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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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집에 왔다. 툭하면 끊는 조퇴에 담임이 미심쩍은 듯 봤지만 이내 “열 오르는 것 같네”하며 보내줬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운동화를 주어서 옆으로 치웠다. 제대로 세워지지 않아 밑창을 보니 이상하게 닳아 있다.
“학교는.”
신발을 벗으며 뱉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학교 또 안 갔어?”
상담 의자 위에 패딩을 벗어놓으며 평이하게 말한다.
“더 안 가면 유급 아니야? 중졸은 해야지.”
대답할 거라곤 기대도 안 했지만 연극배우처럼 착실히 말을 끝낸다.
이불을 펴기도 귀찮아서 바닥에 바로 누웠다. 아프다 한 건 거짓말인데 이상하게 머리가 무거웠다. 눈꺼풀이 천천히 오르내려 어룽어룽한 시야 사이로 검은 인영이 성큼 지나간다.
“김우진, 있으면서 답도 안 하고.”
우진인 거친 걸음걸이 그대로 엄마의 책상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제 것인 양 탈탈 털어도 찾는 건 없는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형, 돈.”
“모르지.”
우진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는 우진이의 말끝을 물고 잽싸게 대답한다. 매번 이런 식이다. 우진이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나는 말끔한 척 판에 박힌 말만 한다. 우진이도 내 말 끝과 동시에 책장을 찬다. 다 낡은 책장은 더 가라앉을 것도 없어 소리만 요란하다. 걷어찬 발보다 뒷발목에 시선이 말린다. 검붉은 딱지 몇 줄이 길게 자리 잡았다.
“돈 찾으면 밴드라도 사.”
우진이는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네가 다 쓰잖아”하고는 패딩을 들고 나가버렸다. 문이 덜 닫혔는지 그 뒤로 “추워 뒤지겠는데 학교는 무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따 나갈 생각이었는데 꼼짝없이 기다리게 생겼다.

 

우진이는 한밤중에 들어왔고 도어락소리랑 맞물려 악쓰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는 걸 보니 엄마한테 들킨 모양이었다. 엄마가 무어라 소리를 치면 우진이도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는 소리가 섞여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날카로운 언어들이 쩌렁쩌렁 벽을 울려댔다. 다현이 잠기운인지 몇 번 움찔거리다가 이불을 당겨 둘둘 만다. 그 탓에 이불을 빼앗긴 수연이 “성다현, 가만히 있어”하고 잠꼬대처럼 속삭인다. 나는 가운데서 빠져 다현이 말고 있는 이불을 적당히 끌어당겨 수연이 위로 덮는다.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매번 자다 깨어 울더니 지금은 익숙해졌는지 무감해졌는지 둘 다 새근새근 고르게 숨을 쉰다.
머리는 계속 멍하고 잠이라도 푹 자고 싶은데 이불을 주고 나니 잠이 쉬이 안 왔다. 곧 적응할까 싶었지만 갈수록 추위는 더 느껴졌다. 거실로 나가려 문을 여는데 비틀린 나무틀이 긁어내리는 소리를 냈다. 이 정도는 시끄러운 축에도 못 들어서 개의치 않았다. 우진이는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엄마로 보이는 형체는 거실에 드러누워 있다. 발에 걸린 유리병이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알코올향이 확 올라온다. 마찬가지로 나뒹구는 패딩을 주워서 창고로 갔다. 여기서 적당히 시간을 때워서 학교를 간 척 해야겠다. 오늘은 내가 패딩을 입었으니 내일은 우진이 차례지만, 모르겠다.

