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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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죽 >

 

기차가 오르는 사다리가 숨 쉬는 공간은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나

고향 길 내려가는 구두에는 누구의 온기가 스며들어

그리도 조용한 침묵에 시간을 터트리나

 

어릴 적 할머니의 서랍은 커다란 할아버지 통나무

구석 보름달은 조용한 동화를 담은 밤의 졸음이었다

할아버지는 좋은 나무라고 벌레 숨은 나무를 가져왔었다

 

할머니는 달동네 89번지 꼭대기 구름 한 덩이를 모아다가

쟁반 가득 손 위로 쏟아 부은 구름들을

할머니 소금물로 뭉근한 반죽을 한다

 

오늘의 숨이 가득 들어찬 오물을 언덕 높은 곳

고립된 전봇대 아래로 가득 토하면

고향 기차가 등 두들기는 흉내 내며 달려 온다

 

할머니 반죽 한 덩어리 속에는 고열과 울음과 그리움과

보석과 한숨과 악수가 뒤엉켜 술 한 잔 하고 있고

안주는 어느 동네의 츄리닝 색으로 맛을 짐작한다

 

서랍 구석에 자리 잡은 보름달은 어느새

할머니의 그리움과 악수가 덜어간 시끄러운 초승달이 되어

토끼 두 마리 방실웃음으로 한숨을 쪄냈다

 

기차 선로에는 달빛이 따뜻하게 스며들었는가

내가 흘린 구름반죽 이만큼을 버리고 남겨져

고향 길을 돌아가는 와중에 달동네 89번지 꼭대기본다

 

고향은 보름달이 부르는 자장가

할머니 반죽 속에 담긴 것들 안에 너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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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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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공간은 색종이처럼 평면이었다. 구석을 접고 접어 겨우 기댈 정도의 벽을 만들고 쉴 틈없이 숨 쉬어야하는 하루가 고통이었고. 하루는 아무도 없는 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소름끼쳐서 흰 물감을 쏟아부었다. 검은 색은 지워지지 않고 흰 물감을 삼켜버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쌓여가는 빨래들이 징그러워서 창 밖으로 내던졌지만 얼마 후 호통소리와 함께 다시 나에게 찾아와버렸다. 그날 생긴 상처가 배 아래에 남아있다. 따끔거렸거든, 하고 누구에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멀어지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단어에 항상 세뇌되어있었다. 먼지는 자라나고 머리 속에 뿌리를 내려 벗어나지 않았다. 쥐어뜯고싶은 것은 벽지뿐만이 아니었는데 나는 이 방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방 안에있는 모든것을 끌어안고 갈 수는 없으니까 라이터를 쥐었다. 태울 거라고는 담배밖에 없었다. 담배가 아니었으니 망정이지 담배였다면 나는 여기 없었다. 엄마는 엄마 아래 누구를 부를건지 나에게 물었는데 이해할 수가 없어서 관뒀다. 아마 앞의 말은 못들은 것 같다. 어쩌면 이 방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공간, 내 삶의 촛불은 담배 대신 종이. 밤이면 밤마다 찾아오는 좋은 구경거리가 여기 또 없지, 그렇지 아저씨.

 

"내 삶은 연기처럼 날아가버릴 것만 같지만, 마냥 그러기는 싫어서 연기()하는 중이야, 쉿, 연기(演技) 중인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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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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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고속도로 한 복판에 자리잡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찔한 바퀴들이 지나치는 낯선 이 곳에 흰 발을 들여놓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이 등 뒤에서 몰려오는 라일락 향기가 남자의 코를 찌르고 도망쳤다. 고양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꽃바람이 일고있다. 산 하나 깎아놓고 아스팔트 바닥만 채우면 그만인가, 페인트 노랗게 칠하고 가드레일 박아야지. 터널은 또 어쩔거야, 지금 있는 길로도 족해. 이쪽으로 주욱 길을 내어보겠다고 고양이와 맞선 이가 몇인가. 남자는 그 때마다 부는 바람을 눈에 넣었다. 거친 모래없이 아주 따가운 바람이다. 한참을 먼 평야만 바라조다가 반대편 고양이가 등을 보일 때, 남자는 고속도로 위에 서서 눈을 감았다.
 아찔한 바퀴들이 지나치는 낯선 이곳이다.
보라, 남자는 눈을 감고도 라일락 향기를 보았다.
 남자는 고양이도 라일락도 바람도 등에 지지 못한 채 이 세상 제일 무거운 짐을 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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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키가 제일 작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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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키가 제일 작을 때 >

