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목록

 

옷장에 발바닥을 맞대어 물구나무를 서 구르고 커튼 봉에 매달려 날아보고 책꽂이에 몸을 구겨 집어넣어 뒹굴고 침대 아래로 미끄러지고 엘리베이터에 껴 계단을 기어가 다다른 옥상에 굽어진 그림자와 정수리 박기 그리고 떨어지는 그림자에 인사

 

마저 집으로 돌아와 흐릿하고 탁해졌지만 남아 우는 이 달래주자

벗겨지는 이 소리에 소리를 묻고 숨에 숨을 죽여 대나무 숲으로

옅어지는 걸음에 물을 더하고 흩어지는 울음에 답은 잊혀져

숫자로 나열된 제목은 하나같이 이름은 너의

부재가 부고가 되었을 때 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귀는 문을 찾지 않아 눈으로 창을 내다 소리를 지르고 불을 켜고 입수

죽은 하루살이와 함께 뜬 눈은 향으로 가득해 헤엄치다 몸이 불어 퇴수

옅어진 나를 기억하자 흩어진 나를 모으자 나의 이름들을 사랑하자

 

나는 나를 알고 있다

진실에 거짓을 쓰고 도망쳤을 때 거울에 비쳐진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 두려웠다

나의 존재는 부재했다

이대로 부족한 나로 완성될 것이었지만 너의 색과 빛이 남긴 온도를 꼭 끌어안아

목록
호기심
목록

눈으로 눈을 본 적 있나요

눈으로 본 눈은 그저 하얀 알갱이

 

코로 눈의 향을 맡아본 적 있나요

눈에 향기가 있었나요

 

입으로 눈을 먹어본 적 있나요

차가웠는데 달콤했어요

 

귀로 눈을 들어본 적 있나요

왜 펑펑 내린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손으로 눈을 잡아본 적 있나요

금세 녹아내렸지만요

 

발로 눈을 밟아본 적 있나요

뽀드득뽀드득 눈이 신발을 밟은 거였어요

 

눈으로 휙 보고

코로 킁 마시고

입으로 콕 먹어보고

귀로 흘려듣고

손으로 놓쳐버리고

발로 뛰어

 

지나쳐요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인데

사람들은 몰라요

목록
악순환
목록

잃어버린 너를 잊어버린 기억은 죄에 죄를 더하고

찾지 못한 나를 찾지 않은 나에 대한 탓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은 물바다를 만들고

쉼 없이 치는 파도에 미련의 지독한 향은 짙어져

 

가고 밤이 오면 액자를 떨어뜨렸다 세우고

떨리는 몸으로 품에 안았다 제자리에

 

두고 셀 수 없이 떠난 너를 위해 달을 빗어 달래고

셀 수 없이 보낸 나를 위해 별을 깎아 지우는 순간

 

마저 남은 이를 잃어가고 잊어버린 기억을 탓하고

잃어버린 나를 찾지 않은 나를 찾지 못한 나는 뒤로

목록
촛농
목록

불을 붙이면

바다가 열립니다

 

옅은 바다향이 납니다

나는 그곳에 삽니다

 

 

바다 아래

바다가 흐릅니다

 

숨을 내쉬면

바다 향이 퍼집니다

 

물이 차오릅니다

나는 뜨거워집니다

목록
종이 위에서의 여름 2
목록

검은 도화지에 돋보기를 가져가

차가운 빨간 물감을 칠해

 

“봐, 태양이야.”

 

윙윙 돌아가는 실외기

웽웽 울어대는 매미

 

낙엽이 떨어지면

눈이 내리면

 

뻐어엉 뚫린 구멍 사이로

모두 빨려 들어가고 말거야

 

“종이가 사라지기 전에.”

목록
내가 살고 싶은 곳
목록

1층 국가는 추억의 놀이동산

2층 국가는 상상나라 놀이터

3층 국가는 신비로운 식물원과 동물원

4층 국가는 알쏭달쏭 실험실

5층 국가는 작은 아파트 단지

 

놀이동산에서 회전목마를 탔다

기분이 둥둥 떴다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제자리였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았다

덩실덩실 같이 춤췄다

손이 잡히지 않았다

 

식물원과 동물원에서 기차를 탔다

덜컹덜컹 무서운데 신기했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봤다

펑펑 연기가 났다

난 해볼 수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깃발을 꽂았다

알록달록 아파트를 세웠다

머물 수 없었다

 

우리 집엔 기다란 행성이 있어

물과 대기는 없어

목록
언어
목록

언어는 들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공기를 가득 채우는데

만져지지 않는 언어의 부피는

햇빛을 받아 살아 숨 쉬는 잎의 내면과 같다

 

언어는 볼 수 있다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데

잎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갖가지의 가지를 이루어진 손으로 그린다

 

언어는 걸을 수 있다

손으로 발을 그리면

공기는 발을 심어준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따라 걷는 것이다

 

언어는 자랄 수 있다

따라 걷다 새로운 언어를 만나면

언어에게 언어를 배우며

언어는 부푼다

 

언어는 날 수 있다

발로 동동 굴러서

언어들이 서로 손 잡고

둥실둥실

 

사람은 언어를 만들었고

언어는 사람을 키웠다.

 

목록
여름
목록

여름아

너를 생각하면

탁 트인 파란 하늘과 뜨거운 바람에 살아 움직이는 초록 잎들이 떠오른다

 

여름아

네가 내게 있으면

나는 바닷가에 놀러와 신이 난 아이가 된다

 

여름아

너를 데려다 주고나면

봄에 잃었던 사람처럼 너마저 사라질까 두렵다

 

여름아

여름아

이대로 여름에 머물러줘

목록
미용실
목록

거울 앞에 있는 나를 기억해줘

거울 앞에 있을 나를 받아들여줘

 

이곳마저

너와 함께였어

 

나를 잊어버려

 

목록
목록

넓은 바다의 파도가 밀려온다

차가운데 따뜻해

 

음음 바로 이거였어

음음 달콤해

퐁당 빠져버렸어

더 깊숙히 가라앉을테야

 

구름이 바람을 불면

향이 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면

햇살처럼 웃는 너가 있을 것 같아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