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의 창조 (토머스 S. 쿤, '과학 혁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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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역할은 무엇일까? 어떤 책은 정서를 고양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이나 슬픔과 같은 특정한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 소설이나 시집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이어트나 화장법처럼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쓰인 책도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책도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자기 계발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어떤 책들은 대학 입시를 위해 읽힌다. 청소년을 위해 쉽게 풀어 쓴 고전이나 교양서적 같은 책들이 그 예이다. 이러한 책들보다 더 수준이 높다고 평가되는, 흔히 말하는 ‘교양서’나 ‘비평서’는 이전에 고안된 이론이나 사상에 대해 설명하고, 필자의 의견을 덧붙인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 같은 책을 이 범주로 분류한다.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그 세부적인 구현의 과정에서 약간씩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성의 패러다임의 개입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학은 서로 유사한 모티프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비문학 도서에서 설명하는 이론이나 사상 또한 과거에 누군가가 이미 다루었던 것이다. 토마스 S. 쿤의 저작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러한 타 도서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대부분의 책들은 패러다임을 답습하지만,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함으로써 쿤은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50주년 기념판 서문을 쓴 인물이자 저명한 철학자인 이언 해킹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위대한 책은 드물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위대한 책이다. 한참 동안 사람들은 이 책이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 중 한 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실제로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영원히.”

<과학 혁명의 구조>는 물리학도이자 철학 연구가였던 쿤이 막 불혹에 접어들었을 무렵인 1962년에 쓴 책이다. 그는 지난 5년여 동안 과학사를 중심으로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 등의 학문을 통합한 과학혁명 모델을 구상해 왔는데, 그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메시지는 분명하다. "과학에서의 혁명은 인간의 순수한 진리 추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의 발전은 단지 패러다임에 대한 답습의 결과일 뿐이다.”

 

앞서 말한 진술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쿤이 주장하는 과학 발전의 구조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쿤은 과학 발전의 구조가 4단계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과학자, 혹은 그에 준하는 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토대 격의 이론, 연구, 이슈의 집합체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단계에 진입한다. 이 단계에서 과학자는 풀리기 어려운 난제들-쿤은 이를 변칙(anomaly)라고 일컫는다― 에 직면하고, 그러한 변칙들은 제 2단계인 위기(crisis)를 낳는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복수의 패러다임이 등장하며 그 패러다임들이 대결하는 과정에서 제 3단계인 과학 혁명(science revolution)이 등장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면 발전의 마지막 단계인 새로운 정상과학의 단계가 도래하고, 이는 또 다시 한 번 과학 발전의 단계가 시작되도록 한다. 이러한 과학혁명의 구조에는 ‘패러다임’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연구를 하게 된 동기가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욕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들은 기성 과학자들의 연구, 이론, 학설 등의 ‘패러다임’에 동화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학문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이 책의 출간이 독자들의 사상뿐만 아니라 언어 습관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쿤이 저서에서 그 단어를 핵심적으로 다루기 전까지만 해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사어(死語)에 가까웠다. 간간히 대학 강의에서만 등장했을 뿐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어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이래로 50여년이 경과한 지금,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책이나 논문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의 패러다임’, ‘패러다임 전환’ 등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정상과학’이나 ‘퍼즐 풀이’, ‘변칙현상’과 같은 용어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필자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함으로써 쿤은 ‘패러다임을 창조했다”고 진술하였는데, 이 문장은 사실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쿤은 과학사의 발전을 설명하는 학설을 제시함으로서 과학 이해의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에 새롭고 심층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그 단어를, 어떤 맥락에서는, 창조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 책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어놓았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 혁명의 구조> 이전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철학이 실증주의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자들의 선택과 결정이 기존의 과학자 집합에서 생성된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이 책의 출간 당시에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부분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대의 사상가들에게 쿤의 주장은 마치 진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이며, 인간은 유전자가 대를 이어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처럼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처럼 실증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는 사고를 훗날 사람들은 구조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사례에서도 하나의 과학적 패러다임이 생성되고, 과학 혁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겠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내용의 불확실성이다. 혹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며, 이를 번역자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원문의 문장구조나 형식이 난해하였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 교양서로서 이 책이 가지는 단점이기도 하다. 일반인뿐 아니라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까지도 <과학 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는 이 책이 대중교양서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오토 노이라트의 <백과사전> 시리즈의 일부로 처음 쓰였다는 점을 참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쿤이 이 저술을 다듬어 대중을 위한 과학 교양서를 펴내거나 해제를 출판했다면 대중이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용의 불확실성은 이처럼 참작가능한 부분이나, 용어 사용에서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 한 페이지에도 몇 번씩 나올 정도이지만 그 명확한 정의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 표현의 문맥적 의미 또한 약간씩 다르다. 실제로 1966년 마거릿 매스티먼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21가지 용례’로 사용되었다고 역설했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의 여러 뉘앙스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구분과 피드백이 이뤄졌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과학 혁명의 구조>는 이언 해킹이 말했듯 ‘위대한 책’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과학의 역사와 발전이 타 학문의 발전과 유사한 경로를 취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여러 시사점을 안겨준다. 인류 문명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는 다윈의 진화론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하나의 의미 있는 터닝 포인트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향후 과학자의 길을 걸을 학생들,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 그리고 학문의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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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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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에게는

또다시 세상에

한 사람의 준이 사라졌다고

차마 말해줄 수가 없어 오늘은

 

아아 그래 너의 부고는 아홉 사람을 거쳐 비로소 나에게로 전해졌구나 너에게 맞는 옷 또한 이 세상에는 부재하여 너는 존재하지 않는 몸을 공허로 감싼 채 매트리스 없는 침대 위에 뉘였다 그들의 카메라는 너의 부재를 촬영할 수 있었으나 이미 휘발하여 바람에 섞인 너의 언어는 차마 해독할 수 없었으므로 너의 육신은 기록되어지나 너의 정신은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젠가

머리가 반쯤 벗겨진 교수가 되어

연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말하겠지-

 

사진의 사체에서는 전형적인 지상시체 손괴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망과 동시에 부패는 시작됩니다 부패한 사체에 모여든 파리는 코건 입이건 귀건 축축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알을 낳습니다 구더기는 자라 파리가 되고 파리가 되어 알을 낳고 알은 다시 자라 구더기가 되고 다시 파리가 되어 알을 낳고 그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구더기는 사체를 파먹어 이렇게 종내에는 뼈와 머리털을 빼곤 무엇도 남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그런 것입니다

 

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은

또다시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차마 너의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어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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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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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이별을 해두었습니다.

 

떠나지 못한 기억은 떠나온 기억만큼이나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찾은 겨울 산을 아직 기억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나는 당신으로부터 열두 걸음 떨어져 걸었습니다. 정상에서 하류로 하류로 하염없이 몸을 내던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당신은 너도 이젠 어른이 되어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채 녹지 않은 살얼음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잽싸게 파고들었습니다. 나는 늙지 않는 나라를 찾아 떠났다는 옛이야기 속 소년의 마음으로 영원히 아이이고 싶다고 대꾸했습니다. 당신이 무어라도 대답하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살았던 초인종이 고장 난 집에서 아직 나는 홀로 살았습니다. 나는 종종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곤 했고 대문 앞에 설 때는 오랜 버릇으로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리듬으로 문을 두드리곤 했습니다. 문 건너의 당신은 부재했으므로 나는 열쇠를 찾아 주머니 속을 헤메었습니다. 텅 빈 가정은 새벽 네 시의 버스 정류장보다도 고요했습니다. 언젠가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없는 세상은 죽어버릴 꺼야 하고 말했던 어린 나를 아직 기억했습니다. 달은 적당히 무르익었고 밤은 적당히 깊었고 그럴 때에 적당히 뜨거운 물에 적당히 검붉어진 팔목을 담그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덧) 방어흔과 주저흔은 자살과 타살의 여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이다. 주저흔은 자살을 목적으로 스스로의 몸에 가했으나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 자해의 흔적이다. 반면 방어흔은 타인에 의한 공격을 방어할 때에 생기는 상처이다. 이 둘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의 흔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나, 그 저항의 대상은 상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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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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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번 겨울 우리 시(市)에는 유달리 눈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흘러 어느새 1월도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면 선생님께서는 5년 동안 국어 교사로서 교편을 잡으시며 저와 동생을 연이어 가르치셨던 중학교를 떠나십니다.

 

선생님께서 꽤 오래도록 K시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먼 지역의 학교로 전근하게 되실 것이라는 것을 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반쯤 농담조로 ‘그런데 너희 누나는 왜 2년 전 스승의 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 거니,’ 라고 물으셨다는 것도요. 집에서 도보로 삼 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인데. 고등학교 생활이 아무리 바쁘다지만 일찍 마치는 날도 일 년에 한두 번은 분명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오래도록 찾아가지 않았을까 하고 저 또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마 그건 제가 아직 자랑스러운 낯으로 선생님을 찾아가기에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하나 뚜렷하게 성취한 것이 없는 저는 차마 선생님을 마주할 수 없어 때때로 중학교 뒷편 산책길의 변두리에 홀로 서 선생님이 계실 3층 교무실을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3년 전 이맘때, 제가 지금 재학 중인 고등학교의 예비소집이 있었지요. 그 해 저희 집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저는 5년 동안 준비해온 학교에 지원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준비 기간 중 절반 이상을 함께 하신 선생님께선 그 무렵 저의 절망을 함께 느끼셨을 겁니다. 제 생활기록부의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과 행동발달사항을 꼼꼼하게 챙기느라 종종 늦게까지 학교에 계시곤 하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죄송함으로 쭈뼛거리던 제게 인생은 새옹지마이니, 낙담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건네셨지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몇 주 동안 지역의 모든 고등학교에 상담 전화를 돌린 끝에 한 고등학교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이 학교는 점점 성장하고 있는 학교이고, 진학실적도 꽤 좋아. 내가 네 이야기를 했을 때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었고. 그리고 수석 입학생에겐 3년 동안 장학 혜택을 준다더구나.”