 

깜빡 잠들었다 깼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 문을 벌컥 열지 못했다. 숨을 참고 가만히 있어도 밖에 들리는 소리는 없다. 나와서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생각보다 좀 늦긴 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번엔 우진이도 학교를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이쑤시개로 엄마 방문 손잡이를 쑤시고 문을 열었다. 나갈 때마다 문은 꼬박꼬박 잠그면서 정작 이렇게 허술하게 해놓은 건 정작 엄마가 생각할 때 중요한 건 이 안에 없기 때문이다.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커버 지퍼를 열어 잡히는 건 몽땅 꺼냈다. 몇 번이고 더듬어 확인도 했다. 엄마는 자신의 공간에 이럴 줄은 몰랐을 것이다. 모두 얼마인지는 제대로 세어보지 못해 모른다. 이번에도 셀 여유 같은 건 없이 가방에다 다 털어 넣는다. 카드는 추적이 가능해서 현금으로만 모아야 했다. 쓸어 담을 가방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엄마는 날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의무교육은 진작 끝났는데 왜 아직도 욕심을 부리냐고 달래다가 나중엔 돈이 없는데 어떻게 보내느냐고 화를 냈다. 나는 내려온 지원금에 대해 말했고 그러자 엄마는 그냥 고등학교에 보내줬다. 학교 핑계로 어떻게 가방이라도 구하지 못하면 동생들 것 하나를 들고 가야 했는데 미안할 일이 또 생길 뻔했다.

 

그대로 향한 곳은 지역에 위치한 커다란 아쿠아리움이었다. 큰 가방에서 정리하지 못한 돈을 주섬주섬 꺼내자 매표소 직원이 잠시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게 다였다. 원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다.
사방이 푸른 아쿠아리움의 파란 창을 한참 보고 있으면 조명이 차례로 내려가고 투명한 공간에 인어가 와 무어라 말을 건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딱지가 붙어 있는 문을 열고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인어가 물을 튕기며 나를 반긴다. 인어는 파닥파닥 계속 물을 뿌리고 나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나 이제 안 와.” 늦을수록 꺼내기 힘들 것이 뻔해 부러 빨리 뱉어버린다. 인어는 수족관 창에 팔을 올리곤 “음”했다. 집을 나오는 것보다 인어에게 이 말을 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그렇구나”하고 수긍해버리니 허무했다. “그게 끝이야?” 인어는 음, 하며 약간 고민하더니 “그냥, 그럴 것 같았어”한다.

 

