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A양이 전화를 받는 법
목록

이것은 나의 권총이다

 

직선을 그어놓은 노트의 첫 페이지 커피잔에 불안이 내려앉을 때마다 문 너머로 시커먼 기차가 지나간다 별이 박혀 있는 문고리엔 더 이상 내 얼굴이 비치지 않아요 상자 속에서 몇 번이고 신열을 앓기 시작할 때 지구에서 지구 밖으로 전화가 걸립니다

 

선생님, 이곳은 시간도 천국도 없는 몇 번째의 아득한 꿈입니까

 

침대맡에 놓여있던 곰인형이 품으로 파고든다 반지하 방의 울창한 사물들 책을 샀다가 사은품으로 받은 새벽숲 디퓨저가 책상에 놓여있다 먼지만 풀풀 날리고 새벽숲의 향기는 나지 않다 밤이면 찾아오는 천국의 간첩이 방구석에 머리카락 뭉치를 놓고 가다 즉석밥과 레토르트 식품을 사서 선반에 쌓아 놓다 아저씨 우리 집 택배는 언제나 현관문 앞에 놔주세요 초인종을 눌러봤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걸 아시잖아요 권총으로 곰인형의 머리를 쏴버릴 때 전화가 귀찮군요 공모전 마감을 패스하기 위해 적당히 핑계를 둘러댑니다

 

폐허가 된 나라에선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는 게 싫어서 휴대전화는 언제나 무음이다 받아야 할 사람 전화도 받지 않고 연락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부터 차단한다 내 나라는 방금 먹은 계란후라이보다 고요하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서 열병을 앓다 열대야는 문고리의 입술을 닮아있다

목록
본 리스 이차원적 발목
목록

꿈속에서 발목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걷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바보야! 연필을 들라구 이대로 있다간 잡아먹히고 말 거야 검은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누워있는 숲에 사는 외계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요 배가 고파 손톱에 낀 김칫국물을 빨아먹을 때마다 파란 족보를 뜯어먹고 도망치는 무서운 괴물의 이야기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말라갈수록 활자가 위독해진다 시인이 책을 못 읽는다니 아가야 넌 눈알조차 써먹질 못하겠구나 그럼 어떡해요

 

이차원에서 사는 외계인이 제 발목을 구워 마카롱을 만들기 때문인데요 나와 온전히 같아지기 위해 평행선으로 길어지는 지구 이차원에서 잃어버린 뼈의 행방 오랫동안 씻지 못한 사람의 살냄새가 자전축을 휩싸고 발목이 잘린 책은 다소곳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엄마 저는 이렇게 춥게 살다가 죽는 걸까요 발목이 없어서 걸어가지도 못하는데요

 

초마다 꿈속에서 발목을 잃어버립니다 토막난 앞발로 목발을 짚는 토끼들 물구나무를 서며 죽음을 흉내내는 아이들 빨갛고 불안한 궤적을 그리는 유성이 무릎에 꽂히는 밤의 일이었습니다

 

 

*boneless, bornless

목록
리코타치즈블루베리샐러드
목록

만년필로 일기를 쓰면

두 번째 손가락에 까맣게 잉크가 묻어

 

도서관의 반납일을 넘기기 일 초전

책갈피의 숫자만큼 네게 구부러질게

 

여름밤의 수학여행 소등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이불 속에서 최선을 다해 부끄러워지지

 

조각상이 서로를 안고 태어나는 일에 대해

너의 귓구멍에서 나는 냄새를 사랑해

 

네 수저통 속에 있는 볼록한 숟가락이 참 좋아

네가 나의 볼록한 엉덩이에 몰두하며 말하지

 

넌 참 아름다운 여자야

하얗고 동그란 얼굴이 내 파란 가슴에 파묻히는 순간

 

리코타 치즈/블루베리 샐러드

쌍둥이처럼 포옹, 그리고 키스를

목록
새의 방식
목록

빗방울은 소리를 소유한다 규칙적인 심장박동과 발걸음의 횟수는 출근길의 졸음을 소유한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시각을 소유하고 깊은 물웅덩이는 개미의 목숨을 소유한다 하지만 트럭이 그의 옆을 지나가자 물웅덩이는 순식간에 그의 검은 장화를 침범한다

 

그의 바지는 젖어 피부에 들러붙는다 장화 속에 있는 그의 발은 완연한 새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는 이종(異種)이다!

