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의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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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 운동장에 깔린 인공잔디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밟으면 사각, 하고 소리가 날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발을 내디뎠지만 살짝 미끄러짐과 동시에 끽, 하고 고무가 쓸리는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365일 초록색인 인공잔디가 깔린 운동장 주위는 빨간 우레탄 트랙으로 둘러싸였고, 도로 쪽에는 침엽수가 심어져 있었는데 족히 4에서 5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중 하나에는 새 둥지가 틀어져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나뭇가지 사이로 둥지가 보였다. 그것은 내가 입학할 때에도 있었고 졸업할 때까지도 있었다.
방과 후 유진이와 나는 운동장 청소를 했다. 운동장 청소라고 해봐야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운동장 한 바퀴를 돌며 쓰레기를 줍는 것뿐인 데다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청소가 끝나면 담당 선생님께서 수고했다며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것을 주셨다.
한겨울이 되어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 날 유진이는 벙어리장갑을 끼고 나왔었다. 하지만 집게를 잡는 데 불편하다며 다음날부터는 노란색 털장갑을 끼고 나왔다. 반면에 나는 늘 맨손이었다.
“이 나뭇잎 그 뭐더라, 삼엽충처럼 생기지 않았어?” 나무 밑을 지나가며 청소를 하던 중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침엽수 잎들을 본 유진이가 말했다.
나는 그 나뭇잎을 들여다보았다. 삼엽충이라, 내 기억 속의 삼엽충은 징그러운 벌레 같은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방 더듬이를 닮은 것 같았다.
“잘 모르겠어. 삼엽충은 오히려 번데기를 닮지 않았나?” 그러고는 먹는 거 말이야, 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유진이도 그 나뭇잎을 노려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유진이는 그 나뭇잎 중 하나를 주워들더니 흙과 먼지를 털어내려는지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하지만 잎들은 그저 맥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기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지 너무 오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보며 유진이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꽃을 보는 것처럼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새로 하나를 주워들어 살짝 흔들어서 먼지를 털어내고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사이에 끼워 넣었다. 내가 어디에 쓸 거냐고 물어보자 책상유리 밑에 넣어둘 거라고 답했다. 네잎클로버도 아니고, 이런 낙엽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오히려 코팅해서 책갈피로 쓸 거라고 하면 나름대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책상유리 밑에 넣어둘 거라니. 이제껏 보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진이의 이러한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뒷정리를 마치고 열쇠를 선생님께 드린 후에야 하굣길에 올랐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나는 휴대전화로 SNS를 들여다보았다. 늘 비슷한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오지만 이상하게 질리지도 않았다. 반면에 유진이는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책을 읽었었다. 아니, 우리 반 모두가 책을 읽었었다. 순전히 유행과 분위기 탓이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너도나도 책을 읽었었다. 하지만 다들 얼마 안 되어 평소처럼 수다를 떨거나 장난을 치거나 쪽잠을 잤다. 하지만 원래 책을 좋아하고 곧잘 읽던 유진이는 계속 책을 읽었다. 유진이의 가방 안에는 늘 그녀가 읽는 책들이 들어있었고 주머니 속에는 갈색 표지로 된 문고본을 들고 다녔다.
신호가 바뀔 무렵, 유진이는 책에서 눈을 떼고 살짝 고개를 들더니 어딘가로 달려갔다. 나는 유진이가 어디로 가는지 대충 지레짐작 하며 터벅터벅 뒤따라갔다.
나는 유진이를 따라 어느 공원으로 들어갔다. 등받이 없는 벤치로 둘러싸인 은행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었다. 하지만 계절도 계절인지라 잡초 하나 없이 전부 갈색뿐인 공원이 자꾸만 밋밋하게 느껴졌다. 유진이는 어느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주웠다.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노란빛이 꺼지고 갈색만 남은 은행잎이었다. 그 옆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쁜 것도 아니고, 가만히 기다린다고 문제될 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서서 기다리는데 지나가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우리를 향해 속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유진이의 손을 붙잡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유진이와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에서였다. 그때도 유진이는 낙엽을 줍고 있었다. 같이 놀다가도 낙엽만 보면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유진이가 처음엔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매년 가을만 되면 그러는 모습을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오히려 나까지 같이 달려 나가 낙엽을 주웠다.
