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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온도(퇴고) [1]

오늘은 날씨에 대해서 배워 내가 좀 도와달라고 하면, 너는 싫다고 해 나는 둔감해서 잘 모르는데 먼저 사계절을 세면서, 봄 여름 그래, 지금은 여름 너에게 몰래 여름이라고 말하면, 이미 다 안다고 해 햇빛 앞에 책상들이 덩어리로 눌려 있어 끝내 칼로 겉을 깎아 파내곤 햇살을 구겨 빈 속으로 채워넣고 우리는 입을 모아 외쳤지 여름에는 쉴 틈 없이 햇빛이 내려옵니다 쉴 새 없이 들이칩니다 그 책상의 흉터는 년도들로 차있어 20을 새기려다 00을 새기곤 해가 더 많이 들어찰 수 있게 해주고 지금은 여름인데 너는 왜인지 입술을 떤다 하면, 그런 게 아니라고 해 어린이들은 왜[…]

교실의 온도(퇴고)
/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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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온도 [1]

오늘은 날씨에 대해서 배운다 내가 좀 도와달라고 물어본다, 너는 싫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둔감해서 잘 모른다 먼저 빈틈없는 사계절을 세면서, 봄 여름 그래, 지금은 여름이다 너에게 몰래 여름이라고 말한다, 이미 다 안다는 손짓이었다 햇빛 앞에 책상들이 덩어리로 눌려 있다 끝내 칼집을 겉에 깎아 파내곤 햇살을 구겨 빈 속으로 채워넣는다 우리는 입을 모아 외쳤다 여름에는 쉴 틈 없이 햇빛이 내려옵니다 비가 들이칩니다 천둥이 내리칩니다 그 책상에 새긴 칼집은 년도들로 차있다 20을 새기려다 00을 새기곤 해가 더 많이 들어찰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은 여름인데 너는 왜인지 입술을 떤다,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교실의 온도
이기인 / 20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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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2]

너가 있길래 난 그냥 흔들 뿐이야 대체 왜 그럴 수 있냐고 너는 아무 얘기 없이 까딱댈 뿐이지 미안해 언젠가 그런 말을 했을 거야 난 남들이 어깨를 잡는 것을 두려워했었는데 내가 있길래 난 그냥 걸을 뿐이야 이젠 나도 발걸음이 꼬이고 비틀려 왼발로 넘어지면 오른발로 버틸 뿐이지 흔들리면 다 빠져나가 어제 묻은 먼지도 그제 칠한 색도 그칠 생각을 안 하고 있어 언제 멈추는지 모를 바닥의 울림에 맞춰 춤만 추고 있어 단지 멈출 게 분명하단 두려움에 또 고개를 젓는 거야 어느새 세게 뒤틀리는 마음에 너가 돌아서는 것을 항상 보고 싶어서 변하지 않을 것처럼[…]

오뚝이
/ 20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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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돈은 [4]

나는 울어야 한다 프드덕거리는 산새들의 고향이 롤러가 밀고 간 자리로 레미콘이 엎은 자리로 타다 남은 장작이 되어 리어카가 잔해를 실어가고 아파트 한 채만이 들어선 것에 너는 웃지 말아야 한다 부리나케 달리고 뛰어 보아도 루돌프가 오지 않는 집의 주일에나 기도를 드리는 아이들의 작지 않은 속삭임에 다만 나는 외친다 남아 돈은 남아도니까

남아 돈은
/ 202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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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 하나 없는 밤 [2]

