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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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저기, 혹시, 하은이 바꿔주실 수 있어요?

하은이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전화 잘못 거셨어요. 끊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이거 분명 하은이 전화번호 맞거든요?

글쎄 하은이라는 사람 모른다니까. 다른 번호로 걸어보세요.

하은이 전화번호 맞다니까요, 모른 척 마시고 한번만 바꿔주세요, 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진짜 딱 한번만, 더도 말고 딱 한번만 바꿔주세요. 하은이 목소리 듣는 게 소원이에요. 제발요.

휴… 알았어요. 대신 더 이상 전화하지 마세요. 오늘로 이 번호도 바꿀 거고,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겁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어서 바꿔주세요.

(정적)

얘, 하은아, 전화 왔다. 받아라.

여보세요?

하, 하은아. 내 말 들려? 언니야.

언니? 언니라고?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이렇게 전화하면 안 돼.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죽기 전에 꼭 네 목소리 듣고 싶었거든. 있잖아, 거기서 빠져나와야해. 거긴 위험해. 그놈들도 위험하고. 널 보살피는 척 하면서 노예로 팔아넘길 생각이야. 새벽에 몰래 도망쳐. 도망쳐야해.

언니, 그만해. 이제 괜찮아. 다 해결됐어. 여기 계신 분들 다 성품 좋으시고, 난 부족한 거 없이 잘 살고 있어. 노예니 뭐니 그런 소리 그만해. 나까지 속상하잖아.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할 필요 없다니,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한가한 소리만 할 거야? 제발 정신 차려. 난 네가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데,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은아, 언니 말 좀 들어.

언니, 정신 차려야할 사람은 언니야. 언니가 나를 돌봐준 건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전화까지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나도 언니랑 같이 살던 때가 떠오르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그리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마음에 들어. 그리고 이곳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 아늑하고 따뜻한 아파트인걸. 약 그만 먹어. 자꾸 약 먹으니까 없던 피해망상도 생기는 거잖아. 언니는 날 걱정한다고 하지만 나는 언니가 배로 걱정된다고.

아니야, 아니야. 하은아. 언니 말 잘 들어봐. 내가 틀렸을 수 있어. 그냥 그날 널 내버려두고 갈 길 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렇잖아. 피를 나눈 친언니가 아니라 해도 나는 너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왔어. 그러니 제발, 우리 다시 함께 살면 안 될까?

나도 언니랑 같이 살던 때가 그립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있는 문제가 아냐. 고모랑 고모부, 친척들이 하나같이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로 살아가는 거잖아. 애도 아니고 그만 보채.

그럼 왜 날 만나러 오지 않는 거야? 연락처도, 주소도, 아무 정보도 알려주지 않은 채 숨어사는 이유가 뭐냐고? 내가 싫어? 언니가 아니라 이거야?

누가 언니가 아니래? 난 한 번도 언니를 언니가 아니라 생각한 적 없어. 언니 마음대로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마. 그냥 난 이제 편하게, 조용히 살아가고 싶을 뿐이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회사도 다니고 집도 마련하고 애인도 만나 재미있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언니도 그렇잖아? 자꾸 내게 병적으로 집착하면 언니한테도 전혀 이로울 게 없어. 그만 포기해. 언젠가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난 모른 척 할 거야. 언니도 날 알아보지 않는 게 마음 편할걸.

너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 그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살면 되잖아. 왜 나는 안 만나는 거냐고? 알았어. 같이 사는 건 도저히 무리니까 딱 한번만 만나면 안 될까?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그냥, 다 필요 없고 한 번만 만나자, 응?

언니… 난… 언니가 그런 짓을 한 이후로 언니를 만나기 싫어졌어. 솔직히 말할게. 내게 언니는 언니라기보다 날 키워준 보모에 가까운 사람이야. 난 이제 스무 살이고 성인이야.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자립할 수 있는 나이란 말이야. 지금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 쭉 나 혼자 꿋꿋이 살아갈 거라고. 그런데 언니가 그 먹여주고 재워줬다는 그 쓸데없는 정 때문에 자꾸 내 발목을 잡으면 나도 힘들고 언니도 힘들어. 다시 말하지만 난 나를 지금까지 안전하게 키워준 언니가 고마워. 하지만 언니는 내게 그 짓을 했잖아. 그런 행동만 안 했다면, 난 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지 모르지.

그 짓이라니, 무슨 말이야?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데? 넌 왜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고 그러니? 그래, 난 언니가 아니다 이 말이구나? 난 한낱 보모라고. 보모라서 넌 그냥 내 모유만 처먹고 건강하게 컸다 이거야? 넌, 넌……

언니, 진정해. 나는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언니도 기억하잖아. 단지 잊어버리고 싶은 속셈이겠지. 난 아직까지 언니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 왜 그런 거야?

왜 그랬냐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맹세코 네가 말하는 어떤 ‘짓’도 하지 않았어! 왜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느냐 말이야!

그건 핑계고 구실이야. 왜 자꾸 거짓말을 해? 내가 어려서, 그때 일어난 일을 깨끗이 잊어버릴 줄 알았어? 솔직하게 말해. 거짓말 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고 언니도 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털어버릴 일도 아니야. 언니는 내가 언니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하은아… 제발… 우리 이러지 말자… 그래, 내가 잘못했어. 거짓말한 것도 미안해.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난 그저, 돈이 필요했을 뿐이야…… 앞으로 우리가 쭉 함께 살아가려면 필수적인 게 돈이잖아. 난 돈을 많이 벌어서 하은이 너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따뜻하게 재워주고 싶었어. 나도 알아, 그 방법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걸. 난 벼락을 맞아 죽어도 부족한 년이지. 돈을 벌려면 내 몸만 팔면 되는데, 너까지 더럽혔으니까 말이야… 정말 미안해. 전부 내 탓이고 내 잘못이야. 아직도 후회하고 있어. 그날 왜 내가 수염 텁수룩하게 기른 지저분한 아저씨에게 너를 돈 받고 내주었는지… 넌 냄새 나는 신문지에 덮인 채 늙은 거지를 받아들여야했지. 일이 끝났을 때 네 하얀 알몸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구린내를 풍기고 있었어. 작고 여린 몸에 늙은이가 손톱으로 긁은 상처가 나 있었고 네 눈은 넋이 나가 멍한 상태였어.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생각이 들더라고. 난 개새끼도 안 하는 짓을 하고 만 거야. 너도 나처럼 자연스레 거지들에게 몸을 대줄 거라 완전히 착각한 거지.

그래, 맞아. 언니는 내게 몹쓸 짓을 했고 죽을죄를 진 거야. 그걸 언니가 내게 갚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언니가 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건지 알기나 해? 내가 받을 고통과 상처의 무게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봤어? 이제 다 끝났어. 다 필요 없고, 날 키운 정이 있어서 경찰을 부르지 않은 것일 뿐 언니에 대한 증오는 가슴 깊숙이 꽂혀 있으니까. 더 이상 전화할 생각 말고 찾아오려는 시도도 하지 마. 번호도 바꿀 거야. 그럼 이만.

하은아, 하은아! 잠깐만 기다려! 이대로 끊을 순 없어!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고 넌 하나도 잘못 없어 제발 끊지 마 이렇게 끊어버리고 다시는 안 볼 거야?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건 너무하잖아 제발 하은아 제발 제발 이렇게 빌게 응? 제발 끊지 마…

언니 시끄러워. 그만해. 그러니까 정만 더 떨어지잖아. 그만하라고. 어차피 계속 통화하고 있을 수도 없어.

알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널 사랑한다는 거야… 난 네가 한 살 아기였을 때 처음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나이 차이는 열네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난 네게 엄마나 다름없었어. 엄마처럼 키웠고 보살피고 매일매일 굶어가면서 널 먹였어. 그냥, 다른 건 하나도 바라지 않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만 알아줬으면 해.

