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에 오신 분 모두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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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년 전부터 글틴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근에 조금 뜸해졌지만 그래도 자주 방문해 글을 읽고 있는 회원 모로라 합니다. 이벤트가 진행되면서 무척이나 많은 회원분이 들어오셨네요. 새로 오신 분 모두 환영합니다! 감상&비평과 수필 게시판에는 소설과 시에 비해 작품이 적게 올라오는 편이라 네 분야 골고루 많이 활동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한동안 회의에 빠져 글을 못 쓰고 있었는데 다가오는 새해에는 올해보다 열심히 움직이려 합니다. 재미있는 글 많이 올려주시고, 댓글 많이 달아주시고, 글 쓰시면서 부담 갖지 마시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산뜻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글틴 여러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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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고서는 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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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들어보십시오

나는 감성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가까운 사람의 부고를 듣고도 아무 감정 없고

어머니가 죽어도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감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물 없고 슬픔 없고 애환 없는

여러분, 보십시오

그 어떤 사회적 개인적 고통을 겪어도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없습니다

나는 로봇인가요

감정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던가요

여러분, 저는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고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습니다

칼로 찔러도 총을 쏘아도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저는 무섭습니다 감정이 없어

저는 무섭습니다

여러분,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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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다 – [브레이브 원]을 감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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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생각하는 나, 밥을 먹는 나, 잠을 자는 나를 가슴속에 품은 채 때로는 행복하게 때로는 불행하게 오늘을 산다. ‘나’는 ‘나’다. 또 다른 나, 내 몸을 대신할 수 있는 제2의 자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플갱어 같은 미지의 생명체는 허무맹랑한 소문으로 간주되거나 신화적 동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간혹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다중인격자라 불리는 그들은 자신이 나 혼자만이 아닌 나와 같은 얼굴을 지녔지만 나와는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괴팍하고 사나운 모습의 나로 또 어떤 때는 상냥하고 가냘픈 나로 행동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유의 인격과는 별개로 이전까지의 나는 온데간데없는, 완전히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브레이브 원>에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제2의 나’는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슬프고 비참한 드라마를 통해 증명한다. 도플갱어 같은 근거 없는 괴담이 아니라 우리 주변 혹은 나에게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참혹한 사건을, <브레이브 원>은 과감하게, 첨예하게, 잔잔하게 파고든다.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 에리카 베인은 사랑하는 연인 데이빗과 함께 ‘낯선 자의 입구(STRANGERS GATE)’라는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길거리 조폭들에게 변을 당한다.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적잖이 발생하는 일련의 '묻지 마 폭행' 같이 조폭들은 에리카와 연인을 무참하게 폭행하며 캠코더로 폭행 장면을 촬영하면서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 둘은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연인 데이빗은 살아남지 못한다. 3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에리카는 데이빗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범인들이 체포되는 모습도 보지 못한다. 파출서로 가 수사를 촉구하지만 무능한 경찰들은 일처리를 거북이마냥 느릿느릿 진행할 뿐이다. 에리카는 급기야 불법으로 총기를 구입한다. 하지만 그녀가 맨 처음 시작한 복수는 연인을 죽음으로 몬 당사자들이 아닌 편의점에서 아내를 죽인 30대 남성이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살인을 목격한 에리카는 들고 있던 총으로 남성을 쏴 죽인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여러 명의 범죄자를 살해하고 친한 친구 머서 형사에게 발각되지만 형사는 외려 그녀의 복수에 협력한다. 에리카는 연인을 잃기 전 '나'가 아닌, 연인을 잃고 살인을 시작하고 난 뒤의 '나'로 살아간다.

 

영화는 에리카 베인이 뉴욕 거리를 누비며 라디오 중계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연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이다. 하지만 ‘STRANGERS GATE’라는 곳에 들어가 데이빗을 잃고 난 뒤 삶은 송두리째 전복된다. 여기서 ‘STRANGERS GATE’라는 공원은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낯선 문에 들어간 에리카는 실제로 낯선 자가 되어 나온다. 그녀는 두 번째 살인을 하고 익숙해진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또 다른 나, 낯선 자에게 “반가워” 하고 인사한다. 애인의 죽음 이후, 편의점의 살인 이후 완전히 변용된 나, 휘어지고 뒤틀린 나, 아니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매우 정상적인 나로 탈바꿈한 것이다. 낯선 자는 낯설 뿐이지 ‘틀린 나’가 아니다. ‘STRANGER’는 흉터와 통증으로 범벅된 '나'에게서 기인한다. 에리카는 우연히 만나게 된 형사 머서에게 인터뷰를 하며 말한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아픔 속에 태어난 나, 사람을 죽인 살인자 나는 진짜 나인 걸까, 같은 자문은 무의미하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든 새로운 나든 모두 같은 주체인 것을. 자아는 분립되어있지만 결코 분열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다중인격, 이중인격을 두고 자아분열이라 하지만 에리카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평범한 라디오 중계자 에리카에서 낯선 자 에리카로 연계되고 변신된 것이다.

 

에리카와 데이빗이 폭행당한 곳은 낯선 자의 문 속 음삼하게 생긴 터널이다. 이 터널은 서사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세부적인 역할을 맡는다. 에리카가 연인과 처음 터널에 들어갔을 때 자세히 관찰하면 화면이 몇 초간 몽환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촬영기법은 사건 이후 주인공의 심리적 후유증이 심화될 때마다 더 과도하게 기운다. 이러한 현상은 터널이 아닌 ‘통로’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에리카가 집안에 틀어박혀있다 친구의 부름으로 집밖을 나서려고 할 때 복도는 터널 때보다 훨씬 기운다. 장면의 중첩은 이밖에도 다양하게 펼쳐진다. 에리카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수술하기 위해 그녀의 옷을 잘라내는데 데이빗과 사랑을 나누는 이미지와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 장면은 영화 초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랑하는 순간의 탈의는 순식간에 괴로운 순간의 탈의로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탈의, 탈피는 지금의 ‘나’가 아닌 새로운 ‘나’, ‘낯선 자(STRANGER)’로 가는 시작점이다.

