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
도선 위의 참새들은 황혼이 저물어도 날개를 펴지 못한다 (퇴고) [1]

줄 위를 건너가던 자전거의 냄새를 아세요 옆에서 줄을 묶던 그가 날 노려보았다 자이트가이스트, 자이트가이스트*   너무 쉽게 놓여있는 전깃줄이 모두의 꿈을 비루하게 만든다 살갗이 간지러웠다   흔들리는 줄이 저마다 전봇대와 입을 맞출 때 둥글어지는 우리들 전봇대는 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둥글어진 우리들은 제 줄의 순번도 까먹은 채 남의 줄을 묶겠지 다시 줄을 묶었다 타들어가는 태양의 장례식, 황혼이 저물어도 아무도 떠나가지 않았다 더운 숨을 내쉬던 참새들이 모여든다 참새가 모여 손금의 모양을 만들었다 한동안 멍하니 놓여있던 손바닥에서 다시 꿈들이 흘러 넘친다   새들의 날갯짓이 숨쉬고있는 손바닥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손잡이를 잡아야 한다 손잡이를 잡아[…]

도선 위의 참새들은 황혼이 저물어도 날개를 펴지 못한다 (퇴고)
/ 2020-11-22
비산
므네모시네의 공중전화 [1]

다이얼을 굴리면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빛도 피부도 없이 소리에만 집중하게 되는 곳 문장이 문장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웃음과 울음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곳이야 여기는   네가 나를 들어올리기 전까지 세상의 반대편에 존재하던 것들 동전 몇 개와 너의 손길로 각자의 언어로 번역되고 비로소 읽을 수 있었던 감춰진 세계   전화 카드의 잔액이 0에 수렴하게 될 때 다시 나는 세상과 멀어지겠지만   구부러진 몸통에 느껴지는 가지런한 솜털,   누군가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는 날 떨리는 손길로 나를 내려놓을 준비를 하더라도 괜찮아 나는 이미 너의 목소리를 외운 뒤였을 거야 남은건 하혈하던 노을과[…]

므네모시네의 공중전화
/ 2020-11-14
비산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집에 있어요 (퇴고) [1]

프라이팬의 뒷면으로 달토끼들이 팔려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이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벗겨진 코팅 속에 기생하는 토끼들 때문이죠 오르골의 아래쪽으로 부서지는 노랫소리   하나 날카로운 식칼의 단면에 주름이 자글한 손이 빨갛게 물들어갈 때   둘 집안 가득 퍼지는 두꺼비의 술 냄새 단 한번의 뜀박질로 달나라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날아다니는 유리컵과 장식품들 쨍그랑   셋 눈물을 훔치면서 아침을 준비하던 프라이팬 밑바닥이 까질 때   매일 밤 같이 도망가자고 서로를 끌어안고 부서진 계이름과 조각난 파편들 주워 담을 때면 달도 우리들이 가여운지 제 무늬를 숨겼습니다   오르골이 하나 둘씩 갉아먹히기 시작할[…]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집에 있어요 (퇴고)
/ 2020-10-29
비산
도선 위의 참새들은 황혼이 저물어도 날개를 펴지 못한다 [1]

줄 위를 건너가던 자전거의 냄새를 아세요 옆에서 줄을 묶던 그가 날 노려보았다 자이트가이스트, 자이트가이스트*   너무 쉽게 놓여있는 전깃줄이 모두의 꿈을 비루하게 만든다 살갗이 간지러웠다   줄에 줄을 묶었다. 줄에 줄을 묶었다. 줄을 전봇대에 묶었다. 전봇대는 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느 것이 내 줄인지 알지 못한다. 다시 줄을 묶었다. 줄에 줄을 묶었다. 내가 묶는 이 줄이 내 줄인지 옆 사람의 줄인지 알지 못한다. 다시 줄을 묶었다. 참새들이 날아들었다. 참새가 모여 손금의 모양을 만들었다. 한동안 멍하니 놓여있던 손바닥에서 다시 꿈들이 흘러 넘친다   새들의 날갯짓이 숨쉬고 있는 손바닥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손잡이를 잡아야[…]

도선 위의 참새들은 황혼이 저물어도 날개를 펴지 못한다
/ 2020-10-18
비산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집에 있어요 [1]

프라이팬의 뒷면에는 엄마의 토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벗겨진 코팅 속에 기생하는 엄마의 토끼들 때문이죠   하나 날카로운 식칼의 단면에 주름이 자글한 손이 빨갛게 물들어갈 때 토끼 한마리   둘 집안 가득 퍼지는 아빠의 술 냄새 날아다니는 유리컵과 장식품들 쨍그랑 토끼 두마리   셋 눈물을 훔치면서 아침을 준비하던 엄마와 엄마의 프라이팬 밑바닥이 까질 때 토끼 세마리   매일 밤 같이 도망가자고 서로를 끌어안고 폭신한 솜사탕 풍부한 견과류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달달 볶을 때면 달도 우리들이 가여운지 제 무늬를 숨겼습니다   우리 집이 하나 둘씩 갉아먹히기[…]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집에 있어요
/ 2020-10-15
비산
구피가 죽었다 [1]

