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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1 [9]

……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미신적 기념물의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도덕과 언어는 극히 단순한 형태로 축소되었다, 마침내! 아르튀르 랭보, 「도시Ville」,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     가끔 내 이름 한가운데 박힌 예,가 미리 예豫가 아닌 예외例外의 예例가 아닐까 생각한다. 본보기 예例, 바깥 외外. 본보기의 바깥에 있다. 이 한 문장으로 살며 나는 오래 앓았다. 예외란 것이 어떨 때는 인간 치외법권이 된 양 아주 편리하지만, 실상 그런 이벤트가 부재한 대부분의 일상에선 아주 외롬뿐인 일이다. 지루함뿐인 일이다. 중학교 때까지 열심히 살았고 꽤 잘 살았다고 자부한다. 기껏해야 기이한 한국 셈법으로 십육 년 산 이들이 잘살지 않으면[…]

20211021
/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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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암전 [3]

1. 누구도 새의 비명을 기억하지 못한다 비상非常이다   피뢰침에 꽂힌 새까만 날개 차라리 벼락을 바랐던 나의 밤은 이제 무얼 먹고 살아가나   다시는 폐곡선에 갇히지 않는다 앙상한 덫을 피하지 않는다 던져 놓은 십자가를 입에 물고 폭풍 묻은 눈가를 비비고선   비행을 시작한다   내 울음은 누군가의 장마가 되고 하필 당신은 울기 좋은 계절 셈하지도 못할 무수한 물가에 우리 눈물 전부 널어놓았다   오늘 같이 있어주라 내일 내가 갈테니까   2. 아무도 새를 다시 본 일이 없다 비상飛上이다  

그리고, 암전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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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장지몽春醬之夢 [2]

성호각에서 시킨 만 팔천 원짜리, 커플 B 세트 말고 삐쎄트만 오면, 응, B 세트보단 삐쎄트가 결연하니까, 독촉해도 느긋이 와 불어 터진 그것만 다 먹으면, 단골 서비스로 같이 온 빼갈 코를 쥐어 막고 꿀꺽 삼키면, 눈물과 비명이 섞인 하여튼 뜨끈한 응어리가 가슴골을 훑는 야릇한 기분에, 마주 보고 실실 웃다 땀 닦고서 낮잠 두 시간만 자고 나면, 그릇 가지러 온 배달원의 지친 노크 소리에 깨고 나면,   우리 다시 태어나자 날카로운 성장통을 온몸에 바르고 세상의 희미한 오줌 구멍으로 미끄러지자 빛이 있다고 믿는 건 덤이겠지 막연함은 초음파 사진 같은 거라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춘장지몽春醬之夢
/ 20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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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너무 야릇했었지 [5]

여름이 오면 나는 사람이 더 더 더 싫어지고, 뭉툭한 손톱으로 긁어모은 욕심과 희망으로 체하느라 허기를 잃는다. 다른 사람이랑 그림자조차 닿기 싫은 나는 간신히 여름을 버틴다. 그럼에도 사랑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랑을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네가 사람 때문에 울지 않고, 아무리 날이 덥더라도 내가 그렇게 미운 애는 아니라는 걸 알아보면 좋겠다. ⠀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 잔의 물. 그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지난 여름 너무 야릇했었지
/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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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3]

1. 엄마는 싫어했다 내 허벅지의 탱화 문신을 2. 넌 모태신앙이잖니 개뿔 나는 나를 믿는 법조차 모른다 3. 나무아미타불 귀신조차 날 믿지 않는다 미열은 신병으로 고쳐 쓸 수도 없었다 독한 게 붙어버렸어 딱한 것 죄인의 골격은 자주 우그러진다 만 원짜리 마리아 상은 더는 웃지 못하고 관세음보살 엄마는 밤마다 내 죄악을 쌀독에 옮겨 담는다 용서는 삶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꿈을 쥐고 태어난 시퍼런 핏덩이로 축복을, 동시에 저주를 4. 항상 기다렸다, 짓누르는 눈빛을 참아가며, 기도 말고 내게 향할 두 손을 5. 단물 빠진 신앙을 우려먹으며 아사를 기다린다 동생들을 먹고 자라는 건 익숙하니까요 싸구려 문신이 번져 시커메진 허벅지로 꿈틀거린다 전부 다 타 버린 기대[…]

