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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도달하는 방법 – [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2]

몇 달 전 도서관에 갔을 때, 깔끔한 표지에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광고문구가 적힌 책을 발견했다. 다른 한국소설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유독 그 책에는 호감이 갔다. 제목은 <고요한 밤의 눈>이었고 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박주영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번 찜해둔 책은 목록에 올려놨다 나중에라도 꼭 읽는 편인데, 그때도 다른 책 읽느라 바빠 잠시 미뤄뒀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일념은 없었다.   그러다 몇 달 뒤, 혼불문학상 수상작 독후감 대회가 열려 나는 주저 없이 <고요한 밤의 눈>을 골랐다. 내가 이 소설을 고른 건 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 - [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 201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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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 1일 [5]

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곳에 들어가면 항상 먼지 그득한 공기와 곰팡이 슬은 책 냄새가 풍긴다. 답답한 기운 때문에 들어가기가 꺼려지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생각은 달라진다. 회색 개미는 신전 기둥처럼 양옆으로 우뚝우뚝 솟은 책 더미들을 피해 현관문으로 돌진한다. 자칫 방심하면 허공 위 신발에게 쥐도 새도 곤충도 모르게 밟혀 죽을 수 있다. 주말에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회색 개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헤르만 헤세, 이청준과 황순원을 지나쳐 내 집으로 들어온다. “이봐, 검정 개미! 오랜만이야! 내가 왔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와? 큰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걸 봐. 정말……[…]

소돔 1일
/ 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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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4]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고 여건이 안 되는데 환경도 안 따라주고 최종적으로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은 없고 돈을 벌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건 없고 할 수 있는 걸 하려면 사람들과 경쟁을 해서 1등만을 바라보는 한국인이 되어야하고 입시 교육에 찌들기는 싫은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을 버는 수밖에 없고 돈을 벌려면 공부를 해야하고 공부를 하려면 노력을 해야하고 노력하고 싶은데 내가 진정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고 무작정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려고 하니 너무 싫고 억지로 하는 게 싫고 억지로 안 하고 내 의지로 하고 싶은데[…]

열여덟 살
/ 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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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2]

열 살   나는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 학교에서 문학 수업 때 선생님은 다정한 눈으로 말하셨지 경수야 네 시는 너무 설명적이구나 시는 은유적이어야 한단다 나는 가슴 깊이 새겨 들었어 선생님 말씀이니까 꼭 그대로 따라 써야 한다고   열 다섯 살   내 꿈은 시인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낙엽 한 장 떨어지는 가을 풍경 아 시심이 절로 솟아오르는구나 시는 설명적이지 않으면서 은유적이고 최대한 해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써야 좋은 시란다 그게 진짜 좋은 시란다 알겠지,   열 아홉 살   내 장래희망은 여전히 시인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봐야한다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쓸[…]

시인
/ 2018-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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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1]

저기 뭐가 보이니? 사람이요. 사람들. 배경은 도시에요.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어디지? 지하철이요. 사람들이 지하로 들어가고 있어요. 땅속은 어둡고 음침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에요. 밝고 빛이 있어요. 공기가 탁해요. 이곳에 오래 있으면 숨쉬기 힘들지 몰라요. 땅덩이는 축축하고 질퍽해요. 사람들이 걸어갈 때마다 신발에 흙이 묻어나요. 온몸이 완전히 젖을 정도로 습한 곳이에요. 사람이 많아? 전차가 지나가는 철로 앞이니 개찰구 앞이니? 안전문 앞이에요. 키가 큰 안전문 앞에 있어요. 사람이 많아요. 아주 많아요. 젊은 사람도 많고 노인도 많아요. 안경을 쓴 사람과 안경을 안 쓴 사람들이 줄줄이 서있어요.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요.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 201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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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맛 [1]

