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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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여학생에게 순희란 이름은 가혹했다. 순희는 학창시절 짠순희 등의 별명을 달고 살았다. 전교생이 오십 명 근처를 맴도는 깡촌의 초등학교에서도 순희란 이름은 이제 한참 낡은 것이었다. 읍내의 여고에서는 새 학기마다 선생님들의 장난 섞인 호명을 받아야 했다. 순희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금자에게 개명시켜달라며 울고불고 매일같이 매달렸다. 금자는 그럴 때마다 "야, 아서라. 느이 할애비가 지어주신 소중헌 이름이잖여. 그냥 그러려니 허구 살어."하고 단칼에 내치곤 했다. 등짝을 때리거나 머리를 쥐어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희가 기회를 잡은 것은 열여덟의 겨울이었다. 금자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 개명하게 해달라고 담판을 걸었다. 이렇게 무슨 조건을 달고 개명을 제안한 것도 수십 회를 넘어가고 있었다. 순희는 평소 학업에 힘쓰지 않았고, 금자 역시 순희가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금자는 만약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것이고, 어차피 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에 순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순희는 지원한 모든 대학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순희의 개명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순희가 재수를 결정한 것은 온전히 개명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시작은 개명에 있었다.
서울에서 순희가 돌아온 날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봄날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순희는 염증과 두려움, 향수와 안락함을 동시에 느꼈다. 변함없이 동네 초입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길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똥 묻은 개와 논밭뿐이었다. 소똥 내가 코를 찔렀다. 순희는 며칠 전에 산 와인색 니트 조끼에 시골 냄새가 밸까 걱정했다.
넓디넓은 논 사이를 가로지르는 긴 흙길을 걷다 보면 작은 촌락이 나왔다. 신축한 조립식 이 층 주택 몇 채와 여러 번 개축한 흔적이 역력한 초가집이 모여 있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집들이나 축사에서 각종 소음이 흘러나왔다. 닭들이 모이 쪼며 꽥꽥대고, 어느 집안에선 여자의 고성, 어느 집안에선 사물이 쓰러지는 우당탕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희는 집을 찾아 조용히 들어가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고모! 순희 왔어요!"
순희의 외침이 있고, 사위는 더욱 시끄러워지더니 온 집에서 사람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사람만이 아니라 개나 닭 따위도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 나오니 순식간에 마당이 번잡해졌다. 순희는 예상했던 진풍경을 보며 킥킥 웃었다.
"순희야아!"
병구는 일 년 넘게 떨어져 지냈던 딸의 귀가에 요란스레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젊을 적부터 가계를 지탱해온 근육을 불끈거리며 달려오는 아버지를 순희는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받아주었다.
부녀가 포옹을 나누는 동안 금자는 "자는 공부헌더고 가드니 웬 멋만 저리 부리고 왔댜?"하고 혀를 찼으며, 작은아버지, 고모, 당숙, 조카를 포함한 친척들은 "도시물 좀 먹고 왔구먼유." "뭐시여, 저 다 큰 처자가 참말로 순희여?"하고 서로 떠들기 바빴다. 노견 똥구는 순희의 다리에 콧잔등과 갈기를 번갈아 비벼댔고, 밖에서 기르는 닭 두 마리가 깃을 여기저기 날려대며 뛰어다녔다. 부녀의 포옹이 끊이질 않자 금자가 "시방 해지겄슈! 엥간히 하고 들오슈!"하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의 삼분지 일이 순희의 친척인 작은 동네에서 순희의 귀향은 큰 사건이었다. 환영은 소규모의 축제처럼 이뤄졌다. 돼지를 한 마리 잡고 마을 회관 앞 공터에서 다 같이 모여 술판을 벌였다. 순희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꾸벅꾸벅하고 사담을 나눴지만, 남이 보지 않을 때는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순희는 삼수생의 귀향을 이렇게 환영해주는 곳은 우리 마을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순희가 귀향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날씨는 완연히 봄이 되어 봄꽃들은 흐드러졌고 햇볕은 따사로웠다. 순희는 천근 같던 학업의 짐을 벗고 도시 친구들의 끝없는 연락에서도 벗어나 마루에 누워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순희는 집에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뒹굴기만 했던 일주일을 회고했다. 이제는 정말로 백수구나. 가족은 모두 볼일을 보러 나갔다. 똥구가 나비를 쫓으며 짖어대는 소리, 냉장고 소리,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따위가 집 안을 채웠다. 순희는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결심이 일었다기보다 자신의 꼴이 처량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와 보니 봄 풍경이 신선했다. 집을 떠나지 않았던 때에는 당연했던 풍경이 도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순희에겐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배추흰나비 같은 흔한 나비 외에도 특이한 무늬를 한 색색깔 나비들이 들꽃을 맴돌며 날아다녔고, 언제 심었는지 모를 벚꽃들이 가로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순희는 스마트폰을 들고 카메라 앱을 켰다. 순희는 가장 좋은 각도와 카메라 필터를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이제야 촬영 버튼을 누르려는데, 화면 속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순희는 스마트폰을 옆으로 치웠다.
마치 복고풍 영화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같다고 순희는 생각했다. 황갈색 카디건을 걸쳐 입은 한 남자가 벚꽃 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벚꽃 잎이 후두둑 떨어져 남자의 주변을 나부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목과 팔다리가 모두 길쭉했다. 카디건보다 조금 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순희의 귓바퀴 안에선 봄 캐럴이 울렸다. 떨어진 벚꽃 잎들이 호를 그리며 회전했다. 벚꽃의 회오리 속에서 남자는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순희는 저도 모르게 저기요, 하고 남자를 부르고 말았다. 바람 소리에 묻히는 일 없이 소리는 전달됐다. 남자는 순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발은 멈추지 않았다. 뒤로 가볍게 날듯이 걸어가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입으로 소리 내진 않았지만, 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남자는 그제야 발걸음을 멈췄다. 순희는 흙 위에 내려앉은 벚꽃 잎을 밟으며 걸어가 남자 앞에 섰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남자를 멈춰 세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남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순희가 말하는 것을 기다렸다.
