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
앞으로 가는 사람 [1]

앞으로 가는 사람 '오스텅스 블루 – 사막' 이라는 시를 읽고 재구성해 써본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빛이 전부인 모래사막 속.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린다. 조난자 블루,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이 노인은 며칠 간 이 사막을 홀로 배회해 왔다. 정신은 자꾸만 흐려졌고, 피부는 갈라져만 갔다. 추운 밤이면 이따금씩 야생 들개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다 죽어가는 청력이 감지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이제 그 앞에 놓인 죽음에 어렴풋이 순응하고 있었다. 몇 시간 째 뜨거운 모래 바닥에 잠자코 누워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음이 들리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끌리듯[…]

앞으로 가는 사람
/ 2020-12-29
녹두
이별한 L1과 B1이 보낸 러브레터 [1]

다미가 배신을 때릴 줄은 몰랐거든. 졸지에 길거리에 버려진 두 인형, 다미의 사자 인형과 곰 인형은 어안이 벙벙했다. 영원을 약속하며 제 갈기를 빗어줄 때는 언제고. 학교에 데려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곰이라며 통통한 제 뱃살을 꾹 눌러 자랑할 때는 언제고. 올해로 중학생이 된 다미는 얼마 전 새로 산 교복을 입고, 전신거울 앞을 기웃대며 제 모습을 요리조리 뜯어보고는 했다. 사자와 곰은 그런 다미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며 꼭 제 누나가 입학이라도 한 듯, 마음 깊이 흐뭇해했다. 다미와 어울려 놀지 못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 둘은 다미가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리라 믿었으며, 그래서 오랜 공백기를[…]

이별한 L1과 B1이 보낸 러브레터
/ 2020-12-29
녹두
[1]

막내야, 여섯째가 신음하며 제 동생의 이름을 부른다. 막내는 들은 척 만척 선반 위의 약통을 열어, 손바닥에 몇 알을 꺼낸 뒤에 저를 부른 제 형- 여섯째의 입 속에 들이밀었다. 여섯째는 켁켁 대며 혓바닥을 꿈틀꿈틀, 거부하지만 결국 동생 아귀 힘에 굴복하고 만다. 여섯째는 온 신경이 마비되는 질환을 앓고 있다. 병세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기에, 어서 죽어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 하지만 막내는 어디에선가 싸구려 약을 구해 그의 명을 억지로 연장 시킨다. 약을 먹으면 고통은 배가 되고, 시뻘건 두드러기가 올라와 긁지도 못하는 온 몸을 가렵게 만든다. 이는 그들 형제를[…]

/ 2020-12-26
녹두
연말 보고서 [1]

함께 들었으면 하는 곡 – 조성모 가시나무   나사는 마침내 승옥의 눈에 마지막 총기마저 사그러들었음을 느꼈다. 제 안에 있는 신경과 욕구를 하나 하나 죽여 눈을 떠도 보려 하지 않고, 귀가 열려도 막힌 척을 하는, 결국 무엇도 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느꼈다. 말로 어르고 달래도, 화를 내며 등을 떠밀어도 승옥은 꿈쩍하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시늉을 할 때도 있었지만 중력이 이끌듯 그녀는 금세 원 상태로 되돌아왔다. 나사는 결국 승옥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승옥, 이제 그만 정신 차려도 되지 않겠어? 상처가 있다면 채우면 되고, 결핍이 있다면 메우면 되어. 이루지 못한[…]

연말 보고서
/ 2020-12-25
녹두
파도의 손길 [1]

  "나를 사랑하세요?" 매일 아침이 밝으면 스텔라는 장의 옆에 우뚝 멈춰 서곤, 그리 질문하곤 했다. 그러면 장은, 길게 하품을 하면서, 혹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닦으면서, 혹은 눈을 부빗거리면서 "그럼, 우리가 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겠어, 이 여편네야." 하고 되려 훈수하곤 했는데, 그럼 스텔라는 군말 않고 움직여 부산스레 아침 준비를 했다. 아침마다 그런 궁금증에 답해줘야 하는 이유는 뻔했다. 오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둘은 혼인 신고 한 번 제대로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을 때야 부모님의 반대나 재정 상황등의 이런저런 것들로 미뤄 왔다지만, 장의 검은 피부 위에 덮여 있는 머리칼들이 하얗게 샌 지금까지도[…]

