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todam
출두 [2]

상필은 메모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김 주임이었다. 한 손에 조끼를 벗어 들고 한쪽 팔엔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상필은 메모지만 들고 있는 게 민망해서 아무 펜이나 잡아들었다. 급하게 뭔가를 쓰는 척했지만 메모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빳빳한 질감에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야 상필은 조심스레 볼펜을 노크했다. 그사이 김 주임은 조끼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거울을 보았다. 상필에게 말했다. 박 간사님, 퇴근 안 하세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열쇠 놓고 가. 상필이 말했다. 김 주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에 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또 쿵 닫혔다. 상필이 펜을 집어 던졌다. 외투를 입었다.[…]

출두
/ 2019-12-31
distodam
파행 [2]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오른발을[…]

파행
/ 2019-10-31
14 월장원 작품에 관해 문의드립니다. [1] distodam 2019-09-29 Hit : 241 distodam 2019-09-29 241
distodam
파행 [1]

  정석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학보사가 있는 학생회관 3층이 캠퍼스 동서 대척점에 있었다. 중간에 교수가 자기 자식이 유학 간 일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학보사 문을 열었다. 뻑-악 하고 둔탁한 느낌과 소리가 문을 타고 손과 귀로 들어왔다. 편집장이었다. 형, 미안해요, 수업이 늦어져서, 편집장은 미소를 지었다. 정석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 안 그래도 돼. 정석아, 그동안 수고했다. 정석이 뒤돌았지만 편집장은 이미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던 사람들도 눈인사만 건넨 채 빠르게 스쳐 갔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빠진 방에는 복사된 종이만 몇 개 널려있었다. 정석이[…]

파행
/ 2019-08-29
distodam
운전의 기술(퇴고본) [2]

민식은 12시간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 12시간 자는 것에 익숙해져갔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난 날부터였다. 민식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맨발이라 신발에 뒤꿈치가 쓸리는 것도 모른 채 뛰었다. 쇠 냄새와 녹 슬은 간판들이 가까워졌다. 회사 앞에 도착한 민식의 눈에는 주차장이 보였다. 트럭들이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식은 속도를 줄이고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갔다. 3층에는 사무실이라는 글자가 박힌 유리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칸막이 너머로 사람들이 민식을 흘낏거렸다. 면식이 있는 대리가 민식에게 웃어 보였다. 연락 못 받으셨나 봐요. 민식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오늘인가요? 대리가 웃음을 잃지[…]

운전의 기술(퇴고본)
/ 2019-01-31
distodam
더는 볼 일 없지만 [1]

싫어서 발버둥 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있을까. 태어나면서 들고 왔던 이를 죽을 때까지 쓰는 이로 바꾸는 과정만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싫어했던 일들이 대개 그러했듯 언제나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구강 검진만 하러 가지만 어렸을 때는 이를 뽑으러 두세 달에 한 번은 치과에 가야 했다. 혼자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형과 함께였다. 나와 달리 형은 충치가 잘 생기는 편이었다. 내 이가 흔들리면 형 이도 까맣게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이를 뽑는 겸 형의 충치 치료도 했다. 이를 뽑으러 가는 치과는 걸어서 5분이면 가는 상가에[…]

더는 볼 일 없지만
/ 2018-12-31
distodam
회귀 [2]

부산으로 갔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적어도 사흘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어쩌면 오래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무언가 빼먹은 물건이 있는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면도기가 생각났다. 방이 엉망이라 무너진 서류 더미를 들어내고 틈새를 뒤져서 겨우 찾았다. 이리저리 흩어진 종이 뭉치들을 대충 갈무리했다. 이미 물결 모양으로 퍼진 잔해들은 그대로 두었다. 면도날을 뺐다. 화장실 찬장에서 새 날을 꺼내 갈아 끼웠다. 이틀 전이 기억났다. 가장 최근에 면도기를 쓴 게 그 날이었다. 모임을 앞두고 길렀던 콧수염을 밀어버린 오후였다. 날을 바꿀까 생각했지만 한 번 정도는 더 써도 괜찮겠다 싶었다. 면도기가 움직일 때마다 살에서[…]

회귀
/ 2018-09-01
distodam
죽음과 한 뼘 가까이 [퇴고작]

죽음과 한 뼘 가까이 고치기 이전 글입니다.   눈을 감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티끌들을 볼 수 있다. 그날 하루의 흔적들이다. 애써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지만, 형체는 핍진하다. 가끔은 가만히 눈감은 이 상황이 죽음이라 가정하곤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면 잠자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가슴 한쪽이 아리며 숨이 막혀왔다. 그러면 무서운 공상을 멈추기로 했다. 대신 생이 끝난 뒤에도 내 존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안도는 잠깐이었다. 죽을 수 없다면 그것대로 끔찍하겠지, 그 수많은 사람이 부대낄 자리나 있을까. 결국, 사람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 몰려왔다. 또 숨이[…]

죽음과 한 뼘 가까이 [퇴고작]
/ 2018-01-31
distodam
죽음과 한 뼘 가까이 [2]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날들이 많았다. 주로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신도 내세도 믿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면 잠자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눈감은 이 상황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숨이 일순간 막히곤 했다. 그러면 무서운 공상을 멈추었다. 암울한 생각 대신 생이 끝난 뒤에도 내 존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영원히 살면 그것대로 끔찍할 거란 기분이 들었다. 그 수많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체념이 몰려왔다. 또 숨이 막혀와서 이제는 눈을 떴다. 며칠을 내내 이런 상태였다. 학교에서 엎드려 잘 때도 생각했고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죽음과 한 뼘 가까이
/ 2017-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