 

도서관 800번대 한 쪽 구석 아무도 읽지 않는
표지 깨끗한 책들이 키재기를 한다
바코드 길이가 제일 긴 것도
맨 앞 종이가 가장 넓은 것도
강씨 성이 지은 것도 크지 않다고
너도나도 키작다고 숨어드는데
저 너머 운수 좋은 책 한 권이
제 표지 잃고서도 키가 크다 우쭐대면서
설렁탕 파 냄새 풍기고 있다
글자이 피어나는 동백꽃이 제 몸 문신처럼 박혀있으니
싸울테면 닭 한 마리 구해오라며 삶은 감자 한 입에 넣자
책꽃이 너머로 비상을 한다
여기 저기 종이 소리 낮게 퍼지는
숨 소리 가득한 이 전쟁터에서
여전히 키재기하는 그들의 삶은 작아지고
어린아이 교복입는 날 서점에도
설렁탕 파 냄새가 기계음낸다
작아진 삶은 도서관에 처박힐텐가
평생을 한 책장에 바쳐 심해에 침전한
젖지 않던 종이는 오늘
겨우 눈물에 젖어 숨을 쉰다

 

시인이 읽던 책 제목이 말을 건다
내 키가 제일 낮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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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천장이 하늘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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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커먼 천장이 하늘에 걸려있다 >

 

빨간 숲 나무 사이로 달려가는 저 춤이
오늘 내 밤 한 더미 앗아간 자리
눈 뜨고 찾으면 시커먼 천장이 하늘에 걸려있다

 

시린 발 위로 드나드는 푸근한 졸음
구름마냥 감싸안아 창 밖으로 나를 내던지고
얕은 바다 위에 돋아나는 보라색 새싹들이 반겨오는
쌉쌀한 밤 한 더미

 

눈을 감고 눈동자를 굴려대면 엄마가
한 장 두 장 넘기는 성 벽 틈 사이로
늑대 털이 솟아난다

 

하늘 끝 구름에 닿는 저 성 꼭대기 옥상에도
빨간 숲 내달리던 그 춤이 발을 굴리고
이쑤시개 만큼이나 뾰족한 나무 칼 들고 늑대를 죽이러 간다

 

어깨를 덮는 이불 망토를 울음에 펄럭이며
계단 한 칸 한 칸 내달리는 모래 섞인 그림자
오늘 별이 떠오를 저 늑대의 숨통이 엄마 자장가에 달렸다

 

한 손에 들어오지도 않는 눈물 젖은 배게 방패
민달팽이마냥 나를 따라 졸졸 기어오고
어둡고 눅눅한 성벽에는 스탠드 불빛이 비춰진다

 

뛰어오른 저 성벽 위로 늑대꼬리가 나를 불러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구름 겨우 틀어막고
축축한 민달팽이를 품에 안으면
늑대가 달려올까

 

조용히 성 꼭대기를 바라보려 눈을 뜨면
시커먼 천장이 하늘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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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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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주인공 >

 

오늘은 어느 연극이 관객을 모실지 기대가 되나
아니 나는 이 극장도 선택되지 않을 것 같소
무대 위 조명도 보지 않고 빈 객석은 꿈도 꾸지 마세
낮에는 조명이 켜질 가치가 없지
쓰레기더미 홀로 파헤치는 저 고양이가 무대 주인공
별밤에는 흰 웨딩드레스 입은 저 곰인형이 2막 조연
빛은 어둠이 있어야 가치 있는 법
네가 있는 낮 어느 어둠도 보이지 않으니 뻔하지
무대 뒷편은 항상 심해였으니 오늘 당신도 관객
F열 중앙 23번 자리는 어제의 명당
창문도 굳게 닫혀 관객의 옥살이는 환호로 가득 차고
어둠 저 너머에는 벌써부터 고양이의 실루엣이 파란 춤추네
그렇담 볼만 하겠소 F열 중앙 23번 자리는 도대체 얼마요
어제 주인공은 고양이가 아니고 저 쓰러진 노인이었고
곰인형은 조연은 커녕 골목 구석에 있지도 않았소
그럼 어제와 다른 공연 아니오
자네는 골목을 모르지 않았나 어둠도 보지 않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지평선 너머 푸른 춤은 달리고 있으니
당신이 죽어갈 때 즈음 조명을 키겠소
어디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무대아래에서 보면
F열 중앙 23번자리가 비어져있소
좌석은 당신에게 줄 수 있으나 볼 수 없을거요