감사가 내려온다나. 엄마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엄마 책상에 잔뜩 쌓인 서류에 엄마가 조만간 무언가 심사를 받게 될 것이라 알게 되었다. 가을 누나는 엄마가 그래서 답잖은 일을 하는 거랬다. 우리한테 내려온 돈을 이제야 급하게 쓰는 것이라고 했다. 욕조 수천 개가 모여 물고기가 떠다니는 곳. 아쿠아리움에선 시야가 푸른색으로 먹먹하게 먹혔다. 다들 멍하게 발걸음을 옮겼고 처음 보는 장황한 광경에 어딜 가든 투덜대던 우진이조차 조용히 이곳저곳을 오갔다. 우리는 둥둥 유영하는 물고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데 가을 누나는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누나는 왜 안 봐?” 우진이 못 참고 물었을 때 누나는 “나도 물고기 같다, 그치”하고 계속 걸었다.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푸른빛이 복도에서 일렁였다. 그 사이 서 있는 가을 누나는 꼭 물속에 있는 것 같아 그 뜬금없는 소리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창밖이 짙은 남빛이었다. 아직도 아쿠아리움에 있는 꿈을 꾸는가보다 했는데 누가 손을 뻗어 내 앞에서 휘저었다. 가을 누나였다. “정신차려.” 가을 누나는 짧게 말했다. “나 갈 거야.” “어디로?” “어쨌든 공부를 해야 해, 알겠지?” 누나는 묻는 말엔 대답도 안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서서 그 현실감 없는 장면만 곱씹는데 그제야 알았다. 엄마 방에서 여태껏 노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엄마는 찾지 않았다. 누나의 행방을 알려고 뒤진 서류속의 누나는 독립처리만 되어 있었다. 얼마 후 엄마의 통화로 엄마를 신고한 사람이 누나인 걸 알았다.
엄마한테서 알바비를 빼돌렸다. 최저시급이 올랐지만 나는 그 전부터 일을 하고 있어 적용이 안 된다고 둘러댄 말이 먹혔다. 두 달 정도 그 차액을 모으면 겨우 한 번 아쿠아리움을 갈까 말까 한 돈이 생겼다. 나중엔 심심찮게 돈을 훔치는 우진이에게 묻어가기도 했다. 정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누나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의무감으로 아쿠아리움을 다녔다.
인어를 처음 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일렁이는 유리창을 끼고 있는 물속에서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옆을 보니 웬 사람이었다. 그냥 지나가려는데 다시금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다가 몸이 식었다. 사람이 왜 저기 있지? 생각까지 파랗게 멈추는 아쿠아리움에서 난 내가 물속에 있는지 저 사람이 물속에 있는지 생각해봐야 했다. 잠시 후에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이라는 결론이 났고 도움을 청하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이 공간에 나만 있는 걸 알아챘다. 잠시 물위로 고개를 내민 사람이 다시 들어와 내게 손짓했다. 홀린 듯 가까이 가니 열린 문 사이 계단을 가리키더니 멀어졌다. 괴기하게 마른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폐장시간 가까이 느적거리면 그 사람은 날 찾았고 거기서 개장시간까지 눌러앉아 있기도 했다. 처음엔 눈치를 살폈지만 사람은커녕 CCTV도 없었고 그 사람은 내가 무엇에 눈치 보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대화를 할 때도 고개만 내놓는 그 사람은 물속이 더 편한 것 같았다. 몸이 기괴하게 느껴지는 건 균형 잡히지 않은 발달 때문이었다. 묘하게 뒤틀린 몸이었다. 다리 같은 경우엔 땅 위에서 걸을 힘이 없었다. 항상 물속에서 살고 숨만 요령껏 쉬며 자유로이 유영하는 모습은 정말 인어 같았다. 그쯤 돼서 물속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다리도 아름다워 보였다.
아쿠아리움은 환상적인 공간이니까 실은 정말 인어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한다는 인어쇼에 출연하는 그 사람을 봤을 때 첫만남에 사람이 물에 빠진 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인어꼬리에서 빼낸 하체가 다시금 볼품없어졌다. 아쿠아리움 직원이냐고 묻는 말에 그 사람은 대답하기 꺼려했다. 굴하지 않고 일할 때만 있는 게 아니라 왜 항상 물속에서 사느냐 하니 곧장 불편함을 내비쳤다. 사장이 안 꺼내주는 거야? 이쯤 했을 때 그 사람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버렸고 그 뒤부터 나는 그냥 그 사람을 인어라고 칭했다. 뭔가 맞지 않다는 생각은 했지만 적어도 인어는 인어라는 호칭을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인어가 오늘따라 희게 질렸다. “맞았어?” 인어는 웃으면서 도리질을 친다. “부었는데”하고 물으니 “있잖아, 나는 바다에서 왔어”하고 말을 가르고 들어온다. 갑작스런 말에 고개만 주억였다. 그냥,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인어든 인어가 아니든 일단 아쿠아리움 태생은 아닐 테니.“바다는 물이 짜.” 인어는 내가 듣고 있는 걸 확인이라도 하는 양 눈을 마주쳤다. “여기는, 싱거워. 물이. 그래서 그런 거야.” 인어는 손짓으로 물방울을 만들어낸다. 거짓말, 속삭이려는데 인어의 말이 빨랐다. “그러니까 와서 같이 울어줄래?”
적보랏빛 뺨에 손을 얹으니 뜨뜻하다. 물안에 계속 있었음에도. 그래서 나온 충동적인 말이었다. 남의 인생에 관여하기엔 버거우면서도 “바다로 갈래?”라고 물었고 인어는 이제껏 물어보지 않은 내가 무색하게 그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긍정의 대답을 했다.