그렇게 한참을 줍다가 지치면 우리는 유진이의 집에 가서 하루 동안 모은 낙엽을 정리했다. 유진이의 책상 위에 펼쳐놓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개만 고르고 나머지는 버렸다.
유진이의 방에 놓인 책상은 갈색이었다. 그 책상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갈색 페인트가 칠해진 것도 아니었다. 책상다리와 옆면, 부속품으로 있는 책장은 흰색이었으니까. 책상유리 밑이 온통 갈색 낙엽으로 빈틈없이 메워진 것이었다. 마치 낙엽이 책상유리 밑을 점령해버린 것 같았다. 지금의 나라면 어안이 벙벙했을 테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마냥 신기해했다.
“내 보물이야!”
유진이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멋지다고 칭찬했다.
책상유리 밑을 점령한 낙엽들은 단풍, 은행, 전나무, 플라타너스 등, 내가 아는 것도 있었지만 난생처음 보거나 이름을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그 낙엽들을 보면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카락이 희끗거리게 되고 이윽고 백발이 되는 것 처럼, 저들도 계절을 보내면서 초록색 물이 빠지고 본래의 갈색만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 우리에게 유진이의 아버지가 과자와 주스를 가져다주셨다. 나는 양손으로 컵을 잡고 홀짝홀짝 마셨다.
“저 낙엽들 좀 버리라고 해도, 도저히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낙엽을 바라보는 유진이의 아버지에게 나는 항의하듯이 말했다.
“왜냐면 유진이의 보물인 걸요!”
그 말을 들은 유진이의 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그래, 유진이에게 보물이면 나한테도 보물이지” 라고 하셨다.
그 뒤로도 우리는 낙엽을 주우러 다녔다. 낙엽을 주워놓았다가 유진이를 만나면 새 낙엽을 주웠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래 흥미가 없는 일에는 금방 질리는 법이다. 나 또한 낙엽 줍기에 금방 질려버렸다. 그래도 유진이와 함께라면 곧잘 낙엽을 주우러 나갔다. 낙엽을 주우러 간다는 생각보다 유진이와 놀러 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유진이와는 여전히 친구로 지냈다.

나는 한 번도 유진이의 어머니를 뵌 적이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나 스스로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이야기만은 꺼내면 안 되겠다고, 꺼내면 괜스레 어색한 분위기가 될 거라고. 그러나 중학교 졸업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제주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창가에 앉은 유진이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유진이에게 조잘거렸다. 이따금 유진이는 풋, 하고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엄마가 올 때 기념품 사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거 있지? 초콜릿 사다 주면 되려나. 너네 엄마는 뭐라셔?”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유진이는 내 눈을 보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목 언저리를 보더니 서글픈 미소를 짓고는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울 엄마,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어. 그래선지 사진을 보지 않으면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더라. 그런데 그 사진마저 잃어버려서, 지금은 거의 기억도 안 나지만.”
처음으로 들은 유진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을 들은 듯했다. 괜스레 유진이에게 미안해져 훌쩍이면서 우는 나를 유진이가 아무런 일도 아닌데 왜 우냐며 달래주었다.

우리는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했다. 일반 사립 고등학교였다. 나는 6반이었고, 유진이는 4반이었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중에서도 남자였다면 틀림없이 반했을 것 같은 외모에 논술을 잘했던 채원과 특히 친하게 지냈다. 유진이는 여전히 낙엽을 주웠고, 나는 그것을 그러려니 하며 지냈다
“4반에 허유진이란 애. 좀 이상하지 않아?”
일 년이 거의 끝나가는 11월 말, 같은 반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중 누군가 말했다.