 

자 그럼 무대를 시작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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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요리는 소금맛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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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요리는 소금맛 구름 >

 

어머니는 세 달을 둥그런 배에 나를 태웠다
그 배에 올라 커다란 닻을 심해에 내려
저 바닥 아래로 몸을 둥굴린다

 

보이지 않는 숨 속에서 어머니는 요리를
심해의 뼛속이 가득 찰 때까지 나는 토라지고
어머니는 피도 쏟지 않고 배만 아프다고 뒹구른다
하늘 위에 다른 길이 막다른 길인지 맛을 보신 모양이다

 

작은 그릇 위에 떠오른 구름 조각들 짠 냄새 역겹다
엄마는 그것도 다 맞는 요리라며 한 데 넣고 젓는다
소금도 넣지 않고 간을 맞춘 요리가 넘쳐 심해에 침전해온다

 

배 위에 돛대는 우두커니 각이 진 면포를 끌어안는다
바람은 불지도 않는데 배만 움직여오고
파도는 배 밑 부분을 치다 마는데 검은 천이 펄럭인다

 

오늘도 엄마 요리가 구설수에 올라 납작한 그릇 밑바닥
심해는 오늘도 조용히 배 밑을 보고
뼛속은 채워지다 말고 울컥해 쏟아지기를 푸른 핏덩이다

 

말 없이 닻에 걸려 올려지고 그제야 배 위에 탄다
차갑고 빨간 노을이 수평선에 칼을 들이민다
그들도 적적히 요리를 할 텐가

 

엄마가 닻에 걸린 나를 납작한 그릇에
바람은 뺨을 치고 여행가는 배를 이끈다
하늘은 수많은 구름이 둥실
엄마는 어떤 구름을 요리에 넣었나

 

그날 밤 달에 비친 것은
엄마를 아프게 한 묽고 붉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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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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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ther.

 

소년의 엄마는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소년의 초점 없는 눈에 그렇게 말했다. 몇 번을 불러도 답을 하지 않는 그에게 고함치면서도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엄마는 또렷이 자신의 눈동자를 꿰뚫어보는 그를 향해 경멸을 내뱉었다. 원래부터 조심성이 없었고, 들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그의 잘못도 없었다고, 소년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렇게 소년의 엄마가 사라져갔다.

소년이 항상 들었던 그 말을, 언제부터인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낮의 햇볕이 들어올 때면 귓가에 울렸던 소근거림. 잡곡이 매번 늘어나던 그 식사의 시작을 알리던 목소리. 이제는 더 이상 소년이 들을 수가 없었다. 차가운 방바닥에 작게 웅크려 커다란 소리의 울림임이 분명한 어느 진동을 온 몸으로 느낄 때마다 소년은 더 작게 숨었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 하나하나 소년의 마음에 자리 잡아 커져가고 있었다. 말을 걸어주지 않아서, 소년은 이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소년에게만 하던 말이 그렇게 거품처럼 녹아내리고,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듣지 않아, 들을 수 없는 소년은 단지 목소리가 그리울 뿐인데. 그렇게 웅얼거렸던 소년이 이제는 마음의 안식을 무음에서 찾고 있었다.

밤마다 꼭 잡았던 엄마의 손길을, 소년은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르고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어느 소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어두운 방구석을 지키는 것이 그의 할 일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년은, 자신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꼼지락 거리다 보면 이제는 수긍하게 된다. 그저 눕고 낮추게 된다. 땅 아래의 전부가 된다.