그래, 좋아. 끊기 전에 이것만 말해둘게. 친척들이 나를 찾아 집으로 데려간 뒤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 진짜 재미있고 재미있는 일이었지. 언니는 아마 짐작도 못했을 거야. 신기하게 두 달 정도 지나니까 눈에 띄게 배가 나와 있더라고. 열 두 살짜리 어린애가 임신을 한 거야. 친척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어. 애가 아무리 거지 소굴에 살았다지만 이 지경까지 온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숙모와 숙부는 나를 산부인과에 끌고 가 강제로 낙태를 시켰어. 의사가 말하길 자기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네. 나이가 너무 적어서 이대로 낙태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 숙모와 숙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반드시 애를 꺼내야 한다고 부들부들 떨며 신신당부했지. 곧바로 나는 수술실에 눕혀졌고 복부와 질이 마취됐어. 의사가 시큼털털한 약을 먹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배에 주사했지. 잠시 뒤 새빨간 고깃덩어리가 눈앞에 등장했어. 피를 뚝뚝 흘리는 고기가 내 아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어. 게다가 내가 평생 동안 같이 살아왔던 언니 혹은 엄마가 날 이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어. 나도 이 고깃덩이처럼 손목 긋고 콱 죽어버릴까 생각했어. 하지만 곧이어 이보다 더 좋은 발상을 떠올렸지. 뭔지 알아?

……

언니는 영원히 혼자 살아야 한다는 거야. 날 이 상태로 만든 바로 그곳에서. 노숙자들이 우글우글 송충이처럼 모여 사는 지하철역에서. 쓰레기통에서 나 같은 아기를 또다시 발견할 생각은 하지도 마.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니까. 의사가 피 줄줄 흐르는 흡사 돼지고기와 같은 고깃덩어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이렇게 말하더라. 난 용케 살긴 살았는데 앞으로 아이는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미안하게 됐다고 말이야. 아니지. 의사는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지. 미안해할 건 바로 언니야. 빌어먹을 쌍년, 언니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뭣도 아닌 너 말이야. 네가 엄마라고? 웃기지 마. 내 엄마는 오래전 죽은, 날 낳은 엄마야. 넌 가짜 엄마고. 키워줬다 해서 다 엄마가 될 것 같으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엄마도 아닌 엄마가 차고 넘쳐날까? 정말 고마워. 언니 덕분에 다시는 아기를 못 낳게 되었어. 뭐 애당초 낳을 생각도 크게 없었지만, 그게 그거랄까. 가끔씩 난 생각해. 내가 그날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일단 친척들이 허락하지 않았을 테고 더러운 늙은이의 정자에서 태어난 사생아는 무척 우울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했겠지. 그런데도 난 왜 자꾸 한때 내 뱃속에 들어있던 고깃덩이를 상기하게 되는 걸까… 참 이상하지 언니?

……

왜, 막상 내 소식 들으니까 황당해? 터무니없지? 아무 말도 못하겠지, 그렇지? 임신이라니, 낙태라니. 상상조차 못했겠지. 잘 되었다고 생각해. 언니도 나도 다 잘된 거야.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려버린 거야. 젠장, 언니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건데… 언니만, 언니만 아니었더라면… 아니지, 날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린 엄마가 나쁜 거지. 언니는 잘못 없어, 그렇지? 그래 안 그래? 대답해봐! 대답하라고! 당장!!

하ㅇ…

(전화가 끊긴다)

 

전화기 내팽개쳐지는 소리.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조명이 꺼지고 막이 닫힌다. 공연이 끝났음에도 무대 안쪽에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곧이어 공연장은 침묵으로 메워진다. 밤하늘만 쓸쓸하게 빛난다. 아름다운 밤이다.

 

 

 

 

*희곡 형식을 차용한 단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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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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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사람들은

우리에게 참치캔을 따주곤 합니다

아이구 귀여워라 불쌍해 맛있게 먹어 몇 마디 툭툭

내뱉고는 아무렇지 않게 갈 길 갑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아는 걸까요

우리에게 참치캔은 필요 없습니다 혼자서도 먹고 살 수 있어요

그게 야생에 사는 들고양이의 의무이자 필연이니까

굳이 주지 않아도 되요 피해만 불러일으킬 뿐

생태계를 파괴하고 밤마다 주민들을

소음에 시달리게 한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모르겠죠 짐작조차 못하겠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우리에게 화난 주민들은

우리의 수를 줄이려 대책을 강구하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자칭하는 고양이 애호가들은

역지사지 동물을 사랑해야한다 반대 시위하고

부딪히고 결국 서로 싸우게 되잖아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가요

한순간 연민의 감정을 품고

지나가다 불쌍해 딱하다 생각하고 잊을 것을

간섭과 시비로 불화가 빚어지고

부지불식간 거리는 텅 비지요

 

참치캔 주지 않으셔도 돼요

나트륨이 너무 많아 몸에도 안 좋아요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를 가만히 놔두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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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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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단순한 취미, 꼭 이루고 싶은 꿈, 반드시 행해야하는 의무, 상금을 타기 위한 수단, 시간 날 때마다 대충 끼적이는, 멍하니 누워서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휘적휘적 돌리며 그리는 낙서 같은 심심풀이 놀잇감?

나는 몇 년간 문학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가리개에 가려진 채 항상 앞을 흐릿하게 보고 산 것 같다는 생각을 수십 번이나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것이 여러 개라면 여러 개를 한꺼번에 할 수는 없는 걸까. 욕심이 과한가. 진로 찾기는 이 세상 모든 청소년의 공통적인 여정이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래저래 지내면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관심 있는 ‘꿈’이 무수히 생겼는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그저 자퇴만 고민하고 있다는 또래 청소년들을 마주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해 같은 십대로써 연대의식이 흐려진다고 해야 하나. 고민은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영화를 사랑해왔다. 그런데 진정 사랑했다면 혼자서 단편영화도 만들어보고 열심히 준비해서 영화감독을 꿈꿨을 텐데, 왜 굳이 앉아서 글 쓰는,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따분할 일을 몇 년 동안 이어온 걸까. 나는 야외로 나가서 활동하는 일을 즐기는데 말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어느 분야의 글이든 글은 그 글을 쓴 이가 어떤 사람인지 활자 속에서 내밀하게 보여준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몇 년간 나는 이 명백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내가 쓰고 고친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눈여겨 훑어봤다. 투박하고 절제되어있지 않고 미숙하며 어설프다. 그리고 솔직하지 못하다. 소설은 그렇다쳐도 수필은 글쓴이의 감정과 내면을 가장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장르다. 글쓴이가 마음속에 품어둔, 평소 가지고 있는 신념과 사고방식은 글을 쓰면서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은연중에 문장 깊숙한 가장자리에서 돋보이기 마련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도 영화지만 나는 특별히 애니메이션에 정감이 갔다. 그래서 한때 찰흙애니메이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각도니 카메라 기술이니 편집 프로그램이니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화면에 잡힌 찰흙 인형이 너무 못생겨 보여, 아무리 찍고 찍어도 내가 상상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데, 곁에 있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책 읽고 애니메이션 공부하고 그림도 열정적으로 그리면 되는데 나는 왜 중도에 인내심 없이 그만두었을까.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당장 실행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또 그만큼 애니메이션에 애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나는 영화를 제작하는 일보다 감상하는 일을 더 즐기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솔직하지 못하다. 영화를 찍고 싶다는 열정은 언제나 가슴속에 이글거리고 있으니까.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문학과 영화는 매우 밀접해있다. 영화의 토대는 대본이고 대본은 글쓰기며 글쓰기는 문학이다. 영화는 문학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글을 열심히 배워두면 멋진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나는 항상 가지고 있다(글을 쓰는 가운데에도 횡설수설하며 혼란스러워하는 필자를 독자 여러분은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서서히 나를 사로잡은 달콤하고 매혹적인,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었으니 바로 록 음악이다.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우리 동네 음악대장이라는 가수를 접했다. 지구가 뒤엎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살면서 그런 장르의 노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클래식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잔잔하고 웅장한 선율의 클래식을 듣고 팝송이나 가요도 많이 들어봤지만 이런 종류의 강렬한 록은 가히 내 삶을 뒤집었다고 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록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상상 초월한 듯한 청아하고 맑고/거칠고 시원시원한 목청의, 한마디로 최고의 실력을 가진 보컬은 처음 봤다. 이렇게 잘 부르는 가수가 이 세상에 존재했나. 외국인들의 음악은 내 정서에 맞지 않았고 클래식도 너무 들었더니 지겹고 공장에서 찍어내는 아이돌 음악은 얼핏 들어도 구역질이 나오는데 음악대장의 노래는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전통 록부터 랩, 발라드, 아이돌 음악, 트로트까지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는 그의 끝도 없는 저력이 나를 압도하고 전율시켰다. 2년 전 음악대장이 등장해 노래 부른 그 순간부터 나는 국카스텐과 자우림, 김경호 같은 한국 록 음악에 흠뻑 빠졌고 기타와 보컬을 열광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점점 잊혔다.

