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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재림이 온다 [1]

언젠가 정말 사랑으로 시집 한 장을 뜯어 보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시인이 굶지 않고 병들지 않는 날이 온다면 사람이 사람 너머의 세계를 깨닫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아무런 어폐 없이 문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어깨를 떼어 주는 부족 없는 삶을 받는 날이 온다면
파란 구슬이 깨질 때
우리가 운명처럼 손잡을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면 신은 걸어간다 아주 오래 그리고 재림이 온다 아무 칩도 남기지 않았을 뿐    

아무렇지 않은 재림이 온다
/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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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는 것이다 [1]

발끝이 붉어진다 딱딱해진다 하얗고 곧은 것은 다 죄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청렴하게 빛이 나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다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고 몇없는 순백의 날이 찾아오면 한없이 파묻히길 소원해 보니까 그냥 나도 그런 사람인 거였을 테다 일말의 어떤 사상도 없이 들어가면 들어가는 대로 쌓이면 쌓이는 대로 그들은 대개 순종적이니까   몸이 굳는다 생각은 추락했다 마찬가지로 죄 없는 나도 하얗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은가 법 너머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나는 그곳을 뛰어넘어 본 적이 없다 죄는 아득한 것이다 그냥 나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니까 나도 하얗다고 생각했다 맨발로 거릴 뛰쳐나가게 된 것은[…]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는 것이다
/ 20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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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트루먼 쇼 [1]

컷, 다시 촬영합시다 손짓 하나에 출생이 지워졌다 울려퍼진 확성기 소리 속에 소란스러운 사람들 몇이 사라진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는 그렇다 마음 몇 개를 배우는 순간마다 각본이 물에 젖으면 글씨가 흐려져 삶을 머금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각본이 찢겨나가면 절벽을 더듬던 사람들이 떨어진다   나라도 예외는 없다 이 시 속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내가, 나이면서도 주인공일 수 없는 내가 카메라를 좇으면 나는 항상 발끄트머리를 화면에 교차시키고 있다 그것뿐이었다 꾸역꾸역 씬을 견뎌내고 있었다 조연으로써 주연보다 힘겨운 생존을 연기하고서 컷, 발이 잘려나갔다 감독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각본이 이 정도밖에 안 돼? 작가는 다리도 없는 주제에[…]

쉬운 트루먼 쇼
/ 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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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서술형에 나를 대입하면 [1]

나는 새벽이 되면 허영심으로 잠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건조한 바람을 푹푹 밟으며 지나가는 축약은 나를 슬픈 사람으로 만들고 나는 그래서 멍청하고 철없다 현실적이지 않은 정론과 나를 기워서 기울어지면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고 사랑은 왜 특별해? 어둠이 사라진다 그리고 일순간 암전, 세상에 늪이 너무 많아서 사랑이 특별해 그리고 다시 폭우 ​ 너는 꼭 내가 나를 게워내게 만들어서 원망스럽다 고장난 엘피를 모아서 나는 깨진 스텝을 밟고 싶다고 피가 긁은 음을 창피 삼아 원, 투, 쓰리, 포…. 나는 둥글어지고 싶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독창적인 화가가 되고 싶었다 동물과 교감하고 생물은 이토록[…]

있잖아, 서술형에 나를 대입하면
/ 2021-11-18
14 나만의 문학 작품 소개 – 에르고스테롤 [0] piaf 2021-08-29 Hit : 30 piaf 2021-08-2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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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꽤나 괴로운 투쟁과 같은 것 –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고 [1]