언제부턴가 소년의 엄마는 엄마가 아니게 되었다. 소년은 그저 그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단지 A4용지 몇 장만으로,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은 표정을 한 아버지의 얼굴을 소년이 판단할 수는 없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던 아빠의 그 서늘함마저도 소년에게 그럴 권리는 없었던 것일까. 소년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년의 엄마는 그를 보며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년은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소년이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 듣지 못했던 것인지 스스로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 가운데에서, 붉은 인주와 손가락의 닳고 닳은 지문이 찍힌 종이가 펄럭일 뿐이었다. 그 양 쪽에 나란히, 두 소음이 아주 큰 진동으로 소년의 전부를 뚫고 지나가 퍼지는데, 그것 하나 듣지 못하고 허공을 빤히 바라보며 소년은 눈 앞을 지나는 먼지 한 톨을 보며 가엾게 고개를 두 어번 끄덕였을 뿐이다.

또 다른 여자는 아빠의 옆에 붙어 팔짱을 끼고 있었고, 소년은 단지 그 여자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소년의 중지 손가락 어딘가에 깊은 굳은 살이 박혀버렸다. 첫 번째 마디 안쪽, 검지와 닿은 곳에 굳은 잘은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소년이 매일 밤 어떤 낯선 여자의 만년필을 들고 조명에 비춰져 노랗게 물들은 종이 위로 잉크를 번질 때,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기는 커녕, 책상 앞 창문 너머로 비춰져오는 푸르고 하이얀 빛들이 그 소리를 묻어버렸다. 때문에 그 소리조차 소년은 들을 수 없었고, 그저 오래도록 노란 종이 위로 글 한 자 한 자를 써내려갈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소년은, 끄적이는 소리 조차도 느낄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감히 조심성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조용히 읊었다.

소년은 소리를 듣지 않으면, 자신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자기합리화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외롭게 자기합리화 했는데 지금은 언뜻 만족한 것 같았다. 소년은 자신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정말 보이지도 않는다면, 소년은 진정한 자신의 세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혹 눈을 감고, 노란 전등 아래에 웅크려 바닥으로 울리는 진동을 가만히 느꼈다.

그러면서 소년은 그리워했다. 이 노란 전등 아래보다, 차가운 진동이 울리는 바닥에 웅크렸을 때를. 그 때는 웅크리고 있으면, 바닥의 울림이 소년을 감싸 안고 소년을 달래주었다. 소년은 그 때 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막았다. 들리지 않기에 느낄 수 있는 소음의 그 진동과 울림은 큰 소리가 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소년은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적어도 소음은 아니었으니까.

소년이 끄적이는 편지는 항상 엄마에게로 보내졌다.

 

소년의 첫 페이지는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그런데도 받는 사람을 쓰고 나서, 인사말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쓰다보면 자연스레 첫 페이지가 완성되었다. 엄마에게 쓰는 모든 편지가 부디 제대로 보내어지기를 바라며 차근차근 써가다 보면, 소년은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선가 또 다른 끄적임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보기도 하고, 정말 간혹 그런 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답장을 바라지는 않았다. 제대로 보내진 것을 확인하려면 소년에게 답장이 와야 하지만, 소년은 왜인지 우연히 우체통 속에 놓인 색이 누렇게 바랜 편지를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었다. 분명 소년은 엄마의 주소가 적힌 편지를 보게 된다면, 남이 볼까봐, 작게 웅크려 그 자리에서 빨리 읽어볼 것이었다.

 

“예다, 어제는 왜 늦게까지 종이에 뭔가 쓰다 잤는지 설명 좀 해보렴.”

그녀는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털 슬리퍼를 신은 채로 발을 조금 구르며 언변을 높였다. 예다는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듣기를 포기했을 때부터, 그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벙긋벙긋 그녀의 입모양을 보고 조금씩 퍼즐조각을 맞추어 갔다.

“아무것도 안 들려서 답해줄 말이 없네요.”