언제부터 내게 문학이라는 분야가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에서 부진하고 지겨운 일로 변질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지난 2016년부터, 공모전에 소설이나 독후감을 응모해야한다는 부담감에서 출발한 것 같다. 그 소소한 부담감을 별것 아닌 일로 가볍게 여기면 되는데 어쩌면 나는 마감일을 핑계로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압박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 문학이 지겹다거나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예전만큼의 열정이 감소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야하는 건지 환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야하는 것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갈 길은 한참 남았고 나는 언제든 다른 갈래로 뻗어갈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만화가를 노린 적도 있었고 동생과 함께 곤충에 빠진 적도 있었고 마술에 심취한 적도 있었고 더 어렸을 때는 로봇과 공룡에 호기심을 보였고… 정말, 그러고 보니, 18년이라는 시간을 타며 많은 것을 건드려봤다.

몇 년간 글에 정성을 쏟은 것은 앉아서 공책에 문서에 쓰기만 하면 되니까, 백지에 활자만 입력하면, 잘만 쓰면 공모전에 입상해 상금이 척척 들어와서, 그 재미로, 흥미를 점점 잃어 문학을 향한 관심이 퇴색했는데도 근근이 이어온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내가 더 이상 글쓰기를 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는 않다.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문학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소중한 것은 너무나도 많고 나는 그것들을 놓칠 수 없다. 나는 책이 좋고 글이 좋고 언젠가 책 한권 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가 좋고 연출이 좋고 언젠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한편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이 좋고 록이 좋고 언젠가 록밴드를 만들어 기타와 보컬로 활동하고 싶다는 원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 꿈들은 누가 뭐래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들은 결코 멀지 않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들어 책을 다시 많이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적게 읽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 답하겠지만 일주일에 한 권은 내게 적은 편이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세 권 정도로 불어난 것 같다. 글도 자주 쓴다. 글은 쓰지 않으면 퇴색한다. 무엇이든 꾸준히 하면 실력이 늘기 마련이다. 놀랍게도 열아홉 살을 앞둔 지금 다시 글쓰기에 조금씩 재미를 느낀다. 오랜만에 맛보는 감정이다. 이 감정이 설사 상금을 얻은 기쁨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 내 진정한 행복은 ‘수상할 수 있을까’가 아닌 ‘이 책 진짜 재미있다’에서 온다. 한 시집의 독서 감상문을 열렬히 작성하고 있는데 쓰면서 읽고 또 읽어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부분이 눈에 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재미를 발견한다.

그동안 나는 소설책만 파헤치고 있었다. 장르적 재미만 느끼려, 허구가 주는 쾌감만 얻으러 한국소설 외국소설 휘저으며 헤매고 있었다. 편향된 독서를 한 것이다. 내년의 목표는 지금까지와 정반대이다. 무조건 다독하는 것보다 양서를 깊이 있게 읽고 곱씹는 것이다. 소설도 좋지만 소설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언어/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섭렵할 계획이다. 머릿속에 교양과 지식을 두고두고 쌓아두면 사용할 날이 반드시 온다.

 

2018년이 저물고 2019년 새해가 온다. 몇 년 전부터 새해엔 항상 새롭게, 열심히 살겠다고 포부를 밝혔는데 그 반대로 해가 거듭될수록 내 정신과 마음은 퇴보했던 것 같다. 한 해간 내가 스스로에게 자랑스럽게 살았는지 자신할 수도 없다. 이제 그러기는 싫다. 내 삶과 시간을 더 유익하고 아름답게 보내고 싶다. 철없는 청소년, 예의와 무례를 구분 못하고 함부로 떠들던 어린아이는 지우려 노력하겠다. 앞으로 끝없는 방황과 고뇌의 시간이 어김없이 닥쳐오겠지만 꿋꿋이 견뎌내고 굳건히 일어서련다. 나와 우리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개척해나가고 싶다.

이기심과 오만으로 범벅되어있던 한 사람이 열아홉 살을 맞는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이천십구년 새해를 앞둔 어느 겨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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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씁쓸한 이별 노래 –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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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까.

1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가족의 사랑만 듬뿍 받아온, 타인에게 사랑을 많이 줘본 적 없는 나에게 박소란 시인의 사랑은 어렵고 난해하기만 하다.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9p)고 원망 담긴 시선을 보내면서 때로는 “경아, 너 혹시 듣고 있니? 나 지금 촉촉이 젖었는데 와서 좀 빨아줄래?”(55p) 하며 답장을 보내고 “거기,/거기 잘 있습니까”(77p)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한다. 물론 저마다의 시가 가진 속뜻은 매우 다르면서 똑같고 멀지만 가깝다. 이 시인이 말하려는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 절대적으로 불가해한 타자의 마음? 이미 떠났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그리운 사람? 사랑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이고, 경우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었다가 전체적이고 포용적인 것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박소란의 시도 마찬가지다.

 

그의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에 실린 시들은 모두 한 주제로 연결되어있다. 쉰다섯 편의 시를 주조하는 표징은 칼/슬픔/아픔/흉터/병/피/젖/어머니(엄마)/살/음식/절망/체념/고독/이별/연인/자책 등인데, 이 표징들은 전부 ‘사랑’이라는 종착점에서 비롯된다. 화자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그리워하거나 찾아 헤매고, 화자의 반대편으로 누군가 떠나고 사라지고 흩어진다. 이별은 오해로 빚어지기도 한다. <너무 깊은 오해>는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를 대범하고도 처절하게 그려낸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 오해의 젖을 빨고 간신히 버티는 지진한 아들과 딸.

