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갈라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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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죄라면 왜 아름다울 수 없을까 천이 검게 변하는 모서리로부터 태어난 비눗방울 안에서 무릎을 꿇고 늘 기도를 했지 손금이 발바닥까지 전염되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모퉁이를 동그랗게 깨뜨릴 수 없을 거라던 손목을 위해서 발끝으로 서서 고해하는 사탕들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우울은 왜 둥글까

 

머리카락은 절반만 회색인데 하나, 빙하 속엔 색깔이 침범하지 않기 둘, 유령에게 빌려온 무게를 쓰다듬지 않기 잃어버린 낱말들을 더듬거리다 보면 무지개를 맨손으로 쥐는 날이 돌아온다고 너무 빨리 자라난 목덜미는 남은 약속을 부정만 남기고 지운다 이를테면 어른과 어른의 눈동자 같은

 

나는 이렇게나 기도를 했는데요 신을 만난다면 내게 할당된 불행의 총량이나 한 번 물어봐 줄래요 동그란 얼굴을 가진 소녀가 자신은 동그란 모양으로 자해를 한다고 말하며 동그란 풍선껌을 불었다 동그란 풍선은 둥실둥실 떠올랐지만 천국으로 가는 손금은 이미 지워진 채였다 발바닥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소녀는 이미 풍선껌 안으로 들어간 채였다

 

아직 덜 마른 동그라미의 질감으로

하나의 몸짓에 예민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유령을 투과한 목소리가 어두워지는 순서로 굴리는 유리구슬을 알고 있니 면사포가 정수리에서 피어나면 놓치지 말아야 할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것만 같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무언가로부터 버림받은 것만 같아 집요하게 굴절되는 소녀는 죽은 척을 하면서, 죽은 척을 하면서,

 

부케를 두 눈에 박아넣는 방법을 안다면 모든 순간이 장례식일까

 

소녀가 나체로 누워 있기 시작했지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보면 세상도 손가락 사이로만 나를 볼 거야 바늘코엔 장미묵주를 끼우고 혼자로 혼자를 들으면서 꼬박꼬박 혼자를 챙겨먹으면서 비누 맛 풍선껌을 꿰매기 시작했지 풍선껌은 작아져도 작아지지 못했지 자꾸자꾸 얄팍해져도 자꾸자꾸 말랑해져도

 

레몬에이드를 레모네이드라고 쓰는 버릇이 열렬하게 지속된 것처럼

레몬에이드에 소금을 넣는 버릇이 있는데

 

소녀는 멀쩡해지는 척을 하지

먹을 걸 가지고 들어오면 동그래질 수 없단다 사랑을 할 수도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단다 순교를 할 수도 없단다 제 입술 속엔 가시나무관이 기생해요 불행을 살게 하는 세계를 먼저 맛봐야 하지 않겠어요 먼저 망가져 봐야 하지 않겠어요 수도꼭지를 열자 머리카락이 절반만 길어졌다

 

병이라는 이름이 붙자마자 챙모자를 쓴 의사들이 손톱의 채도로 통증처럼 밀려든다 정밀하게 조형된 실패를 생성하면서 소녀의 목숨이 아흔 아홉 개라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건 누구를 위한 폭우일까 은색 머리카락은 종아리를 스치며 느리게 자라난다 처방전에는 차례로 눈동자와 비눗방울과 풍선껌이 적혀 있다 소녀는 처방전을 파쇄기에 넣는 대신 목걸이에 걸었다

 

죽은 척을 하면서, 죽은 척을 하면서,

 

풍선껌에도 소금을 넣고 저어보자는 유언을 선물받았다 선물받은 소금에서는 감기처럼 달콤한 맛이 난다 혀뿌리로 감별해도 누가 정말로 죽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동그란 큐빅을 매만지면서 뚫린 풍선껌의 동그란 단추를 여민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내리 잠만 자는 것처럼 사탕인 줄 알고 머금은 사람들이 무릎만큼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누구도 울고 싶어서 우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양을 닮는다는 이야기 눈으로부터 눈으로 소금으로부터 소금으로 죽지 않겠다는 다짐은 꼭짓점이 닳는 과정을 받아적는 것이란 이야기 눈이 부시면 오히려 눈동자가 자란다는 이야기 사실은 구르기 위해서 잠을 차곡차곡 모은다는 이야기 문을 열자마자 세계가 천국이 된다면

 

그래도 소녀는 무결하게 기도를 하겠지 그래도 소녀는 무결하게 교리가 되겠지 알약을 손톱 아래에 밀어넣는다 바늘 끝이 살갗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레모네이드를 삼킨다 무수한 원이 적분되는 사이 은밀하게 구멍을 뚫는다 구멍은 태어나자마자 옹알이를 한다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팽창한 소녀는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연습은 연습일 뿐이지만 마이크를 켜도 풍선껌은 터지지 않지 미리 삼켜 둔 전구가 유성우로 나누어지는 시간마다 동그랗게 부푼 맨몸을 바늘로 찌르면 죽은 별자리도 살아날 수 있다는데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소곤거려도 누군가는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웅크리고 있다는데 그래도 소녀는 두 손을 모으고 입술을 달싹이겠지 말도 안 되는 신맛의 기도문을 외우면서

 

하나, 제가 잘못했어요

둘, 제가 잘못했어요

 

주머니에 동그란 우주를 넣어 두었다 흰 국화를 궤적사진 앞에 내려놓으면서 무슨 죄인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고해하면서 풍선껌의 색깔이 뒤집히는 것도 몰라 점점 더 부풀면서 태생적으로 해변의 고아가 버린 목숨들을 세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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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톡방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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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영

https://open.kakao.com/o/gKLLd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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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이 북적북적하니 숟가락 한 번 얹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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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14년부터 글틴에서 활동하던 윤별이라고 합니당. 우리 글틴 신규회원 여러분 그리고 기존회원 여러분들은 모두 젠틀하고 친절하고 화사하시니 2014년 작품들을 굳이 꺼내서 읽을 일은 없을거라고 믿어요. 글쓰는 사람들만의 에티켓 아니겠습니까. 어두침침하게 다른 사람 글 꺼내서 굳이 그 사람 앞에서 낭송해주는 건… 뭐, 그래요, 취향일 수 있겠죠. 제 취향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저만의 취향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게을러서 2014년부터 적었던 글을 하나도 삭제를 안했거든요. 분명 제 앞에 가지고 오면 초면에 절연당하실 거예요. 빠른 블락 빠른 정신건강 치유. 와! 오늘만 글을 엄청 써내고 죽을 것 같아서 아무말이 나올 수도 있는데 이것도 이해해주세요. 약간 알코올 한 사발 한 기분이에요.

어 얘는 누군데 다짜고짜 와서 환영사를 쓰겠대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급하게 자기소개를 추가하려고요. 보시는 대로 윤별이고요 글틴에서 닉네임은 세 번 바꿨어요. 찾아보지 마세요 큰일나요. 좋아하는 작가는… 시인은 좋아하는 작가를 딱 꼽자면 너무 많아요… 영업해도 될까요? 아침달에서 새로 나온 육호수시인님 시집을 읽어보세요… 이혜미시인님 이제니시인님 안희연시인님 허연시인님 신해욱시인님 김승일시인님 김선재작가님… 요즘에는 양안다시인님 시도 감각적이고 좋더라고요 물론 손미시인님 양파공동체는 갓시집입니다 여러분! 한번 읽어보세요! 왜 최근 시집 낸 분들은 별로 없냐구요 그건 제가 고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재수학원 들어가기 전까지 열심히 읽고 배불러서 행복하게 들어갈거예요. 소설은 사실 작가를 딱 꼽자면 김사과작가님을 좋아하는데요… 천국에서 꼭 읽어보세요. 그외에도 황정은작가님의 계속해보겠습니다, 미나토가나에작가님의 고백 좋아합니다. 에세이랑 비평은 제가 잘 안읽는데… 부끄럽지만… 시집 뒤에 발문들이 굉장히 좋아요. 읽으면서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면서 인생리셋을 하고싶게만드는 그런 충동… 저는 아동문학 제외하고 대부분의 장르를 두루 쓰는데요 그 쓰는 넓이에 깊이가 반비례하는 것 같아요 굉장히 얕게 씁니다 얄팍하고 어색해서 글틴활동 오년찬데 아직도 글 올리는게 너무 미숙하고 두렵고 그래요…

 

글틴 환영사를 적으라니 그냥 옛날 글틴 추억팔이라도 하면 되는건가요?

 

글틴에는 옛날에 문학캠프가 있었어요. 그게 2015년 초 겨울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그때 글틴에 막 입문한 쫄보였기도 하고 원주까지 갈 엄두도 못 냈어서 못 갔었어요. 나도 내년부터는 활동 열심히 하고 가야지! 하고 내심 기대하고 글틴에서 즐겁게 활동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글캠이 없어졌대요. 눈물이 났죠. 엉엉. 그래서 지금까지 글캠에 참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엉엉. 글캠이 내년에는 있겠지 내년에는 있겠지 하고 희망을 품었었는데 벌써 저는 글틴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고 고삼이라 활동도 잘 못했는데 내년에 열린다 쳐도 전 재수학원에 있을 예정이에요. 와. 쓰다보니 울고싶네요 비운의 글틴러. 다녀온 선배의(학교에 글틴 선배가 있었어서… 선생님이 연결해 주셔서 만나뵌 적이 있었어요) 말에 의하면 그렇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밤을 새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그렇게 재밌다던데. 담당자님 이 글을 보신다면 글캠 부활도 고려해주세요. 비록 저는 내후년에 삼수를 하지 않는다면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한 회차 건너뛰고 졸업생으로 참가하겠지만(글캠 참가자만 졸업생으로 참가가능하게 한다면 울 거예요.) 재밌을 것 같단 말이에요. 오픈카톡에 있는 사람들도 글캠을 기다리고 있어요. 재학생 졸업생 포함해서요.

 

저는 글틴 올라운더예요. 글틴 추천사인데 왜 뜬금없이 제가 등장하냐고요? 그럴 때도 있는 거죠 뭐. 하여튼 감상비평에는 드물게 출몰하고 주로 수필이랑 시랑 소설을 쓰는데, 고삼시기에도 짬짬히 써서 내고(수능을 장렬히 망쳤지만) 평을 받았던 건 시 부문이었어요. 소설이랑 수필은 엉덩이 붙이고 진득하게 써야 하는 게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잡아먹더라고요. 기숙사생이라 밤을 샐 수도 없고. 지금은 수능이 끝나고 집에 와서 한 시인데 타자 치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그러니까 멘토님들의 임기는 이년인데, 이년에 한번씩 바뀌기 때문에 저는 게시판마다 평균 2.5분의 선생님을 만나뵈었어요. 글틴 문학당에 지방러가 서울까지 올라가서 직접 만나뵈기도 했구요, 작은 문학의 날(맞나?)에서 이전 멘토님을 만나뵈기도 했구요, 시상식에서도 만나뵈었었는데, 이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째 사연팔이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계속 얘기해보도록 하죠. 환영사라고만 나와있고 형식은 제한이 없으니까요. 양해해주세요. 저 이렇게 틀에 박히지 않은 글을 계속 쓰고 싶었는데 글틴 11월 마감 때문에 계속 정제하고 다듬다 보니 뽕이 차올라서 저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예요.

무튼 지금 소설이랑 감상비평 멘토님은 두 달 전에 새로 부임하신 멘토님이라서, 그때는 저도 수능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글을 못 올렸으니 전前 멘토님 소개를 해볼거예요. 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시라도 문제가 된다면 댓글주세요. 일단 시 부문은 손미시인님께서 올해 초였나 작년 말… 그쯤이었을 거예요. 겨울에 첫 시를 올리면서 제 망한 시에 대해서 오열했던 기억이 나니까 맞을거예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틴러들의 글이 가장 많이 자주 올라오는 시 코너를 맡아주셨고… 저는 손미시인님을 한번 꼭 만나뵙고 싶을 정도로 제 시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슬럼프 있는 거 어떻게 찰떡같이 알고 괜찮다고 해주시고… 일년간 너무 과분한 평을 받아서 정말정말 감사한 마음만 가득할 뿐입니다 실제로 제 1월 시랑 지금 시랑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요. 그간 가장 비약적인 성장은 제 트라우마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셨다는 거네요… 한 삼-사월까지는 시에 저를 녹여내려고 해도 거부감 때문에 못 녹였는데 다음부터는 조금씩… 개미 똥 만큼이라도 넣을 수 있게 되어서 무한 감사를 표하는 중입니다ㅠ. 아 그리고 처음 오시는 분들께 시는 이주에 한 편씩만 대부분 몰아서 피드백을 해요! 수필 부문도 생각을 해보니까 한 편 올렸네요 분명 고삼 올라가기 전에는 한달에 한편씩만 마감을 치자, 의 마음을 가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4월 한 편 올리고 못 올렸더라고요 현생이 웬수예요 아주. 그래도 쓰는 건 못해도 다른 분들 평은 자주 들어가서 봤었는데요, 공감을 바탕으로 한… 아무래도 수필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징검다리(표현이 구려도 이해해주세요 시 한 편 소설 한 편을 방금 마감쳐서 더이상 제게는 좋은 표현이 없습니다)인데 그 징검다리를 조금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시는… 그런 분이었어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던 건 제가 수필을 올렸던 게 백일장에 대한 이야기였었는데 어떤 글을 쓰는지 보려고 제 다른 글을 보셨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수치사할 것 같았지만 다른한편으로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ㅠ 글틴러들을 이해하고 같이 깊숙히 공감하시는 멘토님이에요… 감상비평은 현재 선우은실 평론가님께서 계시는데요, 저는 허희 선생님께서 계실 때 활동을 했었어요. 그리고 팩트로 열심히 후드려 맞았죠. (좋은 의미로요 정말로.) 그렇게 몇 번 너덜너덜해지고 나니까 제 글의 구멍이 보이고 메우고 다시 후드려 맞고 보이고 메우고… 그걸 반복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허희선생님 평론 짱입니다. 읽어보세요 최고예요. 저는 평론 쓰는 분들이 제일 신기해요. 어떻게 그런 어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셔서 구사하시는거지 나는 논픽션은 죽어도 못 쓰겠구나. 소설은 지금 양선형 소설가님께서 멘토를 맡아주셨는데요 저는 김선재 선생님이 계실 때 활동을 했습니다. (얼룩의 탄생 쓰신 그 분 맞아요. 그래요 저는 성덕입니다.) 재작년 8월부터 부임하셨었는데 하필 제가 그때 <여결>이라는 작품을 하나 쓰고 그다음부터 좋은 소설을 아예 못 썼었어서… 3월까지였나? 1월까지였나 한 번 열심히 붙잡고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선생님의 처방을 받고 안 썼네요. 그 이후로 세 작품 썼던 것 같아요. 다 구려요. 김선재 작가님께서는 처음에 문장을 고쳐주셨었는데 그거 보면서 자괴감 오만 번 들었었어요. 이렇게 쓸데없는 단어를 내가 썼었구나… 그리고 나서 그 이후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셨었는데 그거 고치기는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몇 번 퇴고해보니까 훨씬 낫더라고요… 그저 빛… 맞아요 사실 이 글은 성덕의 글이에요…