"벚꽃이 예쁘네요."
순희는 말했다. 겨우 말을 끝내니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순희는 금방이라도 다시 뒷걸음질로 사라질 것 같은 남자를 붙잡기 위해 다시 말을 쥐어짰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
"아."
아? 순희는 그 소리를 속으로 따라 했다. 의아함은 배가 됐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듯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맞다, 그랬지. 저는 최목현입니다."
남자의 다음 말은 멀쩡했다. 갈라지는 목소리도 아니었고, 한 음절도 아니었다. 순희는 의아함을 잊고 이름을 기억했다. 당신은 최목현. 나는 천순희.
순희는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말해줘서."
목현은 그 말을 듣고는 다시금 싱긋 웃었다.
순희는 집에 돌아간 후에야 자신이 어떤 차림으로 목현을 만났는지 깨달았다. 세수도 하지 않았고, 슬리퍼에 츄리닝 차림인 자신이 거울에 비쳤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최목현이? 잘 몰겄는디. 아, 기다, 겨. 저 우엣집 있잖여, 예전에 돌아가신 화백 선생 댁. 그 집 아들이여. 미대인지 뭐신지 다니다가 지금은 휴학 중이라 하던디. 갸는 와?"
순희의 물음에 금자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향했다.
"하이고, 벌써 남정네가 눈에 들어오나벼? 그려, 내지 사람이랑 살면 나야 편허구 좋지. 여서 살면서 농사나 쭉 지으면 디여."
"그런 거 아니야."
순희는 홍조를 띠며 말했다.
순희는 입시만이 아니라 연애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재수학원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정말 입시에 목숨을 걸고 공부하는 사람,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학원까지 보내줬냐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놀러 다니는 사람. 전자에게는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접근하지 못했고, 후자에게는 이름에 대한 자격지심 탓에 다가갈 수 없었다. 대신 자신처럼 두 부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으나 남자는 없었다.
미대생이라, 좋다. 외모는 수수했지만 꾸밀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미대생이라고 듣자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미대 오빠, 그런 분위기였다. 최목현입니다. 말하는 목소리도 듣기에 편했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순희가 인터넷에서 목현에 관한 기사를 찾은 것은 그 날 오후였다. 별생각 없이 목현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한 것이었다. 기사 제목에 그림 얘기가 있어 순희는 아까 보았던 목현의 이야기가 맞을 거라고 확신했다. 목현의 그림이 오스트리아의 미술전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해외의 명망 높은 평론가가 목현을 대상으로 한 평론을 발표했다고 했다. 학부 재학 중인 화가가 이렇게 국제적인 화제로 오른 것은 국내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기사의 말미에는 짧은 인터뷰가 덧붙어 있었다. 목현은 한결같이 겸손한 어조로 자신이 생각하는 미술을 이야기했다. 표현의 절제라는 단어가 몇 번 반복됐다. 순희는 짧은 텍스트에서 들려오는 목현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돌려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순희는 목현을 다시 마주쳤다. 이번 만남은 상정한 만남이었다. 목현을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할 것인가 머릿속으로 그리길 반복했다. 그러나 목현을 보자 머릿속을 바람이 휙 쓸고 지나간 듯했다. 할 말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발걸음을 몰았다. 샐쭉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목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목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마주 웃어주며 고개를 숙였다.
이 동네엔 앉아서 얘기할 공원 같은 게 없었다. 두 사람은 녹색 잎을 섞은 벚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논 하나 너머로 경운기 한 대가 털털거리며 지나갔다. 잠시 말은 멎고 바람 소리가 고요를 채웠다. 순희는 목현이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기에 제 또래로 보이시는데, 대학생이신가요?"
순희가 말했다.
"네, 맞아요.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그쪽도요?"
순희는 삼수생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야기의 물꼬를 틀고자 알면서 던져본 질문이었지만 제 꾀에 넘어간 기분이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제 이름을 안 가르쳐드렸구나. 전 천서희라고 해요."
순희가 말했다. 서희는 어릴 적부터 원했던 이름이었다. 눈에 띄지 않지만 예쁜 이름. 성씨가 천이라 천사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도 어렸을 적 취향이었다.
"휴학은 어쩌다가 하게 되신 거예요?"
목현은 정색하듯 입을 다물었다. 순희는 순간 아차 싶었다. 뭘 잘못 건드렸나 싶었다. 여자나 군대 문제인 것일까. 그래도 천재 화가인데, 입대는 아닐 거야.
목현은 순희의 표정을 보더니 괜찮다는 듯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거 때문입니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뚝 한중간부터 손목까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순희는 군대가 아닌 것에 일단 안도했다. 다만 얕은 상처가 아닌 듯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손을 다치면 큰일일 텐데.
"다치신 거예요? 얼마나요?"
순희가 말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닙니다. 지금은 가스 불도 못 켤 정도로 아프지만, 의사 선생님 말로는 후유증 남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라 하더군요."
그럼 그 상처가 다 나으면, 개강하면 다시 대학으로 가겠네요? 그런 말이 순희의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교수님이 휴학을 권하시더라고요. 아, 제가 미대를 다닙니다. 그림을 그려요. 제가 다친 걸 듣고는 교수님께서, 어차피 그리지도 못하는 놈 있어봤자 뭐하냐, 그러시는 거 있죠? 괜히 그림 그린다고 난리 피우다 덧나면 개고생이라고."
목현은 그렇게 말하고 하하 웃었다. 순희는 생각보다 과묵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 웃겼나요?"
목현이 말했다. 넋을 놓고 있던 순희는 황급히 수습했다.
"아, 아뇨. 미대생이라시기에 놀라서요. 저 처음 봤어요."
"혹시 이 근처 사시나요?"
"네, 맞아요."
"제가 저어기 마을회관 위쪽에 있는 2층 벽돌집에 삽니다. 그 옆에 아틀리에가 따로 있는데요. 낮에는 보통 거기서 지냅니다. 제 그림하고 제가 모아둔 그림이 조금 있어요. 혹시 미술에 관심 있으시면 둘러보셔도 됩니다."
목현은 아주 재밌거든요, 하고 덧붙였다. 그림 얘기를 하고 있으니 더욱 활기가 넘쳤다. 순희는 미소에 전염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순희는 꼭 가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데이트 신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동네 얘기를 좀 더 했다. 목현은 이 동네 토박이였다. 그러면 분명 마주친 적이 있을 텐데, 순희는 의문을 품었다. 두 사람은 이십 분 정도를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해가 제법 길어지고 있었다.