 

우리는

자주 오해의 술잔을 기울인다 오해의 값싼 장신구를 두른 채

여관을 들락거린다 플라스틱 같은 서로의 살갗을 정신없이 핥다보면

어느 순간 슬며시 드러나는 오해의 맨얼굴

서늘한 눈빛 아아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오해했나봐 당신을

소스라친다 소스라친다고 굳게 믿는다

 

오해의 술잔은 더 아득히 기울어진다 이따금

당신은 내 빈 숟가락에

오해의 살점을 발라 얹어주기도 한다 먹어봐 맛있어

 

그걸 먹고 나는 산다 살고 있다고 다만

오해할 뿐

 

오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러므로

오해로써 서로를 견뎌낸다 여관의 차디찬 공기 속

불어난 오해의 젖은 심장 가운데 엉긴 피처럼 달콤해

 

아아 이런 게 아닌데

 

신음하는 새벽의 어깨 너머로

오해가 단단히 솟아오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가 한덩이 오해를 물고

골목 끝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10~11쪽

 

 

시는 첫머리부터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고 선언한다. 전적으로 공감 가는 대목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것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오해하며 살아간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 오해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연인관계는 오죽할까.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아 이런 게 아닌데” 하고 실망한다. 어떻게 보면 불가피하고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이해, 공감은 부재해도 어느 정도의 이해와 공감은 가능하다. 화자도 말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오해로써 서로를 견뎌낸다”고. 오해하지만 아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는 상당히 비관적이고 비뚜름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가 한덩이 오해를 물고/골목 끝으로 유유히 사라진다’는 연으로 끝을 맺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이 단문은 적잖이 진부하고 고루한 것 같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는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화자 자신? 일부 현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시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띠고 있지 않으면 독자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신음하는~ 사라진다’ 보다 적절하고 핵심적인 문장은 없었을까.

 

3부에 편재된 <푸른 밤>이라는 시는 또 다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이제는 이해한”다는 것이다.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같은 책, 106~107쪽

 

 

변덕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언제는 오해한다면서 이제는 이해한다니, 앞뒤 맥락이 맞지 않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1부에서 3부까지 지나오는 시간 동안 변심한 것일까?

이 시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후회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에 방점이 찍혀있다. 겉으로는 그만 다 이해한다지만 화자의 심정은 회한과 죄책감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문장에서 더욱 확연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기를 포기한 화자는,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는 이해한다”고 애써 스스로를 부정한다. <푸른 밤>은 시집의 전체적인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꾸미는데 큰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인의 답답함과 비정함은 2부 <수상한 인사>에도 직설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나 자신과 타자에 대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을까. 나와 타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의 간극을 무슨 수로 메울 수 있을까. 시인은 허례허식과 위선으로 포장된 사람들을 과감하지만 어딘가 어설픈 필력으로 표현한다.

 

 

안녕

반갑게 인사합니다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악수 대신 결투를 청한 걸까

보자기 대신 주먹을 내밀고 만 걸까

 

머쓱한 마음에 뒷머리만 긁적이다 돌아섭니다

바보처럼

 

도처에 흘러넘치는 안녕 안녕

눈부신 인사들

평화의 감탄사들, 가까이할 수 없는

저 수많은 인사는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를 위한 성찬입니까 그대

 

나는 인사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줄 안녕이 없습니다

 

  • 같은 책, 78쪽

 

 

 

무척이나 단순명료해 보이는 시다. 문제는 그 명료함에서 그치는 데에 있다. 이 시는 그저 가식적인 사람들의 속내를 비꼬는 풍자에 불과할까? 몇 번을 읽어봐도 그 이상의 깊이나 의의는 눈에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더 묵직한 주제를 다뤄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 조금 더 깊이 성찰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이 시집에서 가장 깔끔하고 단정하면서 얕고 단순한 시일지 모르겠다.

오해와 후회는 다른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단추 하나 잃어버렸을 뿐인데//거울 밖으로 흉측한 손들이 튀어나와/빈 몸뚱이를 사정없이 낚아챈다’ ‘생일이 언제야? 물으면/망설이곤 해요 축하한다는 말은 때로/미안하다는 말과 같아’ 등 <심장에 가까운 말>은 그만큼 양심과 의심, 진심과 거짓에 근접한 단어들을 “까닭도 없이 드리워진 죽음의 행렬”(82p)처럼 늘어놓는다.

 

박소란의 시는 이 시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유독 과일, 음식이 반복되며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시는 먹을 것, 음식에 많은 연관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 음식들은 공통적으로 ‘어머니’와 전면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음식은 단순히 상징과 은유로 사용될 뿐 아니라, 화자의 다양한 감정과 이야기를 다의적으로 풀어내는 역할도 맡는다. 박소란 시인에게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시의 화자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어머니’가 지닌 고통과 비애의 상징을 엿볼 수 있다.

 

 

시멘트 바닥에 깨어진 감을 보았어요

어느 새벽 물기를 잔뜩 머금은 감나무가 기어코 떨어뜨린 감이었어요

머리를 말끔히 빗어넘긴 나무는 언제 벌써 저만치 멀어져갔고요

감은 제 텅 빈 속을 다 드러내고 부끄러운 표정마저 잃고

뜨겁게 일렁이는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잠시 살길을 궁리하듯이

다리를 절며 다가온 부랑견 한 마리 힐긋거리다 힘없이 킁킁거리다

이내 진저리치며 달아났어요

같이 가, 애원하고 싶어 더 붉어진 감이었어요

떨림이 채 가시지 않은 가슴속 씨가 따끔거려 조금 슬픈 것도 같았어요

간밤 꿈에는 죽은 엄마가 찾아왔어요 반쯤 물러진 얼굴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잤어요 긴긴 잠을, 아 달다

나는 달다

원 없이 잠꼬대를 피워본 감이었어요

슬픔 같은 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이는 감 우연히 발견된 해골처럼

모두들 흠칫 손을 감추어도

단 한번 울지 않는 그런 감을 나는 보았어요

 

같은 책, 14~15쪽

 

 

‘감’의 어머니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감나무가 기어코 떨어뜨린” 감은 같이 가자고 감나무에게 애원하지만 이미 감을 떨어뜨린 감나무는 다시 감을 매달 수 없다. 화자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꿈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제야 감은 “원 없이 잠꼬대를 피워”볼 수 있다. “슬픔 같은 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슬프지만 울지 않으려는 감의 아프고 외로운 시다. 다른 시에서도 어머니는 죽은 몸으로 등장한다. <배가 고파요>는 삼계탕이라는 음식을 사용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영혼처럼 불러낸다.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 같은 책, 20~21쪽

 

 

<감>에서는 감의 이미지를 가져와 어머니를 감나무로 화자를 감으로 비유했지만 이 시는 다르다. 직접적으로 삼계탕과 어머니를 연관지어 죽음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화자는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하고 생각하면서 고기를 삼키고 또 삼키지만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병과 상처로 몰아넣는다. 앞서 소개한 <너무 깊은 오해>에서도 화자는 고기를 먹고 배를 채운다. 그러나 결코 배부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당신은 내 빈 숟가락에/오해의 살점을 발라 얹어주기도 한다 먹어봐 맛있어/그걸 먹고 나는 산다 살고 있다고 다만/오해할 뿐’ 우리는 타인의 살을 먹고 뜯고 착취하고 오해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시인의 세계관은 부정적이며 기이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와 비슷해 그럴 듯한 현실감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참외 만두 설탕 김밥 등 음식들이 어머니와 어딘가 결여되고 결핍된 사회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그려낸다. <체념을 위하여>는 더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사망을 기록한다. “고백한다 밤낮 부레끓는 숨과 다투던 폐암 말기의 어머니/악착같이 달아 펄떡이던 몸뚱이를”

이 시에 따르면 어머니는 폐암으로 죽었다. 그리고 화자는 체념하고 또 체념한다. “희망과 야합한 적 없었다”며 “오로지 체념, 체념만을 택하였다”고. 어머니의 필연적인 타계를 앞두고 딸이 무슨 수를 쓸 수 있었을까. 마지막 단에서 화자의 결심은 더 굳건하고 처절하게 나타난다. ‘행여 우연히 한번쯤 더듬거리듯 옛날을 불러세운다 한들/절망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절망할 것이고/나는 기어이 침묵으로 순교할 것이다 다시 체념을 위하여/도망치듯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굳센 체념을’

시인은 울지 못해 <울음의 방>까지 만들지만 이곳에서도 울지 못한다.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고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거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거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몹시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 같은 책, 46~47쪽

 

 

화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다. 싸구려 자취방에 있었던 것이다. 이 방향으로 신중히 생각하면 시인의 죄와 한은 <울음의 방>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심장에 가까운 말>은 후회막심하고 비참한 속마음 모음집에 불과한 책일까. 이 시집만의 특색일 수 있지만 <우연의 완성>이라는 시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아니면 혹 너무 부정적으로 비쳐질까봐 약간의 긍정을 첨가한 것일까. ‘안녕, 난생처음/깡통을 뚫고 나온 골뱅이처럼 영원히 엔딩에 닿지 않는/한편의 영화처럼/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 이 문장은 여태 읽어온 문구 가운데 가장 섬세하게 와 닿는다. 어쩌면 사랑이란 한편의 영화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이지 않을까.

