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디
넌 내게 한 시진을 더 준다 [1]

밤은 상처받은 존재를 품어줘서 좋다. 내리고 있는 적막을 눈 아프지 않게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달은 우뚝 서서 세상을 비추고 있다. 어둠 속에 가장 빛나는 건 하나, 모든 시선이 달에게 갈 때. 나는 내려놓고 쉴 수 있다. 가끔 창문을 열고 시린 겨울 향기를 맡을 때면, 그게 꼭 달님의 향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야, 좋은 계절이다. 차가운 겨울은 달의 향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좋은 계절이다! ​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라서 좋다. 내게 남은 익숙함을 통해, 새로운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나는 나이 듦이 예쁘다. 좋다, 좋다. 밤새워 나를 품어줬던[…]

넌 내게 한 시진을 더 준다
/ 2020-11-24
우주디
이구아나 오빠 [4]

고장 난 가로등이 깜빡였다. 날벌레는 꼬리잡기를 하던 유년의 모습을 상징하듯, 뱅글 뱅글 돌았다. 파리는 날파리를 쫓았다. 먹지는 않았다. 문득 파리가 날파리를 아득 아득 씹어 먹는 상상을 했다. 얇은 날개는 금방 바스러졌다. 키우던 이구아나 오빠는 파리를 잘 먹었다. 우리 집은 파리가 많았다. 반쯤 열린 파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는 악취가 났고, 설 거지 감이 가득 쌓인 싱크대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다. 파리들은 악취를 사랑했다. 태생이 더러운 걸 좋아하는, 그런 본성을 가졌나,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에게는 상쾌하고 포근한 코튼향, 또는 깨끗한 주방 세제 향 따위가 더럽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이구아나는 아빠의[…]

이구아나 오빠
/ 2020-11-24
우주디
오래도록 낙서하기 위해 [1]

역사서를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탁월한 기록쟁이는 될 수 없었을 거다. 난, 지나치게 감정적이니까. * 날이 추워지면 좋은 점이 많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솜사탕 녹는 달달한 겨울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어쩐지 시린 바람은 한 해를 무사히 버텼다는 상장이 되어 불어오는 듯싶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날이 추워져서인지 내 잠자리 습관은 상당히 방해받고 있다. 평소 난 가볍게 자는 걸 선호한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올해 들어 무언가 탈피하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 원초적인 것에 가까워지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졌을 때, 가벼운 차림으로 자는 걸 선호하게[…]

오래도록 낙서하기 위해
/ 2020-11-18
우주디
우리는 자살 비슷한 행위를 하는 날치들에게 농구공을 던져보자 [1]

자살 비슷한 것을 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라는 네 물음에 나는 느슨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네 시선은 어느덧 농구 골대를 향해 그래프를 그리네. 축과 축이 만난 교점은 내적 의미가 되는 걸까, 아니면 뜻, 아니면 관점? 네 시선이 맞닿은 농구 골대는 나에게 주관적 관점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문득 생각을 하다 ‘골대’라는 것 자체에 뜻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네 생각과 내 생각은 분명 미세한 차이가 있을 거라 믿었어. 그러니까, 내가 골대를 보고 떠올리는 건 고작해야 농구 클럽 대항전 따위지만 넌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거야. 넌 아마도 자살 비슷한 행위를 떠올렸을 거야. 그러나 나는[…]

우리는 자살 비슷한 행위를 하는 날치들에게 농구공을 던져보자
/ 2020-11-18
우주디
불완전 문장의 주격관계대명사는 사랑이므로, [4]

라면이 가장 맛있게 끓는 지점 ​ 바디워시의 거품에 웃는 어린아이 ​ 엄마의 젖은 머리에서 나던 린스의 잔향 ​ 내가 소모했던 모든 감정들 ​ 꿈에 한 발짝 다다랐을 때 흘린 눈물 ​ 인어공주의 분홍색 물거품 ​ 기니피그가 되고 싶었던 햄스터 ​ 모래성이 무너지자 울었던 아이 ​ 눈사람은 녹는다는 걸 처음 깨달았을 때 ​ P를 발견한 천문학자가 터뜨린 기쁨의 신음 ​ 중학교 때 좋아했던 남자애의 까치집 ​ 내 한쪽 어깨를 젖게 한, 같이 쓰던 우산 ​ 꺾여버린 들꽃에 물을 주는 양아치 ​ 뒤도는 방법을 까먹어 다시 볼 수 없는 햄스터 ​ 가시[…]

불완전 문장의 주격관계대명사는 사랑이므로,
/ 2020-11-18
우주디
꼬마가 울었다 [1]

