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연
어린 나를 용서하는 일 [1]

어린 나는 조용한 악보 위에 얹혀진 채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노래 위에서 걸음마를 시작했다 얇은 동화책에 스며든 색색의 안개를 보며 자랐다 유리창 밖에는 빛나는 해 또는 빛나는 달 작은 눈으로 담은 아주 작은 세상의 모습들   시간은 지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 온몸에 달라붙은 살이 연약한 마음을 묶어 둔다 유리창 밖에는 검은 새벽 또는 검은 밤 나는 동 트기 직전에야 눈을 뜬 새끼 새 같다 악보의 흐름을 대충 읽어갈 수 있을 때쯤 되풀이되는 가사가 끝나기를 바라게 될 때쯤에   나는 어린 나를 용서한다 그 애가 잘못한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린 나를 용서하는 일
/ 2017-08-27
박채연
딱딱한 숲 [1]

나무 우거진 숲 깊은 산속에서 서로의 몸을 찌르며 햇빛조차 보지 못하도록 가지를 드리운다 여기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성장 경기장 호루라기 소리 대신 앳된 울음소리에서 싸움은 시작한다 우리의 뿌리에서는 단단한 발톱이 솟아오르는 중 서로를 해치기 위한 애틋한 발길질들이 나뒹구는 숲속 산신령님 제 말이 들리신다면 제게 날카로운 이빨이라도 몇 개 만들어주세요 숲에서 가장 으뜸가는 나무가 될게요 약속해요   그러자 옆에서 들려오는 말 너 그거 아니 이 땅의 칠할이 우리같은 나무들로 득시글거려 벌레와 먼지들 속에서 하루에도 몇만 다발의 가지가 잘려나가고 불 속에 포근히 안겨 제 몸을 태우며 행복한 외출을 떠나는 과정[…]

딱딱한 숲
/ 2017-05-22
박채연
방구석에서 [4]

방구석에서는 방 안이 더 잘 보인다 고로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아픔을 찾고 싶을 때 방 귀퉁이에 가서 웅크려 앉고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곤 하는 것이다   방구석에서는 빛나는 표면을 가진 로봇이 더 잘 보인다 단단한 발을 딛고 빌딩마냥 높이 솟은 로봇 선반 위에서 방 안을 훑어보듯 거만한 자세로 방의 주인인 나마저 내려다보고 있다   방구석에서는 낡아 헤진 헝겊 인형들이 더 잘 보인다 일어나지도 못해서 찬 바닥에 등을 대고 살며 초롱초롱한 플라스틱제 눈으로 천장만을 보다가 끝내는 먼지와 함께 숨쉬게 된 것들이다   방구석에서는 모든 게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유일하게 보이지[…]

방구석에서
/ 2017-04-09
박채연
미카 [3]

미카가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책상은 더러웠다. 그리다 만 장난감 도안들과 부러진 연필심들이 미카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미카는 흑연이 묻어 거뭇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새하얀 비듬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미카는 새삼스레 짜증이 났다. 모든 것에 싫증을 느꼈다. 책상 한 켠에서 눈치를 보며 숨어있는 사탕 껍질들조차도 도무지 봐 줄 수가 없었다. 미카는 온갖 종이들을 다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지금 미카가 느끼는 이 증오스런 감정들은, 모두 오늘 아침의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카는 장난감 회사에 다녔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장난감을 구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부서의 디자이너들은 이 주에 한[…]

미카
/ 2017-03-31
박채연
사막 [1]

해에게 사랑받은 땅 저를 거스르는 물기 따위 모두 증발시키겠다며 햇살은 모래알 틈을 핏빛 양달로 물들였다   간혹 대지의 평화에 매료된 젊은 여행자들의 발자국이 보였고 낙타의 느릿한 걸음 아래 흙 위의 평화는 영원할 듯했다   그러나 여기는 서늘한 밤 무엇이 그 땅을 이렇게 만들었나 황량한 침묵을 간직한 세상이 낮의 체온을 잃고 죽어가는 순간에 해는 왜 그 땅을 외면했는가   밤새 바람이 땅을 난도질했다 해에게 사랑받아 모든 것을 잃었던 땅 뼈다귀만 남아 해쓱해진 모래알들이 소리 없이 잠들어가는 그곳은 사막이라 불렸다

사막
/ 2017-02-15
박채연
우리 [3]

선준은 그 애를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장에서 발견했다. 그 애가 쓰레기장 구석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있지 않았더라면, 선준은 그 애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었다. 무심해보이긴 하지만, 새로운 불운의 형태를 굳이 쓰레기장에 내려앉은 소년으로 상상해 볼 필요는 없었다. 선준이 고약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 숨을 참고 쓰레기 봉투를 던지고 있을 때, 그 애가 몸을 일으켰다. 그 애는 조그만 머리를 쓰레기통의 질펀한 옆면에다 그대로 박았다. 아이는 잠에 취한 듯 휘청거렸다. 선준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주소와 집 전화번호와 재학 중인 학교의 이름 따위를 물었지만, 그 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 애는 해쓱한 얼굴로[…]

우리
/ 201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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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랜만에 와보네요 [1] 박채연 2020-11-13 Hit :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