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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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식은 언제부터인가 12시간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 12시간 자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지각을 할 뻔한 날부터였다. 민식은 후드티에 트레이닝복 바지만 입고 신발에 발 뒤꿈치가 쓸리는 것도 모른 채 뛰었다. 쇠 냄새와 촌스러운 간판들이 가까워졌다. 회사 앞에 도착했다. 민식의 눈에는 한 자리도 비어있지 않은 주차장이 보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자주 보았던 대리가 민식에게 웃어 보였다. 연락 못 받으셨나 봐요. 민식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오늘인가요? 대리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오늘부터랍니다. 민식은 대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 뒤꿈치가 아파져 왔다. 민식은 생각을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왜 오늘 지각을 할 뻔했는지 알게 되었다. 어제가 붉은 조끼와 구호, 돌고 도는 술잔, 그런 것들로 형상화되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공단이 즐비한 곳을 지나서 집 앞 8차선 횡단보도를 기다리면서 민식은 깨달았다. 중얼거렸다. 파업이구나.

 

며칠 전부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식은 기사 일에 뛰어든 지 몇 년 되지 않은 초짜였고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좀 어수룩했다. 하지만 잔뼈가 굵은 이들은 벌써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퇴근길 지나가듯 툭툭 던지던 말들이 조금씩 구체화 되어갔다. 민식이 불안하게 이것저것 물어볼 즈음에는 이미 모든 사항이 결정된 후였다. 어제는 확정된 결론을 자축하는 행사였고 민식은 일단은 그 틈에 끼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안정된 일자리는 아니었고, 회사 측에 붙는 것보다는 아저씨들 측에 붙는 게 그나마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길이라고 민식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민식은 파업이 언제 시작하는 건지 까먹고 있었고 이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있었다. 당장 오늘부터 일거리가 없어졌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민식은 군대 시절부터 모아둔 돈이 얼마 정도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한 일주일 정도는 걱정 없이 놀고먹을 수 있지만 그 뒤부터는 불안해질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민식은 그냥 회사에 붙어서 안전하게 운전이나 해서 트럭이나 살 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가도 아저씨들에 찍혀 영영 업계에 발도 못 들이면 그건 정말로 큰 일이라는 걱정이 들어서 복잡해졌다. 횡단보도 불이 켜졌다. 민식은 집 계단을 올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놀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민식의 휴대전화는 아니었다. 민식이 사는 원룸 공동식당에 연결된 전화였다. 주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을 때 전화를 걸 때 사용했다. 아니면 걸려온 전화를 주인집이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용도였다. 원룸 문을 꽉 닫지 않으면 아래서부터 소리가 울렸다. 민식은 어쩐지 전화를 직접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공동식당이 있는 일 층으로 내려갔다. 전화를 집으려고 한 순간 주인집이 받았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민식에게 건넸다. 학생한테 온 전화네. 고등학교 친구라는데? 민식이 아 예, 하고는 두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가 한 손을 뺐다. 여보세요. 민식아.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민식은 이름이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쪽에서 먼저 정체를 밝혔다. 오랜만이라서 그렇구나. 나 형철이야. 박형철. 민식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박형철이라는 이름을 반추해보았다. 박형철이 자신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침묵이 어색해질 즈음에야 민식은 박형철이 그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이었음을 상기해냈다. 사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것도 생각났지만 몇 번 스쳐 지나간 것 말고는 기억이 없었다. 민식은 일단 어색함을 없애고 전화를 끊는 쪽으로 유도하고 싶었다. 어중간한 사이의 고등학교 동창이 걸어오는 전화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간단하고 어색한 관계증명과 그 뒤로 이어지는 대출 권유, 다단계, 공동투자 제의 같은 데 민식은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민식보다 형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내가 잘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네. 나중에 다시 전화해볼게.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민식은 드디어 동창 등쳐먹는 방법도 진화한 건가, 하고 생각했다. 민식은 형철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려 노력해보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떠올리려야 떠올릴 수가 없었다. 형철은 민식과는 다른 무리였고 말을 섞거나 했던 적도 없었다. 어쩌다 눈 마주치면 어색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왜 자신에게 형철이 전화를 했는지 민식은 알 수가 없었다.

 