 

각설하고 글틴에서는 이벤트도 많이 했었는데요, 패러디 시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외에는 저희 글틴러들이 단합해서 () 글틴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었는데요 그게 작년 만우절 때였어요. 글틴 톡방에 계신 분들이 불을 당겨서 왜 그 이천년대 싸이감성 있잖아요, 그걸로 도배를 해 뒀었거든요. 노랑님께서는… 아 닉 언급 괜찮나 모르겠는데 어쨌든 노랑님께서는 그렇게 올라온 글을 모아서 평론을 했었고 월장원까지 가셨었습니다. 최고야! 대단해! 글틴러들 다들 글에 의욕 넘치고 글 쓰는 거 좋아하는 친절한 사람들이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와주세요. 정말 최고야. 톡방 참여도 너무너무 좋습니다. 지금은 졸업생+재학생 합쳐서 스무 분 정도가 계시구요 진짜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이셔요 제가 그분들의 일호 팬입니다. 얼른 그렇다고 말해요. 아무튼 이 문단의 요지는 글틴러들 굉장히 착하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거였고…

이벤트 말고 한 건 없어? 했던 것 중에 생각나는 건 글틴 문학당이 있네요. 처음에는 서울이랑… 세 군데에서 했었는데 저는 광주(그나마 지방에서 가까움)에서 하는 날에 학교 축제날이었고 연극을 올려야 했어서 못 갔고 결국 일박이일로 숙소를 잡고(문학당은 아홉시반에 집결이었어요…) 서울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당시 멘토님들을 만나게 됐어요 성덕이죠! 멘토님들이 제 작품 짚어서 지적할 때마다 막 떨려서 죽을 것 같았구 낭송할 때 제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부끄러웠구… 아마 지금도 글틴 활동하시는 분들 중에서 작품집 가지고 계신 분들 계실 텐데 제 글이 영영 묻혀버렸으면 좋겠구… 아침에 글 피드백이었던 것 같아요. 소설/시 나뉘고, 수필/비평 나뉘었는데 저는 소설이랑 수필을 택했습니다. 놀랍겠지만 저는 원래 소설 모스트였어요. 지금은 이 꼴이 나고야 말았지만… 소설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짚어주시는 식으로 하셨고, 가끔씩 작품을 짚어서 예시를 들어주시기도 했어요. 수필은 전부 한 번씩 낭송하고 한 테이블당 한 명씩(기억이 가물하지만) 학생이 학생에게 피드백을 했던 것 같아요. 그 후에는 문학난장이 있었고 오은시인님 김솔뫼작가님 뵙고왔습니다. 싸인도 받았어요!

글틴에서 파생된 모임도 있었어요. 작은문학의날이라고, 제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소설멘토님으로 활동하셨던 김보영작가님께서 여러 글틴러 재학생/졸업생을 초대해서 파티룸에서 문학회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글틴러들끼리 만나는 이런 자리도 많았었으면 좋겠네요. 이 때 손미시인님 오시기 전 멘토님이었던 윤석정시인님도 참석하셨었는데, 김보영 선생님이 계셨을 때는 첫 번째 닉네임을 썼고 윤석정 시인님이 계셨을 때는 두 번째 닉네임을 써서 ㅇㅇ이 누구야? 하는 해프닝도 일어났었어요. 오랜만에 안부인사를 드려야겠어요.

시상식이 생각이 나서 말인데요, 굉장히 유쾌하고 재미있어요. 수상하지 못한 분들도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오셔서 즐겁게 수치사하는 걸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수상은 여러 번 했지만 서울로 올라가서 시상식에 참석한 건 올해가 처음이었는데요, 일단 케이터링이 너무 과분할 정도로 맛있었고 (이렇게 홍보하면 안 되나요?) 대상 수상자분 작품은 낭독극으로 편집해서 읽어주시기도 하는데 재밌었어요. 옆에 계신 수상자분 반응 보는 것도 재밌어요. 그리고 모든 수상자가 한번씩 수상소감을 말하는데 그것도 나름 수치사 흑역사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와서 녹음해가세요. 저는 백 프로 수상자가 아닐 거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재밌는 거랑 별개로 낭독극 퀄리티 되게 좋아요. 목소리 꿀 떨어지시고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이번 시상식 때는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그 이후에 일정 없는 사람들끼리) 같이 뒷풀이를 갔어요! 족발집 다녀왔는데 하나도 안 어색하고 재밌어요. 최고에요. 수상자분들 에세이는 문장웹진 8월호에 실려있으니 한번 보세요. 재밌어요. 여담으로 그거 마감 치는 분들 다 모여서 머리 깼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 그리고 원래 고민상담방이 있었어요.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옛날에는 상담 선생님도 계셨고, 그 이후에는 김보영 작가님께서 도움을 주고 싶어서 운영이 되었었는데 글틴이 개편되면서 그 방이 사라졌고, 대신 자유게시판에 그런 부류의 글을 올릴 수 있어요. 만일 특정 장르에 국한되어있다면 끝에 작게 써두는 것도 괜찮아요. 저는 그렇게 해서 소설을 잠시 쉬었고, 쉬는 기간에 조금 더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지만 아무튼)던 것 같아요. 자유게시판에 올리면 아무래도 글틴 회원분들이 보고 댓글을 달아주시니까 그것도 좋을거예요.

 

아무튼 글틴 제가 5년간 뼈를 묻었을 만큼 좋은 사이트니까… 여기 오시는 분들 다 만수무강하시고 글신 내리셔서 꽃길만 걸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흑흑 사랑해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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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낸 구름처럼 둥실둥실 밀려나갔다. 그렇긴 한데. 피터가 유연하게 말을 받았다.

“있어. 내가 봤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 책에는 총기 관리 방법도 양자물리학도 검술의 기초도 안 나와. 말미에 인용 논문도 인용 저자도 없어. 그냥…….”

피터는 알맞은 단어를 고르는 데 꽤 애를 먹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입술을 희고 가지런한 치아로 짓이기다가도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재촉하듯 피터의 마지막 단어를 따라했다.

“그냥?”

“그러니까 그냥…… 사람들이 한 행동을 글로 옮겨둔 것 같아. 내가 다른 애가 한 일을 너한테 말하듯이. 소설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런 건 처음 봤어. 부드럽고 푹신하고 말랑하고 물컹하고, 그런데 너무너무 연약해서 잘못 건드리면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거야. 어떤 여자애가 남자애를 사랑했거든. 남자애가 여자애한테 자신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달이라는 걸 따다 달라고 그러는 거야. 달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꼭 불가능한 것처럼 말하더라고. 아, 그 남자애 이름이 피터였어. 그래서……”

“피터, 너는 여자잖아.”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글로 옮겨둔 것 같은 책이라니, 이야기책이라니, 달이라니.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 내용에 푹 빠져 한눈에 반한 사람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처럼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흥분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피터라니.

이상한 책, 달, 피터. 이상한 책, 달, 피터. 이상한 책, 달, 피터. 더 이상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스위치가 나갈 것만 같아서 나는 그만 피터의 말을 끊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앓는 소리를 내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어. 여자애 이름은 안 나왔는걸. 남자애가 여자애 이름을 한 번도 안 불러 줬었어.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여자든 남자든 이름이 다 숫잔데.”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피터는 그렇게 덧붙였다.

“책 이름이 뭔데?”

“「레드문」. 책날개에는 두 권짜리라고 쓰여 있었는데 1권밖에 없었어.”

피터는 자기 몸만한 빨간 책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필통과 책 따위가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책가방을 무릎으로 옮겨 끙끙거리며 찾아보고 나서야 피터는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터가 내게 건네 준 책은 내 손보다 조금 더 컸다. 붉은빛의 표지에는 반쯤 채워진 동그라미가 은박으로 씌워져 도발적이면서도 다소 고급스러워 보였다. 책을 펼치자, 피터의 말대로 책날개에 쓰인 2권 전권 소설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빌려가도 돼?”

“나 다 읽었어. 보고 돌려줘.”

“주운 책이라며.”

“주운 사람이 임자지.”

엉망인 논리였으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빛 책표지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발가락부터 타고 올라오는 빨강이 내 몸을 전부 물들여 버릴 것만 같은, 이질적인 감각. 이 책이 203을 피터로 만들어 버렸단 말이지.

*

죽음.

윤리 선생은 큰 동작을 할 때마다 유난히 작은 체구가 독특하게 도드라진다. 가령 칠판에 죽음, 하고 두 글자를 써낸 후 뭐라도 생각해 보라는, 관조적인 눈동자로 우리를 쳐다보는 지금처럼. 종종 그럴 때면 약한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아 보였던 마른 골조가 사실은 무거운 철근으로 채워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신념은 언제나 굳고 올곧았으나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다. 교과서에 다 쓰여 있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기만 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건 학생들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뿐일지도 모른다. 학생주임도 학기 초가 아니면 눈감아줄 만한 베레모 미착용조차도 윤리의 눈에 보이면 징계사유가 되곤 했으니까.

피터는 윤리 선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빨간색이 안 그래도 많은 학교에 빨간 베레모까지 쓰고 다니라고 하는 윤리는 얼마나 학생들의 눈을 아프게 하고 싶은 거냐고 늘 투덜거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벽의 반절은 그나마 탁한 빨간색이었고 나머지 위쪽은 흰색이었다. 교복도 울 소재의 베레모부터 얼터너티브 체크무늬의 넥타이와 치마까지 붉은 계열이었다. 넥타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레드보다는 버건디에 가까웠지만.

빨간 입술, 빨간 교복, 빨간 학교, 빨간 단풍나무.

누군가가 손을 들고 윤리에게 왜 우리 학교 교복은 하필 빨간색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윤리는 피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한 학교 측의 조치라고 했다. 피 색깔에 익숙해지면 죽음에도 익숙해지겠지, 하고 윤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마치 오늘의 점심 메뉴를 읊는 것 같이, 묘하게 들뜬 것 같이 들리는 목소리였다. 차라리 월말평가 후에 여기저기에서 묻어나는 피가 눈에 덜 띄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주장이 더 믿기 쉽겠다. 피터는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피터가 윤리를 못마땅해 하는 이유가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베레모를 늘 기숙사에 두고 등교해 윤리 시간 직전 옆반에서 다급하게 빌려야 하는 분주함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실 매번 윤리 시간마다 베레모를 다른 반으로 빌리러 다니는 아이들은 수두룩하니 창피할 정도의 일도 아니었다.

피터는 윤리의 눈을 피해 내 팔을 쿡쿡 찔렀다. 나는 피터 쪽으로 눈만 살짝 돌렸다. 피터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내 쪽으로 몸을 슬쩍 붙이곤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지루해.”

“뭐가.”

나는 최대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피터는 작게 응석부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라도 문득 생각이 난 듯 몸을 고쳐 앉았다.

“214. 내가 윤리가 이다음에 어떻게 말할지 맞춰볼까?”

“또 헛소리.”

피터는 소설이란 걸 읽은 후로 확실히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높은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멍하게 생각에 빠지는 빈도가 늘었고, 내가 가까이 가도 눈치 채지 못하고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새로 생긴 이상현상 중 하나였다.

“아니야, 봐봐.”

피터는 잠시 윤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장난기 넘치게 입술을 벌렸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무엇인가요?”

피터의 속삭이는 것 같은 어조 위로 윤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덮어씌워졌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무엇인가요?”

“누구나 죽음을 경험할 때는 통증을 느낀다고 하죠.”

“누구나 죽음을 경험할 때는 통증을 느낀다고 하죠.”

“그러나 통증은 한순간일 뿐이고 그 이후에는 새로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여러분은 배워 왔을 거예요. 그렇죠?”

“그러나 통증은 한순간일 뿐이고 그 이후에는 새로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여러분은 배워 왔을 거예요. 그렇죠?”

피터의 말을 따라하듯 윤리는 계속해서 강의를 이어나갔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피터의 말투가 다소 급한 것 같이 들린 데 반해 윤리는 당연한 기초지식이라는 듯이 느긋했다는 것뿐이었다.

윤리의 강의가 자신이 한 말과 다르지 않자 피터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얼굴에 퍼뜨렸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묻기도 전에 피터는 또다시 속닥이기 시작했다. 다소 들떠 따뜻해진 숨결이 주위에 머물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나 따라해 봐.”

