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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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 몽블랑 세 번 휘젓고 난 네가 지치고 병들어서 좋아

 

루는 레이스를 거꾸로 뒤집고 마구 짓눌렀다 조각나는 담배 연기와 응결하는 레드벨벳 컵케이크 쉿 누설은 죄야 너는 구원받지 못할 걸 발코니에서 총을 난사하고 목을 조르는 사랑스러운 대니 그는 루의 손을 씻지 루의 손은 과거 같아서 마지막 현재까지 난폭하게 집어삼키고 손가락 위로 돋아나는 생크림 불온한 데카당이 아닌 날개 달린 천재로 박제될래 성서를 토막내고 한 구절에 목매달고 싶어 대니는 칭얼거리는 루의 손을 성수로 한 번 더 헹구지

 

손바닥만 하얀 대니는 머리카락만 까만 루의 목에 기대고 우리 이제 좀 더 달콤한 것을 나누려고 너의 구부러진 무릎에 코코아 파우더를 뿌리고 너는 나의 잃어버린 오른손 다섯 번째 손가락에 너의 혈액을 그어줘 루는 기침을 하고 대니는 기침을 참고 아프고 병든 서로는 서로를 알 수 없는 전염병같은 것으로 규정하고 난 평생 시시한 연애 밖에 못 하는 걸까? 대니는 각혈을 하지 루는 가난하게 그를 사랑해 빈약한 그들의 밤은 관객에게

 

(막이 오르고 그들은 발코니에 섰지 달도 없고 대니의 살결같이 루의 머리카락같이 그런 밤 속 서로의 눈을 가리는 두 사람 발코니는 사라졌지 세트장은 무너지지 지구는 반으로 갈라졌다 관객들이 손뼉을 친다 관객들이 큰 소리로 웃는다 루와 대니의 눈이 굴러떨어지고 있다 아주 깊은 내부로 침잠한다 막이 내린다 관객들은 입꼬리를 찢는다 티켓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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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막하출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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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담을 넘었지

우리는 하이웨이 위를 걸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수천 명의 우리들이 격자로

차곡차곡 망하고 있었다

 

 

너는 쓰러졌지

9999번째 나의 위로

결국 우리는 만 명이 되었고

너는 우리들 속에 망명했다

쓰러지는 너의 눈동자가

정말 태연해서

나는 다시 달렸다

하이웨이의 밑바닥으로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결코 닿을 닿을 수 없는

친절한 너의 목소리가 나에게

불행을 나열하는 습관은 최악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의 세상은 죄였다

죄의 값을 치러야 했다

문을 열기 전 허벅지에 손바닥을 비볐다

횡단보도의 흰 줄은 밟지 않았다

침은 소리 내서 삼켰다 숨은 소리 내지 않고 뱉었다

 

 

나의 죄는 죽을 수 없다

나의 죄는 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속죄는 죄가 되었고

눈동자 아래로 빨간 줄이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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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안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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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숙제는 혼동되는 어휘를 구분하는 것

 

제제 혹은 앨리스가 되는 낱말을 깨물어도 괜찮다고

삼월을 제곱하는 법을 모른다면

차라리 더해도 좋아

호흡과 숨 쉬는 법은 다르다고 소리를 지르는 써머는

 

열대야 속 써머는

종종 달 모양 크레이프를 깨물지

달 표면 위 크레이터 사이로 추락할 거야 춤을 추면서

입술로 새어나가는 뱀의 꼬리는 방식이 아니라 예절을 만들 뿐
여름은 너무 쉽게 요절했지만

여전히 복숭아 껍질은 애달프게

 

우리는 가장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법을 알잖아
손금으로 운동화 끈을 대신하고
근데 이 달력이 정말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이어폰 줄이 엉키면 풀기도 전에 자르는 써머는

 

네 천박함을 사랑해 나는 어딘가 돌았고 선풍기는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손에 쥐가 났다며 손을 주물 거리는 써머의 창백한 여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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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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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도 우체통도 창문도 모두 계란 후라이*

결국은 다 사각형으로 저장하세요

어차피 파란 불에만 건널 수가 있는

등교길의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외로워서

 

자 다시 알람을 다시 맞추고

발걸음을 핸드폰의 진동음과 맞추고

지난 해의 문자를 복구하면서

저는 지난 해의 후라이를 복기하는데요

 

(화장실 모서리에 얼굴을 박고

어쩌다가 어제의  파랑을 쏟아버렸어

품을 줄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부활절 달걀을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고서는

그 애가 다시 태어나길 그 애가 다시 태어나길

죽도록 빌고 있는데요)

 

자 다시 모든 걸 리셋하고

빗물과 악수하는 거엔 소질이 없었던 나는

다만 그 채팅방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가득하고

선생님 저 이제 모국어가 어려워요

 

이빨에 까만 수박씨가 붙은 듯

한 쪽 이가 빠진 채로 실실 웃던 걔를

저는 씹어요 저는 뱉어내요 저는 그냥 저는

유난히 푸른 척을 하던 흰자를 저는 그냥 저는

폭력을 기록하던 보라색 손을 저는 그냥 저는

이제 삭제 영구 삭제 기록 삭제 처참하게 삭제

 

(유서를 썼는데 아직 제출을 못 했어. 걔는 이렇게 속삭이고는 참 똑똑한 당신. 난 이렇게 떠벌리고는)

해변도 우체통도 창문도 모두 계란 후라이

결국은 다 사각형으로 저장하세요

모든 문자는 사각형

불면의 밤들은 사각형

모든 다정함의 폭격은 사각형

알고보면 거짓말들은 다 사각형

마지막 주먹은 다 사각형

해독 불가의 사각형*

 

*재생 / 네 다정이 나를 / 마지막 불을 / 미치도록 / 치마를 접어 입던 / 아프도록 / 혼자 / 어쩌면 / 이별 이야기를 중얼거리다가 / 폭력과 / 터지고 / 부풀어 / 하얗고 / 노란 / 정지 / 재생 / 너는 알고 있었잖아 / 삭제.