죽고 없는 자리에 굴을 팠다 귓속에서는 돌이 굴렀다 해변의 자갈처럼 작은 돌 ​ 죽고 없는 자리에 굴을 팠고, 굴을 판 자리에 ​ 돌을 던졌다 ​ 비가 내리면 웅덩이가 생기겠지, 꼬마가 말했다 해변의 하얀 거품이 달려와 비를 가져가지만 않으면 될 거예요, ​ 해변은 그러나 욕심쟁이 그래서 수없이 많은 물을 모았다 ​ 해변은 그러나, ​ 죽어버린 사람이 흘린 눈물, 내가 쏟은 비 ​ 전부 숨겨줬으므로 ​ 죽고 없는 자리에 판 무덤 위로 하얀 거품이 지나면, ​ 꼬마가 울었다

꼬마가 울었다
/ 2020-11-18
우주디
내 죗값을 그 자리에서 치르게 하소서 [3]

나는 나를 단죄한다. 나의 죄목을 조목 조목 읊는 꿈을 꾼다. 그리운 사람이 내게 준 선물을 잃어버린 죗값이 클까. 나는 오독오독 손톱을 씹는다. 잘게 뿌셔지는 손톱은 어딘가에서부터 휩쓸려 온 조개의 껍질만큼이나 의미 없이 고양된 것이다. 어린아이한테나 높은 의미로 숭고히 새겨지는 조개껍질처럼, 찝찔한 맛과 함께 혀를 벤다. 혀가 얼얼하다. 팔딱이는 혓바늘 위로 몇 번의 칼날이 서늘하게 내리 꽂히고, 이제 죄인은 더 이상 거짓을 고하지 않을 것이므로. 눈물과 함께 참회를 한다. 지옥에 가면 나태의 죗값을, 그리고 혓바닥을 단두대에 올린 채 서걱 서걱 잘릴 것인가에 대해, 묻는 문의 전화를 건다. 콜센터 상담원은 어이가 없어[…]

내 죗값을 그 자리에서 치르게 하소서
/ 2020-11-05
우주디
빨래를 도둑 맞은 세탁소 [4]

 나는 P에게 고했다. 나를 잃어버리지 마. 갈라진 음성으로 되풀이했다. 잃어버리지 마. P는 안 그럴 거라고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P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때아닌 장마를 만난, 버려진 옷가지처럼 그렇게 무너져 버린다. 옥탑방 옥상에 널린 옷가지는 누가 가져갔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마 '비' 가 가져간 거라고, 그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는 깊은 잠에 빠졌고,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고. 눈을 떴지만 감으려 애썼고, 라디오 주파수는 이름 없는 행성에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으므로. 때아닌 장마가 옥탑의 옥상으로 침전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잔가지에 쌓인 소낙눈만큼이나 얇은 빨래는 물에 흠뻑 젖어 어딘가로 사라진 후다.[…]

빨래를 도둑 맞은 세탁소
/ 2020-10-26
우주디
Planet P’s Adventure [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인 ‘생명의 이름’을 배경 음으로 들으시면 더욱더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답니다!-!) 아주아주 먼 옛날, 세상은 온통 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해님도, 달님도 없는 어둠뿐이었지요. 어둠 조각들은 뭉치는 일이 없어, 늘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둠 조각 하나가 물었어요. "우리는 왜 늘 똑같은 색일까?" " …." 나머지 어둠 조각들은 말이 없었어요. 그러다 제일 커다란 조각 하나가 입을 열었어요. "그건.. 그건 말이지 .." ​ "그건 아무도 몰라. 꼬마야, 우리는 원래부터 새까만 존재란다. 그저 조용히 세상을 떠도는 어둠 조각이란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마렴." 제일 커다란[…]

Planet P’s Adventure
/ 2020-10-25
우주디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4]

달그락, 소리와 함께 사물함이 열렸다. 350번은 맨 마지막 줄 하단에 있는 낡은 사물함이었다. 코팅이 벗겨진지 오래라 나무 합판은 곪을 대로 곪아 썩어 있었고, 받침쇠는 까맣게 녹슨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낙후된 사물함을 고집했다. 그는 데스크에서 받아 온 수건을 잠시 내려놓고, 훌러덩 옷을 벗었다. 벌레가 허물을 탈피하듯, 겹겹이 껴입은 겨울옷이 한 오라기 씩 흘러내렸다. 이윽고 나신이 된 그의 몸뚱어리는 상흔 투성이었다. 뱃가죽이 등딱지에 들러붙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빼빼 마른 체형, 양대 산맥처럼 솟은 갈비뼈는 그의 빈약한 몸을 부각시켰다. 살가죽은 제법 허연 편이었는데, 그의 팔과 허벅지 부근에는 낙서 같은 상흔이 빼곡히[…]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 2020-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