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끝은 계속 달리고 있다

울퉁불퉁한 것들을 따라 움직였다 가만히 떨리는 손을 붙잡고 가슴에 상상의 날갯짓을 멈추고 눈을 떠야만 재미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들과 직각들과 무수한 평행 점과 은하수가 놓인 둘레길을 따라 걷고, 걷고 또 걸어도 뛸 수는 없었다 둥근 지구는 있어도 뛰기 쉬운 길은 없었다 알았던가, 나는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걸 얼굴이 벌그레해질 즈음 훌쩍 넘어버리고 싶었다 벽을 짚고 시야를 건너 두 눈을 감고 꼭 감고 끝은 그 자리에 서서 도망가지 않아도 이미 멀다 아마 자신도 열성으로 달리고 있을 테다 저가 끝인지도 모르고 벅찬 숨을 고를 테다

끝은 계속 달리고 있다
/ 2022-08-03
벌새
창백한 내가, 푸른 너에게

꿈은 별보다 덜 더럽고 무거울지도 모른다 흰색 목줄을 한 갈색 푸들 그 위로 전갈 자리가 맴맴 돌아다녔다 너는 무슨 색의 묵주를 차고 있니 구슬 같은 너의 눈을 보고 있으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고 싶어진다 습기도 신의 축복이겠지 덜 마른 걸음을 내디디라고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을 균형에 맞게 살아가게 하는 새의 깃털처럼 뭉근한 밤 수없이 오는 편지들을 정리한다 코스모스의 총기는 가로등 불빛은 왜 어두울수록 떨어질수록 그리워지는지 알다가도, 아마 모르다가도 모를 일이다 신이 주신 친절 혜성, 흐릿한 시야와 고요한 함성의 하모니 먼지 덩이가 떨어지는 천체 아래 둘러앉아 누구에게 바칠[…]

창백한 내가, 푸른 너에게
/ 2022-08-03
벌새
설익은 채로도 [1]

  짙은 초록은 초록으로 연두는 설익은 채로도 괜찮다   눈앞의 세계는 오아시스 오아시스 뒤에 있는 낙엽도 시간의 발자국 마음속의 소란은 나뭇잎처럼 포개버리면 된다   그러면, 몇 잎은 죽어 버리는데 죽은 잎들에게는 숨을, 새롭게 불어넣고 신 연두색이 되면 썩을 일이 없다   푸른 불꽃이 내뱉는 건 남들의 소동, 창문 밖의 소나기 두드림을 묵인하면 물은 공기가 되고 두 발을 움직이면 손과 입은 남아돌 틈이 없다   평범한 나는 그렇게 살아가니까 한 마리의 소탈한 찔레꽃처럼   벌을 따른다고 불려도 나는 늘 너처럼,만을 외치지 않고 고요한 너와 함께 숲으로 가고 싶다  

설익은 채로도
/ 2022-07-12
벌새
가방에 넣고 다니던 생각들을 조금 풀어보았다 [2]

<사람>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끊어지는 붉은 실이 있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나 딱히 큰 욕심도 없다.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건 중요하다. 미지근한 온도로 마음이 역행할 때가 있기는 해도… 아무것도 몰랐을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친구가 물어봤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종종 생각한다. 모르는 것도 편해지려고 짓는 죄가 아닐까. 왜냐고 물으면 나는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에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아무도 모르겠는 기분이다. 도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들은 가지각색이다. 가끔 그들이 행복을 위해 퍼덕이는 하루살이 떼로 보이기도 한다. 일상성이라는 별에서 살며,[…]

가방에 넣고 다니던 생각들을 조금 풀어보았다
/ 2022-07-10
벌새
새로운 것은 새롭게 두어라 [1]

꿈은 깨어진다 새가 알을 뚫고 나오고 내 생명은 어디서 왔나요 꿈나라에서 그리고 어디로 가나요 새의 날개는 나비보다도 흐물거려서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도 금이 가 버린다 그런 말은 내뱉는 게 아니라 삼켜야지, 배고프니까 눈을 감아도 저린 게 여운 여름 나무의 밑동 눈그늘 아래서 정처 없이 떠도는 검은 새 흐르는 땀, 말라가는 속살 어두운 둘레길을 빙빙 도는 눈 밑의 까만 점 무리 부화하진 못한 새들은 곧 블랙베리라고 불렸다 그 속에서 뭐가 조각나든 눈을 뜰 때는 재밌으니까, 블랙베리를 먹으면 시큼한 하루가 둔한 몸짓과 함께 덤덤해졌다 잊어 잃어버리고 너도 나와 같은 아름다움을 앓았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새로운 것은 새롭게 두어라
/ 2022-07-09
벌새
내가, 나에게 [1]