*error 해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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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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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안녕을 하고 있어요 두 손으로 방긋방긋 웃으며 입꼬리가 단순한 제가 미워서 머리카락을 뜯어요 나는 능숙하게 자라난 숙녀니까요 항상 어제가 오늘보다 더 빨리 결승점에 도달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가끔 목이 부풀어도 괜찮아요! 이제는 풍선껌을 가장 큰 소리로 씹을 수 있으니까요

 

블루베리 괴물과 커플 레이스 파자마를 맞췄어요
가끔은 눈두덩이에 멍이 들어요 점점 블루베리를 닮아가요 사랑은 못된 방법으로 전염되나요  그렇다면, 숙녀가 되는 건 어려워요

 

일부러 어려운 책을 읽어요 꾼 적도 없는 꿈을 해석해요 철학자의 말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요 몇 번이나 보라색 형광펜을 칠해요 모르는 문장을 보면 책을 거꾸로 쥐고 책은 도끼래! 그래서 손목이 쿡쿡 쑤시는 걸까 그래도 괜찮아요! 저는 숙녀! 저는 숙녀니까요!

 

어려운 걸 쉽게 보는 법을 알았어요
이제 제 손목은 건조해요

설탕 입자와 먼지들이 둥둥 떠다니는 대기 속에서

결국은
숙녀

너무 일찍 늙어버린 마음을 능숙하게 속여요

저의 미성숙함을 불투명하게 불러요

향수를 뿌리고

아이스크림은

후후

불어서

꼭꼭

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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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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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우리가 차라리 지독한 길치라면 좋겠어 근데 우리는 자꾸 기억한다 모든 걸

 

후드득후드득 스타카토

캐럴의 엇박자가 공중에서 날개를 펼치다가

동공에 박혀

떨어지는 파란 박자의 깃털을 악보에 가둔다

 

트리 장식의 날카로운 꼭짓점으로 머리칼을 다듬다가

 

크리스마스인데 선물이 없어
슬퍼?

오빠와 나는 파랗게 울지

 

 

오빠

우리는 어디에 있다 아니 어디에도 없어 어디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부서진 스타카토의 잔해가 너의 눈가에 묻어날 때

 

나는 전화를 건다

모르는 눈사람이 전화를 받는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의 엉터리 학설에 젖어버려서

나의 상념을 접어두고

 

BLUE BLUe BLue Blue blue blu bl b

Bird

 

어떡하지 나는 깨달음이 항상 늦은데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은 뭘까

어른이 되는 게 가능은 할까

 

조금 짧은 꿈을 꿨어 이불이 찢어졌고 창문은 열려있다 의자에 눈사람이 앉아있어

 

 

눈사람 
자꾸 깨어나는 것이 있잖아 아가야 어떡하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엄마와 아빠는 새장에 갇혀있어
바들바들 떨면서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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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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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난 내가 외로울 때 인사를 건내는 사람을 싫어해
언제쯤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제쯤 너를 해할 수 있을까

 

구식이야 너는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서간문 쓰지 마
창문 앞에서 불꽃놀이 보며 다정한 척 하지도 마
차라리 계속 울게 내버려둬
음악을 재생해 Supersonic ₁

넌 날 존중하는 법을 몰라

 

축축한 곳에 가고 싶어 푸른 등을 가지고 싶은 우리는 백사장에 소원을 흘리고 도망가고 나는 싸가지 없는 숨구멍을 가졌어 자꾸 숨이 어려워

 

쇼트 케이크를 먹었고 촛불을 불다 폐병에 걸렸다 죽어가는 불씨를 모래성에 처박는다 모래성은 밖에서 안으로 성실하게 무너지고 너는 내 생일을 까먹는다 나는 자주 달력을 찢고 내 생일은 2년에 한 번씩 너의 생일은 2주에 한 번씩 찾아온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₂

 

벌써 우는 거야? 네가 묻지

아니 울지 않아

울 날은 앞으로도 넘쳐흘러
그래도 우리는 다만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₁ 야 짜피 우리는 별 의미가 없었잖아 But… I need to be myself, I can't be no-one else

₂  해피 버스데이 따위. 다 망했으면 좋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야아… 네가 왜 울어? 정말 내 생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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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서리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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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흩어지는 모든 시간들을 억지로 붙잡을 생각은 없어. 여름날의 환영들과 그 기록은 나에게 아주 멀리 또 아주 가까이에 있거든. 우선 나의 모든 악상을 엿본 네게 애정 어린 감사의 인사를. 내가 지금 뱉는 모든 음절도 이 연주들의 일부라고 생각 해 주길. 내 젊은 날의 경성을 너도 살짝 엿보길. 나는 아직도 매일 그 날의 꿈을 꿔. 이름과 언어와 예술을 모두 잃은 채 영감만 남았던 그 시대를. 이제 정말 시작해볼게. 첫 곡은 늘 그랬다시피. 네가 가장 좋아하는.

 

히카루는 항상 피아노를 친다.