여전히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답은 닫혀있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열려있다. 사랑은 사람일 수도 자연일 수도 물건일 수도 사유일 수도 있고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체도 모르고 찾아 헤매거나 끌어안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은 사랑으로 순환된다.

박소란 시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 시인조차 자신의 사랑이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심장에 가까운 말>의 시들은 심장에 가까워 보이지만 때로 멀어 보이기도 하다. 병과 슬픔이 정말로 화자의 심장에, 우리의 심장에 가까운 낱말일까?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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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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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태신앙인입니다. 흔히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부모가 신앙인이면 나 자신도 신앙인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렴 상관없습니다. 이제 와서 불교나 천주교로 개종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답니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항상 교회에 관한 글쓰기를 거부해왔습니다. 일전에 교회를 다룬 소설을 쓴 적이 있었는데 사실 소설이라 부르기엔 아리송한, 현실과 허구의 구분이 애매하고 문장도 구성도 다분히 어설픈 글이었지요.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옛일이 회고되면서 자신감이 붙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저와 교회에 관해 본격적으로 전기를 써보려 합니다. 다소 어색하고 두서없어도 이해해주실 줄 믿습니다. 잠깐, 믿는다고 하니 꼭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혹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 글은 종교를 강요하거나 권유하는 글이 아니고 교리나 전례나 사회문제에 관한 글도 아닙니다. 그저 한 청소년의 삶과 교회에 한한 간단한 수필일 뿐입니다. 저는 자기 교회 다니라고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휴지를 건네주는 집사가 아니고 두 시간 동안이나 설교하고 장광설을 펼치며 방언까지 하는 목사도 아니며 굵직굵직하고 크나큰 음성으로 영광스러운 말씀을 전파하시는 예수님/하느님도 아닙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앞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기독교에 한정되어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나 천주교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절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가보았지만 한 번도 부처와 석가모니를 신앙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절은 거의 대부분 산에 있기 때문에 등산도 할 겸 깨끗한 공기와 물도 마실 겸 다녀간 것이지요. 이제 서두는 그만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 제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남 사생활이라 지루할지 모르지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애써 쓴 글인데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제 기억에 가장 오래된 교회는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입니다. 그때 저는 기껏해야 일곱 살 정도의 꼬마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다 누군가 나무라면 순식간에 수그러져 위축되는,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소심한 남자아이였지요. 제 몸이 작았던 탓인지 전반적인 교회 외양은 매우 커보였습니다. 아마 실제로도 컸을 겁니다. 기억에 남은 교회 일로는 성탄절인가 추수감사절인가, 하여간 어떤 행사입니다.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행사 날 곁에 붙어있었지요. 김호태(가명)라는 소년이었는데 같이 놀면서 잘 지내다가, 어느 날 놀이터에서 다퉈 헤어졌답니다. 특별히 아끼는 장난감을 부서뜨렸다는 이유인데 사실 그 애가 부순 게 아니라 제가 실수로 떨어뜨린 거였지요. 괜한 심술 때문에 사이가 멀어진 겁니다. 그때는 제가 어리고 욕심만 많았으니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아무튼 그날은 ‘달란트 시장’이라는 것을 여는 날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폐 단위 ‘달란트’를 차용해 주일학교 활동을 가장 열심히 한 학생에게 달란트를 듬뿍 주어 달란트 시장 때 나오는 장난감과 각종 과자, 음식들을 마음껏 사게 해줄 수 있는 이상야릇한 행사지요.

달란트를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든가 교회로 친구를 데려오면 됩니다. 새 신자를 배달(?)하면 집사님은 신이 나서 달란트를 200 400씩 잔뜩 준답니다. 저는 그렇게 달란트를 받는 애들을 보고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아, 나는 친구가 없어 달란트를 많이 받고 싶어도 못 받는구나… 하면서요. 그때는 어려서 이러한 장로회의 틀에 박힌 허영심 가득한 제도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달란트 시장 행사 날,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저는 달란트가 없어 콜팝 몇 컵 먹고 끝난 것으로 압니다. 엄청 멋있어 보이는 로봇 장난감이 있었지만 너무 비싸 제가 가진 돈으로는 살 수 없었지요. 천국은 돈으로는 결코 갈 수 없다 하는데, 로봇 장난감은 왜 돈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신성한 예배당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예수님께 혼쭐 난 상인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두 렙돈밖에 없는 저만 있을 뿐이지요.

 

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유리 파편처럼 쪼개진 것 같지만 서투르게나마 끼워 맞춰봅니다. 주기도문을 영어로 외워 성탄절 무대에 나가 암송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제가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외웠던 것 같습니다. 올 빠더 갓 헤븐 어쩌고 지껄인 것 같은데 막상 무대에 오르자 바짝 긴장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지요. 다행히도 평소 잘 대해주시던 선생님이 응원해 정상적으로 잘 읊었습니다. 이것 외에도 성탄절 날 별의별 행사를 한 것 같은데 세세하게 떠오르지는 않는군요.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저는, 그때, 그 선생님을,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제 인생 최초의 짝사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일곱 살인가,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마흔(추정)에 가까운 여자 선생님을 좋아하다니! 연상이 취향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를 뛰어넘은 금지된 사랑이라 해야 할까요? 그 선생님이 화장을 진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린 저에게도 그런 면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지요. 여러분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이 비밀은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저만의 것으로 간직하도록 하지요. 그 선생님이 지금도 잘 살고 계신지는,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 교회를 다닌 기간이 매우 짧아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가 매우 적습니다. 제가 이 교회만 다닌 게 아니니까요.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겨볼까요.

 

이사를 하면서 저는 유아세례를 받지 못했답니다. 덕분에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감명 깊고 은혜로운 세례를 받았지요. 포항 어딘가에 있는 교회를 떠나 포항 어딘가에 있는 다른 교회로 갔는데 이곳에 관한 추억은 참 많습니다. 고구마 호일에 싸서 구워먹고 논두렁에서 커다란 참개구리도 잡고 짚도 꼬고 가지도 떼어먹고… 정말이지 시골 느낌 가득 나는 따스하고 정겨운 곳이었습니다. 교회는 작았지만 그곳에서 친구들과 뛰어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근처 농장에서 호박만한 고구마도 캐보고, 벼메뚜기도 잡아 프라이팬에 튀겨먹었답니다. 그때 이후로 메뚜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여러분이 아직 드시지 않았다면 꼭 권하고 싶습니다. 웬만한 튀김요리 저리가라입니다. 수많은 맛집 블로거도 벼메뚜기를 먹어보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먹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벼메뚜기 철에 논에서 벼메뚜기를 잔뜩 잡습니다. 마구 잡아서 병에다 한가득 채워 넣습니다. 프라이팬에 기름 두르고 메뚜기를 넣은 다음 뚜껑을 닫습니다. 벼메뚜기들이 괴로워하며 탁탁 뛰다가 조용해지면 꺼냅니다. 날개만 떼고 다 먹습니다. 배는 조금 느끼할 수 있으니 원하신다면 배는 떼어내도 좋습니다. 곁들여 소금 후추 치고 다른 양념과 같이 먹으면 더욱 맛있겠지요.