형철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 건 이틀 즈음 뒤였다. 민식은 전화벨이 다섯 번쯤 울리기를 기다렸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 박형철이야. 형철이 먼저 말했다. 이제 내가 기억나니? 민식이 대답했다. 어. 고등학교 동기잖아. 너무 갑자기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서 그때는 잘 기억이 안 나더라. 형철은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민식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몇 초 지나서 민식의 귀로 대답이 들렸다. 다른 게 아니고, 운전 좀 가르쳐 줄 수 있나 해서. 운전? 민식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 너 운전 잘하잖아. 내가 운전 잘하는지는 어떻게 알아? 아니, 잘할 것 같다고. 너 고등학교 때부터 운전했잖아. 민식은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민식이 3학년 생일이 지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서 종종 아버지 차를 운전하고 다녔던 건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형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였다. 민식이 말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너 나랑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아, 그랬지. 민식이 대답했다. 머릿속으로는 졸업앨범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민식은 전화를 끊고 싶었다. 내가 가르쳐주는 것도 좋은데 운전학원을 알아보는 건 어떨까? 내가 다녔던 데 괜찮은데. 민식이 살짝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운데,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겠대. 네가 좀 도와주라. 기본기만 가르쳐줘. 돈도 줄게. 민식은 돈이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잡았다. 그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운전 되게 잘하는 사람 있는데. 그 사람 소개해 줄게. 그게 더 나을 거야. 형철이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음. 그럼 일단 전화번호 좀 주면 내가 연락할게. 그래. 다음에 만나서 밥 한번 먹자. 민식이 전화를 끊었다.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식은 이제 누구를 형철에게 소개해줄 지가 고민이었다. 영민이 떠올랐다. 영민은 민식보다 다섯 달 늦게 트럭을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전역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운전병으로 복무했다고 했다. 공백이 있었지만 영민은 성실했고 남이 하는 부탁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민식은 영민 정도 성격이면 형철이 답답해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형철은 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지 않아 한 달 전 통화내용을 뒤져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영민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영민은 회사 지하 휴게실에 있다고 했다. 거기는 왜? 민식이 물었다. 여기가 노조 사무실이래요. 영민이 대답했다. 민식은 일단 그리로 간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민식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회사 건물 지하 휴게실로 향했다. 철문 둥근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오래된 먼지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비닐 장판이 깔린 바닥에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은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렁이고 있었다. 모두 빨간 조끼를 입었고 더러는 머리띠도 메고 있었다. 드물지만 머리를 민 사람도 보였다. 벽 한쪽에는 문구가 적힌 종이 피켓과 천으로 된 걸개가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영민아. 민식이 불렀다. 의자에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던 영민이 일어났다. 빨간 조끼에 짧은 머리였다. 민식이 영민을 한 번 더 불렀다.

 

영민과 민식은 지하에서 건물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민식이 말했다. 간단한 거야. 운전하는 것 좀 네가 도와주면 돼. 영민이 물었다. 형이 직접 안 하고요? 형 친구라면서요. 친구까지는 아니고, 아는 사람. 동창. 돈도 준대. 너 많이 벌어야 한다면서. 파업하면 임금도 안 나오잖아. 영민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거죠? 형철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내가 너 아끼는 후배여서 너한테만 소개해주는 거다. 할게요. 영민이 말했다.

 

파업 대열에 동참한다고 생각했지만 민식은 갈수록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눈치 보면서 시작했지만 온종일 사무실에 죽치고 앉았던 이후로는 다시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대신 공사장에서 잡부 노릇을 하거나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일당을 벌었다. 그렇다고 회사 측에 붙을 마음은 아니었다. 민식도 회사에 대한 반감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민식은 종종 동료들의 파업에 대한 뉴스를 찾아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협상 결렬이라는 글자만 몇 번을 보았는지 민식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파업이 길어지고 일당벌이도 트럭을 타던 때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였다. 민식은 형철에게 영민을 소개해 준 것이 아쉬워졌다. 그깟 운전이 뭐 대수라고. 형철에게 돈을 좀 더 올려 받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식이 늦게 일어난 날 영민의 전화가 몇 통 들어와 있었다. 연속으로 걸려 있었다. 민식은 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민이 첫 마디를 꺼냈다. 형, 나 형이 말한 운전 도와주는 거 그만뒀어요. 민식은 속으로 기쁘면서도 궁금해졌다. 왜? 무슨 일인데? 형, 그 사람 인간이 아닌 것 같아요. 도대체가 몇 번을 알려줘도 감을 못 잡더라고요. 아니 운전은 고사하고 시동도 못 걸더라니까. 그래서? 겨우 시동 걸고 액셀이랑 브레이크 밟는 것까지 가르쳐줬죠. 그러니까 자기가 이 정도면 됐다고, 운전학원 가본댔어요. 몇 주동안 한 게 그게 끝이야? 네. 알았어. 좀 진행은 되고있냐? 영민이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요. 요새 회사에서 대체인력 뽑아서 운행할 거라는데 그 소문 때문에 다들 난리예요. 형은 아니죠? 나도 회사 싫어해. 민식이 곧 전화를 끊었다.

