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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예측, 자유, 그리고 나 [1]

나는 글을 쓰게 될 때 어떤 느낌의 말에 사로잡혀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시작하게 된다. 근데 그렇게 쓰다 보니 글쓰기가 그저 글의 중심을 향해 나가는 길 닦기 정도의 일이 되어서는, 그것도 대충 쓱쓱 훑어대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상상의 형체를 찾아 떠돌기 마련이다. 또 그렇게 쓰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도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시작을 웅장하게 펼친 적도 있었는데, 그 뒤 작업은 마치 요란하게 흩뿌려댄 개막식 폭죽의 잔해들을 수거하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또 한 구상이 머릿속 어딘가를 유랑하다 사라진다. 어젯밤도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다.[…]

표현, 예측, 자유, 그리고 나
/ 202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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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 [1]

흙에서 온 것들도 흙이 묻으면 버려지는 곳에선 더 넓게 돌아다니고 싶은 꿈은 구형 틀에 몸을 맞추어 구르지도 뒤틀리어 한 발만 딛고 멈추지도 않으면 그저 공상에 그칠 뿐 믿음도 없이 조악스러운 몸을 갖춘 나는 추악하게 들러붙는 먼지들에 자신을 잃었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나 지저분하게 웅크려 독백할수록 늘 같은 얼굴로 잠들려 한 자세는 지나는 시간마다 조금씩 일그러진다 꿈이 달아나 버린 틈에 고인 물 그 물이 전부 차오를 때 나는 사라지는 것처럼 알알이 뚝뚝 흩트린 채 부유도 침전도 잊고 소용돌이친다

점토
/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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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e Silicagel Deseo(자유로운 실리카겔 욕망) [2]

어느새 성인 이상의 나이기를 꿈꾸던 예술가의 어떤 시절이 지나고 밤새 거리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약물이 예술가의 손 앞을 배회한다 불면증으로 인한, 무기력으로 인한, 우울로 인한, 불면증 걸린 예술가의 병(病)을 위한, 약을 위한, 병(甁) 속에 동봉된, 약을 위한, 비닐 팩 속 뒤엉키고, 뒤틀리는, 혼란스러운 알갱이들 마구잡이로 약물 틈새를 유랑하며 쏴아아 거리며 끝없이 표류한다 예민한 예술가와, 위축된 위와, 소홀한 소비가, 조화를 가속할 때 바닥을 향해, 반복의 종말을 앞두고, 몸서리치는, 건조한 방주 빈 통 속에서 촉각만으로 예술가를 굳게 만들어버리는 매끈하고 단단한 겔 인체에는 무해하나 먹지 마십시오 연주자를 집어삼키는 팀파니처럼 청개구리의 반전의 반전인 에포미스1처럼 예술가의[…]

Libre Silicagel Deseo(자유로운 실리카겔 욕망)
/ 202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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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1]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책상 위에 지우개로 만들어진 기초조차 외우지 못한 원시인이 만들었다 그 원시인은 청동 볼펜을 손에 들고 녹이 슬었다고 소리치며 다녔는데 글씨 몇 자를 남기곤 사라져버렸다 ‘아주 오래전 불씨를 피우려는 이들이 있었다’ 여러 번 그 글귀를 지워버리려고 고인돌을 주워들어 문질렀는데 돌 가장자리는 흰색으로 빛만 났다 사람들은 늘 빛을 보려 제사를 지냈다 내일의 태양은 더 많은 심장을 원했다 태양을 위해 모두가 함께 숨을 죽였다 피는 바닥으로 물들었고 얼룩진 바닥을 구분하려 사람은 고인돌을 세웠다 녹슨 청동에선 항상 피맛이 났다 이 모든 기초를 외우지 못한 그 원시인은 모든 일을 적어나가는 자 청동 볼펜을[…]

고인돌
/ 202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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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의 법칙 [1]

어제도 오늘도 바나나를 까먹고서 계속 벗어버렸던 껍질을 딛고 넘어져요 뉴턴은 계속 껍질채 먹는 사과를 추천하고 버스는 자꾸만 가다가도 멈추면서 손님 버스에서는 음식물 금지라고요 다리가 결국 휘청거리며 잡는 손잡이 덜커덩거릴 때마다 다같이 휘청이던 사람들 먹던 바나나는 어느새 갈색으로 변해버렸고 상태가 변할 때마다 나는 저항해야만 한다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치고 싶었어요 움직이는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르고 티비에서는 이때쯤이면 정답을 말해주던데 기사 아저씨는 언제나 아무 답이 없었어요 움직이지 못한 나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축 늘어진 바나나 껍질처럼 자리에 눕고서 언젠가 제발 세워달라고 소리치게 될까요 버스는 기다리지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질까요