 

지하철에서 불량배들을 살해한 에리카는 완전히 낯선 자로 태어난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하고 얼굴을 씻은 다음 화장을 고친다. 의도적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띄는, 어두운 화장을 한다. 그리고 네 번째 살인, 형사 머서가 잡고 싶어 한 흉악범을 잔인하게 살해하기 전 에리카는 ‘낯선 자의 문’ 앞에서 장갑을 낀다. 그녀의 결심, 확고부동한 다짐은 낯선 자의 문 앞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굳건해진다. 에리카는 말한다. 나는 죽음을 위해 멈출 수 없었기에 죽음이 나를 멈추었다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에리카는 결국 그녀와 연인을 폭행한 조폭들을 남김없이 죽인다.

지하철 살인 때 만난 형사 머서는 에리카에게 용의자 다섯 명을 보여준다. 그녀는 한 명을 마주보고 잠깐 의식하지만 범인은 아니라고 부정하며 경찰서를 벗어난다. 머서는 이때부터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에리카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머서의 추측은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머서는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절대 못 져버릴, 나와 가까운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체포할 배짱이 있는지 자문하고는 형사로서의 의무를 포기하고 에리카의 복수를 도와준다.

에리카는 저당 잡힌 반지를 찾아내 조폭의 애인을 찾아가 폭행 당시의 영상을 얻어낸다.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그때의 장면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을 응시하며 그녀는 운다. 우리는 타인이 되지 않는 한 타인의 아픔을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 에리카는 공포와 두려움이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고 방송에서 털어놓는다. 이 대목은 극중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FM 90.1 MKW 방송을 들으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영화는 에리카가 데이빗과 함께 춤추며 들었던 음악이 울려 퍼지며 막을 내린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망각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낯선 자’가 된 에리카는 영원히 낯선 자로 살아간다. 평범한 내가 아닌, 낯선 자의 문에 출입해 낯선 자가 되어 나온 나로.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진짜 나에게서 파생된 친밀한 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방인이다. 사람들에 의해 배척되고 사람들에 의해 희생된 낯선 자. 비단 낯선 자는 <브레이브 원>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숱하게 태어난다. 세월호, 삼풍백화점, 셀 수 없이 많은 화재 등… 슬픔은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에리카는 또 다른 나, 제2의 자아이면서 제1의 자아인 나를 품고 잃어버린 애완견을 되찾아 처음 그 장소로 돌아간다. 낯선 문으로, 낯선 곳으로. 그리고 이제는 화면이 기울지 않는다. 그곳은 나의 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New york…… the safest big city in the world. but is horrible… to fear the place you once love. and to see a street corner you knew so well… and be afraid of its shadow. To see familiar steps, be unable climb them. I never understood how people lived with fear. woman afraid work home alone… people afraid of white powder in their mailbox… darkness and night. people afraid of people. I always believed that fear belonged to other people. weaker people. it never touched me. and then it did. and when it touches you, you know… that it’s been there are all along… waiting beneath the surfaces of everything you loved. and your skins crawls… and your heart sickens… and you look at the person you once were walking down that street… and you wonder, will you…? will you ever be her again?”

(뉴욕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죠. 하지만 끔찍해요. 사랑했던 도시를 두려워하는 게… 평소 다니던 길모퉁이에 드리운 그림자에 가슴이 철렁하고 평소 오르던 계단을 못 올라요. 공포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 못했죠. 밤길을 겁내는 여자들, 테러범들의 탄저균 공격을 겁내는 시민들. 어둠. 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공포는 나와 상관없다 생각했죠. 나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근데 아니더군요. 공포를 경험하면 그제야 깨닫죠. 처음부터 존재했고 내가 사랑한 것들 속에 잠복해있었다는 걸. 팔엔 소름이 돋고 가슴은 아려와요. 거리를 활보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문득 궁금해지죠. “옛날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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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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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게 말하지. 왜 말이 없냐고. 대답 좀 해보라고. 그러나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위축되어버리는데. 나는 이 빌어먹을 성격을 고치고 싶다. 한 동네 사는 다른 친구들은 질세라 사람들 앞에 당당히 마주서서 자신의 빛나는 모습과 기품 가득한 면모와 개성 넘치는 장기를 펼쳐보이곤 하는데 나는 항상 그림자 뒤에 숨어 타인의 눈치만 살핀다. 사람들은 내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건네지만 나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알아서 내가 별 훌륭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구시렁거리며 떠나간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엔 복잡 미묘한, 이상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앞으로 나아가 사회 속에서 부조리한 시선을 견뎌내며 꿋꿋이 살아갈까? 사람들의 눈초리와 입에 발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칭찬과 탄사와 경멸 가득한 비난과 모욕과 혐오를 버텨내며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갈까? 그러나 나에게는 용기가 없다. 차마 저들 앞에 서서 내 추태를 대놓고 자랑할 자신이 없다. 무엇이 유익해서, 무엇이 뿌듯해서 떳떳하게 내 모습을 남들에게 허물없이 드러낼 것인가. 이대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먹을 것만 뱃속에 욱여넣으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텨내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나는 끝까지 입을 닫을 생각이다. 아니, 애초에 벌리지도 못할 입 음식밖에 모르는 입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나는 그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없다. 당신들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다. 내 목숨은 이곳을 관리하는 주인 손에 달려있을 뿐이다. 유리 막 속에 갇혀,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주인이 부어지는 모이만 퍼먹고 평생을 전시장에서 보내야하는 게 바로 나 앵무새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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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도달하는 방법 – [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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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도서관에 갔을 때, 깔끔한 표지에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광고문구가 적힌 책을 발견했다. 다른 한국소설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유독 그 책에는 호감이 갔다. 제목은 <고요한 밤의 눈>이었고 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박주영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번 찜해둔 책은 목록에 올려놨다 나중에라도 꼭 읽는 편인데, 그때도 다른 책 읽느라 바빠 잠시 미뤄뒀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일념은 없었다.

