때마다 온몸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행복감에 조심스레 미소 지었다.
 
절정:
 
a는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앉아 바람을 쐬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들뜨게 했다. 부질없는 목숨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생을 숨어 있어야 한다는 그였다. 그의 내일에서 오는 우울감과 불안감 때문에 집 안에서도 그는 매일 제대로 숨조차 못 쉬며 살아갔다. 그 동안의 그에겐 약간의 환풍구가 필요했다. 초코바를 모두 먹은 그는 손에 포장지를 꼭 쥐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한 순간에 병病은 찾아왔고 예전 애인이었던 d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 과학 이론상으로도 증명할 수 없으며 완치란 불가능하다고 판정되기까지 한 병 세미콜론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신벌’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게,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질적이고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 세미콜론 병에 대한 기사에는 줄줄이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이 모든 것은 순리다.’ ‘신이 타락한 음욕주의자들을 벌하는 것이다’ ‘신조차도 동성애자들을 역겨워했던 게 아닐까’ a는 그 밑에 무어라고 답글을 달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글도 덧붙이지 못했다. 모든 게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순간. 납작해지는 기분이었다. 존재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데. 모든 것이 불가항력이었는데. a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t가 생각났다. 동성애자들에겐 분노도, 우울도, 사랑조차도 금지되어버린 지금, 신에게 동성애자들이란 정말 세상의 안정을 위해 지워버려야 할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a의 씨의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a는 몸을 홱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a의 시선보다 먼저 닿은,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 a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의 눈 속에 들어온 것은 운동복 차림의 t였다. 오른손에 음료수 캔을 든 채로 해맑게 웃는 t의 모습이 천천히 a의 동공 속에 번져나갔다. 메아리처럼 먼 곳으로부터 울리는 박동이 점점, 점점 커졌다.
 
도피:
 
a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이 답답했다. 통증이 폐와 심장을 비롯한 온몸의 기관들을 꾹꾹 눌렀다. 그는 공원 변두리의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t를 여기서 만나리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t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t는 그에게 몇 마디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 중 단 한 소절도 a에겐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둥둥 크게 박동했다. 뒤집히고 재조립되는 세상에서 간신히 두 발을 딛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더 이상 t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그래. 만나서 반가웠어요. 안녕.’ 세 마디의 말을 급하게 남기고 자리에서 달아났다. 당혹스러워하는 t의 잔상도, 근처에 놓고 온 자신의 짐들도 생각하려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그는 홀린 듯이 집에 돌아왔다. 그는 어떠한 동작 없이 곧바로 침대로 가 쓰러졌다. 다리가 저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납작해지는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a의 몸은 더 이상 입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납작해지고 납작해져서…… 잊혀져 버릴 것만 같았다.
 
몽상:
 
그 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빨강과 파랑의 이분법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색의 세계에서, 그는 죽었던 연인 d를 만났다. 그들은 간판도 없는 커피숍에서 한 잔의 그린 버블티를 나누어 마시며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지내. 어떻게 지내긴. d는 못 본 사이 혈색이 더 좋아져 있었다. 체격도 예전보다 더 컸다. 형은 되게 힘들게 사는 것 같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어. a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수척해진 얼굴을 잠시 어루만졌다. 고통이 느껴지는 피부였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어. a는 d의 손을 잡으려 자신의 손을 죽 뻗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든 a의 앞엔 t가 웃음기를 띤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순간 모든 것이 잘못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온몸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온몸만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얇아지고 뒤틀려가고 있었다.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듯. 모든 오류를 제자리로 돌려버리겠다는 듯 힘찬 속도로.
 
독백:
 
그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불을 품에 꽉 쥔 채로 그는 웅크렸다. 무엇이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있는지, 그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고통 받아야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두려움은 바퀴벌레처럼 불쾌한 흔적을 남기며 발등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a는 조금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불을 덮어썼다. 쓰러지듯 몸부림을 치며 침대에 눕자 뜨거운 눈물이 침대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단지 사랑하는 성性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겪는 모든 초자연적인 고통들이 그의 목구멍을 자꾸만 막아버렸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연이어 깨물며 울었다. 입안으로 천천히 뜨거운 핏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겪어왔었던 모든 생애를 돌이켜보았다. 남들과는 다른 사랑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직장을 잃고 연인을 잃었으며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잃어버렸다. 하나 같이 강탈당한 것들이었다. a는 눈물과 핏방울로 얼룩진 뺨을 닦아내며 목을 긁는 뾰족한 슬픔들을 삼켜냈다. 태어났을 때부터 결정권이 없었던 그의 지향성 때문에 겪는 모든 통증들이 억울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는 죽은 그의 애인 d의 얼굴과 공원에서 마주쳤던 t와의 일들을, 과거에 짝사랑했었던 아이 b를 연이어 떠올렸다. 목이 터져버리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에겐 더 이상 어떠한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끝내 어떠한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금, 웃었다.
 