 

하지만 소유란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가 그는 날카로워진 종아리를 서툴게 매만진다 동시에 그는 깨닫는다 그의 삶은 한 번도 낯섦을 침범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충실한 순례자로 인간이 사랑하는 달콤의 방식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 그는 레몬 타르트를 만들었다 레몬은 언제나 반달 모양으로 열여섯 조각이 올라갔으며 매일 8시 정각에 타르트를 한 조각씩 가지고 출근했다 그는 규칙적인 인사와 규칙적인 작업과 규칙적인 계산과 규칙적인 퇴근을 했다 중간에 화장실은 정확히 네 번 갔으며 점심시간엔 언제나 사내식당에서 A세트를 먹었다 그는

 

규칙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골목 깊숙이 들어간다 장화를 벗는다 여덟 개의 발가락과 원뿔 모양의 고단하고 뾰족한 발톱이 탄생한다 형태를 확인한 그는 몸서리를 친다

 

그는

 

낯설었다.

목록
손등 간첩
목록

난 이제부터 단정함을 사랑하는

손등이 될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간첩이 될래

 

내가 살던 집은 두 시간에 한 번 마을버스가 지나가고 넓은 해변이 바람에 모래알을 실어 보내는 곳 못을 뺀 작고 검은 구멍에는 개미들이 들락거렸고 마룻바닥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거인의 뒤꿈치처럼 삐걱거렸다 메롱을 멈추지 않는 아이들의 혓바닥이 어울리는 방과후,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살던 나는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새들의 자유주의를 동경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흉곽에서

돋아나는 지구의 언어로

 

무성한 그리고

부드러운 두통을 겪다가

두 줄 시를 쓰다가

그러다가

 

(외로이)

 

난 이제부터

가장 외로운 것들을 사랑하는

손등이 될래

명멸하는 지구를 삼키려는

입술이 될래

목록
하늘의 바이올린
목록

내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답답해합니다. 내 병명은 편측성불완전구순구개열로 간단히 말하자면 언청이입니다. 입을 벌리지 않아도 하얀 치아는 제멋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이야, 너 이제 그만하자.”

바람은 갈라진 틈새로 목구멍을 드나듭니다. 솔-레-라-미- 단조로운 바이올린의 음률이 순차적으로 올라갑니다. 손가락을 대지 않은 채 긋는 현은 깊고 웅장합니다. 나는 입에 이어 귀까지 부정하고 싶어졌습니다. 내 이름과, 뭐라구요?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앞치마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우리 집은 다른 집에 비해 빈곤한 편입니다. 하루하루 버는 돈이 그날의 식량입니다. 게다가 반복적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내 입은 그나마 남은 돈을 그대로 잡아먹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는지 조금이라도 기미를 보이면 맞설 기색이 역력합니다. 하지만 난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깁니다.

악기를 처음 손에 쥐어본 것은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상당히 늦된 재능의 발현이었습니다. 처음 손에 쥔 바이올린 채와 둥그스름한 몸체는 딱 품에 안겨들어 예기치 않은 흥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과는 이미 나왔습니다.

“엄마 나, 하고 싶어.”

단순하지만 뚜렷한 의지를 담은 한 마디였습니다. 갑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합니다. 나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뜹니다.

“집안사정이 그런데, 무슨 애가 자꾸 음악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제 어머니의 눈엔 눈물이 맺혀있습니다.

“너도 알잖아. 응? 너 이거 해서 돈 못 벌어.”

그녀는 울음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참으려고 끅끅거렸습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젖가슴을 부여잡았습니다. 맹수처럼 날선 눈이 나를 파랗게 쳐다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난의 서러움과 죄책감, 원망이 고인 세월의 응어리입니다. 심지어 내가 언청이라 더욱-

“소이야…”

건조한 공기로 차있는 실내에 내 이름이 가라앉습니다.

 

 

“소이야! 담임쌤이 너 불러.”

무릎이 가볍게 튀어오릅니다. 어깨는 한 순간 들썩거립니다. 그 분은 내 은사십니다. 나에게 처음 음악을 향한 열정과 재능을 불태워주신 분입니다. 나는 집과 현실에서 벗어나 그의 온화한 목소리와 격려의 손짓, 그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미래에 위로받습니다. 음악계에서 꽤 권위 있는 분이라고 들었으나 왜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이끌어나가고 싶은 것처럼 고상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해볼 뿐입니다.

“A고는 생각해봤니?”

그 때부터 나의 가슴은 차갑게 가라앉습니다. A고는 일반계지만 음악중점고등학교로 저희 지역에선 나름 성적도 괜찮은, 일반계인데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명문입니다, 성적이 조금 부족하지만 내가 음악을 할 수 있는 학교중에 가장 여건이 좋은 학교입니다. 그런데,

“너 음악에 재능 있잖아. 그래서 물어본 건데, 어머니는 뭐라셔?”