 

그러다 몇 달 뒤, 혼불문학상 수상작 독후감 대회가 열려 나는 주저 없이 <고요한 밤의 눈>을 골랐다. 내가 이 소설을 고른 건 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밤의 눈이라,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건지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건지, 중의적인 제목이지만 재미있었다. 게다가 스파이 소설이라니. 나는 SF 환상소설이나 첩보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든 건 마피아가 등장하고 총을 쏴대는 진부한 첩보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읽지 않던 장르라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아서 신선했다.

 

책은 금방 읽혔다. 상당히 짧은 소설이라 꾸준히 읽어 두 시간 만에 완독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의 기억을 잃고 갈 곳 없이 방황하는 X, 쌍둥이 언니가 실종되고 혼자 상담실을 운영하는 D, X를 감시하며 승진을 바라는 Y, 부하들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B, 요원들을 총괄하는 헌책방 노인,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는 Z. 주요 등장인물은 이렇게 여섯 명이다. 특이한 것은 이 등장인물들이 일반적인 1, 3인칭 시점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작가는 매번 한 명씩 돌아가면서 화자가 바뀌는 소설 기법을 차용했는데, 이 기법은 오래전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한 많은 작가가 써온 실험 기법이다. 대부분의 한국소설은 이 형식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박주영 작가는 1인칭 화자를 번갈아 서술하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은 사실상 모두 주인공이다. 크고 작은 비중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행복이다. 매 장에 ‘Happy’가 붙는 것도 인물들의 목표이자 종착지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아 헤맬까.

 

소설은 가장 비중이 큰 X와 Y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X는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깨어난 스파이다. 그는 15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려, 첩보요원도 회사원 직책도, 모든 것이 낯설고 답답하기만 하다. 소설 초반의 X는 현실과 꿈을 혼동하는,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또 다른 스파이 Y를 만나고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Y는 X를 감시하라고 보내진 요원이다. 둘은 요원으로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애써 거짓된 행동을 하지만, 서로 사랑에 빠진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뇌하고, 방황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맨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지 갈등하다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몇몇 평론가는 이런 점을 짚어 실존의 문제, 실존문학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행복이 있는 세상이다.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이자 기회는 ‘패자의 서’라는 책을 통해 발현된다.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작가는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열린 상태로 끝낸다. 이야기는 열려있어 행복을 향한 길을 보여주고, 효과적으로 핵심 주제를 전달하며, 가능성과 희망을 폭넓게 제시한다. 첫 장이 에필로그, 마지막 장이 프롤로그인 것도 소설이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구하는 방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시간도 기억도 아닌 사랑만이,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사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장마다 New Memory, New World, New Year는 적혀있어도 love는 없다. 진정한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자가 직접 알아낼 수 있도록 은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법으로 작가는 더욱 효율적으로 서사를 구체화한다. D는 상담실을 찾아온 X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이 나라, 이 지구, 그리고 결국은 나의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가벼운 첩보물이 아니다. 현대 사회 체제를 진지하게 비판하고,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행복이 무엇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천명하는 잔잔한 드라마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권력도 계급도 아닌, 사랑과 행복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행복을 갈구하며 살아갈까.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은 돈의 행복, 권력의 행복 등 사람들이 얻고 싶어 하는 행복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단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자연과 더불어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고. <고요한 밤의 눈>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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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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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곳에 들어가면 항상 먼지 그득한 공기와 곰팡이 슬은 책 냄새가 풍긴다. 답답한 기운 때문에 들어가기가 꺼려지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생각은 달라진다.

회색 개미는 신전 기둥처럼 양옆으로 우뚝우뚝 솟은 책 더미들을 피해 현관문으로 돌진한다. 자칫 방심하면 허공 위 신발에게 쥐도 새도 곤충도 모르게 밟혀 죽을 수 있다. 주말에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회색 개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헤르만 헤세, 이청준과 황순원을 지나쳐 내 집으로 들어온다.

“이봐, 검정 개미! 오랜만이야! 내가 왔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와? 큰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걸 봐. 정말…… 울 뻔했다니까.”

그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 두툼한 것을 꺼낸다. 회색 개미는 방금 전까지 백과사전 구역에서 두꺼운 소설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얼굴에 장판처럼 열이 나 있다. 식식거리는 콧김이 내 눈앞까지 퍼져온다. 그는 천만 분의 일 확률로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소돔 120일> 초판을 발견했노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자랑했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구하기 힘든, 희귀본도 아닌 초 희귀본 <성처녀의 욕망> <안방철학> <사랑의 죄악> <신부님의 금지된 장난> 등 유명 사드 소설은 모두 발에 넣었지만 국내 초판 <소돔 120일>은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운 좋게, 운명적으로 <소돔 120일>을 찾아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큼지막한 소설 두 권이 그의 발톱에 들려있었다. 나는 이런 희귀본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살면서 두 눈으로 구경하기도 힘든 책을 일일이 수집하는 그의 열정과 긍지가 감명 깊었다. 그에게 고서 수집은 취미라기보다 의무에 가까웠다.

