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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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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은 전학 온 첫날부터 아이들에게 미움을 샀다. 누구도 미진에게 말을 건네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미진은 세실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세실은 미진의 첫 짝꿍이었다. 사실 미진은 세실과 깊게 친해지지 않으려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진과 눈이 마주친 세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안녕.그렇게 첫 날은 세실과 그저 몇 마다 주고 받고 수업을 들은 게 다였다. 그런데 앞 자리 여자애가 미진을 계속 흘끔, 흘끔 쳐다보는 것을 미진은 느꼈다. 노골적이었으니까. 그리고 하루만의 미진의 첫인상을 결정짓기에 충분한 제스처였다. 미친년.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문을 연 순간 아이들은 그 단어를 연신 내뱉었다.

 

미진은 자신의 이름을 희화화 시키며 놀리는 줄 알고 세실에게 아이들의 유머인지 아님 진짜 그 뜻을 칭하는 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세실은 푸흐흡, 하고 큰소리로 웃어재끼며 미진의 말에 끝까지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뭐가 재밌어서 처 웃냐고 시발. 미진은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다, 정수리 부근에 느껴진 시선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앞자리 여자애는 더 이상 흘끔거리는 소심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한껏 찌푸린 미간과 노골적인 눈빛으로 미친년, 이라는 짙은 음성을 미진의 머리속에 깊숙히 박아놓았다.

 

1학년 끝 무렵 전학 온 학교 생활은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건 미진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유일한 친구는 세실 뿐, 하다 못해 같이 화장실을 가고 같이 밥을 먹는 건 불가능했다. 3개월 정도면 웬만한 아이들과 친해졌던 미진이었다. 군인인 아빠를 따라 전학을 간 것은 지금까지 8번 정도였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1년에 한 번씩 전학을 다녔지만 친구 사귀기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으며 하루만에 단짝을 만들 수 있던 미진이었다. 애초에 세실이 학교에서 당하는 취급의 연유는 모르겠지만, 망친 학교 생활의 8활은 이 아이탓일 것이며 2할은 사나운 자신의 인상을 탓하며 나름 합리화 중인 학교 생활을 해내는, 아니 견뎌내는 중이다. 아빠의 전근을 기다리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으니까.

 

12월 중순이 지난 무렵인 오늘은 겨울비가 내렸다. 투명하고 하얗던 눈들이 빗물에 녹자 흑심을 드러내버리고 질척거리는 것 같았다. 발끝에서 맴도는 차가운 기운에 소름이 훅 끼쳐 올라왔다. 언젠가 세실에게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걔가 집에 간 걸 본 적이 없네. 미진은 학교 입구에서 대충 눈을 바닥에 문지른 뒤에 자신의 교실을 향해 뛰쳐 올라갔다. 미닫이로 된 문고리 사이에 묵진한 열쇠고리가 입을 꾹 다문 채 있었다. 문 사이로 비치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7교시 이후로 잠든 세실이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쟨 미동도 없이 잘도 잔다, 세상 편해 아주. 미진은 쿵쿵, 쿵쿵 손으로 앞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미동이 없다. 야! 세실아! 세실, 세실! 일어나라고, 세실은 쓰윽 고개를 들고 멀뚱멀뚱한 눈으로 미진을 쳐다보았다. 세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의 고리를 열고 미진과 마주했다. 안녕. 미진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이게 만나서 하는 인사인지, 집에 돌아갈 때 하는 인사인지 분별이 안 갔다. 세실은 미진에게 물었다. 비는 그쳤어? 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미진은 한껏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겁나 질척거려, 새까맣게 물든게 걷기 싫은 거 있지. 세실은 아… 그렇구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미진에게 물었다. 같이 갈까? 미진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그저 오랜만에 같이 가는 누군가가 생겨 조금 흥분되었다. 미진과 세실이 학교 입구에 도착하자 창문 너머로 빗줄기가 쏟아졌다. 아까전 부슬비와 확연히 비교되는 물줄기였다. 세실은 공용 우산꽂이에 유일하게 놓인, 겨우 한명이 쓰고 갈 유아용 우산을 집어 들었다. 미진은 푸흐흐, 웃었다. 우리 너무 유치한거 아니냐.

 

아무렴 어때, 너만 쓰면 되잖아. 세실은 미진 끌고 빗줄기 사이로 들어갔다. 세실은 미진에게 완전히 우산을 씌어주며 아무말 없이 걸어갔다. 미진은 우산 손잡이를 잡고 있는 세실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세실 쪽으로 우산을 기울었다. 아까보다 빗줄기가 더 굵어진 것 같다, 그지. 세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우산을 미진 쪽으로 기울었다. 미진은 순간 발끈했다. 너 젖잖아, 왜이래 자꾸?

 

나 안 젖어, 걱정마. 미진은 세실의 어깨쪽을 보았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턱 없이 작은 크기에다 세실 쪽으로 우산을 기우느라 한쪽이 젖어버려 흰셔츠 사이로 옅은 살색을 띄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젖지 않은 세실의 하얀 교복셔츠가 눈에 띄었다. 미진은 순간 등골의 서늘함이 훅 끼쳤다. 내가 진짜 미친년이 된건가. 세실은 아무말 없이 싱긋 웃었다.

 

집 다 왔다.

 

세실은 완전히 미진에게 우산을 넘겨주었다. 더 거세진 빗줄기가 세실을 뚫고 아스팔트에 그대로 낙하 할 뿐이었다. 숨을 죽여버린 미진은 눈을 꾹 감고 다시 떴다. 여전히 세실은 자신의 앞에서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또한 존재한다, 존재하는데, 존재, 하는, 데.

 

미안해, 혼자여서 외로웠어.

 

미진은 일렁이는 세실을 가만히 볼 수 없었다. 눈 속에 맺힌 눈물이 턱 끝으로 떨어지면 정말로 마지막이 될까봐. 내가 이렇게 세실이에게 정이 들었나. 끅끅거리는 날숨을 숨길 수 없었다. 미진은 세실의 팔을 무작정 잡아보았다. 여전히 세실이 느껴진다. 미진은 세실에게 받은 우산을 건네 주었다. 쓰고가.

 

넌 혼자였던 적 없었어, 줄 곧.

 

하늘은 세상에 내린 눈을 지우기 위해 힘껏 물줄기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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