 

이 교회에는 또래 친구가 많았습니다. 순하고 착한, 인정 많은 형도 있었고 버릇없는 동생도 있었지요. 유독 욕을 많이 하고 까칠한 녀석도 있었는데 기묘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저는 욕만 들으면 웃음이 났습니다. 누군가 욕을 하면 참을 수 없어 킥킥거렸지요. 물론 상대방이 저를 향해 하는 욕이나 악의가 담긴 욕을 들으면 몹시 불쾌해지지만, 친구끼리 장난치며 하는 욕을 들으면 웃을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때도 그 애가 ‘너희들 욕이 뭔지 알아?’ 하면서 가운뎃손가락을 쳐들었을 때, 너무 웃겨 하마터면 방뇨할 뻔했답니다. 제가 너무 이상하다고요? 저도 어쩌겠습니까. 웃음이 터져 나오는걸요.

추억들을 늘어놓다 보니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도 듣다 보면 재미있으실 겁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목사님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에게 제가 아주 모욕적인 발언을 했지요. “누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아?” 하고요. 그 누나는 키 작고 뚱뚱하고 못생겼었는데, 제가 정곡을 찌른 겁니다. 그 뒤로 그 누나와 사이가 틀어졌고 제 식구들은 여태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면서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군요. 이제 이런 사소한 잡념들은 제쳐놓고 다른 곳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세 번째 교회는 대전에 있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여전한지 모르겠군요. 그때 저는 두 번째 짝사랑을 했습니다. 저랑 나이가 같은 여자아이였는데 고백 한 번 못해보고 이사한 기억이 나네요. 유일하게 용기를 내 사진 한 장 찍어주었는데 그 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되었답니다. 사진 찍어주던 날 청소년부에서 다함께 스케이트장에 갔는데, 저는 그곳에서 엉덩방아를 크게 찧었지요. 옆에 있는 선생님이 균형을 잃어 저까지 넘어진 것인데 아직도 그 일 때문에 저는 스케이트를 싫어합니다. 빙판이 뻑뻑해 잘 미끄러지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불편하고 자꾸 넘어지고… 가장 싫어하는 스포츠를 꼽으라 하면 주저 않고 스케이트를 말할 겁니다. 저는 스케이트가 싫습니다. 하지만 스키는 꼭 타보고 싶군요. 그 여자애랑은 말도 많이 못 섞어봤답니다.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였다면 더 가깝게 지냈을 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아직도 가슴 한곳에 서성이고 있는 것 같네요.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이 교회에 담긴 추억이 많지 않습니다. 이때도 달란트 시장은 여전해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데리고 오자 집사님이 달란트를 듬뿍 주었던 게 기억납니다. 지금 장로회를 다니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아직도 달란트시장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발 그 이상한 행사 없어졌으면 합니다.

 

자, 네 번째 교회를 소개할까요. 이 교회는 지금 제가 다니고 있는, 여태까지 다녔던 교회 가운데 가장 만족스럽고 마음에 드는 교회입니다. 부천으로 이사하면서 가게 되었는데 제 의지로 선택한 교회가 아니었는데도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바로 서울에 있는 큰 성당인데요. 이곳은 유치한 CCM 찬송가도 없고 율동도 없습니다. 권사님이 억지로 손 꽉 잡고 율동하라며 강요하지도 다 같이 한 시간 내내 찬양만 부르지도 않고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어제 방영했던 드라마 얘기를 하지도 않지요. 장로회가 천주교의 예식과 전례를 완전히 무시하고 설교와 찬양만 한다면 이 교회는 전례가 있고 전통이 있답니다. 장로회보다 세력은 몹시 약하지만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신성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찬송가가 아닌 전통 성가를 부르고 설교도 오래 하지 않습니다. 복사라는 것도 있는데 예배 진행을 돕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2년 전부터 복사를 섰는데 조금 피곤하긴 해도 뜻 깊고 재미있답니다. 전례를 아주 가까이서 보고 체험할 수 있거든요. 복사마다 맡은 역할이 있어 촛대 드는 복사, 향 드는 복사, 십자가 드는 복사 등 나뉘어져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촛대를 하다 지금은 향을 듭니다. 장로회보다 훨씬 다채롭고 신비하고 웅장하고 멋진 곳이지요. 이곳에 온 후로 친구가 꽤 생겼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제가 1년 반 전부터 마음을 다잡고 노력해 활발하고 활력 넘치는 청소년으로 변신했습니다. 계속 그림자 같은 존재로 지내봤자 좋을 것 하나 없고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생각에 바꾸게 된 것이지요. 저는 제가 많이 변한 줄 몰랐는데 친구들은 빠른 기간 내에 변했다고 하더군요. 아직 소심한 성격은 많이 남아있지만 제가 외향적이고 활기찬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기만 합니다.

착한 친구들, 마음씨 좋은 신부님들, 편안한 예배 등 이 성당은 제게 최적화된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참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모님과 여러 번의 방황을 하다 마침내 제대로 된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으니까요. 혹여 오해하실까 말씀드리는데 성당이라 해서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성공회라는 기독교에 간 것이랍니다. 장로회와 많이 다르고 천주교와도 많이 다른 곳이지요. 이단이 아니니 걱정마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저는 세 번째 짝사랑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데이트 신청했다 차였답니다. 영화에서 보면 실연당한 남자들이 울고 난리도 아니던데 저는 슬프다기보다는 외려 시원했습니다. 2년 동안 묵혀놓은 감정을 단칼에 털어버리니 후련하더군요. 물론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지만요. 제가 정말로 상대방을 좋아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이제 새로운 사랑을 찾아볼까요.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을 배웠고 삶을 배웠습니다. 태권도학원 같은 곳을 제외하면 유일한 사회생활 장소가 교회였지요. 교회를 통해, 종교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부패와 오류로 범벅되었는지 깨달았고 사람관계를 배우며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나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많은 것을 배웁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사람을 대하는 법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저에게는 학교 대신 교회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게 교회는 삶의 전환이자 방향이자 나침반이라 할 수 있지요. 그만큼 교회가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 제 삶을 이끌어갔으니까요.

교회를 옮겨 다니며, 나이를 먹으면서 종교관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성부성자성령의 존재만 의심했는데 이제는 종교에 한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무한히 열리고 변모되는 것이지요. 하늘에 계신 하느님도 종교고 병자들을 치료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종교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과 따뜻한 햇살, 아침 이슬에 일렁이는 푸르른 잎사귀도 종교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종교고 재미있는 영화가 종교고 통기타 한 대가 종교입니다. 어떤 신이든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믿고 사랑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종교가 있을까 싶습니다. 한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 기억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웃고 떠들고 즐기고 노는 것이 곧 하느님이라고. 그 따뜻한 마음이 하느님이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이라고. 그분은 나중에 죽으면 교회에 놓여있는 의자 하나가 되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 말이 얼마나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제가 사이비 종교 같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여러분도 하느님, 부처님 같은 신을 믿으실 겁니다. 물론 안 믿으시는 분도 있고요. 그 신이 여러분께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 종교는 참 좋은 종교인 것입니다. 어떤 신은 진짜고 어떤 신은 가짜가 아니라, 내가 믿는 신도 진짜고 남이 믿는 신도 진짜인 것이지요. 제 말이 틀렸다고, 동의 못 하겠다고 반박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종교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든 그 종교가 여러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그보다 좋은 종교가 있을까 싶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별의별 잡다한 이야기까지 한 것 같군요. 하지만 이런 잡다한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재미있게 느껴졌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교회 이야기를 펼치면 밑도 끝도 없을 줄 알았는데 쓰기 시작하니 순식간이네요. 어느 정도 축약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요. 저는 신앙심이 깊지도 않고 가정예배를 무척이나 따분해하지만 종교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도 종교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각각 다 다를 겁니다. 내가 생각한 종교는 이런 것이야, 나는 이런 생활하면서 종교를 이렇게 접해왔어, 나는 종교가 뭔지 관심 없어 등등 저마다 갖고 계신 종교관이 무궁무진하겠지요. 부디 여러분도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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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에 오신 분 모두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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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년 전부터 글틴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근에 조금 뜸해졌지만 그래도 자주 방문해 글을 읽고 있는 회원 모로라 합니다. 이벤트가 진행되면서 무척이나 많은 회원분이 들어오셨네요. 새로 오신 분 모두 환영합니다! 감상&비평과 수필 게시판에는 소설과 시에 비해 작품이 적게 올라오는 편이라 네 분야 골고루 많이 활동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한동안 회의에 빠져 글을 못 쓰고 있었는데 다가오는 새해에는 올해보다 열심히 움직이려 합니다. 재미있는 글 많이 올려주시고, 댓글 많이 달아주시고, 글 쓰시면서 부담 갖지 마시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산뜻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글틴 여러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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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고서는 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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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들어보십시오