피터는 몸을 뒤로 빼 나와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러더니 한 손의 엄지와 다른 손의 검지를 붙여 작게 네모 모양을 만들었다. 윤리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난 그만 치고, 어떻게 했냐니까.”

“이거야. 한 번만 해보라고.”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였는지 피터가 한 손가락을 치켜들고 다시 눈웃음을 쳤다.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피터는 나를 끌어들이고, 나는 피터에게 말려들고.

한숨을 쉬고 피터처럼 손으로 사각형을 만들었다. 피터는 손을 그대로 윤리 쪽으로 향했다. 동공이 빛에 노출된 고양이처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피터의 사각형 안에 윤리가 사진에 담긴 마냥 담겨있었다.

“이제 눈동자를 움직이는 거야.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왼쪽 위, 오른쪽 위, 오른쪽 아래, 왼쪽 아래, 그리고 다시 왼쪽 위.”

미심쩍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간단한 동작.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윤리를 사각형 속에 가두듯 손을 뻗었다. 시선이 오른손 검지손톱에서 도드라진 뼈마디를 거쳐 툭 튀어나온 손가락뼈를 지나, 엄지손가락의 끝까지 굴러갔다. 다시 왼손 검지로 옮기고,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는 살결을 훑으며 엄지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처음 맞닿은 부분까지, 기차가 종착역으로 들어가는 속도로 천천히 사각형을 그렸다. 고작 네모 그리기로 윤리의 이야기를 미리 예측한다는 건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작은 원 안에 무언가가 마인드맵처럼 쓰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뉴런들의 연결구조 같기도 했다. 작은 글씨들이라 꼼꼼히 읽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하나가 윤리의 과거 행적을 뜻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당장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인드맵의 끝자락에 매달려 빛나는 글자들을 읽으면 윤리의 목소리가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따라 들려왔다. 마치 싱크가 맞지 않는 자막 같았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가장 유력한 현대 가설은 고통을 대가로 하는 사후의 행복입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죽기 전에 받은 고통이 치유의 에너지로 상반 치환되어 오히려 터널의 끝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사실 내가 발견한 책은 하나가 아니었거든. 책 두 권이 가지런하게 쌓여서 화단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는데, 이상한 이야기책 말고 우리가 아는 책도 있었어. 소설도 재미있었으니까, 그 책도 읽어보고 싶어서 너한테 소설을 빌려주고, 그래, 사실 내 책도 아니니 빌려준다는 말도 조금 이상하지만, 하여튼 기숙사에 돌아와서 책을 펼쳤다? 그 속에 한 번 시도해 보라고 자필로 쓰여 있더라고. 그래서 해 봤더니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되더라.”

피터는 내게 지루한 하루의 변수가 될 수 있을 만한 기술을 알려 준 대가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요구했다. 내가 알려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너무 날강도 같은 게 아니냐고 묻자, 그렇대서 네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잖아, 하고 너무 당당하게 웃어버리는 피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매점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과거를 보곤 했다. 그건 생각보다 더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가까운 과거와 아주 가까운 미래밖에 볼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몇 초 후의 일이어서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점점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보이는 범위도 목적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네모 모양으로 손을 모으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마치 소설에 나오는 피터처럼 그가 지금껏 겪어왔던 일들이 마인드맵처럼 네모난 창 안에 정리되어 나왔다. 의도치 않게 너무 오래 전의 일부터 읽어버려서 알면 위험할 것 같은 정보까지도 알게 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럴 때면 눈을 삼 초간 감았다 떴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과거와 미래는, 때때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를 의심하게 했다.

피터는 과거를 읽는 기술에 집착하는 것 같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학생 신분으로 도대체 혼자 이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까지 다다르는 건 피터에게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피터는 과거를 읽힌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원하는 정보만을 훑어보는 것도 가능했다. 피터에게 원리를 물어보면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른다는 서두로 먼저 오답에 대한 배리어를 쳤다. 다만 과거로부터 데이터를 모아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는 원리인 것 같다고 했다. 깊게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의 미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미래가 섞여 보이는 현상이 그걸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처음으로 두 개 이상의 미래를 읽었을 때, 피터는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와도 마다한 채 기숙사에 들어오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며칠을 살다 나와 떡 진 머리를 베레모 뒤로 익숙하게 넘기며 그걸 경우의 수라고 지칭했다. 피터의 눈 아래엔 다크서클이 짙었고 어딘가 퀭해 보였지만 확률을 설명하는 피터의 눈동자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공학도적 희열 때문이었는지 반짝거렸다.

“너도 솔직히 궁금하잖아.”

피터는 내가 건넨 아이스크림 껍질을 잡아당겨 뜯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배실거렸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후 우물거리는 동안 피터의 말은 잠시 끊겼다. 피터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써 본다는 것 자체로 얼어붙어 있는 나와 다르게 편안하고 태평했다. 막무가내로 손목을 잡고 학교 근처 지하철역까지 끌고 오는 것도 피터다웠고.

“피터, 여기까지 꼭 올 이유가 있어? 그냥 학교 애들한테 써 보면 안 되는 거야? 지금껏 많이 그래 왔잖아.”

“가설을 하나 세워 봤어.”

피터는 주위를 살피듯 두리번거리더니 어느새 다 먹어치운 아이스크림 스틱을 껍질에 싸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쓰레기는 안정적인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지점에 안착했다. 피터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표본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은 적합하지 않아. 일단 학생들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극히 낮으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범죄에 연루되는 거면 나는 안 할거야.”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피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쉬는 날에도 교복을 입은 피터는 와이셔츠가 구겨지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구김이 간 부분을 손으로 무심하게 툭툭 털면서 나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같이 도리질을 쳤다. 전혀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나를 안심시키는 말과 함께.

휴일 점심시간대의 지하철은 붐볐다. 지하철 기둥에 딱 붙어 서 있어도 이리저리 사람에 치여,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느 샌가 피터와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도 피터는 수색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눈을 깜빡이고 작게 네모를 그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과거를 읽는 피터의 모습은 이제 익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터는 내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214, 저기. 저 사람. 방금 읽었는데 소매치기를 할 확률이 구십 퍼센트가 나왔거든. 지켜보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할 지 안 할지 모르는 거니까 일단 지켜보고.”

피터는 내 말을 가로채고는 조용히 자신이 지목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츄리닝 바지를 입은 남자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들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남자의 뒤를 밟았다. 남자는 유난히 밀도 높은 환승역의 사람들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돌아다녔다. 우리는 남자의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남자는 고개를 완전히 숙이고 노래를 듣는 척을 하다가, 옆 사람의 뒷주머니에서 조금 비어져 나온 지갑을 은밀하고 신속하게 빼내어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피터의 팔을 꽉 쥐었다. 범죄현장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괜찮아. 이미 신고 넣었어.”

피터가 들고 있던 휴대폰 액정에는 소매치기 현장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을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는 기록이 떠 있었다. 피터는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친구일 때는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지만 적이 된다면 어떻게 접근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두려운 사람.

피터는 표본의 수가 너무 적으면 가설이 입증될 수 없다며 아예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죽치고 앉아 있는 피터를 두고 갈까 생각하다가도 피터의 옆에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앉았다. 기껏해야 표본 삼을 한두 명만 더 건지고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소매치기는 자주 일어났다. 피터는 자신이 읽은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켰고, 그러면 나는 지목당한 사람을 덩달아 빤히 보았다. 확률이 반절을 넘어가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지갑이나 시계, 그 외의 값나가는 것들을 훔쳤고 피터는 그럴 때마다 사진을 찍어 신고했다. 오히려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도 같았다.

“저 사람이 마지막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피터가 긴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은 피터처럼 주말에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치마가 회색인 걸 보니 우리 학교 교복은 아니었으나 학생 특유의 앳된 분위기가 주변에 맴돌았다. 자신의 상체만큼 크고 무거워 보이는 백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두 다리.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었고, 이어폰을 꽂고 있었으나 눈은 불안한 듯이 여기저기를 방황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우리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벤치에서 멀리 떨어진 승강구로 향했다. 피터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지하철역에 처음 올 때처럼 내 팔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나는 두 손으로 온종일 피곤에 지친 눈을 꾹꾹 누르고 나서야 피터와 함께 여자아이를 따라갔다.

“어디까지 쫓아갈 거야?”

“마지막이니까 쟤 나가는 역까지만.”

내가 속삭이자 피터도 소곤거렸다.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 몸을 붙였다. 피터의 팔이 내 팔과 맞물렸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여자아이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가는 걸 보고 우리는 조금 더 여자아이 쪽으로 가까이 가기로 했다. 여자아이는 자신의 어깨가 톡톡 두드려지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어폰을 빼고 무안해하는 상대에게 곧 인사했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이어폰을 쥔 손을 뒤로 숨겨 꼼지락거렸다. 선생님이라고 불린 사람은 옅게 웃으며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지하철의 북적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세하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여자아이는 내내 선생님을 불편해하는 것같이 초조해 보였고, 선생님은 그런 징조를 하나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순환선 지하철이 정차해 문이 열리자 여자아이는 비어 있는 지하철 좌석에 앉았다. 선생님은 그 옆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피터, 저 여자애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지 않아?”

피터는 대답하는 대신 손으로 네모 모양을 그려 둘을 빤히 쳐다보았다. 선생님과 여자아이를 차례로 읽어보는 것 같았다. 두 정거장이 지나가는 동안 피터는 그것에만 온 집중을 다했으나 결국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긴 곱슬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자애가 선생님을 불편해할 이유가 없어. 공통된 기억을 같이 추출해서 읽어보기도 했는데 마찬가지야.”

여자아이는 옆에 앉은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도 같았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아이와 함께 일어났다. 다음 역에 정차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함께 일어난 둘은 여자아이의 백팩이 승객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른 지하철 차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여자아이를 너무 열심히 보고 있던 게 들통 난 것 같았다.

피터는 여자아이 못지않게 초조한 표정이었다. 여자아이가 확률을 뒤집어버리고 소매치기를 저지르지 않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아이에게 우리가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 것 때문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내 직속선배, 그러니까 바로 윗 기수 214의 부서를 나는 종종 잊어버리곤 했다. 디스플레이시각생명공학. 들어도 무슨 일을 배우는 부서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게다가 생명이라니, 가치도 없는 학문을 자진해서 배우겠다고 들어간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생명이라는 단어가 붙은 부서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기피하는 부서였다. 아무리 부서가 입학 후 랜덤 배정이라고는 해도 암암리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직 머리도 다 굳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배정받은 부서가 적힌 쪽지를 조심스럽게 펴 보고 환호하거나 실망했다.

다방면의 지식을 배우고 익힌 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시켜 활자로 찍어내는 집필부나 본인의 목숨을 확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무력에 특화된 부서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반면 언제든 버릴 수 있고 버려질 수 있는 생명을 보조하며 기술마저도 모두와 공유하겠다고 드는 생명 계열 부서들은 알게 모르게 자선사업으로 비꼬아 불리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월말평가에서 떨어지고 싶어 안달이 난 부류의 녀석들은 없었으니 겉으로 보일 만큼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건 어느 종류의 자살행위와도 같았으니까.

지독한 모순. 월말평가에서 낙제하고 싶지 않은 건 단순하다. 자존심 이전에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별다를 것 없이, 평가에 미달한 학생들은 죽는다. 총검술 실기에서는 버티지 못하면 다른 친구의 손에 죽는다. 한순간 눈을 돌린 틈을 타 앗아갈 수 있는 게 목숨이다. 자신의 소유는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남이 쥔 줄은 쉽게도 끊어낼 수 있는, 얄팍하고 나약한 것들.

죽고 죽이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적어도 윤리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죽는다는 건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터널을 지나가는 걸 의미한다. 아무도 슬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터널을 지나갔으니까. 그 후에는 받았던 고통만큼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먼저 지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또 다른 모순이지만.

“선배.”

“뭐야, 너희 이 시간에 다른 사람 호실에 들어오면 벌점이지 않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눈알 모형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선배가 피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볍지 않은 우리의 발소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혹은 모두가 잠들었을 밝은 시간에 누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피터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금 경쾌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는 선배도 커튼만 쳐 두고 안 주무시잖아요. 그것도 분명히 벌점인데. 아, 9학년은 졸업 시험 때문에 예외던가요?”

선배는 고개를 젓고 산발이 된 머리를 머리끈으로 질끈 묶었다.

“너희가 그냥 찾아왔을 리는 없고, 졸업시험을 신경 써 주기에는 너희 월말평가가 코앞이고. 부탁할 거라도 있나 보네. 아니면 밥 사달라고 조르는 거거나.”

“둘 다요.”

피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은요, 하고 넉살도 좋게 소곤거리는 걸 직속선배는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싹싹하게 구는 피터를 예뻐하는 편이었다. 내 직속선배가 생명 관련 과라고 말하니까 골몰하다가 텀블러를 선물해 봐, 하고 제안했던 게 피터였다.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은 아주 미세한 것에도 영향을 받아 항상 긴장해야 한다고, 그래서 목이 자주 탈 거라고. 그것뿐 아니라 자신의 직속선배에게 줄 마카롱이나 조각 케이크를 챙길 때 꼭 여분을 가져와 내 직속선배에게 가져다 달라고 손에 쥐여 주곤 했다.

“214랑 제가 팀으로 연구를 하나 하고 있거든요. 그러다가 이런 게 필요해졌는데, 할 줄 아는 사람이 선배밖에 안 떠올라서요. 전공이시잖아요, 이런 거.”

“아, 과제연구? 이번에 너희도 나가?”

“과제연구는 아닌데 비슷한 거예요. 논문 완성되면 선배한테도 한 부 가져다 드릴게요.”

“어디 봐봐.”

피터는 그려 온 설계도를 선배에게 내밀었다. 피터의 전공이 아니었기에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투명 렌즈에 네모 모양이 반투명하게 그려져 있는 모양새였다. 다만 그려진 네모 모양은 동공이 움직여도 늘 그 자리에 있게끔 설계되었다.