 

형철이 민식에게 연락한 것은 영민이 전화한 지 두어 달 뒤였다. 민식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형철은 예의 힘없는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형철은 운전학원에 다니면서 면허를 땄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영민이 도와주었던 이야기나 시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민식은 그다지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 때마침 손님이 짐을 한가득 들고 오는 것을 보았기에 잠시만, 이라고 말하며 형철의 말을 끊었다. 형철은 조금 있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운전면허를 따기는 했는데 완전한 건 아니야. 민식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형철은 연습면허를 땄다고 말했다. 도로주행 중이라고 차에 붙이면 도로에서 주행은 가능하대. 그런데 2년 이상 운전한 사람이 동승해야된대. 민식은 이제야 형철이 왜 전화를 했는지 알았다. 형철 주변에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도와달라고? 응. 돈도 줄게. 형철이 너무 스스럼없이 말해서 민식은 조금 당황했다. 얼버무리고는 대화를 끝냈다. 민식은 정작 약속 전날까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만취한 채로 늦잠을 자다 전화를 받고서야 민식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해냈다. 민식이 약속 장소로 가니 형철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법한 회색 경차였다. 아직 뒤에는 도로주행이라는 글자가 없었다. 형철이 왼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 그것인 것 같았다. 민식이 어떻게 차를 구했냐고 물었다. 형철은 웃으면서 렌터카라고 말했다. 도중에 운전면허 없이 여기까지 차를 운전했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형철은 동네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민식이 할 일은 조수석에 앉아서 그가 어떻게 하는지 도와주면 되는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몰랐지만 민식은 차 시트에 앉자마자 자신이 엄청나게 피곤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눈꺼풀이 조금씩 느리게 감기는 것을 느꼈다.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자꾸만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싶어졌다. 형철은 더듬거리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차가 주차된 모퉁이를 돌 때는 몇 번이나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민식은 잠시 졸다가도 뒷 차가 울리는 경적에 몇 번씩 고개를 쳐들었다. 형철과 민식은 시내를 빠져나와서 강 바로 옆 4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교통량이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민식은 팔짱을 끼고 잠에 취할 수 있었다.

 

민식은 타의로 잠에서 깼다. 길게 경적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옆을 보니 형철이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앞 신호등을 보니 파란 불이 선명했다. 민식이 풀썩 소리 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지금 출발해야 돼. 형철이 조금씩 속도를 냈다. 뒤차들이 경적을 울리고는 앞질러 갔다. 제기랄. 민식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잠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형철은 겁에 질려서 민식이 무슨 행동을 하든 신경도 쓸 수 없었다. 형철은 30킬로를 넘지 않게 운전했고 그의 차선을 고른 차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깨닫고 탈출을 시도했다. 형철은 그가 운전하는 차선 뒤에 단 하나의 자동차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형철은 그게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차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니 형철은 조금씩 속도를 올렸고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그가 원형교차로를 무사히 통과했을 때부터였다. 그러나 형철은 민식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원형교차로를 지나서는 오거리였다. 형철은 파란불만 보고 우회전 신호를 받지 않은 채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다행히 그에게 달려드는 차는 없었다. 형철은 뒤늦게 도로에 적힌 글자를 발견하고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형철이 이제껏 올렸던 속도를 갑작스레 늦추었다. 민식은 차 앞부분에 거의 닿을 만큼 몸이 당겨졌다. 민식은 운전을 도와주러 왔다는 것도 깜빡한 채 자기 잠을 방해한 게 무엇인지 파악에 나섰다. 민식은 형철이 거의 걷는 정도 속도로 운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야, 뭐 하는 거야? 민식이 물었다. 아까 도로에 속도제한 09라고 적혀있던걸. 60이 아니고? 민식이 말을 끝낸 순간 앞에서 트럭 하나가 미친 듯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민식은 형철을 보았다.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가 민식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민식은 안전띠를 풀었다. 엑셀에 올려진 형철의 발을 밟고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트럭은 민식과 형철이 탄 차 트렁크 부분을 스치듯 지나갔다. 민식은 그대로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갓길에 세웠다. 형철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민식이 형철의 뒤통수를 쳤다. 다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역주행을 한 거야? 형철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몰랐어. 그게 뭔지 몰랐다고. 민식은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미친 듯 긁었다. 잠시 후 차 문을 열고 나갔다. 형철은 시동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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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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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갔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적어도 사흘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어쩌면 오래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무언가 빼먹은 물건이 있는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면도기가 생각났다. 방이 엉망이라 무너진 서류 더미를 들어내고 틈새를 뒤져서 겨우 찾았다. 이리저리 흩어진 종이 뭉치들을 대충 갈무리했다. 이미 물결 모양으로 퍼진 잔해들은 그대로 두었다. 면도날을 뺐다. 화장실 찬장에서 새 날을 꺼내 갈아 끼웠다. 이틀 전이 기억났다. 가장 최근에 면도기를 쓴 게 그 날이었다. 모임을 앞두고 길렀던 콧수염을 밀어버린 오후였다. 날을 바꿀까 생각했지만 한 번 정도는 더 써도 괜찮겠다 싶었다. 면도기가 움직일 때마다 살에서 털이 분리되며 미세한 진동과 함께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거울에 푸른 수염 자국을 비추던 중 전보가 왔다. 부친위독. 순간 정신의 무게추가 한 쪽으로 넘어갈 듯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전보를 갈색 나무 책상 위 종이 더미 사이에 올려놓았다. 의자에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검지와 엄지를 벌려 입을 감싸고 동공에 힘을 풀었다. 다음 며칠 간의 일정과 오늘 만날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십 년 만에 만나는 대학 동기들이다. 다시 언제 만날지는 모른다. 얼굴만이라도 비추고 나오기로 했다. 하루 동안 누레진 셔츠를 벗어 바구니에 쑤셔넣었다. 합판 옷장을 열었다. 새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마지막 단추를 잠글 때 종이가 양철 바닥에 쌓이는 소리가 스쳤다. 갑자기 귀가 멍해지는 듯하더니 가슴 한가운데가 요동쳤다. 누런 종이를 뒤집어서 방 안으로 들고 왔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왼쪽 모서리를 천천히 돌렸다. 부친사망급래요망. 발신자 명의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주소는 내가 아는 아버지의 집 주소가 맞았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아버지 집에 찾아간 날 내게 어색하게 인사했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광대가 우묵하게 들어간 얼굴과 흰자위가 누런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첩의 자식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던걸까. 나는 무심코 옆얼굴을 만져보았다. 방을 몇 바퀴 빙 돌았다. 동시에 오른쪽 손목에 달린 단추를 잠그고 풀었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한숨을 내쉬고 멈춰 섰다. 물 반 컵을 마시고 광낸 구두를 신었다. 둥근 양철 손잡이를 돌려 밖으로 나섰다.