몇 달 간 공부를 손에서 놓았던 저는 선생님의 수고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전교생 대표로 선서를 하고 장학 증서를 받았을 때는 선생님의 기뻐하실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그렇게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저는 2년을 보냈고, 이제 ‘고 3’이 되었습니다.

 

 

선배들의 수능 성적이 나오고 수시 결과가 속속 발표되자, 학교의 관심은 자연스레 저희 학년으로 향했습니다. 처음으로 진로상담실에서 3학년 부장 선생님과 독대하던 날을 기억합니다. 20여 년 전까지 방송실로 쓰였다는 그곳은 높고 넓었으며 위압적일만큼 근사했습니다. 그 공간의 화려함과 적막함은 수년 간 학교의 입시를 진두지휘해 오신 부장선생님의 아우라가 더 크게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지금 졸업하는 너희 선배들은 뛰어났던 위 기수와, 그보다 더 뛰어난 너희 기수 사이에서 늘 비교당하는 학년이었지. 그치만 보렴, 이번에 그 아이들이 우리 시에서 가장 많이 서울대를 갔지 않니. 의대도 많이 갔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너희 학년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특히, 가장 뛰어난 너희 기수 중에서 가장 우수한 너와 P에겐 더더욱.”

저는 계면쩍게 하핫 하고 웃는 것으로 답했고 선생님은 말을 이으셨습니다.

“너와 P는 둘 다 의대를 지망하는구나. 너는 어느 과 전공의가 되고 싶니? 아마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싶겠지?”

선생님은 아마 제가 중학교 때 소설을 쓰고 토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A의학에 대해 아실 겁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저는 줄곧 A의학자로의 미래를 꿈꿔 왔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A의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어요. 지난 2년 동안 거기 맞춰서 비교과 활동도 했고요.”

“A의학?”

반문하시는 부장 선생님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고등학교의 선생님들께선 줄곧 제가 A의학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을 염려하시곤 하셨습니다. 2년 동안 저를 가르치신 S 선생님은 요즘 제 얼굴만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요.

“곧아, 그보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뇌 과학자가 되겠다고 해라. 요새 이국종 교수가 언론에 자주 나오니까, 외과 전문의가 되어서 외상센터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도 좋고. 아니면 차라리 P처럼 ‘임상의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떤 과를 전공할지는 대학에서 공부한 후에 정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던지.”

뇌 과학자와 외과 전문의는 근래에 의과대학에 진학한 선배들이 자기소개서에 적은 희망 직업이었습니다.

“저와 선배들은 다르잖아요. 저는 외과의도 뇌 과학자도 그리 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로 그 직업을 희망하는 학생과 비교되었을 때 그들보다 우세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A의학은 전공자가 적지만, 의대를 졸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학문이고요. 또 제가 확실한 꿈이 있는 상황에서 P처럼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은…”

“네가 대학을 가서 A의학을 하든, 검사가 되던, 학교 앞에 문방구를 차리든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의대에 합격하는 것이 문제잖니… P는 영리한 선택을 한 거야.”

 

제 생활기록부에 꼼꼼히 밑줄을 치며 읽으시던 3학년 부장 선생님의 첫마디는 다른 분들의 것과는 사뭇 달라, 제게 희망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곧아. 네가 A의학과 관련되어서 한 활동은 다른 지원자와 차별화되어 있어서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과생은 흔치 않으니까.”

“네…”

“그런데… 네가 하고자 하는 A의학은 변두리의 학문이잖니. S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국종 교수의 활약은 의사를 꿈꾸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수 있는 거야. 자연스럽다고. 그런데, 변두리의 의학인 A의학을 하고 싶다는 너의 말을 교수들이 믿어줄까?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대학은 학교를 빛내 줄 아이를 원해. 넌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어.”

‘변두리의 의학.’  물론 선생님께서 저를 위하는 좋은 마음과, 퇴근 후에도 저와 관련된 서류를 읽어보시는 정성으로 하신 말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두리’라는 단어는 마치 여름철의 반쯤 녹은 아스팔트 도로와 같은 감각으로 저를 휘감았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반에서 대청소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교실을 비워주기 위해서였겠지요. 한 아이가 교실 뒤편 칠판에서 떼어낸 환경미화용 장식을 한 움큼씩 복도의 쓰레기통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희망 대학과 학과를 적어 코팅한 색지였습니다. 무심코 그 옆을 지나가던 저는 언뜻 본 두 단어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그 꿈의 주인은 저도 알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저희는 소설과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습니다. 여름 즈음에는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말도 언뜻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의 꿈이 잠시 부러워졌습니다.

 

문집부원 모두가 어두워질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중학교 2학년의 여름이 떠오릅니다. 학생들이 투고한 글을 세련되게 다듬는 것은 저와 선생님의 몫이었지요. 글을 고치며 우리가 한강과 김영하와 김훈에 대해, 그리고 톨스토이와 오웰에 대해 오래도록 나눈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 때의 어리고 철없던 제가 꾸었던 꿈도요. 멀지 않은 미래에, 그러니까 한 스무 살쯤에 화려하게 등단해 굉장한 베스트셀러를 써내어 위대한 대문호로 역사에 오래도록 남는 꿈이요. 초등학생 때부터 저는 선배들보다도, 선생님들보다도 글을 잘 쓰는 아이였으니까요. 글쓰기 대회에서는 꼬박꼬박 상을 받았었습니다. 아, 두어 번 떨어지기도 했었군요. 그러나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심사평에 제 글이 초등학생의 글로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숙해 어른들의 손길이 닿았거나 남의 글을 베낀 것으로 의심되어 심사에서 제외했다는 말이 있었지요. 그것을 보며 저는 어린아이의 자만과 허영으로 심사위원들의 단편성과 어리석음을 비웃고 우쭐해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저는 제가 누군가를 비웃을 만큼의 문학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제게 글을 잘 쓰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회의 일부가 된 후부터였습니다. 주변의 여러 분들이 제게 원한 건 오히려 로봇처럼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고 과학이론에 통달한 이과 우등생의 모습이었습니다. 문예창작과 혹은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고 싶은 친구들은 백일장이나 문학 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종종 결석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출전한 대회 중에는 제가 중학생 때 고등학생이 되면 한번쯤 가보겠노라고 생각한 곳도 있었지만, 저에게 그러한 결석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문학적 교류와 체험이 그들의 업이었다면, 저의 업은 책상에 붙박인 듯 앉아 연습장 빼곡히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아이들은 저보다 더 오랜 시간 필사와 습작을 했고, 창작 과외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곧 진학할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아마 비슷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감화시키고, 제가 접할 수 없는 여러 가지를 함께 배우겠지요. 그들과 비교해 제 글이 인상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종종 불안해지곤 했습니다.

 

한번은 국어 선생님께서 어느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어 학생들이 그 분의 작업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평소였더라면 문과 친구들의 비교과 스펙을 빼앗는 것이라는 생각에 망설였겠지만, 문과 아이들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저는 그 문학기행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국어 선생님께서는 제 지원서를 다시 돌려주시곤 말씀하셨습니다.

“곧아. 네가 지금까지 해 온 비교과 활동 중엔 ‘문과’스러운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래서 자칫 네 생기부가 너무 난잡하게 보일 수도 있어. 이 애가 문과를 희망하는 앤지, 이과를 희망하는 앤지 헷갈릴 정도로… 확실한 건, P는 전체 내신은 너보다 낮지만 수학과 과학만 놓고 보았을 땐 너보다 훨씬 내신이 높다는 거야. 활동도 너보다 적지만 이과에 집중되어 있고. 넌 어중간해. 사정관들이 보았을 때, 과연 누구를 더 좋게 평가할까?”

어중간하다, 라는 다섯 음절의 말이 제 2년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내려진 평가였습니다. 저는 감히 의학의 변두리를 꿈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과의 변두리이자, 문학의 변두리였고, 어느 쪽에도 확실히 소속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저의 모습이 선생님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무서워 지금까지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어쩌다가 저는 ‘변두리’에 불과한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를. 모든 것은 제 욕심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원하는 것을 잠시 물릴 줄 몰라 아무것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제 미련에서 말이지요. 아마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더랬지요.

‘욕망으로부터 슬픔이 생기고, 욕망으로부터 고통이 생기니. 욕망하지 않는 자에게는 슬픔도 고통도 없으리라.’