“나도 끝까지 잡을 수는 있는데, 어느 정도 완성되고 난 다음엔 내 친구한테 부탁하는 게 더 낫겠다. 디자인 하는 친구라서 렌즈도 만지거든. 한 번 말해 볼게. 아마 들어 줄 거야. 너희 둘 다 필요해?”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네, 두 개 필요해요. 둘 다 도수 없구요.”

피터는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두 개를 주문했다. 선배는 설계도에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몇 단어들을 더 끼적였다.

“아마 일주일은 걸릴 거야. 투명 렌즈는 있는데 그 안에 색소를 넣는 거라서 제작 공정이 컬러렌즈랑 비슷하거든. 급한 거 아니지?”

피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괜히 여기 남아서 벌점 받지 말고 가서 자라고 했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온 건 딱 일 주일 만이었다. 곤란하게도 내가 동아리 활동을 하는 시간에만 선배가 시간이 난다고 해서 피터가 대신 받아오기로 했다. 부실에 널린 원고 뒷정리를 하고 있으면 피터가 들어오겠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피터가 부실 문을 활짝 열었다.

“렌즈 다 만들었대. 선배한테 감사하게도, 우리한테 받은 게 많다고 그냥 가져가래. 몇 번이나 돈 드렸는데 안 받으시더라.”

우리한테 받은 것들이 아니라 너한테 받은 것들 아닐까, 피터. 그 말이 목구멍을 꽉 채웠지만 애써 삼켰다. 피터는 신이 나서 아직 다 치우지도 못한 신문들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테이프로 붙여진 부분을 칼로 갈랐다. 속을 펼쳐보니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피터가 의뢰했던 렌즈 두 세트, 여분의 렌즈 케이스, 렌즈 세정제와 보관액까지.

피터에게 왜 이런 걸 부탁했냐고 묻자, 피터는 의외로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사각형을 의식하면서 모서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끝나는 문제인데, 이 사각형의 매개가 꼭 손이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라고. 수상하게 보일 빌미도, 매번 손을 들어야 했던 불편함도 없어질 거라고. 그리고 우리는 이 렌즈를 이용해서 과거를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할 거라고.

피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손목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기 때문이다. 내가 별 말 없이 따라간 이유도 역시 간단했다. 입체적인 사람을 평면으로 읽는다는 건, 그리고 그게 데이터화되어서 출력된다는 건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말마따나 지루한 하루의 변수를 만들어 준 대가로 아이스크림은 너무 적었고, 피터가 가는 곳마다 워낙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터졌으니 따라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나를 데리고 피터가 도착한 곳은 교실 앞이었다. 피터는 벽에 기대어 콧노래까지 부르며 누군가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피터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같은 반 남학생이었다. 관심이 없어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네가 정보상인이야?”

“뭐야, 누가 그렇게 불러? 물론 정보를 파는 건 맞지만. 어제 문자 보냈던 의뢰인이 너지?”

“어.”

그 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문자에도 써 뒀었는데, 좋아하는 애가 생겨서…… 어디에서 고백을 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지 모르겠어서. 그걸 좀 사 보려고.”

피터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그건 부딪혀봐야 아는 거 아닐까, 하고 중얼거리다가 아무렴 어때,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걔는 누군데? 네가 반했다는 애.”

“……우리 반 반장.”

피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미리 적어 둔 것 같은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그 애에게 쥐여 주며 피터는 당부하듯 입을 열었다.

“선입금 반절. 그 다음에 정보를 줄 거야. 그러면 나머지 반절을 입금하면 돼. 계좌는 여기 쓰여 있으니까 이쪽으로 보내주면 되고. 설마 우리 적어도 일 년은 더 볼 사이인데 떼먹을 생각 하는 건 아닐 거라고 믿어.”

그 애는 바로 입금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는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내 팔짱을 끼고 의뢰인에게 손을 흔들고 교실 창문으로 나를 끌고 갔다. 우리 반 반장이 조회대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방과 후에도 체력단련에 힘쓰는 성실함을 익히 알고 있어서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피터도 반장을 찾은 것 같았다. 운동장으로 향하기 전에 피터는 천천히 눈꺼풀을 두 손가락으로 벌려 간편하게 렌즈를 꼈다.

“읽는 건 내가 할 거야, 214. 너는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를 끌어주면 돼. 길게도 말고, 한 삼십 초 정도. 그 정도면 읽고도 남으니까.”

가자, 피터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재미있는 능력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피터처럼 영리한 아이에게 이 기술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즐거웠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활용할지가 궁금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이 금지된 유혹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회대에선 아직도 반장이 가쁜 숨을 내쉬며 줄넘기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반장이 줄넘기 한 세트를 끝내기를 옆에서 기다릴 예정이었지만, 반장은 우리가 기다린다는 걸 재빠르게 눈치채고 줄넘기를 멈추었다. 피터는 내 옆구리를 톡 쳤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반장, 나 선생님이 말한 거 적어 둔 종이가 사라져서 그러는데, 우리 월말평가 시험범위가 어디까지였더라?”

“시험범위? 어떤 과목?”

“다른 건 다 아는데 생물이랑 총검술. 총검술 이번에 필기도 본대?”

대충 둘러댄 것 치고는 그래도 괜찮은 핑계인 것 같았다. 반장은 잠시 뭔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다시 내 눈을 바라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생물은 6단원 끝까지고 누적범위 아닐 거야. 총검술은 필기 안 보는 걸로 알고 있어. 기말평가만 필기 보고 월말엔 실기만 본대.”

“정말? 고마워. 하마터면 시간만 날릴 뻔 했네.”

반장은 인사하는 대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피터와 나는 반장을 조회대에 남겨둔 채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로 향하는 그 짧은 길에 피터는 계좌에 들어온 돈을 확인하고, 읽은 과거와 미래를 조합하여 의뢰한 친구에게 보냈다. 나는 피터가 추구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다는 데에 놀라 잠시 멍하게 걸었다. 피터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걔, 실패할 거야.”

“걔? 의뢰한 애?”

“응.”

“왜?”

“걔 좋아하는 사람 있더라고.”

“그것도 말해 줬어?”

“아니. 내가 왜?”

할 말은 없었다.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건 딱 계약한 정보까지만이다. 그 이상을 호의로 귀띔해 줄 수는 있겠지만, 피터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번엔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야. 간결하게 부정했다. 피터도 변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우리는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사실 모든 대가를 돈으로 받은 건 아니었다. 가끔씩 의뢰인들에게 군것질거리를 얻어먹기도 했고, 기분이 내킬 때나 불법촬영 가해자를 특정해달라는, 듣는 것만으로도 화나는 의뢰를 받을 때면 무상으로 해 주기도 했다.

간단한 일들부터 복잡한 일까지. 피터가 선배에게 부탁한 렌즈가 아니었으면 훨씬 눈치를 보거나 숨어서 해야 했을 일이었다. 아니, 애당초 피터의 기술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기숙사에 유난히 늦게 들어온 피터가 씻고 나온 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싸매 올리고 자리에 스며들듯 누웠다. 나는 맞은편 침대에 누워 피터 쪽을 생각 하나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피터, 머리 말려. 이불 젖어.”

내가 피터를 부르자 피터는 잠시 일어나려고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그대로 다시 누웠다. 머리를 말리기 귀찮다는 신호였다. 말리지 않고 자면 그 다음 날 머리가 얼마나 복실거릴지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피터는 머리를 말리는 대신 내 이름을 불렀다.

“214.”

“또 왜.”

“나 오늘 선생이랑 대판 싸웠다?”

“누구랑?”

“윤리.”

“그럴 만하네.”

“뭐가 그럴 만 해.”

“너 원래 윤리 싫어했잖아.”

“이거랑 그거랑은 별개지.”

피터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눈을 맞췄다. 피터가 나를 읽고 있을까? 피터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무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피터를 읽을 수 있으니까. 피터는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방향으로 팔을 늘어뜨린 채였다.

“윤리가 나한테 교복 안 입고 다니냐고 뭐라고 하는 거야. 솔직히 우리 학교 교복 실용성 제로잖아. 여자애들 와이셔츠에는 라인 들어가 있어서 숨쉬기 불편하지, 베레모는 대체 왜 쓰는지 모르겠지, 아무리 추워도 치마 아래엔 스타킹만 신어야 하지, 체육복 등교 안 되지. 오늘 또 깜빡하고 베레모를 내가 안 쓰고 갔다? 나는 윤리 시간만 아니면 될 줄 알았지. 복도에서 그렇게 나한테 지랄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으응.”

“한두 번도 아니고 못 참겠어서 윤리 읽었거든. 선생님도 학창시절에 교복 입고 다니기 싫어했던 거 아니었냐고, 선생님들이랑 말싸움 하면서 애들은 교복을 입어야 예쁘다고 하는 거 들었다고, 우리가 학교에 공부하려고 오지 선생님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오냐고 막 쏘아붙였더니 윤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특유의 목소리로 너는 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르냐고 인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

할 말이 없으니까 인신공격만 하더라. 피터는 힘없이 깔깔거렸다. 그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는 통쾌함과 예의가 없었다는 죄책감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 웃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피터는 선생님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고, 외려 모범생 타이틀을 반쯤은 걸치고 있었으므로. 이번 일로 선생님들의 입소문에만 오르내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그저 괜찮을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어차피 우리는 닥쳐오는 월말평가 때문에 과거를 읽는 것에 대한 연구든, 의뢰상인 짓이든 잠시 중단해야만 했으니까.

*

“꽃은 유독성의 식물로 개화 전에는 위험수준이 극히 낮으나 한 번 피면 지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독성을 뿜는다. 스치기만 해도 강력한 화학 작용으로 살갗이 녹아내린다. 이는 희석하지 않은 염산을 피부에 쏟는 것과 같은 수준의 파괴력으로, 반응식은……, 아, 피터. 우리 반응식도 외워야 한다고 했나?”

“그거 내면 선생들 욕 들어먹을걸. 차라리 위험성이 높은 순서를 외워. 생물이 필기하라고 했던 거 있잖아.”

“그치? 설마 이걸 내겠어.”

“아니면 학교 동쪽에 있는 위험금지지역 외우던가. 거기 꽃밭이라고 접근도 못 하게 하잖아. 학교를 위험금지지역 근처에 세워 놓은 인간들 머릿속은 절대 이해 못 할 것 같지만.”

우리는 기숙사 앞의 야외 테이블에 각자의 책을 올려놓고 들어오지도 않는 빽빽한 글자들을 머릿속에 밀어넣고 있었다. 소리 내어 읽으면 조금이라도 더 외울 수 있을까 싶어 중얼거리는데도 단순 암기는 늘 어려웠다.

“너무 일찍 일어났어.”

아직 해 안 졌잖아.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꾹꾹 눌러 비볐다.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눈두덩이 마찰열로 화끈거렸다. 어떻게든 잠을 쫓아 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밝은 건 또 오랜만이었다.

“그러게, 너 이 시간에 일어난 건 몇 달 만 아니야?”

“어쩔 수 없잖아. 실기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우리 학년부터는 줄어드니까 필기에서 떨어뜨리겠다고.”

분명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몇 백 명에 달했던 재학생 수는 월말평가를 보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총검술 말로는 모든 학교가 치르는 평가라고 했다. 최고의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고. 줄어드는 퍼센트는 그때그때 달랐다. 많이 죽으면 많이 줄어들었고, 적게 죽으면 적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같은 학년의 재학생 수는 거의 일정했다는데, 그건 필기시험의 영향일 거라고 총검술이 언젠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만일 해당 학년에서 열 명이 죽어야 학생이 줄어드는 추이가 일정하다고 했을 때, 실기시험에서 두 명만 죽었다면 필기시험에서 끝부터 여덟 명을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면 필기시험으로 죽여 버리면 될 걸 왜 굳이 학생끼리 죽고 죽이는 실기평가를 봐야 하는 거죠? 그건 너희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느껴보라는 게 아닐까. 서로 싸우고 다치고 누군가가 죽는 걸 똑똑히 보는 과정에서 죽지 말아야겠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지는 말아야겠다, 하고 다짐하라는 게 아닐까.

사람은 생각보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면 피부로 느끼지 못해. 생각해봐라. 모르는 사람이 너희 앞에서 죽는다면 너희는 어떻게 반응할까? 기껏해야 동정심 정도일 거다. 타인이라는 단어는 마법 같은 말이라서 너희에게는 방패가 되어주고 타인에게는 칼이 되어 그들을 베지. 타인은 타인에게 본인이니까. 너희의 친구를 너희가 직접 손으로 베어야 타인의 죽음이 아니게 되는 거다. 그래야만 타인이 아닌 사람들의 죽음에도 무덤덤해지게 되는 거고, 동시에 너희의 죽음에는 한결 더 엄격해지는 거다.

그럼 모두가 서로를 베기를 거부한다면요? 그건 상관없지. 이 중 죽고 싶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나? 201, 너는 지금 당장 죽고 싶나? 에이, 설마요. 그냥 궁금해서요. 다행이네. 직접 눈앞에서 내가 죽여줄 수도 있어. 한 학년이 멸종한다고 해서 이 학교에 타격은 없다. 오히려 다른 학년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너희도 알다시피 학교를 졸업하면 더 잔인하고 엄격해지는 게 사회니까. 죽음은 밥 먹듯이 일어나니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어야 하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다.

총검술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동시에 죽음은 특별하지 않아 언젠가 나와 가까웠던 사람에게 찾아와도 그다지 감흥이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월말평가가 끝나면 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는 없어져 있었다. 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차피 한 달 후면 또다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 테였으므로. 그런 것 없이도 학교와 우리는 잘만 돌아갔으므로.