그 후에도 산책 중에 목현과 마주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순희는 오늘 목현의 아틀리에를 찾아가기로 했다. 도시에서 내려올 때 사왔던 봄옷들을 풀었다. 이번에는 조금 꾸미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하지 않게, 순희는 목현이 인터뷰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표현의 절제.
햇볕이 아직 설익어 날은 선선했다. 오랜만에 입은 스커트가 봄바람에 나풀거렸다. 좁은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얇은 샌들을 신은 발이 돌부리를 밟을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다.
개들이 짖어댔다. 조용한 시골에선 먼 곳에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울려왔다. 개들은 한 번 짖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짖어댔다. 순희는 개 짖는 소리가 시골의 소리라고 생각했다.
멀지 않은 곳에 목현의 집이 있었다. 집 마당엔 닭들이 작은 철조망 우리에 갇혀 있었다. 본채와 따로 지어진 아틀리에는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본채와 달리 하얀색을 기조로 한 조립식 건물이었다. 주기적으로 페인트칠을 하는지 얼룩 없이 외양이 깔끔했다. 제법 크기도 있어 얼핏 보면 별개의 주택처럼도 보였다.
순희는 아틀리에의 목제 현관문을 두드렸다. 통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곧 문이 열렸다. 목현이 나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미소와 함께였다. 순희는 어쩐지 평소보다 미소에 힘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목현은 신발장에서 면 슬리퍼를 꺼내주었다. 나무 바닥이 물감으로 얼룩덜룩했다. 구석 창문 앞자리에 비치된 이젤과 의자, 작은 탁자를 제외하면 가구랄 것이 없었다. 때가 탄 소형 냉장고가 작업 공간 반대 구석에 있었고, 삼단 서랍, 그 위에 탁상시계와 라디오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공간은 그림이 차지했다. 개중엔 한쪽 벽 절반을 꽉 채울 정도로 큰 그림도 있었다. 복잡한 선이나 도형 없이 색의 패턴으로 채워진 그림이었다.
목현은 각각의 그림들과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대개 친분이 있는 화가의 그림을 증정 수준의 가격으로 사 모은 것이라 했다. 그림들은 가까이서 보았을 때와 멀리서 보았을 때, 설명을 듣고 보았을 때와 듣지 않고 보았을 때 인상이 판이하였다. 순희의 미적 감수성으로는 그림들이 멋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신 복잡한 의미가 이미지로 충돌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감상을 목현에게 말하자, 목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인지, '그거지요'인지 알 수 없는 끄덕임이었다.
그림들의 소개를 마무리하자, 목현은 간이 의자를 가져와 이젤 근처에 설치했다. 목현은 냉장고에서 음료수 두 캔을 꺼내 하나를 순희에게 건네고 이젤 의자에 앉았다.
"앉아요. 오늘 어땠나요? 좀 지루했죠? 설명이 너무 길긴 했어요."
순희는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뇨, 즐거웠어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분야의 이야기를 할 때 빛나는 것 같아요. 오늘 목현 씨가 그랬어요."
목현은 빙긋 웃었다.
"미술을 사랑하시네요."
순희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림은 제 은인이거든요."
"은인이요?"
"제가 이렇게 서희 씨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그림 덕분이죠."
순희는 이름을 불린 것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귀를 간질이는 듯했다.
"나이가 차도 영 말을 하지 못했답니다. 얘기하는 건 알아듣고, 글도 쓰는데 말이죠. 원래라면 그런 쪽에 도움 주는 기관이나 학교에 들어갔겠지만, 저희 부모님이 워낙에 고지식한 분들이라서요. 이런 반편이라도 제 으로 먹고 살길은 열어주겠다고 어머니는 농사를, 아버지는 그림을 가르쳐주셨어요. 초등학교랑 중학교는 그런 사정 때문에 못 다녔죠."
순희는 같은 동네에 사는 목현을 왜 학교에서 만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이 동네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동네 아이들 모두가 다녀도 전교생이 오십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모두 아는 사이기 마련이었다. 왜 어릴 적에 본 적이 없나 했더니, 학교를 안 다녔구나. 금자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벙어리인 아들을 주변에 공연히 보이길 싫어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평범히 말씀하시잖아요?"
순희가 말했다.
"평범한가요? 말이 트인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나이쯤 되면서 트였거든요. 잠시만요. 화장실 좀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목현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갔다.
쉼 없이 얘기하던 목현이 화장실에 들어가자 순희는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순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목현이 소개하지 않은 그림을 발견했다. 흰색 천으로 덮어놓은 채였는데, 화장실 문이 열려 있는 동안엔 눈에 띄지 않았다. 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몇몇 다른 그림들도 천으로 가려둔 것이 있었지만 이 그림은 느낌이 달랐다. 그저 가렸다기보다는 봉해둔 느낌이 들었다. 순희는 함부로 들춰보면 안 될 것이란 생각에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목현이 나왔다.
"그 그림이 보고 싶어요?"
목현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괜찮아요. 봐도 됩니다."
목현은 그렇게 말하고 순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서 있는 순희의 어깨에 목현의 손이 스쳤다. 뻗어 나간 손은 그림을 덮어뒀던 천을 한 번에 끌어냈다. 천천히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먹으로 그린 나무가 있었다. 명암이 없고, 잎도 없었다. 정갈한 흰색의 바탕에 검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먹으로 그렸지만, 수묵화라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팝 아트의 느낌이 풍겼다. 나무는 복잡하면서 단순했다. 많은 것이 빠져 있었지만 강건한 몸체는 눈앞에 둔 듯 생생했다. 얼핏 보면 겨울의 눈 덮인 헐벗은 나무처럼, 얼핏 보면 흰 봄꽃을 휘날리는 나무처럼 보였다.
순희는 숨을 삼키고, 탄성을 흘렸다. 한숨이 섞인 그 탄성에 목현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과거의 자신이 그 위에 겹쳐 보였다.
"백지 위로 뭐가 보입니까?"
목현이 말했다. 순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말로 정의하기 힘든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작입니다. 완성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제가 말을 시작했죠. 아버지는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치사한 사람이죠. 항상 벙어리라고 저를 구박했지만, 부정이란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순희는 말하지 못하는 아들의 손에 붓을 쥐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했다. 치사한 사람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목현은 손목의 붕대를 풀어 순희에게 보여줬다. 상처가 없었다. 대신에 오돌토돌 닭살이 돋아 있었다. 어깨와 팔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상처는 거짓말입니다. 더는 그릴 수가 없어서 돌아왔어요. 매일 여기,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한량처럼 앉아있는 일상입니다. 제 그림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인정할 수 없었어요. 한국에는 없었던 시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쁘기보단 짜증이 났습니다. 모든 게 저를 놀리려는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하고 많이 싸웠어요. 안 그래도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더 그랬죠. 제겐 재능이 없어요. 그저 아버지를 따라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그림을 생각합니다. 보지는 않아요. 이렇게 되고 마니까요. 이 그림을 따라 할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은 저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입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에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순희가 말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름 하나도 못 바꾸고, 대학 하나도 못 가고, 그런 저를 나무라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아와 버린 사람도 있어요. 목현 씨는 아니잖아요. 목현 씨는, 축복받은 거잖아요."
