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디
사랑해도 될 거야 [5]

사람을 사랑해도 될 만큼 행복한 날이 오면 좋겠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좋겠고, 그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장을 보고, 같은 차를 타고, 모든 걸 함께하는 거야. 그러면 나는 정말 행복할 텐데.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모로 누웠지. 아픔밖에 남지 않은 밤을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먹었어. 달은 무슨 맛일까, 어릴 적 입맛을 다시며 궁금해했는데. 아, 달은 황홀한 맛이었구나. 비로소 깨달았어. 너는 끔뻑이는 두 눈으로 나를 담았지. 네 눈 속에 나는 볼록한 카메라 렌즈처럼 우스꽝스럽게 빛났지만, 너는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했어. 나는 네 목에 비단뱀처럼 팔을 두르고, 너는 가냘픈 고라니처럼 애처롭게[…]

사랑해도 될 거야
/ 2020-09-10
우주디
저녁 식사 [3]

  컷!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촬영을 마침과 동시에 긴장이 풀린다. 활짝 웃고 있던 출연진들은 하나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입김은 곧 뿌연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나는 말없이 모직 외투를 꽉 조이며 추위를 달랬다. 담당 피디가 세트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게스트로 출연한 신인 아이돌 A는 감독을 보자마자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그 모습이 퍽 웃기기도 하고, 한 편으로 안쓰러워 고개를 돌렸다. 담당 피디는 상당수의 예능을 부흥시켜, 대세 메이커라 불리며 방송 업계에서 제법 높은 개런티를 받는 모양이었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공공연한 소문에 의하면 그가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지문 인식이 되는 집에 산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저녁 식사
/ 2020-08-30
우주디
붉은 실 [1]

  붉은 실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는가? 붉은 실은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탄생과 동시에 주어진 운명에 예속돼 이어져 있다.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인간이 존재하는데, 그에 비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인간의 수는 극소수이며 한정적이다. 인간관계는 일종의 네트워크이다. 인터넷 매체에서의 네트워크와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인간이 관계 짓기에 소모하는 시간은 통신 매체끼리의 연결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연결고리 역시 빈약하다.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전혀 평등치 않은 조건을 달고 태어난다. 그 예를 역사서에서 찾아보자. 역사서에 기록된 핵심 과거 인류 문명의 발달과 출현에서는, 최초 도시 문명의 발달로 메소포타미아를 논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을[…]

붉은 실
/ 2020-08-02
우주디
당신의 계절이 궁금합니다 _ 얼굴 없는 사람이 [1]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과, 가장 기다려지는 계절은 무엇인가요? ​ ​ 저는 겨울을 좋아해요. 한 밤중에 쌓인 눈을 보는 건 기다리던 택배를 뜯어보는 기분과도 같아요. 차려입지 않아도 돼서 좋고, 극명한 온도 차이에 안락함을 느끼기도 해요. 온종일 찬바람이 부는 바깥에서 잰걸음으로 떠돌다가, 따뜻한 히터가 가동되는 실내로 들어왔을 때. 안경에 뿌연 김이 서리는 것까지 모두 완벽한 삼 중주랍니다. 기다려지는 계절은 겨울이 아니에요. 좋아하는 것과, 기대되는 건 1cm 정도의 간격이 있어요. 닿을락 말락 하면서 평생 닿지 못하는 평행선 같은 정의죠. 저는 여름이 기다려져요. 모순적이게도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답니다. 여름은 되돌아오기 전까지 많은 걸[…]

당신의 계절이 궁금합니다 _ 얼굴 없는 사람이
/ 20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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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도 외상이 있는 거라면, 난 살아야 해! [5]

. 스산한 기운에 눈을 뜨니 새벽이다.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건 00 문학상 수상 후보 목록. 사실 거의 안 될 걸 알면서 넣은 거긴 하다만 급 울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328명의 응모작 중에 총 20편을 뽑았는데, 얼마나 잘 썼으면 예심에 통과한 건지 궁금했다. 내가 진짜 울적해지는 건, 00 문학상에 참가하지 못하게 돼서가 아니다. 대학교 실기는 백일장보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할 텐데, 청소년이 응모하는 대회조차 떨어지는 내가 과연 실기라고 붙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선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의구심이 든다. 이 정도 실력으로는 운이 좋아서 어떻게든 문예 창작과에 들어간다고 도태될 것만 같은 기분. 최근에는[…]