욕망하지 않는 것. 그것은 A의학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면접관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을 의미할 터입니다. 또한 그것은 소설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 연습과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할 터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어떤 것도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변두리와 변두리, 그리고 변두리를 이으면 하나의 교점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 교점이 바로 제 삶의 중심입니다. 다른 모든 것의 변두리에 있어도 삶에 있어서는 언제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제 ‘욕망’을 버린다면, 전 제 인생에서조차 변두리에 머무를 뿐일 테니까요. 물론 그에 상응하는 ‘슬픔과 고통’이 무엇일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면접관을 설득할 수 있도록 A의학에 대해 더 공부하고, 수시 전형으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정시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지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그리고 그로 인해 수학 등급이 떨어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지요. 쉽고 곧은길을 두고 험한 길을 선택한 저를 바보스럽다고 여길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불구불한 길만이 제 삶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길이 끝나면 꼭 선생님을 다시 만나러 가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아무리 먼 곳으로 전근가시더라도, 저도 일 년만 있으면 성인이니까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때까지 부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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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기 전에(윤별)’에 덧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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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기 전에(윤별)’에 덧붙여

 

 

원문: https://teen.munjang.or.kr/archives/100699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11월 수필 부문 월장원인 윤별의 ‘연극이 끝나기 전에’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쨌든 문집은 만들어져야 한다.”

이 글을 읽을 무렵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부장으로 있는 토론 동아리에서는 11월쯤에 문집을 펴낼 예정이었다. 수익금은 작년처럼 비정부단체에 기부할 예정이었고, 기부 행사를 진행하고 봉사 시간을 받기로 단체 측과 협의도 다 해 놓은 상태였다. 문집 발간에 사용되는 비용도 학기 초에 행정실에 청구해서 학교 측에서는 우리를 위해 얼마간의 예산을 떼 놓았다. 비용 한푼 들이지 않고 부원들의 스펙도 쌓아주고, 의미 있는 기부도 할 수 있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다만 한 가지,

 

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빼곤 말이다.

 

2학년들은 이미 작년에 해 보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만으로 1학년들에게 문집 일을 일임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나는 1학년들이 알아서 잘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2학년에서 기획하고 있던 다른 동아리 활동을 이끄느라 문집 일에 크게 관여하고자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이 다 가도록 열심히 짜고 있다는 기획안은 나오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9월 모의고사 준비를 해야 해서, 9월 모의고사가 끝나면 중간고사 준비를 해야 해서, 중간고사가 끝나면 수행평가 준비를 해야 해서, 기획안 작성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2학년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파트가 뭔지 알지 못해 글을 써나갈 수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10월 말이 되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1학년 편집부장들을 불러 함께 기획안을 짜고, 부원들에게 분량을 할당해주었다. 부원들을 열심히 재촉한 결과, 다행히 글 취합은 11월 안에 끝났다.

 

복병은 기말고사였다. 기말고사가 끝나자 겨울방학이 2주 앞으로 다가왔고, 편집과 일러스트는 시작도 안 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행정실에서는 우리를 위해 마련해둔 예산을 이미 다른 곳에 써버렸다는 연락이 왔다. 11월에 돈을 사용하기로 해놓고, 12월이 되도록 찾아가지 않아서 다른 부서에 할당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비로 문집을 발간해야 했다. 무를 수도 없었던 것이, 이미 비정부단체에서는 우리 행사를 위해 언제 팸플릿과 포스터를 보내 줄지 묻고 있었고,  중요한 2학년 2학기 내신을 포기하며 문집에 들어갈 글을 쓴 2학년 아이들의 노력이 너무 아까웠다. 1학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보였다. 편집부장들은 자신들의 수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망해 보였다. 2학년들은 1학년이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신들이 3만원씩을 내서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은 1학년들이 중간 진행을 보고하지 않고, 볼썽사납게 일을 그르친 것에 화를 내고 계셨다. 나는 부장으로, 그 세 집단의 중간에 끼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어쨌든 문집은 만들어져야 할 텐데, 라고 되뇌고 있었다.

 

 

그 무렵에 윤별의 수필을 접했다. 글을 쓰지 않은지는 오래 되었지만, 가끔 글틴에 들러 제목이 눈에 띄는 몇몇 작품들을 읽고 나갔던 터였다. 첫 문단부터가 너무나도 그 당시의 나의 상황과 비슷해서, 글의 길이가 제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나갔다. 글쓴이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연극부 부원이다. (아마 수능 직후인 것으로 추정되는)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동아리의 축제 준비는 아직 시작 상태였다. 1학년들이 올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연극은 연습은커녕 대본조차 덜 쓰여 있는 상태였고, 귀신의 집을 꾸미기에 필요한 박스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수능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선배들마저 우려할 정도였다. 마침내, 글쓴이를 포함한 2학년들이 1학년들의 연극에 도움의 손길을 주기로 합의했다. 축제 2주 전, ‘장면 전환이 아홉 번이나 있을’ 정도로 엉망인 1학년들의 대본을 고치는 데에 그들은 야자 시간을 바쳤다. 호랑이 선생님조차도 그들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 주셨고, 1학년들은 2학년들의 제언을 열심히 메모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공연의 진행에 실낱같은 빛이 보이는 듯 했으나, 이튿날 그들은 다시 절망을 맛보게 된다. 1학년들은 ‘놀리는 인력이 없어야 한다’며 두 팀으로 나누어 대본을 수정하고 있었고, 결말을 어떻게 낼지를 의논하느라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대본은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흡사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들 같다’고 생각한 글쓴이는 과외를 빼고 학교에 남아 1학년들을 모았다. 그러나 모인 1학년의 수는 2학년의 수보다 적었다. 결국 모인 이들은 대본을 더 진척시키는 대신 3학년들이 써 놓고 상연하지 않은 대본으로 연극을 준비해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 연습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습 참여율은 저조했다. 1학년들 사이의 갈등도 고조되어, 더 이상 연습에 나오지 않겠다고 나가버린 학생도 있었다. 박스를 주우러 나간 학생들은 폐지 줍는 노인들의 생계수단을 빼앗는다는 민원을 받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연습은 계속되었고, 연극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 무렵 1학년 부원들이 2학년들도 무대에 올라올 것을 제안하고, 함께 군무를 연습하며 그들은 밝음을 되찾았다. 수능이 한 주 연기된 터라 그들의 축제도 따라 연기되었다. 거의 준비가 끝났음에 안도하면서도 글쓴이는 이제 고3이 된 자신이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을 느끼곤 했다. 수능 당일, 그들은 밤늦게까지 연극 연습을 하고, 귀신의 집 세팅을 했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다. 연극부원들은 하나가 되어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윤별의 ‘연극이 끝나기 전에’가 수필로서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섬세한 묘사일 것이다. 이 글에 직접적으로 알파벳으로 이름이 표기된 인물만 해도 열두 명 남짓이나 될 정도이다. 글쓴이는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고, 연극부원 각자의 감정에 일일이 초점을 맞춘다. 이 수필에는 유독 인물들의 대화 장면이 많은데, 그 점이 이 글이 그 자체로도 하나의 희곡인 것처럼 읽히게 해 준다. 대화 장면은 또한 갈등을 부각시키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가령, 비상소집 때에 2학년들보다 적게 모인 1학년 부원들을 향한 2학년 부원 J의 말(“우리도 이제 수능 준비해야 하는데 너희 도와주러 나왔지. 그런데 지금 일 학년들 나온 애들 거의 없지. 나오는 애들만 나왔잖아… 아니. 다 제치고. 연극, 하고 싶긴 한 거야?”)과 J를 말리는 글쓴이의 말(“야, 진정하고, 감정적으로 가지 마.”)은 장면에 싸한 긴장감을 부여하며 이 글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여러 인물의 대화를 통해 사건이 전개되므로, 글의 분량은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 수필에 나온 모든 인물들과 그들의 말은 전후의 사건과 긴밀하게 엮여 있어서, 하나가 빠지면 나머지도 균형이 맞지 않고 허물어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량이 일반적인 수필에 비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이를 줄이기 위해 비교적 불필요해보였던 일부 상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더라면 글의 정체성 내지는 매력이 지금보다 훨씬 덜 느껴졌을 것이다.