주변은 “맞아. 어린애처럼 낙엽이나 줍고 다니던데.” “바보 같아.” 라며 동의했다.
나는 분위기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유진이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낙엽을 줍는 것은 내게는 별것 아니었지만 올해 유진이를 처음 본 그들은 유진이와 친구도 아닐뿐더러 유진이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왜들 그래. 그러지 마. 그게 뭐 어때서.” 내 옆에 서 있던 채원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소현아 너, 허유진하고 친하지 않아?”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가 내게 물었다.
채원이 그러지 말라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뭐라고 답할지 고민했다. 유진이는 내 친구가 맞지만, 분위기상 그렇다고 밝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나까지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내 인생 가장 잔인하고 후회되는 선택을 했다.
“내가? 미쳤냐?”
부인하는 건, 물을 한 잔 마시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결국 나는 타협을 한 것이다. 현아와 유진이 사이에서, 어쩌면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이번에도 타인의 시선이 원인이었다.
그 날 저녁에 침대에 엎드려 오늘 있었던 일들을 후회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유진이와 잘 지내면 될 거라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용서했다. 하지만 막상 다음 날 유진이에게 말을 걸려니,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나도 유진이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유진이보다는 다른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게다가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되어도 유진이와는 같은 반이 되지 않았다. 내심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진이와 다시 가까워질 기회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내가 유진이와 점점 멀어진 만큼 채원이 유진이 곁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진이는 나로부터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진이가 어딘가 변했다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9월 모의고사를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같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크림색이었을 타일은 오래되어 옅은 회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반대편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처음 유진이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 유진이를 쫓았다. 왠지 물에 젖어 몸에 들러붙은 옷을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진이는 계단을 올랐다. 그러고는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았다. 그 계단은 철책으로 가로막혀 있었지만, 높이가 낮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유진이는 그걸 넘으려 했다. 하지만 분명 옥상으로 나가는 문은 잠겨있을 텐데.
“유진아.” 나는 유진이를 불러 세웠다.
유진이는 철책을 넘으려던 것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너, 너네 반 애들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적정 돼서 따라왔어.”
유진이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철책을 휙 넘어버리고는 위로 올라가 버렸다. 나도 철책을 넘어 계단을 올랐다.
“허유진. 왜 그래.”
유진이는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동안이었지만 눈시울이 붉었고 입은 힘을 주어 일 자로 앙다물어져 있었다. 하지만 곧 얼굴은 풀어지고 서글픈 미소를 띠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유진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 아무도 안 오거든. 그래서 가끔 슬플 때 혼자 와.” 그렇게 말하고는 적갈색 창틀에 걸터앉았다.
나는 맞은편 벽에 기대었다. 한 손으로는 팔꿈치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9월의 벽은 시원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끈적거린다고나 할까. 벽의 온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만은 확실했다.
“이런 거,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불현듯 유진이가 말했다.
나는 유진이를 바라보았지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얼굴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뭐가 안 좋은 건데?”
“나한테 말 거는 거. 그거 하지 마.”
전혀 예상외의 말을 들어서 그런가, 머릿속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관지로 들어오고 나가는 공기가 온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더웠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명료하게 답이 돌아왔다.
“네가 불편해서.”
나는 무언가를 검색하고 잠시 딜레이가 생기는 것처럼 잠시 멍하니 있었다. 유진이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오해하진 말아줘. 너만 불편하다는 게 아니야. 그냥 사람이란 것이 불편해. 너도, 선생님도, 학생들도,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부모님도, 심지어 나까지도.”
나는 유진이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뒤를 돌며 생각했다. 나도 낙엽 같은 거나 줍는 네가 불편했거든.
그 뒤로 나는 유진이와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다. 말을 섞을 일이 생긴다면 온갖 핑계를 대어 그 상황을 피해갔다. 유진이와 어색해진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유진이가 싫어졌다. 그것 때문이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함께했던 우리는 결국 대학교에서 갈라지고 말았다. 유진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지방 국립대학교에 진학했다. 십여 년의 인연도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언젠가 유진이에게 낙엽을 줍는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지 유진이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글쎄. 말하기 좀 그런데.”