우울도 외상이 있는 거라면, 난 살아야 해!
/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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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나비가 보이는 여름 (수정1) [3]

    파란 나비가 보이는 여름 우리 엄마는 어릴 적 원예가를 꿈꿨다고 한다. 엄마는 무언가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화분이 적었고, 푸른 잎사귀를 드리우며 햇살을 받아 성장하는 꽃이 없었다. 엄마는 꽃 대신 나를 낳아 키웠다. 어린 나와 오빠가 혹시라도 화분 때문에 다치지 않게, 꽃을 거의 키우지 않았다. 엄마가 나만 했을 때, 부푼 기대감을 껴안고 원예부에 들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잡초를 뽑고 텃밭을 돌보는 잡일을 시켜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슬퍼 목구멍이 뜨거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진짜 내 외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파란 나비가 보이는 여름 (수정1)
/ 2020-07-27
우주디
단추 같은 사람 [2]

  단추 같은 사람     저는요 이듬에 크면 단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작아서 떨어져도 모르고 구석을 휘휘 뒹굴진 몰라도요 데굴데굴 이리저리 치이다가 하수구 속으로 휙 빠질지 몰라도요   단추 같은 사람이 돼서 단추 같은 글을 쓸 거예요 어디에도 꼭 들어맞아 빈 구멍을 채우고 구석을 뒹굴다가도 햇살에 반짝여서 어린아이의 작지만 소중한 보물이 될 테지요   내 글이 누군가의 결핍을 채운다면 저는 단추 같은 작가가 될 거예요 비록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아도 모두의 구멍을 잠가줄 수 있는 단추말이에요   저는 그런 글을 쓰는 단추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

단추 같은 사람
이기인 (시인) /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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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지 못한 사람 [2]

  만나보지 못한 사람 나는 오래 살지 못했다. 아직 살아가는 중이고, 흔히들 이제 성인이라고 말하는 나이인 스무 살도 안 된다. 만으로 치자면 아직 16년을 산 것인지라 나를 스친 사람이 적다면 참 적다. 어릴 적에는 이사를 꽤 많이 다녔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그 애들의 이름을 다 외우기도 전에 헤어졌다. 언덕을 힘 빠지게 올라야만 했던 집이 있었다. 기울어진 언덕길에 자리한 자그마한 토스트 집이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엄마가 종종 사주셨던 기억이 있다. 아주머니는 친절했었는데 다섯 살 때 일이라 얼굴은 흐릿하다. 그 시절 기억들은 전부 필름이 부분적으로 날아간 사진 같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
이기인 / 2020-07-24
우주디
사랑이란 감정을 그려보자 [1]

  ​통상적으로 사랑은 붉다고들 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대다수 사람들이 말하는 붉은 마음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드라마 속 연인들은 흔히 이별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사랑이 차게 식었다고 말한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게 따뜻하기만 한 걸까? 요새는 사랑의 전도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사유한다. 교회에서 전도를 나오는 이들은 수많은 인류에게 사랑을 전하는 걸까. 조물주가 우리를 창조할 때 쏟아부은 마음의 농도에 대해선 그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문장으로 모든 이에게 당신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생명 연장의 명분을 심어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줄곧 신의 존재에 대해. 공평한 배분에 대해 생각하곤[…]

사랑이란 감정을 그려보자
글틴 /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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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 내일에게 보내는 편지 _ 여름호 [5]

  to_ 미래의 나에게. 오늘 하루는 조금 아팠나 봐. 하루 종일 세상이 광광 울어댔어. 집으로 오는 길에는 머리카락이고 교복이고 다 젖었어. 오늘은 여름이 많이 아픈 건가 싶어. 온종일 시끄럽게 울었으니까. 온 세상이 슬퍼했어.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나 혼자 울고 있다는 고독감은 들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공동 현관문에서 발라당 자빠진 것 빼고는 그래도 괜찮았던 여름의 한 조각으로 기록할래. 요즘 들어 부쩍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이건 그 누구보다 살고 싶다는 증거 같기도 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내 잘못인 것만 같아 숨이 가빠 오고, 입안이 바싹 타 들어가는데. 난 왜[…]

불특정 내일에게 보내는 편지 _ 여름호
/ 2020-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