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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의 실로폰 [1]

비가 내렸었다 찬 바람이 불던 날 딱 이맘때쯤의 비처럼 그때는 듣지 못했던 비 오는 소리 비 우는소리 베란다 난간에 떨어지면 실로폰 소리가 나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울 줄만 알고 사랑할 줄은 몰랐던 빗줄기처럼 비는 마음껏 오는데 말라붙은 마음엔 눈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비가 내렸었다 찬 바람이 불던 날 딱 이맘때쯤이면 나는 말라붙은 맨드라미 꽃 한 송이가 되어.

맨드라미의 실로폰
/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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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1]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나를 찾아온 걸까 부푼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그저 스쳐 가기만 한다. 너는 내 뒤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나는 네게 그저 잔바람 같은 사소한 것이었을까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너는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는 걸까

바람
/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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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 [1]

바람이 불지 않는 적막한 머릿속에 틀어박혀 고요함으로 너를 부르는 일 바람이 불지 않는 하얀 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열린 창으로 너를 그리는 일 계속 불러봐도 오지 않는 작은 바램은 너의 짙은 향수를 기억할 뿐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헛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불지 않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너도 나를 바랬기를 바라는 헛된 바램은 하얀 바람이 되어 어두운 창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너를 바라고 있었다.

흰 바람
이기인 /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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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작아질 수 있을까 [1]

시인이 된다는 건 세상에 혼자 남는 일 외로운 일 왜 외로운지 알게 되는 일 나 스스로 한 없이 작아지는 일 세상은 왜 외롭고 허전하고 쓸쓸해야만 하는가 바람 부는 언덕에 선 윤동주의 길을 걸으면서도 오르기가 두려운 건 왜일까 나는 바람 앞에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가 나는 아직 그의 발뒤꿈치만큼도..

얼마나 작아질 수 있을까
/ 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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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음 (수정 시) [1]

모래 쓸리는 소리 거품 터지는 소리 파도가 친다 맘도 없으면서 매일같이 친다 파도가 치면 내 머릿속엔 거품소리 밖에 남지 않는데 짓궂게 또 친다 너도 그리워서 나를 보러 오는 걸까 파도가 치면 또다시 거품소리 모래 쓸리는 소리 나는 수포음으로 만신창이가 된 하얀, 모래밭에서

수포음 (수정 시)
/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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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될 때까지 있었다 [1]

벚꽃도 지는 때가 있는 법이라 나는 가만히 내가 호수가 될 때까지 있었다. 숨을 죽이면 잊혀지는 하얀 불꽃이 재를 남길 때까지 있었다. 잊혀지지 않은 이름은 마치 꿈처럼 밑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리고 잊혀진 눈물은 호수 한가운데 살며시 포개어지는 때 캄캄한 정오에서 나는 가만히 호수가 된다 꽃잎이 깊은 곳에 하나 둘 쌓여가는 걸 당신이 알 리 없으니 나는 가만히 호수가 될 때까지 있었다

호수가 될 때까지 있었다
/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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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음 [1]

모래 쓸리는 소리 거품 터지는 소리 파도가 친다 맘도 없으면서 매일같이 친다 파도가 치면 내 머릿속엔 거품소리 밖엔 남지 않는데 짓궂게 또 친다 너도 그리워서 나를 보러 오는 걸까 파도가 치면 또다시 거품소리 모래 쓸리는 소리 나는 수포음으로 만신창이가 된 해변에서

수포음
/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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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에서 사공을 잃었어 [1]

낙동강에서 사공을 잃었어 별생각 없이 슬퍼하기만 했는데 줄에 묶여 한 세월 보내는 일은 또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러다 당신이 와서 내 옆에 앉았네 저 반대편에 가고 싶었던지 말을 걸었어 사공이 없어서 데려다줄 수 없다고 궁금했어 당신이 정말 나를 타러 왔을까 내심 바랬지 사공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면 좋을 텐데 낙동강에서 당신을 만났어 매일 볼 수 있다면 행복하기만 할텐데

낙동강에서 사공을 잃었어
/ 202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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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눈박이 물고기가 되지 못해서 [1]

들풀처럼 살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바람 부는 언덕 위에 서서 봄 오는, 빼앗긴 들을 보며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깨달았다면 보고 싶은 마음이 남도 삼백 리 상사호만 해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리웠다면 차가운 하늘에 따뜻한 문장 하나 적어둘 수 있었을 텐데 하긴 내가 쓴 시에게 나는 한 번이라도 연탄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한 번이라도 북관에 살아서 앓아본 적이 있었던가 풀잎 하나도 괴롭게 사랑하지 못한, 나는 외눈박이 물고기가 되지 못해서 /1-류시화「들풀」 2-윤동주「바람이 불어」「쉽게 쓰여진 시」 이상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3-박목월「나그네」 정지용「호수」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5-안도현 「연탄」 6-백석 7-류시화「외눈박이[…]

나는 외눈박이 물고기가 되지 못해서
/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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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1]

발이 닿지 않는 곳 새벽 별빛이 우겨들고 파아란 노을이 저무는 곳에서. 나는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불행한 짐승. 짐승의 그늘 아래에서 차마 천한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여기는 겨울.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이 오기 전에. 검은 뿔이 봉인된 작은 호리병의 마개를 쥐고있었다 추락하는. 자기상의 애착으로 간신히 붙들었던 파아란 자아의 끝은 짐승의 그늘 아래서 검붉은 피를 쏟아버리고. 차마 천한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영원한 겨울. 나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추락
/ 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