 

가방은 앞으로 메고 패딩으로 인어의 다리를 감싸고 그대로 업었다. 직원 중에서 인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사실상 없어 누가 제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게 충동적이었다. 가까운 바다로 가는 버스를 끊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문득 인어가 공기에 노출되어 바짝 말라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돌아본 인어는 새카만 눈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구경만 할 뿐 아무 이상 없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얼마 안 있어 어둑해지더니 갑자기 비가 내렸다. 이렇게 추운데 눈도 아니고 비라니 좀 난데없었다. 버스기사가 통로 불까지 끄자 세상이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암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슬쩍슬쩍 내리치던 번개가 이제는 아주 요란했다. 수연이는 번개를 무서워한다. 다현이도. 우진이는 비를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오늘 너무 추운데. 아까부터 애써 하지 않고 있던 생각들이 번개 하나에 물꼬가 트여 줄줄이 이어져 나온다. 가을 누나가 사라졌을 때 아무도 섭섭함을 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결국 그냥 나만 도망치는 거 아닐까? 조만간 정말 독립을 해야 했고 돈도 사실상 내 몫인 걸 챙겨 나온 것뿐이다. 우진이랑 같이 쓰는 패딩을 들고 나와버린 건 미안하지만…… 잘 모르겠다.

 

축축한 바깥만 보다가 언젠가부터 자고 있는 인어의 얼굴을 봤는데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바다야?” 나는 도리질을 쳤다. “저기 초롱아귀도 있는데.” 가리키는 손끝엔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이 있었다. “아니잖아.”하니 번개가 치길 기다렸다가 하는 말이 “전기뱀장어도 있어”다. 그것도 아니라하니 “그럼 여긴 아쿠아리움이야? 저기 상어도 있고.”하고 새로이 묻는다. “너 진짜 바다로 가면 되는 거 맞아?” 바다가 뭔 줄 알아? 인어가 고개를 급하게 끄덕여 뒷말은 내뱉지 않고 삼켰다. “농담이지.” 인어가 푸스스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항상 여기 살았어?”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땅 위겠거니 미루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는 얼굴이 왜 부었지.” 대답이 없자 인어는 조그맣게 덧붙인다. “너도 사실 바다에서 왔나봐.”

 

비는 갈수록 거세졌고 바닷가까지 왔는데도 인어를 쉬이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빨리, 얼른.” 몇 번이고 보채는 소리를 듣고서야 인어를 다 젖은 모래사장 위에 내려놨다. “늦었다, 빨리 가봐.” 인어는 패딩 지퍼를 내리며 말했다. 말라비틀어진 다리를 내놓은 인어와 몰아치는 바다가 비현실적이었다. 인어가 슬금슬금 뒤로 몸을 뺐다. 좀 더 가면 바다였다.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따라가니 인어가 저리가라며 내 뒤로 고갯짓했다. 그러니까, 말려야 되는 걸 아는데 그럴 수 없는 건 무엇 때문이지? 등부터 물에 빠지는 인어에게 나는 패딩을 던져줬다. 인어는 거절하지 않고 패딩을 껴안은 채 물속에 잠긴다, 잠겼다.
버스터미널에 들어가자 인어를 업고 있을 때도 시선 한 번 안 주던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본다. 편의점에 들어가자 계산기를 쥔 사람이 “손님, 물…….”하며 바닥을 가리킨다. 그제야 제대로 젖은 걸 안다. 그 순간에도 돈 걱정을 했다가, 이내 돈은 종이가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멍청하게 안심한다. 밴드 한 통을 샀다. 주인은 우산을 권했지만 이미 다 맞은 게 뭔 소용인가 싶었다. 버스기사한테 사정을 해 옷을 다 짜내고 좌석에 앉는 걸 조건으로 겨우 버스를 탔다. 돌아가는 버스는 아까만큼 요란하진 않았다. 창밖만 봤다. 인어가 존재하긴 했는지 헷갈렸다. 모든 게 상상 같았다. 창에 맺힌 물방울에 산란되는 빛들에 얼핏 보면 바닷속 같기도 했다. 창 안에 있으니 아쿠아리움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말도 안 된다는 거 알지만 문을 열었을 때 전기뱀장어가, 인어가, 바다가 날 맞이하길. 이 시간이면 잠금쇠를 삼중으로 걸었을 게 뻔해 다 얼어붙어 무감한 손으로 문을 두드린다. 문은 신경질적으로 벌컥 열리고 내뻗치는 건 아귀가 아닌 손아귀지만 인어도 한 번의 두드림으로 바다에 간 건 아니니까, 문은 쾅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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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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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에 들어갔는데 왜 튕겨 나왔는지
어젯밤엔 무심을 걷다 왔다
걸리는 것은 없고 흐린 시야만 탓하기엔 우리가 너무 엉성했다