 

젊은 날 자주 다니던 술집에서 벌써 반쯤 늙어버린 이들은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통기타를 버리고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에는 침묵과 잔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전보 이야기를 하려다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어지지 못하는 동정 어린 말들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이상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농담을 했지만 잠긴 목 때문에 거북하게만 들렸다. 취기를 빌려 억지로 자아내는 웃음들은 상투적이었다. 정적이 계속되고 누군가 입술을 들썩일 즈음 나는 일어섰다. 모두와 손을 맞잡고 건투를 비네, 따위의 덕담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도 끊긴 시각이었다. 억지로 들이킨 잔들 때문에 걸음이 지벅거렸다. 지축이 흔들리는지 내가 흔들리는지 알지 못한 채 구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엎어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그런데 어제 또 전보가 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소리를 들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잠바 하나를 러닝 위에 걸쳤다. 문을 열고 우체통 안에 손을 넣었다. 종이 질감이 느껴졌지만 손으로 쥐어지지 않았다. 전보를 양철 바닥에 붙이고 밀어 꺼냈다. 조카출생급부산행요망. 자형이 보냈다. 태기가 있다는 소식은 작년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들었다. 축하합니다. 누님, 하며 나는 누님과 자형의 손을 잡고 격려했었고, 양부가 내게 결혼을 언제 할 거냐고 물었던 것도 기억한다. 그게 지난 봄이었다. 지금은 해를 넘겼지만 아직 쌀쌀하니 열 달 정도 지난 셈이었다. 세 번째로 전보를 받은 날 회사에 장례 때문에 사흘 정도 못 오겠다고 말했다. 주말까지 몸 잘 추스르게. 차장은 내 어깨를 한 번 만져 주었지만 그가 인쇄소 뒤에서 담배를 피우며 툴툴거리던 것도 나는 보았다.

 

해가 뜰 즈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찬물에 얼굴을 비빈 뒤 양치를 했다. 새 셔츠를 입고 황갈색 코트를 걸쳤다. 검은 넥타이는 바랜 자주색 가죽가방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날을 갈아끼운 면도기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우체국으로 갔다. 공기가 바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직원들이 상자를 나르고 있었고 데스크에는 한 명만 앉아 있었다. 구석으로 가서 전보 발신지 한 장에 당일 도착. 이라고 썼다. 번호표를 뽑을 필요도 없이 바로 종이와 전보 값을 내밀었다. 급행인가요? 직원이 물었다. 예. 내가 대답했다. 직원은 손을 뻗어 하얀 대리석 위에 놓은 종이와 동전을 가져갔다. 나는 회전문을 밀어 우체국을 나왔다. 시계를 한 번 보았다. 다시 우체국으로 들어가서 한 장을 더 썼다. 급행으로 보내주십쇼. 직원에게 건넸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은 그새 제 자리를 찾아가고 거리에는 노파 몇 사람뿐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신작로 쪽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생각했다. 친아버지가 죽었다.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 양부의 딸이, 누님이 아이를 낳았다. 온 힘으로 축하해야 한다. 불행에 동정을 절반만 쏟아붓고 경축에 나머지 반을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감정을 반으로 나눌 수도 없다. 그럴 만한 조절력이 내게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다. 부산으로 가면 마땅히 장례에 가서 혈육으로서 도리를 다해야 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지언정 십수 년을 함께 살아온 호적상의 가족에게도 기쁜 낯을 보여야 했다. 두 장의 전보는 지금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누가 먼저 도착할까. 어쩌면 한 우체부의 가방에 모두 실리어 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병원 3층 산부인과에 한 장, 지하 영안실에 한 장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보도가 끝났고 아스팔트 앞에 섰다. 대로 횡단보도 반사경에 내 등 뒤로 달려오는 택시가 보였다. 몸을 돌려 오른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초록색 차가 멈추었다. 터미널로 갈 것이다. 결별과 축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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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미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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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미쳐가고 있다

이 만년필에 내 모든 몸과

영혼을 맡겼다

 

문학만이 나라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니까

 

이게 바로 지금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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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한 뼘 가까이 [퇴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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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한 뼘 가까이

고치기 이전 글입니다.