사도*
/ 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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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태신앙子胎信仰 [2]

엄마는 싫어했다 내 허벅지의 탱화 문신을 넌 모태신앙이잖니 개뿔 나는 나를 믿는 법조차 모른다 나무아미타불  귀신조차 날 믿지 않는다 미열은 신병으로도 고칠 수가 없었다 독한 게 붙어버렸어 딱한 것  무거운 걸 이고 다니는 사람의 골격은 뒤틀린다 엄마의 지옥은 지금의 생生이다 허벅지에 낸 구멍은 엄마를 위한 기도 부처의 얼굴은 만원짜리 십자가에 어울린다 관세음보살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무도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밤마다 엄마는 내 죄악을 뭉텅이로 잘라 먹는다 부처님은 먹는 게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란 것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마신 해골물은 엄마의 눈물로 간이 딱 맞았다 아직까지 엄마의 목소리가 더 커서 나는[…]

자태신앙子胎信仰
/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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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줄모르는시네키-드 [1]

눈알 대신 박아버린 중고 캠코더 드디어 보이는 건 덜 자란 어른들 아직까지 오줌 질질 싸며 꾸는 패륜의 꿈은 곧 각본이 되어 자, 누군가의 부모는 관람이 불가합니다   훔쳐온 교회의 시뻘건 조명과 외로움만 질질 흘리는 몸구멍들로 세상을 담을 준비는 끝났어 세상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지만 원래 처음은 다 그런 법일 걸   한숨으로 닦아낸 뷰파인더에선 드디어 보인다 보여 건조한 형광등 아래 널부러진 계집 울부짖는다 어차피 이건 무성 영화지만   한참을 빨아 겨우 세웠네 단단해진 영사기는 뿜어낸다 발가벗은 어제들을 죽일 듯이 쫓아온다 도망간다 죽을 듯이 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 달다 턱 아래의 급박함은 항상 달아서[…]

할줄모르는시네키-드
/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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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하 후 하 [3]

누군가 여행에서 사다 준 인도풍의 가방을 끌어안고 이국적인 향의 그리움을 내뱉다가 나는 가끔 죽는다   나그참파 자욱한 단칸방에서 실컷 피우던 담배가 다시 보니 엄마의 등골 뼛조각이었을 때 어질어질 청춘을 너의 손에 쥐어주고 나는 기껏 죽는다   낭만을 먹고 살 수 없는 등신들은 배가 곯아 서로를 삼킨다 봄에는 몸이 달거든요 아직 여름이 안 와서 다행이에요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아 미니멀리즘 우울증을 갖게 된 것 같아 마음 깊이 박힌 삿대질을 빼지도 못하면서 그제서야 나는 죽는다   서걱서걱 눈썹을 다듬다 괜히 삶도 다듬고 싶어진다 가만히 앉아 고쳐가는 혈관들에 나는 천천히[…]

후 하 후 하
/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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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만한 창세기 (퇴고作) [1]

씬 1 레디, 액션.   자자, 어차피 이번 촬영은 30년도 안 된다고 하니까 열심히 하자구요, 그정도는 이 판에선 굉장히 짧은 거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여러분, 이제부턴 내가 술 들어가니까 그냥 하는 말이에요, 오프 더 레코드, 알지? 아마추어 아니잖아. 아니 글쎄, 이 시나리오 원래 크랭크 인조차 안 들어갈 수도 있었대. 아, 왜긴 왜야. 재미도 없고, 임팩트도 없으니까 그렇지. 바로 직전에 나왔던 시나리오는 죽어버렸어. 몰라, 그때 교통사고 나서 배우가 확 뒤져버렸다고 했나? 두 명의 목숨값을 갖고 태어난 거야, 이 애새끼는 처음부터. 에이, 정 스탭, 뭐가 불쌍해. 다 자기 팔자인 거지.   첫[…]

코딱지만한 창세기 (퇴고作)
/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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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올해 수상 발표 일정 [1] 가고일 2022-04-20 Hit : 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