화열은 홀로 극장에 앉아 있다. 히카루는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 건반을 툭툭 건드린다. 건반 위에서 위태롭게 춤추는 희고 얇은 손가락. 히카루는 견고한 곡도 휘청거리며 연주하는 재주가 있다. 그녀는 경성의 피아니스트이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열은 그 입술에 제 입을 맞추고 싶다 생각했다. 희고 분홍빛이 감도는 살결 위에 진분홍 쉬폰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복숭아 같다. 히카루는 온통 여백인 백지를 보듯 음표가 빼곡하게 채워진 악보를 몽롱하게 응시한다. 끝 음이 한 없이 빨라지고 중간 중간 쓸모없는 플랫이 가득하다. 심지어 같은 악장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탁. 타닥. 탁. 타닥. 타닥. 탁. 히카루의 음악은 복숭아의 과즙. 피를 달작지근하게 만든다. 탁. 타닥. 탁. 타닥. 타닥. 탁. 피아노의 음성에 화열의 심장이 팽창하며 발화한다. 가변적인 악곡의 박자에 맞추어 화열은 손가락을 까닥거린다.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뭐든 히카루에게 맞추기. 화열은 가끔 히카루와 같은 박자로 숨쉬기 위해 애쓴다. 일정하게 부풀어 오르는 히카루의 앙상한 갈비뼈 부근을 생각하며. 여전히 그녀의 박자에 몸을 맞춘다. 다정하고 불길하게 이성은 자꾸 투명해진다. 광야를 달리듯 빠른 손놀림이 멈추고 나서 히카루는 피아노 옆에 나란히 선 후 화열에게 조용히 목례한다. 장난스럽게 살풋 웃어 보인다. 화열은 그런 히카루가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히카루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연주가 아닌 이야기

또 이야기가 아닌 연주이기도 해

히카루는 건반 대신 자신의 무릎에 희고 얇은 손가락을 얹는다. 히카루는 피아노의 가장 높은 음을 닮은 목소리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피아노의 가장 낮은 음과 같이 말한다. 낮고 진중하게. 작게 진동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퍼져나가는. 히카루는 동화책을 읽듯 스스로의 기억을 읽는 방법을 안다. 히카루는 눈을 감는다. 그 눈 위로 조명이 쏟아진다. 그 덕분에 히카루는 눈을 감고도 분홍을 볼 것.

 

내 첫 악장은 이제야 시작이야

 

 

길에서 태어났어. 그런데도 빌어먹게 자꾸 길을 잃었어. 너 그거 아니? 애초부터 길을 잃은 자들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 해. 길을 잃은 어른들을 많이 봤어. 그들은 하나 같이 이름이 없었거든? 그래서 서로에게 비공식적인 이름을 부여했어.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몰래 엿듣고 그걸 훔쳤어. 그들이 발음하는 이름은 대략 이러 했어ㅡ마사꼬, 신쯔케, 츠까사. 그 어른들은 이름의 한 부분을 굳이 강하게 발음했다? 모두 앞니가 없었거든. 그들이 약하게 작은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는 꼭 바람과 같다고 난 종종 생각했어. 그들의 말은 입에서 옅은 미풍처럼 불어와 공기 속에 섞였어. 그 어른들의 몸에서는 쓰레기 냄새가 났어. 나도 마찬가지였어. 악취를 제외한 향을 몰랐어. 또, 어른들이 새벽에 매일 훔쳐오는 썩은 빵과 주먹밥을 제외한 다른 음식을 전혀 몰랐어. 엄청 웃기지. 그래도 난 그 썩은 빵과 주먹밥을 먹으면서 자라났어. 머리칼도 풍성해지고 키도 몇 뼘이나 더 자랐어. 가슴도 커졌고 쇄골도 선명해졌어. 14번째 생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받았어. 새벽의 어두운 골목에서 14번째 생일을 축하받았어. 내 이름을 처음으로 발음한 아줌마는 4년째 똑같은 누런색 누더기 옷을 입었고 앞니 두 개도 이미 다 빠져있었어. 또 피부에는 붉은 점이 빼곡했고 손톱은 없었어. 그리고 눈이 아주 붉었어. 아줌마는 지나가던 순사에게 자주 맞았어. 또 말을 더듬었지. 가끔 내 눈조차 쳐다보지 못하고 벌벌 떨었어. 난 그 아줌마가 싫었어. 더러웠어. 나도 아줌마처럼 될 것 같아서 무서웠어. 그래서 그 아줌마를 자꾸 외면했어. 어쨌든. 그 아줌마는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어.

음 네 이름은 히, 까루 히까, 루란다 저어기 저, 푸른 지붕 집에 사,는 아가, 씨 이,름이 히까루야 노오란, 색 치마에 붉,은 뺨,이 얼마나 예쁜지 나,는 알지 히까루, 너도 히,까루 아가씨처럼 곱게 자,랄 거야 나는 알지 네, 가 얼마나 고운지

너, 너는 나,처럼, 되지 말,어라 알, 겠지, 응

 

그 날부터 히카루가 되었어. 그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어. 그 이름의 뜻을 아주 커 버린 후에야 알게 되었지. 어쨌든 난 이름을 가졌어. 그 의미는 이제 나도 어엿한 어른이라는 것. 이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위법 행위를 저질러야 한다는 것. 왼쪽 눈꺼풀이 떨렸어. 배가 너무 고팠어. 도둑질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내가 괴물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끝이 다 닳은 다홍색 치마를 두어 번 걷어 올려 손에 꽉 잡았어. 손이 좀 작은 편이라 자꾸 치마가 손에서 벗어났어. 고개를 푹 숙였어. 그리고 천천히 골목을 벗어났고. 그렇게 골목을 벗어난 까닭은 무언가를 훔칠 빈 집이나 작은 가게를 찾아내기 위함이야.

 

고개를 들고 주택가를 응시했어. 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았어. 차라리 다 떨어져 줘. 이 경성으로. 내가 괴물이 되기 전에. 완전한 어른이 되기 전에. 지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종종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가끔 손목에 유리 조각을 가져다 대곤 했어. 그 뿐이야. 내 몸에 상처를 입히는 법을 전혀 몰랐어. 그저 매일 기도를 할 뿐. 이런 생 따위 그만 끝내도 좋아. 기왕이면 후생은 없었으면 좋겠어. 가끔 생으로부터 멀리 도망쳤어. 그런데도 생은 항상 다시 나에게도 걸어오더라. 자박, 자박, 자박.

