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마
세현, 편지지 위에 눈이 내렸어 [1]

※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폭력, 자살, 자해 등)

세현에게 잘 지내지? 이 한마디가 난 지겨워 죽겠다. 그래서 난 이런 글밖에 못 쓰는 건가. 우린 늘 그렇듯이 팔짱을 낀 척하며,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졌지. 에어컨이 고장 난 곳에서도 왼손이 오른팔을 덮고, 오른손은 왼팔을 덮으면. 나는 너무 추운 곳에 있구나, 하고. 속눈썹이 차라리 하얗게 변했으면 좋겠어. 그럼 눈꺼풀을 더 일찍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헤어졌을 무렵엔, 나는 밖으로 나와 얇은 이불 한 장 같은 눈밭의 두께를 보았지. 그 아래에 들어가 나오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걸어야 했어. 아스팔트는 침대가 아니니까. 그렇게 각자 다른 길을 나아가면서, 잠시 모든 이들이 나처럼 걸을 수[…]

세현, 편지지 위에 눈이 내렸어
/ 2021-09-20
사랑하마
매미보다 금방 뒤집히곤 했지만 [1]

배를 보이고 죽는 것들이 있다. 적어도 우리는 아니다. 우린 반드시 엎드린 채 죽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등을 드러내며 숨이 멎는다는 것은 평범한 임종이 아니다. 등줄기가 공중에 훤히 드러난 채로 잠들어버린 이들이 늘어난다 해도 가슴에 묵직하게 놓인 서러움이 풀려야지. 우린 그걸 제대로 된 죽음이라 부른다. 자꾸만 떠오르는 숨들은 파도를 마신 후 주마등에 덮인다. 점점 뭍으로 다가오는 운동화들을 본 적 없겠지만, 그중 한 켤레는 분명 주인의 발보다 치수가 크겠지. 신발끈 매듭은 늘 단단해야 보기 좋아 보이던데. 급하게 떠나는 여행이라서 대충 묶었을 것이다. 혼자 한강 다리에 가서 철로 된 난간의 차가움을 쓸어내고 싶었다. 검게[…]

매미보다 금방 뒤집히곤 했지만
/ 2021-09-14
사랑하마
종점 [1]

다음 그다음 정류장이 종점이래요 빈자리가 있는데 내리지도 못할 사람들이 아직 서있다 꼭 도착을 해야만 버스인가 기사가 틀어준 유행가를 좋아할 수도 있고 정류장이 오는 것도 그만큼 간혹 일어나는 거지 멈추는 것은 더욱 희박한 일 앉아가야 편한 길이 있어 아버지는 무릎을 굽혔다 젊은 그가 마라톤 결승선을 넘었을 때 뭉개진 운동화 밑창에 묻어있는 새똥 비둘기 한 마리가 이 바닥을 날아오르며 꼭 누고 가야만 후련한 것이 있다 좌석에 가만히 앉으려다 바람과 부딪히면 꿉꿉한 냄새가 고여있는 도로가 보였고 그 위로 육중한 바퀴가 흘러간다는 걸 알지만 더는 멀미가 나지 않는 당신이라서 이젠 다리를 쭉 펼 수[…]

종점
/ 2021-09-06
사랑하마
새벽이 짖을 때면 [2]

눈물이 길어, 그걸 잘라낸 날부터 네 이름을 부르면 나의 새벽이 짖는다. 입을 다물기 위해 턱관절을 내려놓은. 목줄 달린 것의 입김은 납작하다. 걸음은 깊어간다. 광장의 기울기를 닮은 바람, 송곳니 사이에 낀 서리. 한껏 끌어당겨도 다 쏟아지지 않을 폭설. 새벽이 눈을 질끈 감는다. 거리를 밟는다. 횡단보도는 몇 초간 기절하고 신호등이 눈을 끔벅인다. 살얼음을 누르는 발가락, 도로에 앉은 첫눈이 짙다. 새벽의 몸이 부서지면 하늘에 물이 찬다. 이것 봐. 비둘기 없는 골목도 희다. 건물 창가에는 꼭 얼어버릴 낙서가 있다. 난 얼굴 반절을 가린다. 눈앞이 흐려지는 날엔 네가 없지만. 내복을 껴입어 가장 더운 사람이 되어도[…]

새벽이 짖을 때면
/ 2021-08-09
사랑하마
표류하는 한계를 뚫고 [1]

노력과 재능 모두 한계가 있다. 나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재능이 없으면 얼마나 초조한지 잘 안다. 이번 주 내내, 몸도 정신도 지쳐있었다. 텅 빈 용지 위에 쓸 수 있는 문장은 없었다. 한 글자도 쓸 수 없어, 숨이 턱턱 막혀와서 가만히 엎드렸다. 팔뚝에 눈물을 다 묻혔다. 종이 한 장을 꺼내 간단한 그림을 그렸는데 자꾸 입술이 말랐다. 그림도 그릴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는 이 무력함에 빠져들었다. 나는 입술을 뜯었다. 뜯은 딱지가 으깨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과물이 없어도 과연 상관없을까. 다른 농도의 의견들이 머릿속에서 섞였다. 그러다 드는 생각, 나[…]