유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배시시 웃다가 이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나도 캐물을 만큼 궁금하지는 않아서 더는 묻지는 않았다. 만약 궁금했다고 해도 굳이 대답하기 싫다는데 나도 더 묻기는 싫었다.
서글픈 미소.
유진이는 종종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난 지금 우울하지만 괜찮다고, 지금 내가 이런 기분인 데에 너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다른 누군가가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절대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어느덧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일요일 저녁,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고 길을 걸으며 아까 봤던 토끼인형의 성별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하는 쓸데없는 짓은 즐거웠다. 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 유진이의 아버지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딱히 유진이의 아버지가 나에게 연락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전화를 건 사람이 유진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친구에게 잠시만, 이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똑같이 여보세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 유진이의 아버지였다.잘 지내셨어요, 어쩐 일이세요. 습관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유진이의 아버지는 잘 지냈다고 대답하시고는 다른 화제를 꺼내셨다. 하지만 나는 얼마 가지 못해 통화를 이어가는 것에 지치고 말았다. 누가 보더라고 억지로 통화를 이어나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고자 했다. 옆에 남자친구도 있고, 유진이의 아버지와 전화를 하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이의 아버지는 이야기를 길게 끄셨다. 고등학생 때 유진이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우리 아빠, 곤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앞에 말을 많이 해, 라고.
“저, 무슨 일 있으세요?” 참다못한 나는 결국 그렇게 물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놓였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열어 무언가를 힘겹게 꺼내듯이 말하셨다.
유진이가 죽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선명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들렸다. 유진이가 죽었다고.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유진이의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을 것 같지도 않고, 나도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어두운 이야기에 대해서는 깊게 알려 하지 않는다.
남자친구와는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머릿속의 신경들이 산만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검은 원피스로 갈아입고 귀고리와 목걸이도 풀었다. 남자친구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괜히 그에게 유진이의 죽음에 대한 설움을 풀어버릴까 봐 끝내 거절했다.
장례식장 입구에 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유진이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빈소가 있는 3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 4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 짧았다. 뭔가를 생각하기에는, 참회의 기도를 드리기에는 더더욱.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안에서 여자 한 명이 내렸다. 채원이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채원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냥 지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채원을 나는 불러 세울 수 없었다. 결국, 엘리베이터에 타 3이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는 것밖에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사람이 거의 없어 들려오는 소리라곤 두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뿐이었다.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든 데 있어 내가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장례식장에 계속 있으려니 내가 마치 교회 안에 숨어들어온 범죄자인 듯한 기분이 들어 서둘러 나가려고 했다. 막 나가려던 찰나에 뒤에서 유진이의 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잠시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유진이와 닮은. 아니, 유진이가 닮은 그 아버지의 눈동자와 눈매는 나로 하여금 유진이가 떠오르게 했다. 유진이의 아버지가 벽에 기대어 앉으시기에 나도 따라서 벽에 기대고 앉았다. 이야기는 대부분 유진이에 관한 것이었다.
“유진이가 그렇게 낙엽에 집착한 이유, 알고 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는데, 대답 안 해주더라고요. 저도 캐묻지는 않았지만.”
“난 대충 알 것 같다.” 유진이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으셨다. “유진이가 엄마 없이 컸잖냐. 그래선지 철이 일찍 들었거든. 언제였더라, 일하고 돌아오니까 유진이가 밥 먹으라면서 상을 차려놓은 거 있지. 그러고 보니 유진이 엄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 게 단풍잎 책갈피였지. 너도 봤으려나 모르겠다. 그, 가운데에 단풍잎 모양 구멍이 난 책갈피. 그거 유진이 엄마가 직접 단풍잎 주워다가 만들어서 유진이한테 준 거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는 그 책갈피를 본 적이 있었다. 유진이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문고판 책에 끼워 사용하던 건데, 코팅한 단풍잎 가운데에 같은 모양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신기하게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을 유지했다.
