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로맨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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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를 따라 침몰한다. 한가운데로 허물어진다. 견디는 너와 달리는 너. 우산 끝이 내 몰골처럼 부러진다. 그래도 내려간다. 하강의 기질은 검정 같은 게 아니라서. 찬란과 착란 중 어울릴 통로를 고른다. 여기서 네 역할은 마음껏 무서워하는 것. 그러나 너는 숨을 크게 쉬는 법을 안다. 백덤블링을 하면 솟구쳐 오른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 없이도 녹을 수 있어. 너는 나의 유일한 자랑인 열병을 싫어한다. 그러니 깨끗한 걸 죄다 보여달라고 했다. 그 말 하나로 네가 사랑하고 있다고 오해한다. 뒤로 뜀틀을 넘어도 주워담을 수 없다. 피아노 건반에 앉아 나를 튕길 때를 기다린다. 오해를 눈동자마다 심고 싶어서. 문은 수직으로 열린다. 나는 아직 떨어지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네가 가르쳐 줘야 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신만 용서할 수 있는 색깔을 가진다. 새파란 독약은 사실 새하얗다고. 우리만 볼 수 있는 색은 색일까. 나는 해상력이 뛰어나지 않은 문제아. 하지만 오래 집착하지 않는다. 때가 거의 타지 않은 교복처럼. 첫 세 장만 깨끗한 참고서처럼. 잃어버렸다는 건 슬퍼할 시간마저도 없었다는 것. 너는 갇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내 소유의 낱말이었는데. 대신 나는 녹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시가지의 맨홀에서 튀어나온 건 너일까 나일까. 어쩌면 라플라스일 수도 있지. 화요일을 꽃이 피는 날짜로 정했다. 당기는 문을 밀어본다. 나는 화재에서 어차피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처음으로 세상의 탓을 해본다. 나는 지구에 없다. 파편이 맨몸을 조각내도 여기가 좋아. 늘 주어와 술어가 뒤바뀌는 꿈을 꿨다. 손과 발이 뒤바뀌는 꿈을 꿨다. 끝과 처음이 뒤바뀌는 꿈을 꿨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서 너는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나는 미련이라고 단정지었다. 너는 수없이 펼쳐진 객실에 빈 방이 없다고 했다. 안내방송이 나왔다. 모두 진부한 방으로 옮겨 주세요. 다같이 짐을 싸서 문 앞에 단정하게 정렬했다. 누구나 악마 가면을 쓴 새벽이었다. 유일한 너만 새하얬다. 거짓된 죄를 사하여 달라고 매일 체념한다. 오늘은 너 대신 내가 처음으로 투숙객이 된다. 이미 너는 발음을 견주어 변칙이 된다. 나에게는 처음이 너무 많다. 처음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건 내 발일까. 처음 정원 속으로 잡아먹히는 건 내 발일까. 내 발가락은 얼마나 더 자라날 수 있나요. 여분의 시간마저도 목이 졸렸다.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옆방에선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너는 냉장고로 들어가버리고 나는 민소매로 갈아입는다. 정오에는 비가 오는구나. 그래서 처음 목이 말랐구나. 너는 나약한 악마라서 뚱뚱해지는구나. 내가 너를 따라 자라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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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 아쿠아 아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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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너는 덤블링을 하고 나는 움푹 패인 바닥에 웅크린다. 한 바퀴 돌 때마다 꼭짓점은 하나씩 늘어난다. 숨을 틈이 늘어난다. 아가미가 돋아난다. 너만 어둠을 다칠 숫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영영 베이지도 지치지도 않을 예정.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이파리들이 손을 흔든다. 대관람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린 치마들.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투신한 주인공들. 겨우 반나절을 숨쉬었는데 벌써 숨이 차요. 뽀글뽀글뽀글뽀글. 오인된 줄기를 미끄럼틀로 개조한다. 나는 미끄러져도 화상을 입지 않는 변종. 교복과 연필이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로 돌아간다. 처음과 끝이 다르다는 걸 몰랐을 때로 돌아간다. 작도한다. 나쁘다. 토슈즈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꼬리지느러미가 비닐에 먹힐 때까지. 이제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너는 울고 싶다고. 나쁘다. 발목이 묶이면 천장에 발끝으로 서본다. 지옥처럼 새하얀 눈이 쌓였다. 천국처럼 새빨간 거짓말이 쌓였다. 너는 완성되지 않은 피조물. 뺨이 붉은 무릎. 살아낸다는 건 결국 어항을 덧쓴다는 걸까. 그건 또다른 수면일까. 내 손가락은 여전히 목덜미에 박혀 있다. 물탱크 속으로 허물어진다. 유해의 밤을 이겨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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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레이션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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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에는 가로등이 있다 손인지 발인지 목소리인지 모르긴 몰라도 희미함 위에 서 있다고 하자. 그냥, 스톱워치는 작별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여전히 우리는 트랙을 돌고 그것을 신파라고 부른다, 물집이 잡혀도 포스트잇을 입술에 칠한다 그리고 그래도라고 말한다. 지칭은 울 수도 없어야 감쌀 수 있다고 슬픔이 말했는데 유리창은 초침처럼 오만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정반대의 허공을 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점이 없는 벡터처럼

 

달콤한 우리는 빼어질 수도 더해질 수도 없어서 나의 간격은 무척 좁거나 없다 물구나무를 서야 입장할 수 있는 놀이동산의 유곽에서 내가 낳은 솜사탕을 우리라고 부르기로 하자 키우던 발목이 기울어졌다, 롤러코스터가 직접 초래한 각도로 두 계절을 열거하면 왠지 지구처럼 길을 잃은 것만 같다

 

여전히 나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 원의 정의에 대해 묻는다면 떠나도 모를 만큼 진득해지자고, 아직도 길어지는 여정들. 어떤 행성을 반으로 가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입술에서 입술로. 저기 부러운 반환점이 온다.

 

초인종이야 소란이야 음치의 카데바야 서늘이야 여름이야 빈칸의 출몰이야 허리케인의 눈이야 나는 더 이상 잔인하거나 천진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영영 죽지 않는 것들아 이제부터 영영 내 손가락에 끼우고 싶다고 이미 죽어버린 열망들을 조종하면 그러니까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도 아니야

 

우리가 우리로부터 걸어나가고

문은 없는 항로처럼 죽어있었고 이제

 

더러워진 팔레트 위에, 이름을 녹인다 그건 사실 부서진 조약돌을 늘어놓았다가 발로 으깨 만든 우연들. 혀에서 혀로 혹은 어느 날, 하고 부르면 멀어지던 달력의 수인번호들처럼. 드문드문 낭독당한 마지막처럼. 죄의 뒤에 놓여야 할 색깔을 꿈속에서 오래 고민하다가 되도록이면 손목으로 울지 않을 수 없어 빛나는 밤. 없어질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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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카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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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부장이 눈치 까고 밀어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인사과에 서류 넘어갔다니까. 사무실에서 종종 마시던 뉴욕 브랙퍼스트의 초콜릿 향이 강하게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라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곤 자기 몫의 밀크티를 투명한 컵에 부었다. 밀크티가 찰랑이며 채워졌다. 라가 꼭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흘겼다.