두 사람의 눈빛이 한가운데에서 맞닿았다. 말 없는 공방이 오갔다.
순희는 그 후 집으로 돌아갔다. 발에 익지 않은 샌들을 종일 신고, 비포장도로를 걸어 다닌 탓에 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 봐도 고통이 낫지 않았다.
그 날 밤, 아틀리에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금자가 고통을 호소한 것은 모내기철의 저녁이었다. 종일 이앙기를 모는 병구의 곁에서 잔소리를 하던 금자는 저녁을 먹고 안방에 들어가다 꼬꾸라졌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뱃속이 누군가 때리는 듯 아프다며 병구에게 매달려 울었다. 병구는 금자를 둘러업고 내달렸다. 한밤의 시골길을 트럭이 질주했다. 순희는 심란한 마음에 짐이 하나 더 떨어진 기분이었다. 명치를 얻어맞은 듯 숨 막히고 괴로웠다.
이튿날 아침에 걸려온 전화에서 금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순희는 코맹맹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금자는 맹장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흘이면 퇴원혀도 된디야. 근디 느이 아부지가 밤시 나 죽어 나 죽어 그랬더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여. 사흘만 더 있다 퇴원혀라 그런디야? 금자가 호탕히 웃자 순희는 몸에 힘이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랴서 그러는디, 이앙기 몰 줄 아는 사람헌티 대신 남은 모내기 좀 혀달라 부탁혔으니 모레쯤에 집으로 올 겨. 니가 안내 좀 혀 줘, 알긌남?
모레 낮이었다. 순희는 이른 점심을 먹고 사람을 기다렸다. 봄이 깊어 낮에는 더웠다. 뙤약볕 아래 서 있을 생각을 해 순희는 반팔 위에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주방 식탁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모내기 도와주러 온 사람이구나. 문을 열어줬더니 나타난 건 목현이었다.
"어머니가 부탁해서요. 얼른 해치웁시다."
목현이 창고에서 이앙기를 몰고 나왔다. 평소 단정한 차림이었던 그가 바짓단을 걷고 장화를 신은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웃으면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더 어색해질까 두려워 순희는 웃음을 참았다. 모판을 이끌고 논으로 가니 생각보다 많은 양이 남아 있었다.
"한 천 평 정도는 남은 것 같네요. 네댓 시간 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안에 들어가 계셔도 됩니다."
순희는 고개를 저었다. 목현은 별말 없이 모판을 이앙기에 연결하고 논에 들어갔다. 목현은 능숙하게 이앙기 방향을 돌려가며 논에 모를 심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 농사를 배웠다고 했지. 이앙기는 모를 내려놓듯 사뿐히 지나갔다. 모는 단단히 논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지나갈 때마다 물이 튀겼다.
여전히 시골은 개 짖는 소리로 시끄러웠고, 동네 뒷산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공명했다.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에 순희는 쪼그려 앉아 목현을 구경했다. 아무 일 하지 않는 시간은 길게 느껴졌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은 채였다. 목현이 탄 이앙기는 육중한 가축처럼 느릿느릿 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멀어졌다가 가까이 돌아왔다가 하는 목현을 보고 있자니 나른했다. 하품을 하면서도 자리는 뜨지 않았다.
목현은 한 시간 반을 일하다 이앙기를 세웠다. 이앙기 엔진에서 나오는 열기가 햇볕과 함께 목현을 괴롭혔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샌가부터 순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받아요!"
목현의 눈앞에 갈색 물체가 날아왔다. 양손으로 잡으니 차가움이 전해졌다. 순희가 하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날아온 것은 초콜릿 맛 튜브형 아이스크림이었다. 갑자기 뭐람. 목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 손으로 아이스크림 몸통을 잡고 한 손으로 아래쪽을 때리니 팡 터지는 소리와 함께 포장이 찢어졌다. 두 사람은 논을 바라보며 나란히 쭈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목현은 다시 이앙기를 몰았다. 한참 넓어 보이던 논을 녹색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시간은 네 시였다. 갑자기 이앙기가 멈춰 섰다. 목현이 이앙기에서 내려왔다. 논 한중간에서 이앙기와 씨름하는 모습을 본 순희가 소리쳤다.
"왜 그래요?"
목현은 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이더니 1분 정도 더 실랑이를 했다. 포기한 듯 도로변으로 올라와서는 전화를 걸었다.
"예, 이게 잘 고장 나는 게 아닌데 이러네요. 예, 예. 이 시간엔 여기까지 못 오신다고요? 아, 예,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목현은 전화를 끊고 순희에게 말했다.
"이앙기가 갑자기 시동이 꺼졌는데, 다시 시동이 안 걸리네요. 엔진 쪽 문제인 것 같은데, 수리점이 근처에 없어서요. 읍내 끝에 한 곳이 있어서 전화해봤는데, 이 시간엔 못 오신다네요. 어두워지면 길이 안 보여서 위험하다고."
"그럼 어떡해요?"
순희가 말했다.
"어떡하긴요. 내일 다시 일해야죠."
"하지만 이제 조금인데."
"그러게요. 이제 조금인데."
순희는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다 다시 어딘가로 뛰어갔다. 목현이 따라가려 했으나 순희가 “기다려요!”하고 소리쳐 제지했다. 목현은 멀리 사라지는 순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희는 오 분 후에 돌아왔다. 목장갑 한 짝을 손에 들고서였다.
"손으로 해봐요.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죠."
"손으로요? 아유, 말도 안 돼요. 100평을 언제 합니까. 해 다 지죠. 사서 고생하는 겁니다."
목현을 얼떨떨해하면서 말했다. 자신이 어릴 적엔 이미 이앙기가 집에 있었다. 그럼에도 해마다 어머니는 사람 손힘이 들어가야 땅이 작물들을 봐주는 거라며 모내기도 100평 정도는 손으로 했다. 어린 목현에게도 일을 시켰는데, 모내기는 특히 품이 많이 드는 중노동이었다.
순희는 목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없이 이앙기에 실려 있던 모판으로 다가가 모를 집어 들었다. 논바닥을 철벅이며 걷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순희는 휘청거리면서도 모내기를 시작했다. 목현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그렇게 해서 모가 땅에 박힙니까?"
목현도 논으로 들어가 순희가 심은 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으로 이렇게 파서 심어야 해요. 너무 얕게 심으면 쓰러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이면 나중에 제대로 못 자라요."
목현은 순희의 손에서 모를 몇 개 가져가서 직접 시범을 보였다.
"자, 너무 힘주지 말고, 이런 식으로 심는 거예요. 거리는 이 정도 유지하면서."
순희는 어정쩡하게 서서 목현이 모를 심는 걸 바라봤다. 자신 넘치는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었다. 이미 땟국이 흐르는 구레나룻을 보며 순희는 모판을 더 가져왔다.
"해 지기 전에 끝낼 수 있죠?"
순희가 물었다.
"글쎄요. 해봐야 알겠는데. 원래 모내기는 장정 대여섯은 붙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좀만 더하면 걷기도 힘들어질걸요."
"그래도 앉아있는 게 힘든 것보단 뿌듯하겠네요."
순희가 말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논에 심어진 모들을 둘러보고 손에 질끈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80평 좀 넘게 남은 논을 천천히 메웠다. 순희도 어릴 적에 어머니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을 기억해내며 모를 심었다. 질척거리는 진흙이 장화에 들어가 갈수록 발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순희는 생각했다. 이보다 더한 진창에도 빠져봤다. 누구나, 모처럼.
해는 계속 기울었다. 산기슭으로 반쯤 몸을 숨긴 해는 붉은 빛무리를 퍼트렸다. 논도 황갈색으로 물들고, 모도 익은 벼처럼 발갛게 되었다. 순희와 목현의 눈에는 벌써 고개 숙인 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메우지 못한 논이 줄어들수록 손이 느려졌다. 한 줄을 끝내고 방향을 틀다가 서로 부딪쳐 넘어지고 웃곤 했다.
노을이 불탈 때 두 사람은 겨우 모내기를 끝냈다. 도로에 주저앉아 논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한 차례를 끝낸 기분이네요."
순희가 말했다.
"뭔 소린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걸을 힘도 없어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논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고, 달이 떠도 그대로였다. 색이 빛나는 꽃도, 미려한 난도 아닌 모들이 달빛에 물들어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두 사람은 지나가던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에 돌아갔다. 각자 집에 들어가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간혹 현관에 놓인 더러운 장화에 곁눈질을 보낼 뿐이었다.