나는 눈을 뜹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주위를 둘러봅니다. 꼭 밤하늘처럼 캄캄하군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숨이 막히네요. 내가 있는 곳은 좁은 공간인가 봅니다. 벽을 만져보니 1평도 채 되지 않는 방이군요. 마음 같아서는 이 밀폐된 방 안을 뚫고 나가고 싶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벽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제 집게가 부러질 정도에요. 한 열 번 정도 두드려봤는데 꿈쩍도 하지 않네요. 가만, 내 다리에 뭔가 만져집니다. 까슬까슬하고 잘그락거리는 게 꼭 자갈 같네요. 약간 축축하기도 하고요. 눈에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 예측으로는 물에 젖어 축축해진 자갈 같습니다. 누군가 이 방 안에 자갈과[…]

바다의 맛
/ 201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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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를 참았더니 화내는 법을 잊어버렸다 참고 참고 죽고 싶을 만큼 터질 만큼 참았더니 화가 어디론가 쑥 사라졌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뒤로부턴 화를 내야 할 때 화가 나오지 않는다 눈치 참 더럽게 없는 놈이다 괘씸하다 그리곤 밤이 되면 주책없이 튀어나와 나에게 화낸다 왜 그때 화내지 않았느냐고 왜 화내야할 상황에 잠자코 당하기만 했느냐고 나는 화, 너에게 화낼 수가 없구나 네 말이 너무 옳아 나는 화에게 화내지 못한다 나는 더욱 커진 화를 입속에 쑤셔넣고 또 참는다 이 밤이 끝날 때까지

/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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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잠 [1]

  가끔씩 나는 이런 몽상에 빠져든다: 빨래를 널어야 할 때면 나는 베란다로 나가 세탁기 뚜껑을 여는데, 그때마다 나는 세탁기 속으로 흡수된다는, 빨려 들어간다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소름끼치면서 야릇한 느낌. 만약 정말로 세탁기 속으로 쑤욱 들어가 혼란스레 뒤엉킨 빨래들과 한 몸이 되어 한 색깔로, 아니 이도저도 아닌 색으로 혼합되거나 분할되면서 섞인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세탁기로 들어가는지 세탁기가 나를 끌어당기는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내 머리가 뒤틀리는 걸 느끼면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쭈그러지며 빨래들과 미친 듯이 뒹군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인 걸까 빨래인 걸까?[…]

영원의 잠
/ 201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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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밤을 맛본다. 콧속 깊이 밤을 들이마셔, 그 안의 달과 별들을 삼킨다. 나는 밤을 먹으러 새벽에 나간다. 해가 떠 어둠을 가리기 전 나는 밤을 먹으러 나간다. 차들의 배기가스와 공장의 불빛이 어른거려도 나는 밤을 먹으러, 기어코 나간다. 밤은 달고 맛있다. 잡냄새가 섞여있어도 밤은 밤 맛 그대로 낸다. 밤은 아침과 섞어 마실 수 없다. 아침에겐 맛도 없고 향취도 없다. 나는 밤맛만을 맛보며 살고 싶다. 새벽마다 수탉처럼 일어나, 밤과 함께 누비고 싶다. 평생 낮을 보지 않고 밤과 사귀고 싶다. 학교도 직장도 집도 삶도 버리고 밤만을 껴안고 밤이랑만 살아가고 싶다. 세상 근심 떨어내고 밥이 아닌 밤을 먹고 달과[…]

/ 201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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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개 [1]

남자는 공원 한가운데에 서있습니다. 이유도 목적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한 공원 한가운데에 아무 말 없이 서있을 뿐입니다. 사위는 잠잠합니다. 주변의 소리라곤 간헐적으로 짹짹거리는 참새와 찌익거리는 직박구리 소리뿐입니다. 남자에게 소리란 없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그저 공원 한가운데에, 목표도 방향도 없이 가만히 서있을 뿐입니다. 여자는 궁금합니다. 그녀는 호기심을 느끼고 서있는 남자를 유심히 관찰합니다.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긴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이십대 후반쯤 되는 젊은 사람인 건 알 수 있습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진기로 찍힌 듯, 공원 한가운데 정지해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개
/ 201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