목구멍에 걸친 언어가 죽어갑니다. 어머니가 내비친 것은 완고한 거절이었습니다. 음악은 당장의 삶이 급한 어머니께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각각 다른 고등학교의 특성이 어떤지에 대해 알아보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발이 넓거나 시간이 많은 분이 아니셨고 내가 어머니를 잘만 속일 수 있다면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성공만 한다면 어머니도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놓고 싶지 않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희망과 세상에 존재를 새기고 싶어 하는 열망입니다.

“…괜찮으시대요.”

“그래? 다행이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그 학교의 팸플릿과 입학원서를 건네십니다. 어머니께 갖다드리렴. 생기부랑 서류들은 내가 잘 정리해 놓을 테니까 사인만 받아와. 나는 그것을 꼭 쥐고 집에 갔지만 어머니는 상위에 통장과 서류, 책 더미를 쌓아두고 한 장씩 넘겨보고 있었습니다. 말이 없는 어머니는 블라인드가 쳐진 듯 감정을 읽을 수 없어 무서웠습니다. 난 그냥 서류를 가방에 쑤셔 넣곤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부터 난 실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직 허락을 해주시진 않으셨지만 단순히 실기준비를 핑계로 악기를 만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습니다. 학원을 다닐 비용은 없었습니다. 지방, 그것도 소도시 외곽의 작은 학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에 남아 바이올린을 지도해주셨습니다. 난 매일 음악실에 남아 연습을 했고 일찍 끝나는 날이면 계단 난간에 앉아 윤동주의 시를 읽었습니다.

중학교 이학년 때의 일입니다. 선생님과 상담을 끝내고 허리 밑으로 내려앉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금 내가 당한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정말 역겹고 공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방에서 올려다본 네모난 하늘이 너무 새파랬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공터가 참 많습니다. 난 그날 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공터 흙바닥 위에 누워 밤을 지새었습니다. 시골의 하늘은 참 맑습니다. 겨울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그 사이로 바람이 달리고 있습니다. 별아, 너는 왜 그렇게 빛날 수 있는 거니.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고 우주공간의 운석들을 빨아들이면서, 어쩌면 그렇게 타오를 수 있는 거니. 그렇게 까맣고 더러운 하늘에 있으면서, 밝고 찬란하게 초원에 빛을 내리는 너를 동경했어. 그런데 난-

몸을 씻기 위해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흙이 묻은 교복을 세탁기에 넣어 몇 번이고 빱니다. 깨끗해지도록. 더러움이 남지 않도록. 설거지가 쌓인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빈 방에선 일에 지친 어머니의 땀 냄새만이 났습니다.

새벽부터 엄마가 큰 소리로 통화하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엔 어머니께서 옷장 속에만 고이 모셔두던 정장을 꺼내 입으셔서 예쁜 어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서류에 사인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 김소이!”

점심시간, 이현오는 중학교 1학년 때 전의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이런 시골 학교까지 전학 온 도시아이입니다. 비싼 집에서 사는 비싼 옷을 걸친 비싼 도시아이. 그 애는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얹어 이마를 탁 치고는 웃으며 도망칩니다. 찢어진 흔적이 옅게 남아있는 입술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이내 꾹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는 판잣집이라 불릴만큼 낡은 옥탑방에서 사는 내 가난한 집안사정을 곧잘 놀리곤 했습니다. 짜증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 시간은 역사였습니다. 2학기에 접어들어 우리는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물소를 사냥하는 인디언들과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들이 스쳐지나가고 유럽에서 온 호모 사피엔스들은 문명을 이루었다. 남북전쟁과 링컨과 독립선언문이 다시 지나가고 교과서는 맨 앞으로 옮겨져 하얀 페이지만이 남습니다

실기 연습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자 나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룻바닥에 앉아 서류를 펼쳐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어머니는 말이 없습니다. 서류가 사락사락 넘어가고 어머니는 손가락을 붉은 점토에 찍어 지장을 찍습니다.

“저 이것 좀 사인해주세요”

“…소이야.”

“응?”

“엄마가, 미안해.”

서류에는 양육권 포기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 이후로 난 학교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마을의 대청마루라 불리는 큰 공터에서 어머니가 자살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담센터와 집을 오가며 심리치료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것이 무슨 효과를 발휘하는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돌아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나를 좀 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뿐입니다.

나는 결국 그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과 그 서류 때문에 자연스레 아버지께 양육권이 넘어갔고 난 아버지가 바라는 도시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산을 쓰고 검은 하늘을 가렸습니다.