 

발단
사촌동생은 제법 표현을 하고 손엔 크레파스가 한가득
해는 빨강 별은 노랑
눈동자는 투명한데 동생의 세계는 퍽 알록달록
발바닥에 하트를 그리는 붉은색이 자꾸 부러집니다

 

전개
동생아 너는 다 죽어가는 보라로 하트를 그리렴 그건 막 피어나는 잿빛 같은 거야
언니 무슨 소리야 하트는 빨강이야
맞아 사실 그런 건 다 소용없는 거야 다 동원해도 진달래 한 송이 피워내지 못 하는 진달래색은 무어니 하늘색을 안다면 크레파스는 진작 분질렀지 않겠니

 

위기
얘 너 동생한테도 이상한 소리를 하니
어머니의 말씀은 애정이오 사랑입니다 희뿌연 건 아직도 체의 문제겠지요
너는 단 것만 받아먹으려 해

 

절정
하지만 인간이라면 응당 귀에 크레파스 두어 개쯤은 처박고 사는 것 아닙니까? 입술 사이 달싹달싹 편협하게 뭉개진 크레파스를 문 화려한 사람이 이다지도 많은데 문제 될 것 하나 없습니다

 

결말
나는 안경 없이 한 발도 못 내닫는 눈먼 자입니다 그깟 색이 뭉개지든 말든 경계 없는 세상은 똑같으나
귀로 삐져나온 색들이 결국 경계 따윈 존재하지 않다고 나는 똑같이 얼룩덜룩합니다

 

동생의 분출은 어느새 다리까지 차올랐고
다만 나는 희끗한 벽지로 바라봅니다
이제 와 색칠놀이에서 빠지기엔 발자국에 뒤쫓길까

 

 

 

 

 

 

*격정은 미성숙함 따위로 소화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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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는 미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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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메밀을 함부로 돌아다니게 하지 마십시오.

 

어린 국화들이 서식하는 곳에는 빛을 죽여야 합니다. 그 고운 것들은 다 녹은 달빛에도 못 이겨 희게 색이 바래버립니다.

 

가령 운동장 한가운데 같은 곳에 세워두지 말아야 합니다. 방방 켜진 불들을 보면 제 고향 같아 미친 듯이 쏘다닐 게 뻔합니다. 저기 스멀스멀 국화가 도깨비 혼혈이란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고 나발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손으로 기고 내일은 가장 높은 가지에 목을 맬 거야

 

팔렐레레레 사리분별 못하고 웃어젖히는 국화한테 카페인을 주입한 건 도깨비밖에 없을 테니 일단 저 빌어먹을 비석들에 커튼을 치고 메밀밭을 밀어버립시다. 그리고 차라리 도토리나무를 심읍시다.