 

유리에 뜨거운 거 부으면 안 돼.

유리 아닌데.

아니야?

언니가 보내준 거라 잘은 모르는데 아닐걸. 소포로 유리 보내면 깨지잖아.

그렇긴 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보고서야 라는 작은 싱크대에 주전자를 놓고 돌아왔다. 흘끔 보아도 싱크에는 남은 공간이 많지 않았다. 딱 한 명이 머물 법한 부엌, 책상, 선반. 침대도 없어 여길 집으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할 것 같았다.

 

일 얘기나 마저 해 봐. 얼마나 진행됐는데?

 

라는 내가 모으고 있는 자료들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어떨 때는 시계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설명을 듣곤 했다. 나는 반쯤 마신 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

 

 

카론의 불그레한 뺨을 쓸어주며 배웅할 때까지도 내색하지 않았으나 사실 시계를 주문한 언니의 요청을 몇 주째 미룬 채였다. 이렇게 내팽개쳐 두다가는 다음 소포에 생사를 확인하는 글이라도 적혀 있을 판이었다.

며칠이나 손대지 않았던 수납장 위의 손목시계를 가져와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서랍을 열면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 같은, 그러나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편지들이 무수했다.

가장 최근에 만졌던 편지 봉투를 더듬어 찾았다. 봉투에서 분리된 편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조금만 시계에 담아줘. 조각이나 장식, 디자인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사람들이 네 시계를 매우 좋아하는데, 정작 시계공이 나타나지 않으니 궁금한가 봐. 그러니까 이번 테마는 너로 하자. 이건 내 부탁이기도 해.

 

언니는 내가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을 피해 이 숲에 들어온 후부터 매일같이 생필품이 떨어졌다 싶을 때쯤이면 내 상반신만한 박스를 소포로 보냈다. 아주 꼼꼼하고 세밀하게 포장된 안에는 늘 아이스팩이 들어 있어 음식들이 단 한 번도 상한 적이 없었다. 포장재 위에는 언제나 정성스럽게 실링왁스를 찍어내어 밀봉된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만년필로 쓰인 편지는 언제나 디어 라, 로 시작했다.

어쩌면 언니는 내가 실링왁스를 좋아하는 걸 기억할지도 몰랐다. 왁스가 녹으면서 내는 목소리가 그렇게 행복하다는 걸 들어본 적 없을 언니는 모를 텐데도.

 

시계의 조각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를 테마로 한 작업은 처음이었다. 물방울과 별이 불규칙적으로 수놓아진 베젤과 케이스를 세공할 때 안료는 유난히 금세 말랐었지. 다이얼에서는 명왕성이 일정한 궤도를 두고 회전했다. 내가 무얼 넣어야 할지는 나도 몰라, 언니. 내게는 여기 있는 모든 게 전부 소중한걸.

그래도 무엇인가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내 시계가 비싸게 팔린다는 이유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였으니까. 나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언니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일일 테였다. 그리고 나는 언니한테 빚을 지고 있으니까.

 

탄,

응?

 

카론이 있는 내내 내게 장난을 걸었던 탄이 불쑥 커지며 대답했다. 불꽃을 튀기며 벽난로 안에서 즐거웠다는 듯 깔깔 웃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통나무를 갉아먹었다.

 

내일 밤 호수에 가자.

호수? 왜, 재료 떨어졌어?

탄은 자신이 먹는 통나무에서 재가 떨어지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다가 가운데 부분을 태워버려 나무를 둘로 동강낸 뒤 한입에 먹어 삼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무도 얻어다 준다고 약속하면.

그래.

소나무로.

걔네는 까다로운데.

아니면 안 가. 춥단 말이야.

불이 추운 걸 어떻게 느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 그래?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탄을 바라보자 탄은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최대한 작게 만들고선 혀를 길게 빼물었다.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태가 얄미웠다.

추워.

알았어, 알았으니까. 준비해.

 

 

*

 

 

나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전에는 사보 외주를 하고 오후에는 라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밤에는 부장에게 성희롱 및 성추행을 당한 사람들의 사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여사원들이었고, 보복이 무서워 주위에 알리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고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부장이 나를 이 숲속으로 파견 보내고 나서 가장 별일은 라를 만난 것이었다. 말이 이 숲 위쪽에 지어지는 댐 건설에 대해서 낱낱이 파헤쳐 오라는 것이었지, 한 달을 넘어가면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조용히 하라는 협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는 내가 프린트해 온 피해 사례들을 차근차근 읽고 있었다. 원래 오던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덧붙여 말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함께 햇살이 잘 들어오는 자리를 찾아 앉는 것 외에는.

나는 라의 옆에 앉아서 몇 번이나 검토하고 윤문했던 사례들을 다시 떠올렸다. 이내 머릿속에 담고 있기도 싫어 지워내면 고양이를 닮은 라의 얼굴만 시야에 가득 담긴다.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이며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따위는 분명 눈이 가는 외모다. 오두막이나 숲에는 별반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마저 심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함께 붙어 책을 읽거나 사진첩을 넘겨보는 일은 잦았으나 이렇게 라를 빤히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라가 사례를 읽는 만큼 꼼꼼하게 라의 얼굴을 읽었다.

 

길게 나부끼는 속눈썹, 사나워 보이지만 사실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 깊은 눈매와 명왕성을 닮은 눈동자, 붉은 기는 찾아볼 수 없는 낯에서 유일하게 불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입술, 광대를 덮어내고 허리까지 이질적으로 떨어지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카론.

 

라의 코랄 색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급하게 눈을 서류로 내렸다.

 

너는 왜 굳이 이걸 폭로하려고 해?

응?

 

라는 서류를 내렸다.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라를 응시했다. 라도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거 아냐. 너도 이렇게 불이익 받는 일 없었을 거고.

 

나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라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서류는 이미 라의 손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나는 다소 흐트러진 서류를 그러모아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나는 이런 게 너무 싫어, 라. 권력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건 항상 힘이 약한 사람들이잖아. 나만 아프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게 해결되는 일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평소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라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라의 눈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라의 옆으로 긴 눈이 동그랗게 변하면 나는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왜, 라. 그래도 그래서 나를 만났잖아.

그걸로는 성에 안 차? 라에게 물으면 그제서야 라는 내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그러네, 하고 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숲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내가 물어오면 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다가도 애매한 대답만 내놓았다.

 

재미없어.

나는 뒤로 얼굴을 거두었다. 라가 답하기도 전에 나는 서류를 챙겼다. 라는 내 손끝만 멍하게 바라봤다. 나는 라의 낯빛을 힐끔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없으니까, 다음에 내 글이나 봐 줘.