 – 그때 당시의 나는 픽 죽고만 싶었다 낮이 되면 기분이 시에 젖힌 것처럼 우울했다   슬플 때를 조심해야 하는 거야, 슬프면 사람이 복숭아처럼 물렁물렁해지니까   나는 내게 되어야 했다 나는 되어야 했다, 싱그럽게 흔들려도 그대로인 나무가 되어야 했다 복숭아가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도록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흙의 바닥 같은   뭐라도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발끝 아래로 주저앉는 침묵이 오면 몸을 둥글게 말고 유유히 평범한 가재처럼 쓸려 온 신파가 떠나기를 빌었다   울음과 고통은 각자의 방에서 우리 서로는 사랑만 하자 철학자들은 짐짓 슬픈 사랑을 거부했다   되어버려라, 내게 무엇으로 시작했든, 끝은 잃어버린[…]

내가, 나에게
/ 2022-05-28
벌새
시각의 사각지대 [1]

나약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 강하기 때문에 잃을 수 없는 것 필름처럼 감기는 안경의 물막 위에 오롯이 앉아 떠도는 빗물 강아지들 외친다 다시는 밤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마 그들을 보듬으려 하지도 마 어깨에 서려진 울음의 온도를 모른 채로 강아지들이 미끄러진다 평평한 면 위에서 서로를 뒤쫓으며 서두르지 마 어둡다고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니까 한 명은 빛을 찾고 한 명은 어둠을 찾자 가면을 벗으면 어차피 다 뛰는 뼈들이다 골격에 갇힌 채 약할 살을 부수는 외친다 결국 다 너고 다 나고 다 우리들이야, 일상성에 사는 성층의 사람들이여, 내게 오세요 새벽을 이끄는 개[…]

시각의 사각지대
/ 2022-04-16
벌새
물비늘 (퇴고) [1]

나름대로 버티다가 수면에 이르러서 부서지는 불빛들을 감싸는 물살은 얼마나 부드럽고 온건할까 우리는 우리를 적당히 미워했으면 좋겠다 태초의 세상이 떨어질 때 태양은 호흡을 돕는 물비늘을 감고 왔다 저마다의 묽은 파편이 묻어나올 때 서로는 서로를 조용히 안아주어야 한다 세상이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아무런 말과 숨 없이 비늘이 비늘을 스쳐가는 적막으로만 가볍고 자유로운 낙하를. 가끔은 숨만 쉬는 것도 중요하니까 너는 비늘이 벗겨지는 그대로 아름답다 이기는 것보다 지고 울지 않는 구름의 습도로 물살 아래서 일렁이며 밀지 않고 밀려나는, 그저 하나의 빛으로 소란스러운 영원을 버티는 굴레는 나선처럼 억세지만 다같이 호흡하면 만날 수 있다 휨 안[…]

물비늘 (퇴고)
/ 2022-03-29
벌새
물비늘을 벗으려 [1]

나름대로 버티다가 수면에 이르러서 부서지는 불빛들을 감싸는 물살은 얼마나 부드럽고 온건할까 나는 너의 우수의 살을 덧대고 미련 넘치게 안심한다 우리는 우리를 적당히 미워했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푸른 파편이 몸에서 나올 때 서로가 서로를 조용히 안아줬으면 좋겠다 차가운 웅덩이 속에서 겨울을 헤엄쳐 본다 밤별이 내릴 때 손을 뻗어 거리를 헤아리면 때로 눈가에 염소가 맺힌다, 아침이 밝으면 희미해질 고요한 물결들이 나를 감싼다 나는 호수가 되어 간다. 그토록 소란스러운 영원들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몸 하나를 버티는 설된 굴레는 우윳빛처럼 고요해질 수도 있었고 멀리서도 이리 아름다웠다 일렁이는 것들을 더는 잡지 않겠어, 다짐하니 구름이 사라지면 날씨조차도[…]

물비늘을 벗으려
/ 2022-03-10
벌새
아침의 샤워 – 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 잡생각은 줄어들지를 않아. 전생에 아마도 인어가 아니었을까 나는 [1]

사각의 울림통은 조그만 뚫림 사이를 비집고 귓가만으로 일 초 만에 스며들어 몸의 반응 벌컥 일어나 벌떡 후룩 후루룩 파도는 파도를 타고 넘실대네 귀에서 통통 허리를 반으로 기울이자 아침 물 자락 송골송골 뒷자락에서 스르르   아침의 샴푸는 부드럽고 시원하여 아침 그 자체 같아 참 발랄하기도 하지 이슬을 맞은 것 같다고 하지 다들 씻겨내면서도 간간하다고 또 물에 고파   물을 쏟아부으며 눈을 흘끔 뜨면 감으며 보낸 열 시간은 어제로 소명 밑은 하얀 거품의 바다 인어들의 속삭임 혹은 비명 밀치는 방울들은 바닷가 알갱이 모래 조각의 무디어진 유리의 사이다병 네모 통으로 흘러가는 중 말쑥한[…]

아침의 샤워 - 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 잡생각은 줄어들지를 않아. 전생에 아마도 인어가 아니었을까 나는
김덕희 / 20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