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임
덧붙이는 글 [8]

나와는 연도 없을 상들을 받아 출판되는 책보다는 아마추어가 쓴 투박한 글을 좋아합니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문장들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문장보다는 목구멍에 걸리는 일이 잦으니까요. 소화되지 않는 글들이 좋았어요. 소화가 되지 않은 채 오래오래 덩어리처럼 내 기억 한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기성 작가처럼 다듬어진 글은 써낼 자신이 없어서 투박한 글을 쓰는 법을 배웠어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홀로 좋아하는 글을 출력하고 필사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된 건 그것 때문이에요. 모서리가 거친 글을 좋아했고 그렇게 써도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잠깐 비겁한 변명 하나 할까요. 처음엔 다양한 작가의 글을 읽었지만 갈수록 폭이 좁아진 건 취향이[…]

덧붙이는 글
/ 2021-08-20
카임
구원은 셀프 [2]

(혐오 표현 주의!)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우면 밀려드는 잡생각들과 사이에 자리 차지한 박지운 이름 때문에 벽에 머리 처박고 처박고 처박다 호구같이 송우연한테 전화를 거는 건 일상이다. 송우연도 안다. 힘들 때마다 찾는 사람은 송우연인데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박지운인 거. 잡생각을 지우려 걜 이용한단 것도. 그런데 자꾸만 걘 좋아해요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너무 사랑해요 죽어 버리고 싶어요. 잔뜩 구겨진 포스트잇 위로 엉성하게 지워놓은 텍스트는 알아볼 수 있었고 그 밑에 적힌 본론에 난 또 쓰레기 된다. 저 이용해도 돼요.   구원은 셀프   미친놈은 미친놈끼리 연애해서 피해자를 최소화시켜야 한댔는데. 미친놈끼리 연애했더니 미친놈이 미친놈[…]

구원은 셀프
/ 2021-07-31
카임
소외된 모든 이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위로 : 날씨의 아이(2019) [1]

(글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오직 기도만으로 비 내리던 날씨를 맑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소녀는 흔히 생각하는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부모를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겨진 모습은 신이라기엔 초라한 행색이고, 그런 소녀를 지켜주려는 가출 소년은 갈 곳이 없어 오히려 소녀에게 지킴을 받는다. 멋대로 자연 현상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신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어째서 약자의 자리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을까. 영화 ‘날씨의 아이’는 소외된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왠지 숨이[…]

소외된 모든 이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위로 : 날씨의 아이(2019)
/ 2021-07-21
카임
수몰 [2]

※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폭력, 자살, 자해 등)

목을 매고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들렀다. 생전 별로 생각하고 살지 않던 친구가 사진으로 박제되어있는 모습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건 낯설어서였고 자꾸 우는 사람들 틈에서 억지로 쑤셔 넣은 육개장은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모조리 토했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잊고 지낸 그 친구 같아서 자꾸 얼굴을 대입해 보는 게 역겨웠다. 집에 들어가기 전 소금을 뿌렸다.   오랜만인 이름으로 걸려온 전화에 외출했다. 장례식에서 재회한 하은은 죽은 친구의 중학교 시절 동아리 직속 후배였고 대학에 들어간 후엔 함께 살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등교할 때면 이따금 스피커로 들리던 노래들이 죽은 친구의 선곡이었단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와 동시에[…]

수몰
/ 2021-07-20
카임
안티 [2]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여행할 계획을 세웠지 철없는 어린애처럼 우린 태양이 내리쬐던 날 부모를 잃은 고아와 폭우가 쏟아지던 날 목줄이 끊어진 개를 닮았어 거지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궁핍하게 핥으며 고민하던 그해 여름.   우리는 물 대신 기름을 먹여 키운 꿈들을 뱃속에 욱여넣으며 바닥을 기었지 기름은 물보다 가벼우니 기름을 먹인 꿈들이 하늘을 날 거라고 믿으며 서로의 손을 잡았지 날개를 엮듯이.