피터가 빌려주었던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아리송했다. 시체의 피부는 아직도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피터의 손을 마주잡을 것처럼 붉었다. 피터는 여자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달을 닮은 눈동자로 피터를 깊게 들여다 볼 것만 같았다. 입술을 열어.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게 달을 따다 달라고 할 사람은 더 이상 없단 말이야. 피터는 시체의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끌어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피터의 시야가 희뿌예졌다. 피터의 눈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시체의 어깨를 적셨다.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언제 울던가. 드물어 가늠하기 어려웠다. 잘 쳐 봐야 낙제를 턱걸이로 면했을 때 기쁨과 안도에 겨워 성적표를 손에 쥐고 우는 것뿐이다. 그것마저도 자신의 죽음이 미루어졌다는 데에 대한 눈물이다. 타인의 죽음에 울 수 있을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무감한 일에? 게다가 고통받은 만큼 행복해진다는데, 울 이유가 있을까?

피터는 필기해 둔 노트를 팔랑거리며 넘겼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길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그러니까 생물 과거를 한 번 읽어보라니까. 만날 낙제 겨우 면하면서.”

나는 반쯤 농담조로 낄낄거리며 피터를 놀렸다.

“말했잖아. 사실상 낼 수 있는 건 책 속의 전부라서 과거를 읽어도 책 속의 전부라고 결과가 뜬다니까. 실기였으면 읽었겠지.”

“알았어요, 낙제생 피터 씨.”

피터는 고개를 들고 익숙한 웃음으로 나를 가늘게 흘겨보다가 내 어깨 너머로 표정을 굳혔다. 나는 피터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느릿하게 돌렸다.

양복을 입은 익숙한 얼굴 뒤엔 앳된 얼굴들이 두 줄로 서 있었다. 한 번도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들. 줄은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어린 아이들의 행렬은 정문 바깥까지 이어져 마지막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절반은 낯을 가리는지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경직된 몸을 이끌고 가로등이 나직하게 길을 비추는 가운데로 어정쩡하게 캐리어를 고쳐 잡았다. 이곳저곳에 가로등이 막 켜질 시간이었다.

“미스터.”

“214, 학교 가는 길이니? 203도 있네.”

“네,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미소를 지었다. 미스터는 통솔하던 아이들의 수를 다 세고 보고하는 조교의 말이 끝나고서야 나와 네모난 눈동자를 맞추었다. 총원 사백, 열외 없음.

“곧 월말평가잖아요. 조금만 공부하다가 가려고요.”

나는 읽고 있던 공책을 흔들면서 피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피터는 그제야 고개를 잠시 까딱여 인사했다. 얼이 빠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피터를 곁눈질로 잽싸게 훑다가 괜히 버건디 넥타이를 바로 맸다.

“벌써 신입생 들어오는 기간이에요?”

“오리엔테이션. 몇 번이나 봤으면서 새삼스럽긴.”

“시험 기간에는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재미있는 거 아시잖아요.”

미스터는 익숙하게 낮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미스터를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미스터도 내게 허물없이 대하곤 했다. 다른 아이들은 본인의 일에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미스터니 신입생들이니 하는 곁가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괴짜로 취급되는 피터와 나만 지금의 8학년 중에서는 미스터에게 말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미스터를 처음 만났던 건 열 살이 된 다음 날 아침, 임시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캐리어를 든 채로 기숙사 앞에 집합했을 때였다. 마치 지금 가지런하게 줄 서 있는 어린아이들같이. 그 때의 미스터는 조금 더 젊었고, 무언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아 보였다. 부모님과 떨어진 건 그 때가 처음이었으므로 잔뜩 긴장했었는데, 미스터는 아이들을 체크하다 말고 떨고 있던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미스터를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학교 기숙사에 상주해 있는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미스터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제외하면 한 달에 한 번, 월말평가 때만 나타났다. 실기평가 채점은 선생님이 하는데도 굳이 그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 다른 학생들을 관찰하듯 주시했다. 옆의 선생님과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미스터에게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월말평가가 끝날 때마다 피터와 나는 미스터에게 가서 맛있는 걸 사 달라고 졸랐다.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보였을 테였지만 미스터는 선선히 우리를 매점으로 데리고 가 소시지 빵을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다. 그건 우리가 아주 어렸던 1학년 때부터 8학년이 된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이제는 미스터가 우리를 기다릴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도 피터와 같은 부류였다. 뭐라고 부르면 되냐고 물었을 때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하다가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이 미스터였으니까.

“이제 너희가 몇 학년이지?”

“8학년이요. 졸업까진 일 년 남았구요, 얻어먹을 소시지 빵도 열두 개씩 남았어요.”

“졸업시험도 일 년 남았네.”

“너무해요. 그걸 꼭 그렇게 일깨워줘야겠어요?”

“팔 년 동안이나 203이랑 214는 유난히 친했고.”

“뭐가요?”

“아니, 그냥. 이 학교 학생들은 다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크잖아. 남하고 관계 쌓기를 묘하게 거부하는 것처럼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던데, 너희 둘은 어째 볼 때마다 같이 있는 것 같아서.”

미스터는 우리가 어린 시절 그랬듯 우리의 머리를 헝클듯 토닥였고,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미스터의 시선은 우리에서 새로운 신입생들에게 옮았다가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그래야 너희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이제 가 봐야겠다. 애기들 반 배정해야 해. 얘네 너무 오래 밖에 세워 두는 것도 좀 그러니까. 월평 때 보자.”

미스터는 손을 흔들고 우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조교에게 손짓을 했다. 신입생들은 미스터를 따라 학교 건물 쪽으로 다소 빠르게 걸어갔다.

미스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피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읽혀.”

“응?”

“미스터 말이야. 과거는 읽히는데 미래가 어떻게든 읽어 보려고 해도 물음표밖에 안 떠 있어.”

필기보다 앞서 치러야 했던 실기평가는 나쁘지 않게 지나갔다. 내가 이번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피터가 우연히 발견해 낸 사실 때문이었다. 피터는 읽는 기술에 대한 연구를 중단한 것이었지 읽는 행위를 아예 중단한 건 아니었는데, 우연히 확률에도 손을 댈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말만 확률 조작이지, 사실상 필연적인 사건의 발발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를테면 실기평가 당일 저 학생이 나를 쏠 확률이 팔십 퍼센트에 육박해도, 내가 그 학생에게 대응사격을 하지 않고 먼저 다른 학생을 노리면 나를 노리던 학생도 상대적으로 제압이 쉬운 다른 학생을 먼저 겨냥한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으나 마치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특정 행동을 하거나 어떤 단어 하나를 내뱉는 것만으로도 필연적으로 내가 원하는 쪽의 확률이 빠르게 올라가 백 퍼센트를 찍는 걸 보고 피터는 실기평가 전날 내게 살짝 귀띔했다. 대응사격을 하지 말고 다른 적을 먼저 공격하는 척 하라고.

분명 이번 시험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으나 우리는 나름대로 편안하게 통과했다.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연습했다는 뜻이겠지. 우리가 시험장을 나가자 또다시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들어와 다음 시험을 위해 시험장을 정리했다. 늘 이런 식이었으니 피비린내가 빠질 리가 없다.

아직 필기시험이 남아 있었지만, 피터는 실기시험까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며 사흘쯤은 마음대로 놀겠다고 했다. 실기 전날까지도 필기시험을 준비하기도 했고, 원체 머리가 좋은 피터였으니 그래도 별 상관없을 걸 알았기에 나는 도서관 건물 3층에 위치한 독서실로, 피터는 2층 도서관에서 각각의 시간을 보냈다. 아마 놀겠다고 선언했어도 책을 읽거나 과거를 읽는 기술에 대해 연구하고 있을 게 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터는 예상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도서관에서 나왔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평소와는 달리 깨작거리는 피터의 모습이 나사 하나쯤은 빠진 것 같아 보여서 이번에는 내가 피터의 손목을 끌고 매점으로 갔다. 그 때까지도 생각에 가득 잠겨 있는 피터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쥐여 주고 팔짱을 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214, 너 달이라는 거 기억해?”

“달? 소설 속에 나왔던 그거?”

나는 아이스크림 포장을 벗기고 한 손에 껍질을 구겨 쥐었다. 피터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일단 먹어. 나는 피터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포장을 벗기곤 한숨을 쉬었다. 피터의 생각 폭은 너무 넓어 설명을 듣지 않으면 잘 이해가지 않는 것이 대다수였다. 피터는 내가 독촉을 하자 그제야 아이스크림을 햄스터처럼 입안에 가득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응. 근데 달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어.”

“우리가 소설을 한 번도 못 본 것처럼 달도 한 번도 못 봤는데 어딘가엔 존재하나보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이 혀끝에 맴돌다가 금세 사라졌다. 피터는 차가운 걸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어 두통이 온 건지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고 연신 관자놀이를 눌렀다.

“소설은 정말 꽁꽁 숨겨져 있어서 지금껏 우리가 접해보지 못했다고 해도 묘사된 달은 늘 밤하늘에 떠 있는 거였어. 우리가 못 봤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지 않아?”

“지금까지 달에 대한 걸 찾아본 거야?”

피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실기시험이 끝났으니 조금 자 두기라도 했으면 나았을 텐데, 사흘 동안 룸메이트인 내가 피터를 보지 못한 만큼 기숙사에 있는 시간이 극히 적었던 피터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지쳐 보였다. 그깟 달이 뭐라고. 피터가 하나에 매료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몇 년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으니까. 그래서 허황된 것은 일찍 싹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거 찾아봐서 뭐하게.”

나는 부러 더 냉정한 말투를 뱉으면서 매점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한숨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니, 그래도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 우리에게 달 말고 인공 태양이 있잖아. 막 밝지는 않아도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고. 어디 다른 행성에라도 달이라는 게 있나 보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소설 속 사람들이 우리랑 너무 닮아 있단 말이야. 다른 행성에 인간이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피터의 말이 맞았다. 애당초 너무 덥거나 추워도 멸종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이었다. 조금만 먼지가 많으면 기침을 하고, 바이러스가 돌면 앓아눕고, 심지어 정신적 충격에는 속수무책이라 눈 뜨고 당하고만 있는 나약한 호모 사피엔스, 인간.

소설 속의 사람들은 우리와 달랐다. 어두컴컴한 밤을 원료로 일하는 우리와는 달리, 소설 속에선 밤에 잠을 자고 낮에 일어나서 일을 했다. 죽는다는 걸 두려워했고 주위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마치 정말로 다른 세계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다르다고 하기에는 닮은 점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밥을 먹었고, 잠자는 시간대는 달라도 잠을 잤으며,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했고, 본능적인 것 말고도 옷을 입었고, 인지와 행동의 조화를 알고 있었고,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 스스로 책을 읽어 지식을 탐닉했고, 휴대폰을 사용했고…….

피터와 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피터는 각자만의 생각에 취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스터가 어디선가 나타나 피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 전까지는.

“실기 끝났다고 얼빠져 있네, 203.”

“미스터. 평가 기간이라서 계신 거예요?”

피터는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를 휘어 내리는 피터는 지난번 미스터와 대면했을 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한순간 피터의 눈이 반짝였다. 기회가 있을 때 잡지 못하면 피터가 아니었을 테였다.

“너희 찾으니까 없어서 좀 더 기다렸지.”

피터는 인사치레도 대강 넘겨들었다. 눈을 보아하니 자신이 가장 궁금해 하던 것에 대해 곧바로 물어 볼 작정이었다.

“미스터, 혹시 이 뭔지 알아요?”

미스터는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나 찰나에 스쳐 지나간 곤혹스러운 눈빛은 놓칠 수 없었다. 미스터는 팔짱을 꼈다가 풀었다가 다시 끼고는 한 팔을 들어 자신의 목울대를 만지작거렸다. 눈동자에 밝은 가로등 빛이 반사되었다.

“달? 그건 어디에서 들은 거니?”

“그냥, 건너들었는데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서요.”

피터는 자연스럽게 얼버무렸다. 미스터의 눈빛을 피터도 아마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동체시력이 좋아 사격 실기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었으니까. 마스터는 오래도록 피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 누구라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알면 안 되는 지식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피터를 응시하던 마스터는 고개를 흔드는 동시에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피터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시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게요, 하는 대답을 듣고서야 마스터는 우리에게 소시지 빵 말고 음료수라도 사 주겠다면서 우리를 놓아두고 매점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회피하려는 움직임 같기도 했다. 목각인형이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 지 설계하느라 잠시 관절이 삐걱거리는 것처럼.

그리고 피터는 미스터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익숙한 잿빛 책, 반만 채워졌으나 우리가 익히 알던 것과는 반전된 모양의 동그라미.

「레드문」 2권.

미스터의 손아귀 사이로 얼핏 보이는 건 분명히 책이었다.

*

피터는 잠을 통 청하지 못했다. 어떻게 미스터가 「레드문」 2권을 가지고 있는지, 읽었다면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우리에게 달이라는 것의 정체를 숨기는지, 미스터의 미래는 왜 읽을 수 없는지. 피터의 말에 따르면 이제는 과거 항목마저 읽기 어렵게 변형되었다고 했다. 렌즈가 고장 났을 가능성에 대해 물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피터의 몸 상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필기평가는 진행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필기평가였으므로 이제 별다른 감흥도 들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익숙해지는 게 참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해도 평소처럼 시험을 칠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 평가가 끝나자 다들 움직이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기지개를 펴거나 하품을 했다. 나는 책가방에서 「레드문」을 꺼내 책상 아래에 두고 몰래 읽기 시작했다. 왠지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달은 원래 은색에 가까운 노란색이라고 했다. 기상 상태가 좋지 않으면 빨갛게 보일 때도 있지만, 레드문이라고 지칭되는 달은 태양이 달을 가리는 개기월식을 뜻한다고. 어제 읽었던 소설 속의 내용을 다시 곱씹으며 책을 넘겼다.

