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낙
프레이 [1]

우리가 살던 숲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하늘을 가렸던 잎사귀들이 단단히 부풀어오르며 설익는다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는데 바람이 불어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에메랄드가 쏟아지며 시야를 온통 녹색으로 물들인다   공기가 숲의 깊숙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중이다 내가 너에게 선물한 향수 냄새가 바람에 실려온다 소금기 어린 새하얀 향기가 충혈된 셔터로 포착한 반딧불이의 비행흔처럼 식인 거미의 거미줄처럼 나무들 사이에 얼기설기 걸쳐져 있다 나는 심장에 화살이 꽂힌 채로 너를 추적한다 너의 자취를 쫓아 뜀박질하면 발 밑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쪼개진 보석의 속살은 과육처럼 번들거린다 깨진 여름에서는 방사성 연기가 피어오른다   숲은 점점 더 무너져내린다 나는[…]

프레이
/ 2021-08-19
소낙
리턴 [1]

다언이 오 년 동안 기른 머리카락은 내가 잘라줬다. 머리에 껌이 붙어서 다른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애지중지 기른 머리를 한순간에 잘라버리는 것의 이유치고는 허탈했으나, 이미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엉겨붙은 껌을 이제 와서 탓해 봐야 소용없었다. 내가 다언을 앉히고 필통에서 가위를 꺼내는 동안 다언은 부주의하게 잘 때 머리를 두는 쪽 가판대 밑에 껌을 붙여둔 과거의 자신을 향해 투덜거렸다. 굵고 까슬까슬한 머리칼은 한 손에 쥐기 버거울 정도로 숱이 많았다. 가위질을 하자 서늘한 소리가 났다. 썩둑 썩둑. 뭉툭한 감촉이 손에 전해졌고 그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끊어지면 무언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

리턴
/ 2021-06-30
소낙
흙먼지 속에서 산란하는 빛: 파란노을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6]

화성의 노을은 푸르다. 대기가 흙먼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화성의 토양은 산화철을 잔뜩 머금고 있기에 붉고 황량하게 뻗어 있다. 마찬가지로 산화철 성분이 떠다니는 공기는 붉은빛에게만 우호적이어서 나머지 색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대낮의 하늘은 녹슨 철 빛깔로 물든다. 그러나 해가 질 때면 빛이 투과해야 하는 대기가 늘어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파장이 짧은 파란 빛만이 간신히 먼지를 뚫고 화성의 지표까지 도달할 수 있다. 붉은 낮과 푸른 노을. 지구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파란노을은 솔로 뮤지션으로, 서울에 사는 학생이라는 것 외엔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정규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흙먼지 속에서 산란하는 빛: 파란노을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2021-05-23
소낙
어느 겨울 아침의 기록 [1]

아침 여섯 시 이십 분의 엘리베이터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도 조용하다. 이따금 한두 사람이 입을 열어도 갈라진 목소리는 짧게 적막을 깼다가 금세 잦아들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이 잠이 덜 깬 귀들 사이에서 사각거렸다. 기숙사 1층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안개에 푹 잠겨 있었다. 누군가가 무뎌진 손길로 주머니 속을 더듬어 학생증을 꺼냈다. 삑. 학생증이 찍히고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로 밀려들었다. 알싸한 겨울 냄새가 숨통을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기분에 잠이 깰 법도 했지만, 몽롱한 정신은 좀처럼 또렷해지지 않았다. 애들은 외투 모자를 뒤집어쓴 채로 삼삼오오 체육관을 향해 걸어갔다. 짙은 안개가 바람을 따라 흐르며[…]

어느 겨울 아침의 기록
/ 2020-12-31
소낙
저물어가는 겨울밤이자 안녕이었다¹ [2]

말간 하늘에는 선명한 테두리의 초승달만이 잘못 튄 손톱 조각처럼 단단히 박혀 있었고 새하얀 불안에 입안을 온통 베일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걸 입에 넣고 오래 굴리고 싶었다   최백규의 시 한 구절이 숨과 함께 피어올라 보는 곳마다 소용돌이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름밤은 아니었다 뜨거운 계절은 행성의 저편으로 피난을 간 지 오래 작별인사가 필요한 저녁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안녕이었다 흘려보낸 값진 시간들에게 손에 쥘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더 나은 미래들에게   해가 지는데 달도 같이 저물어 갔다 울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은 나지 않았다.       ¹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저물어가는 겨울밤이자 안녕이었다¹
/ 2020-12-27
소낙
카니발 러브 [1]