 

이 글은 타 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글쓴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묘사하는 수필의 본연적인 목적에도 충실하다. 글쓴이는 마치 한 편의 희곡이나 소설 같은 이 수필에서 1인칭 주인공과 1인칭 관찰자를 오가며 주변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심리상태를 담백하게 적어 내린다. 글쓴이는 특히 타 인물들에 대해 함축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평가를 내리는데, 그 방식에서 탁월함을 보인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글의 막바지 무렵, 2학년들도 연극 무대에 서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글쓴이가 2학년 기장 Y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이다. 부원들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Y에 대해 글쓴이는 “내가 누구를 봐서 해 주는 거야, 라는 말에서 누구를 맡고 있는 것만 같았다,”라고 말한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부터 감상을 쓰기 위해 재차 반복해 읽을 때까지, 저 문장은 한결같이 나를 잡아끌었다. 내가 누구를 봐서 해 주는 거야, 라는 말의 ‘누구’를 맡고 있다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독자는 Y가 어떠한 성격인지, 교우관계는 어떠할지, 학급이나 동아리에서 어떤 존재일지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긴 대화로도, 한 줄의 묘사로도 글을 진행해나갈 수 있는 글쓴이의 역량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만 이 수필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말부가 도입부나 전개부에 비해 빈약하다는 점일 것이다. 수필은 1학년 부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고, 2학년 부원들이 Uptown Funk를 추기 위해 무대 구석에서 대기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 직전의 장면은 1학년 부원들이 핀 마이크 착용과 리허설 등 최종적인 준비를 하는 동안 2학년 부원들이 귀신의 집을 보수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학교 관리인과의 잠깐 동안의 대화(“여기 왜 안 열려!”/“아, 선생님, 저희 오늘 귀신의 집요!”/“으엥, 오늘 축제여?”/“네, 오늘 밤까지만 쓸게요, 선생님!”)까지도 대화 형식을 빌려 세세하게 묘사하였던 종전과는 달리, 이 두 개의 장면은 합쳐서 15줄이라는 짧은 분량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수필의 주제가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글쓴이가 연극 당일에 대한 묘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A4 14장에 달하는 긴 호흡의 글을 이끌어온 글쓴이가 마지막에 이르러 지친 것일 수도 있겠다. 일반적인 분량의 수필이라면, 15줄짜리 결말은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기 전에’는 타 수필에 비해 도입과 전개가 압도적으로 길기 때문에, 결말이 급하게 지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1학년들의 엉망인 연극 못지않게, 준비가 덜 된 ‘귀신의 집’도 수필의 전개에 한 획을 차지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결말부에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종 리허설 때까지 2학년 부원들이 박스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수할 정도로, 귀신의 집은 연극부의 축제 준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공들여 만든 귀신의 집이 축제 때 어떻게 되었는지는 수필이 끝날 때까지 제시되기 않는다. 어쩌면 글쓴이가 말하는 귀신의 집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축제 때 진행하는, 놀이공원 귀신의 집의 미니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관객의 흥을 돋우기 위한 강당 세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수필의 맨 처음에 글쓴이는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라고 말한다. ‘귀신의 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부분이 미흡하게 다루어진 것이 다소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필은 매우 잘 써진 글이다. 글쓴이의 문학적 재능과 기교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글의 진정성과 보편성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글쓴이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고민과 생각은 어떤 환경과 나이의 독자든 굳이 동아리 활동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 중에서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것들이다. 특히 비슷한 나이대의 청소년들은 이 글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나는 예비 고 3으로서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상황에 1학년들의 연극을 위해 발 벋고 나서야 하는 상황에 놓은 글쓴이에게서 남들이 수능 기출을 풀 때 밤새도록 빨간 플러스 펜을 들고 부원들의 글을 교정하고 있던 나 자신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 삼 학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연극부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쓴이의 한탄은 나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었다. 1학년 부원들 대다수가 회의에 불참했을 때 글쓴이가 한 ‘화를 내고 싶었는데 온 후배들의 잘못이 아니라 오지 않은 후배들의 잘못이었고, 사실 지금까지 이만큼 온 건 그 자리에 있는 일학년들이 없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할 테였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라는 독백은 초기 편집회의 때 1학년 부원 몇몇이 각종 비교과 행사를 이유로 불참했을 때 내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 생각과 비슷했다.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공감하고,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을 쓰는 윤별은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내내 건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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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봄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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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방관.

 

그것은 류봄이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6년의 긴 시간동안 터득한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는 것에 그녀는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이 들기도 했지만, 방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이제는 경영 부실로 인해 폐교된 지방 사립대학의 의대를 졸업했다. 그 대학에 부속 병원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졸업이 다가올 무렵 그녀는 타 대학병원에 인턴 지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인 U 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동기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정신의학과 과장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칙대로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성과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이면 류봄은 종종 새벽에 악몽을 꾸다 깨어나곤 했다. 늘 같은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정신과 레지던트 3년차였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던 날이었다. 30살의 그녀는 의국의 열린 문틈으로 레지던트 4년차 선배인 C가 당시 정신의학과 과장이었던 P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P는 바닥에 쓰러진 C를 발로 걷어차고 밟으며 환자들 앞에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저 정도로 맞았으면 분명 온 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류봄은 어느 순간 신음을 참고 있던 C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P도 그녀를 발견했다. P는 점잖게 헛기침을 한 후 류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다가와 방문을 닫았다. C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P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다는 민원을 넣은 것은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다. 마침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터라,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폭행민원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전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된 그녀는 경찰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반차를 내고 병원 현관을 나서던 류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P와 마주쳤다. P는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조사에서 류봄은 P가 C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P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C의 주장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고, P에게 레지던트 폭행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U대학교 부속 병원은 정직하고 훌륭한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병원 내에서 C의 평판은 바닥을 찍었다. 그 일이 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C는 치사량의 포타슘을 자신의 정맥에 주사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년 후에 류봄은 U대 병원의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고, 그녀의 커리어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시피 했다. 몇 년 뒤 P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였을 때, 그는 류봄에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병원 직원 중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이었지만, 류봄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식 의사가 되고 만 1년이 지났을 때 결혼을 했다. 상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소개받은 선배 의사였다.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류봄이었기에, 결혼생활 또한 순조로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시부모는 류봄에게 검사를 받아볼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불임 판정을 받았고, 그러자 남편 측은 이혼을 요구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라고 류봄은 한산해진 진료실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류봄은 구내식당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혼자 밥 먹는 것에는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묵묵히 홀로 밥을 먹는 것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어쩐지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철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류봄은 병원 근처의 제육볶음이 맛있는 백반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류봄과 연배가 비슷한 여자가 혼자 꾸려나가는 식당이었는데, 아이가 백혈병으로 U대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는 어느새 서로 반말로 농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쩐지 느끼하고 몸에 안 좋아 보이는 걸 먹고 싶어, 라는 마음의 속삭임에 류봄은 병원 1층의 햄버거 프랜차이즈로 향했다.

 

류봄은 치킨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점원은 이번 달 프로모션입니다, 라고 말하며 버거와 캐릭터 열쇠고리를 함께 건넸다. 하얀 바탕에 까만 눈, 역삼각형 모양의 까만 코를 가진 토끼 캐릭터였고, 몸통에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무심히 테이블에 열쇠고리를 내려놓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던 류봄은 자기 쪽을 바라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소아병동 환자인 것 같았다. 류봄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은 평생 낳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류봄은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게임중독 청소년이나 자폐를 가진 어린이들이 진료실을 찾아오면 괜히 서랍에 넣어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쥐어주곤 했다.

 

“아줌마, 이 토끼 뭔지 알아요?”

햄버거를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류봄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소아병동 아이는 류봄 맞은편에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니, 모르는데, 라고 류봄은 대답했다.

“그러면요, 여기 이거는 얘 입이게요, 코게요?”

아이는 류봄이 코라고 생각했던 토끼 얼굴의 역삼각형 모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코 아니야?”

“땡! 이건 얘 입이에요!”

아이는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난 이게 얘 코인 줄 알았어. 입이라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데”

“그거는 얘가요, 슬퍼도 안 슬픈 척 웃고 화나도 안 화난 척 웃고 있어서 그래요. 얘는 맨날 이렇게 웃으면서 방방 뛰어다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얘가 맨날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해요. 저도 약간 그렇거든요. 그래서 얘가 저 같아서 좋아요.”

류봄은 아이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초등학생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 아이인데, 그런 어린 아이 입에서 어째서 저런 말이 나올까. 저 애의 삶도 순탄치 않았나보다, 하고 류봄은 생각했다.

“이름이 뭐야?”

“얘 이름은 오버액션토끼에요.”

“말고, 네 이름말이야.”

“저는 이세민이에요! 저 병원에 엄청 오래 있었는데요, 아줌마 지나다니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아줌마 의사죠?”

“어떻게 알았어?”

“지금 가운 입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우리 엄마 식당 올 때도 맨날 가운 입고 왔잖아요. 와서 맨날 제육볶음만 먹고 가잖아요. 히힛”

세민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혹시…. 네가 백반집 아이니?”

“네! 전 아줌마 몇 번 봤는데, 아줌마는 기억이 안 나나 봐요. 쪼금 섭섭하다.”

류봄은 미소를 짓고는 이 열쇠고리 너 가질래, 라고 세민에게 물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돼요? 저도 하나 받았긴 한데요, 병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도 하나 주고 싶었는데, 치즈버거 세트를 한 개 더 사먹을 돈이 없었어요.”

“그럼 이거 가져가서 친구 줘.”

“감사합니다! 제 친구 이름은 안수하에요! 나중에 수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류봄은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배꼽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류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후로 몇 번 류봄은 병원에서 세민을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괜히 반가워 몇 마디씩 말을 건네곤 했다. 처음엔 세민도 제법 붙임성 있게 대답을 해 주었다. 어른스럽지만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여서, 은연중에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고 귀여운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의 표정이 시나브로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류봄은 병원 로비를 유령처럼 배회하던 아이를 불러 세워 햄버거 가게에 앉혔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우울해 보이냐는 류봄의 물음에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햄버거 세트에 따라 나온 오버액션토끼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렸다.

“…… 수하가 사라졌어요. 우리 아지트에도 안 찾아오고, 병원을 다 뒤졌는데도 안 보여요.”

“저번에 말한, 네 친구 말이야?”

“네….”

“글쎄…. 퇴원한 거 아닐까? 건강해져서.”