(*시절 : 바보, 천치, 어수룩한 사람을 일컫는 충남 서북부 지역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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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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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나는 당신의 비상을 보았다. 오직 나만이 당신의 증인이다. 당신은 날개를 쭉 벋은 채 창공을 가로질렀다. 쏟아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반짝거렸다. 이윽고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태양을 가렸다. 나는 그 아래에 있었다. 당신의 모습이 역광으로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것이 인류최초의 비행이었다. 지금도 믿어의심치 않는다. 당신은 하늘 높이 날아, 영겁처럼 긴-어쩌면 찰나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만끽했다. 나 역시 마치 꿈결 속에 있는 듯했다.

아직도 고향의 옛 집에 머무는 동안이면 창고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당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내가 갈무리한 당신의 날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날 내가 옮겨다놓은 모습 그대로 여기에 남아있었다. 여기서 날개를 보며 당신과의 추억을 안주 삼아 브랜디를 마시는 것이 늙은 내 취미였다. 추억 속의 당신은 이제 나보다 쉰 살은 어렸다.

당신은 하늘을 동경하는 이카루스이자 총명한 기술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양력을 발견하고 날개를 설계 중이었다. 당신은 내게 그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어. 새처럼, 바람처럼." 당신의 동경은 나까지 끌어들인 우량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당신의 비행을 보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다. 그때 나에게 당신은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잃어 잠시 무리와 하늘을 떠난 한 마리 새가 아닐까. 나는 곧잘 당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슬슬 취기가 올랐다. 그만 본채로 들어갈까 하는 차에 문이 열렸다. 시원한 바람이 콧잔등에 닿았다. 손자 녀석이 바닥을 끼익끼익 울리며 달려들어왔다. 넘어질 뻔하면서까지 급하게 구는 것이 중한 용무가 있는 듯했다. 손자는 숨 고르는 일도 잊고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쭉 뒤로 빼자 그제야 글씨가 읽혔다. '1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저자 란에 써있는 이름이 친숙했다. 옛 전우의 이름이었다.