심장에 종양이 자라난 것 같아 아니 지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아 아니면 사실 난 육식동물에게 뜯어먹히는 중이고 이 모든 감정은 단말마의 환각인 걸까   혈관을 세차게 흐르는 니트로글리세린 터지기 직전의 풍선이 이런 기분이겠지 선인장을 끌어안을래 피부를 찢어 속에 가득한 새빨간 감정이 왈칵 쏟아지게 해줘   기억을 담아 빗장뼈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작은 유리병들은 한순간의 작은 덜컹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뱃속에서 들끓는 파열음 위장 사이로 유리조각이 굴러다니고, 뒤틀리는, 숨통, 네가 웃을 때마다 나는 죽어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박제가 되고 싶어 속에 든 모든 걸 긁어내고 깔끔하게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어  […]

카니발 러브
/ 2020-12-27
소낙
입안에서 달콤하게 부서지는 '악마의 시나몬 쿠키':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고 [1]

흔해빠진 서술로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이야기 속에 파묻히는 것 자체를 사랑하기도 했으나, 조금 더 부끄러운 속마음을 들춰보자면, 나는 내 또래가 그림 동화책을 더듬더듬 읽을 때 혼자서 두껍고 글자가 가득한 책을 읽는 내 모습에 도취되었던 것도 같다.『위저드 베이커리』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던 시절의 내가 그런 허영심에 집어 들었던 책 중 하나였다. 페이지는 휙휙 넘어가고 글자를 훑는 눈길에는 막힘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잘 읽히는 소설이었음에도 당시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우울하고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책의[…]

입안에서 달콤하게 부서지는 '악마의 시나몬 쿠키':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고
/ 2020-12-27
소낙
뻗어나가는 초록: 호프 자런, 『랩걸』을 읽고 [2]

나는 책 취향이 까다로운 편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책이라도 꼭 그 책을 완벽하게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어떤 것은 문체가 너무 딱딱해서, 어떤 것은 한자어를 너무 많이 쓰고 문장을 꼬아서, 어떤 것은 지나치게 번역체를 써서, 하며 문체를 트집잡는가 하면 스토리 진행 방식이나 시점, 클리셰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지고도 별점 하나를 깎는다. 심지어는 책의 물성도 따진다. 손에 쥐었을 때의 감촉이나 내지는 어떤 종이를 썼는지도 내게 있어서는 독서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이런 기준들을 모두 만족하는 책을 찾는 것은 정말 드물면서도 아주 기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랩걸』을 읽은 것은 올해 가장 잘한 일 중[…]

뻗어나가는 초록: 호프 자런, 『랩걸』을 읽고
/ 2020-12-27
소낙
밤의 열차 [1]

삼호선, 옥수역에서 압구정으로 가는 길 자정에 가까운 시간 사람들은 각자 손 안에 든 작고 환한 창 너머를 응시하거나 가슴팍에 턱을 묻고 졸고 있었고 그들의 귀에서는 이어폰 줄이 지친 영혼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 듯한 모습으로 늘어져 있었다 열차 안을 둔탁하게 배회하는 금속성의 발자국 소리와 새근거림과 두툼한 겨울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리는 그곳에서 책을 읽던 나는   불현듯 다른 세계로 온 기분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히 뒤집힌 분위기 형광등 불빛을 쐬며 피곤을 가다듬던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은 가로등 불빛에 휩싸여 따스하게 빛났고 화장과 졸음이 뒤섞여 번진 눈가를 한 앞자리 언니는 어느새[…]

밤의 열차
/ 2020-12-19
소낙
( ) [1]

얼굴의 반쪽이 다른 반쪽 얼굴을 바라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는다   시선은 빛을 품었다 얼굴이 반으로 조각나기 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빛이다 머나먼 행성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아래로   네 얼굴의 나머지 반쪽에 (   )가 자리한다 네가 말하기 시작한다 얼그러진 (   )가 들썩인다 언어는 희멀건 공백을 희미하게 뚫고 나오려 하지만 안쪽에서만 맴돌다 이내 사그라든다 (   )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알아내야 한다 네 목소리를 귀로 쫒는다   타인을 마주하기 위해 (   )를 뒤집어쓰는 것이 일상이 된 오늘이다 우리는 눈빛을 읽고 뭉개진 목소리를 판독하는 법을 익혔다 관계는 어느새 해석학의 양상을 띠고   네가[…]

( )
/ 2020-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