나는 감성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가까운 사람의 부고를 듣고도 아무 감정 없고

어머니가 죽어도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감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물 없고 슬픔 없고 애환 없는

여러분, 보십시오

그 어떤 사회적 개인적 고통을 겪어도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없습니다

나는 로봇인가요

감정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던가요

여러분, 저는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고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습니다

칼로 찔러도 총을 쏘아도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저는 무섭습니다 감정이 없어

저는 무섭습니다

여러분,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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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다 – [브레이브 원]을 감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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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생각하는 나, 밥을 먹는 나, 잠을 자는 나를 가슴속에 품은 채 때로는 행복하게 때로는 불행하게 오늘을 산다. ‘나’는 ‘나’다. 또 다른 나, 내 몸을 대신할 수 있는 제2의 자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플갱어 같은 미지의 생명체는 허무맹랑한 소문으로 간주되거나 신화적 동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간혹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다중인격자라 불리는 그들은 자신이 나 혼자만이 아닌 나와 같은 얼굴을 지녔지만 나와는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괴팍하고 사나운 모습의 나로 또 어떤 때는 상냥하고 가냘픈 나로 행동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유의 인격과는 별개로 이전까지의 나는 온데간데없는, 완전히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브레이브 원>에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제2의 나’는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슬프고 비참한 드라마를 통해 증명한다. 도플갱어 같은 근거 없는 괴담이 아니라 우리 주변 혹은 나에게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참혹한 사건을, <브레이브 원>은 과감하게, 첨예하게, 잔잔하게 파고든다.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 에리카 베인은 사랑하는 연인 데이빗과 함께 ‘낯선 자의 입구(STRANGERS GATE)’라는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길거리 조폭들에게 변을 당한다.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적잖이 발생하는 일련의 '묻지 마 폭행' 같이 조폭들은 에리카와 연인을 무참하게 폭행하며 캠코더로 폭행 장면을 촬영하면서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 둘은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연인 데이빗은 살아남지 못한다. 3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에리카는 데이빗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범인들이 체포되는 모습도 보지 못한다. 파출서로 가 수사를 촉구하지만 무능한 경찰들은 일처리를 거북이마냥 느릿느릿 진행할 뿐이다. 에리카는 급기야 불법으로 총기를 구입한다. 하지만 그녀가 맨 처음 시작한 복수는 연인을 죽음으로 몬 당사자들이 아닌 편의점에서 아내를 죽인 30대 남성이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살인을 목격한 에리카는 들고 있던 총으로 남성을 쏴 죽인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여러 명의 범죄자를 살해하고 친한 친구 머서 형사에게 발각되지만 형사는 외려 그녀의 복수에 협력한다. 에리카는 연인을 잃기 전 '나'가 아닌, 연인을 잃고 살인을 시작하고 난 뒤의 '나'로 살아간다.

 

영화는 에리카 베인이 뉴욕 거리를 누비며 라디오 중계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연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이다. 하지만 ‘STRANGERS GATE’라는 곳에 들어가 데이빗을 잃고 난 뒤 삶은 송두리째 전복된다. 여기서 ‘STRANGERS GATE’라는 공원은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낯선 문에 들어간 에리카는 실제로 낯선 자가 되어 나온다. 그녀는 두 번째 살인을 하고 익숙해진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또 다른 나, 낯선 자에게 “반가워” 하고 인사한다. 애인의 죽음 이후, 편의점의 살인 이후 완전히 변용된 나, 휘어지고 뒤틀린 나, 아니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매우 정상적인 나로 탈바꿈한 것이다. 낯선 자는 낯설 뿐이지 ‘틀린 나’가 아니다. ‘STRANGER’는 흉터와 통증으로 범벅된 '나'에게서 기인한다. 에리카는 우연히 만나게 된 형사 머서에게 인터뷰를 하며 말한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아픔 속에 태어난 나, 사람을 죽인 살인자 나는 진짜 나인 걸까, 같은 자문은 무의미하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든 새로운 나든 모두 같은 주체인 것을. 자아는 분립되어있지만 결코 분열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다중인격, 이중인격을 두고 자아분열이라 하지만 에리카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평범한 라디오 중계자 에리카에서 낯선 자 에리카로 연계되고 변신된 것이다.

 

에리카와 데이빗이 폭행당한 곳은 낯선 자의 문 속 음삼하게 생긴 터널이다. 이 터널은 서사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세부적인 역할을 맡는다. 에리카가 연인과 처음 터널에 들어갔을 때 자세히 관찰하면 화면이 몇 초간 몽환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촬영기법은 사건 이후 주인공의 심리적 후유증이 심화될 때마다 더 과도하게 기운다. 이러한 현상은 터널이 아닌 ‘통로’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에리카가 집안에 틀어박혀있다 친구의 부름으로 집밖을 나서려고 할 때 복도는 터널 때보다 훨씬 기운다. 장면의 중첩은 이밖에도 다양하게 펼쳐진다. 에리카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수술하기 위해 그녀의 옷을 잘라내는데 데이빗과 사랑을 나누는 이미지와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 장면은 영화 초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랑하는 순간의 탈의는 순식간에 괴로운 순간의 탈의로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탈의, 탈피는 지금의 ‘나’가 아닌 새로운 ‘나’, ‘낯선 자(STRANGER)’로 가는 시작점이다.

 

지하철에서 불량배들을 살해한 에리카는 완전히 낯선 자로 태어난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하고 얼굴을 씻은 다음 화장을 고친다. 의도적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띄는, 어두운 화장을 한다. 그리고 네 번째 살인, 형사 머서가 잡고 싶어 한 흉악범을 잔인하게 살해하기 전 에리카는 ‘낯선 자의 문’ 앞에서 장갑을 낀다. 그녀의 결심, 확고부동한 다짐은 낯선 자의 문 앞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굳건해진다. 에리카는 말한다. 나는 죽음을 위해 멈출 수 없었기에 죽음이 나를 멈추었다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에리카는 결국 그녀와 연인을 폭행한 조폭들을 남김없이 죽인다.

지하철 살인 때 만난 형사 머서는 에리카에게 용의자 다섯 명을 보여준다. 그녀는 한 명을 마주보고 잠깐 의식하지만 범인은 아니라고 부정하며 경찰서를 벗어난다. 머서는 이때부터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에리카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머서의 추측은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머서는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절대 못 져버릴, 나와 가까운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체포할 배짱이 있는지 자문하고는 형사로서의 의무를 포기하고 에리카의 복수를 도와준다.

