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지니
크로스 드레서 [1]

그곳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어 언젠가는 모두 이곳을 떠나고 졸업하겠지 몇 번이고 휴학계를 제출한 나는 아직도 알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아   무표정으로 웃고 있는 낭자 무표정 낭자는 눈물을 흘릴 때도 웃을 때도 무표정이야 나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들면 심장엔 피 대신 눈물이 흘러 내 세상에 나는 없었어   거울을 바라봐도 내가 보이지 않아 자, 이제 알을 깨고 나와 날개가 돋은 나 그건 어쩌면 천사일지도 몰라

크로스 드레서
/ 2021-04-30
23 글틴 캠프 및 문학상 시상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2] 핸지니 2021-04-09 Hit : 324 핸지니 2021-04-09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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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일의 날씨는 흐릴지도 몰라 [1]

오늘은 봄이 찾아왔어 딸기 맛이 나는 입술을 깨물면 달콤한 과즙이 새어나올까 비린 맛밖에 나지 않아 처음은 항상 달콤한 법이라고 하지만   쨍한 햇빛 아래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길 먼지 냄새가 났어 내일의 날씨는 흐릴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우산을 쓰고 걷는 거야   봄은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고 하루 종일 나오는 재채기는 봄 때문이야 나 때문이 아니야 미지근한 바람이 나를 감싸면 간지러워서 재채기를 할 수밖에 없어   오늘의 날씨는 맑음 어쩌면 내일의 날씨는 흐릴지도 몰라 나는 그래서 우산을 쓰고 걷는 거야 바람에서 벗어나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줄 너를 찾아   봄에[…]

어쩌면 내일의 날씨는 흐릴지도 몰라
/ 20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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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기록(1-8) [3]

임신테스트기 마스크를 챙기고 모자를 꾹 눌러 쓴 채 편의점으로 향하던 길은 눈이 가득 쌓여 있었고, 곳곳에는 얼음판이 존재했다. 나는 혹시 나의 뱃속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아기를 위해 조심스럽게 걷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의 뱃속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이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행위로 인해 유산되길 빌며 조심성 없게 뛰어갈 뿐이었다. 나는 편의점 알바에게 매장에 임신테스트기가 있냐고 여러 번 물었고, 알바는 못 알아들었는지 여러 번 나에게 되물었다. 임 신 테 스 트 기 요. 또박또박 한 글자씩 눌러 말했는데도 못 알아먹는 알바가 멍청한 건지 아니면 16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가 편의점에 들어와[…]

이지원 기록(1-8)
/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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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살 [1]

관상쟁이는 내가 전형적인 도화살 관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몇 시간을 가슴이 찢어질 듯 울었다. 연예인 관상이라고도 불리고 유튜브엔 각종 화장법이 넘쳐나는 도화살, 그 도화살을 동경하는 여자애들을 흔히 도화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남자가 참 많이 꼬였다. 고작 18년 살았으면서, 마치 50년은 산 것 마냥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남자들이 꼬였다. 좋은 쪽으로 꼬인 게 아니다. 수없이 받아 온 성희롱 그리고 성추행… 이제 가벼운 성희롱은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다.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날 좋아한다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대개 나의 몸을 탐하던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늘 연애를 쉬지 않았다.[…]

도화살
/ 2021-01-28
핸지니
박하소녀 [1]

저는 열여덟 살 여고생이에요 도화살이 있다고 해요 늘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팔자에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내게 다가오지 않아요   오늘은 32살 아저씨를 만났어 나더러 사랑한다고 말하더라 나는 또 그 말을 믿어 고개를 끄덕이며 응 나도 사랑해요 그리고는 말라붙은 정액에 리스테린을 뿌리고 박박 문지르는 거야 리스테린의 알코올은 적은 양으로도 나를 취하게 해 박하소녀가 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대 썩은 복숭아향이 나는 나에게 이제는 박하 향만이 날 수 있다면 좋겠어 매일 박하 향을 풍기고 다니는 박하소녀 술을 살 수 없는 열여덟 살은 취하고 싶을 때면 리스테린을 마셔 몸 속의 상처를[…]

박하소녀
/ 2021-01-28
핸지니
[1]

“왜…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당신이라면 늘 음악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네?” 그러나 내 눈 앞에 서 있는 건 한 명의 카페 종업원 뿐이었다. “요즘은… 노래 안 불러요?” 카페 일은 오후 네 시 사십분에 끝난다고 한다. 나는 카페 앞의 서점에 들어가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서점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선 12월답게 캐롤이 흘러나왔고, 징글벨을 이후로 이어지는 곡은 아리아나 그란데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였다. 선진희가 오디션에 나와 불렀던 곡이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선진희의 노래가 잊히지 않는다. 선진희의 목소리는 내가 죽어라 노력해도 가질 수 없던 목소리였다. “정민아, 너는 다 좋은데 목소리가 참 평범하다. 네 노래에[…]

/ 2020-12-31
핸지니
Hi, my aluminum. [1]

안녕, 나의 알루미늄.* 네가 밤늦게 보낸 문자를 봤어. 네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좋아했던 건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어. 나는 너를 어떠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걸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차오르는 사랑이었어. 하루 중 절반을 네 생각만으로 보내는 날들이 참 많았어. 어째서 너를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 열넷이라는 나이 때문이었을까. 마치 그게 사실이라는 것처럼 나의 사랑은 너를 이후로 점점 옅어져만 가.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나 몇 년 전 쓰던 일기장을 펼쳤어. 어쩜 이렇게도 애틋했을까. 네가 없인 하루도 지나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나날들이였는데 오늘도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가. 많은[…]

Hi, my aluminum.
/ 2020-12-20
핸지니
날개 [1]

매주 찾아갔던 교회에선 늘 성경에 반하는 기도를 드렸지만 그럼에도 저는 훌륭한 신자였습니다. 십자가에 대고 중얼거리던 수많은 나날 이제야 저는 신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멘.   선생님께서는 서른 명의 학생 앞에 저를 세워 두시고는 위선자란 단어를 찔러 넣으셨어요. 저는 뛰어난 학생은 아니지만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교실은 저를 끊임없이 고통에 빠지게 했지만 어떤 교실은 제게 구원이었습니다. 작은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수위 아저씨의 호통을 들을 때까지 교실에 남아있던 그 여름의 시간은 고통과 맞바꿀 만한 쾌락이었습니다.   어제 저의 통장에는 이만 원이 들어왔습니다. 내일은 십만 원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해요.   저를 무시하던[…]

날개
/ 20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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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점오등성 [1]

시리우스를 인정하는 프로키온 내가 프로키온이라면 나는 폭 발 해 버 렸 을 텐 데 너는 꼭 일등성 같아 나는 열등감으로 뭉쳐진 별 너는 니체를 좋아한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매일 잿더미 위에서 숨을 쉬어 너 는 마 치 일 등 성 같 아 빛나지 않는 일등성.

일점오등성
/ 202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