 

이건 어쨌든 국화 모르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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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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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쌀쌀해졌는데 다들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나는 푸른색에서 나왔다 맑음으로 대표되는

 

 

투명한 수정에 우울하고 음침한 것만 들이대니 푸르게 빛을 내지

솔직해서 다 보여주니까 뒤엣것들이 비치잖아 날 위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강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나는 멍든 쪽빛 그것마저 자꾸 훔쳐보려든다

그냥 계속 흐려지고 싶은데 들어본 적도 없는 알러지가 난리를 쳐 걸핏하면 체한다

망할 과민반응 예민해서 뛰어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

 

 

정신 나간 놈들만 바다에서 허덕이니까

난 마음이 좁으니까 없다고 고고한 척 하기엔 잘못 디디면 순식간에 검어지는 거야

시체처럼 꼿꼿하게 서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게 많이 엉긴 거고 공명 따위 없는 속이 좋아

잠을 자지 않아도 돼도 평생 잘 작정이다

 

 

나는 푸른색에서 나왔다 청아하지 않아서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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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말-해로운 말-모든 사람이 별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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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시입니다. 이전에 올렸던 시들을 퇴고하려다가 새로 써서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무해한 말>

 

 

말에 온점을 달고 싶어

긁어내리는 물음표는 싫은데

갈고리는 혓바늘로 돋아 떼어낼 수 없고

차가운 입술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항상 웃을 수 있을까

물음표의 날을 내게 돌려

입술을 도려내었다

비치는 나는 웃고 있지만

부작용은 염증으로 번진 반점인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도대체,

 

 

흘러내린 가증은

꼬리를 가려 부드러운 결을 만든다

 

 

 

 

<해로운 말>

 

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넌 저렇게 빛나는데 난 왜 아무 것도 아니지 너한테 난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일 텐데 뭘 더 바라는 거야 미안해

 

 

 

 

<모든 사람이 별이라면>

 

 

위성은 따위에 속하는 세상

사람들은 시끄러운 화소에 눈이 멀고

검은 것들은 귀에 설어 못 삼킨다

 

 

빛나지 않는 것들을 다 쥐기엔 그만큼 넓지 못하다

시간의 틈에 페트병을 버리러 온 사람조차

가진 것보다 바닥에 박힌 유리별을 잇새에 품고 싶어 하는데

 

 

불살라야만 발광하는 것들은 서로를 애틋해한다

스쳤던 온기, 착잡한 끝인사, 하얀 적막을 떠올린다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릴 것들 무엇이든 조각은 제 가치를 안다

 

 

우리 둘만 있으니까 눈 살짝만 떠 볼래 유리별도 항상 가로등만 쳐다보고 있는 걸

번들거리는 욕망이 손에 가득해 깍지를 낄 수 있는 거야

우리는 은색 포장지 안에 숨어 빙글빙글 돈다

 

 

 

 

조언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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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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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 사이를

부표로 표류하다

익은 발에

흰 물결이 걸리었다

 

 

환상은 몇 번이고 깨어진

돌가루보다 세밀하여

가라앉으니 희기보다는

투명하였다

 

 

숨이 짧아 내저은 손에는

흔적만 남은 버석한 아가미

돌고래의 눈물은 증발과 동시라

나는 대신 모래알들을 게워내었다

 

 

사막은 끝없이

모래알 같은 생애가 와르르

 

 

표정이 없는데도

자꾸만 따뜻해졌다

모래를 뒤집어쓴 돌고래는

다정이 무거워 못 헤어 나오고

 

 