글?

소설.

 

나는 부러 지나가는 어조로 말을 던졌다.

 

출판사에서 댐 조사만 하지 말고, 단편이라도 써 오래. 나 밉보였나 봐. 일을 또 주시네.

다 썼어?

얼추 어제 마감했어. 고치는 게 더 일이라곤 하더라. 너랑 같이 다녔던 들판이며 숲속 깊숙한 공간들이 배경 묘사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거든.

 

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의 표정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기쁜 걸까, 슬픈 걸까, 아니면 라도 라의 감정을 모를까. 어쩌면 라를 이해하는 건 부장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몇 가지의 가설을 정리하다가 재빨리 생각을 지웠다.

 

 

*

 

 

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이거 내가 쓴 거 아니야. 언니가 보낸 거라고.

언니의 주문서를 낭독하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호수가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바위를 딛고 서서 호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물을 날카롭게 일렁이는 낯은 분명 무언가 불편하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왜, 나는 다시 물었다. 너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호수가 대답했다.

누구, 카론?

카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호수가 심하게 요동쳤다. 어린아이들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동요하기라도 한 듯 호수 주위에 만발해 있는 분홍색 꽃들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어?

라, 너, 우리에게 쏟을 관심을 그 여자애한테 다 주고 있잖아.

 

우리가 다 봤어.

우리가 다 봤어.

우리가 다 봤어.

 

목소리들이 한데 합쳐져 울렸다. 머리가 아팠다. 탄이 자리한 초롱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탄만 조용한 게 분명했다.

카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적은 없었으나, 숲과 숲, 그리고 숲과 숲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문이 여기까지 퍼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움직일 수도 없는 저 애들에게는 이 소식이 논쟁하기 좋은 사건이었을 테였다. 여전히 목소리들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초롱이 점점 따뜻해지다가 뜨거워지다가 갑작스럽게 온도를 내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구름처럼 몸을 부풀려 커져만 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만!

그만해. 알겠어.

내가 사랑을 잘못 알았나 봐.

 

심호흡을 했다. 떼를 지어 소리치던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그 중 같은 어조의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등등하던 공기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떨리는 느릅나무의 호흡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라, 너는 우리를 사랑하지.

 

한밤중의 별을 닮은 목소리가 물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랑하지. 위압적인 곰 같은 목소리가 물었다. 사랑하지. 연어가 물 밖으로 튀어오르는 밤의 목소리가 물었다. 사랑하지. 사랑하지, 사랑하지, 사랑하지.

 

그래, 사랑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겠어.

 

호수는 확답을 얻어내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 견고함에 힘을 실어 주는 건 주위의 모든 목소리들이었다. 조용히, 나직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답을 달라고 입을 모아 요구하면 내가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그만큼 너무 오래 보았고, 서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았으며, 서로를 단번에 무너뜨릴 열쇠 하나씩은 쥐고 있었다. 내가 숲 위에 건설된 댐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호수는 나를 재촉하며 물과 물 사이에 입을 열듯 틈을 만들어내었다.

 

누구를 사랑해서 사람을 분해해 보겠어, 그렇지, 라. 우리의 꽃을 꺾어버렸던 날, 네가 내 안으로 밀어버렸던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대답해 봐. 너는 그 애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호수가 더 요동치면 저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거름망을 거치지도 않고 내 귀로 꽂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 날에는 늘 악몽을 꿨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호수와, 꽃과, 나무와, 새들과, 숲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것. 그건 유년의 나와 내 엄마가 늘 꿈꿔 왔던 것이었으나 막상 꿈속에서 마주하면 입을 닫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만 같아 공포스러웠다.

눈을 굴리다가 탄이 든 초롱을 더 꽉 쥐었다. 탄을 내려다볼 시간도 없었다. 나는 애써 에둘렀다. 최대한 의연하게 말을 굴렸다.

 

죽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결국 이 숲 말고 다른 만들어진 것의 일부가 된다는 건데.

 

호수는 여전히 일렁였다. 무섭지는 않았다. 가족보다 더 많은 세월을 함께한 친구다. 불만족스럽다는 듯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면서 자신들끼리 웅성거리는 모양새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말했잖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희밖에 없다고.

 

그제야 흔들리던 동세들이 잠잠해졌다. 호수는 그렇지, 하고 흡족하게 몸을 떨었다. 물의 파편들이 호수 위로 튀어나왔다가 잠잠하게 들어갔다. 호수에서 빛이 나는 건 늘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가 볼게.

왜 벌써. 뭐 가지러 온 거 아니었어?

 

그제야 탄이 소나무를 열심히 주장했다는 게 떠올랐다. 평소라면 이 시점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왜 자신의 나무를 챙겨가지 않느냐고 불퉁댔겠지만, 탄은 오늘 유난히 조용했다. 초롱을 들어 작아진 탄을 확인했다. 탄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맞긴 한데, 오늘 너희 기분 안 좋은 거 같아서.

됐어, 주문서 들어 보니까 아무거나 골라 넣어도 될 거 같던데. 네 언니한테 필요한 거 조심히 가져가. 우리는 널 사랑하잖아.

 

 

*

 

 

오늘의 라는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몇 번이고 불러도 대답하는 속도가 느렸다. 나는 라를 부르다가 끝내는 라의 손목을 쥐었다.

 

라.

 

라는 반짝 놀라더니 내 눈을 마주하고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 왔잖아. 내가 말을 한 글자씩 띄어 강세를 주고서야 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하지 못하는 라는 숲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는 라에게 보여 줄 원고 뭉치가 들려 있었다.

 

소설 가지고 왔는데, 오늘 줘도 네가 읽을지나 모르겠어.

 

그렇게 멍해서는. 웃음을 흘리듯 뱉으며 라에게 소설을 건넸다. 한때는 글을 쓰고 싶어 하던 시절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써 오라고 했다던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연락이 오지 않았어도 나는 아마도 소설을 썼을 것이다. 남의 글을 눈 빠지게 보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이 정도로 주어지는 건 입사 이래로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단지 라의 눈에 비친 소설의 세계가 어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소설을 받아들었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원고의 무게감이 어쩐지 과하다고 생각했다. 라는 지난번 피해 사례들을 읽었던 것처럼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철해진 표지를 넘겨 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라가 읽는 방식은 읽는다기보다는 눈에 박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어느 하나도 기억에서 놓치지 않을 거라는 듯이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시계 작업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애당초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분량이 많지는 않았다. 한 달간 꾸준히 조금씩 쓰다 보니 오십 장 정도의 소설이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라가 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제 보아도 눈은 깊었다. 라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으나 이내 잦아들었다. 나는 라의 곁으로 엉덩이를 밀어 다가가 몸을 붙였다. 등을 벽에 기대자 피곤이 쏟아졌다. 라에게 더 나은 소설을 보여주고 싶어 밤새 글을 고친 탓이었다.