피터 쪽을 보니 책상에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망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 평소처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잠을 자고 혼자 기숙사로 돌아가 누구보다 빠르게 채점을 해 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적을 깬 건 앞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온 두 남자였다. 둘 다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중 왼쪽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월말평가마다 결과를 알려 주던 사람이었고 이번에도 8학년 전체를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른쪽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이번에 새로 배치된 사람일 테였다. 왼쪽 남자는 익숙한 듯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더니 두 명의 번호를 불렀다. 호명된 사람들은 눈을 내리깔고 앞으로 나갔다. 오른쪽 남자는 앞으로 나온 둘에게 각자 알약이 담긴 봉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나머지는 나가도 좋아요. 6월 월말평가 무사히 치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두 명이 서 있는 방향을 더러 흘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피터는 필기시험이 끝난 날에는 늘 혼자 하교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동아리 부실에 처박혀 동아리에서 월말평가 전에 마무리된 원고들을 먼저 교정하곤 했다. 아마 오늘도 별반 다를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사망자가 나오고 나서 하루 정도 학교가 조용한 건 늘 있던 일이었으니까.

피터는 벌써 나갔겠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중 빠르게 내 뒤를 지나가던 누군가와 부딪혀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책을 놓쳤다. 미안해, 하는 말에 간단하게 고개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고 허리를 굽혀 책을 주웠다. 책가방 안에 넣고도 누군가 봤을까 봐 불안했다. 마치 반입하면 안 되는 금지물품이 내 책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시선이 앞쪽으로 향했다. 문득 약을 받아든 학생들을 읽었다. 둘의 과거는 각각 달랐으나 미래는 사망이라는 똑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약을 받았으니 당연했고, 별로 놀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아리송한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연구 후 데이터 소멸.

섬뜩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호기심은 바이러스 같은 것이었는지 피터에게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억누를 수가 없어서 우리의 월말평가 결과를 알려 주러 온 두 남자를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도출된 값은 물음표였다. 피터가 미스터를 읽었을 때와 똑같이.

“거기 학생, 안 가요?”

“이제 가려구요.”

오른쪽 남자가 얼른 나가라며 눈치를 줬다. 나는 책가방에 책을 집어넣은 후 빠르게 들쳐 메고 교실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미심쩍은 게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복도 사이 화장실 쪽으로 갈라진 틈에 몸을 숨겼다. 지하철역에서 여자아이를 따라갔듯, 이번에도 미행을 해 볼 심산이었다.

곧이어 왼쪽 남자가 반에서 혼자 나와 다른 반으로 들어갔다. 약을 복용해야 할 학생들을 우리가 시험을 친 교실로 데리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바쁘게 다시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가더니 금세 전동리어카를 끌고 돌아왔다. 리어카는 크지 않아 학교 복도를 무리 없이 오갈 수 있어 보였다. 조용한 복도에는 왼쪽 남자의 목소리가 차갑고 선명하게 들렸다.

“다 앉았나요? 먹어요. 고통 없이 죽는 약이니까. 손상되지 않는 편이 나으니 서로서로 좋게, 어서요.”

모두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남자는 마지막까지 형식적인 예의를 차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만일 오늘 월말평가로 죽은 대여섯 학생들이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그건 아마 약을 쥐여 준 남자일 테였다. 공부를 하지 않은 본인들이 아니라. 사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절대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어야 하므로 본인들을 자책하는 것도 아귀가 맞지 않기는 했지만.

결국 아무도 우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안녕, 하는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작은 인사가 새어나오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필기시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다리가 아파왔다. 동시에 교실 앞문이 열렸다. 시체 하나당 사람이 한 명씩 붙더니, 리어카에 열을 맞춰 싣기 시작했다. 시체는 많이 무겁다고 배웠는데 생각보다 가뿐하게 들려 내팽개쳐졌다. 며칠까지만 해도 말을 섞던 사이였는데 그 무게가 저렇게나 가볍구나.

“끝났습니다.”

“고생했어. 가자.”

둘은 전원을 올리고 리어카 뒤에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덕분에 내 발소리가 겹쳐 들리는 게 상쇄될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앞뒤 간격을 유지하며 까치발을 들고 리어카를 따라갔다. 혹시라도 발소리가 들킬까 도둑고양이처럼.

복도 끝에서 선명한 안내원 목소리가 들렸다. 팔층입니다. 둘은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에 리어카를 밀어 넣었다. 안정적으로 리어카가 들어가자 닫힘 버튼을 눌렀는지 문이 금세 닫혔다. 나는 신발을 벗어들었다. 맨발로 달리면 소리가 덜 나겠지. 엘리베이터가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주시하면서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에서 멈췄다. 지하 2층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였고,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문이 늘 잠겨 있고, 입장하는 순간 죽는다는 소문까지도 도는 곳.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왕 발을 내딛었으면 끝까지 가 봐야지. 지하 2층의 큰 문 손잡이를 잡았다. 체중을 실어 뒤로 당겼더니 의외로 쉽게 열렸다. 아주 잘 관리되고 있었는지 흔한 철문이 열릴 때의 시끄러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들어가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하가 어두워 다행이었다. 나는 벽 쪽에 최대한 붙었다. 다행히 아직 멀리 가지 않았는지 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앞으로 가고 있었는지 손전등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어린 애들한테 서로 죽고 죽이라고 하는 겁니까?”

“신입이라 잘 모르나 보네. 실험체가 너무 많으면 효율적으로 관리가 안 되잖아. 이 때 아니면 애들이 머리가 커져서 말을 듣지도 않아.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변수를 차단하긴 해야 하는데, 머릿수 줄이려면 뭘 모를 때 하는 게 낫잖아.”

“변수 차단…… 그것 때문에 온 학교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거고요?”

“머리 잘 돌아가는데? 원래 학교 안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감시 카메라에 즉시 녹음되어서 징계 먹거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는 감시 카메라가 없지만.”

“그럼 더 궁금한 것도 물어봐도 되는 겁니까?”

“그래, 어차피 둘밖에 없으니까.”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나는 숨을 죽이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람을 죽여 온 사람들이고, 만일 들킨다면 살해당하겠지.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게 느껴졌다.

“수조 안에서 키워지고 있는 어린애들 말입니다. 그 애들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데 그 이전의 자신들의 일은 어떻게 기억하는 건가요?”

“잘은 모르는데, 연구원들이 신경교란물질을 수조 하나하나에 집어넣는다고 들었어. 그러면 기억이 생긴다는데…… 뭐, 우리 같은 관리직이 이해하면 연구원들이 있을 필요도 없겠지. 이런 애들 머리 다 열어 봐서 똑똑한지도 모르겠지만.”

“걔네는 밤에도 연구하잖습니까.”

“야, 우리도 밤에 일하잖아.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 다 일하는 낮에 자는 것도 재밌긴 합니다.”

둔탁한 소리와 작은 신음이 이어졌다. 두 명만 있는 것 치고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나는 빠르게 철문을 다시 열고 지하를 빠져나왔다. 기숙사까지 맨발로 달리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갑작스럽고 급진적인 정보들이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생각들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면서 몸집을 불렸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니. 연락은 학교 방침 때문에 안 되지만 내겐 부모님이 있었는걸.

그러고 보니 미스터가 왼쪽 가슴에 내 이름이 달린 명찰을 나누어 줬었지. 그러면서 번호는 무작위로 붙여진 거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그럼 미스터를 만나기 전의 나의 이름은? 열 살이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린 것도 아니었으니 기억이 나야 정상일 텐데, 내 과거의 이름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피터에게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건 다음 날 등교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피터는 아무것도 모르고 영어 교재를 가지고 와서 내게 정관사의 발음을 물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음 앞에서는 더, 모음 앞에서는 디로 발음해.”

“근데 이건 자음 아니야? 디라고 발음하던데.”

“음성학적으로 분류해서 자모음이야. 한글로 썼을 때 말고. 왜. 어떤 외국인이 영어를 한글로 바꿔 읽냐.”

“레드문 앞에 정관사를 붙이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건 어디에 쓰게.”

또 그 얘기다. 심드렁하게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숨이 깊게 내쉬어져 등가죽이 배까지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월말평가도 끝났는데 왜 이렇게 까칠해.”

피터의 말에 짜증스럽게 대답하기 전에 방송이 먼저 선수를 쳤다. 8학년 B반 203 학생과 214 학생은 지금 바로 지하 2층으로 내려와주세요. 다시 한 번 알립니다. 8학년 B반 203 학생과 214 학생은 지금 바로 지하 2층으로 내려와주세요.

지하 2층.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일어나려는 피터의 손목을 본능적으로 움켜잡았다.

“가면 안 돼.”

“왜, 그 소문 때문에? 소문은 소문이야.”

“피터, 시간이 없으니까 잘 들어. 나 지하에 다녀왔어. 그리고 거기서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봤어. 미스터랑 관련된 일이야. 우리 거기 가면 백 프로 죽어.”

“무슨 소리야.”

피터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기회조차 놓칠 운명이었다면 고민하지 말고 말할 걸 그랬나 보다. 나는 창문 너머로 피터의 손목을 쥐고 달려가 쫙 깔린 양복 입은 남자들을 가리켰다. 전부 총을 한 정씩 들고 있었다. 나는 기겁하는 피터를 두고 말을 이었다. 기분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봤지. 쟤네 다 안 읽혀. 그리고 아마 안 가도 죽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 뛰자. 시간이라도 끌어보게. 어떻게든 살지 누가 알아.”

그리고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그 때 알려줄게. 지금은 안 돼.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여전히 피터를 꽉 쥔 채 계단참으로 뛰었다. 계단에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넘어가기 적당한 정도의 크기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눈짓했다.

“미쳤어? 여기 팔 층이야.”

“피터, 아래층 난간으로 뛰어서 매달리고 천천히 한 층씩 내려가. 배웠잖아.”

아마 우리가 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계단부터 올가미 조이듯 점점 몰아올 게 틀림없었다. 피터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난간을 넘어 철봉을 하듯 아래로 뛰어내렸다. 피터가 안전하게 아래층에 착지한 걸 보자마자 나도 뛰어내렸다. 바닥까지 많이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계단으로 총으로 무장한 양복 무리가 우르르 몰려 올라가는 게 보였다. 방송이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현재의 소동은 학생징계위원회를 열기 위한 절차로, 학생 여러분들은 개의치 말고 각자 할 일을 계속하시면 됩니다. 피터와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어디로 가야 하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면 되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스터. 그 사람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우리가 읽을 수 없던 물음표가 떠올랐다. 살 수 있을까? 억측일까? 그러나 우리가 감시당하고 있다면 우리가 아는 곳으로 달렸을 때 잡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무작정 피터의 손을 잡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달렸다. 그게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동쪽의 위험금지지역. 그나마 다행이었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야 뒤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숙여.”

피터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배운 것은 성실하게 활용해냈다. 늘 겪어 왔던 월말평가 덕분이었다. 우리는 두 손을 놓고 있는 힘껏 달렸다. 목으로 들어오는 까끌까끌한 먼지가 따가웠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벌집이 될 것만 같았다. 총소리와 피터의 목소리가 구분되지 않던 순간, 왼쪽 팔에 타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팔에서 찐득하고 뜨뜻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숱한 월말평가에서 단 한 번 맞아 보았던 총알의 감각과 똑같았다. 다만 스쳐지나갔기에 계속 뛸 수 있었다. 뛸 수 없어도 뛰어야만 했다. 공포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기계적으로 팔다리가 움직였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리의 발은 단단한 땅을 기계적으로 박찼고, 입술을 질끈 물고도 눈앞에 꽃밭이 보일 때까지 계속 뛰었다.

여태껏 죽음에 대해서 배울 때의 결론은 결국 전부 과정이었다. 월말평가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아이들이 흘리던 신음은 일종의 주문 같은 거라고, 다만 터널을 통과하기 위한 의식 같은 거라고. 눈을 감는 순간 우리의 몸은 빠르게 터널을 통과할 테고, 그 위에서는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려 우리를 감싸고, 이곳에서의 숨이 완전히 멎으면 그제야 터널의 끝에서 또다른 시작을 하는 거라고. 약간의 통증이 수반될 수는 있지만, 곧 멎는다고. 그 정도는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그럼 우리가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이다. 죽음이 완전한 새로운 시작이 아닐 가능성은 얼마나 되지? 애당초 새로운 시작이라고 이야기했던 건 누구였더라? 처음 증명했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만일 죽음 너머로 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래서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면?

알고 있던 세계가 전부 무너질 때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무엇이든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이처럼 만져보고 느껴보고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일 더하기 일은 이가 맞냐고. 우리는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게 맞냐고. 정말이냐고. 눈동자로 사각형을 그렸을 때 읽히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꾸만 목 뒤에 물음표를 심어버리는 기분이다. 그들의 사각형에 떴던 단 하나의 기호를 들이미는 것만 같다. 폐가 공기로 가득 찰 때까지 숨을 들이켰다.

나도, 피터도, 다른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이 거짓일 확률은 얼마나 되지?

아니, 다시 물었다.

모두가 단단히 믿고 있던 게 사실 거짓이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거지? 내가 여기서 총에 맞아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책임져 줄 수 있는 거지?

“피터!”

“빨리!”

총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연달아 들리는 파열음이 피터의 목소리를 잠식하듯 먹어 들어갔다.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발끝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발목은 멋대로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갔다. 튄 콘크리트 파편이 뺨을 스쳤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처럼 총을 쏴댔다. 꼭 우리를 꽃밭으로 몰아가려는 것만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무력화시키려는 것만 같이. 그러나 그들도 아무런 장비 없이는 녹아버릴 텐데.