그는 크게 고함하듯 말했다. 소년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였다. 그래서 자신이 소리를 냈는 지 조차 몰랐기에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녀는 놀라며 그의 뺨을 몇 대 후리고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고래고래 소리치냐고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기에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다고 몇 번 더 말했다. 그러고는 멱살을 잡고있던 그녀의 팔을 풀고 자신의 방으로 터덜터덜 올라갔다. 그녀는 뒤에서 그의 욕을 했다. 모쪼록 그의 귀에 박힐 수 있게 소리쳤다. 대충 아무런 욕이나 지껄이고 나서 탁자 위 찬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유리잔에 묻어나는 그녀의 립스틱을 보며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막 가지런히 정리된 싱크대를 흘기고는 한숨을 쉬었다. 뽀득하고 새하얀 접시들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녀는 선명한 자국이 남은 유리잔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어지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십, 수백개의 조각으로 뿔뿔히 흩어지는 유리잔이 아줌마의 시선에 들어왔다. 유리조각 몇몇은 러그 안쪽으로 숨어들어가 조용한 냉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그런 아주머니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끈거리는 유리잔 하나를 더 꺼내 쥐었다. 덩달아 찬 물을 울컥울컥 채워 넣고 한 모금 마시는 듯 했다. 그녀는 물을 채 다 마시지도 않고 온 팔에 힘을 빼어 어깨를 툭 내렸다. 유리잔 안으로부터 얇은 물줄기가 러그를 적시더니 아래에 있던 유리조각들 위로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물을 전부 쏟아내고 나서 그녀는 온 손가락에도 힘을 놓았다. 물기에 자연스럽게 유리잔이 떨어졌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굵직한 핏방울이 맺혔다.

 

“아무튼 이 집안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네. 거지같게.”

아주머니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것을 보고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녀도 소년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아주머니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힐긋 보면서 바닥에 웅크려 깨진 유리잔 조각을 주워갔다. 조각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피가 고이며 작은 물 웅덩이에 조금씩 번져가는 걸 선명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서히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랐다. 몇 걸음 더 옮겨간 자리로 웅장한 문 하나가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문고리를 돌려 몸이 들어갈 정도로만 문을 열고 비밀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안의 둘은 서로 사랑했다. 남자는 한 여자를 버렸지만 지금의 여자를 더욱 사랑한다고 합리화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달랐다. 정말로 사랑이 맞는지, 누군가는 알아 맞출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

그 둘의 사랑이 너무 특별했기에 소년에게도 특별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모든 단어가 그렇지 않듯, 특별하다는 것 또한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소년은 그 자기 자신만으로도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듣지 않는 자신이, 시선으로 감을 맞추며 제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신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겼다.

 

매일 밤, 자신의 책상에 웅크려 뭔가를 끄적이면서.

 

소년이 끄적인 글은 전부 집 밖으로 벗어나면 우체국으로 향했다. 빨간 우체통에 모여지고 멀리로 배달되는 모습을 보면서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또 다시 울컥울컥 올라오는 무언가 인지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깊은 한 숨이 소년의 깊은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소년이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도 멀었다. 듣지 않는 소년에게 험난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시선이었다. 소년이 자신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소리에 홀려 다시금 시선에 집중했다. 거친 아스팔트 길을 그렇게 걸어오다 보면 멀리서 봐도 넓은,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이 등장했다. 멋스러운 대리석에 반사되는 은은한 달빛이 소년을 마주했다. 주위를 둘러싼 푸른 잎사귀들이 소년을 닮은 듯 했다. 소년은 조금 더 걸었다. 그리고 그 잎사귀들 사이에 자리잡은 검은 대문을 손으로 잡으며 시선에 의지한 채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미 대문은 안중에도 없고, 잎사귀에 파묻혀버린 작은 우체통에 다다랐다. 우체통을 얼마간 빤히 바라보면서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저 멀리서 해가 웃음을 짓는 것이 그려졌다. 소년은 자신의 방 창문 아래 책상에 엎드려 그 햇살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손으로는 책상 위를 더듬더리다가 손 끝에 닿은 둔탁한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그러고 쌓아둔 종이의 맨 윗 장을 책상에 펼쳐놓았다.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면서, 그는 자신의 세상에 다시 갇혔다. 만년필 잉크는 소년에게 귀중했다. 잉크가 바닥을 보이면 연필이나 볼펜으로 종이에 끄적여야 할 테니까. 연필이나 볼펜은 소년에게 불편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소년을 가난하게 볼까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대놓고 잉크를 빌릴 수도 없었다. 그녀도 만년필 잉크를 한 달에 한 번 그에게 꼬박 줘야 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고, 언젠가부터 그의 만년필을 숨기려 드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의 펜꽂이에는 몇몇 잉크가 많이 남은 볼펜들과 연필, 그리고 그 옆으로 뭉툭해진 지우개가 굴렀다. 솜씨 좋은 글짓기를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년의 책상은 그저 단순했다. 그 흔한 책꽂이 하나도 없었고, 만년필 잉크와 연필꽂이, 그리고 부수적인 조각들, 잉크가 둥그런 원을 그린 채 말라붙은 굳은 유리판. 그의 책상은 노란 불빛에 비춰졌다.