 

라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라가 집중하던 원고 뭉치는 표지가 맨 앞으로 하여 가지런히 정리되어 라의 손에 얌전히 쥐여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라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내가 라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라는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졸려?

……응.

 

내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완전히 잠에 취해 잠겨 있었다. 몇 시간이나 잤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건 그저 라의 집에 시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그럼 기대고 눈 감고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머리카락이 라의 등이며 몸에 닿아 간지러울 게 뻔했으나 라는 몸을 빼지 않았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따뜻했다. 집안이 따뜻했는지, 라의 몸이 따뜻했는지, 어느 쪽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트라우마에 갇혀서 나아가기를 무서워하는 P도, P에게 자신을 무너지지 않는 낙원으로 삼으라는 S도. 서로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도, 예뻤어. 슬펐고.

 

나는 으응, 하고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불가역적인 힘이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라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흐릿해졌다. 라의 목소리가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웅웅 울리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마치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이.

 

그리고, 닮았다고 생각해.

 

 

*

 

 

라.

탄이 오래 잠잠하더니 카론이 돌아가자 기어코 말을 꺼냈다. 호수에 다녀온 후 처음 듣는 탄의 목소리였다. 탄은 제 불꽃을 일렁이며 벽난로의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왜 내 이름은 탄이야?

나는 벽난로 앞으로 걸어가 맨바닥에 앉았다. 탄이 데워 두었는지 따뜻했다. 탄의 눈이 데룩데룩 구르다가 내 시선과 맞물렸다. 손가락을 꿈틀거리다가 결국엔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너, 나한테 처음 말 걸었었잖아.

태어날 때부터 우리 말소리 들렸었다며.

떠드는 거 듣고 있는 거랑 얼굴 들이밀고 이야기하는 거랑은 다르지.

아무튼.

내 인생의 오점. 오발탄. 그래서 탄.

야.

 

탄의 어이없다는 눈은 아무것도 모를 때 네가 싫어졌다는 장난을 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얼굴 근육을 팽팽하게 당겨 웃었다. 왜, 싫어? 탄의 표정은 가볍게 무시한 채 나는 다리를 쭉 폈다.

 

그 때는 어렸잖아. 너랑 영영 헤어질 뻔도 했었고.

불행했어?

아마 엄마는 불행했을걸.

너는?

어렸다니까. 학교 들어갔을 때도 거기가 병원인지 몰랐고. 그 때 너 나 안 보여서 울었다며? 스스로 꺼뜨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없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대신 네가 여기로 데려와 줬잖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탄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내가 병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탄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럴 때면 도리어 내가 탄을 응시했다. 그 조금의 적막도 참지 못하고 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네 이름은 하필이면 왜 라야.

몰라, 지금 시비 걸어, 탄?

툭 뱉어낸 말이 너무 퉁명스러울까 잠시 곁눈질을 했다. 작업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기어들은 맞물려 금방이라도 절그럭거릴 것 같았다.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탄은 내 낯빛을 스치듯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쟤네 자.

탄이 껴안고 있던 통나무를 넘어 내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제 알려 줄 때도 됐잖아. 얼굴을 그을릴 듯 그을리지 않는 열기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골려볼까 싶었다. 탄의 얼굴 가까이 손바닥을 펼쳐두었다. 탄이 몸을 흐물하게 녹였다가 다른 쪽으로 치솟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오늘따라 이름에 집착을 해.

네가 직접 이름 붙여 준 여자애 때문에. 너 다른 애들한텐 이름….

 

나는 벽난로 옆에 잘라 둔 장작을 쥐어 당겼다. 팔뚝만한 목재를 탄의 머리에 두고 꾹 눌렀다. 말을 잘린 탄은 눈을 이리저리 찌푸리다가 금세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통나무를 껴안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탄, 카론 이야기라면 그만해. 나는 그 애를 사랑하지 않아. 알잖아.

너는 카론이 어떤 별인 줄 알잖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탄이 말을 가로챘다.

 

그럼 왜 걔 이름은 카론이야?

 

탄은 다 타고 난 재같이 굴었다. 꾸역꾸역 붙여 준 이름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나는 그게 전쟁이 나기 전의 밤이라서 잠잠한지, 혹은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라서 잠잠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너 정말 기억 안 나?

탄은 답답하다는 듯 몸 전체를 펄떡여 불똥을 튀겼다. 잔뜩 일그러진 불꽃의 모양이 내 앞까지 밀려왔다 거두어졌다. 그건 언니의 편지였고, 언젠가 물었던 내 이름의 이유였고,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시계가 그런 모양을 갖추고 있는 이유였으니 잊었을 리 없었다.

명왕성과 위성. 어쩌면 붙인 이름이 나를 흔들었는지도 몰랐고, 처음 봤을 때부터 흔들려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도 모른다.

 

사랑해.

 

사, 랑, 해. 아주 천천히 공기를 혀 양옆으로 새어냈다가, 입천장을 스쳐낸 후, 입매를 옆으로 늘려본다. 사랑한다는 발음은 꼭 위태로우면서도 그토록 안정적이지. 혼자라면 금세 쓰러질 것 같으면서 손을 맞잡고 뒤로 누우면 무너지지 않는 것. 손 안에 쥐기에는 이질적이면서 목덜미 뒤에서 숨을 거둬가는 것.

그러나 동시에 둘 다에게 아픔만 안겨주고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것.

 

아니, 난 안 사랑해.

숨을 들이켰다. 다 부질없어.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탄.

 

 

*

 

 

라가 말했던 마지막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닮은 것 같다고 이야기한 다음의 부드러운 낱말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라의 집에서 그렇게 자고 왔으니 밤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오는 길은 꽤 어두컴컴했고, 눈까지 내려 라가 바래다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길을 잃을 뻔했다. 초롱을 들고 보폭을 맞추어 걷는 게 분명한 라에게 나는 자꾸만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라는 웃으며 초롱을 흔들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들은 게 다야, 카론. 내 이름 두 자를 유난히 부드럽게 발음할 뿐이었다. 나 듣던 도중에 잤다니까? 아무리 라를 흔들어도 라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원고를 다시 꺼냈다. 그걸 읽는다면 어쩌면 라가 했던 말을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꾹꾹 눈에 눌러담았는지 원고의 끝부분이 살짝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라가 원고를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라가 집중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원고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단어들이 듬성듬성 빠진 빈칸들이 눈에 잡혔다. 나는 빠르게 원고를 넘겼다. 마치 원래 그렇게 프린트된 듯, 정갈한 활자들 속에 단어들만 쏙쏙 빠져 있었다. 빈칸 채워넣기라도 하라는 것 같았다. 열 번도 더 고치고 읽은 이야기였다. 아마 이 정도는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턱을 괴었다. 이 자리에 들어갈 단어가 같은 건 자명했다. 소설을 쓸 때 단어에 비중을 두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네           까지도 볼 수 있어, P.

네가         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네        이 될게.