눈앞에는 우리보다 키가 큰 장미덤불이 흐드러져 있고 뒤에서는 양복 무리가 엄호사격을 하며 우리를 뒤쫓는다.

이대로라면 꽃의 독에 질식사할 테다. 들어가는 순간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과 함께 그대로 흐물흐물 녹아버리겠지. 지독하고 깊은 구덩이가 생길 거고, 끝의 끝까지 죽음보다 못한 통증을 견뎌내며 의식을 붙잡다가 가망 없이 추락할 게 뻔하다. 아직 반응식도 외우지 못했는데. 잔인하고 유해한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잔인하지 않았나? 죽고 죽이던 우리는 폭력적이지 않았나?

죽음의 의미가 갱생이나 새로운 시작같이 거창한 게 아니라 단지 둔탁하고 날카로운 통증뿐이라면, 정말, 정말로 어이없는 가설이지만,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밖에 줄 수 없다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친구들에게 나는 무슨 의미였나?

“피터!”

나는 피터에게 꽃밭으로 들어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피터는 내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꺾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쉬기도 힘들었다. 헐떡이며 간신히 음절을 끊어 토해냈다. 피터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안 돼, 저기 들어가면 죽는다고!”

“우리한텐 선택지 같은 거 없어, 피터! 빨리 뛰어!”

뭐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냐, 하는 외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속도를 내 꽃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녹아 없어진다. 죽는다는 건 무서웠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믿던 사람의 총에 맞아 비참하게 죽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게 낫다는 건 안다. 그건 피터가 늘 하던 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바람 소리가 더 크게 귓가에서 울렸다. 심장이 온몸에서 뛰는 것 같았다. 달콤한 향기가 일순간 온몸을 아찔하게 덮쳤다. 눈을 쪼는 것 같았던 빛이 그림자로 뒤덮였다.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눈을 떴다. 피터가 내 옆에서 뛰고 있었다.

녹아내리지도 않고, 질식사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결과 도출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야, 빨리 추적 안 해?”

“예상 범위를 벗어났어요, 등록된 데이터가 없어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통신은?”

“필요 없을 줄 알고 준비를 안 해서……”

총소리는 몇 번 더 나고 그쳤다. 대신 뒤에서 험악하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치명적인 독성으로 우리를 죽일 수 있다던 꽃들은 도리어 기분 좋게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터의 손을 꽉 잡은 채 달린다. 우리는 죽은 걸까? 이미 죽어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환각을 느끼고 있는 걸까? 죽는 순간의 통증이 없이 죽은 걸까? 여러 생각들이 뺨의 상처를 홧홧하게 만드는 바람을 타고 지나갔다. 여전히 가쁜 호흡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 모른다. 숨이 한계에 다다랐다. 키보다 더 큰 꽃들 사이에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넘어지다시피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과 목은 땀범벅이었고 베레모는 뛰는 중에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우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숨소리만 서로의 귀를 가득 채웠다. 침묵이 이다음의 우리를 저주한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입을 닫았을 것이다. 아마 피터도.

“피터.”

만일 이곳이 격리된 세상이고 그들의 말대로 우리는 개조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이 가짜이고 그들이 진짜라면. 진짜가 가짜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기 위한 통로도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아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꽃이 피어나지 않은 공간에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나무판자가 막고 있었다. 그걸 찾은 건 순전히 행운이었다. 내가 팔을 뻗자, 피터는 나를 막아서고 나무판자를 들어냈다. 흰 와이셔츠가 위쪽 팔부터 온통 빨갛게 물든 걸 그제야 알아챘다. 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칼에 베인 것 같은 상처임에도 홧홧했다.

“들어가야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깊게 쉬곤 전제조건을 달았다.

“살았잖아. 네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무릎을 꿇고 땅을 더듬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로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는 데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피터가 엎드린 뒷모습만 보고 조용히 따라갔다. 습기 찬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무릎의 얇은 피부를 타고 무게 실린 통증이 이어졌다. 꼭 바닥에서 가시가 돋아나 무릎을 찔러대는 것 같은 귀찮은 감각. 지하는 땅을 파내 만들어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질척거리지도 축축하지도 않았다. 흙이 날리던 것도 지하통로로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잠잠해졌다.

어느새 우리는 무릎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의 높이로 완공된 길의 정 가운데로 걸었다. 사뭇 널찍해진 길은 피터 옆에서 걸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피터의 표정이 어렴풋이 스쳐 보였다. 피터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을까. 앙다문 입술과 흙이 가득 묻어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 때문에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순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알던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다. 읽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진짜 세계는 어딜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조각나 버린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걸까. 어쩌면 눈을 깜빡이는 방법부터. 어쩌면 숨을 쉬는 방법부터.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과거부터. 손톱이 손바닥의 살갗을 뭉근하게 짓눌렀다.

“네가 알던 내가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거잖아.”

피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통로 안에 울리는 발걸음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열 걸음을 걷고 피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214. 달은 있겠지?”

나는 피터 쪽으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애써 붙잡았다. 내가 처음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피터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통로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핑 돌았다. 와이셔츠를 적시고 뚝뚝 떨어지는 피는 지혈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만해, 피터.”

네가 침묵해도 이미 받을 수 있는 벌을 다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것 같으니까. 뒷말은 삼켰다. 그러나 피터는 내게 계속해서 물음을 던졌다. 마치 정답이 없는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듯이.

“정말 이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어, 너는?”

“피터.”

“지금까지 쌓아온 걸 다 버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거냐고.”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거야. 너는 이 모든 걸 다 버틸 수 있어? 우리가 알고 있던 것 중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는데?”

피터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내 목소리만 동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울렸다. 손바닥으로 손톱이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없던 일처럼,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틀린 걸 알아도 묻고서 영영 살 수 있냐고.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잖아. 어떻게 사람들의 미래를 그렇게 확정지을 수 있었는지. 조금만 생각해도 운명론은 폐기되어야 하는 멍청한 이론이었다는 거 너도 알잖아.”

“너무 늦었어, 214. 죽기 직전에 그걸 깨닫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안 죽어.”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단단했다. 피터가 다시 부정하기 전에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안 죽을 거야.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우리를 가엽게 여겨 줄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소설에 나왔던 것처럼 다른 세계에선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거야. 아직은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없이 걸었다. 말도 없이, 답도 없이. 걷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 되어서야 차 몇 대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분명 내려올 때는 많이 내려오지 않은 것 같은데, 계단은 까마득한 위를 향하고 있었다. 올라가면서도 말은 없었다. 다만 지하통로는 점점 땅굴 같은 모습에서 벽돌이 쌓인 것처럼 변하고 있었다.

“피터.”

“응.”

“너는 나가면 그 이름을 쓸 거지?”

문득 물었다. 만일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숫자로 불리던 우리는 뭐라고 불려야 할까.

“그러려고. 만약 너무…… 다르면 바꿔야겠지만.”

“내 이름은 뭘로 할까.”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서로에게 물었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의 아기처럼. 이름, 성별, 생일부터 시작해서, 학년, 상식, 좋아하는 것들을 거쳐, 윤리관과 가치관까지, 무엇이 세계와 어긋나 있을지를 추론했다. 긴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한 번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전부를 뒤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끊임없이 불안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세계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없을 것 같았던 끝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낯선 건물로 이어져 있었다. 층고가 높은 건물의 한쪽 벽은 화면으로 가득했는데, 기숙사부터 시작해 학교의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 모니터는 아주 극소수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모니터 아래에는 숫자와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개중 8-203과 8-214로 라벨링되어 있는 모니터에 눈길이 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광경이 시선을 따라 모니터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내가 지하에 내려간 걸 이런 식으로 알았구나. 처음부터 비밀스럽게 뭔가를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했구나. 아니, 피터가 처음 「레드문」을 읽었던 순간부터 이런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을 천천히 내리자, 코앞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양복 무리들만이 아니었다. 실험복을 입고 있기도 했고, 사복을 입고 있기도 했고, 그 중에는 우리를 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미스터도 있었다. 미스터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고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자 저 녀석들이야, 하고 악을 썼다. 분명히 양복 무리들의 앞에 서서 전두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지하 말고도 다른 통로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피터는 뒤로 주춤거렸다. 미스터의 악다구니에 다른 양복 무리들이 권총을 빼들고 우리 쪽을 겨누었다. 우리의 오른쪽에는 새로운 문이 있었다. 그 문에 벽을 기댄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끝까지 잔인하고 잔혹했다.

“우리를 어떻게 할 거죠?”

“여기에서 발포하면 안 돼. 근처에 다 들릴 거란 거, 다 알지.”

미스터는 양복을 입은 무리에게 명령조로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내내 눈은 나와 피터를 번갈아 응시했다. 내가 만났던 미스터가 진짜 미스터인지, 아니면 지금의 미스터가 진짜 미스터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미스터는 지하 통로를 통과하지 않은 우리를 대할 때처럼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내려가서 이곳에 대해 입만 다물고 있으면 더 이상 쫓지는 않을게. 죽이지도 않고. 생존권도 보장해 준다고 약속하마.”

“그런 얘기는 총부터 내리고 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이건 다 뭐예요.”

이번에는 피터가 물었다. 경직되고 딱딱한 소리였다. 무언가 억눌린 것 같기도 했다. 미스터의 목소리와는 상반된 느낌이었고, 그래서 더 단단하게 들렸다. 미스터는 한숨을 쉬고 양복 무리들에게 손짓을 했다. 우리에게 겨누어졌던 총구가 거두어졌다.

“203, 네가 아는 게 대부분 맞아. 너희는 수조에서 태어난 인공 생명체들이고, 열 살 이전의 기억은 전부 조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너희가 살던 곳은 바이오스피어의 일종이야.”

바이오스피어. 배운 적이 있었다. 또 하나의 지구. 밀폐된 공간에 지구와 같은 조건을 만들고, 사람이 직접 들어가 생존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장소. 미스터가 이곳의 최고책임자라도 되는 건지, 아무도 미스터를 제제하지 않았다. 미스터는 말을 이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정보의 한정성을 두어서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예측하고 그로 하여금 인간게놈지도의 감정 및 행동유전자 편을 만드는 거였어.”

“그리고 우리는 멍청한 그 실험의 실험체였던 거고요.”

피터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에서 말해왔던 불확정한 미래를 붙잡으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겠지만. 피터는 미스터를 똑바로 노려보다가 빙글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피터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미소였다.

“가설을 세워 봤는데. 우리가 미래를 볼 수 있었던 프로그램은 당신들이 사용하던 거였죠? 네모 모양으로 다음 행동의 확률을 알 수 있는 그거 말이에요. 우리가 인위적으로 프로그램에 개입할 때마다 프로그램의 정확도가 내려갔을 거고. 당신들 입장에서는 변수가 생기는 것도 꺼림칙했을 텐데, 그 변수가 당신들의 끔찍한 진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버렸다. 그래서 방해하는 표본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미스터는 아무 말도 없었다. 긍정의 표시였다.

“실험체가 이 정도까지 알아낸 걸 직접 본 소감이 어때요? 이것도 충분히 성공적인 것 같은데, 딱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어린애들을 쓴 거예요?”

“214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나 보네. 그 또래의 뇌가 가장 변칙적이고 변수가 많기 때문이야. 아직 미성숙하거든. 그래서 실상 너희 또래만 연구하면 성인은 그렇게 많은 표본이 필요하지 않아.”

미스터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호의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머지는 뻔했다. 이 실험이 아무리 국가 단위라고 해도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윤리적으로 질타를 받을 게 당연했겠지. 아무리 비뚤어진 생명윤리를 배웠어도 간단한 추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미스터가 왜 우리를 그렇게나 입막음시키려고 했는지, 아래로 돌려보내려고 혈안이 되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궁금한 건 이게 다니? 그럼 이제 돌아가자. 차편은 이쪽에서 마련해줄게.”

나와 피터를 죽이려고 들 때는 언제고. 미스터는 우리에게 늘 보여주던 미소를 만면에 펴 바르곤 제안하듯 굴었으나, 사실상으로 반강제적으로 압박했다. 나는 피로 범벅이 된 왼손으로 피터의 손을 잡았다. 피터와 나는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미스터의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편안하게 웃었다.

“미스터, 어떡하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오른팔을 등 뒤로 뻗었다. 문고리가 만져졌다. 살짝 손에 힘을 쥐어 돌려보니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화사한 미소를 내보이면서 등에 힘을 실었다.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당신은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싫은데.”

우리는 재빨리 문을 쾅 닫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우리가 딛고 있는 곳이 진짜 세상이다. 모든 것이 조작되어 매초마다 사람들을 기만하는 바이오스피어 따위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부터 무얼 해야 할까. 돌아갈 기숙사도, 집도 없는데. 어디로 향해야 할까. 어디로 걸어야 더 이상 지치지도 울지도 않을 수 있을까.

눈을 들어 새까만 하늘을 보았다. 가로등과 건물에 불이 빽빽하게 들어온 사이로 피터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달이 있었다. 누구도 달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것만이 달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멍하게 하늘처럼 새까매지기만 할 뿐. 그게 차츰 달을 닮아가 붉어지는 건지도 모르고.

레드 앞에 붙는 정관사는 더, 라고 발음해야 할까, 아니면 디, 라고 발음하는 게 옳을까. 우리는 달을 처음 본 순간 말하지 않아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빨강은 그 자체만으로 빨강이 될 수 없으니 더 레드라고 발음하는 게 옳다고.