“아니에요! 수하는 말도 없이 사라질 그런 애가 아니란 말예요!”

세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선언하듯이 말했다.

“수하는…. 납치된 거예요. 얼마 전에 수하가 그랬어요, 하루 종일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루는 이상한 아저씨들이 수하를 끌고 가서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씌우고 이상한 통에 집어넣었데요. 수하가 막 아프다고 하고 그만하라고 해도 아저씨들은 들어주지도 않았데요. 거기 하루 종일 있다가 풀려났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그랬어요.”

“그냥 MRI 찍고 마취 수술 한 거 아닐까?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치료의 한 부분이야.”

“아니에요! 저도 수하도 MRI도 찍어 봤고 마취도 해 봤는데, 그거랑 진짜 다른 거예요! 자기를 실험용 쥐처럼 다뤘다고 수하가 그랬어요.”

류봄은 세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빛은 진실 되고 절박해보였다. 마치 7년 전의 C처럼. 이 아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거짓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수하라는 아이는 이 아이의 환상 속에서 탄생한 가상의 친구가 아닐까. 이 아이를 믿어줘야 할까. 만약 세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터였다.

“….아줌마, 그 아저씨들 좀 막아 주시면 안돼요? 이러다가 수하한테 큰일이 날지도 모른단 말예요.”

류봄은 도움을 요청하는 세민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피했다.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류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글쎄, 네가 말하는 아저씨들이 누군지 모르겠다. 너무 막연하고 불분명한 정보라서, 그거로는 수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아무래도 나는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구나.”

아무래도 세민은 의사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류봄은 말했다. 세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것이 보였다. 세민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빈 햄버거 포장지를 버리고 일어서 휘적휘적 가게를 빠져나갔다. 늦은 끼니를 때우러 찾아간 백반집에서도 세민은 줄곧 상처 입은 표정으로 류봄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 저 아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류봄은 불현 듯 생각했다. 어쩐지 가슴 한편이 싸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류봄은 스스로에게 잘했어. 잘했어, 류봄, 이라고 되뇌었다. 애초에 저 아이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도 불분명하잖아.

 

그러나 세민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류봄은 곧 알게 되었다.

“소아병동에 안수하라는 애, 소문 들었어?”

의국 앞을 지나가던 류봄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수하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류봄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의국에는 레지던트 몇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류봄은 커피를 타 마시는 척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를 의식한 레지던트들이 거의 속닥거리다시피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약물, 의료사고, 인격 장애, 실험, 연구 같은 단어들만이 드문드문 들려왔으나, 그 단어들만으로도 사건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류봄은 원두를 내리며 슬금슬금 레지던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홍세연 연구원이랑 박민철 쌤?”

한 레지던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류봄의 눈치를 살피더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류봄은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한 레지던트들은 어느새 류봄의 존재를 망각한 듯 했다.

“미쳤다…. 박민철 그 인간은 인간쓰레기를 넘어서 핵폐기물 아니냐?”

“글니까, 나 인턴 때 말야, 그 인간이….”

홍세연과 박민철은 류봄도 아는 작자들이었다. 전자는 U대 의대 부설 연구소의 연구원, 후자는 같은 병원 소속 의사였다. 홍세연과는 병원과 연구소가 함께 하는 망년회나 단합회 때 몇 번 마주쳤는데, 류봄은 그의 모습이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박민철은 여러모로 P 교수를 닮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무능력하기까지 해서 근래에도 의료사고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그 콤비가 안수하를 모르모트로 삼아 수상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에 엮이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류봄의 이성이 속삭였다. 류봄은 의국 밖으로 슬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인간들한테 붙잡혀 있다면, 안수하라는 그 아이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갑작스럽게 울린 휴대전화 벨소리에 류봄은 흠칫 놀랐다. 백반집 여자였다.

 

류봄은 진료실 책상에 눕듯이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백반집 여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거기엔 안수하의 근황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선뜻 안수하를 구하는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말한 10분 전의 자신의 모습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녀의 이성이 소리쳤다. 도대체 뭐 하고 싶은 거야,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류봄은 멍하니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몇 주 전 세민에게 받은 쪽지가 책상에 붙어 있었다.

‘아줌마, 엄마가 아이스 홍시 사 놨대요. 오늘 꼭 식당에 놀러오세요! 수하도 나중에 꼭 소개해 드릴게요! -이세민-’

쪽지에는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조약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류봄과 두 아이, 그리고 예의 토끼 캐릭터로 추정되는 난해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에서 안수하와 이세민은 풍선을 손에 들고 밝게 웃고 있었고, 류봄의 등에는 하늘색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류봄은 한 손으로는 오버액션토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세민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들려오는 빗소리에 류봄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7년 전 그날만큼이나 세찬 비였다.

 

이튿날 오후에 류봄은 반차를 내고 백반집을 찾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삐걱거리는 문을 여니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이제 어쩔 셈이냐, 류봄의 이성이 조소하듯이 물었다. 한눈에도 연륜 있는 학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U대 의대 연구소 소속 류혁진입니다. 이쪽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신임 연구원 한도윤 양입니다.”

“아…. U대 병원 정신의학과 과장 류봄입니다.”

“세민이 어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수하…. 도와주신다고 하셨다고…..”

“네…. 일종의 의료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하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특수하고 비범한,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요. 그러자 U대 의대 연구소에서 수하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다소 비윤리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고 …. 전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해당 연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연구과정에서 연구 대상인 안수하 양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규명하려고 합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연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안수하 양에게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네, 저도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지요?”

“선생님은 병원 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시지요. 그리고 기자나 의료계 인사들과도 면식이 있으시고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수하를 대상으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연구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외부에 알려주십시오. 연구소는 폐쇄적인 곳입니다. 외부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어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이곳은 홍세연 연구원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절망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판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수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

“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저희가 캐낸 해당 연구 관련 자료와 수하 양의 능력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험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보내드린 자료를 읽어보신 후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메일주소는…. 여기 있습니다.”

류봄은 주머니를 뒤져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명함을 꺼내 류혁진에게 건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드려요, 류봄 선생님.”

한도윤이 말했다. 류봄은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세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꼭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라고 말하며 류혁진이 악수를 청했다. 류봄은 그의 손을 힘껏 잡고 흔들었다.

 

장맛비에 사람들의 발이 묶인 것인지, 오후의 진료실은 한산했다. 류봄은 한참 동안 류혁진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그녀의 이성이 중얼거렸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류봄은 이성의 물음에 답했다. 그녀는 류혁진이 보낸 메일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파일에는 연구에 대한 상세 정보와 연구의 진행 상황에 대한 자료와 함께 틈틈이 몰래 찍은 것 같은 스냅 사진들도 들어 있었다. 류봄은 그 사진들을 통해 안수하를 처음으로 대면했다. 앙상하고 괴로워 보이는,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앳된 아이였다. 아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표정은 무표정했다. 류봄은 휴대폰 연락처를 뒤져 도움에 될 만한 번호들을 찾아냈다. U대 병원의 최연소 정신의학과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PD와 기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렸던 모양인지, 그녀는 의학 다큐멘터리나 육아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였고, 몇몇 신문에 칼람을 연재한 적도 있었다. 성공의 척도로만 생각했던 그 경력들이 뜻밖에 이런 일에 도움이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류봄은 기자들에게 류혁진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U대 병원은 비윤리적인 생체 실험을 중지하라’

‘아이를 풀어주고, 연구책임자는 사임하라’

바람에 날려 온 대자보 조각이 발에 채였다. 언제나 말끔했던 병원은 며칠 사이에 꽤나 을씨년스러워졌다. 소식이 알려진 후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병원 앞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퇴원수속을 밟고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 일을 언론에 알린 것이 류봄이라는 사실은 곧 병원과 연구실 전체에 퍼졌다. 몇몇 간호사와 의사들은 류봄이 지나갈 때마다 역병을 보듯이 피했다. 류봄은 허리를 펴고 꼿꼿이 걸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환자가 많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료실은 하루 종일 한산했다.

 

궁지에 몰린 홍세연과 박민철은 사건이 공론화되고 사흘이 흐른 후 안수하를 풀어줬다. 안수하의 모친은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반집 여자가 임시로 안수하를 맡기로 결정되었다. 안수하의 치료와 교육은 류혁진이 전담하게 되었다. 안수하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주로 제일 친한 친구인 세민과 시간을 보냈다. 세민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끔 병원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세민은 씩씩하게 말을 붙여왔다. 그럴 때 마다 류봄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류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부스를 철거하고 짐을 정리해 떠나고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데, 라고 류봄은 중얼거렸다. 류봄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안수하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류봄은 경찰서로 향할 것이다. P의 레지던트 폭행 사건에 대한 진술을 번복하기 위해서였다. P가 C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어째서 그때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지 다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게 불러일으킬 파장에 대해서는 류봄도 알고 있었다. U대 병원의 최연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는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고, 아마 다시는 의료계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세민과 백반집 여자마저 그녀를 꺼려하게 될지도 모른다. 병원의 이미지는 추락할 것이고, 그녀 자신과 은퇴 후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책을 출판해 일약 유명세를 얻고 있는 P 두 사람 다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문득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C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류봄은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묘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건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번에야말로 그를 찾아가야겠다, 술과 꽃을 사서, 그의 묘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 류봄은 두서없이 생각했다. 그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류봄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어리고 미성숙했던 자신은,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줌마! 엄마가 저녁 드시러 오래요!”