※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폭력, 자살, 자해 등)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해당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던 시절,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이라고들 한다. 그에 알맞게 에반게리온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명작이라고 평가되곤 하지만, 명성만큼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을 보여 주는애니메이션이라는 평들도 자자하다. 그리고 난해한 창작물을 좋아하는 나는 역시 이 애니메이션 피할 수 없었다. 썸네일에서 쓸쓸한 눈빛을 한 신지의 눈은 벌써 자신의 세계를 보여 줄 준비를 마친 채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카리 신지. 지구를 침공해 오는 사도에 대항하는 네르프의 사령관인 이카리 겐도의 아들이다. 신지는 그만큼 위엄있는 이의 아들이지만, 성격조차 그를 닮지는 못했다. 아니, 되려 도망치길 원하고, 사람들의 부탁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외로워하며 고뇌하는 사람이다. 현실에서 신지를 마주친다면 사람들은 겁쟁이, 찌질이와 같은 칭호를 붙여 줄지도 모른다. 설령 그가 사도로부터 네르프와 지구를 지켜내는 영웅일지라도. 그런 신지의 주변은 신지에게 한도 이상의 짐을 뱉어낸다. 그리고 "싫으면 도망쳐" 와 같은 성의없는 각성을 신지에게 내민다. 어쩌면 일 분 일 초가 다급한 네르프에서는 당연한 처사일 수도 있겠지만, 신지는 그런 말을 머금고서 다시출전하고, 괴로워하는 삶을 반복한다. 고작 중학생인 신지는 꼼짝없이 어떤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 거다. 평범한 일상은 더이상 꿈꿀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삶에. 신지의 옆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신지와 비슷한 과거를 가졌지만 하늘을 찌르는 자존감을 가진아스카라거나, 신지의 아버지인 겐도와 특별한 유대감을 가지고 명령만을 따르는 레이라거나, 신지를 이끌게 된 네르프의 작전부장인 미사토라거나. 다 하나같이 어떤 아픔을 가졌고, 은연중에 외로움을 가졌으며, 어느 순간에 자신의 쓸쓸함을 생각하는 인물들이다. 욕조에 누워 절망하는 아스카는 자신의 유년기와 동시에 엄마의 자살을 생각한다. 레이는 자신을 구하러 온 신지의 얼굴을 보며 이카리 겐도를 떠올린다. 미사토는 카지를 사랑했으나 그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자, 결국 카지를 밀어내고 다시 쓸쓸해지고 만다. 그리고 신지는 엄마의 죽음과 동시에 홀아버지에게 버려졌고, 다시 아버지와 재회했지만 일말의 반가움조차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모두는 괜찮은 척한다. 다들 괴롭지 않아? 다들 고독하지 않아? 이건 나만의 괴로움이야? 이런 질문을 속으로 던지는 듯 하다가도, 돌연다시금 에반게리온에 탑승하고, 작전을 지휘하며 또 변화한다.   신지는 레이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신지를 구해줬을 때 감사를 표하지만 아스카는 신지가 레이와 아스카를 구했을때 그렇지 않다. 신지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탓하고, 아스카는 자연스럽게 남을 미워한다. 서로 닮은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스탠스를 지니며 마찰하던 둘은 끝내 갈라지고 마는데, 평소 높은 자존감을 가지던 아스카가 레이와 함께 신지에게서 구해졌을 때다. 아스카는 잘려나간 자존심으로 낮은 싱크로율을 보이며 레이에게 신지를 비꼬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스카는 자신의 완벽함을 과거를 가리는 마개로 만든 채 살아왔던 거다. 아스카의 속에서 자신은 사랑받을 수 있는 엘리트 세컨드 칠드런에서, 신지에게 뒤처진 구제불능까지 전락한다. 이를 구제할 수단은 없다. 그냥 상처를 덮고 다시 나서려 할 뿐이다. 왜냐하면 아스카는 서드 임팩트까지 AT필드, 즉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서드 임팩트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아스카는 언제나 우위를 점하고 싶어했던 탓에 서드 임팩트 이후에 기분 나쁜 죽음을 맞는다. 어떤 선택들이 맞물려 (신지와 아스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고, 이런 황망한 지구 속에서 살아남은 신지는 자신의 곁에 언제든지 자신의 선택과 자신 그 자체를 힐난할 수 있는 존재인 아스카가 남아있다. 신지는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 속에 해결책을 강구하기보단 그저 아스카를 목을 졸라 죽여 버린다. 이런 신지의 행위의 이유는 이해한다는 듯이 손을 내밀지만, 결론적으로 자신을 음해하려 했고, 자신을 아래에 둔 채로 이 모든 것을 어영부영 끝내버린 이런 결과가 허망하다는 듯이 "기분 나빠." […]