무서워? 왜? P,         은 잊지 않는다는 서약과도 같은 거야. 우리는 너무 오래          을 잊고 살았잖아.

 

밖의 눈이 점차 쌓이고 있었다. 나는 단어 생각을 하다가, 라가 잘 들어갔을까 하고 염려하다가, 다시 단어 생각을 하다가, 라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추론하다가, 다시 단어 생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라가 그나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눈임에 안도했다. 또다시 샌 생각에 내 머리를 믿는 건 그만두었다. 대신 나보다 나은 저장 장치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본 파일을 보면 정확한 단어를 알 수 있을 테였다.

 

노트북이 부팅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금속제의 낡은 노트북에 무심코 손목을 대었다가 튕겨오르듯 팔을 빠르게 거두었다. 이제 바꿀 때가 되었는지, 아래에서 정전기가 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어 본 원고 파일에도 누가 고의로 지워 둔 것 같이 그 부분만 지워져 있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써도 다른 생각으로 빠지기 일쑤였고, 미완된 상태로는 글을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단어를 채워 넣어야 했다. 한 번의 퇴고가 더 추가된 셈이다.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팬 소리가, 내가 듣지 못했던 라의 마지막 말처럼 희미하게 잦아들었다.

 

*

 

 

탄.

응.

카론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뭐가.

 

탄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탄을 바라보았다. 나와 탄 사이에는 틈이 없었다. 벽난로에 가까이 붙었다. 탄은 빨리 말해보라는 듯이 몸을 크게 부풀렸다가 바람을 빼 원래 상태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원했던 소나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서.

 

대표로 나서는 것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그게 왜.

카론은 변화라는 게 두렵지 않은가 봐.

안 무섭겠어?

 

탄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감아내듯 찌푸리고 나를 쏘아보았다. 혀를 찰 때마다 불꽃이 위로 튀었다. 탄은 소나무를 꿀꺽 삼키고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변화는 두려워. 나도 너 사라졌을 때 무서웠다고 말했잖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이 보였어.

힘들어도 그냥 하는 거지. 마냥 과거에 매몰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눈을 감았다. 카론의 자신감 넘치던 표정에 결여된 게 두려움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탄은 한숨을 내쉬고 소나무 가지 하나를 더 가져와 짓씹었다.

 

걔한테는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야. 적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는 거고. 그걸 감당할 만큼의 용기가 있는 거고, 이 바보야.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더 가지고 있는 거라고. 탄은 말을 쏟아내고서는 벽난로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그래 봤자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탄이 나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 보내는 신호였다.

과거에 매몰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지. 정확하게 어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으나 탄의 날선 말이 나를 향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간이 지나도 내겐 바뀐 게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믿어 왔으니까.

 

탄.

또 왜.

 

탄이 입을 비죽이며 구석에서 웅얼웅얼 대답했다. 짤막하게 대답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술을 열어 공기를 끊듯 흘려냈다. 이건 평생 내가 담지 않을 이야기일 줄로만 알았는데.

 

만약 내가, 너한테. 시계 속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갈 거야?

누구한테 줄 건데.

…….

이젠 날 아예 멀리 보내시겠다?

탄.

나 보기 싫어? 이제 질렸어?

 

그런 게 아닌 걸 알잖아, 탄. 그러나 내가 눈을 들었을 때 보인 탄의 표정은 목소리와는 달리 장난기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탄에게 손가락 하나를 펴 찌르는 시늉을 했다. 탄은 내 손을 먹다 만 나무로 밀어냈다.

 

그래, 무릎 꿇고 들어가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볼게.

탄.

대신 조건이 있어.

 

탄은 내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훔친 그 단어하고 같이 담아줘.

뭐?

모를 줄 알았어? 그러니까 하필이면 왜 그런 단어를 훔쳤어.

 

그 여자애 소설에서. 탄한테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너조차도 간파했잖아. 네 감정조차도. 탄은 그렇게 말해놓고서 히죽 웃었다.

 

 

*

 

 

내가 라의 작업실에 처음 방문한 이후로, 라의 집보다 작업실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라는 작은 공간을 좋아했고, 나는 불필요한 공간을 반기지 않는 편이었기에 우리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체결된 계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라는 집에 있다가 내가 오면 그제야 나갈 채비를 하고 함께 작업실로 걸었다. 둘도 버티지 못할 만큼 협소한 공간은 아니었다.

별다른 일은 없다. 늘 그랬듯 라는 밀크티를 타고, 나는 주전자를 만지려는 라를 저지하고, 라는 불을 노려보고, 유리컵으로 위장한 컵에 밀크티를 붓고, 그 후에는 책상을 밀어 둔 작은 공간에서 어깨 한쪽을 공유하며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네가 들을 수 없는 걸 내가 들을 수 있다면 어떨 거 같아?

 

라는 종종 이런 물음을 해 오곤 했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을 땐 죽음이 푸른색이라고 주장했었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삶의 일부일 뿐이고, 내가 지금 숲에 소속되어 있다면 죽음 이후에는 다른 범위에 소속되는 것뿐이라고. 아프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이라고. 내가 분해되어서 다른 조각들과 연결되면, 나는 결국 다시 그들의 일부가 되겠지. 그게 다야.

 

그럼, 나는 너를 통해서 그 이야기들을 듣겠지.

두렵지 않아?

뭐가 두려워?

 

반문했다. 내가 두려운 건 그런 게 아니야, 라. 이야기는 끝끝내 내 목울대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냥, 다. 내가 듣는 게 환청이라는 거잖아. 나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 온 라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나쁜 환청이었으면 네가 나를 여기까지 끌어들였을 리가 없잖아.

라는 눈을 감았다. 나른한 눈 아래 자리한 입술이 붉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라의 목을 쥐고 입술을 맞물렸다. 밀크 티 맛이 났다. 라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라의 손이 내 짧은 머리카락을 헤집는 게 선명했다. 라의 목에서 박동이 불규칙하게 느껴졌다. 틈새로 라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카론, 씻을래? 지금.

같이.

응.

 

우리는 벌거벗은 채 서로의 등을 맞대고 앉았다. 물에 젖은 맨살의 온기는 조금 시큼하고 그보다 더 부드러웠다. 라는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느리게 당겨 깍지를 꼈다.

 

카론.

응.

기분이 어때?

 

나는 혹시나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매연이라도 새어나올까 봐 앙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라의 나른한 목소리는 어항 속에 머리를 넣고 말을 한 것처럼 축축하게 울렸다. 라는 계속해서 내 손마디를 더듬었다. 시트러스 같아. 끝이 다소 늘어지는 라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내가 말을 이었다.

피치. 라가 금세 답했다.

라일락.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왠지 그러면 라가 거품처럼 터질 것만 같았다. 대신 라의 뒷통수에 목덜미를 뉘였다. 부드럽고 따끈했다. 있잖아, 라. 네 목소리는 라일락을 닮았잖아. 이름도 라일락에서 따 온 거야?