세민이 진료실 문을 힘차게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럼 갈까, 하고 류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비는 어느덧 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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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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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방관.

 

그것은 류봄이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6년의 긴 시간동안 터득한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는 것에 그녀는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이 들기도 했지만, 방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이제는 경영 부실로 인해 폐교된 지방 사립대학의 의대를 졸업했다. 그 대학에 부속 병원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졸업이 다가올 무렵 그녀는 타 대학병원에 인턴 지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인 U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동기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정신의학과 과장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칙대로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성과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이면 류봄은 종종 새벽에 악몽을 꾸다 깨어나곤 했다. 늘 같은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정신과 레지던트 3년차였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던 날이었다. 30살의 그녀는 의국의 열린 문틈으로 레지던트 4년차 선배인 C가 당시 정신의학과 과장이었던 P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P는 바닥에 쓰러진 C를 발로 걷어차고 밟으며 환자들 앞에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저 정도로 맞았으면 분명 온 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류봄은 어느 순간 신음을 참고 있던 C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P도 그녀를 발견했다. P는 점잖게 헛기침을 한 후 류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다가와 방문을 닫았다. C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P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다는 민원을 넣은 것은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다. 마침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터라,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폭행민원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전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된 그녀는 경찰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반차를 내고 병원 현관을 나서던 류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P와 마주쳤다. P는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조사에서 류봄은 P가 C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P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C의 주장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고, P에게 레지던트 폭행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U 대학교 부속 병원은 정직하고 훌륭한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병원 내에서 C의 평판은 바닥을 찍었다. 그 일이 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C는 치사량의 포타슘을 자신의 정맥에 주사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년 후에 류봄은 U대 병원의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고, 그녀의 커리어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시피 했다. 몇 년 뒤 P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였을 때, 그는 류봄에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병원 직원 중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이었지만, 류봄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식 의사가 되고 만 1년이 지났을 때 결혼을 했다. 상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소개받은 선배 의사였다.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류봄이었기에, 결혼생활 또한 순조로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시부모는 류봄에게 검사를 받아볼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불임 판정을 받았고, 그러자 남편 측은 이혼을 요구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라고 한산해진 진료실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류봄은 구내식당 대신 병원 근처 상가에 있는 햄버거 프랜차이즈로 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혼자 밥 먹는 것에는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묵묵히 홀로 밥을 먹는 것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류봄은 치킨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점원은 이번 달 프로모션입니다, 라고 말하며 버거와 캐릭터 열쇠고리를 함께 건넸다. 하얀 바탕에 까만 눈, 역삼각형 모양의 까만 코를 가진 토끼 캐릭터였고, 몸통에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무심히 테이블에 열쇠고리를 내려놓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던 류봄은 자기 쪽을 바라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U대 병원 로고가 박힌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소아병동 환자인 것 같았다. 류봄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은 평생 낳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류봄은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게임중독 청소년이나 자폐를 가진 어린이들이 진료실을 찾아오면 괜히 서랍에 넣어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쥐어주곤 했다.

 

“아줌마, 이 토끼 뭔지 알아요?”

햄버거를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류봄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소아병동 아이는 류봄 맞은편에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니, 모르는데, 라고 류봄은 대답했다.

“그러면요, 여기 이거는 얘 입이게요, 코게요?”

아이는 류봄이 코라고 생각했던 토끼 얼굴의 역삼각형 모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코 아니야?”

“뗑! 이건 얘 입이에요!”

아이는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난 이게 얘 코인 줄 알았어. 입이라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데”

“그거는 얘가요, 슬퍼도 안 슬픈 척 웃고 화나도 안 화난 척 웃고 있어서 그래요. 얘는 맨날 이렇게 웃으면서 방방 뛰어다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얘가 맨날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해요. 저도 약간 그렇거든요. 그래서 얘가 저 같아서 좋아요.”

류봄은 아이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초등학생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 아이인데, 그런 어린 아이 입에서 어째서 저런 말이 나올까. 저 애의 삶도 순탄치 않았나보다, 하고 류봄은 생각했다.

“이름이 뭐야?”

“얘 이름은 오버액션토끼에요.”

“말고, 네 이름말이야.”

“저는 이세민이에요! 저 병원에 엄청 오래 있었는데요, 아줌마 지나다니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아줌마 의사죠?”

류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 열쇠고리 너 가질래, 라고 세민에게 물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돼요? 저도 아까 하나 받았긴 한데요, 병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도 하나 주고 싶었는데, 치킨 버거 세트를 한 개 더 사먹을 돈이 없었어요.”

“그럼 이거 가져가서 친구 줘.”

“감사합니다! 제 친구 이름은 안수하에요! 나중에 수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류봄은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배꼽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류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류봄이 이세민이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은 그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점심을 먹으러 진료실 밖으로 막 나가던 류봄은 문 앞에 서 있던 두 아이를 발견했다.

“아줌마! 오늘부터 길 건너 돈까스 가게에서 왕돈까스 시키면 오버액션토끼 인형을 준대요! 같이 가실래요?”

“음…. 그럴까? 내가 사 줄게.”

“아니에요, 우리도 돈 있어요. 돼지저금통 깨 왔는데….”

그 돈은 더 좋은 데에 쓰렴. 나는 이십 분 일하면 왕돈까스 세 접시 살 돈을 벌 수 있단다, 라고 말하며 류봄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 맞다! 아줌마, 얘가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수하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스산하게 들려 류봄은 걸음을 멈추었다. 빼빼 마른 아이의 홀쭉한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는 무엇이 불안한지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폐가 있는 아이일수도 있겠다고 류봄은 생각했다. 류봄은 돈까스를 먹으며 아이를 계속 지켜보았다. 아이는 전반적으로 주변 환경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세민과 이야기를 할 때는 밝게 웃었다. 그래도 의지할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녀가 생각할 찰나였다.

“아줌마, 저 화장실 가고 싶은데 같이 가주시면 안돼요?”

류봄은 세민과 함께 일어섰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세민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줌마, 수하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니?”

“수하가 그러는데요, 이상한 아저씨들이 매일 수하를 끌고 가서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씌우고 이상한 통에 집어넣는데요. 또 막 이상한 약을 먹여서 재워놓고 몸에 이상한 짓을 한데요. 수하가 막 아프다고 하고 그만하라고 해도 아저씨들은 들어주지도 않는데요. 거기 수하 엄마가 같이 있을 때도 있는데, 수하 엄마는 수하가 도와달라고 해도 그냥 보고만 있는데요.”

“그냥 MRI 찍고 마취 수술 한 거 아닐까?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치료의 한 부분이야.”

“아니에요! 저도 수하도 MRI도 찍어 봤고 마취도 해 봤는데, 그거랑 진짜 다른 거예요! 자기를 실험용 쥐처럼 다룬다고 수하가 그랬어요.”

“수하는 어디가 아픈데?”

“음…. 뭐라더라… 인격 장애? 그런 게 있고요.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데요. 이상한 아저씨들이랑 실험하고 나면 더 아프다고 그랬어요?”

“혹시 수하가 망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망상이 뭐나면…. 없던 일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데…”

“아니에요! 그 아저씨들 저도 봤단 말이에요. 점심 먹고 나면 또 수하를 데리고 갈 걸요? 아줌마, 그 아저씨들 좀 막아 주시면 안돼요? 이러다가 수하한테 큰일이 날지도 모른단 말예요.”

류봄은 도움을 요청하는 세민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피했다. 아이의 말을 믿어도 될 지부터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어쩔 것인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류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세민은 의사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류봄은 세민에게 수락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세민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류봄은 곧 알게 되었다.

“소아병동에 안수하라는 애, 소문 들었어?”

의국 앞을 지나가던 류봄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수하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류봄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의국에는 레지던트 몇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류봄은 커피를 타 마시는 척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를 의식한 레지던트들이 거의 속닥거리다시피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약물, 의료사고, 인격 장애, 실험, 연구 같은 단어들만이 드문드문 들려왔으나, 그 단어들만으로도 사건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류봄은 원두를 내리며 슬금슬금 레지던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강호민 연구원이랑 박민철 쌤?”

한 레지던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류봄의 눈치를 살피더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류봄은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한 레지던트들은 어느새 류봄의 존재를 망각한 듯 했다.

“미쳤다…. 박민철 그 인간은 인간쓰레기를 넘어서 핵폐기물 아니냐?”

“글니까, 나 인턴 때 말야, 그 인간이….”

강호민과 박민철은 류봄도 아는 작자들이었다. 전자는 약사 출신 연구원, 후자는 같은 병원 소속 의사였다. U대 의대 부설 연구소 소속인 강호민과는 병원과 연구소가 함께 하는 망년회나 단합회 때 몇 번 마주쳤는데, 류봄은 그의 모습이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박민철은 여러모로 P 교수를 닮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무능력하기까지 해서 근래에도 의료사고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그 콤비가 안수하를 모르모트로 삼아 수상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에 엮이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류봄의 이성이 속삭였다.