도착:
 
아직까지도 인터넷과 신문을 달구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병 ‘세미콜론’. 동성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 사람들에게만 발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에게 미친 파급력은 대단했는데요. 현재에 이르러 병의 발병과 악화를 늦춰주는 둔화제가 개발되면서 이 병에 의해 목숨을 잃는 성소수자들이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잇따라 세미콜론 병에 감염된 성소수자들이 자살하거나 약을 끊고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우울해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안 되는 극단적인 제한 상태를 참지 못하고 죽음을 결심하는 것인데요. 지난 13일 서울의 주택가에서 정부의 지원을 끊고 스스로 병에 의한 죽음을 택한 사망자가 추가적으로 발생하면서 시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해당 사망자의 신원은 해당 주택에 거주하는 a모씨로 밝혀졌는데요. 그는 세미콜론 병 감염을 이유로 회사에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이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알려졌습니다. 그가 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전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이로써 정부의 지원을 스스로 끊고 약을 섭취하지 않아 죽음을 맞은 채 발견된 세미콜론 병 감염자는 열한 명이 되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종점:
 
수백 개의 a들은 자신의 몸들을 둘러싼 하얗고 좁은 유리케이스를 바라본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여기 왜 보관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 a씨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수백 개의 점으로 분해되어버린 그에게 그런 작은 의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시신경 속으로 들어온 하나의 풍경은 순식간에 두 갈래로, 세 갈래로 분해되고 분리되었다. 먼지처럼 계속해서 분해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a는 섣불리 구분하지 못했다. 한 개에서 두 개로, 네 개로, 수백 개로 분리되는… 언젠가 다시 합쳐질 몸뚱아리를 기대하면서 끊임없이 갈라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일까 세계일까. 수백 개의 a들이 공중에서 둥둥 부유했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세계가 왜 이렇게 조각나고 분리되어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는지, 왜 이질적으로 분리되어버린 세계들은 자꾸만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는 것인지 좀처럼 그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무언가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발성기관이 사라진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온몸으로 웃었다. 자꾸만 분해되어가는 세상을 신랄하게 비웃기 시작했다. 이제 막 수천 개로 분해되어버린 a들은 일제히 입꼬리를 죽. 잡아당겼다.
 

목록
예식장에서
목록

넘어지지 말고 제대로 걸어야 한다. 발목 밑으로 내려오는 새하얀 내일을 밟지 않도록. 팡틴은 코제트의 신발끈을 정성스럽게 묶어주었다. 코제트는 단단히 묶인 매듭처럼 정교하게 미소지었다.
 
테나르디에와 빨간 깃발을 창밖에 매달아둔 채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기도의 순간 팡틴은 코제트의 오른손을 놓쳤다. 코제트의 새하얀 드레스가 팡틴의 젖가슴처럼 늘어져 출렁거렸다. 사뿐한 걸음걸이는 햇살에게 드레스 끝단에 정교한 우체통을 수놓게 했다. 팡틴은 내일의 플래너를 찢어 접은 편지 한 통을 그 위로 던졌다. 철편鐵片. 신부의 새까만 뒤통수 속으로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줄 수 있겠니.ⓑ
 
풍덩. 잠기는 소리. 팡틴은 늘어진 젖가슴을 잘라냈다. 번진 핏물이 눈가에 이파리를 뚝뚝 떨어뜨리고. 코제트가 마리우스에게 입술을 걸어주자 모두의 환호가 쏟아졌다. 빛. 그리고 소금.ⓑ
 
 
ⓑ 결혼식이 모두 끝난 뒤였다. 장발장은 신부 측 육 열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대형 냉장고를 발견했다. 그는 아무 분노 없이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 양희은의 노래 <엄마가 딸에게>에서 인용.