라는 느슨하게 말했다. 손가락 사이를 누르던 온기가 떨어져나갔다.

카론, 방금은 내가 말한 게 아니야.

 

 

*

 

 

작업실 이 층에 있는 다락으로 카론을 먼저 보냈다. 금세 씻고 나와 축축한 길고 숱 많은 머리는 수건으로 아무리 잘 말려도 함께 자는 데는 불편할 것이었다. 카론의 짧은 머리가 조금은 부러웠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간밤 청소한 이후로 눈이 내리지 않아 깔끔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라.

 

벽난로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작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던 나는 몸을 돌려 탄 쪽을 향했다. 탄은 여느 때처럼 굵은 통나무 하나를 끌어안았다. 위층에 카론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뭐가.

 

탄은 입을 열다가 꾹 다물었다. 그러곤 이내 몸을 온 바닥에 늘어뜨려 푹 퍼졌다. 이럴 때면 평범한 벽난로의 불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다 떨어져 가는 소나무 가지를 탄에게 넘겨주었다. 탄은 나무를 받아먹으며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나 언제 시계에 넣어 줄 건데.

기대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네.

 

탄은 발끈하다가도 금세 축 쳐졌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나는 탄에게 더 바싹 다가갔다. 탄이 끌어안고 있는 통나무를 들어올리고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나중에. 왜, 빨리 가고 싶어?

 

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불꽃이 튀어 통나무가 타들어갔다. 나는 한 번 웃어보였다. 네 뜻에 따를게. 속삭였다. 통나무를 벽난로에 내려놓았다.

탄은 일렁이다가 통나무 아래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탄에게 머무른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 자고 올게. 벽에 붙은 사다리 앞에 선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고 입을 뻐끔거렸다. 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은 다락방의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 올라오는 건 날이 맑은 날뿐이었기 때문에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을 넓게 폈다. 카론은 이불 위로 올라앉아 내가 움직이는 곳마다 시선을 옮겼다. 다락방을 덮고 있는 비스듬한 지붕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구름 하나 끼지 않은 깨끗한 하늘이 펼쳐졌다. 바다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달이 보였고 촘촘히 박힌 별들이 쏟아졌다. 불을 끄면 더 반짝이는 항성들이었다.

 

카론.

 

누워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밤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잠들지 않았는지 금세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숨을 뱉었다.

 

예쁘지.

응. 카니발 같아.

카니발?

마지막 축제. 단식 기간 전에 마지막으로 즐기는 기간이라서 화려하게 파티를 해. 카니발을, 닮았어.

 

카론은 입술을 닫았다. 드문드문 울리는 말소리가 자꾸만 귓가에서 나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는 겨울의 대삼각형이 카론의 말마따나 마지막인 것처럼 빛났고, 축축한 샴푸 냄새는 곁에서 맴돌았으며, 카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왜 하필 마지막일까.

이 평화는 영영 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순간의 평화는 불화로 번지지 않겠지. 지금의 광경이 망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지금 바로 앞에 펼쳐진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몽롱했다.

 

카론, 자?

아니.

왜 안 자.

그냥.

 

담담한 어조와는 달리 카론은 몸을 뒤척였다. 마치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불안한 아가들이 자꾸만 한 군데에 있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카론의 손을 더듬어 꾹 쥐었다. 무슨 일인데, 카론.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려 카론을 보았다. 카론은 여전히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는 채 입술을 물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카론의 입술을 매만졌다. 카론은 그제야 입술을 물던 이에 힘을 풀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라, 나 이제 떠나야 해.

 

 

*

 

 

언제?

다음 주 중으로.

카론.

나도 알아. 갑작스러운 거. 미안해.

…….

라.

카론,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마지막 말을 내뱉는 라의 목소리가 언뜻 잠겨 있는 것도 같아서, 나는 차마 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그래, 하고 마찬가지로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을 뿐이다.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데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고쳐지지 않았다.

 

라는 여느 때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를 기다렸다. 달이 뜬 늦은 밤이었고, 장소가 문 앞이라는 것만 빼면 달라진 점은 없었다. 라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익숙하게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신발 밑에 풀들이 밟혔다. 처음 만났을 때 꽃을 꺾었다가 혼났던 일이 눈에 선명했다. 이 숲에서는 그게 누구든 내 명령을 따라야 해. 늙은 나뭇잎도 허락을 받고 떨어지고, 호수도 제멋대로 더러워지고 싶을 땐 급하게 나를 불러. 카론, 숲을 침범했으면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지.

 

시간은 빠르고, 언젠간 헤어질 걸 알고 있었다. 인연은 원래 스쳐 지나가는 거니까. 한 시기의 지대한 숨을 차지했더라도 그건 결국 한 시기밖에 되지 않으니까. 생을 하나의 긴 띠로 본다면 겨우 하나의 선분밖에 긋지 못하니까.

라의 손을 잡으면 늘 온기가 머물렀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르는 것도 같았다.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 온기는 살아 있을까. 나는 내내 내 손을 그러쥔 라의 손만 뚫어져라 보며 라의 걸음을 따랐다.

 

카론.

 

라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는 호수가 머물렀다. 한밤중이었는데도 그 주변은 이상하게 환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호수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몇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한 번에 꽁짓불을 켠 것 같이 어른거렸다. 라는 내 손을 쥐고 가자는 듯이 눈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로 가까이 갈수록 어린아이들이 환청처럼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연인들이 잠자기 전 이불을 덮고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정도의 데시벨로. 그게 마지막 인사라는 듯이 아주 정성스럽고 작게, 듣지 못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들리기를 원하는 정도의.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나무들은 저마다의 가지를 흔들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언뜻 보기에는 평화로웠으나 갑자기 가지를 부러뜨려 나를 덮칠 것만 같은 섬뜩함 또한 때때로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분홍색 계열의 꽃이 많았다. 호수의 빛과 더불어 아주 얇은 꽃잎들은, 마치 색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호수로, 들어가 보고 싶어.

 

내가 넋을 놓고 호수를 바라보는 동안, 라는 나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건 꼭 명왕성 같았다. 탁하지도 밝지도 않은. 라는 말없이 풀밭 한가운데에 앉았다. 라를 따라 앉으면 라는 나를 망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도 몰랐다.

라는 내 손을 잡아끌더니 만발한 분홍 꽃 중 하나를 꺾었다. 잠시간 라의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금세 퍼졌다. 손끝부터 온기가 퍼졌다. 라는 자신의 무릎에 내 손목을 얹어 두고 꽃을 약지손가락에 묶었다. 축축한 꽃의 줄기가 손가락을 감싸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라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꽃이 시들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기억해 달라는 라의 부탁 같기도 했다.

 

 

*

 

 

갈 거야?

 

라가 한참이나 망설이다 물었다.

 

가야지.