 

‘엄마가 병원 앞에 식당을 열었어요. 아줌마, 오늘 꼭 놀러오세요! -이세민-’

진료실 문에 붙어있는 도화지를 발견한 류봄은 흠칫 놀랐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던 탓이었다. 쪽지에는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조약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류봄과 두 아이, 그리고 예의 토끼 캐릭터로 추정되는 난해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에서 안수하와 이세민은 풍선을 손에 들고 밝게 웃고 있었고, 류봄의 등에는 하늘색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류봄은 한 손으로는 오버액션토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세민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그림 따위는 재빨리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하고 류봄의 이성이 말했다. 이 식당에서 세민과 그 모친을 만나게 되면 꼼짝없이 사건에 관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류봄의 손은 이성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뭐야,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녀의 이성이 악을 쓰다시피 말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빗소리에 류봄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7년 전 그날만큼이나 세찬 비였다.

 

“우와, 아줌마! 오셨네요!”

축하 화환의 꽃이 아직 싱싱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민의 낭랑한 음성이 류봄을 반겼다. 류봄은 자신이 조악한 지도 하나를 가지고 무섭게 퍼붓는 장맛비를 뚫고 이 식당까지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어쩔 셈이냐, 이성이 조소하듯이 물었다.

“아줌마 배고프시죠? 저기 앉으세요! 우리 엄마는 제육볶음 잘해요.”

세민이 홀로 뛰어 들어가 의자를 빼 주었다.

“뛰어다니지 마, 세민아. 그러다 다칠라.”

류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때 인턴 생활을 같이 했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였다. 그는 류봄을 발견하더니 약간은 떫은 표정으로 목례를 건네고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둘러보니 식당에는 소아병동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은 어느새 그들의 단골집이 된 모양이었다. 연구소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저…. 제육볶음 정식 하나 주세요.”

네, 제육 정식 하나 맞으시죠, 하고 부엌에 있던 여자가 나와 주문을 받았다. 세민의 모친인 모양이었다. 류봄 또래의 여자로 보였으나, 손이 거칠었고 얼굴에는 오래 누적된 피로의 흔적이 보였다. 그렇지만 병원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재롱을 부리는 세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류봄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들어가려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세민이 어머니 맞으시죠? U대 병원 정신의학과 과장 류봄입니다.”

“아…. 세민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수하…. 도와주신다고 하셨다고…..”

자신의 애매한 답변을 세민은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류봄은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흘러갈 일이었던 것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수하가 어떤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점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여자가 세민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세민이가 처음 수하를 만난 것은 4년 쯤 전입니다. 수하는 자폐가 있는 아이였는데, 약물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몇 달 전에 병원 측의 실수로 수하가 잘못된 약물을 처방받게 되었어요. 일종의 의료사고….이지요. 그런데 그 약물이 뜻밖에 수하의 증세를 완화시켰다고 했어요. 다른 자폐 환자들에게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수하에게서만. 그러자 U대 의대 연구소에서 수하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연구가 정상적인 연구는…. 아닌 것 같아요.”

“정상적인 연구가 아니라니요?”

“우리 세민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고 있어요. 세민이는 거의 서너 살 때부터 병원생활을 했어요. 골수성 백혈병은 완치가 가능하다고들 하는데, 세민이는 아직도…. 그래서 백혈병과 관련된 신약이 개발되었다고 할 때마다 임상실험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수하가 당하고 있는 실험은 그런 실험과는 달라 보였어요. 조금 더 위험하고 이상한…. 병원 갈 때마다 수하를 만나는데, 하루하루 아이 얼굴이 야위어가는 게 보여요.”

“…… 그렇군요.”

“수하 어머니를 만나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그분은 수하를 짐처럼 생각하시는 분이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

 

맞은편 식탁에서 국밥을 먹던 두 연구원이 어느 순간 류봄이 앉은 테이블로 건너왔다.

“그래서 저희는 해당 연구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연구과정에서 연구 대상인 안수하 양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규명하려고 합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연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안수하 양에게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민 모친의 말을 곱씹고 있던 류봄은 그들이 자신의 테이블로 넘어 온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하고 류봄은 물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U대 의대 연구소 소속 류혁진입니다. 이쪽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신임 연구원 한도윤 양입니다.”

류혁진이라는 남자가 류봄에게 명함을 건네며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네,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지요?”

“선생님은 병원 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시지요. 그리고 기자나 의료계 인사들과도 면식이 있으시고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수하를 대상으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연구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외부에 알려주십시오. 연구소는 폐쇄적인 곳입니다. 외부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어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이곳은 강호민 연구원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절망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판치는 곳입니다. 수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

“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저희가 캐낸 해당 연구 관련 자료와 수하 양의 능력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험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보내드린 자료를 읽어보신 후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메일주소는…. 여기 있습니다.”

류봄은 주머니를 뒤져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명함을 꺼내 류혁진에게 건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드려요, 류봄 선생님.”

한도윤이 말했다. 류봄은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세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꼭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라고 말하며 류혁진이 악수를 청했다. 류봄은 그의 손을 힘껏 잡고 흔들었다.

 

장맛비에 사람들의 발이 묶인 것인지, 오후의 진료실은 한산했다. 류봄은 한참 동안 류혁진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그녀의 이성이 중얼거렸다. 류봄은 책상 한 귀퉁이에 앉혀놓은 토끼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돈까스를 먹고 얻은 것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류봄은 이성의 물음에 답했다. 문득 선배 C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났음에도 류봄은 단 한 번도 그의 묘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건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번에야말로 그를 찾아가야겠다, 술과 꽃을 사가야지, 그의 묘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 류봄은 두서없이 생각했다. 그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류봄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어리고 미성숙했던 자신은,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어리석었을까. 남은 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류봄은 생각했다.

 

‘띠리링’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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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백일장 선물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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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야자 끝나고 집에 와 보니 두꺼운 소포 뭉치가….! 독서대, 철학서, 시집에 문구세트까지…..정말 감사합니다! 시험기간이라서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있지만 시험 끝나고 다시 열심히 글틴활동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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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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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 늦여름이었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아이에게서 갑작스러운 메일을 받았다. 의례적인 인사말 몇 마디를 건넨 후에 그는 내 근황에 대해 줄곧 전해 들었다며 그 당시 내가 열성적으로 하고 있던 이런저런 비교과활동을 언급하더니 이에 대한 제 코멘트를 덧붙였다.

‘…. 정말 가시밭길을 스스로 기어들어가다니 마조히스트의 기질이 있구나….’

 

더 이상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늦은 밤이었고 방구석에는 낮에 예은이와 함께 체크리스트를 써가면서 꾸려놓은 캐리어가 있었다. 나는 혼자 누워 뒤척거리면서 답장도 하지 않고 곧 잊어버렸던 그 메일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 더군다나 한라산 코스를 택한 것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아킬레스건이 선천적으로 좋지 않아 오래 걸을 수 없었고, 그래서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다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간 동안 학교에 남아 당직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 주제에 한라산이라니, 대체 무슨 정신이었느냐고 나는 과거의 나에게 물었다. 정상에 올라가면 제주도 전체가 조그마한 디오라마처럼 발아래에 펼쳐지고 주위에는 쉼 없이 노루며 사슴이 뛰어다닌다는 말에 혹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이니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한라산이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사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한라산에 가자고 주변 아이들에게 떼를 썼던(물론 그 중 99%는 단칼에 거절했다) 사람이 나였으므로 탓할 사람도 없었다. 진지한 고려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수학여행이 다가오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담당한 파트가 2분도 채 안 되는 장기자랑 춤 연습도 힘에 부쳤고, ‘진짜 한라산을 오르겠다고?’라고 묻는 주위의 불신하는 눈빛도 그제야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캐리어 바퀴가 발에 채일 때마다 나는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메일 내용을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바로 그 메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그 마지막 문장이었다.

‘ … 그럼 고생해라. 괜히 주변 사람들 고생시키지 말고. ㅇㅅㅇ’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의 농도가 갑작스럽게 옅어졌다. 아파트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는 뜻이었고, 곧 해가 뜰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 수학여행 첫째 날 새벽이었다.