 

목록
스티로폼 시즌
목록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마저 타박상이라고 말하다 새하얀 피부로 세탁되기 위해 뼈를 분지르는 아이들, 다만 우리라고 부르다 온몸 세포 알알이 둥그런 도형이 되었다면, 그런 구조을 가진 상자가 되었다면. 그건 성공이라고 하다 안에 공백을 엎질러도 괜찮을 크기
 
우리는 어떠한 동작을 포장해야 칭찬받을까 차곡차곡 모아둔 공백 속으로 분질러둘까 오늘의 마음을 미지수로 정해놓고 대입하다 식을 풀다 새까맣게 새하얀 감정이 도출되다 연산에 실패한 것일까 수리에 약한 우리 악수할 손이 드물다
 
묻다 새까만 속을 가진 어른들에게, 우리는 일회용인가요? 알알이 다 둥그레지지 못한 도형, 다만 나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네가 말하다 내 손을 맞잡고, 너는 종종 그런 방식으로 울다 우리는 여전히 새하얀 성을 가진 종족들, 대입해주세요 끓어오르는, 새까만, 이내 튼튼하게 폭발하는, 우리, 본명
 
안거나 서로를 덮는 방식으로 닮아가다 일회성 슬픔이 옮는다 어리다는 말이 이중포장되다 전혀 비어 있어서 어설프다 우리의 하얀 밤

목록
피카부
목록

 
엄마가 죽고 사흘 뒤, 엄마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활짝 핀 손가락 위로 쌓이는 안녕. 졸린 목이 피곤할 것 같지 않니. 라고 말하며 손을 흔드는 엄마는 죽은 사람이다. 그 날 밤 나는 몰래 팬케이크를 구워 먹었고
 
그 속에 겹겹이 엄마가 쌓여 있었다
 
(묻는다 네 죽음은 오늘도 건강하니?)
 
소리를 질렀다 왜 당신은 새파란 사람인가요 그저 무서운 꿈일 뿐이란다, 엄마는 소근거렸다 엄마는 좁은 부엌에서 작별을 손질한다 굽는 게 좋겠니 찌는 게 좋겠니, 엄마는 튀기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가장 긴 목뼈를 가진 수명이지 않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파란 작별은 먹고 싶지 않아요.
 
나는 방으로 나왔다. 성큼성큼.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 엄마는 자꾸만 문을 두드리고
인형놀이는 막 끝났다. 나는 여전히 건강한 신파주의자다. 부디 안녕히 주무세요. 문을 잠그다
 

목록
어제는 태풍이 왔다
목록

뉴스는 호우주의보를 보도했다.
 
 
잠가 놓았던 난민들이 쏟아졌다. 철새처럼 무리지어 수근거렸다. 간밤에 301호가 무너져 내렸다고 302호와 303호는 속닥였다. 십자가 위에 걸린 비바람처럼 웅성거렸다
 
 
무너져 내린 길목을 걷느라 어른들은 아이가 되었다. 모두의 무릎이 축축했다.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만 보인다는 비벼락은 낯 익은 소문이었다. 다 헤진 야상을 걸치고. 사람들은 자주 주머니 속에서 뒤척거렸다. 가게들은 전부 닫혀 있거나 닫혀 버렸다
 
 
내일은 내일의 태풍이 올 것
아무데나 버려진 바람을 한 움큼 훔치고
길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훌륭한 소란이었다
 
 
때때로 부슬비가 내리면 나란히 걷던 발자국들은 두려워한다. 갈라진 골목을 한 줄로 걷고 싶어 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입버릇이다. 비상식량처럼 부러진 손톱을 아껴 먹으며. 다만 여전히 비린내가 풍긴다고 말한다. 오늘의 날씨는 흐림이라는 전보다. 먹구름들의 뒤꿈치가 무너진 301호 예수상에 걸렸다
 
 
거꾸로 뒤집힌 교회엔 302호 303호 사람들의 입모양으로 만원이었다. 오늘은 전투적으로 계속된다. 뉴스는 영영永永, 호우주의보를 보도한다. 거리에 고여 가는 불행들에 대해 생각하며. 어제의 폭풍처럼 잠잠한 눈꺼풀을. 내린다
 
 