"여기 나오는 아서 경이 정말 할아버지예요?"

손자가 물었다. 책 표지에 그려진 복엽기 사진을 보고 있자니 취기가 훅 올라왔다.

"그래, 내가 바로 제임스 아서 경이다!"

콧김을 뿜으며 과장스러운 군인 말투로 말했다. 손자가 눈을 빛내며 책에서 소개하는 일화에 관해 물어댔다. 나는 경험담을 바탕으로 적당히 부풀려서 손자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손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피한 세대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갔다.

"그럼 이 조형물에도 뭔가 있는 거죠?"

손자는 당신의 날개로 다가갔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손자는 당신의 날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신의 흔적은 누군가의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뭔가 적혀 있는 것 같아요. 다 헤지고 번져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J. A……."

손자가 중얼거렸다.

"얘야, 네 큰엄마가 부르는 것 같구나. 가봐야하지 않겠니?"

내가 말했다. 손자가 덜컥 고개를 들었다. 불쾌한 침묵이 감돌았다. 손자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순순히 창고를 나갔다. 손자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자각하면서도 끓어오르는 심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허리가 찌르르 아파왔다. 나이가 나이임에도 사람은 이런 유치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었다.

당신은 마지막에 와서야 일을 망설였다. 사람이 직접 날개를 달고 시험 비행을 해야 일이 끝났다. 하지만 추락할지도 모르는 날개를 메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을 할 만한 미치광이는 당신밖에 없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덜 미쳐 있었는지,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나를 찾아왔다. "네가 대신 해줄 수는 없겠어? 말했잖아. 너도 새처럼, 바람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며!" 나 역시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당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결국 무슨 대답을 하긴 했을 것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백년이 지난 일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당신의 날개로 다가갔다. 발을 들어 손자가 보았던 비밀을 짓밟았다. 전쟁터에서 군홧발로 그랬던대로. 허리가 계속 아파왔지만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의, 그리고 나의 날개가 부수어져갔다. 무슨 상관인가. 이런 흔적이 없대도 내가 당신의 증인이다.

당신은 분명히 하늘을 날았다. 새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틀림없는 인류 최초의 비행이었다. 당신이 태양을 가리고 역광으로 물들었던 때의 그 모습만은 똑똑히 기억났다. 반백년이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였다. 나는 오직 그때만을 상상했다. 당신의 얼굴이 잠깐 빛났던 때, 그래서 검게 물들었을 때, 당신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때의 당신은 무엇을 보고있었을까. 하늘을? 나를? 당신은 어째서 추락하고 말았는가. 그 탓에 나에게 진정한 하늘이란 여전히 당신의 빛났던 얼굴이다. 아주 어둡게 빛났던, 당신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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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에 쥐어준 야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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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에 쥐어준 야구공

나는 황망히 관객석 뒤쪽으로 도망쳐 나왔다. 앞앞 자리에 앉은 두 사람 탓이었다. 저 둘이 왜 이런 곳에 있을까. 마주치면 분명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 것이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몸을 옮겼다.

깡, 하는 시원한 소리와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늘 높이 공이 날고 있었다. 나는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리 포물선으로 날아가는 타구였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일어섰다. 펜스를 넘길 것처럼 날아가던 공은 결국 펜스에 부딪혀 떨어졌다. 떨어진 공을 외야수가 처리했다. 2루 주자는 여유롭게 홈을 밟았고, 1루 주자는 아슬아슬하게 홈인했다. 타자는 3루에 안착했다. 홈런인 줄 알고 일어섰던 관객들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3루타가 어디냐. 관객들은 응원 소리를 높였다. 열기는 뜨거웠고, 나는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잠실에서 홈런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줄 아나. 하지만 아예 안 나오는 건 또 아니지. 나는 문득 그 날의 공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교복을 입었을 때였다. 서울 오는 버스에서 얼굴이 삭았다는 이유로 성인 요금을 빼앗겨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21세기를 맞은 서울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여기저기 치인 나는 겨우겨우 잠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껏 지쳐 이제 그냥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진짜 야구장은 이렇게 큰 것이었나. 그 날 경기는 안 그래도 많은 관객을 부르는 잠실 시리즈였다. 그 트윈스의 야생마가 현역이던 시절이었다. 응원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관객석은 꽉 차 있었고, 경기 준비를 하는 선수들의 눈빛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촌놈이었던 나는 야구장의 분위기에 심취되었다. 이 큰 야구장을 가볍게 압도하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와 내가 TV 스크린 너머로 동경했던 야생마의 호투는 나를 야구장의 포말로 만들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집에 돌아가서는 쇳소리밖에 못 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맥주도 마시지 못하는 나이였지만 나는 누구보다 취해 있었다. 야생마를 만나면 사인을 받기 위해 가져온 글러브를 꼭 쥐고서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는 점점 트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야생마는 마운드를 내려갔지만 이어서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도 호투를 계속했다. 몇 번이고 삼진을 잡아냈다. 승기를 잡았다. 응원 소리가 더욱 드높아졌다. 패색을 느낀 베어스 쪽 관객은 선수들을 북돋고 역전을 기도했다. 승기를 잡은 트윈스 쪽은 환호를 거듭했다.