에리카는 저당 잡힌 반지를 찾아내 조폭의 애인을 찾아가 폭행 당시의 영상을 얻어낸다.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그때의 장면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을 응시하며 그녀는 운다. 우리는 타인이 되지 않는 한 타인의 아픔을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 에리카는 공포와 두려움이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고 방송에서 털어놓는다. 이 대목은 극중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FM 90.1 MKW 방송을 들으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영화는 에리카가 데이빗과 함께 춤추며 들었던 음악이 울려 퍼지며 막을 내린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망각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낯선 자’가 된 에리카는 영원히 낯선 자로 살아간다. 평범한 내가 아닌, 낯선 자의 문에 출입해 낯선 자가 되어 나온 나로.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진짜 나에게서 파생된 친밀한 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방인이다. 사람들에 의해 배척되고 사람들에 의해 희생된 낯선 자. 비단 낯선 자는 <브레이브 원>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숱하게 태어난다. 세월호, 삼풍백화점, 셀 수 없이 많은 화재 등… 슬픔은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에리카는 또 다른 나, 제2의 자아이면서 제1의 자아인 나를 품고 잃어버린 애완견을 되찾아 처음 그 장소로 돌아간다. 낯선 문으로, 낯선 곳으로. 그리고 이제는 화면이 기울지 않는다. 그곳은 나의 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New york…… the safest big city in the world. but is horrible… to fear the place you once love. and to see a street corner you knew so well… and be afraid of its shadow. To see familiar steps, be unable climb them. I never understood how people lived with fear. woman afraid work home alone… people afraid of white powder in their mailbox… darkness and night. people afraid of people. I always believed that fear belonged to other people. weaker people. it never touched me. and then it did. and when it touches you, you know… that it’s been there are all along… waiting beneath the surfaces of everything you loved. and your skins crawls… and your heart sickens… and you look at the person you once were walking down that street… and you wonder, will you…? will you ever be her again?”

(뉴욕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죠. 하지만 끔찍해요. 사랑했던 도시를 두려워하는 게… 평소 다니던 길모퉁이에 드리운 그림자에 가슴이 철렁하고 평소 오르던 계단을 못 올라요. 공포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 못했죠. 밤길을 겁내는 여자들, 테러범들의 탄저균 공격을 겁내는 시민들. 어둠. 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공포는 나와 상관없다 생각했죠. 나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근데 아니더군요. 공포를 경험하면 그제야 깨닫죠. 처음부터 존재했고 내가 사랑한 것들 속에 잠복해있었다는 걸. 팔엔 소름이 돋고 가슴은 아려와요. 거리를 활보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문득 궁금해지죠. “옛날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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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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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게 말하지. 왜 말이 없냐고. 대답 좀 해보라고. 그러나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위축되어버리는데. 나는 이 빌어먹을 성격을 고치고 싶다. 한 동네 사는 다른 친구들은 질세라 사람들 앞에 당당히 마주서서 자신의 빛나는 모습과 기품 가득한 면모와 개성 넘치는 장기를 펼쳐보이곤 하는데 나는 항상 그림자 뒤에 숨어 타인의 눈치만 살핀다. 사람들은 내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건네지만 나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알아서 내가 별 훌륭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구시렁거리며 떠나간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엔 복잡 미묘한, 이상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앞으로 나아가 사회 속에서 부조리한 시선을 견뎌내며 꿋꿋이 살아갈까? 사람들의 눈초리와 입에 발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칭찬과 탄사와 경멸 가득한 비난과 모욕과 혐오를 버텨내며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갈까? 그러나 나에게는 용기가 없다. 차마 저들 앞에 서서 내 추태를 대놓고 자랑할 자신이 없다. 무엇이 유익해서, 무엇이 뿌듯해서 떳떳하게 내 모습을 남들에게 허물없이 드러낼 것인가. 이대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먹을 것만 뱃속에 욱여넣으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텨내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나는 끝까지 입을 닫을 생각이다. 아니, 애초에 벌리지도 못할 입 음식밖에 모르는 입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나는 그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없다. 당신들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다. 내 목숨은 이곳을 관리하는 주인 손에 달려있을 뿐이다. 유리 막 속에 갇혀,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주인이 부어지는 모이만 퍼먹고 평생을 전시장에서 보내야하는 게 바로 나 앵무새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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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도달하는 방법 – [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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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도서관에 갔을 때, 깔끔한 표지에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광고문구가 적힌 책을 발견했다. 다른 한국소설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유독 그 책에는 호감이 갔다. 제목은 <고요한 밤의 눈>이었고 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박주영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번 찜해둔 책은 목록에 올려놨다 나중에라도 꼭 읽는 편인데, 그때도 다른 책 읽느라 바빠 잠시 미뤄뒀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일념은 없었다.

 

그러다 몇 달 뒤, 혼불문학상 수상작 독후감 대회가 열려 나는 주저 없이 <고요한 밤의 눈>을 골랐다. 내가 이 소설을 고른 건 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밤의 눈이라,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건지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건지, 중의적인 제목이지만 재미있었다. 게다가 스파이 소설이라니. 나는 SF 환상소설이나 첩보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든 건 마피아가 등장하고 총을 쏴대는 진부한 첩보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읽지 않던 장르라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아서 신선했다.

 

책은 금방 읽혔다. 상당히 짧은 소설이라 꾸준히 읽어 두 시간 만에 완독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의 기억을 잃고 갈 곳 없이 방황하는 X, 쌍둥이 언니가 실종되고 혼자 상담실을 운영하는 D, X를 감시하며 승진을 바라는 Y, 부하들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B, 요원들을 총괄하는 헌책방 노인,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는 Z. 주요 등장인물은 이렇게 여섯 명이다. 특이한 것은 이 등장인물들이 일반적인 1, 3인칭 시점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작가는 매번 한 명씩 돌아가면서 화자가 바뀌는 소설 기법을 차용했는데, 이 기법은 오래전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한 많은 작가가 써온 실험 기법이다. 대부분의 한국소설은 이 형식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박주영 작가는 1인칭 화자를 번갈아 서술하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은 사실상 모두 주인공이다. 크고 작은 비중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행복이다. 매 장에 ‘Happy’가 붙는 것도 인물들의 목표이자 종착지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아 헤맬까.

 

소설은 가장 비중이 큰 X와 Y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X는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깨어난 스파이다. 그는 15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려, 첩보요원도 회사원 직책도, 모든 것이 낯설고 답답하기만 하다. 소설 초반의 X는 현실과 꿈을 혼동하는,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또 다른 스파이 Y를 만나고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Y는 X를 감시하라고 보내진 요원이다. 둘은 요원으로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애써 거짓된 행동을 하지만, 서로 사랑에 빠진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뇌하고, 방황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맨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지 갈등하다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몇몇 평론가는 이런 점을 짚어 실존의 문제, 실존문학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행복이 있는 세상이다.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이자 기회는 ‘패자의 서’라는 책을 통해 발현된다.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작가는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열린 상태로 끝낸다. 이야기는 열려있어 행복을 향한 길을 보여주고, 효과적으로 핵심 주제를 전달하며, 가능성과 희망을 폭넓게 제시한다. 첫 장이 에필로그, 마지막 장이 프롤로그인 것도 소설이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구하는 방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시간도 기억도 아닌 사랑만이,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사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장마다 New Memory, New World, New Year는 적혀있어도 love는 없다. 진정한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자가 직접 알아낼 수 있도록 은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법으로 작가는 더욱 효율적으로 서사를 구체화한다. D는 상담실을 찾아온 X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이 나라, 이 지구, 그리고 결국은 나의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가벼운 첩보물이 아니다. 현대 사회 체제를 진지하게 비판하고,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행복이 무엇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천명하는 잔잔한 드라마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권력도 계급도 아닌, 사랑과 행복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행복을 갈구하며 살아갈까.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은 돈의 행복, 권력의 행복 등 사람들이 얻고 싶어 하는 행복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단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자연과 더불어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고. <고요한 밤의 눈>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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