나야 다 쓰러져가는 책방에서 워낙 오랫동안 성인잡지만 읽어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지만, 그는 유독 세계고전만 보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새 책을 발견했다는 충격과 쾌감에 젖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일단 내 집에서 한밤 자고 가기를 권했다. 시간이 늦은데다 책방도 곧 문을 닫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주인이 문을 걸어 잠가서 온전히 곤충들의 세계가 되지만, 불빛도 꺼지기 때문에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간대가 되면 개미 꽃무지 나비 무당벌레 등은 피곤한 눈을 쉬게 하고 각자 발을 씻거나 야식을 먹고 숙면에 접어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주인이 문을 닫지 않는다. 곤충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새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마트폰을 켜서 시시한 영상을 감상하고 있다. 저대로 있으면 새벽 두 시가 넘어도 잠이 드는 법이 없다. 대체 무슨 대단한 영상인지 한번 붙잡으면 다섯 시간도 넘게 본 적 있다.

나는 서둘러 회색 개미를 깨웠다.

“이봐, 회색 개미! 얼른 일어나서 저것 좀 봐!”

회색 개미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 창문을 통해 책방 주인을 바라봤다. 나는 회색 개미의 눈알이 물을 먹은 듯 점점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저게 뭐하는 짓이야?”

“가끔씩 주인이 저런 행동을 하더라고. 근데 딱히 놀랄 일은 아니잖아?”

“아니야…… 내 책!”

회색 개미는 황급히 책장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가 상 · 하 로 나뉜 <소돔 120일>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나도 그를 뒤따라 책을 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가져갔거나 그새 손님이 들어와 사갔거나 둘 중 하나다. 아니면 회색 개미가 다른 곳에 두었는데 잊어버리고 엉뚱한 구역에서 뒤지고 있는지 모른다. 어찌 됐든 회색 개미는 혈안이 되어 땀을 들기름처럼 줄줄 흘리면서 서가를 헤집어놓고 있다. 20분 넘게 뒤져도 나오지 않자 종이를 북북 찢어 이리저리 흩날린다.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나는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지금은 밤이고, 이런 한밤중에 헌책방에 들어와 책을 사가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산다 해도 그 잡지를 딱 골라 가져가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이미 늦었다. <소돔 120일>은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방법은 있었지만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었는데 회색 개미는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골목골목 집마다 돌아가며 문을 두드렸다.

“어이! 사마귀! 문 열어봐, 당장!”

왕사마귀가 졸린 눈으로 삐걱 문을 연다.

“무슨 일인데 이리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잠 좀.”

회색 개미는 이웃 간의 예의범절도 무시한 채 무작정 안으로 쳐들어가 서랍이며 옷장이며 아무렇게나 파헤친다.

“어디 숨겨놓은 거야? 얼른 내놓지 못해!”

결국 회색 개미와 왕사마귀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고 결과는 당연히 회색 개미의 패배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는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린다.

“야, 오색나비, 문 열어! 꿀벌들아, 노린재야, 하늘소야, 문 열어보라고!”

이런 소란에 참다못한 주민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회색 개미에게 항의한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이 난리를 피워요? 정 못 찾겠으면 다같이 찾으면 되잖아요?”

꽃매미 부인이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자 회색 개미는 그제야 수그러져 주눅 들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에이, 진즉에 그리 말해줬으면 될 것을…… 그럼 같이 찾아봅시다.”

화날 대로 화난 곤충 주민들은 차마 분을 풀지 못하고 흩어져서 <소돔 120일> 두 권을 찾기 시작했다. 나도 주민들을 도와 구석구석 청소하며 책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책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금방 어디론가 휙 없어질 수 있을까? 이건 아무리 봐도 누가 훔쳐간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이유로, 누가, 왜?

유력한 절도범은 윗집 사는 달팽이 영감이었다. 이 끈적끈적하고 느린 노인(노파)은 구부러진 숟가락 깨진 접시 조각 엉킨 실 뭉치 등 각종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일이 취미인 동물이었다. 늙었고 동물이다 보니 우리 곤충들은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소돔 120일>을 슬쩍 가져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달팽이 영감 현관문을 두드렸다.

“할아범 아니 할멈, 아니 할아범 에잇 어르신, 잠깐 방문할 수 있을까요?”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야? 내 물건을 훔쳐가려고 하는 놈이.”

“물건 훔친 놈은 당신이잖아요, 어르신.”

“뭐? 어느 놈이 바락바락 말대꾸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더 말할 거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뒤에서 달팽이 노인이 소리치는 것도 무시하고 창고로 내려가 책을 찾는다. 이상하다. 여기에도 없다. 주민들이 몰려와 한 시간을 넘게 파헤쳤는데도 책은커녕 종잇조각 하나 나오지 않는다. 회색 개미는 울부짖는다.

“이 영악한 놈! 아니, 년! 어디다 숨겼어?”

“숨겼다니…… 난 책 같은 것 보지도 못했다고.”

“거짓말하지 마! 네가 안 숨겼으면 대체 누가 숨겼다는 거야? 책이 있는 곳을 밝히란 말이야!”

달팽이 노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애꿎은 늙은이만 잡은 셈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집안을 샅샅이 훑었지만 나오는 건 갖가지 쓰레기와 먼지 뿐, <소돔 120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회색 개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지쳐있었고 주민들도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두들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책방 주인이 문을 열 테고 손님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회색 개미는 미쳐버릴지 모른다. 자기 혼자 미치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탐색을 그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힘이 빠진 상태였다. 쓰레받기로 걸레로 청소를 해서 그런지 콧속에 뻑뻑한 먼지가 가득 끼어있었고 얼굴도 거무튀튀하게 검댕이 묻어있었다. 나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곤충이 그랬다. 다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씻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주민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잠도 못 주무시고 제 친구 회색 개미 때문에 열심히 책 찾으려 노력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안 찾으셔도 되니(회색 개미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민들은 내 말을 듣고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투덜대며 회색 개미를 나무라면서. 나 같으면 도와주지도 않고 쌍욕이나 퍼부은 다음 늘어지게 잠이나 잘 텐데 참 성품도 좋은 분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서있는데 대뜸 회색 개미가 다가와 시비를 건다.