 

나는 자꾸 애먼 소리를 흘려내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라는 말이 없었다. 다만 마른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쥐었다. 몇 번이고 고쳐 쥐는 손가락이 유난히 차갑고 아팠다. 분명 맞잡은 손인데, 시계의 철골이 손목을 죄는 것처럼 서늘했다. 라는 자신의 주머니를 오래 뒤적거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멈춰 보려는 것처럼.

 

라는 작고 어둡고 검푸른 손목시계를 손바닥에 놓아두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불안정하게 회전하면서 붉은 빛을 깜빡이는 시계 다이얼의 행성을 응시했다.

그건 단순한 심장 같기도 했고, 이름 모를 마음 같기도 했고, 치열한 속죄 같기도 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만발한 연보라색 등나무꽃 덩굴 같기도 했고, 세상의 모두가 사라지고 오로지 둘만 남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자꾸만 윙윙거리며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고, 라의 코랄빛 입술 같기도 했고, 또 작업실에 몸담고 일렁이는 불꽃 같기도 했고……,

 

안녕.

 

라가 뱉어낸 마지막 어절이 라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부드러워서 가장 잔인한, 라. 한참이나 침묵은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서로의 눈이 이미 너무 깊이 닮고 닳아 서로를 만질 수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손을 뻗으면 얇은 얼음판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라는 명료한 사실을 알았다.

 

그래.

 

우리는 잘 가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위로에 불과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라의 명왕성을 닮은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라의 까만 눈은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 만큼이나 혼탁하게 흔들렸다.

내 눈에는 뭐가 담겨 있어, 라? 나는 천천히 고래처럼 가라앉는 네 눈동자를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하다가, 하마터면 수류탄 파편 같은 물음을 던질 뻔했어.

 

손목시계를 왼쪽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와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구분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건 라, 네가 말했듯 아주 어렵고도 고결한 일이었지. 기차 시간표를 떠올린 나는 곧 캐리어를 잡아당겼다. 기차역까지는 이 숲에서 나가 택시를 타도 삼십 분이 족히 걸렸다.

 

 

*

 

 

기차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이 기차를 타는 건 숲에서 나온 지 몇 주일 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작가 취재를 위함이었다. 나는 내가 교정한 보라색 표지의 책을 만지작거렸다.

그 동안 부장은 자리를 옮겼고, 내 노트북은 기어이 고장이 났다. 외장 메모리에도, 클라우드에도 저장해 두지 않은 탓에 소설의 독자는 라 하나로 끝이 났다.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출판되는 건 내 글이 아니라 절제할 줄 아는 작가들의 글이었으니까.

 

종종 라의 생각이 났다. 늘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에서 행성이 회전할 때마다였다. 괜찮다는 듯이 붉은 빛을 깜빡이던 행성이 어제부터 미약하게 불규칙적으로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다만 붉은빛이 유독 초라하고 미약할 뿐이다. 약이 다 되었나 싶어 나사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라의 연락처도 받아 놓지 않아 결국엔 그 숲에 다시 한 번 가 봐야 할 빌미가 생긴 셈이었다.

 

진동이 울렸다. 전 부장에게서 메시지가 온 참이었다. 상태바에 뜬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은 댐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행성의 빛이 완전히 꺼진 것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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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던 눈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제 거품이 일 때마다 만조의 썰물처럼 쓸모없어지는 목구멍의 비눗방울 밟고 있는 빗금으로부터 비는 광합성 없이도 자라나는데 나는 더 성장할 수 없는 식물처럼

 

셔터를 누르면 전개되지 않는 줄거리가 펼쳐졌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몰라 모래바닥에 포복했다 몸이 떠올라도 사막에 갇혀 있었다 눈알들이 생존을 따라 기어가고 있었다 치환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붉은 굳은살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장황하게 펼치는 모든 증명들을 사랑하지만 다시 접을 수는 없어서 비가역적인 슬픔들이 맨땅인 것처럼 지구본의 선들을 구부러뜨리기로 하자 그리고 이 세상을 네가 만들어내었다고 하자 나는 여기에서 없어져도 좋아 이름이 지워져도 좋아

 

이 안과 바깥을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을 손끝에서, 등 돌린 우리의 신이 우상 같은 물방울을 둥글게 깎아내어 슬픔이 굴러갈 수 있게 만들어진 옥상에서, 터질 리 없는 견고하고 고독한 강당에서, 외투가 떠오르면 나는 너에게 버블건을 겨누고 더 쓸 수 없다고 말하고

 

동그랗고 둥그런 찰나들 우리는 교복을 챙겨입고 미끈거리는 장마는 풀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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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곱도 소용도 상관도 없어야 할 유일한 환상이다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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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의 뼈는 물이라서 영영을 믿지 않고도 흐를 수 있지 어제의 영사기에 올라타면 천식처럼 기구해지는 뒷면의 꿈, 투사되는 손길들, 반쯤은 농밀하게 익어 가는 어항까지, 제일 먼저 전구를 꺾는다 플라스크의 눈을 누른다 나는 우주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무수히 떨어지는 변종 손목에 키스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거꾸로, 올라가는 셔터와 셔터 사이가 더는 시를 쓸 수 없게 만들고

 

나는 발레리나 따위를 좋아해 분질러질 수밖에 없는 발가락의 말미를 좋아해 열대어처럼 퉁겨오르는 목울대의 불안한 이완을 좋아해 손끝으로 춤을 춘다면 그 무게는 어디로 견뎌야 하는 걸까 실재하지도 않는 목덜미는 한참이나 얄팍해 사이를 투과할 손톱이 망가질 텐데 주사위가 있습니다 나는 패인 크레이터 속으로 들어가 불길한 수면에 중독됩니다

 

언제나 둥글어지고 싶었어요, 등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등이 솟아나고, 굳지도 않은 몰드가 운명이 되고, 그걸 꿈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말없이 돌아버리는 사람, 나는 반만 젖은 스페이드 카드를 귀에 구깁니다 물도 없는데 바다라고 불리는 건 일종의 실패가 조형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일제히, 발작적으로, 과거만이라도 지평면만이라도₂, 곱하면 사방에 튄 내가 반투명의 역사로 너를 사랑해₃

 

온전하다는 건 어른이 될 선지마저도 없다는 제시문

 

너의 입술과 내 입술 중 어느 것이 더 가엾을지 내기하자 너는 주먹을 내 나는 부적격의 증표로 숨을 낼게 네가 날 믿지 않으면 누가 날 믿겠어 토슈즈를 갈아 뭉친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친다 내일은 없다는 문항의 존재론을 서술하시오(36.5점) 하지만 작별 선물로는 내일의 발자국을 손바닥 위에 깨뜨려 줘 이방인은 물러선 나머지 휘파람이라도 불 준비를 한다 그믐이 지면 우리는 거짓말처럼 흘러 굳는 뜀박질이 될 거라서

 

 

 