아줌마는 항상 나에게 생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어. 이 모든 건 꿈. 죽는 순간 빙과처럼 흘러내리는 꿈. 난 빙과가 뭔지 몰랐어. 그래도 아줌마의 말을 믿었어. 딱 그 말만 믿었어.

 

노란 대문, 파란 대문, 나무로 만들어진, 고철로 만들어진, 허술한 대문, 견고한 대문. 어쨌든 거의 모든 집의 대문이 꼭 잠겨있었어. 세상이 위험했거든. 아니 지금도 위험한가? 어쩌면 더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한 집 건너 일본인이 살았던 주택가였어. 서로는 서로에게 자꾸 다정한 척을 했어. 실은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난 아직 어렸지만 세상 물정은 꽤 잘 알았어. 일본인 집을 구분하는 법은 이미 한 아저씨에게 배웠어. 그 아저씨는 맨날 칼을 들고 다녔어. 난 그 칼로 대체 아저씨가 무어를 할까 항상 궁금해 했지. 어쨌든 그 구분 방법은 간단해. 일본인 집의 마당에는 봄이면 희고도 연한 분홍빛의 벚꽃이 피어나는 벚나무가 한그루씩 심어져 있어. 나는 일본 사람들이 항상 무서웠어. 그 사람들이 하는 말, 나는 다 알아 들었거든. 길거리에 사는 어른들도 그들을 무서워했어. 그 어른들도 일본어를 다 알았어. 최대한 낡고 어두침침한 집에 몰래 들어가서 음식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어. 밝고 따뜻한 것보다 어둡고 축축한 것에 익숙함을 느꼈거든. 난 천천히 한 집 한 집 대문을 살폈어. 키가 대문보다 작은 탓에 그 안의 광경은 차마 살피지 못 하였어. 그러다가 한 집에 문뜩 눈길이 갔고. 그 집에는 대문이 없었거든. 주택가에서 가장 크고 또 견고해 보이는 두 현대식 주택 사이에 자리 잡은 판자집이 기이했어. 나는 식욕보다 호기심이 앞서는 마음으로 판자집의 문을 열었어. 손잡이도 없어서 문을 애써 손으로 끙끙 밀었다? 나무의 촉감이 축축했어. 어울리지 않게 그 집 주변에는 꽃향기가 풍겼어. 믿겨져? 꽃이 단 하나도 심어져 있지 않은데도.

집 안의 구조는 단순했어. 왜냐고? 그냥 텅 비어있었거든. 조명을 켰는데도 방이 어두침침했어. 조명의 샛노란 빛이 이질적으로 느껴졌어. 조명은 천장만 겨우 비추고 집안 곳곳을 비추지는 못 했어.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건반이 몇 개 빠진 피아노가 있었어. 물론 그게 피아노라는 사실도 한참 뒤에 알았어. 음, 그냥 검고 큰 물건. 그렇게 생각했어. 검고 큰 물건 옆에는 무용신이 놓여 있었어. 밑바닥이 다 닳아있었어.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걸 몇 번이고 어루만졌어. 몰라.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 그리고 솜이 다 터진 이불 몇 개. 단출한 옷 몇 벌. 음식은 단 하나도 찾지 못 했어. 너무 억울했어. 첫 도둑질인데 건진 게 하나도 없다니. 난 어른이 되긴 글렀다고 생각했어. 제길, 오늘은 굶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집에서 나오려고 했어. 그 순간, 검고 큰 물건이 눈에 걸렸어. 이건 분명, 훔치면 큰돈이 될 거야. 그 생각이 먼저 들었어. 그래서 그걸 들고 집에서 나와야겠다고 결심했어. 근데 그건 너무 무거웠어. 칼쟁이 아저씨보다도 아줌마보다도 저번에 어떤 오빠가 나에게 던진 돌맹이보다도. 그리고 문도 너무 작아서 그걸 들고 나갈 수가 없었어. 아쉬움에 검고 큰 물건을 한참 노려봤어. 순간,

 

저기 누구……

 

나를 경계하는 낮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어. 화열아, 네가 항상 그러잖아. 난 피아노의 가장 낮은 음처럼 이야기한다고. 그러면 난 항상 부정하지. 왜 인 줄 알아?

 

누구십니까.

 

서툰 억양으로 일본어를 뱉는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거든. 피아노의 가장 낮은 음을 닮은 그 목소리. 나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은 소리. 이상하게 친숙함을 느끼는 소리. 이젠 아무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리.

 

안녕.

……

당신 일본어가 서투신가 봐요

아무래도 쓸 일이 별로 없으니까

저는 당신 집에……

 

그는 살짝 긴장이 풀린 듯 나를 빤히 쳐다봤어. 난 이상하게도 당돌해져서 그를 자세히 관찰했어. 아마 나이는 스물. 얇고 찢어진 눈 주변이 참 붉었어. 눈동자는 희고 맑았지. 그의 머리는 조금 길었어. 아마 한참 동안 다듬지 않은 것 같았어. 또 입술 끝은 살짝 올라가 있었고 뺨에는 길게 흉터가 있었어. 얼굴과 목의 피부는 창백하고 분홍빛이 도는데 손은 참 까만 빛을 띄웠어. 그는 서 있는 자세가 신기했어. 꼭 곧 하늘을 날 것만 같이. 새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는 낯선 것에 약간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 허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지.