“야, 검정 개미. 너 방금 뭐랬냐? 나 때문에 뭐가 어째? 너 지금 책 못 찾은 게 나 때문이라고 했냐? 하, 참나 어이가 없어서. 야 이 새끼야. 내가 이때까지 너한테 해준 게 얼만 줄 알아? 매일 집 찾아갈 때마다 진딧물 열 마리에 설탕 한 봉지까지 안 가져간 게 없어. 그리고 하루 종일 네 하소연 듣느라 얼마나 진을 빼는지 알기나 해? 기껏 이야기 들어줬더니 친구라는 게 배신 때리고 자빠졌네. 이 진드기만도 못한 새끼야.”

나는 그의 거친 언행에 살짝 놀랐지만 당당히 대응했다.

“뭐? 새끼? 야, 진짜 족보 더러운 회색 개미새끼가 나보고 새끼란다. 그러니까 누가 소돔 120일 같은 쓰레기 변태 소설 찾아내래. 그딴 싸구려 찾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고생할 일 없었잖아 안 그래? 넌 네 스스로 일거리를 만드는 거야 이 멍청한 개미새끼야. 알았어? 알았으면 집에 돌아가서 발 씻고 잠이나 처 자 새끼야.”

회색 개미는 적잖이 놀랐는지 가만히 내 눈만 쳐다보다 이내 씨부렁대며 물러갔다. 궁시렁 궁시렁, 지가 뭘 안다고.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린 채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정말 힘겨운 날이다. 괜히 소돔이란 책 때문에 이런 소동이 일어났으니. 사마귀를 비롯한 곤충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지, 미안해야할 건 내가 아니라 회색 개미인 거야. 암 그렇고말고……

내가 상념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회색 개미였다.

“또 뭐야? 왜 찾아왔어?”

문을 열자 회색 개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오줌을 지리면서 말한다.

“거… 검정 개미야… 큰일 났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생쥐였다. 생쥐가 앞발로 내 집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회색 개미는 벌벌 떨면서 내게 매달렸다.

“저것 좀 쫓아줘! 검정 개미야! 넌 나보다 힘세잖아! 빨리!”

나는 아기처럼 울어대는 그가 꼴불견이었지만 내 집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움직였다. 집이 잿더미로 변해버리기 전에 망할 놈의 생쥐를 쫓아내야 했다. 나는 지하 창고로 내려가 미리 모아놓았던 폭탄먼지벌레 산(酸) 세 병을 꺼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생쥐는 더러운 음식 찌꺼기가 묻은 코를 킁킁대며 식량을 찾고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머리 위에 산을 뿌렸다. 세 병 다 빠짐없이. 생쥐는 비명을 지르고는 우스꽝스럽게 폴짝폴짝 뛰면서 벽 구멍 너머로 줄행랑 쳤다. 역시 생쥐까지 물리치는 나는 대단하다. 자만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니 독자 여러분은 읽으면서 눈살 찌푸리지 마시길. 내가 잠깐 생쥐를 몰아낸 사이 회색 개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서 외침소리가 들렸다.

“이걸 봐! 이걸 보라고! 드디어 찾은 것 같아!”

그는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화색이 되어있었다. 생쥐 보금자리에서 책을 찾은 모양이었다. 나도 뒤따라갔는데 이내 실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책이 아니라 신문지였어.”

이제 그도 나도 지쳤다. 어디를 봐도 책장에는 없고 주민들 집에도 달팽이집에도 없고 생쥐 집에도 없으니 <소돔 120일>은 하늘로 날아갔거나 땅으로 파묻힌 게 틀림없었다.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회색 개미야, 아까 화내서 미안했다. 그만 관두고 들어가서 쉬어. 내일 다시 찾도록 해.”

그러나 그는 표정이 달랐다. 마치 금방이라도 한강에 뛰어들 얼굴이었다. 눈알은 벌겋게 충혈 되고 볼 살은 쭉 빠져서 광대뼈가 들어났으며 배는 볼품없이 쪼그라져서 노인의 주름살 같이 되었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그래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진작 포기하는 건데… 내가 멍청했다.”

나는 아니라고 수고했다고 위로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신없는 하루였다. 내일은 제발 그놈의 망할 책이 나타나 회색 개미의 입을 틀어막아주길.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바깥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생쥐가 찾아왔나 싶었지만 살아있는 생물의 소리는 아니었다. 뭔가 작은 것이 찌그러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책방 밖 도로를 내다보았다. 회색 개미가 보였다. 납작하게 뭉그러져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누워있었다. 차바퀴에 깔려 죽은 것이다. 그의 표정이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책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나 보다. 그렇다고 자살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회색 개미는 멍청해도 너무 멍청했다. 서가를 조금만 더 뒤지면 나올지도 모르는데.

바로 그때 책방 현관문이 열렸다. 손님이 온 것이다. 벌써 날이 밝아 일곱 시가 된 게 틀림없었다. 손님은 서가를 두리번두리번 훑어보다 구석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소돔 120일> 상 · 하 였다.

“저기 아저씨, 이거 얼만가요?”