그건 곧 은색이 될 레드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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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와 D 사이 C가 없는 세계의 중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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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나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나을까

도망치기 전에도 버려질 준비를 하는 게 나을까

 

물은 더 낮고 나쁘게 나아지고

서로가 더 가깝고 기쁘게 가여워지고

 

오래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라도 충분한 주사위는 있겠지 처음부터 간지러운 뺨을 문지르다 보면 어쩐지 겨울은 달콤해지고 우리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그러나 빛나고 단단한 아류처럼

 

발소리가 무너진다 세상이 제한되는 동안 빨간 목도리를 뜨기로 약속했는데 모두가 다정한 고아가 되어 구멍난 외투를 둘이서 걸치고 세 다리로 걸으면 두 손을 맞잡고 꼭 살려달라고 기도를 해야 할 것만 같아

 

차라리 나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나을까

도망치기 전에도 버려질 준비를 하는 게 나을까

 

유기된 복숭아뼈가 있다면 기르지 말아보자 내가 너를 떠올려도 더 이상 토슈즈가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나를 끝까지 망칠 수 있는 건 지젤뿐이고

 

살았던 시간 속에 잠기는 건 어떤 기분이니

죽은 꿈 속에서 헤엄치는 건 어떤 기분이니

 

자꾸만 가벼워지는 기분이지 묵시록을 더듬다가 겨우 한 줄을 깨뜨리는 육각형같이 용서하기에는 우리가 함께 목매려던 시간이 길어서 불길하고 교묘하게 돌아눕던 가시가 돋아나서

 

물의 손금을 파헤치고 싶어

더 이상 유령이 단순해지면 안 되는데

 

그믐마다 데칼코마니를 하고 싶었다 달이 탄다고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해의 총량을 늘리고 싶지 않아서 테두리를 밟다가 주문처럼 외우는 미안은 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한 번만 뱉으면 정말 어둠처럼 납작해져 죽을 것만 같다고 뺨은 미열처럼 붉어진다고

 

슬픔에 젖은 솜사탕처럼

불온전하게

수영도 못하는 미아를 깊숙한 여행으로 내몰 때

 

이제는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만 확실해질 꿈을 꾸겠지

나는 더 나빠지고 싶어 탐미적인 기분으로

 

도망치기 전에 버려질 준비를 하는 게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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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의 쌍둥이를 밀물처럼 찾아다녔어 불어나는 우리 몫의 이명들, 새벽에 날아오른 개미가 집을 잃었다 왼손으론 세계의 선별된 반절을 받아쓰고 오른손으론 배회하는 나머지 반절을 가렸지 떠다니는 우리는 두 개의 정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쪼개어지는 두 개의 오답이 되어, 언니 이제 나는 우리라고 가로로 불리기 싫어요

 

사실 유리창은 온종일 산만하지 그러나 우리는 재차 스마일을 덧그릴 수밖에 없었다 물렁해질 대로 물렁해진 발뒤꿈치는 폭죽처럼 부풀고 가까운 우리의 머리 가슴 배 자꾸만 목을 조르는 소문이 있어 우리가 개미의 눈을 빼앗아서 이렇게 태어났단 거 말야 모든 우연은 언젠가 따로 떨어져 견고해지지

 

눈을 감고 네 목소리만을 따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언니, 우리는 또 어디를 나는지도 모르는 채로 열망들을 풍선에 집어넣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통째로 삼키잖아 귀가 멀어도 걸어왔던 공중의 부서짐을 들어요, 유리 같은 손끝들을 부비면서 우리 공명에 깨져버릴지언정 젖지는 말자 불온하고 불안한 서적들아

 

그러나 나는 압착된 유리조각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갓 찍어낸 쓰레기봉투 정도의 질감으로 , 온전하다는 건 살아있지 않다는 뜻이지 미래가 과거로 어김없이 치환될 때 쏟아지는 신열을 앓고 뒤꿈치에서 언니가 걸어나간다 입 맞추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들을 헤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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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ppel du v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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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치아로 서문은 만들어지나 내가 선을 그을 때 어떤 네모가 더 이상 네모가 아닐 때 어떤 바다가 더 이상 바다가 아닐 때

 

나는 잠들기 직전을 좋아하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표면의 광택이 질려버릴 때에도 선물은 착실히 포장당하지

 

취향은 해변을 따라 바스라진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더 울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네가 되었다가 여주인공이 되고 딱총나무 지팡이로 변하고 마틸다처럼 차려입고 리볼버가 되고 크림브륄레가 되었다가 다시 모래에 발자국을 찍는다

 

우리가 진정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진실을 녹여 넣어보는 것 벨라도나처럼

 

너는 또 누군가의 진정을 위험하게 씹고 있다

누구의 선지로 요트는 만들어지나 나는 나의 반밖에 견딜 수 없는데 모두 커다란 부표만 맹신하고

 

천천히, 라고 말하면 어쩐지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고

덤비지도 못하는 혼혈이 되고

 

강당에서 손을 들었다 파도를 낭독하는 순간부터 없던 실체마저 잃어버렸다 우리는모두결여된소식과

 

그만둬, 그만두라고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더 굳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정말로 흉내라도 내고 싶어서

언제나 또 리본을 묶고 또 편지를 기다리고 남은 시간은 시간도 아닌데

 

그래도 우리 모두가 참여한 표절과 표정

요정의 말버릇은 우리, 우리, 우리와 우리

 

종아리와 우리, 정강이와 우리, 무릎과 무릎과 우리, 뺨과 우리, 발바닥과 손바닥과 우리, 사랑해, 그건 또다시 우리, 머리카락과 손가락과 우리,

 

정의가 없는 것들에게 정의가 생겨날 때 적의를 덮고 잠드는 밤도 있을까 우리가 없는 것들에게 우리가 생겨날 때 세계를 덮고 지새는 밤도 있을까

 

철자가 달라져도 단어는 단어라서

앞뒤를 바꿔 읽으면 반대가 되는 무책임한 단어를 너라고 부르기로 하고

 

우리가 친절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잠자리에서 화병에 잠긴 진정제의 갯수를 가늠하고

 

순례길에서 누군가를 찾으면 누구는 더 이상 누구가 아니지

눈동자가 얼마나 커졌는지 물으면 나에게는 눈꺼풀이 소용없어요 헤아리는, 복종의 여파만큼이나

 

나는 잠들기 몇 초 전의 비좁은 구유를 좋아하는데

 

그래도 야자수를 피해 걷는 밤이네요

다행이야, 거짓말해도 혼나지 않는 날이라서

 

* 하지만 이유없는 충동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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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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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주세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견출지에 델타성의 이름을 적어 버렸어요 비도 오지 않는데 온통 젖어버린 나를 누가 흰긴수염고래에게 데려다 주고 싶겠어요

 

책상에 앉는 괴짜가 세계처럼 불어나는 편애를 알아요 의자엔 포장된 예비종이 말끔하고요 하나같이 나른해지는 후드들의 타살이었죠 그래도 빨간 모자를 쓰면 어느 선분의 닻에 걸릴 것만 같았단 말이에요 갑판 위에 올라가면 어느 종이비행기가 나를 지나칠 것만 같았단 말이에요

 

모비딕 모비딕 우리는 한밤중에 교복을 입어요

모비딕 모비딕 우리는 한밤중에 춤을 춰요

 

빼곡히 붙은 포스트잇이 싫어요 칠판 안에 갇힌 댄서가 싫어요 자꾸만 탭을 외치는 슬리퍼도 싫어요 물구나무를 서서 듣는 수업도 싫어요 나의 아프고 어리숙한 손가락도, 꼭 누군가는 연기 없는 영화가 되고 버블건을 겨누는 스크린 뒤, 파도가 자꾸만 둥글어지는데 운명이 자꾸만 서툴러지는데

 

그래도 나는 당신이 싫어

그래도 아름다운 당신은 나쁜 꿈을 꿔

 

어쩔 수 없어요 꽉 끼는 등대가 흰색으로 비칠 때마다 나는 조만간 뛰어들 계획을 세우고만 싶은걸요 낮은 천장에 박힌 야광별은 늘어나도 늘어나도 파도에 몽땅 떨어져 버릴 걸 아는걸요

 

바다를 열면 바다, 바다를 접으면 헐벗은 우리, 교실의 창문을 활짝 열어요 풀지 못한 파도들을 절반만 접을게요 너의 선물은 솜사탕이고 나의 선물은 나이프겠죠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거지) 사라진 리본을 건져내는 동안 눈금은 점점 짧아집니다 어쨌거나 수몰된 별들을 앞니로 한 입 베어물면 짠 결정들이 돋아나는데

 

새로 자라지 못할 살갗들을 눈꺼풀 속에 감춰두면

잠겨버린 맨발처럼 퇴화한 아가미

 

우리는 이토록 순결해져야만 하나요

모조리 깎여나갈 귀퉁이들을 위하여

 

용서해주세요, 나는 오늘도 돛대에 매달려 복습했던 슬픔을 다시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희고 단단한 맛이 죄라면 모르겠다고 대답해도 괜찮을까요 밖과 밖을 구분하는 원은 도대체 어디쯤을 걷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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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글레이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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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가르면 쏟아지던 플랫들 잉크를 껴안고 마젠타 케이크로 뛰어내려보기도 해야지 설탕 손톱은 대문자로만 쓸 수 있어 성장을 거부하면 발목의 리본이 길어지고 그러나 우리는 발자국이 없는 돌연변이, 발끝을 주름에 묻으면 박탈되는 자격들 내가 엎드리면 척추에선 희고 환한 무언가가 자라나는 것 같아

 

표류하는 계절들은 다 우습지 포장지가 창문에서 태어날 때마다 적당한 열기를 찾아 나선다 오늘은 통증에게 유에프오처럼 인사해볼까 여기는 여름인데 나는 있다가도 없고 너는 없다가도 얼어붙는다 너를 열면 네가 다치고 또 너는 점점 뜨거워져야지 빈칸을 뛰어넘는 입술이라서 야광별을 깨무는 달콤한 시술이라서 혀끝에서 혀끝으로, 열병을 담은 토슈즈는 수평으로 내리는 비처럼 옮아가고 손바닥에선 까마귀가 돋나 봐

 

여기서 우리 둘 중 하나만 코팅된다면… 어떤 어지러움은 전희를 통째로 잃어버리기도 한다 눈의 미뢰가 단단해지는 동안 너는 예쁘게 미쳐버리는 법을 알지 근처의 근처, 기구해지는 근처의 손가락, 머리카락을 담는 근처가 난처해지면, 또 우리는 어떤 연민을 먹고 사는 세대인가요 그런 말을 하는 너희는 꼭 연인들 같아 혀끝은 여전히 높은음자리표를 기르는데 너는 여전히 평평하지 않은데

 

방금 삼킨 건 유통기한이 지난 면사포 아직, 하고 발음하면 눈물이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지 익숙하게 뭉치는 결정들과 일정하게 발발하는 난반사들 나는 거꾸로를 잘해요 나는 거짓말을 잘해요 네 알약은 파랑이고 내 알약은 노랑이에요 서로의 부적합한 각도를 가장 잘 알고 있어요 함께 미끄러지고, 멀어지고, 이해처럼, 죽음같이, 중심, 벌려진 입과, 천칭을, 몽땅, 아직 춥지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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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볼 발푸르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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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볼 발푸르기스

 
사실 그건 접힌 옷 사이로 휘어져 돋아나는 긴장들이지. 디온, 나의 만들어진 신. 맨발로 루비를 깨뜨린다. 꺼뜨려진 꿈들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달라붙었다. 연한 성수에 네 목걸이를 뿌릴게. 숲은 보이지만 디온은 숲이 되겠다고 했어. 반복은 물구나무와도 같은 것이라서. 각자의 겹을 이파리 사이에 숨긴다. 찬란하게 무너지는 프랙탈이든 어제의 미친 사육제든 왜냐하면,

 

형언하지는 말자. 대신 세리프의 각도로 직조된 동선을 끊어버리자. 말하는 모자를 써 봐. 말하는 무릎을 알아. 말하는 수심을 알아. 그것보다 깊이 다이빙한다. 디온은 발레를 춘다. 아이스크림이 끓는 원반 위는 춥다. 바닐라, 바닐라, 용서를 외우다 보면 닳아 버린 손이 매워서 울게 되지. 너의 결정은 어떤 동물을 닮았을까. 다음 생에는 달콤하게 태어나고 싶어. 입을 열면 그동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만. 네 발끝에선 사방으로 녹은 루비가 튄다.

 

누군가는 빨간 구두를 건네지만 디온, 걔는 마녀가 아닌걸. 너는 루비를 수급해야만 해. 그러므로 디온은 뛰어오른다. 않는 기억들. 없는 기억들. 너는 아무것도 몰라. 힘을 모아 할 수 있는 거라곤 샴고양이를 껴안는 것밖에 없거든. 말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토슈즈는 차차 허약한 발목으로 기울어졌다. 모두가 미아가 되는 날엔 울지. 너는 매일매일 미안해하고 디온은 매일매일 괜찮아하다가 둘로 나뉜다.

 

차라리 주어와 키스를 해.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거겠지. 이제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체리꼭지를 물면 기다렸다는 듯이 없는 이름을 없애고. 너는 둘. 너는 하나. 이해는 조금 아껴두는 편이 낫겠지. 야옹이 너와 너 사이로 지나간다. 디온과 디온의 간격은 소량의 눈꺼풀과 튀튀만 있으면 된다고. 복사의 원본은 어디로 사라지고 너희 둘만 남았어. 몰라요. 몰라요. 따라하지 마. 따라하지 마.

 

다리미는 필요없다. 포옹이라는 단어만 있으면 너는 조금 더 냉정해지고 너는 조금 더 단단해지지. 우리가 재배한 조명을 꺾어 오독오독 먹어보기로 하자. 닮은 행성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너는 빛날수록 점점 더 작아진다. 빛만 난다. 똑같은 속도와 다른 무게로. 그건 너와 너 사이에 놓인 기적에 중독되었다는 것. 힘주어 발음할 슬픔이 남아있었다는 것. 구분할 수도 없잖아. 얼마나 춤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눈동자로. 여전히 너도 짓물렀구나. 이제부턴 숲을 나무라고 부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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