경기는 계속돼 9회 말이었다. 오늘 홈은 베어스였다. 이미 점수 차는 꽤나 벌어져 있었다. 드라마처럼 역전 끝내기 홈런 같은 홈런이 연속 두 번은 터져야 정말 역전할 수 있는 점수 차였다. 안 그래도 잠실에선 홈런이 나오기 힘들었으니 관객들의 분위기는 일목요연했다. 마지막 긴장의 끈이 내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때, 어느 소리보다도 청아한 재앙의 소리가 들렸다. 응원석의 모든 관객들이 목이 부러질 정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공은 직선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정확히 이쪽 관객석을 향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베어스는 절규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공은 결국 잠실의 펜스를 넘었다. 나는 무심코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잠실의 홈런 공은 내 글러브 위로 떨어졌다. 아웃은 아니었다.

나는 내 글러브에 들어온 공을 유심히 보았다. 난 야구공을 가져오지 않았고, 이 공은 방금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그럼 확실했다. 나는 홈런볼을 잡은 것이었다. 손목과 손바닥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베어스 관객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옆에서도 베어스 팬으로 보이는 한 가족이 환호하고 있었다. 나는 손에 잡힌 야구공을 바라보았다. 강력한 스윙에 맞고 날아왔음에도 야구공은 깨끗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행운에 겨워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얘, 안 돼.”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작은 손이 있었다. 짧고 뭉툭한 손가락이 다섯 손가락 펴져 있고, 하얗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그 가운데 가만히 서있었다. 손가락들이 생명을 띠고 꼼지락거렸다.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의 손이었다. 부모가 아이를 말리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 손을 잡을 뻔했다. 아이는 마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초등학생 아이에게 공을 건넸다. 부러지기 쉬워 보이는 그 손을 쥐듯 천천히. 아이는 손을 뻗어 야구공에 손을 갖다 댔다. 아이의 부모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와 나는 별개였다. 이 야구장과는 멀리 떨어진, 독립적인 공간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아이는 미소 지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그 때를 회상하고 있자니, 처연했다. 작은 행운이었던 그 만남을 지나, 지금은 도망자 신세였다. 나는 이제 다시는 그 눈빛을 볼 수 없다. 이대로 경기장에 있으면 꿀꿀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듯했다. 나는 경기장을 나가려다, 배트 맞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늘엔 야구공이 떠있었다. 커다란 뭉게구름이 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야구공은 이쪽 관객석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야구공이 나를 잡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서른이 넘은 몸을 이끌고 앞으로 달렸다. 옛날 젊었을 적처럼, 공을 잡기 위해 달렸다. 여기였다. 여기 서면 공을 잡을 수 있으리라. 나는 멈춰 서서 손을 뻗었다.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홈런, 깔끔하게 펜스를 넘긴 타구였다. 나는 손을 보았다. 공은 잡히지 않았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에게 안긴 딸아이가 배실 배실 웃고 있었다. 딸아이는 작은 손바닥을 펴 나에게 향했다. 딸아이를 안은 엄마는 놀란 얼굴이었다. 근 몇 년간 본 당신이 지은 표정 중에 가장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나는 야구공 대신 손을 뻗어, 딸아이의 손을 포개 잡았다. 야구공은 딱딱하고 거칠하다. 딸아이의 손은 부드럽고 매끈했다. 나는 당신에게 눈빛을 건넸다. 아마도 당신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야구공을 주길 바라는 것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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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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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서 애나 낳고 살면 돼. 그게 효도하는 거다. 넌 착한 아이잖니.
입시 원서로 대판 싸운 날이었다. 술에 취한 아빠는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말했다. 나는 경악했다. 아빠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를 딸이라는 소유물로써 생각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내 손을 맞잡은 아빠의 거친 손에서 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난 결국 원서를 다시 썼다. 그 날 밤, 볼을 감쌌던 축축한 베갯잇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부모님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 옆에 앉은 가연 언니가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을 멈추고 잠시 가연 언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인상이 둥글었다. 볼살이 도톰하고 눈매가 부드러웠다. 화장도 짙지 않아 이웃 언니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연이란 이름은 가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나란히 앉은 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모텔 역시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일반적인 방의 모습이었다. 침대와 서랍장, 테이블과 거울 달린 화장대 정도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모텔은 문란한 곳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실제로 본 모텔의 모습은, 상상 속의 호텔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오랜 침묵 후에, 가연 언니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어.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네. 어때, 포옹은 괜찮아?”
가연 언니는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연 언니는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마치 아기를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뻣뻣이 굳은 내 몸을 풀어주듯 어깨와 허리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블라우스 너머로 가연 언니의 살결이 느껴졌다. 나는 가연 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옅은 감귤 향이 났다. 포옹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연 언니는 나를 안은 채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이런 점 때문이야. 많은 여자들은 이렇게 포옹하고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거든.”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가연 언니의 몸은 따스했다. 사람의 체온이 새삼 각별하게 느껴졌다. 오직 온기를 탐해 가연 언니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갓난아기가 자신을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속을 파고들 듯, 가연 언니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한 화분에서 자라는 두 식물처럼 얽혀 들어갔다.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연 언니는 베개 맡 서랍장 위에 올려뒀던 휴대전화를 집었다.
“15분 남았네. 아쉬워라. 자기 몸, 따듯했는데.”