 

눈을 감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티끌들을 볼 수 있다. 그날 하루의 흔적들이다. 애써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지만, 형체는 핍진하다. 가끔은 가만히 눈감은 이 상황이 죽음이라 가정하곤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면 잠자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가슴 한쪽이 아리며 숨이 막혀왔다. 그러면 무서운 공상을 멈추기로 했다. 대신 생이 끝난 뒤에도 내 존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안도는 잠깐이었다. 죽을 수 없다면 그것대로 끔찍하겠지, 그 수많은 사람이 부대낄 자리나 있을까. 결국, 사람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 몰려왔다. 또 숨이 막혀와서 이제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끌어매었다. 며칠 동안 이런 상태를 반복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엎드려 잘 때도 그랬고 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결같이 대답은 쉼표보다는 물음표였다. 그때만 해도 이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믿었지만, 그 생각이 우스워지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걱정이 사라질 수는 없으니 가장 좋은 삶은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란 친구의 말이 들어맞았다. 사실 새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걱정 같은 사치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길로 다녔다. 의미 없는 지식을 남보다 더 채워 넣고 보상을 받았다. 잠은 부족해서 정신이 멍했고 눈만 감으면 꿈을 꾸었다.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문학마저 뒷전으로 치워버렸다. 이렇게 기계처럼 나를 죽이며 버텨내다 보니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일 같은 건 쉬이 망각해가고 있었다.

3년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냈다. 하루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평소에 가던 길로 가다 보니,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그가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등교 시간까지 맞추려면 걸어서는 아슬했다. 앞의 녀석도 학교로 가는 데도 샛길로 빠졌다는 건 그 길이 빠르다는 신호 같았다. 속는 셈 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길 들머리부터 구불구불한 골목이었다. 길바닥조차 아스팔트가 아닌 오래된 콘크리트였다. 큰 교회가 보이는 지점부터는 왼쪽은 산기슭이었고 오른쪽에는 노후화된 주택가였다. 그때부터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계속 따라가서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예상보다 십 분은 더 이른 시각이었다.

학교가 파하고서 더듬거리며 왔던 길을 떠올려 집으로 걸어갔다. 다시 그 산기슭과 낡은 집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그곳이 평범하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다.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무덤들이 보였다. 내 지난 상념들이 덩어리져 있는 것 같았다. 공동묘지처럼 정갈하지도 않았고 문중의 묘처럼 단정한 석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에 묘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언젠가 제주에서 보았던 이름 모를 산담은 죄다 홀로였다. 검은 돌로 무릎 높이의 담장을 세우고, 각자의 구역을 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무덤들은 최소한의 구획이나 기단석조차 없었다. 무덤이 있으면 그 옆에 무덤이 있었고, 그 위나 아래에 또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가 떠오르며 비추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자그만 흙산들은 햇빛을 머금고 풀을 돋우기만 했다. 그들은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모습이었다. 비석 이나마 세운 게 있으면 그나마도 없는 게 부지기수였다. 한자로 학생 신위라 쓰여 있는가 하면, 한글로 ○씨 ○○지묘라 쓰인 비석도 있었다. 세월에 깎이고 이끼가 껴서 한때 글자가 존재했는지조차 모를 돌도 있었다. 몇몇 무덤은 땅이나 다름없이 완만했다.

