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숲 속 글 발자국들 [2]

수필은 정말 익숙하지 않다. 미숙함에 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쓰고 싶은 이유는, 수필이 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쓰고 싶을 때 쓰는 능력이야말로 기죽지 않는 비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쓴다 –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식의 극단적인 표현은 아니다. 물론 쓰지 않을 때도 나는 존재한다. 다만 존재하기만 하고, 존재하는 데 무기력할 뿐. 삶 속에 삶을 맡긴 채 흘러가는 기분이랄까. 나는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싶으므로 하고 싶을 때는 해야 한다. 적어도 글쓰기만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보면,  상을 연속으로 탄 이후로 내 코는 미끄럼틀의 꼭대기처럼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글 좀 쓰는구나 커서 작가해도 되겠어 문학적 소질이[…]

숲 속 글 발자국들
/ 2021-09-20
벌새
타인의 눈물 [2]

  비를 맞는 것과 비를 보는 것이 다르듯이 너를 무수한 영광으로만 생각했고 수많은 조각을 보지 못했다   가령 비를 뚫으며 마모된 진록 레인코트라던가 레인코트의 모자를 쓰고 얼굴을 비비는 투박한 손가락 손가락 아래로 눈물인지 비일지 모를 액체라던가   나는 그를 일종의 영향으로만 생각했으나 그는 나의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절친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진정한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은 내게 타인일 뿐이고 궤변의 속삭임은 너의 존재를 지운다   다만 비가,  비가 땅을 부수도록 내릴 뿐 그저 그뿐

타인의 눈물
/ 2021-09-19
벌새
유월 언저리에서 (퇴고) [2]

무언가가 강하고 깊고 담직하게 흘러나와 멈출 수 없도록 달려갈 때 직관이라는 게 있잖아 너를 너라는 사람 자체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 사그라드는 빛이 따가워 눈을 잠깐 아주 잠깐 감박거릴 때 이미 너는 사라지고 없다는 것 터진 카메라 필름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지 역광,이라고 부를게 제대로 응시도 못한 눈동자 별처럼 혈관에 박혀왔던 동굴처럼 그리운 숲내음 차가운 계곡물 그사이를 헤엄치다 숨이 차서 그만두지도 못했고 끝이 없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었을까 너를 끝도 없이 바라보다 목만 말랐지 숫자들에다 끊임없는 의미부여를 하고  맞아, 그곳은 여름이 참 더웠지 같은 무겁지 못한 말들을 읊조리는 것   무언가가[…]

유월 언저리에서 (퇴고)
/ 2021-09-19
벌새
남자와 소녀와 아이스크림 – 맛이 없다. [3]

  “있잖아, 어차피 녹을 거면 뭐하러 먹지?” 버킷햇으로 그늘진 낯의 성인이 피스타치오 맛을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어본다. 먹처럼 담담한 목소리가 굵게 전등 아래서 흔들린다. “네?” 전등 조명이 비추는 피사체는 한 소녀. 나지막한 높이로 스쿱을 건지다 말고 손님의 눈을 올려다본다. 마주친 갈색 눈동자가 흐릿한 빛을 띠고 있다. 소녀는 아무 영문 없이 남자가 마치, 히키코모리 같다고 생각한다.  “가다가 다 녹을 수도 있어. 언제든지 늦을 수 있으니까.” “그럼 녹기 전에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혼자서?” “네, 뭐…” 새로운 유형의 상황에 소녀는 당황했지만 할 말을 한다. 아이스크림 집에서 일하는 동안은 아이스크림의 만사에 최선을[…]

남자와 소녀와 아이스크림 - 맛이 없다.
/ 2021-09-19
벌새
유월 언저리에서 [1]

무언가가 강하고 깊고 담직하게 흘러나와 중간의 줄을 그어 버릴 때 직관이라는 게 있잖아 혹은 단념 말미암아 너를 너라는 사람 자체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 사그라드는 빛이 따가워 눈을 잠깐 아주 잠깐 감박거릴 때 이미 너는 사라지고 없다는 것 터진 카메라 필름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지 역광,이라고 부를게 제대로 응시도 못한 눈동자 별처럼 혈관에 박혀왔던 동굴처럼 그리운 숲내음 차가운 계곡물 그사이를 헤엄치다 숨이 차서 그만두지도 못했고 끝이 없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었을까 형이상학. 본질에는 끝이 없어 언제나 말라가는 것 숫자들에다 끊임없는 의미부여를 하고  맞아, 그곳은 여름이 참 더웠지 같은 무겁지 못한 말들을[…]