 

당신 집에 음식을 훔치러 왔어요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어. 그리고 살짝 웃었어. 낮은 목소리. 꼭 시를 읊는 것과 같이. 어떡해. 우리 집에는 달리 먹을 것이 없는데. 나도 대꾸했어. 그러게요. 왜 없어요. 하필이면 당신 집에 먹을 게 없어요. 그는 다시 웃으면서 말했어. 그러게. 없네. 저 정말 가진 게 없어요. 왜 하필 우리 집으로 왔어요. 난 또 대꾸했어. 당신, 당신도 나처럼 가난해요?

 

아마도

저기 저건 뭐에요 태어나서 저런 건 정말 처음 봐요

뭐?

검정 또 하양 엄청 큰 거

피아노

피, 아, 노

저걸로 도대체 뭘 하는데요

소리로 모든 걸 표현하지

어 한 번 눌러 봐 저기 하얗고 검은 사각형들

 

그 건반을 살짝 눌렀어. 곧장 맑은 소리가 울렸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어. 몇 번이고 건반을 두드렸어. 그는 그건 도, 그건 레, 그건 미. 그렇게 음의 이름을 알려줬어. 원한다면 가끔 와도 좋아. 너 피아노 더 치고 싶잖아. 솔직히 … 이젠 칠 사람도 없으니까. 질릴 정도로 한 번 쳐 봐. 기꺼이 들어줄테니. 그의 말에 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어.

 

히카루에요

응?

제 이름이요

당신 이름은 뭐야?

 

그는 발걸음을 옮겼어. 하늘로 도약하듯 길게 손을 뻗으면서. 살짝 눈을 감고 그는 나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어. 우아했어. 모호한 선이 고왔어. 그는 사뿐히, 사뿐히, 사뿐히. 나에게로 왔어. 그런 동작은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라. 익숙하지 않은 부드러움이 나는 살짝 무서웠어. 그는 눈을 다시 떴어. 그의 걸음걸음마다 꽃이 피어났어. 붉고 푸르고 하얀 꽃들. 작은 꽃잎이 그의 그림자에 스쳐 뭉개져. 그리고 그 향기가 사방을 적셔. 덕분에 그에게서는 꽃향기가 났지. 아마 너는 믿지 못 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다 진짜라고. 그는 참 예뻤어.

 

멜서리.

나는 춤을 춰. 그가 속삭였어.

 

 

그래, 아마도 딱 이틀 후에 너를 만났지. 지금 네 표정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잘 모르겠어. 어쨌든 화열이 널 봤었지 내가. 그 날 난 울고 있었어. 기억 나? 그 날 아줌마가 죽었어. 내게 이름을 부여했던. 자꾸 어른들은 울음을 참기를 강요했어. 그들은 내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을 정도로 무기력 할 때. 그 때만 내가 울길 바랬어. 있잖아. 난 가진게 내 목숨 밖에 없었거든. 내 살이랑 내 머리카락이랑 내 눈이랑 내 이마랑 씨발 그런 거 밖에 가진 게 없었거든. 근데 그 것 마저 다 빼앗기면 어떡해? 그럼 난 죽는 거잖아. 난 죽어서야 울 수 있어? 정말 그런 거야? 항상 그렇게 생각 했었어.

그래서 혼자 울고 있었어. 고개를 쳐 박고. 근데 눈물 다 닦고 일어나보니까 네가 내 옆에 서있더라. 너 도대체 얼마 동안 내 곁에 있었던 거야? 얼마 안 있었다고? 거짓말. 다리 부들부들 떨리는 거 다 봤어.

 

울었어?

 

굳이 알면서 너는 물어 봤지. 난 고개를 말없이 주억거렸어.

 

아버지는 가끔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면서 연인들의 편지가 떨어진다ㅡ라고 표현하셨어

저어기 봐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떨어지잖아

 

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지. 이해도 못할 허무맹랑한 서술을 앞에다 두고 핵심은 뒤에서 알려줬잖아.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고개만 푹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팠어. 깊게, 깊게, 깊게, 이렇게 세상에 없는 곳에 닿고 싶어서. 깊게, 깊게, 깊게. 내 무지가 부끄러워서.

 

모든 건 다 지나가

봄은 여름이 되고 여름은 가을이 되잖아 슬픔도 곧 지나갈 거야

영영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던 것 같아. 우리는 그날부터 자주 어울려 놀았어. 물론 우리는 좀 많이 달랐지. 넌 어딘가 폐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자주 약을 먹고, 기침을 하고, 숨 쉬기를 힘들어했어. 가끔 쓰러졌지. 또 네 손목과 발목은 되게 얇았다. 가끔 흰 종이에 쓱쓱 문장을 적어내리는 네 필체는 정갈했어. 네 아버지는 꽤 유명한 작가 같았어. 일본 간부의 청탁을 받고 정치색이 짙은 글을 쓰는. 넌 아버지가 ‘진짜’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지. 그리고 넌 이담에 커서 ‘진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늘 말했어. 그래, 넌 지금 진짜 글을 쓰는 작가야? 언젠가 화열이 네가 나한테 ‘히카루는 파도의 하얀 조각을 닮았어’ 라고 했잖아. 난 그때 네가 진짜 작가가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어. 그와 동시에 그 문장을 한 음절 한 음절 다정하게 읊어주는 너를 보면서 난 괜히 내 누더기 치마가 부끄러웠어.

 

있잖아, 난 너랑 같이 있어도 늘 외로웠어. 우리는… 너무 달랐잖아. 봄의 끝자락에 깨진 앞니를 내게 보여주며 달려오는 널 봤었지. 네 눈두덩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어. 넌 아버지에게 맞았다고 했어. 이유는 끝까지 안 알려줬잖아. 넌 자꾸 말을 돌리면서 상황을 바꾸려고 했어. 나에게 알려주기 싫은 것 같았어. 그래봤자 다 빤히 보이는데. 미웠어. 또 동시에 날 위하는 네 마음이 예뻤어. 난 그때 또 직감했어. 화열이와 가까이 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래서 자꾸 핑계를 찾았어. 너를 만나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 핑계로 멜서리와 너를 만나게 한 거야.