소년은 여섯 평 짜리 단칸방에서도 꿈을 꾸었다 갓 짜낸 올리브처럼 촉촉해서 젖어들기 좋았고 때로는 솜사탕처럼 달콤해서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화장실과 신발장 사이에 이불을 피고 잠을 청할 때면 한 뼘의 뒤척임에도 센서등의 반짝임에 잠을 설쳐야 했고 화장실 문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꾸던 꿈에 금이 가기도 했었다   그는 네모난 어항에 담긴 구피 몇마리와 같이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축축한 반지하의 물고기들은 차례차례 따뜻한 햇빛이 드는 저마다의 낙원으로 가라앉았다 투명한 몸뚱아리였다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새벽의 뒷모습 어항 바닥에 계속해서 쌓여가는 구피의 시체들   엄마는 둘만 남은 열대어를 일회용 컵으로 옮겨주었다[…]

구피가 죽었다
/ 2020-10-09
비산
항히스타민제는 기관지에 맞지 않습니다 [1]

입을 벌리고 항히스타민제를 우겨 넣었다 콧물이 흘러넘쳐 이 세계를 다 적실까봐   요란한 기관지를 알약으로 갈아 끼운다 이제 터져나오는 재채기와 간지러운 눈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알약은 독했고 불빛은 역했다 억눌러진 신경계가 졸음과 우울을 불러 모을 때 나는 세상의 불빛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거리를 걸어갔다   내가 삼킨 알약은 가루가 될 수 없었다 항히스타민제는 몸 속에 녹아들었지만 내 몸은 세상에 스며들지 못했다 사람들을 향한 재채기가 다시 한번 터져나왔다   이 알약은 바닷가에 흩뿌려질 뼛가루의 하위호한이다 조약돌이 뺨을 얻어맞고 내뱉은 얕은 신음소리 모르핀을 한 박스 들이킨듯 모래 위에 피어나는[…]

항히스타민제는 기관지에 맞지 않습니다
/ 2020-09-29
비산
화살표의 레퀴엠 (퇴고2) [1]

새벽의 손잡이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거나 초름한 꽃이 계절에 못이겨 제 고개를 떨굴 때 열차는 출발하곤 했습니다   우리 되돌아가요 되돌아가요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창 너머로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 몸뚱아리가 보였는데요 그 낮빛이 꼭 나를 닮아있다 생각이 들면 모포를 뒤집어쓴 인간이 내게 키스를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기차에는 수십명의 내가 타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죽음에 크게 놀라지 않았어요   차창에 머리를 박고 나가 떨어진 새의 죽음은 방향을 잃은 스칼라의 절규라 누가 그러던가요 그렇다면 새의 죽음은 곧 나의 삶이겠네요 시작점과 끝점 사이에 의존하던 나는 이제 핸들을 틀어 되돌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화살표의 레퀴엠 (퇴고2)
/ 2020-09-26
비산
환상통 (퇴고) [1]

나는 가끔 통증을 겪어요 분명히 도려냈던 부분인데 신경 말단 덩어리서부터 저릿해올 때가 있어요   나무 판자와 옷가지 속에 숨어 사는게 불편해서 몸뚱아리를 조각내 문 앞에 걸어놓았는데요 또 다시 누군가 옷장을 세차게 흔들어대는걸 보니 지나가던 실바람이 조각들도 훔쳐간 모양이에요   썩은 사과처럼 쪼개진 육체들은 문 밖의 이방인에게 웃으며 인사해요 나를 너무나도 닮아있는 그 목소리들은 흰 새처럼 날아 나의 살점을 파고들어요   사색에 잠겨도 가끔씩은 옷장 속의 나사를 조여줘야 해요 빠져버린 나사와 빈 구멍을 발견하면 뒤틀리듯 아파오는 통증이 더욱 또렷해지거든요   모델 없는 크로키, 속이 텅 빈 담배, 전구 없는 전등, 문고리[…]

환상통 (퇴고)
/ 2020-09-21
비산
몽중 진단서 [1]

잃어버린 계절이 목구멍에 쌓여갈 때면 몸에 힘을 빼고 스크린의 무성영화를 응시하세요 복통이 느껴져도 그건 당신의 감각, 통증에 몸을 맡기세요 구토가 치밀어올라 혀 끝에서 비린맛이 느껴질 때는 눈을 감고 혀는 기도로 말아 넣으세요   내딛는 왼발에서는 메스꺼움이 오른발에서는 어지러움이 느껴지나요 식도에 손을 집어넣어 썩어버린 계절을 꺼낼 자신이 없다면 움직일 의지조차 지운 채 꿈을 꾸세요   그곳은 당신이 봤던 영화처럼 흑과 백으로 가득할거에요 당신이 찍어내는 발자국에 통증은 물러질거고 역류하던 찌꺼기는 혓바닥에 막혀 되돌아가겠죠   당신의 발걸음이 조금은 어색해질 때 잊고있던 이물감이 다시 목구멍을 건드릴 때 꿈 속에서 만난 여인과 대화를 나눠보세요 제가[…]

몽중 진단서
/ 2020-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