*바이올린은 말을 한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날뛰고 있는 물소위에 올라타 있었다. 어머니는 바람조차 자유로운 아메리카의 초원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이룬 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어머니는 자유롭게 초원을 달리고, 하늘에서는 별똥별이 내렸다.

목록
줄무늬 카페인
목록

줄무늬 카페인

 

그의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검은색 바탕 레드줄무늬 스타킹

조금씩 압박을 시작하고

목구멍을 꿀꺽꿀꺽 넘어가는 나, 검은 뱀

서점주인은 다리를 주무른다

 

육체를 내리치며 피로를 빌미삼은 파충류

줄무늬 스타킹은 다리를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나는 그동안 조금씩 식도에 좀먹히고

약간의 포션, 프로메테우스의 석유가 되어가며

서점 램프에 불을 밝힌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몇 모금

나는 목젖을 뛰어넘는 줄무늬 수레바퀴

지붕 위 서점에 형광등을 연결하고

증폭작용을 시작하는 트랜지스터

 

도트무늬처럼 남겨진 컵 속 둥근 원

나는 마지막 숨의 파편처럼 남겨져

시체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자정의 종소리

서점은 죽어가는 나-카페인-를 양분삼아 불을 밝혔어요

 

서점주인은

꼬인 혀를 붙잡으며

#0시_0분, #개_같은_밤샘작업, #죽고_싶다.

목록
갱도 퇴고본
목록

갱도

 

아이들이 빠져나온 교실

효수의 칼날을 당겨오는 카르마의 수레바퀴

갱도의 쪽방에서 마스터키를 향해 뛰어들고

아이들의 머릿속 글자의 회선들은

매일같이 신항로를 개척했다

 

바람 부는 고요한 갱도

그 곳에선 그림조차 글자가 되어

아이들의 머리에선 흑연이 묻어났다

아이들의 발목을 자르는 바겐세일 마케팅

점원들은 금속 넥타이를 맨 채

연필조차 무기로 바꾸었다

 

알고리즘의 혈관 속에서

아이들이 떨어뜨린 땀방울은

빛나는 금덩어리일까

 

황금향을 향한 아이들에게

조도를 낮춰 비춰준 태양빛이

밀어뜨린 갱도 속

자그마한 금덩어리라도

아이 손에 쥐어질까

 

노랗게 빛나는 안전모의 헤드랜턴

가물가물 하던 시야조차 닫혀버린 그 곳에서

아이는 금을 캐내고 있다

목록
마네킹
목록

맨살들을 우뚝 갈고리에 걸어놓고선

홍등이 걸린 네모난 정육점은 동공을 자극하고

우린 자그마한 빛에도 그만 눈을 감아버렸지

반나절조차 채우지 못한 발걸음은

뚜벅이는 소리가 귓바퀴를 맴돌 때마다

세상을 시계방향으로 돌리고

우리들은 장막으로 덮인 스크린 아래에 남아

납덩어리와도 같은 몸을 힘껏 끌어안고

페시미즘의 도래를 축하했어

 

동공은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

이불로 슬쩍 덮어버린 젖가슴엔

다른 이의 시선이 짓이기듯 남아있어

 

있지, 우린 마네킹일 뿐이야

천천히 날 훑어가는 이 감각은

인공수정체가 응시하는 저 하얀 봉오리의 둔덕은

응, 마네킹일 뿐이야.

스크린 앞 우리는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아

우린 그저 자신을 그대로 내보였을 뿐인데

언제나 부끄러운 소유물처럼 여겨졌어

 

우린 마네킹

바라보는 사람들은 우릴 그저 마네킹으로만 생각했어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처럼

스크린의 홍등은 다시 가격을 매길 듯 간판을 내걸고

마네킹이 되어버린 우린

언제나 거짓 그 자체가 되었지

 

다시 우린 정육점 앞에 홍등을 걸고

얇은 스크린에 몸을 압착해

우린 정말 마네킹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마네킹이어야만 했을까

 

 

 
*다음 달에 졸업식을 마치면 고등부로 들어가겠습니다

목록
노동
목록

노동

 

움푹 파인 잔을 향해 술을 따른다

물줄기 따라 별이 우수수 떨어지고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시장바닥의 메마른 흙냄새가 배어있던

아내의 머리카락, 매일 흙을 나르던 나는

그 냄새가 싫어 이불 속에서도 아내를 밀어내었다

 

내 눈치를 살살 보던 아내가

문빗장너머로 살그머니 웃는다

아내 손에 생선가시처럼 박혀있던 실반지

상처자국으로 남아 화장대 위에서 눈물을 흘린다

 

지난 겨울, 구덩이를 파다가

그 속에 아내를 묻었다

추운 밤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