산다는 건 꽤나 괴로운 투쟁과 같은 것 -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고
/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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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1]

두꺼운 컴퓨터를 따라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페일 블루 아이즈를 듣고 천천히 가라앉자 천천히 돌아설 때 네가 나를 미워하기 시작할 때 나는 그때 부서질 거야 천장을 밀어내며 지직거리는 엘피에 맞춰 춤을 추자 붉은 결사대와 맞잡고 기도하면 너는 너를 게워낼 수 있어 힘들게 한 발을 뻗어나갈 때마다 내 손을 잡고 걸으려는 네 자신을 뒤늦게 원망할 때마다 난 더 이기적으로 사랑을 선망할 거야 그리고 난 너를 독점하게 될 거야 생애 모를 몇 명의 수도사 얘기를 하고 무질서하게 천사의 날개를 빼앗아 날게 될 거야 우린 추락하기 전까지 우리가 우리일 수 있었던 시간을 평생 가지게 될 테니까 우리라는 단어로 세상을 길들이게 되면 이런 철없던 시절은 영원하겠지 절벽은 끝도[…]

뻐꾸기 둥지
/ 202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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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에 대한 견해 [2]

기름 쩐내와 비린내, 또 온갖 흥정하는 소리가 넘치는 시장 한가운데서부터 어수선한 상가들을 지나 다닥다닥 붙은 건물 위로 붙은 가림막이 끝을 보이는 곳으로 달려갈 때마다 나는 우리가 훔치지 않은 열대 과일들의 이름을 생각하곤 했는데   한때 석류와 석유의 이름을 구분하지 못했던 나는 자주 석류 대신에 붉은 석유를 떠올렸다 시장과 엇갈린 골목에 홀로 앉아 손에 배인 것이 기름기인 줄도 모르고 주전부리 짠맛에 이어 석유의 달달한 과육을 상상할 때면 혀끝이 시큼하다 못해 아려오기도 했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나는 두 뼘이 더 크고 어린 석유의 맛을 점점 잊어갔지만 내 손을 잡아끌고 망고 사이를 훑으며 빨간[…]

석유에 대한 견해
/ 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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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반데룽, 다시 나는 [1]

  나는 초월한 감각으로 걷고 있다. 새하얀 안개를 휘저으며 앞으로 걷고 있다. 나는 맹인이지만 습하고 짙은 안개 쯤은 느낄 수 있다. 돌부리도 오르막길도 꺾인 길도 없는 그저 길 뿐이라는 것쯤은 느낄 수 있다. 나는 몇십 년을 이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이 길에 나를 놓고 사라졌다. 잘한다는 말도 힘내라는 말도 없었다. 아니, 사라졌는지 나를 여전히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맹인으로 태어나 길을 걷는 나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랬다. 다시 걷다가 끝없이 돌고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하얀 길이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그렇게 지친 맹인은 다시 일어선다. 몇 번째[…]

링반데룽, 다시 나는
/ 20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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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수천만 개의 실패한 궤도를 달고 돌지 [2]

그날은 유독 더러운 달들이 쏟아졌어 언니가 편지 하나만 남기고 도망쳤었거든 정갈하게 뜬 태양들과 썰렁한 지구, 아무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살덩이로 사는 건, 역겹게 붕 뜬 기분으로 날지 못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거라고 그랬어 살기 위해서 온갖 것들을 만지고 엉켜들어가고 이도저도 아닌 채로 섞여들어가는 건, 죽기 위해서 누군가의 짐이 된다는 건 역겨워서 토가 나온다고 그랬어 그래서 매번 숨어서 토를 했대 온갖 껍질들을 다 긁고 다녔대 온몸이 빨개졌을 때면 검은색 구정물을 턱턱 뱉어내며 앙상해진 팔다리로 또 바깥을 휘젓고 다녔대 십 년 전에는 온 지구를 헤집고 다닐 거라고 말했던 언니가, 사 년[…]

지구는 수천만 개의 실패한 궤도를 달고 돌지
/ 202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