 

네가 멜서리의 집으로 나와 함께 간 날. 아마 그 날 너에게 처음으로 내 연주를 들려줬잖아. 악보도 없고 그냥 손이 가는대로 피아노를 쳤지만. 그래도 너와 멜서리는 내 연주를 진지하게 들어줬지. 그렇게 자꾸 피아노를 쳤어. 악보는 모두 내 머리 안에 있었고 때때로 멜서리의 춤과 너의 말이 나에게 영감을 줬어. 멜서리와 너와 나의 시간이 겹친다는 게 좋았어.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서 애를 썼어. 나는 자꾸 어른인 척 굴었고 멜서리는 자꾸 아이인 척 했지. 너만 그대로였어. 그래서인가. 네가 뭐든 다 발견했잖아. 멜서리 집 앞에 떨어진 가장 희고 고운 조약돌도, 12시와 1시의 간극에 마시는 달콤한 홍차도, 멜서리가 추던 춤의 이름도. 그리고 … 멜서리의 유서도. 목적지는 우리가 아니지만… 그래도 다 네가 발견했지. 창문 틈에 끼어있던 그 바랜 종이. 기억나지.

 

그걸 읽어 봐. 멜서리의 이야기는 그걸로 대신하자.

 

윤무곡

 

벚꽃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름이 오는 것 같아요.

 

떠나기 전 당신이 물었지요. 국권 없는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그러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보니 결국 이 지경까지 왔고. 제가 아는 것은 오직 당신. 네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불안하면 벽을 긁던 그 손에 달려있는 반달 같은 손톱도. 창백한 살에서 아스라이 풍겨오는 비누 향도. 결국 끝까지 잊을 수 없을 테지요. 가장 사랑하던 당신 때문에 난 죽겠구나. 당신의 목소리가 손톱이 살이 날 죽이겠구나.

 

네가 조금은 소년일 때. 당신은 약을 가끔 먹고 자주 아프다고 했습니다. 가끔 손끝이 파랗게 썩어가는 것 같다면서 손을 숨기기도 했어요. 활자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당신은 항상 각종 서적을 가까이 했습니다. 시를 쓰는 것이 좋다며 연약한 손가락으로 연필을 잡고 몇 시간 째 궁리를 하기도 했지요. 도자기 같이 허연 당신 손가락이 혹여나 부러질까 전 당신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항상 늦게 나가서 늦게 돌아오셨지요. 들어오는 순간 땀과 술 냄새가 훅 끼쳐왔어요. 어머니는 자신의 일을 어여삐 여겼습니다. 어머니는 미치도록 춤을 췄어요. 미치도록 고왔고요. 그래서 정말 미쳐버렸죠. 아마 당신을 만나기 참 전부터 전 춤을 췄어요. 종이에 내 이름을 적는 법도 모른 채 발끝을 곱게 펴고 춤을 추는 연습을 했지요. 손을 예쁘고 높고 더 길게 뻗는 법. 하늘에 닿을 듯 다리를 펼치는 법. 가끔 어머니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법. 잠에 취해 화장이 다 번진 채 누워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서툴게 닦는 법. 전 그런 것만 할 줄 알았어요. 아마 평생 춤을 출 것 같았어요. 이렇게 평생 내 발에 엉켜 넘어지다 생이 끝날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미칠 듯이 웃다가 조용히 열이 올랐습니다. 낮밤을 꼬박 지새우며 땀을 흘리다가도 갑자기 창백한 안색으로 일어나 깔깔 소리를 내면서 웃었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미칠 듯 웃다가 다리를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전 뒤따라가서 어머니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어요. 그저 이 모든 게 춤 같았거든요. 교묘하게 구성된 우아한 춤. 어머니는 노래 부르듯 웃었고 전 그냥 그 웃음에 맞춰 춤을 췄습니다. 추다가 넘어지고 또 실실 웃었어요. 기왕이면 어머니가 오래 제 곁에 있기를 원했어요. 하늘은 믿지 않았기에 깨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연신 빌었어요. 가끔 조용한 성당 안에서 목적 없는 기도를 했습니다. 창 아래로 쏟아지는 빛 사이를 유영하는 먼지를 봤어요. 그렇게 30분만 지나면 당신이 내 뒤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냥 다 관두고 당신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끄럽게도.

 

당신은 저에게 발레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이지. 이것이 서양의 춤이라고 하더라. 인물과 배경의 경계선이 흐릿한 사진을 들고 당신은 하나 하나 설명을 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분홍 꽃잎 같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그녀들은 고왔습니다. 저도 그녀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소개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그녀들의 모든 행동을 해독하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제 손끝과 어깨를 응시하셨죠. 얘, 너도 발레 좀 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당신 보여주었던 그 사진 속 인물의 이름. 그게 멜서리. 난 잊지 않습니다.

배우고 싶었지만 그 방법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항상 당신의 얘기를 듣기만 했어요. 를르베, 데벨로뻬, 그랑바뜨망, 앙 드앙. 를르베, 데벨로뻬, 그랑바뜨망, 앙 드앙. 당신 목구멍에서 솓아나오는 그 단어들이 예뻐서. 그건 잊을 수 없는 것. 잊혀지지 않는 것. 잊다가 잊다가 아파서 다시 상기하는 것. 그걸 잊는 건 당신을 잊는 거라고. 당신의 목소리를 최후에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여야 하니까. 당신은 갈수록 자주 울었고 약해졌어요. 항상 전 다짐했습니다. 내 모든 걸 당신에게 줄 것이라고. 그래. 내가 당신을 위해서 출게요. 뭐든 할게요.