소년의 책상은 순진했다.

 

지금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으니까요. 숨기면서도 자꾸만 쓰게 되네요. 저는 오늘도 노란 불빛 아래서 열심히 당신에게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 봅니다. 방금 전에 편지를 한 통 보냈는데, 또 쓰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단지 어제 썼던 편지를 보내놓고 또 다시 반복하는 것 뿐입니다. 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해주지 않은 것 덕분에 제가 편지를 보내는 것이 들키지는 않는가 봅니다. 나는 꽤나 부유한 집에 들어선 것 같아요. 꽤 멀리까지 보낼 수 있는 우표 값을 가질 정도로 부유한, 그정도요. 이 집 주인은, 그러니까-. 아무튼, 생각보다는 이상해요. 따듯하지도 않고 자상하지도 않지만 내가 이 집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 것 말이에요. 그러니 걱정마요, 난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요. 여기에 갇혀 지내는 것 같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으니까요. 오히려 이게 더 편할지도 몰라도, 그저 방 안에서 예전처럼 작게 웅크리고 있을 수만 있으면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제가 행복하기는 한 걸까요?

 

“예다, 어제는 어딜 갔다 온 거니. 말 좀 해다오.”

소년은 자신의 세상에 갇힌 채 앞에 놓인 토스트 두 장을 칼로 잘랐다. 위에 얹힌 노른자는 아무 소리 없이 터지며 빵에 스며들었다. 거친 토스트 단면이 촉촉해졌다.

“예다, 물어보잖니?”

그녀는 보다못해 눈살을 찌뿌리면서 나이프를 들고있던 예다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 딱지가 앉은 손은 소년의 아버지 향기가 났다.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찌푸려진 눈살은 그에게 무언가 물어본 듯한 분위기였고, 눈빛이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어서 답해…!’

“아침 식사 자리에서 굳이 이렇게 분위기를 흐려야겠니! 어제 어딜 나갔다 왔냐고 물어보잖아!”

“들리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잖아요. 당신이 하는 말 아무것도, 나는 들을 수가 없어요.”

소년은 이번에도 크게 외쳤다. 이번에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스스로 자각할 수 없었다. 그에 그녀는 화가 난 예다를 상상했다. 어금니를 꽉 깨문 것도 아니거니와 그저 목소리가 컸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참는 듯 했다.

“그럼 너는. 입모양. 입모양을 보라고 몇 번이나 말 했니, 내가! 어제, 어딜, 나갔다, 왔니!”

그녀는 좀 점잖게 말하려다가 점점 격해지는 자신의 감정을 눌러 담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크게 내지 않았지만 혼자 궁시렁거리며 자리를 EJT다. 계란 후라이의 노른자가 전부 빵으로 스며들었다. 거친 빵은 눅눅해지고 조금씩 그대로 식어갔다.

뒷모습을 보인 예다는 계단을 올라가다 이렇게 외쳤다. 화가 난 모양인지 주먹을 불끈 쥐고서 이를 악 물었다.

“정말로 물어보려거든, 궁금하거든. 그냥 TJ서 보여주면 될 것을. 왜 굳이 말로만 하려 해요! 난 들을 수가 없다니까!”

이번에야 말로 정말 고함이었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비밀이 있는 거겠지.”

소년은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랫입술은 꽉 깨물어진 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 했다. 다시 계단을 올랐다. 심장이 떨려왔다. 비밀같은 건 없어, 하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어도 어쩔 수 없는 비밀은 저 아래에 있었다. 왜 만년필 잉크는 줄어들고 쌓여지는 종이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책상 위 유리에는 왜 잉크가 굳어지는지 오직 그만 아는 비밀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소년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마저 올랐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서 나가면서 그는 두려움에 젖었다.