처음 이곳이 만들어졌을 때를 생각해보았다. 적당히 양지바른 언덕에 누군가 주검을 묻고, 또 누군가가 밤새 몰래 봉분을 만들고. 그러기를 수십 년이 넘었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묻은 이는 분명 다른 이의 흙을 좀 빌려야 했을 것이다. 주로 아래쪽 무덤이 허물어져 가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 테다. 찾아오는 이 한 명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언덕 맨 위쪽의 그나마 비석이 단정한 곳엔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무덤은 죽음에 가깝더라도, 그 가장자리에서 생은 버티고 있었다. 둔덕 왼쪽 구석에 푸른 그물을 친 곳이 있었다. 다른 부분들과 달리 평평한 땅이었다. 사다리꼴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땅 위에 파랗게 솟은 건 배추였다. 사람이 직접 울타리를 치고 심었다. 그곳뿐 만 아니라 주변에 밭이 많았다. 거기 누운 사람들이 내게 실마리를 쥐여주었다.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사람들은 살아내고 있다고. 죽은 자의 육체는 흙에 스며들고 그이를 머금은 땅은 작물을 길러 내고 사람을 살게 한다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을 알아볼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내가 본 대로만 판단해보자면, 죽음이 영원한 결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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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한 뼘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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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날들이 많았다. 주로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신도 내세도 믿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면 잠자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눈감은 이 상황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숨이 일순간 막히곤 했다. 그러면 무서운 공상을 멈추었다. 암울한 생각 대신 생이 끝난 뒤에도 내 존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영원히 살면 그것대로 끔찍할 거란 기분이 들었다. 그 수많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체념이 몰려왔다. 또 숨이 막혀와서 이제는 눈을 떴다. 며칠을 내내 이런 상태였다. 학교에서 엎드려 잘 때도 생각했고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결같이 대답은 쉼표보다는 물음표였다. 그때만 해도 이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믿었다. 그 생각이 우스워지는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걱정은 해결해도 또 다른 형태로 생겨나므로 가장 좋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 것이란 친구의 말. 들어맞았다. 기계처럼 나를 죽이며 버텨내다 보니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일 같은 건 쉬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멍하니 계속 살아냈다. 하루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평소에 가던 대로 가다 보니,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녀석이 어떤 샛길로 빠졌다. 등교 시간까지 맞추려면 걸어서는 빠듯했다. 앞의 녀석도 학교로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샛길로 빠졌다는 건 지름길로 간다는 신호다. 속는 셈 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샛길 초입부터 구불구불한 골목이었다. 길바닥조차 아스팔트가 아닌 오래된 콘크리트였다. 큰 교회가 보이는 지점부터는 왼쪽에 둔덕 오른쪽에 오래된 주택가였다. 그때부터는 적당히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도착하고 보니 예상보다 십분은 더 이른 시각이었다. 기억해 두기로 했다. 학교가 파하고 더듬거리며, 왔던 길을 떠올리며 걸었다. 다시 그 둔덕과 빌라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둔덕이 그저 평범하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다. 그건 내 지난 상념들이 뭉쳐진 것과도 같았다.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무덤들이었다. 무슨 공동묘지처럼 정갈하지도 않았고 문중의 묘처럼 단정한 석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에 무덤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어쩐지 더 쓸쓸했다. 언젠가 제주에서 보았던 이름 없는 무덤들은 죄다 홀로였다. 검은 돌로 무릎 높이의 담장을 세우고, 각자의 구역을 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무덤들은 최소한의 구획조차 없었다. 줄 맞추기나 기단석 따위도 없었다. 무덤이 있으면 그 옆에 무덤이 있었고, 그 위나 아래에 또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가 떠오르며 비춘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자그만 흙산들은 햇빛을 머금고 풀만 돋우었다. 무덤들은 어느 하나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비석 하나 세운 것이 있었다. 그나마도 없는 게 부지기수였다. 한자로 학생ㅇㅇㅇ신위라 쓰여 있는가 하면, 한글로 ㅇ씨ㅇㅇ지묘라 쓰인 비석도 있었다. 세월에 깎이고 이끼가 껴서 한때 글자가 쓰여 있었는지조차 모를 돌도 있었다. 몇몇 무덤은 땅이나 다름없게 완만했다.

처음 이곳이 만들어졌을 때를 생각해보았다. 적당히 양지바른 언덕에 누군가 가족을 묻고, 또 누군가가 밤새 몰래 무덤을 만들고. 그러기를 수십 년이 넘었을 터이다. 이제는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묻은 이는 분명 다른 무덤을 밟고, 다른 이의 흙을 좀 빌려야 했을 것이다. 주로 아래쪽 무덤이 허물어져 가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까. 아무렇게나 두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언덕 맨 왼쪽 꼭대기의, 그나마 비석이 단정한 곳엔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단지 그것 뿐은 아니었다. 무덤은 죽음에 가깝더라도, 그 가장자리에서 생은 버티고 있었다. 둔덕 왼쪽 구석에 푸른 그물을 친 곳이 있었다. 평평한 땅이었다. 다른 부분들과는 구분되었다. 그 땅에 놓인 것은 배추였다. 사람이 직접 울타리를 치고 심었다. 그곳뿐만 아니라 주변에 밭이 많았다. 나는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사람들은 살아내고 있다. 죽은 자의 육체는 흙에 스며들고, 그이를 머금은 땅은 작물을 길러내고 사람을 살게 한다. 죽음을 먹고 다시 삶이 자란다. 지독한 순환이다. 동시에 내 상념도 스치듯 해결되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을 누구도 확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본 대로만 생각해보자면, 죽음이 꼭 끝만은 아니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다고, 모두 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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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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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글을 거의 쓰지를 않은 것 같네요. 못 쓴걸까요, 안 쓴걸까요. 중학교때 안하던 공부를 이제 와서 열심히 하다 보니 시간이 안나서, 라고 변명하고 싶은데, 막상 보면 스마트폰 보는 시간이나 책읽는 시간  일기쓰는 시간은 비워두면서 글쓰는 시간은 없네요. 몇 번 소설을 쓰려 시도는 했죠. 그런데 쓰다가 팽개치고 쓰다가 팽개치고를 한 두어번을 했어요. 이제는 시도 조차도 안해요.  언제 또 시간을 내서 꾸준히 소설을 쓸지 확신이 들지를 않으니까. 고등학교는 시험 치고 걸러 또 시험이더라고요.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 인데,  역시 책에서 말하듯 한 장씩이라도 쓰는게 좋은거겠죠. 팽개치더도 써보는게 옳은 거겠죠. 알면서도 실천하는게 참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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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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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사지가 잘린지는 좀 되었다. 도시에는 보도블록 위로 창백한 가로수가 서있다. 크기나 종도 제각각이다. 그도 생물이어서, 죽지 않으면 자란다. 뿌리가 벽돌을 뚫고 조그만 오르막을 만들기가 예사다. 가지는 조금씩 자라 사람들 눈을 감춘다.

