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새벽
잊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고 [4]

민정과 주환은 중학교 1학년 가을에 사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환을 보며 남몰래 가슴앓이  하다, 초6 때 같은 반이었던 김예서가 주환에게 고백할 거라 떠드는 걸 듣고 그날 오후 무작정 내지른 고백이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교복 차림으로 아무도 없는 교문 앞에서 고백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언제부터, 왜 좋아하는지 육하원칙으로 사랑의 역사를 읊다가 아, 망했구나 생각했는데 주환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사귀는 거지? 민정은 그날 밤 흥분으로 잠을 못 이루다, 새벽 2시에 다짜고짜 자신의 베프인 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안은 전화벨이 세 번째 울렸을 때 전화를 받았고, 민정은 흥분해서 잠이 덜 깬 지안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잊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고
/ 2020-08-21
서새벽
혀는 칼날보다 강하다고 믿는 소년 [1]

중3 1학기 기말고사 D-32   “아 어카냐. 이번 시험 망치면 엄마가 컴퓨터 부순다는데.” 정은이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며 말했다. “나도임. 안 그래도 저번 시험 망쳐서 영석이 단단히 화났던데. 이번 시험 조지면 어디 암매장 당할  듯.” 영석, 맞다. 영석 초 영석 중 영석 고 설립자 이영석.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아는 그룹 영석 그룹의 설립자 이영석. 영석 그룹은 영석 중공업, 영석 화학, 영석 교육재단, 영석 출판, 영석 제당 등을 아래에 둔 한국의 대기업이었다.  승빈 말을 빌리자면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밥 벌어먹고살게 해주는 아주 대단한 기업이었다. 그 그룹의 사장이 승빈의 할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영석 교육재단 이사장이었다.[…]

혀는 칼날보다 강하다고 믿는 소년
/ 2020-08-05
서새벽
검은 책갈피 [1]

 죽음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짓말, 이라며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될까 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부정당한다는 사실은 여동생과 일 년 가까이 쌓아온 추억을 부정당한다는 사실과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그것이 나에게는 너무 끔찍한 일이었기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내가 끌어안고만 있는다면 내 속이 너무 곪아 버릴 것 같아서 털어놓는다. 내 동생과 일 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여동생과 일 년 동안 연락을 했다.’ 여기에 한 단어를 덧붙이면 조금 특별한 문장이 되고, ‘나는 여동생과 편지로 일 년 동안 연락을 했다.’ 또 한 단어를 덧붙이면 보는 이에 따라[…]

검은 책갈피
/ 2020-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