나는 몸을 띄우려

수천의 생애를 꺽꺽

돌고래는 얽힌 내 발은 풀어주지도 않고

건조한 숨만 불어넣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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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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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는 벌레가 많다. 바닥에 깔린 머리카락을 제때 안 치워서인 것 같다. 바닥을 기거나 날아다니다 걸리는 놈들은 가차 없이 죽이곤 했는데 거미는 왠지 망설여졌다. 백석의 수라 때문이다. 다른 벌레는 죽이면서 거미 앞에서 망설이는 게 웃기지만 거미는 익충이니까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래서 침대 바로 위에 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미와 함께 삼 일을 잤다. 삼 일째 되는 날 자려고 누우니 거미가 없었다. 자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일어나서 처음 보는 시커먼 덩어리가 없으니 기분이 이상해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천장을 살피다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거미는 덩칫값을 하듯 새끼를 어마어마하게 쳤는데 거미들이 차지하는 영역이 내 영역보다 더 넓었다. 내 집인데! 소름이 오소소 돋아 빗자루로 거미집을 다 부쉈다. 포획한 새끼거미들은 변기 물에 내려버렸다. 수라는 잊힌 지 오래였다. 거미들을 이십 분 넘게 잡아들였으나 모든 일의 원흉인 큰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큰 거미를 잡기위해 천장을 샅샅이 뒤졌다. 큰 거미가 나보다 세력을 넓히지만 않으면 같이 살아도 상관없었겠지만 큰 거미는 정도를 몰랐다. 일주일이 꼬박 지나고서야 큰 거미를 찾을 수 있었는데 막상 죽이려 보니까 큰 거미가 생각보다 더 커서 에프킬라를 사왔다. 한두 번 뿌려선 꿈쩍도 안 하기에 등이 하얗게 덮일 때까지 에프킬라를 뿌려댔더니 거미가 다리를 꼬며 거미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곡예를 하더니 바닥에 내려와서 파들파들 기었다. 괴로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조금 미안했다.

사실 처음이 어려웠지 그 다음부턴 쉬웠다. 큰 거미가 문제가 아니었는지 거미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고 나는 거미를 볼 때마다 망설임 없이 에프킬라를 뿌렸다. 뒤돌아보면 생겨 부수기도 포기한 거미집 곳곳에 팔다리를 옹송그린 채 죽어 있는 거미들이 늘어났다. 하루는 창문을 반대로 열었다. 방충망도 없는 창이 거미줄 때문에 뿌옜다. 항상 열댓 마리는 보이는 큰 거미집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어 나오는 거미들의 본거지였다. 내 집 안에만 안 들어오면 괜찮다고 놔뒀는데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죽이는 것도 귀찮아 그냥 다 죽여 버렸다. 마흔세 번째 거미를 죽이고 침대에 누우니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졌다. 잊힌 지 오래인 수라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대식구를 전부 죽인건가?

침대에 누워 본 휴대폰엔 5월 4일이 날짜로 찍혀 있었다. 원래 꿈속에선 꿈인 걸 모른다는데 날짜를 본 순간 꿈인 걸 바로 알아버렸다. 말도 안 돼, 지금 수능이 50일도 안 남았는데! 처음으로 자각몽을 꿨다. 거실엔 안방이 달려 있었고 문을 여니 엄마가 자고 있었다. 동생한테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화장실에 있다고 했다. 다 됐고 엄마 옆에서 자고 싶어 자리를 좀 비켜 달라고 엄마를 깨웠다. 엄마는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내가 깼다. 집에는 나 혼자였고 서러웠다.

가족은 이사를 했다. 나 없는 우리집에 나는 열 번을 채 안 가봤다. 이사할 때 바꾼 비밀번호는 갈 때마다 잊어버려 새로 물어보았다. 빨래바구니랑 쓰레기통 위치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에서 엄마, 아빠, 동생 딱 세 자리 있는 칫솔거리를 보고 기분이 묘했다. 수능이 끝나면 우리집으로 들어갈 거라지만 약간 내쳐진 기분이었다.