안티
/ 2021-07-07
카임
우리 집 금붕어는 배를 뒤집고 죽지 않았다 [2]

우리 집 금붕어는 배를 뒤집고 죽지 않았다. 할머니네 집 금붕어는 날이 더워 배를 뒤집은 채 쪄 죽었고 이전에 키우던 금붕어는 엄마가 먹이를 한 움큼 던져주는 바람에 배가 터져 죽었다. 좋아하는 시에선 ‘열 마리 모래무지를 담아두었는데 바다로 돌려보낼 때 배를 드러낸 채 헤엄치지 못했다고 했다.’*란 구절이 나오고 읽었던 소설에선 배 터져 죽은 금붕어가 어항 위를 떠다니고 있었는데, 우리 집 금붕어는 배를 뒤집고 죽지 않았다.   “금붕어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더라.” 언니에게 말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엿들으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던 금붕어의 죽음은 온통 배를 뒤집은 채 수면 위를 방황하는 모습뿐인데 그 금붕어는[…]

우리 집 금붕어는 배를 뒤집고 죽지 않았다
/ 2021-06-29
카임
낭만 상실 [4]

지구가 낭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믿는 사람은 이미 철저히 무너져있는 채란 걸 너를 보며 알았어. 날 때부터 낭만에 기대는 법을 배운 사람은 낭만에 기생해 살아갈 줄은 알지만, 낭만 같은 거 없는 세상에선 그야말로 고아가 된단 걸. 지구에 남은 낭만은 이제 더 없지만, 너는 그걸 몰랐고 나는 그걸 알았지. 하지만 함부로 낭만을 꿈꾸는 너한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낭만은 멸종했지만 너는 멸종하면 안 되니까 그랬어. 그래서 입을 다물었어.   너. 또래보다 유독 어려 보이던 너. 교복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다니지만 넥타이는 항상 엉성하게 매던 너. 그 넥타이가 올가미 되어 네[…]

낭만 상실
/ 2021-06-17
카임
종의 기원 [6]

※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폭력, 자살, 자해 등)

결핍된 것 없이 자랐으나 결핍된 것마냥 구는 버릇이 있었다. 겨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손톱을 뜯었다. 뜯고 뜯고 뜯어서 피가 날 지경이 되어서야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갔다. 입가엔 피를 묻힌 채였고 손톱은 엉망으로 뜯겨 울퉁불퉁했다. 단순히 어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치부하는 일이 잦았다. 짓이겨진 손끝에 반창고를 둘러주며 걔의 엄마는 말했다. 해운아 일주일 동안 손톱 안 물어뜯고 얌전히 있으면 엄마가 상 줄게. 태생이 물욕이 없어 상 같은 거엔 관심 없었다. 그래도 눈 맞추며 그 말을 하는 엄마의 검은 눈동자가 너무 생생해서 그날부로 손톱 물어뜯는 일을 관뒀다. 그리고 살을 파먹었다. 시작은 손톱의 거스러미였다.[…]

종의 기원
/ 2021-05-09
카임
한(恨) [1]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선 과거와 미래를 버려야 한다. 한은 그걸 가출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실종됐다. 할머니 손에 길러졌고 중학교 졸업식 날 이름 모를 사촌 집으로 옮겨갔다. 한을 교묘하게 죽이려 들었던 건 아녔지만 그래도 숨이 막혀서. 눈치와 스트레스가 얽혀 걔의 몸을 뒤덮을 때쯤에 사촌과 잤고, 그날 가출했다. 어린애가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했던 생각이 나는 나를 버려야 한다. 오로지 현재의 나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 외의 나는 버려야 한다. 버려진 한의 몸은 금방 부패해 악취가 풍기겠지만 그런 걸 견디지 못하면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슈퍼 앞에서 한은[…]

한(恨)
/ 2020-12-02
카임
[6]

미움 같은 거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지만 실은 누구보다 미움받고 있단 거. 누구나 꿰뚫을 수 있게 투명막으로 제작된 걔의 껍데기는 벗겨낼수록 탁해져서 결국엔 잔뜩 난도질당한 채 발견돼도 그 속을 아는 건 처참한 시체뿐이었고 사랑 같은 거에 목매달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정신 차리니 수면 위를 방황 중인 익사체는 누구의 몸이지. 할 줄 아는 거라곤 정신 나간 놈처럼 입 놀리기와 엿 같은 키스 스킬 남발밖에 없는 아가리는 억지로 소주병 꽂아 쌉치고 있지 않으면 때때로 시한폭탄이 돼서 내 앞길을 터뜨렸다.   석철이가 그랬다. 넌 술에 취할수록 제정신 되는데 완전히 정상인 되려면 몇[…]

/ 202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