관성의 법칙
/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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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퇴고) [2]

해가 강을 넘어가며 빛을 쏘면 낮이다 걷는 나를 사람들은 차를 타고 앞질러 도망간다 곧 있으면 잠길 다리를 벗어난다 가끔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으면 두려움보다는 믿음이 온다 “물 밑으로는 매일 괴물이 자라니까 몸을 던져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내가 말을 할 때면 사람들은 빠르게 자리를 뜬다 생각에 잠긴 나를 뒤로 한 채 아주 오래 밑을 바라본다 반복되는 강물 위에 올라오는 얼굴과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흔드는 강 강 위로 사람들이 마주하기 꺼리는 괴물이 보인다 다리 위에서 죽어가는 괴물 말라가는 전신을 뒤로 한 채 괴물의 이름은 없다 괴물은 외로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삼켜간다 흐르는[…]

괴물(퇴고)
/ 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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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 [1]

약을 탈 때가 왔어 물컵 한 잔을 준비해 봉투와 봉지를 뜯어 전부 털어넣었어 이젠 아무것도 없다 근데 뭐가 문제야 가라앉지 않아 자꾸만 떠오른다 기다리면 사라지겠지 남는 것은 생각뿐이야 병원에 가서 받을 때 ‘취급에 주의하세요’ 한마디 없던 모습 좀 기다렸더니 아등바등 돌아가며 서로를 밀어내는 모습 더 기다렸더니 조용해진 시체들에게 말도 건네지 않는 모습 또 기다렸을까 언젠가는 모두 녹아 손잡고 돌아다니는 모습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라앉지 않는 듯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이야 ‘법칙을 무시하고도 어떤 말이 될 수 있겠니' 나는 얇게 내뱉었어 때로 내 숨에 응답하는 몇은 내 머리 앞을 떠다니다가 귓가에 대고[…]

가루
/ 20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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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1]

해가 강을 따라 다리 위를 넘어가며 빛을 쏘는 낮이었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걷는 나를 앞질러 도망갔다 곧 있으면 잠길 다리를 벗어났다 가끔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으면 두려움보다는 믿음이 온다 “다리 밑으로는 매일 괴물이 자라니까 몸을 던져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내가 말을 할 때면 빠르게 사람들은 자리를 떴다 생각에 잠긴 나를 뒤로 한 채 아주 오래 밑을 바라본다 휘몰아치는 강물 위에 올라오는 얼굴과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흔드는 강 강 위로 사람들이 마주하기 꺼리는 괴물이 보였다 다리 위에서 죽어가는 괴물 말라가는 전신을 뒤로 한 괴물의 이름은 없다 괴물은 외로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괴물
/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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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지나갈수록 [1]

침대에 좀 더 누워 잊히는 별을 보고 이름을 붙여가겠지 참 많은 고민이겠지 넓고 검은 하늘에는 많은 것들이 앞다투어 뜨고 그 중 하나는 내 꿈이었고 나 오래도록 바라보고 갤 수 없는 구름이 미루며 지나간 달이 그 앞을 지나간대도 사라지진 않겠지 언젠가는 새벽이 오고 큰 별도 눕겠지만 점점 낮아지겠지만 그래도 환히 빛나겠지 기대해 내일은 좀 더 긴 밤일 거야 근데 이 밤 저 별은 유독 아름답구나

밤이 지나갈수록
/ 20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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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의 변명 [1]

이제 더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을 거야 우후죽순 떨어지는 원숭이라도 된 거니 바나나를 쫓는 건 그들만의 오랜 습성이야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니까 횟수로 치지 않아야 해 한 해가 지나면 결국 죽어버린다고 독수리를 응시하던 거위라도 된 거니 날아 가버리는 비겁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것 말이야 거위는 야생에 살지 않고 가축이니까 횟수로 치지 않아야 해 한 해가 지나면 결국 죽어버린다고 그렇게 말들 반복해봤자 나는 사람이니까 이해할 이들 없고 사람에게는 다가오는 성인의 시간 발목에는 썩지 못한 덩굴이 묶이고 손에는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 줄이 감기면 아아아! 이건 함성이었어 나를 공중으로 띄워줄 찰나의 시간 얼굴에 긁히는[…]

타잔의 변명
/ 202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