오른쪽으로 돌리면 조였고 왼쪽으로 돌리면 빠졌다 사장은 내게 움직임을 가르쳤다 몸에 손을 얹고 하나 하나 천천히 그렇지 잘했어 사장은 많은 모양의 전구들을 모두 사랑했다 꼬마전구도 반짝거렸다 나도 얼룩을 닦고 전파사의 상품이 되고 싶었다 개똥이나 만지다가 눈이 멀어서 몸들에서 빛이 나는 줄도 모르고 춤을 췄다 이건 블루스야 블루스 사장은 몸을 좌우로 뒤틀며 말했다 느린 춤은 모든 노래를 블루스로 그때는 보기 위해서 눈을 열었다 가로등은 둥근 배를 집어넣을 때라고 누가 말할 때 사장은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언제나 날카롭게 이를 드러냈다 그래도 반짝거렸다 밖으로 나와도 어둡지 않았다 간판들만 거리를 태우고 있었다[…]

전구 하나 없는 밤
/ 2020-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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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연애 [2]

양파처럼 사랑을 하다간 한꺼풀 한꺼풀 가식과 위선을 벗기곤 남은 공백 앞에서 울어대고 조개처럼 사랑을 하다간 딱딱한 모습으로 진주를 찾아 헤매곤 빈 속에 속아 짠 물만 흐르겠지 그러면 우린 귤같은 사랑을 하자 서로에게 있어 칼과 같은 예리함이 없어도 한꺼풀만 벗기면 알맹이가 드러나자 다만 장맛비 사이에서 너를 찾기엔 아직 너무 시큼한 우리 사이 그러나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 때 그때는 둘러씌워진 막을 벗기자

껍질연애
고봉준(문학평론가) /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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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에 대해 알려준다 [1]

개미는 기쁘게 웃으며 짐을 나르지 못한다 오래 전에 턱이 두 갈래로 동강나버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썩은 사마귀 머리를 든 채 비웃음이라도 내뱉기만 하면 좋을 텐데 개미는 진딧물 궁둥이를 빨 때 울음을 제일 먼저 삼킨다 그 치욕을 무릅써봤자 얻는 것은 한 방울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서로 자리를 바꾼 채 자신의 궁둥이를 들이밀기만 하면 좋을 텐데 개미는 수없이 마라톤을 뛰지만 얻는 것은 고작 개밥 한 톨이며 여왕은 이미 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 날개도 없는데 곤충이라고 자부하며 검댕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일을 하지만 뛰다가 지치면 다른 개미의 입에 물린다 그런데도 개미는 울지 못한다 오래 전에[…]

개미에 대해 알려준다
/ 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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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에서 7시 50분경 -등대- [2]

쓸모 없는 척 하자 바다에 들이눕고서 갈매길 쓰다듬으며 신나게 춤을 췄다고 거짓말 잘도 하면서 그래서 지쳐 누웠다고 언젠가 돌아볼까 무서웠던 빛 날 비추는 걸 멈추지 말아줘 또 다시 져버릴까 두려웠었지 늘 까먹지 않으려 노력하잖아 스며들다 보면 깊어져오고 언젠가 말을 할 텐데 그때가 올 텐데 왜 지나가다 보면 떨어져가고 언젠가 같은 시간에 계속 마주치곤 해 딱 한 마디를 못하고 제자리 맴돌기만 하는데 쓸모 없는 척 하자 바다에 들이눕고서 갈매길 쓰다듬으며 그렇지만 신나게 춤을 추자고 부끄럼 타지 않고서 그래서 지쳐 눕자고

수평선에서 7시 50분경 -등대-
고인환 /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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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보기 전에 [1]

전할 말도 없고 아무래도 우린 이제 끝인가 봐 오늘 밤에는 만나지 말자 따뜻했던 여름보다 한심했던 인연아 설움 말고 행복했던 봄만 남기자 미래에 너를 붙이는 것은 아름답고 거창해가고 싶었던 그런 멍청한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너를 볼 때마다 너도 나를 보리라 생각했는데 희미해지고 번져가는 것을 추억과 후회 중 무엇으로 부를지 고민하자 내가 잠시 싸늘해지는 것은 내일의 몸을 데우기 위해서니까 내가 망설이는 만큼 언젠가 그때 보자

꿈 보기 전에
고인환 / 202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