 

동네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사거리가 있다. 좌우로 나뉜 횡단보도를 기준으로 여기는 2단지, 저기는 3단지 식으로 구별한다. 곳곳에 가로수는 많이도 심겨있다. 2단지 쪽에 세워진 나무가 하나 있다. 잎이 둥근 종이라 겨울이면 삭막해진다. 겨우살이나 가끔 신세질 뿐, 앙상한 가지만 무성하다. 어느날 보니 그 나무에 사람이 올라갔다. 자세히 보니 사다리를 탄 것이다. 사람이 올라간 후 나무는 한풀 멋이 꺾였다. 그나마 빽빽하던 것이 잘렸다. 짧은 잔가지는 덜어냈다. 긴 가지는 뭉텅 잘리었다. 주위를 보니 다른 나무도 마찬가지다. 사철 푸르지도 못하고 사지를 잘리는 이 시지푸스들이 가련하다. 그러든 말든,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쳐간다. 기실 나무에 신경쓰기는 너무 바쁜 우리네다. 나만 해도 우연히 나무를 본 것이다. 그 전에는 저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나무가 어떤 기분인지 아무도 모른다. 나무는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썰린 나무를 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가던 길을 걸었다. 길섶 울타리를 보았다. 울타리는 풀이 덮었다. 그 중 풀 한 포기가 막대기처럼 솟았다. 서리도 없는 따뜻한 겨울에 그것은 홀로 길게 자랐다. 사람 키의 곱절은 되었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나는 자연의 신기함을 생각해보았다. 그것도 잠시 잘리워진 나무를 떠올렸다. 무리에서 특출난 것이 화를 당하는 일이 많지 않은가. 풀도 그 사례가 될 것만 같았다. 긴 풀은 사람들 시선에 빽빽한 나무 만큼이나 눈에 잘 띌 것이다. 곧 작업복에 야구모자 쓴 이가 큰 집게로 풀을 썩둑 자르겠거니 생각하였다.

 

그러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풀이 솟은 울타리는 항상 지나는 길이다. 어제 보아도 오늘 보아도 그대로, 자랑스러이, 인간을 내려보듯 서있다. 사람들은 나무에 비해 풀에 관대한 듯 하다.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나무가 자라면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 풀은 거들떠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실용을 좇고 귀찮은 일을 벌이기 싫어한다.

 

글을 쓰는 지금은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다. 해마다 봄이 지날 즈음이면 풀냄새가 진동한다. 여름을 대비해 풀을 깎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저 군계일학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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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남자와 달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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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 일과 중 제일 좋아하는 일을 꼽으라면 달리기와 글쓰기다. 둘은 꽤 상반되어 보이지만, 나에겐 비슷하다. 언제나 나에게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어김없이 달리기 위해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갈 무렵이었다.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잠그고 가로등은 빈자리만 비추었다. 이미 어둑해진 운동장 어귀로 들어서니 귀퉁이의 철봉 가까이에 남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얼마 전에도 운동장에서 운동하던 이들은 많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달랐다. 운동장에 들어섰던 이들은 대부분 뛰기는 싫고 운동은 해야 하기에 느릿느릿 걷는 중년들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철봉 근처에서 운동하고 있었다.