거미한테 내 상황을 투영하는 건 아니지만 의도치 않은 가족해체를 시킨 게 마음에 걸렸다. 에프킬라를 든 순간부터 의도치 않았다는 건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좀 외로운데 그냥 거미랑 같이 살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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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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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은 얼굴이 벌게진 채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베이스는 허공에서 부서지고 조각들은 부메랑인양
동네 한 바퀴를 돌고서야 우리 귀에 닿지
낮말은 새만 듣는다고 꼭대기층으로 쫓겨났으나
우리의 낮은 학교가 다인 걸 밤이 더 시끄러운 건 우리 탓이 아니야
컴퓨터한테 전원잭을 빼앗겨 넋 나간 앰프는 누가 옮기고
이 빠진 키보드 틀니는 누가 챙길 건데
해체는 했지만 조립할 줄 모르는 드럼을 들고 멍청히 서 있는 표정들이 좋아
부러진 드럼채는 푹푹 꽂아 무덤을 세우자
집까지 피크가 따라오기 전에 주머니를 비우자
지나치게 긴 손톱과
지나치게 짧은 손톱
스무 살이 되면 모두가 같은 손톱을 가질까
중압감은 곧 중력 시간은 멈춘 것만 같았는데
창문은 열어놓고 문단속은 철저히 이 습관만 남겨놓을래
그래 그래 기타가방 같은 건 죄다 태워버리자
불은 무서우니까 조명 위에 얹어놓고 기다릴래 어쩔 수 없어
물에 퍼지는 약가루가 불꽃놀이보다 화려했는데 뭘 기대하는 거야?
손톱 밑 굳은살이 흐늘거릴 때
우린 아무 어른이 되는 거야 아무 어른이 되는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야 어른이 뭐야 달력이 한 장밖에 안 남았는데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냥 술냄새 숨기려 아이스크림을 먹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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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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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스스로를 화인이라 칭했다. 인간은 낯설어했다. 차라리 수인이면 용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짐승은 씨가 마른 지 오래라, 그것도 푸념뿐이었다.

인간은 오랜 도륙에 지쳤다. 그래선지 화인의 변화를 한참 뒤에나 알아차렸다. 화인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어설프게 인간을 따라했다. 수술과 암술이 부끄러워 꽃잎을 땅에 처박고 뿌리로 벙긋벙긋 말을 걸었다. 아담과 하와의 신화를 새로 쓰려는 그들에, 인간은 뱀이 무엇인지 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을 불쾌한 골짜기 한가운데 빠뜨린 죄로 화인은 그 옛날 짐승들처럼 배척당했다.

제초제통이 유독 무거웠다. 다기는 지구 마지막 구역에 다다를 때까지 내내 얼떨떨한 낯이었다. 화인은 도망친 지 오래고 아직 부끄러움을 모르는 풀들만이 꼿꼿이 땅에 뿌리 내린 채 하얀 분말을 뒤집어썼다. 프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분말을 살포해댔다. 다기는 그런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프그는 몇 안 남은 인간의 대장격이었고 또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인간 중 하나였다. 다기는 화인에 대한 감정보단 프그에 대한 믿음 그 비슷한 무언가에 기대 통을 탈탈 비웠다. 전지구라고 해봤자 네 시간이면 빠짐없이 밟을 수 있는 땅 위로 내려앉은 가루들이 퍼석했다. 식물들은 곧 말라죽을 테고 식물에게서 힘을 얻는 화인도 곧 말라죽을 터였다. 다기는 언젠가부터 온 적막에 실없이 어깨를 주무르며 프그의 눈치를 살폈다. 앞으로의 계획 따윌 물을 생각이었으나 곧 어설프게 올라간 프그의 입꼬리에 엉켜있는 불안을 읽었다. 다기는 턱까지 늘어진 말을 애써 삼키고 항상 그랬듯 속으로 되뇌기만 했다.

식물이 없으면 화인은 죽겠지만, 인간은요? 짐승도 식물도 없는 땅에서 인간은 무얼 먹나요? 인간? 역시 다음 토벌은 인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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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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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넌 쟤의 발그레 분홍바다 같은 미소를 지워버리고 싶단 거잖아

눈싸움 해봤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곱고 노란 흙만 솎아 섞어 응 더 꽉꽉 눌러 뭉쳐야지

맞혀버려 쟤 얼굴에 홍조가 걷혀야 숨이 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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