 

 

2

 

3박 4일의 수학여행 중 한라산 등반은 셋째 날에 배정되어 있었다. 둘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방에서 친구들과 초콜릿 소물리에를 표방하며 기념품 가게에서 사 온 초콜릿을 까먹고 있던 나는 한라산 코스 참가자들은 로비로 모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었다. 로비에서 초코바, 소시지 등 한라산 등반 중에 먹을 간식들을 일인분 씩 나눠 담기 위해서였다. 맨 왼쪽으로부터 4, 3, 2, 1 개씩 담으면 돼, 라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지퍼백에 간식을 나눠 담았다. 한라산 코스를 신청한 순간부터 줄곧 실감나지 않았던, 이튿날에 한라산을 오른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한라산은 등반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라산 코스 아이들은 다른 코스보다 더 일찍 로비에 모여 출발했다.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 우리가 오를 코스는 성판악 코스였다. 전날 지퍼백에 챙긴 간식과 두 병의 물, 점심으로 먹을 김밥을 가방에 넣고 ‘13:00까지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야 백록담까지 등반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인 푯말을 넘어 한라산에 입산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돌길이 이어졌다. 양 옆으로 빽빽이 나무가 심겨져 있다 뿐이지 동네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이었다. 한라산도 별거 아니네,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조로운 길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참을 걸어 나온 표지판에는 아직 우리는 초급 단계의 등산로에 있으며, 차후 중급 단계와 고급 단계의 등산로를 모두 거쳐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각 단계가 끝날 무렵에 대피소가 한 개씩 있었는데, 기상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사람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만든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초급 단계 등산로가 가장 길이가 길기는 했지만, 아무리 걸어도 일정한 간격마다 세워진, 남은 시간과 간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에 적힌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의 목표는 함께 한라산 코스를 신청한 친구 K와 속도를 맞추는 것이었다. 첫 이십 분 정도동안은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K의 날랜 걸음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엉성하게 뛰어가 봐도 그가 있던 위치에 내가 도달하자 K의 실루엣은 잔인하리만치 멀어져 있었다. 초반부터 마구 뛰니 메고 있던 크로스백(등산을 하려면 역시 배낭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한라산에서 실감했다)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K를 좇는 것을 포기하고 내 속도에 맞춰 걷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혹시 내가 일행의 끄트머리일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저 멀리서 실루엣으로 수학 선생님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앞으로 돌아 다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나는 내 가시범위 내에서 홀로 되었다. 잠시 멈춰서 앞뒤를 살펴보았지만 누군가 멀어지는 소리도 가까워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걸으면서 작은 돌을 차는 소리에 섞여 정체모를 조그만 소리만이 들렸다. 아마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며 뒤척거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속삭임 같기도 부스럭거림 같기도 해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리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길이 뻗어나가는 데로 걸어 나갔다. 혼자 걸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 주는 소리였다. 하산할 때 그 30분 남짓한 길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국어 선생님께서는 나와 다른 친구를 그 길 구석에 세워두고 일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셨다. 등산하는 길에 들었던 소리가 증폭되어 고요하면서도 왁자지껄하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3

 

30분 정도 지나 해발 고도를 알리는 비석 앞에 모여 뒤로 오는 아이들 수를 세고 있던 국어 선생님과 서너 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오른손으로 받쳐 들고 걷고 있던 크로스백을 보시더니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사양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번 힘이 빠지면 돌이킬 수 없다며 계속 설득하셨다. 그래도 역시 내가 메고 가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개선부대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그 순간 그들의 함성 소리에 기가 꺾여 계속 고집을 부리려던 패기가 사라졌다. 자칫 이러다가 조 전체가 지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후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을 때 먼저 와 밥을 먹고 있던 K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가방을 쌤이 들고 온 거야?”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K는 농담조로 반칙이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괜히 능력도 안 되면서 한라산에 오른다고 했나, 라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며 종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가방을 선생님께 드리고 나는 한 손에 얼음물을 들고 계속 걸어가다 B를 만났다. 그는 물이 거의 다 떨어지고 얼음덩이만 남아있던 내 물병을 보더니 자기 물을 좀 부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거절했다. 다시 목마르기 전까지 남은 물이 얼음을 좀 녹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을 올라갈수록 목이 말라 남은 물을 다 마셔버렸고, 점점 기온이 낮아지던 탓에 얼음은 좀처럼 녹지 않았다. B는 이미 저만치 앞서 간 상태였고, 얼리지 않은 물 한 병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가방 안에 있었다. 초급 코스와 중급 코스 사이의 대피소에서 물을 채워 넣어야 했었겠지만 멈춰 쉬면 뒤처질 것 같아서 바로 중급 코스 등산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전날 오전부터 냉동실에 넣어 꽁꽁 언 얼음에서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물을 삼켜가며 걸었다.

 

나는 타인들보다 뒤처지거나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늘 쉬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거나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한 친구는 가끔 나에게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삶의 방식이 있다면 저런 삶의 방식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곤 했었다. 한라산에 올라 그 아이가 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진달래밭 대피소에는 육개장 한 종류의 컵라면만을 팔았다. K와 나는 선생님께서 사 주신 라면 한 컵을 나눠 먹었다. 익히 알던 육개장과는 조금 다른 맛이 났다. 기압 때문인지 면발도 더 탱탱하게 느껴졌다. 중학교 때 에베레스트를 다녀오신 음악 선생님께서 대피소에서 먹었던 신라면 맛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말을 하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한라산을 오른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4

 

점심을 먹고 대피소를 나와 고급 코스에 접어들었다. 고급 코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험준했다. 주변의 등산객들은 등산 스틱으로 돌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걸었다. 나는 배낭은 물론 등산스틱도 없었으므로 그 사람들이 밟은 돌을 유심히 보고 디디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번 발을 헛디디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험한 돌길이었던 등산로가 나무 계단으로 바뀌었다. 원형으로 굽어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삼십분 정도 올라가자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나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산 아래가 굽어 보였다. 절벽을 메운 보라색 꽃 뭉텅이 아래로 제주도 전체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광경인 양 조그맣게 보였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름답다’의 말뜻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면 이러한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분 좋게 불었던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정상에서 1km 정도 남은 지점부터 바람은 한겨울에도 겪어 본 적이 없는 강도로 불어 닥쳤다. 바람에 휩쓸려간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등산로에는 계단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굵은 밧줄이 묶여 있었다. 그것 또한 여기저기 나무 지지대가 빠져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등산객들은 그 줄에 매달려 기어가듯이 얼마 남지 않은 정상으로 올라갔다. 행여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다면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나는 한 손으로 모자를 잡고 다른 손으로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미련한 선택이었다. 바람이 밧줄을 잡은 손 쪽으로 불어왔고, 나는 순식간에 줄을 놓치고 밑으로 쓸려 내려갔다. 내가 인간 폭탄이 되어 기어 올라오는 사람들을 도미노처럼 산 아래로 무너뜨리기 직전에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산타할아버지처럼 숱 많은 수염을 늘어뜨린, 아마도 노르웨이 계통으로 보이는 덩치 큰 서양인이었다. 그가 영어를 알아들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크게 감사를 표하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마저 기어올랐다.

 

한라산의 정상, 즉 백록담에서도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나는 계단에 앉아 간식을 까먹고 있던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산타할아버지 수염의 외국인은 제 집 마루인양 익숙하게 나무 계단에 앉아 페이퍼백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상에 도착한 수학 선생님은 대자로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바람을 헤치고 분화구 쪽으로 다가가며 푸른 물이 반짝거리는 백록담 주위로 노루며 사슴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드디어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백록담 물은 말라 진갈색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당연히 노루나 사슴은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한라산을 오른 것이 백록담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실망할 법도 했는데, 그러한 광경을 보고도 아쉽지가 않고 도리어 기쁘고 뿌듯하기만 했다. 나는 백록담에서 눈을 돌려 내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길고 아득한 길이었다.

 

 

5

 

내려오는 길도 지겨우리만치 멀었지만 올라가는 길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발을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후발대와 함께 그 아이들이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페트병이며 비닐 조각을 줍는 것을 도우며 걸어 내려갔다. 국어 선생님과 아이들이 쇼핑백(놀랍게도 쇼핑백 또한 산에 버려져 있던 것들이었다)에 쓰레기를 꽉 채워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말이야…. 사람들이 내 걱정을 해 주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럴 때마다 초라해진 기분이 들거든.”

멍하게 걷다가 들려온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올라갈 때 발을 다친 아이의 목소리였다. 옆의 친구가 그를 걱정하며 한 말에 대한 대꾸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걸어 내려가며 한라산을 오르기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돌이켜보았다.

 

오래전 받은 메일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가시밭길, 그 아이는 메일에 가시밭길이라고 써 놓았다. 수학여행에서 한라산을 오르기로 한 것은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애가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메일을 보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은 대충 맞아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가시밭길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가시밭길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훗날 혼자 한라산을 올랐다면 나는 정상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가방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면, K가 고급 코스를 내려갈 때 한 걸음 앞서 걸어가며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산타 수염의 서양인이 그 슬로프에서 나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백록담을 끝내 보지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산 아래에 다시 발을 붙이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예견한 것처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가시밭길을 걸어 올랐다. 하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것도 괜찮다고, 이제는,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오래도록 묵혀 놓은 그 메일에 답장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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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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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별도 달도 없는 이 밤을

걷는 건 저 검푸른 물에

모두 휩쓸려가 버렸기 때문일거야

나는 그대와 등을 맞대고 앉아

하염없이 하류로, 하류로,

몸을 내던지는 물줄기를 지켜보았던 것을 기억해.

 

속삭였어 있지 나는

자그마한 시냇물로 흐르고 싶었어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며 논둑 사이로 춤을 추듯이

그대는 퍽이나 나이가 든 것처럼

말했어 아냐 어른이 된다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섞여 휩쓸려가는 거야

소리 없는 노래를 부르며 움직임 없는 춤을 추듯이.

 

그대가 풀 먹인 저고리처럼 웃으며

아득한 하류를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해.

어릴 적 보물 상자에 숨겨두었던

새파란 수채 물감 따윈 이미

시간에 내주었는걸 통행료로.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새하얀 거품이 되어

 

우리가 별도 달도 없는 이 밤을

걷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우리가 섞여가고 있기 때문일 거야

나는 그대와 손을 포개고 앉아

하염없이 하류로, 하류로,

팔을 내뻗는 물줄기를 올려다보았던 것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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