나는 밤공기를 마시며 뛰었다. 고맙게도 운동장엔 원 모양으로 인조잔디가 심겨 있어 그 길로 곧장 달리면 한 바퀴다. 학교를 슬쩍 보면 조회대는 흰 조명이 비추었고 다른 쪽을 가스 가로등이 밝혔다. 내가 다시 남자를 바라본 것은 운동장을 다섯 바퀴 정도 돌았을 즈음이었다. 보통 운동장을 다섯 바퀴 정도 돌면 조금씩 숨이 가빠지고 처음의 긴장이 풀려 집중이 흐트러진다. 그런 가운데 남자가 보였다. 그는 분명 턱걸이를 하고 있었다. 철봉은 높이가 조금씩 높아지는 세 개가 솟아 있는데, 남자는 이 중 중간 높이 철봉에 매달렸다. 그 사람은 독특한 기구를 사용했다. 각각 목과 철봉에 연결하는 긴 고무 고리 같은 것이었다. 턱걸이하다 보면 목에 힘이 풀려 뻐근해진다. 그것을 막는 도구로 보였다. 그런데 기구를 착용한 모습은 마치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 같았다. 낮이었다면 기구와 옷과 몸이 제각기 색을 띄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은 그를 어스름한 그림자로만 보이게 했다. 어둠 속에서 목에 무언가를 건 이가 턱걸이를 하는 모습은 조금 우스웠고 기괴했다.

내가 운동장을 달리는 동안 그도 기구를 착용했다 벗었다 하며 턱걸이를 했다. 나는 쉼 없이 달렸지만 남자는 틈틈이 숨을 고르고 반복했다. 나와 그는 아무 말 없이 운동만 묵묵히 했다. 그때 학교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도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본 몸집은 작아 보였고 움직임은 재빨랐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학교 쪽을 계속 살폈다. 어둠이 일렁였다. 마침내 조회대 불빛 사이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였다. 도둑은커녕 개였다. 중간 크기의 개가 학교를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나는 다시 달렸지만, 개가 운동장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정작 개는 내려올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열 바퀴를 뛸 즈음까지는. 조회대 양옆에는 단이 높은 세 개짜리 계단이 차례로 있는데, 개는 조금씩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와서 달리는 나를 살피곤 했다. 문득 눈길이 신경 쓰여 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 개는 사라졌었다. 남자는 아직도 목을 맨 채였다.

처음에는 사십 바퀴를 뛰리라 마음먹었다. 평소대로면 오십 바퀴를 뛰어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쉬다 며칠 전 다시 시작한 운동이었기에 스무 바퀴부터 조금씩 횟수를 늘리는 중이었다. 분명 밥을 먹은 지 1시간이 넘었음에도 위가 저려왔다. 30바퀴를 돌면서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뒤에서 낮고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가 짖는 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개는 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뛰어오는 개를 끔찍이 무서워한다. 이미 호흡이 가팔라졌지만, 속도를 올렸다. 짖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진원지가 가까워졌다. 내가 속력을 올릴수록 개는 더 빠르게 나를 쫓아왔다. 이대로 간다면 개가 나를 따라잡을 것이 뻔했다. 너머에 턱걸이하는 남자가 보였다. 스치는 기억에, 조회대 불빛에 비친 개는 털이 정돈되어 있었다. 키우는 주인이 있는 개였다. 나는 턱걸이하는 남자가 개를 풀어놓고 운동을 하는 것이리라 추측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철봉으로 내달렸다. 철봉 바로 앞에 오기 직전까지. 머릿속은 개에게 엉덩이가 물리는 상상만 되새겼다. 남자는 멀리서부터 나를 지켜보았던 것 같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도 잊은 채 물었다. 저 개가 그쪽 개냐고. 남자는 아니라고 했다. 내 가정은 틀린 셈이었다. 마음이 다시 착잡해졌다. 내 표정을 본 남자가 덧붙였다. 자신도 개를 키운다며, 내가 달리지 않으면 개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나는 감사하다 말한 뒤 돌아섰다. 개는 멀찍이서 나를 노려보더니 등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개가 운동장을 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개가 학교를 나간 뒤에야 천천히 걸었다. 달리기하고픈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자도 가방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개는 학교 앞 떡 공장에서 키우는 듯했다. 공장에서 사람이 나오자마자 개가 반기는 것을 보았다. 학교 입구를 돌아 나오며 웃음 지었다. 개는 학교를 활보하고, 나는 달리고, 남자는 목매듯 턱걸이를 했다. 한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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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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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의 한 카페에서-이름도 생소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며-창밖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앉았던 자리는 단층의 긴 책상에 딸린 의자였다. 유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건물에 존재했다. 내 허리보다 높은 의자에 등정한 채 밖을 보았다. 한국인인지 중국인일지 모를 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때때로 그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오로지 자신만이 유리 뒤에 숨어 그들을 관찰한다고 착각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함으로써 그런 환상은 깨지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보며 그 자신만이 나를 몰래 훔쳐보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나와 그는 유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른바 〈상호관람〉을 했다. 어쨌든 공평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은 적어도 투명했으니까.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은닉했다고 착각하는 희극.
또 나는 승합차 한 대를 본 적이 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창문을 까맣게 덮은 차였다. 나는 그 차를 유심히 살폈지만,  어떤 인기척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 안의 이가 밖을 바라보았다면 그에게 나는 똑똑히 보였을 것이다. 이 경우는 비(非) 상호관람이다. 한쪽은 형상을 보려 기웃대지만, 한낱 보호필름 앞에 인간의 존재는 상실한다. 인간 사이에 색깔을 덧씌운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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