유월 언저리에서
/ 2021-06-09
벌새
하늘바라기 [3]

하얀 나비가 날아간다 행복한 자취이다 슬픈 울음이다 나비는 키가 크고, 장대하다 무한히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머금는다 묵직이 날아가며 사랑을 내린다 나비가 날아간다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푸르고 흰 하늘로 나비는 예고 없이 날아간다 온기가 맴돌고 새가 운다 행복한 울음이다, 행복한 울음이다 인사는 나누지 않는다 땅지킴이들은 두 발 딛고 서 하늘을 바라본다 곧게 바라본다 그래, 그렇구나 살다 보면 어둠은 깊은 밤이 오듯 나비처럼 내려앉는 것이구나 우리의 몫은 손을 마주 잡고 희끄레한 옛날들의 빛과 함께 남은 길을 고요히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구나 땅지킴이들은 하늘을 본다 곧게, 길게 바라본다 슬픈 어둠 행복히[…]

하늘바라기
/ 2021-02-20
벌새
좋은 향기는 언제일까 [2]

생선을 굽는 때가 좋았다. 고등어 굽는 내가 작은 집안에 오롯이 퍼질 때가 좋았다. 물고기 향이 안방으로 퍼지는지, 현관문으로 퍼지는지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코끝을 춤추게 했을 때가 좋았다. 냄새를 쫓다가 밤 창문을 열 때가 좋았다. 식은 여름비의 안개를 느낄 때가 좋았다. 웅성거리는 촛불과 부지런히 삭혀야 하는 자두와 가지런히 켜진 노란 전등이 좋았다. 전등 위를 죽도록 날아다니는 초파리 떼가 좋았다. 작위적으로 열어 놓고 게으름에 닿지 않은 피아노 건반을 쳐다볼 때가 좋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편함이 넉넉할 때가 좋았다. 벌레들의 깔짝거림과 여름 저녁의 텁텁함이 진한 농도로 합쳐져 서로를 느낄 수 없게 돼도 좋았다. 불빛[…]

좋은 향기는 언제일까
/ 2021-01-25
벌새
경계 속 헤엄 [1]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우뚝 서 밤하늘을 바라보았지 눈 위에는 바다가 있어서 은보다 곧게 굽은 별들을 바라보다가 순서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매듭지었지   생각이 생각을 먹고 어느 생각은 생각을 흐리다 보면 흰 각질 같은 게 일어나 주위의 말소리를 새어 물고 검푸른 입맛을 다시다 고막으로 들어와 우렁찬 잠을 자고는 했지   한참을 쉬고 스스로 일어나면 어스름 희미해지는 새벽녘 왠지 모를 아쉬움에 고개를 되묻을 때면 보이는 푸르고 넓은 고래의 등   그 표피를 두 발로 집고서 이쪽으로 가자, 동해로 헤엄쳐 가자 밤기운을 떨치려 속삭거렸지   봄비인지 벚잎인지 모를 말갛고 부슬부슬 내려오는 선홍들을[…]

경계 속 헤엄
/ 2021-01-13
벌새
상념 [1]

절의 종소리에 하릴없이 차분해져 버리는 세상 따위에 살고 있다 울려 퍼지는 종의 울음 하늘의 감각을 들이마시는 걸까 바람은 시리고 연은 나는데 왜 마음은 구름 타고 찢어지지를 못하는 것일까   누가 나의 울림을 쳐주어 세상처럼 가라앉을 수만 있다면 일정한 간격 속에 비애를 맞춰 단정한 계단의 폭으로 상충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는 어느 더러움이 있고 깨끗해지는 서리 따위가 있으랴   비바람은 불고 거미줄은 두 다리를 휘감아와도 생그럽게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분홍색 안경, 펄럭이는 자줏빛 치맛자락 따위도 사랑을 날치기해가는 그대 같은 사람만 없을지라면 허름한 건물 그 밑의 바수어지는 누름꽃 같을 것이다   오토바이에 기대[…]

상념
/ 2021-01-13
번호 컨텐츠
24 어떻게 글을 나누세요? [4] 벌새 2021-09-20 Hit :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