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서의 여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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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도화지에 돋보기를 가져가

차가운 빨간 물감을 칠해

 

“봐, 태양이야.”

 

윙윙 돌아가는 실외기

웽웽 울어대는 매미

 

낙엽이 떨어지면

눈이 내리면

 

뻐어엉 뚫린 구멍 사이로

모두 빨려 들어가고 말거야

 

“종이가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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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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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국가는 추억의 놀이동산

2층 국가는 상상나라 놀이터

3층 국가는 신비로운 식물원과 동물원

4층 국가는 알쏭달쏭 실험실

5층 국가는 작은 아파트 단지

 

놀이동산에서 회전목마를 탔다

기분이 둥둥 떴다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제자리였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았다

덩실덩실 같이 춤췄다

손이 잡히지 않았다

 

식물원과 동물원에서 기차를 탔다

덜컹덜컹 무서운데 신기했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봤다

펑펑 연기가 났다

난 해볼 수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깃발을 꽂았다

알록달록 아파트를 세웠다

머물 수 없었다

 

우리 집엔 기다란 행성이 있어

물과 대기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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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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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들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공기를 가득 채우는데

만져지지 않는 언어의 부피는

햇빛을 받아 살아 숨 쉬는 잎의 내면과 같다

 

언어는 볼 수 있다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데

잎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갖가지의 가지를 이루어진 손으로 그린다

 

언어는 걸을 수 있다

손으로 발을 그리면

공기는 발을 심어준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따라 걷는 것이다

 

언어는 자랄 수 있다

따라 걷다 새로운 언어를 만나면

언어에게 언어를 배우며

언어는 부푼다

 

언어는 날 수 있다

발로 동동 굴러서

언어들이 서로 손 잡고

둥실둥실

 

사람은 언어를 만들었고

언어는 사람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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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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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아

너를 생각하면

탁 트인 파란 하늘과 뜨거운 바람에 살아 움직이는 초록 잎들이 떠오른다

 

여름아

네가 내게 있으면

나는 바닷가에 놀러와 신이 난 아이가 된다

 

여름아

너를 데려다 주고나면

봄에 잃었던 사람처럼 너마저 사라질까 두렵다

 

여름아

여름아

이대로 여름에 머물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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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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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 있는 나를 기억해줘

거울 앞에 있을 나를 받아들여줘

 

이곳마저

너와 함께였어

 

나를 잊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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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바다의 파도가 밀려온다

차가운데 따뜻해

 

음음 바로 이거였어

음음 달콤해

퐁당 빠져버렸어

더 깊숙히 가라앉을테야

 

구름이 바람을 불면

향이 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면

햇살처럼 웃는 너가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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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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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뼈가 아려온다

정신은 또렷하다

깜빡거리는 신호를 무시했다

차 안 인간의 불호령도 무시했다

검은 옷을 차려입고

쪼그려 앉아 울던 대리석 계단으로 왔다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사과가 필요해

액자 속 웃고 있는 아버지에게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사과가 필요해

액자 품은 나에게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

사과가 필요해

울다 지쳐 잠든 내 동생에게

 

사과가 필요했어

마음이 몹시 아팠던 어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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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있는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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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밤에 파도가 밀려오듯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불 켜진 방에서 울컥울컥

 

윙윙 돌아가는 컴퓨터처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엉엉 젖어가는 얼굴

 

떠나보낸 달님이

나 보러 데리러 온 차가운 별빛에

데어버린 혀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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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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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거울 앞 투과된 환한 미소는 산산조각 부서졌다.

 

조각난 미소는 조각난 횟수만큼 일그러진다.

조각난 미소는 지은 횟수만큼 날카로워진다.

 

우린 그래서 쓴 웃음을 짓는다.

 

 

비어있는 속에는 흐르지 못한 울음이 가득하다.

 

막혔던 목을 조르며 재촉한다.

피어난 핏줄은 눈을 뜨겁게 적신다.

 

우린 그래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다.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모른 척한다.

 

우린 그래서 반쪽짜리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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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와 마른 나뭇가지에 쌓여만 가는 눈 때문에 녹지 않는 팔 위의 기다란 눈

여름이 오면 빛을 볼까 두려워

남들 눈에 녹을까 두려워 천조각으로 가리고

차라리 이 겨울이 끝나지 않기를

 

눈은 켜져있는데 자꾸만 꺼두어 두고 싶은 눈 때문에 녹아내리는 입 속의 둥근 눈 덩어리

여름이 와도 다시 겨울이 와도 한없이 녹아내리는 눈

차라리 이 겨울이 끝나 봄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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