“책이 많이 상했네. 오천 원만 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침대에 앉아 책을 들고 가는 손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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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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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고 여건이 안 되는데 환경도 안 따라주고 최종적으로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은 없고 돈을 벌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건 없고 할 수 있는 걸 하려면 사람들과 경쟁을 해서 1등만을 바라보는 한국인이 되어야하고 입시 교육에 찌들기는 싫은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을 버는 수밖에 없고 돈을 벌려면 공부를 해야하고 공부를 하려면 노력을 해야하고 노력하고 싶은데 내가 진정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고 무작정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려고 하니 너무 싫고 억지로 하는 게 싫고 억지로 안 하고 내 의지로 하고 싶은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한 세상이 싫고 돈밖에 모르는 돈 없으면 안 되는 나라가 싫고 돈은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공부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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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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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나는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
학교에서 문학 수업 때
선생님은 다정한 눈으로 말하셨지
경수야 네 시는 너무 설명적이구나 시는 은유적이어야 한단다
나는 가슴 깊이 새겨 들었어 선생님 말씀이니까
꼭 그대로 따라 써야 한다고

 

열 다섯 살

 

내 꿈은 시인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낙엽 한 장 떨어지는 가을 풍경 아
시심이 절로 솟아오르는구나 시는
설명적이지 않으면서 은유적이고
최대한 해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써야
좋은 시란다 그게 진짜
좋은 시란다 알겠지,

 

열 아홉 살

 

내 장래희망은 여전히 시인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봐야한다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거야 시를 써서
한용운이나 신경림 같은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위대한
시인이 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나는
시인이 되고 말 거야

 

스물 세 살

 

나는 우리나라 지키는 군인
험악한 김 상병님이 물으신다 야 인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시 쓰는데요
시?
네 시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얼른 교대나 해!
상병님이 공책을 빼앗으신다 찢어진 종이가
태극기처럼 휘날린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교대 근무하러 나선다 연필은
버린다

 

서른 한 살

 

나는 달세 밀린 반지하방 사는 백수
편의점 라면 사다 차가운 물에 녹여 먹는다
공모전에 몇 편 접수했으니
다음 달에는 소식이 있겠지 나는
누가 뭐래도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시인이니까

 

서른 여덟 살

 

내가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데 언제 올라오셨는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얘야,
너도 이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해야하지 않겠니
이제 며느리도 보고 손주도 보고 싶구나
나는 귀를 막는다 어머니,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나도 다 컸어요
어머니는 조용히 물러가신다 그래그래, 알았다…

 

마흔 다섯 살

 

나는 아직도 무직자
칠 년 전 그 옥상에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 그래 시는 좋은 거구나
이렇게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구름도 보고 검은색도 보고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로 가신 걸까 다 자라버린 자식 놔두고
한 편의 시 쓰러 산책 가셨나
그래 이왕 갈 거
나도 시나 쓰고 갈까
오래전 던져버린 시
내가 쓴  시

 

쉰 한 살

 

나는 나이 든 헬스장 청소부
취직한 지는 오래됐는데 익숙하지는 않구나
구겨진 종이를 편다 글씨가 쓰여있다
시다. 내가 어제 쓴 시.

 

일흔 일곱 살

 

나는 정자에 앉았다 말없이
까마귀 본다 재수없게 생긴 까마귀다
나는 까마귀를 노려보다 가방에서
밧줄을 꺼낸다 그래
드디어 시를 쓰는구나 한번 읽어보지도 못한
내 시
드디어 한 줄 완성했다 그러자
온몸이 하늘 위로 붕 뜬다 가볍게 새처럼, 까마귀처럼
마침내 이 나이 먹어서야
시를 썼다
시를 쓴다
시를 쓰고 있다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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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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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뭐가 보이니?

사람이요. 사람들. 배경은 도시에요.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어디지?

지하철이요. 사람들이 지하로 들어가고 있어요. 땅속은 어둡고 음침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에요. 밝고 빛이 있어요. 공기가 탁해요. 이곳에 오래 있으면 숨쉬기 힘들지 몰라요. 땅덩이는 축축하고 질퍽해요. 사람들이 걸어갈 때마다 신발에 흙이 묻어나요. 온몸이 완전히 젖을 정도로 습한 곳이에요.

사람이 많아? 전차가 지나가는 철로 앞이니 개찰구 앞이니?

안전문 앞이에요. 키가 큰 안전문 앞에 있어요. 사람이 많아요. 아주 많아요. 젊은 사람도 많고 노인도 많아요. 안경을 쓴 사람과 안경을 안 쓴 사람들이 줄줄이 서있어요.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요.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열차가 오고 있어? 열차가 온다고 안내방송이 나와?

지금…… 열차가, 열차가 달려와요. 환한 빛을 내고 있어요. 무서운 빛이에요. 모두들 안전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어요. 끼익 소리가 나요. 열차가 멈췄어요. 안전문이 열려요. 사람들이 나오고 들어가요. 지하철 안에 탔어요. 사람들이 뺏길세라 서둘러 자리에 앉아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손잡이를 잡아요. 모두들 휴대전화를 들여다봐요. 문이 닫혔어요. 곧이어 열차가 출발해요.

지하철 안에 무엇이 있지?

바깥에 지나가는 풍경들이요. 산, 나무, 건물…… 밝은 햇빛이 있어요. 눈이 부셔요.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잠깐이에요…… 다시 지하 속으로 들어가요. 너무 캄캄해요. 이곳엔 사람들만 있어요. 모든 것이 어두워요. 너무 어두워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사람들 중에, 누가 보이니? 보이는 사람이 있어?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모자를 썼어요. 많이 늙어 보여요. 나이가 꽤 든 노인이에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겠니? 나이가 얼마나 있어 보여?