 

‘제발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방문이 열렸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에 커튼은 펄럭이고 방 안이 빛났다. 예다는 자신의 책상을 보고 놀랐다. 자신의 만년필 잉크가 쏟아져 벌컥벌컥 유리판 위에 흩어져서도 아니고, 종이가 아래에서부터 잉크로 번져갔기 때문도 아니었다. 온갖 필기구가 부숴진 채 바닥에 흩뿌려져 있음도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단지 찢어진 편지가 잉크에 젖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놀랐다. 심지어 자신의 편지가 아니었다. 좁은 자신의 방 안 서랍 구석에 꽁꽁 숨겨둔 노란 불빛을 받았던 편지는 결코 아니었다. 형형 색색의 종이였음이 분명한, 잉크에 젖은 편지는 유리잔 처럼 찢어져 있었다. 소년은 편지를 골라냈다. 지문이 잉크로 조금씩 채워져 갔다. 종이에는 그의 지문이 조금씩 말라붙기 시작했다.

조각을 맞췄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조각을 맞춰갔다. 받은 사람부터 인사가 씌어진 첫 페이지가 한 조각을 남기고 채워졌다. 나머지 한 조각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예다는 그저 한숨을 쉬고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갔다. 엄마의 따듯함이 느껴질 수 없는, 잉크에 젖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그 편지를 소년은 조금씩 읽어갔다. 듣지 않기를 잘했다. 소년은 또다시 시선에 의지했다.

 

  1. 예다.

오랜만이구나, 예다.

 

오래전부터 너의 편지를 보아하니 나의 향수가 그리운 듯 해 이렇게 편지를 써보마. 그쪽 부모님이 착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지내고는 있는걸 보니 다행인 듯 해. 너 또한 부유하게 살고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나 더 이상 편지를 써 보내지 마렴. 내가 너의 편지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았겠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구나. 마음에 들지 않은 터라 일부러 답장 또한 보내지 않았는데 말이야. 너는 눈치도 없는 것이, 답장이 오지 않으면 편지를 써내려가지 않는 것이 원칙이란 걸 모르는 게로구나. 나름대로 가정교육을 잘 받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너에게 이제 정이란 건 없는 듯하다.

 

 

그럼, 이만.

 

 

예다는 울었다. 잉크 위로 눈물이 번져나갔지만 이미 넓게 번진 잉크 탓에 티가 나지 않았다. 엄마의 편지라고 믿고싶지 않을 만큼 차가운 편지였다. 그가 아는 엄마가 절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소년의 엄마가 아닌, 누군가가 그에게 장난을 쳤을 거라고.

거짓으로 써진 편지는 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엄마는 거짓을 담았다. 소년에게 정을 보이지 않았을까. 소년이 자신의 세상에 갇힌 것이 그리고 정이 떨어지는 일이었을까.

무슨 이유였는지 소년은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듣기를 포기했다.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 했던 그는 들리지 않는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소년이 듣기에는 아빠의 잘못이 컸다. 다른 여자와 눈이 맞은 모양인지, 이혼을 요구하는 아빠가 너무 더러웠다.

 

 

소년은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다. 그의 잉크가 더 줄어들지도 않고, 쌓여진 종이 위로 또다시 먼지가 쌓였다. 꾸덕하게 굳은 유리 위의 잉크라면 여전히 둥그렇게 흔적을 남기고만 있었다. 그저 그럴 뿐으로, 예다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다.

오직 노란 전등 아래 웅크려 작은 진동을 느낄 뿐이었다.