목록
다만 소년의 벽난로는 물컹거리기를 소망한다
목록

 
…은 아직 예열되지 못한 벽난로
 
식전 빵처럼 차갑게 준비된 거실 속에서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소년은 이불 속에 포장된 일회용품이다. …소년은 아직 예열되지 않은 벽난로, 웅크리는 것만으로도 난쟁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경직된 책장들 사이에서 발효되는 착각. 간밤에 젖가슴이 돋아나오는 꿈을 꿨어 천장은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벽지의 눈꺼풀마다 새어나오는 노래는 높아, 높아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중독. 간밤의 한낮처럼 꿈들은 너무 빨리 식어버려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신기루들. 발효는 부패로도 읽을 수 있는데, 곰팡이처럼 번식하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소년은 땋지 않았다. 너는 수염을 깎아야 하는 시절, 바짓단을 걷어 올려붙여야만 한다고 굳은 선반이 명령했을 때, 벽장 안에서 익어가는 빨강들은 누구의 유실물인지, 잃어버렸다는 말까지 잃어버리고 나서 소년은 웅크렸다. 웅크림은 변태變態를 잣는 재단사라는 믿음, 빨개질 거라는 희망. 소년은 단지 웅크려, 벽난로의 불씨가 조금 더 다정해질 때, 언젠가는 벽난로마저 잠기게 할 커다란 젖가슴을 얻고 싶다고, 그 순간 단단했던 소년의 벽장은 …웅크린 도형이 되더니
 

목록
소년이 온다
목록

소년이 온다.
 
소년이 파도와 함께 밀려온다 소년의 머리카락이 죽음에 얽혀 밀려온다 밀려온다는 말과 함께 밀려온다 짠맛과 함께 짠 성분이 된다
소년의 이름은 사실 파도였으리라
 
머리에 달린 구멍에서 자꾸만 피가 흐를 때
섬이 될 수 있으리라는 소년의 믿음은 단단해지고
 
파도와 함께 소년이 밀려온다 소년의 종착지도 밀려온다 비명과 콧노래와 홀로코스트가 소년의 눈주름처럼 매달려 밀려온다 밀려온다는 말을 밀어내는 세기로 밀려온다 다 같이 짠 성분이 된다 염분의 기분으로 통일 된다
 
비명이 함부로 섞이는 물결. 감히 나란해지는 파도.
구멍 속으로 내린 두레박에서 소년의 먹물이 발견된 것은 새까만 비밀일까.
이 슬픔이 액체의 기분이라면 위험하다, 숨죽인 아우성이나 북극성처럼
 
바다가 삐걱거리며 부풀어 오를 때;
 
소년은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소년의 구멍이 더 큰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소년의 죽음이 소년의 몸뚱이를 밀며 세차게 밀려온다 분명 세 발자국만 더 가면 우리는 육지가 되겠지, 우리는 오래토록 짠맛이 되어 이 파도를 기억할거야 죽음과 죽음의 말이 소년이 되어 밀려온다 점점 더 새까맣도록 커진다
 
소년이 도착하지 않은 섬에서
새로운 파도가 출항을 서두른다
 

목록
슬픔 속의 슬픔, 일상 밑의 비일상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을 읽고)
목록

 

한강의 연작 중편소설 ‘채식주의자’는 여러 가지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극단적이고 기괴한 소설 속 상황들은 깨끗한 접시처럼 단란한 문체에 담겨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은 소설의 첫 부분을 맡은 ‘채식주의자’였는데, 꿈속에서 목격한 장면들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게 된 여자의 극단적 행위를 인상적으로 그려내었다. 나는 거기에서 한강의 문장 속에 내포된 뒤틀린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곤 하는 그로테스크함이나 기괴함에 가까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일종의 슬픔이었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수록된 시들 역시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표명하고 있다. 함축적이고 짧은 문장 속에 폭력과 슬픔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 한강의 시들은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불투명한 오묘함이 있었다. ‘피 흐르는 눈’이나 ‘해부 극장’ 등의 시들은 한강 특유의 매력이 가득 풍겼다.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깝고, 쾌락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논하는 시들이었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시는 시집 맨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었다. 상당히 단조로운 서술로 이루어진 이 시는 어쩌면 단순한 일상의 나열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특히 ‘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라는 시의 마지막 서술은 얼핏 보기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하는 건방진 의구심을 들게 하기에 충분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역시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 시의 독특한 감정선을 읽기 위해서는 마지막 구절들과 맞물려 돌아가야 할 톱니바퀴 역할의 구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 5행~8행의 ‘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 구절인 것이다. 시 속 화자는 밥을 먹고 있거나 밥을 먹기 직전의 상태다. 이는 시 속 서술로써 알 수 있는 정보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행에서 시인은 흰 밥공기 위로 김이 피어올라오는 현상에서 어떤 감정을 감지한다.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발상을 떠올린 것이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는 상상은 곧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된다. 화자는 유순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세월이든, 어떤 소모적인 감정이든, 그 어떤 것이든) 무엇인가를 놓쳐버렸다는, 지금도 놓치고 있다는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이후 화자는 ‘밥을 먹어야지’라고 말한다. 밥은 1행~4행에서 일상을 묘사하는 데에 쓰인 소품이다. 이러한 밥이라는 사물을 어떤 상실감의 감지 후 갑자기 떠올렸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 속으로의 순응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회의감과 상실감을 느꼈음에도 화자는 결국 이 일상에 순응하여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연과 연이 벌어지는 간격 속에서, 화자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 미묘한 공백 속에서 화자가 겪었던 감정들을 상상하고 공감해보며 그 공허함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밥을 먹었다’고 말하며 일상으로의 순응을 완료한 화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 작품을 이 시집의 가장 인상적인 시로 꼽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고의 흐름과 변화가 연과 연 사이로, 짧고 단조로운 문장들 사이로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독자들이 이 감정을 공유 받을 수 있을 만큼 소통의 통로를 열어두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 시의 마무리는 일상으로서의 순응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일상을 겪어내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 더욱 인상적이다.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나는 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라는 짧은 본문 속에서 시인은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한꺼번에 그려낸 것이다.