나는 가연 언니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가연 언니의 체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몸에 남은 체온이 나의 것인지 가연 언니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포옹을 통해 전해 받은 가연 언니의 체온은 마음속까지 뚫고 들어왔다. 포옹은 체온을 전하고, 체온은 서로를 하나로 만들어줬다.
“다음에 아버지를 설득할 땐 꼭 안아드리면서 말해 봐. 난 자기가 안아주면 체온 말고도 여러 가지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연 언니는 농담처럼 말했다. 나와 가연 언니는 짧은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문득, 나는 아버지의 거친 손을 떠올렸다. 체온이 전해지지 않았던 손이었다. 하지만 가연 언니의 농담처럼, 그 때 아버지가 포옹을 해주시며 말했다면, 체온이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만약, 내가 그 손에 체온을 전해줬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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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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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나는 땅바닥에 버려진 검은 봉지를 보았다. 쓰레기에 눈짓을 줄 일은 없었다. 시선 끝에 들어온 새까만 비닐 봉지 끄트머리가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자라나는 잡초 싹 위에 유유히 떠오른 검은 봉지를 보았을 때 신경이 쓰였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의미 없는 쓰레기가 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까? 난 들춰보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머릿속에 검은 바탕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흑. 그 위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검은 바탕을 생각 위에 칠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검은 그림이 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검은 봉지는 그대로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매일 검은 봉지를 스치듯 차가 지나갔고, 스키드 마크가 도로에 새겨졌다. 날이 따듯해지면서 잡초는 계속 자라났다. 보도블럭 사이의 흙에서 잡초 외의 꽃들도 피어났다. 개나리, 민들레 같은 꽃들이 자라났다. 그 구석에서 검은 봉지는 가만히 흔들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귀를 내버려두고, 아무런 무게 중심도 없는 듯 서있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다면 그 윤곽이 드러나야 할 텐데 그런 게 없었다. 무엇을 짊어지고 있기에 잡초 곁에 붙어 떠나지 않는 걸까. 어쩌면 비어있는 자신을 짊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꿈속에서 몇 번이고 그 안을 들췄다. 내용물은 항상 달랐다. 동전 한 닢이 그 안에 떨어져 있기도 했고, 자그마한 돌멩이가 봉지를 고정하고 있기도 했다. 내 꿈은 빠짐없이 채워져 있었다. 검은 봉지가 있는 도로변은 잡초와 꽃들로 채워져 꽃밭이었고, 하늘은 별과 해와 달이 서로를 둘러싼 푸른 밤하늘이었다. 꿈 안에서 그런 모습들은 항상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째선지 봉지 속에 든 것들은 부자연스러웠다. 검은 비닐 봉지가 날지 못하는 것은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 깨어 눈을 뜨면 주변은 어두웠다. 항상 그랬다. 낮과 밤은 뒤바뀌어 내게 낮은 어두운 시간이었다. 이불을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바닥엔 잡동사니가 굴러다녔으므로 발에 채이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나는 패딩점퍼를 걸쳐 입고 집 근처의 공원을 찾아 나섰다. 봄이었지만 아직 밤은 쌀쌀했다. 칼바람이나 다름없이 거센 봄바람에 꽤나 자란 머리카락은 갈대가 바람 맞듯 휘날렸다. 감지 않아 기름진 머리여도 숱이 부족하니 가볍게 날았다.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걸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해 공원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공원 중심의 구조물에 걸린 시계를 보니 열두 시였다.
공원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오줌지린내가 진동했다. 이 시간의 공중화장실은 가장 청소가 되어있지 않은 때였다. 취객들이 몰려와 바닥에 오줌을 흩뿌리거나 세면대에 구토를 쏟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열두 시면 다행히 조금 일렀다. 나는 걸레 빠는 세면대에 머리를 집어넣고 물을 틀었다. 얼음장 같은 물이 뒤통수로 떨어졌다. 강한 수압에 얻어맞으며 머릿속이 얼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차가운 것을 급하게 먹은 듯 머리가 아려왔다. 찬물에 얻어맞을 것을 예상했지만 목은 크게 움찔거렸고 놀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피의 감각은 금방 마비됐다. 나는 패딩 주머니에 들어있던 샴푸 샘플을 뜯었다.
핸드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밖으로 나오면 달은 서쪽으로 걸음을 옮긴 뒤였다. 새벽은 더욱 깊어져 주택가의 불빛들은 잠들었다. 각종 사옥으로 쓰이는 고층 빌딩들과 홍등가의 불빛들만 밝게 날뛰었다. 이 조그마한 도시에 왜 그리 많은 빛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저 별들을 가릴 만큼 가치가 있는 도시일까, 이곳은. 나는 머릿속에 하나 둘 그려지는 낙서를 떨치고 공원에서 나왔다.
옛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항상 이런 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별하늘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숨만 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반복하던 나날이었다. 그런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문으로 향할 때, 나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엔 별이 많았다. 학교가 산등성이에 붙어있었기에 그랬을까, 유독 그 길에선 별이 많이 보였다. 나는 매일 같이 그 별의 개수를 세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구나, 오늘은 어제보다 적구나. 그러다가 고개를 쳐들고 하교하는 학생은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아는 친구가 보이면 말을 걸어 나란히 걸었다.
매일 지나는 장소에서 다시 검은 비닐 봉지를 보았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꽤나 자란 잡초와 풀꽃들 사이에서 녹색 조화를 망치는 존재였다.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닌데 억지로 붙어 있는 듯 부자연스러웠다. 악착 같이 검은 비닐 봉지는 자리를 지켰다. 빌어먹을 자식. 생각해보면 저 검은 비닐 봉지도 쓰레기에 불과했다. 저 자리에 있어도 될 물건이 아니었다. 평생 발휘해 본 적이 없는 환경 보호 정신이 불타올랐고, 나는 몇 주 동안 날 신경 쓰이게 했던 검은 비닐 봉지를 드디어 들추었다.
가볍게 들린 검은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것은 녹색이었다. 마음이 동요했다. 가볍게 들었던 검은 비닐 봉지의 무게가 갑작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이런 거면 날아가지 못할 법했다. 상상과 별 다를 없는 결과물이었다. 손의 떨림이 멈추고 깨달았다. 이런 건 검은 비닐 봉지가 짊어질 물건이 아니었다.
나는 녹색 펄프 뭉치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주었다. 손에 남은 것은 검은 비닐 봉지였다. 몹시 가벼워서 손가락에 준 힘을 풀면 봄바람을 타고 휘날려갈 물건이었다. 몇 주나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이 물건엔 알 수 없는 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서히 손가락의 힘은 풀렸다. 바람이 한 차례 강하게 휘날렸고, 검은 비닐 봉지는 밤하늘을 타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검은 비닐 봉지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몸은 무거웠고 휘날리지 않았다. 그저 평소 가던 길 그대로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하지만 변화가 있었다면, 별과 달만이 떠 새까맣고 투박한 밤하늘도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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