파도의 손길
/ 2020-10-29
녹두
추억하기 요령 2 – 그러니 무엇이든 예술로 쓰려고 하는 나는 쓰임새가 없겠지? [1]

  그맘때쯤 나는 처음으로 소라껍질을 통해 바다 소리 듣는 걸 해 봤다. 한 달 전쯤 휴양지에서 주워 온 소라껍질이었다. 장소는 다른 소음이 없는 잔잔한 기류가 흐르는 곳. 껍질 귀퉁이를 귓구멍에 힘껏 욱여넣고, 눈을 감으면 마침내 싸아아 싸아아 작은 파도소리가 울린다. , 많은 시인들은 소라껍질을 작은 바다에 빗대 노래해 왔으나, 그 새벽, 홀로 난 그런 시들을 반대했다. 꼭 죽은 바다를 화장하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담아둔 것 같아서.   낭만의 유효성이란. 생명이 다 한 추억ㅡ 그러나 나는 제법 많은 소라껍질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더는 안부조차 묻지 않게 된 스승으로 칭할 수[…]

추억하기 요령 2 - 그러니 무엇이든 예술로 쓰려고 하는 나는 쓰임새가 없겠지?
김용규 / 2020-07-05
녹두
별난 꿈 [3]

글에 앞서…!   이 글은 제가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 번쯤 직•간접적으로 겪어봤을 정도의 깊이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성폭력•가스라이팅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혹시 관련 주제가 읽기 불편한 글틴 친구들이 있다면 피해주세요. 그리고 묘사가 조금 노골적인 부분이 있는데 게시판 수위에 걸맞지 않다면 삭제조치 해주셔도 좋습니다…   함께 들으면 좋은 곡 https://youtu.be/mzgHlarYr-0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꿈을 꿨다. 네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중인격자인 꿈이었다. ​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 호쾌하고, 다정하고, 유머러스하며, ​ 분위기 띄우는 것을 잘 했고, 쉽게 욱했지만 그만큼 뒤끝도 없었다. ​ 누군가를 쉽게 미워했지만 쉽게 좋아할 줄도[…]

별난 꿈
/ 2020-06-26
녹두
추억하기 요령 [3]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의 논지를 입증하듯, 나는 자주 전의 사진이나 기록을 꺼내보며 회상하곤 한다. 그때 그 장면의 감정, 감동, 환경이 주는 아득함이며 함께 있던 인물들을 향한 그리움, 그런 류의 향수. 흔히 “추억팔이”라 불리는 이 행위를 반복하며 나는 “아, 나는 과거에 잘 머무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았다. ​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 현실에 사는 것보다 즐겁고 기꺼운 이유는, 과거의 기억은 꼭 초콜렛 상자 같기 때문이다. 상자 속에 있는 초콜렛들은 언뜻 보면 다양하고 폭 넓은 종류라서, 복합적이란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초콜렛”이라는 대분류 하에 같아서, 달큰하고, 단단하고,[…]

추억하기 요령
/ 2020-06-25
녹두
승화 [1]

비닐하우스는 온화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그 장벽에 구멍이 나고, 찬 바람이 새어들어오기 전까지 한 포기 풀에 불과하였던 나는 밖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비닐은 서서히 찢겨나갔다. 사랑으로 착각했던 어리광들은 녹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의 성장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주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뿌리는 얼마나 깊어졌는지, 야생 바람에 어떻게 해야 버텨낼 수 있게 될 것인지, 의식할 필요도 없었던 것들이 필수적이게 되었다. ​ 이것은 죽음인가? 혈관 속을 타고 들어온 본질적인 공포는 살을 뜯어냈다. 구멍 난 가슴과 몸에는 온 기운이 줄줄 새는 것처럼 전신에 힘아리가 들지 않았다. 형태를 앗아가는 신체의 변화, 마비와 분리. 그러나 기이하게도 해방감이[…]

승화
/ 2019-12-21
번호 컨텐츠
10 블로그 하시는 분! [3] 녹두 2020-12-30 Hit :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