 

어머니는 자꾸 늙고 더 아팠어요. 그녀는 가끔 제게 물었습니다. 조국의 춤을 아니.

저는 매화 나무에 대롱대롱 메달린 꽃을 따듯 조심스레 손을 뻗었습니다. 잔잔한 수면 위를 걷듯 살금살금 돌다가 정적이 깨지고 파도가 치듯 거칠게 뛰었어요. 바로 앞에 당신이 있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당신을 쫓듯 열렬했어요. 같은 동작은 단 하나도 없었고 매 순간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추던 춤을 추면서도 자꾸 당신이 알려준 단어를 마음 속으로 꺼냈습니다. 를르베, 데벨로뻬, 그랑바뜨망, 앙 드앙.

어머니는 제 모습을 보다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간 중간 가사를 잊었지만 음은 기억했습니다. 그 음들이 흘러넘쳐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단조롭지만 애처로운 그 곡조.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흐려집니다. 그냥 당신만 선명해요. 그거 하나면 안 될까.

 

어머니가 폐병을 심하게 앓다가 돌아가시고 전 자꾸 당신을 찾았습니다. 당신은 뭔가 중요한 일을 시작한 것 같았어요. 어려운 책을 읽고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도 내 세계는 전부 너였어. 당신이 자꾸 내 앞에서 사라지고 내 세계는 순조롭게 몰락했습니다.

 

당신은 별이 유난히 많던 그날 밤 손톱을 새워 벽을 긇다가 무심하게도 툭 그 말을 뱉습니다. 야, 난 독립 운동을 한다. 당신은 조금 취했고 전 그런 당신에게 익숙했습니다. 자꾸 야위어가고 창백해지는 당신이 불안했습니다. 당신 손목에 툭 불거진 동맥을 볼 때마다 죽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술에 취해서야 제게 웃어주었습니다. 그게 또 좋아서 저는 당신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춤을 가만히 보다가 말 없이 날 안아줬어요. 또 더 가끔 당신은 제 손바닥에 손톱으로 이렇게 적었습니다. 멜서리. 멜서리야.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네가 너무 깊어지는 게 무서워. …그런가요. 날 버리지 마. 제가 어떻게 버려요. 그렇지? 그렇죠.

그렇게 전 가끔 멜서리가 되었습니다.

 

곧 떠나 목적지가 어디일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요 저는 항상 괜찮아요

 

아마 보름. 달이 둥글던 그 밤에 당신은 물었습니다. 만약 자기가 멀리 멀리 아주 멀리 가더라도 자신을 기억할 자신이 있느냐고. 전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사이좋게 잠에 취했잖아요. 새벽녘 갈증에 눈을 뜨니 당신은 없더라. 창 밖 푸른 새벽이 그렇게 아픈 줄은 몰랐죠. 새벽달의 흰 빛이 꼭 당신을 닮아서 저는 정말 오랜만에 울었어요. 생각해보니 당신이 제게 남긴 건 멜서리라는 이름 밖에 없더라. 전 그 이름을 섬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좀 더 자주 멜서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사랑하는 것. 제가 사랑하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은 것.

 

있잖아요. 굳이 덧붙이자면 이건 편지보단 유서에 가까워요. 당신이 없어 전 홀로 유서를 쓰네요. 언젠가 당신이 경성으로 돌아온다면. 다시 제 집으로 와 준다면 이걸 보고 당신이 아주 조금은 울었으면 좋겠어요. 창문에 이 글을 끼워둡니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오길. 우리가 조금만 더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전 조국을 위해서 죽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죽습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게 무엇이든 전 그걸 위해 죽을 수 있어요. 이제야 전 당신에게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어떤 기억은 아주 먼 곳에서도 저를 자꾸 좀먹습니다.

우리는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혼곡

 

이제야 그를 보내. 마지막 날을 기억하니. 멜서리는 우리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

오지 말어 이번에는 오지 말어 당분간 모습을 비치지 않을테니까 서신을 주고 받기도 어렵겠지

멜서리는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어. 너는 멜서리가 상해로 향할 거라 했어. 나는 멜서리가 어딜가든 좋으니 금방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들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고 너는 정갈한 필체로 편지를 썼지. 우리는 그걸 준비하면서 나름 즐거웠잖아. 우리가 꼭 어른이 된 것 같았어. 멜서리가 잠시 없더라도…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 때 나는 이미 내가 알던 모든 노래를 피아노로 칠 수 있었어. 물론 조금 서툴렀지.

 

그리고 낮이 왔어. 우리는 다급하게 멜서리의 집 앞으로 갔다. 익숙하게 문을 열고 멜서리를 불렀어. 방은 조용했어. 모든 가구는 그대로, 피아노도 그대로, 깨진 창문도 그대로. 다 그대로 여전한데 멜서리만 없었어. 우리는 방을 뒤졌어. 멜서리가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꽃과 편지를 주고 싶었어. 그러다가 넌 창문 틀에 놓인 멜서리의 편지를 봤지. 물론 우리를 향한 편지는 아니였어. 글 못 읽는 나를 대신해 네가 또박또박 편지를 읽었지. 마지막 문장이 끝나고, 우리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어. 너는 어디로 가야할지 안다며 내 손을 잡고 막 달렸어. 우리는 광장으로 향했어. 이유는 한참 뒤에 네가 알려줬잖아. 그 일을 치르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행해야 한다고.