70세는 넘어 보여요. 아니 80세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갈색 모자를 썼고 회색 외투를 입었어요. 선글라스를 써서 눈을 알아볼 수는 없어요. 수염은 듬성듬성 나있고 머리카락은 전부 흰색이에요. 손은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요. 무언가를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주머니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겠니? 확신은 못하더라도 짐작이라도 해보렴.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사각거리는 질감의 얇은 물건이에요.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 물건에 관한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해. 그 노인을 더 자세히 설명해봐. 노인은 혼자인가?

혼자인 것 같아요. 그의 곁에 아무도 없어요. 그는 항상 혼자 다니고,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해요. 독서와 운동을 즐기고 자연을 사랑하지요. 매일새벽 일기를 쓰고 아침마다 간단한 스트레칭과 운동을 해요. 공원으로 산책 나가 조용히 꽃을 들여다보는 감수성이 무척 풍부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노인은 쓸쓸해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어요. 그는 아주 외로운 사람이에요. 말이 없고 과묵하지요. 사람들 앞에서 잘 웃지 않고 여행 가는 것도 꺼려해요. 혼자 방안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요리를 좋아한다지? 마땅히 자신에게 요리해줄 사람이 없어 취미삼아 요리를 하는 남자라더군.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지. 내 말이 맞지?

맞아요…… 그는 불행해보여요. 오래전 그는 부인을 잃었어요. 위암이라는 병이었지요. 노인은 울었어요. 눈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세상 다 잃은 듯한 아픔으로 울부짖었어요. 그 일이 있은 뒤 노인은 혼자 살아요. 부인의 무덤은 깊고 깊은 숲속에 소리 없이 묻혀있지요. 노인은 미칠 듯이 괴로워요. 그러나 마음은 고요해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무엇이 다가올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거든요.

다가올 미래라고? 너는 그 남자에게 다가올 미래가 어떤 세계인지 알고 있는 거니? 아니면 그저 짐작만 하는 거야? 너는 알 수 있어?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노인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끝날지 대강 추측만 할 뿐이에요. 자신에게 무엇이 닥칠지는 노인 자신만 알아요. 자신의 죽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꿰뚫어보고 법이지요.

그럼 그 노인에게 물어봐야겠군. 노인이 있는 곳을 말해봐.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보여?

노인은 열차를 계속 타고 있어요. 창문 밖으로 시커먼 배경이 스쳐가고, 노인은 잠잠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해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요. 반대편 먼 곳에서 또 하나의 열차가 달려와요.

뭘 하려는 거지? 지금 노인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반대편 열차가 빠르게 다가오자, 노인은 갑자기 비상 손잡이를 돌리고, 과감하게, 맹목적으로 문을 잡아당겨 열어요. 그리곤, 눈 깜짝할 새에 밖으로 뛰어내려요. 열차는 피와 내장으로 물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요. 온 객실 안이 시뻘겋게 피범벅이 되었어요. 경악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객실을 뛰어다녀요. 승무원이 달려 나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애쓰지만 소용없어요. 지하철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요.

노인은 어떻게 되었지? 확실히 죽은 거니? 온몸이 터지고 으스러져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져 죽었지? 그렇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에요. 경찰이 신분을 확인했거든요. 소란이 났던 열차가 잠잠해지고 난 뒤, 경찰은 노인의 주머니에서 유서를 발견했어요. 피로 흠뻑 젖어 육안으로 판별하기 어려워 복원을 거친 뒤 알아볼 수 있었지요.

유서의 내용은 뭐였지?

모른 척 하지 마세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쓴 유서의 내용을 당신이 모른다는 건 불가능하죠. 자, 이제 직접 당신 손으로 써내려간 유서를 읽어보세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기다려줄게요.

그래…… 이제 읽을 때가 되었지.

 

 

드디어 당신을 보러 갑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으로, 이승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미지의 세계에 나도 갑니다. 오래 기다렸지요? 하여튼 늙은이라는 게 주책맞아요.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뒤따라갈 텐데, 이렇게 참지 못하고 스스로 갈 길을 선택해버리니까요. 이런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리라 믿습니다. 참고로 나는 죽음의 존재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얻었어요. 막상 맞닥뜨리고 보니 별 것 아니더군요. 그것은 거대한 괴물의 모습으로도 초라한 노파의 모습으로도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볼품없이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어요. 내가 죽음을 어떤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죽음은 내 비위를 맞추어 형상을 자유자재로 바꿨지요. 죽음은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어요. 꾹 참고 기다리다가 자연의 흐름대로 죽느냐, 아니면 내 손으로 나의 삶을 마무리 짓느냐. 나는 내 선택을 존중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보러가려 죽음을 선택한 내 결정이 옳다고 생각해요. 거기 있을 당신을 보러 갈 생각에 내 마음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군요.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세시 송내역에서 80대 노인이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이 노인은 지하철 비상 레버를 당겨 문을 열어 열차 밖으로 뛰어내렸으며, 열차 안의 모든 승객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노인의 외투에서 유서를 발견했는데 오래전 죽은 그의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고 합니다. 편지의 내용을 저희 방송국이 단독 입수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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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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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뜹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주위를 둘러봅니다. 꼭 밤하늘처럼 캄캄하군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숨이 막히네요. 내가 있는 곳은 좁은 공간인가 봅니다. 벽을 만져보니 1평도 채 되지 않는 방이군요. 마음 같아서는 이 밀폐된 방 안을 뚫고 나가고 싶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벽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제 집게가 부러질 정도에요. 한 열 번 정도 두드려봤는데 꿈쩍도 하지 않네요. 가만, 내 다리에 뭔가 만져집니다. 까슬까슬하고 잘그락거리는 게 꼭 자갈 같네요. 약간 축축하기도 하고요. 눈에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 예측으로는 물에 젖어 축축해진 자갈 같습니다. 누군가 이 방 안에 자갈과 함께 나를 가둬놓은 모양입니다. 두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 자갈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바다에서 잘 살고 있던 나를 기절시켜 강제로 가둔 놈은 누구일까요? 누가 나를 감금했을까요? 범인 추리하기 전에 여길 나가는 게 먼저겠지만, 날 가둔 녀석을 본다면 이 집게발로 두 눈을 푹 찔러주고 싶군요.