“그래서 유진이가 낙엽에 집착하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그렇게 말하시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시더니 말을 이으셨다. “유진이 엄마는 유진이가 돌이었던 해 가을부터 매년 낙엽구경을 하러 나들이를 갔었거든. 유진이 엄마가 죽은 해에도 갔었어, 제 몸을 무리해서라도 말이야. 그래서 낙엽은 마지막으로 생긴 제 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 하고 소리가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리고 마치 물살에 떠밀려온 커다란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저씨, 사실은….”
유진이와 있었던 일을 전부 말씀드리려 했다. 하지만 유진이의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막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상자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걸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유진이의 유품인데. 버리는 것보다 너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받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상자를 받아들었지만 한참을 망설였다. 내가 과연 이걸 받아도 될까. 차라리 채원이에게 주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유진이한테 너는 마지막까지 친구였잖냐. 받아줘.”
‘너는 마지막까지 유진이의 친구였다’ 가 아니라 ‘유진이한테 너는 마지막까지 친구였다’ 라고 하신 게 마음에 걸렸다.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결국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손거울, 장신구, 안경 따위가 있었다. 맨 밑바닥을 들춰보니 작은 일기장과 갈색 천으로 된 커버가 씌워진 문고본이 한 권씩 들어있었다. 문고본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진이가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이었다. 무슨 책이기에 매일 들고 다녔던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커버를 벗겼다. 표지 귀퉁이에 검은색 네임펜으로 작게 ‘하루하루’라고 적혀 있었다. 일기장이었다. 여태까지 문고본이라 생각해온 것이 사실은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일기장을 꺼내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곳엔 삼행으로 된 문구가 하나 적혀 있었다.

태양 같은 정열
냇물 같은 끈기
앞으로, 앞으로

나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에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을 띤 단풍잎 책갈피. 유진이의 책갈피였다.
나는 첫 페이지로 돌아가 일기장을 천천히 읽어갔다. 일기는 유진이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유진이의 어머니의 것인지, 유진이의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아저씨, 유진이에게 유진이의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아마 이 일기장이 아닐까요.
그 말은 속 안에 고이 감춰두었다.
나머지 한 권도 일기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진이의 어머니의 것이 아닌 허유진 본인의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일기장을 펼쳤다.
그 일기장 첫 페이지에도 다른 필체지만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며 읽어나갔다. 그러자 내 안에서 뭔가가 응어리진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물이 되어 눈에 투명한 막처럼 고여 찰랑거리더니 이내 흘러내렸고 이윽고 오열로 변해 터져 나왔다. 나는 한참을 울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장례식장을 나섰다. 그저께, 아니.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회색 물감을 칠해놓은 듯 흐렸던 하늘은 색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 기분을 조롱하듯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그런 하늘을 몇 분 동안 바라보고 있으니 시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게 어지러울 정도로 맑은 하늘인가.
그제야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문고본을 읽으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전광판과 조명들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 밤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자 나는 읽고 있던 책 사이에 빨간 단풍잎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은 뒤 가던 길을 재촉했다.
거리는 한창 봄을 즐기고 있었다. 한층 풀린 날씨에 사람들은 이제야 잔뜩 껴입었던 옷을 한 꺼풀씩 줄이기 시작했다.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찰나, 시야 한구석에 뭔가가 들어왔다.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공원 벤치 위에 이제는 남아있을 리가 없는 샛노란 은행잎이 잠시 쉬어가는 행인처럼 앉아있었다. 그러나 곧 그 행인을 쫓아내듯 바람이 불어와 은행잎을 떠밀어냈다. 저 멀리 날아간 은행잎은 이윽고 밤의 거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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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청소년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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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어쩌다 글틴문학당에서 2015년 수상작품집을 받았는데요, 다른 년도 것도 읽고 싶은데 비매품이라고 되어 있어서.. 어떻게 얻을 방법이 있을까요?

(가급적이면 책으로 읽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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