₁ 어떤 힘은 수직으로 발달해 익숙한 명명법만 부여받았다 우리는 같은 지점에 머무른 가상의 집합 속에서 살고 있지

₂ 당겨져 갇히는 게 빛인지 손목인지 목소리인지 구분하는 방법이 학계에서 아직 명료하게 규명된 바 없다

₃ P(A)가 배덕한 신앙으로부터 도려내어질 운명의 앞면이라면 P(B)는 뺨이 붉은 소녀의 발바닥에 바다가 가장 많이 새겨질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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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것마다 기시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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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집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고, 접하는 어휘는 고삼이라 한정적인데, 쓰는 것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 같고, 시가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옛날처럼 쓸 수도 없는 것 같고, 자꾸 퇴화하는 것 같아서 문제입니다. 조금 사랑할 수 있게 되었나 싶더니 다시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제 글을 보면 토할 것 같습니다. 문장도 거기서 거기, 발상도 사유도 거기서 거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같고 독창성이라곤 없는 것 같아요. 제 글이 싫어요. 제 시가 싫습니다. 조금 더 튀어나가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2010년대의 시단에만 머물러야 하는 걸까요 결국 발전이라곤 할 수 없는 걸까요 사실 자괴감에 빠지기도 싫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나는 생각이 너무 지배적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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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구 이토록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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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표면을 갉아먹는 저 은밀한 반란을 봐 얘들아, 혀끝에서 피어나는 이를테면 어색하게 맞물리는 장미 덩굴같이, 누군가가 쏟아진다면 적어도 열기에 에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볼펜의 끈적한 잉크 안에서, 뽀글뽀글 우리는 네 질척한 슬픔을 눈꺼풀로 받아적을 준비가 되어 있어 감사해, 텅 빈 머리가 꼭 하나씩 빼먹고 발음하면 너는 하여간 미끄러지는 걸 알고만 있어

 

그런데 나 이제 정말이야, 정말로 못 버틸 것만 같아 너는 언제부터 견고해지기 시작했니 언제부터 입술의 틈으로 하여금 지난하게 신앙을 얽었니 얘들아, 봐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토록 익숙할수록 절도처럼 낯설어지는 천국을 정말로, 버티지 못해도 매달릴 수는 있어야 한다고 자, 잘 들어 이제부터 우리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비구름을 틀어막으러 가는 거야 알았지 그래도 낭자하게 비린 여기가 천국이니까,

 

길을 뒤집어 걷자 A-8, B-13, 잘리고, C-27, 사선으로 베이고, 너는 자 여기까지. 출입증이 없잖아. 불공평한 소음들은 뒤집혀도, 불균형한 복원 대신 다정한 멸종을 택한다 자기소개서 대신 유서나 써야지 이번엔 어디로 깔끔하게 복직할 수 있나요 어느 꿈으로, 나의 열두 해는 어떤 값싼 방식 혹은 그 이하로 분해되나요 쨍그랑, 개량한 장미는 젖었을망정 세 자릿수의 가시가 없다고, 들여보내 주세요 선생님, 너는 내 앞에서 우주선에 몸을 묻고 나는 분질러진 다리를 한참이나 지쳐 절단하고

 

이마에 입을 맞춰 줘

나는 전생을 모조리 기억하고 내가 사랑하는 너는 젖은 것들이라곤 모조리 잊어버리고

 

돌아가지 마 아무거나 할 수 있어, 우리의 주먹 쥔 불면은 도대체 얼마나 더 간절해야 어깨의 부피를 줄일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엉망인 맞춤법을 지켜야 합니까 우리는 왜 이 빌어먹을 천국에서 하염없이 아무렇지도 않아야 합니까 깍지를 낀다는 건 발칙한 손가락 사이로 카니발리즘에서 겨우 살아남은 무해한 변절자들*을 연소처럼 문지르는 것 재채기를 하지 얘들아, 키슈 옮는 전염병을 핑계로 없는 자극처럼** 깨뜨려도 그래 다 씨발, 괜찮아

 

 

* 그러니까, 모두가 스스로 사라질 때 기어코 같이 자살하자고 했잖아.
** 끓지도 않으면 우리는 반짝거리거나 반사될 수 없어서. 이왕이면 손목에 돋아난 나무처럼 위험해지기 위하여. 평면처럼 납작해지면 일그러져도 어떻게든 비틀 수 있겠지 우리는 우리를 끝끝내 보지 못하겠지만,
( 이 면은 공백입니다 ) 부족은 원죄로 숭배당할 수밖에 없을까 삼백육십오일 구멍 같은 신음을 내내 앓아도 우리를 위한 천국만 지독하게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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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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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끄면 두 쌍의 비늘이 누울 수 있지
마지막을 비집을 각오를 하고

 

모서리에는 다섯 살짜리의 파자마가 있지
누구든 차례도 없이 빌려 꾸다가
싫증이 나면 이불방울을 불거나 웅크리거나

 

예쁘게 꾸며 둔 팔목은 어쩐지 낯이 익어
그건 인형을 둘로 나눠 묶는 일과는 가장
다른 부류의 일이라서

 

빻아 둔 입을 길게 늘여볼래
그리고 악몽은 예감하기만 한다고 속삭일래

 

소금 같은 몸을 열어보는 건 그만두기로 하자
알약이 드물게 열리는 나무처럼

 

환한
서로의 화상을 기우지 말자고 했지
나는 누구의 입술에 기대어 자야 할지를 모르겠어

 

이번에는 손을 뻗었다
양말이 무릎을 꿇는 감각으로
좋은 꿈을 닳도록 앓아

 

이틀은 비리거나 싱겁거나 우스워서
시큼한 오늘
나는 목걸이에 매달린 기도

 

마르지 않는 머리를 썰어 혀 밑에 숨기면
어느 윤달에 알맞던 척추의 맛
오븐에서 아장아장 쓸려나온 맛

 

이별도 작별도 별의 이름인데 너는
이담에 커서 깨진 거울이 되겠다고
매달리지도 미끄러지지도 말아야 하는데

 

쓸어 넘긴다
모른 척 어제는 없으니 아무 생각도 없이
아닐 수도 있어

 

내일은
둥글고 물러
달콤하게 죽기 좋은 날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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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문장 : WRITING (feat.글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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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숫자 하나씩을 사용해서 쓰는 구절들. 글틴 분들도 같이 해 보면 어떨까 하고 가져왔어요! 성인이 되신 글틴 졸업생 분들도, 막 활동하고 계신 글틴 분들도 즐겁게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백 분은 넘지 않겠지만 스무 분이라도 참여해 주시지 않을까 기대해요. 댓글로 참여의사를 먼저 달아주시고 4월 20일까지 각자 쓴 문장을 대댓글로 달아주세요! 개인에게 할당되는 숫자는 자신이 댓글을 단 순번입니다. 수시로 업데이트할게요!

 

예시작

http://naver.me/xy0KH8Fc

 

 

순번

1 백색소음

2 윤별

3 속도

4 소낙

5 노랑

6 냥큼냥큼

7 비행선

8 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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