표류하는 한계를 뚫고
/ 2021-08-06
사랑하마
동생의 순대 (퇴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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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해 동안 본 적 없는 동생 앞에서 수저를 놓는다 순대를 입에 넣어주고 맛있냐 묻고 싶은데 부재중 전화 다섯 통, 물먹은 휴대전화의 진동 베란다도 있는데 뭣하러 다리까지 갔어 운동화 신은 날엔 물길도 피해 걸었으면서, 신발 한 켤레 놔두고 간 네가 떠밀려왔다 국밥을 먹으면 우린 금방 체했지 점심값 걸고 팔씨름해도 뻔했던 승부 네 편지에서는 져주던 삶도 아름다웠다고 쓰러진 부모 대신 운동화를 닦고 말리며 나는 단 한 번도 널 이긴 적이 없는데 다리에서 지워진 숨을 생각하니 더더욱, 더더욱 이긴 적 없었던 거야 꼭 잡아주었던 언니의 손도 없이 너는 누구를 향해서 추락하고 있는[…]

동생의 순대 (퇴고)
/ 2021-07-25
사랑하마
[1]

세상에 머물다 가는 이름이 있다 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양팔의 각도를 수평으로 맞추고 파란 것이 산들거리며 피어날 것 같은 나의 영은 음독하여 들것에 실려가고 박준의 영은 아침에 가만히 숨을 놓고 응급실에도 동명이인이 있겠지 어리고 맑아서 다른 세계의 영들은 가만히 죽는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종이 속으로 들어간다 도화지가 영의 허리를 삼켰고 영은 글자가 되어 납작하게 떠올랐다 나는 영을 읽었다 발음에 의식할수록 굵은 혀조차 아래에 꾹 눌어붙는다 영이 입었던 바지의 주머니에는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난다 온도를 알 수 없어 눈물인지 눈꽃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아마 금붕어가 담겨 있을 수도 영은 더는 말할 수 없어[…]

/ 2021-07-24
사랑하마
그렇게 어른이 될 우리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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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방에서 탄내가 올라온다. 나는 줄곧 이곳에서 다리를 꼰 채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쓴다. 안 그래도 질식할 것 같은 선풍기 바람을 옆에 두는데, 여름의 향인지 누가 담배를 피우는 것인지 코가 자주 텁텁하다. 냄새로부터 한층 민감해졌다. 비염은 많이 나았고 몸이 클수록 비강이 넓어져 그렇다고. 우린 자랄 때마다 피부가 너무 아프다. 찰흙 메꾸듯 불어 가는 몸집이, 문짝의 높이를 넘을까 봐 불안하다. 그리고 냄새는 거꾸로 쌓여만 간다. 나의 머리는 방바닥보다 천장에 가까우므로. 두통이 자주 일어나고 숨 쉬는 것을 잊으려고 한다. 아니 잊고 싶은 게 아닐까. 내 방의 창문을 무심히 열었다. 산소가 들어와[…]

그렇게 어른이 될 우리는
/ 2021-07-22
사랑하마
벗는 사람, 입는 사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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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실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수영도 배운 적이 있지만, 사실 탈의는 여전히 낯선 일련의 과정이었다. 몸을 드러낼 때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문득 느꼈다. 나의 왼쪽 허리에는 흉터가 있다. 한 번 크게 베인 것이 아니라 자잘한 직선들이 겹쳐있다, 누가 난도질한 것처럼. 살면서 이곳저곳 상처가 생겼고 반창고를 붙여도 간지러웠다. 발갛게 변한 부위를 애써 쓸어냈다. 손가락을 살짝 기울이고 손톱을 피부에 맞닿게 했다. 먹잇감이 죽어버린 걸 깨달은 고양이처럼 나는 상처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말았다. 완전히 방치했다. 피가 굳고 딱지가 올라와도 뜯지 않았다. 그렇다고 솜에 소독제를 묻히지도 않았다. 연고를 짜는 대신에 나는 수영복을[…]

벗는 사람, 입는 사람
/ 2021-07-19
사랑하마
동생의 순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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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해 동안, 본 적 없는 동생 앞에서 수저를 놓는다 순대를 입에 넣어주고 맛있냐 묻고 싶은데 무릎 위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 다섯 통 물먹은 네 몸을 보며 혼잣말했다 베란다도 있는데 뭣하러 다리까지 간 거야 아파트 단지에서 물총놀이하는 애들 울리기 싫었나 아니면 내가 너의 허리를 붙들어맬까 봐 그랬나 하얀 운동화 신은 날엔 물길을 피해 걸었으면서 그 신발은 다리 밑으로 흐르며 눅눅해졌어 동네에서 국밥을 먹다가 우린 금방 체했지 오기가 나서 마주 앉아 팔씨름해도 뻔했던 승부 네 마지막 편지에서는 져주던 삶도 아름다웠다고 쓰러진 부모 대신 운동화를 닦고 말리며 나는 단 한 번도 널[…]

동생의 순대
/ 2021-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