 

나는 바다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답니다. 톡토기들을 잡아먹고 갯지렁이를 콕콕 집어 먹었지요. 아, 그 달콤한 맛이란! 정말 천국의 양식이었지요. 먹을 것을 생각하니 배가 고파오는군요. 여기 있으면 굶어죽을지도 모릅니다. 이 좁은 곳에 나를 가둔 놈이 음식을 던져줄 리 만무하니, 내 손으로 직접 나가 먹읍시다. 문제는 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벽을 어떻게 뚫느냐 인 거지요. 제 집게로는 무리입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탈출이 불가능할 테지요. 이곳엔 나밖에 없는데 과연 조력자가 영웅처럼 짠, 하고 등장해줄까요? 허무맹랑한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잠깐, 생각을 전환해봅시다. 이제 머리를 쓸 시간입니다. 계속해서 고정된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면 나갈 문도 외려 닫혀버릴지 모릅니다. 왜 나는 벽을 뚫는다는 생각만 했을까요? 아래나 위를 깬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바닥을 두드려봅시다. 벽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군요. 위를 건드려볼까요. 아니, 예상 밖으로 물렁한 느낌이군요. 딱딱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긁으면 부서지겠는데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쉽게 부서지네요. 한 30분 긁었더니 마침내 위가 열립니다. 만세! 드디어 탈출할 수 있습니다! 빛이 보입니다. 이런 걸 바로 탈출의 쾌감, 묘미라 하는 것이군요. 그리운 햇빛이 나를 비춥니다. 상쾌한 공기가 폐 안으로 스며듭니다. 정말 답답해죽는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집에 갑니다. 그리운 내 바다로 가, 질퍽질퍽한 갯벌로 뛰어가 먼저 조개를 파먹을 겁니다. 갯강구 갯지렁이 등등 각종 벌레들도 냠냠 맛있게 뜯어먹어야죠. 그러고 나서 바위 밑 집으로 들어가 한 잠 푹 잘 겁니다. 깨우지 마세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잘 테니까요.

자, 이제 이곳을 떠나볼까요. 여긴 바다가 아니군요. 딱딱한 나무 재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위입니다. 잠깐, 저기 무슨 소리가 들리네요. 저 거대한 것은 뭐죠? 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연주황색 덩어리가 내게 접근해옵니다. 무척이나 빠르군요. 제 눈이 좇을 수 없을 정도에요. 아니, 이건 또 뭐죠? 동그랗고 새까만 홍합이 있네요. 아니, 홍합치고는 너무 크고 가리비라 하기에도 애매하네요. 조개가 아닌 것 같아요. 연주황색 덩어리가 나를 냅다 집어던집니다. 이 새까만 홍합(?)은 딱딱하고 까칠까칠하고 뜨뜻하네요. 뭔지 모르겠지만 저 덩어리가 나를 여기 가둬버리는군요.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네요. 아까 전부터 따뜻하다 못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냄새도 나고요. 여긴 사우나일까요? 그런 것치곤 바닥만 뜨거운 것 같은데요. 아, 너무 뜨겁습니다. 발이 타는 것 같아요. 사우나도 이 정도는 아니라니까요. 도저히 가만히 못 있겠어요! 제가 과잉 반응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뜨거운 겁니다. 언제 이렇게 뜨거워졌죠? 온몸이 자글자글 끓는 것 같네요. 이거 너무 뜨거운데요. 이제 뜨거운 수준을 넘어 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요…… 이렇게 죽기는 싫은데. 얼른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바위 밑 집으로 들어가…… 한숨 푹 쉬고 싶은데…… 그런데……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말을 안 들어…… 나는…… 이제…… 죽는 건가요?……내 몸이 점점…… 새까맣게 되고 있어요…… 내 집게발이…… 타고…… 나…… 죽나 봐요…… 죽고 싶지 않아…… 살려주세요…… 제발…… 아, 내 그리운 집…… 정말로 죽는 건가요…… 이렇게 허무하게…… 죽기는 싫은데…… 누군들…… 그렇지 않겠어요…… 미처 내 꿈…… 이루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생을…… 떠나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죠?…… 그러니…… 여러분 이제…… 모두들…… 안……녕!

 

 

뭐야, 벌써 구웠어?

응. 어떻게 했는지 뚜껑을 부수고 나왔더라고. 이참에 그냥 프라이팬에 넣고 튀겨버렸지.

잘했네. 오늘 저녁엔 맛있는 꽃게 요리를 먹을 수 있겠어. 상추랑 쌈장 준비해놔.

알았으니까 얼른 가서 앉아있어. 금방 내올게.

그래, 다음에 또 바다 갈까? 조개도 줍고 꽃게도 잡아오게.

좋지. 8월에 서해랑 동해도 가보자. 조개가 많다더라.

이번엔 삽이랑 소금도 가져가자.

소금은 왜?

구멍 있는 곳에 소금 뿌리면 맛조개가 튀어나온대. 텔레비전에서 봤어.

뭘 그런 것도 다 보냐. 얼른 설거지나 해.

설거지는 네가 해. 프라이팬 수세미로 닦지 말고 행주로 살살 닦아. 알았지?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한두 번 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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