 

새로운 잉크가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않던 그 날부터,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지문 사이사이에 잉크가 묻어있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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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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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줄 > – 동생

날개를 달고 하늘 위에 매달린 연이 위태롭다
긴 끈은 생명줄처럼 끊어지기를 기다리는지
점차 길어져 하늘에 닿는다

 

동생은 헌 달력으로 커다란 연을 만들어
마음에 바람이 부는 날 둥실 띄웠다
동생은 마음에 날개를 달아놓고 일기를 적었다

 

동생은 병상에 누워 머릿속을 뒤적이다가 사과를
한 개를
두 개를
세 개를
한 입 두 입 베어물어서 제 몸에 상처를 낸다

 

동생이 넘겼던 문제집 접힌 페이지는 벌써
작년에 휘갈긴 잉크 자국만 구석에 놓였고
창문 밖 달은 어지간히 커다랗게 베어져 한 입 거리만 남았다

 

동생이 띄워놓은 연줄이 나무의 초록으로 물들어 팽팽해졌을 때
동생은 일기를 덮고 날개를 진 채 훨훨 날았고
엄마는 쌉쌀한 잉크만 마시다가 취해 노래를 불렀다

 

오늘도 달이 어지간히 크게 베어 송곳이었다
한 입으로도 베어물 수 없는

 

 

< 연줄 > – 엄마

날개를 달고 하늘 위에 매달린 연이 위태롭다
엄마는 생명줄처럼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연줄을
맨 손으로 잡다 손이 베였다

 

엄마는 오늘자 신문으로 만든 연 구석에
쌉쌀한 잉크로 찍힌 숫자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노래방에 갈 줄로 알고 엄마는 전화 걸 잉크자국도 없다

 

동생은 병상에 누워 머릿속을 뒤적이다가 사과를
한 개를
두 개를
세 개를
한 입 두 입 베어물어서 제 몸에 상처를 냈다

 

나는 홀로 빈 집에 남아 신발정리를 한다
270 검은 구두 한 짝이 집 나가고 없다
구둣주걱 한참 사라지고 없다

 

프린트된 초록 칼날 동그라미 개수는 몇 개나 늘어졌는지
엄마는 몰랐다 동생은 어렴풋이 알았고 나는 온전히 모르겠다
다만 열 아홉개 손가락으로 세는 것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동생도 띄워놓은 연줄이 나무의 초록으로 물들어 팽팽해졌을 때
동생은 일기를 덮고 날개를 진 채 훨훨 날았고
엄마는 쌉쌀한 잉크만 마시다가 취해 노래를 불렀다

 

나무가 선물해준 꽃다발을 등에 쥔 나는
엄마의 칼날 몇 개를 훔쳐오다가 손이 베였다

 

창문 밖 달은 어지간히 커다랗게 베어져 한 입거리만 남았다
한 입으로도 베어물 수 없는

 

원래는 하나의 서사를 갖춘 시 한 편이었으나 서사가 지나치다는 피드백을 받아 두 개로 나눈 시입니다 (3차 퇴고).

원래의 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 연줄 >

 

날개를 달고 하늘 위에 매달린 연이 위태롭다
긴 끈은 생명줄처럼 끊어지기를 기다리는지
점차 길어져 하늘에 닿는다

 

동생은 헌 달력으로 커다란 연을 만들어
마음에 바람이 부는 날 동실 띄웠다
동생은 마음에 날개를 달아놓고 일기를 적었다

 

오늘자 신문 구석에 쌉쌀한 잉크가 숫자를 만들어
사람을 구했다
아가씨가 노래방에 갈 줄로 알고 엄마는 전화 걸 잉크자국도 없다

 

동생은 병상에 누워 머릿속을 뒤적이다가 사과를
한 개를
두 개를
세 개를
한 입 두 입 베어물어서 제 몸에 상처를 낸다

 

동생이 넘겼던 문제집 접힌 페이지는 벌써
작년에 보았던 숫자만 구석에 놓였고
창문 밖 달은 어지간히 커다랗게 베어져 한 입 거리만 남았다

 

프린트된 초록 칼날 동그라미 개수는 몇 개나 늘어졌는지
엄마는 몰랐다 동생은 어렴풋이 알았고 나는 온전히 모르겠다
다만 열 아홉개 손가락으로 세는 것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동생이 띄워놓은 연줄이 나무의 초록으로 물들어 팽팽해졌을 때
동생은 일기를 덮고 날개를 진 채 훨훨 날았고
엄마는 쌉쌀한 잉크만 마시다가 취해 노래를 불렀다

 

나무가 선물해준 초록색 꽃다발을 등에 진 나는
엄마의 칼날 몇 개를 훔쳐오다가 손이 베였다

 

오늘도 달이 어지간히 크게 베어 송곳이었다
한 입으로도 베어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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