 

멜서리는 춤을 췄잖아. 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리다가 쓰러졌잖아. 그러다가 또 발작하듯 일어서서 낮게 웃었잖아. 그 누구의 춤도 아닌 멜서리의 춤을 췄잖아. 경성의 시끄러운 낮의 중심에서 미치도록 손을 뻗고 발을 옮겼잖아.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그를 봤어. 모두가 너무 먼 곳에서 그를 봤지. 멜서리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어. 나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세계의 끝. 미지의 영역. 멜서리는 돌고, 돌고, 돌고, 또 돌았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대고. 대한 독립 만세. 막 그랬지 그는 울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않았어.

순사들이 달려왔어 멜서리는 총구를 당겼어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못했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했어 너무 빠르게 모든 게 지나갔어

붉은 피가 쏟아졌어

 

빠르게 식어가는 멜서리의 몸을 보며 참 많이 울었잖아. 순사들은 멜서리의 피부가 죄다 하얗게 변하기 전에 서둘러 시체를 옮겼어. 멜서리의 흰 옷이 붉게 물들었어.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조용히 감겼어. 내 얼굴은 일그러졌어. 내가 우는지 웃는지도 몰랐어. 한참 뒤에 너도 울었지. 우린 멜서리가 바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멜서리도 없이 오랜 시간 울었어. 우리의 일부가 부서진 것 같았어. 빈 곳을 채우고 싶었지만 뭘로 채워야할지 몰랐어.

 

그리고 한 할머니가 조용히 노래했다. 난생 처음 듣는 노래였어. 난 그 음을 잊을 수 없어. 낡고 닳은 목소리. 너는 그때 어땠어. 어땠냐고.

 

계속 무기력했어. 멜서리도 없는 멜서리의 집에 앉아서 홀로 우는 시간이 늘어만 갔어. 나는 썩은 사과를 베어 먹고, 멜서리의 옷장을 몇 번이나 바라보고, 방문을 열었다가 닫고, 창문을 덮을 천을 가져오고, 노래를 부르다가 울음을 그치고. 너는 가끔 나에게 왔지. 너가 있을 때만 나는 피아노를 쳤어. 누군가가 듣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알리고 싶었어. 나의 모든 기억을. 이름을 처음 가진 순간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울음 같은 죽음을. 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어. 너는 항상 나를 봤지. 피아노를 치면서 우는 나를 봤지. 점점 우리는 자랐어. 난 내가 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너도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근데 있잖아. 이 사랑 때문에 넌 멜서리를 잊었어. 너는 글을 썼어. 하지만 네가 쓰는 글은… 모두 너의 아버지의 표절이야. 위대함을 꿈꿔? 대답 좀 해.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그런데 또 네가 혐오스러워, 난 너 없으면 안 돼. 근데, 그래서 네가 미워. 네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잖아.  너는 이제 기침도 안 하고, 멍도 하나도 안 들었고, 조금 더 자주 웃어. 아직 필체가 정갈하고 문학을 사랑해.  그런데, 너는.

화열아, 너는, 너는. 너는 무얼 했니. 나는 피아노를 쳤어. 너는 무얼 했니. 너는 기억했니? 기억 했어? 아니면, 벌써 잊었어? 나는 아직도 과거를 살아. 빌어먹을 과거를 산다고. 아직도 내 음악을 사랑해? 너를 향한 게 아닌데도?

 

 

조명이 꺼졌다. 히카루는 무대에서 내려온다. 음표 없는 악보가 흩날린다. 화열은 홀로 극장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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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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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을 베어 물어
검은 나방이 오래된 춤을 추면 우리는 골몰한다

 

나방을 박제하세요 날개의 얇은 끝이 닳았어

너는 항상 다정하게 굴지 말라며 날개를 뜯어

우리는 자주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내일의 흉터를 발목에 새겼고 손가락 마디마다 라일락이 피어난다 너는 내 살 위에서 그림자놀이를 하다가 손가락을 꺾어 꽃다발 사이에 숨겨.

 

종종 내일의 타살을 훔친다

 

쇄골 위 장례를 치른다 너는 생존자가 되지 말 것 짓밟으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라일락을 너의 동공 사이에 박아두고 저수지 아래에서 기어 나오는 레퀴엠 악절의 숨을 끊어버리자

 

한낮의 불한당이잖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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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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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 )이 생겼다
너는 나를 ( )라고 부르다 나는 너를 이름의 끝 글자로 부르다 너는 네 이름의 끝 글자를 내게 떼어주다

 

덜렁거리는 목을 가진 내가 가출을 하다 나는 우산도 없이 창밖으로 뛰어나가다 너는 뒤늦게 붉은 우산을 내밀다 나는 이미 ( )이다

 

우기에는 물가로 낙하
너의 발목까지도 차오르지 못하는 물 너는 자주 하얀 나비를 보다 혈액 대신 투명함이 가득 흘러서 너는 울다

 

너는 너의 빌라에 도착하다 옆집 세탁기가 시끄럽다 비는 이미 그쳤다 빨래를 생각하다 축축하게 늘어진 옷들로 얼굴을 덮다 숨구멍으로 습기가 축축 들러붙다 너는 묵묵히 빨래를 널다

 

나는 푸른 밤에 자주 머물다 가끔 내 생애를 들고 한참을 달빛에 비추다 고민을 하다 눈을 감다 다시 눈을 뜨다 눈을 감다 다시 눈을 뜨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 그렇다고 생각하다

 

나는 우산 없이도 장마를 퍽 잘 버틸 것이다
가끔 네 생각을 하다 자주 너를 까먹을 것이다

 

극열하다
열망하다
나는 너를 망望할 것

달과 태양처럼
너와 나를 정반대에 두고
나는 너를 (                   )

 

너는 빨래를 차곡차곡 개다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옷장에 옷을 차곡차곡 넣고

 

(네 열병은 참 길다 난 계속 돌아오는 길을 모를 것)

 

넌 가끔 낡은 사당의 문을 열고 인화燐火를 보다 비가 주기적으로 내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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