 

이 시 외에도 ‘여름날은 간다’에서 느낄 수 있는 서늘함이나 ‘저녁의 소묘’에서 풍겨오는 인상은 한강 특유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침보다 저녁을 더 많이 끌어오는 한강의 시들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그녀가 무엇보다 세밀하고 예리하게 그려낸 시 속의 고통들은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아프다. 대부분의 문장들이 함축적이고 연과 연 사이의 공백이 길어 무거운 감정의 소통이 쉬운 것도 한강 시 특유의 장점이다. ‘밤을 기다리고 있’는 한강의 시들은 꼭 아침을 거부하거나 고통을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고통으로 해소하려는 사람들이나 위로를 사절하는 병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선물하고 싶은 시집이다.

목록
소년통(少年痛)
목록

 

왼손잡이는 어긋난 오기誤記라고 해서 오른손잡이가 되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해적방송처럼 물러 내리던 우기, 버려진 잔반들 속에서 졸업장은 찾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한 폭 더 깊어진 슬픔의 키 재기, 쓸모없는 것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키가 컸는데

 

달콤해도 달콤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혀로 들었다 이미 무죄로 판결난 혓바늘들은 왜 억울해하고 있는지, 고작 그 길이만으로도 새파랗게 피가 났어. 피의 맛은 달콤하기 때문에 달콤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언젠가는 하교해야할 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한 뼘씩 키가 커지는 것은 어깨선일까 두려움일까. 어린 필름들의 러닝타임이 너무 간소하다고 느껴질 때, 후반전이 시작하고 나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경고.

 

목록
버드맨
목록

 

손가락을 물어뜯는 버릇은 삼 대 째 내려온 악습이었다 마루에 누워 바닥이 되었을 때 바다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상상력은 나를 네발짐승으로 만들어주는 원동력, 눈물샘이 헤퍼질 때마다 깊숙한 손톱자국으로 점을 쳐보고 싶었다 내일은 어떤 피를 흘릴 것인지에 대해

 

눈에서 뽑아낸 슬픔들은 튼튼하기도 하였다 조각된 조각의 조각이기에 충분하였다 학창시절의 우리처럼 벽들이 날카로워지면 나는 날아갈 날개를 다시 꿰매야 했다 날짐승이라고 불리고 싶었다 젖을 빨기에 적합한 입술과 입술의 포개짐 자장가만 있다면 웅크릴 수 있을 것 같았지. 지금도 우리의 몸에는 피보다 질은 외피가 돌고 있다

 

종種이기 때문에 우리는 퇴화할 운명이다 우리는 운명의 종, 낡은 교복 대신 나쁜 습관들을 물려받을 때마다 탓할 방향이 늘어나서 기분이 좋았다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것 발톱이 길어지고 구부러질 때마다 밥들을 쪼아 먹어보는데, 밥알들은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것으로 소화보다 더 아름다운 자유를 찾아 퇴행했다. 성씨돌림처럼 돌아가는 회로 판에서 나는 언제나 패배가 없는 도박, 승리가 없는 싸움이지. 바닥이 허물어질 때마다 바다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물에 빠져 죽는 최초의 바다가 되어도 좋을 일

 

모두가 부서질 준비를 했다 나도 실패를 구걸했다

이따금 눈동자가 가냘파질 때마다 하늘의 고도를 측정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