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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선 횡단보도 [1]

  십자 건널목에 길이 생겼다 너는 한 쪽 끝에서 교차로를 본다 새벽녘에도 움직이는 거리를 어떻게 멈춰 세우고 흰 길을 냈을까 생겨난 신호등과 숫자가 너는 어색하다 너는 다시 생각한다 정제된 변화에 스며드는 어른이 되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가끔은 빵빵거리기만 하는 차가 너무해 오전 일곱 시 가량의 공기는 아프기도 그만큼 차갑기도 했고 언제는 무료했고 주인 모를 바람만이 차를 갈라놓았고 목적지에 오류가 있어도 발을 놀릴 줄 아는 사람 그 모든 피사체를 눈에 담았지 앵글 하나하나 부서지기라도 한다는 것 마냥 사라져도 존재하는 섬광을   교차로 한가운데 너는 서있다 무채색의 시선 중심에서 청색 치마 아래[…]

대각선 횡단보도
/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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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 버린 것 [1]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맞물리지 않는 톱니를 욱여넣어 길을 만들고 일그러진 태엽을 감싸 안아 다시 헤엄치게 한다 푸르게 붉게 낙엽처럼 설익은 자욱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이들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게끔 꼭꼭 숨겨라 머리카락 보일라 찬연한 햇빛에 눈을 잃은 그와 빛을 저버린 윤달 결함에 함몰 또 몰락에 눈을 감아버린 치들 폐부에 물이 차올라 수심을 박차는 물고기와 이미 찌들어 지울 수 없는 녹을 뒤집은 그저, 그냥 그런 것들 못찾겠다 꾀꼬리 걔는 한 번도 웃지 않던데 나온 웃는 그림을 보고 의아했더래 마음에 들지도 않았나 뚱딴스럽게 나는 머리카락이 가장 예쁘더라 뒤집은 초상화를 바랐나 붓질이[…]

감추어 버린 것
/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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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SHABY [1]

    여름의 햇발은 잔인하게 우리를 비췄다. 그늘을 찾던 중이었다. 길가에서 외마디 소리를 내며 쓰러진 아이를 움켜쥐었다. 모두가 함께 뒤엉켜 울다 숨이 끊어지면 그의 가슴을 베는 것이다. 서로 그 아이가 죽는 날을 어느 샌가부터 헤아리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비열한 양심은 약자에게 조금 더 억세, 아이가 버텨내기엔 역겨웠을 것이다. 암묵적인 동의가, 은근한 시선이 모든 죽어가는 이를 환호했다. 우리는 미아였다. 어느 때부터 우리는 변법에 따라 불문율을 만들었다. 이건 우리만의 의례이자 제사, 우리는 힘이 센 아이와 체력이 튼튼한 아이를 중심으로 아이를 둘러싸 안았다. 스러져 가는 건물의 입구를 보니, 이전에는 오피스텔로 쓰이던 것이었다. 여기라면[…]

HUSHABY
/ 201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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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서 [1]

  공이 바닥에 튀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쇠구슬이 자석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라면   원하던 방향을 막은 바닥을 저주하며 힘든 구색이 있으니 진로를 버리려고 글을 조금 좋아했으니 글을 붙잡으며 악기를 할 줄 알았다니 음악을 바라 재능으로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서 아무 것도 없이 발만 담구다 더 이상 도망갈 구실조차 없을 때   쇠구슬을 긍정적인 환상으로 덧대고 덧대어 실상은 뭣도 없는 내가 잘만 튀어 오른다 농구공 같이 피구 같이 자기도 공이라는 듯 세상에 존재하는 자기성을 무시하면서 시효가 남지 않은 꿈은 더욱 크게 부풀리고 사소한 것에 옹졸해져 버린 바람을 불어 넣은 풍선 안에 들어간[…]

벼랑 끝에서
/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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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성을 향하는 붓 [1]

  나는 네 생각보다 붉은색을 좋아해 중력이 끌어 열매에 닿으면 시작되는 광신도의 밤   사람을 그릴 때 적을 담으면 꼭 그렇게 장미처럼 품는다고 눈동자 일궈내지 않으면 귀신까지 담는다고   숨 내쉴 구멍도 없이 빛을 발하다 물을 뿜어내 버리는 곡예가 이제는 지루해 붉은 행성으로 도망쳐 버릴까 흰 빛 속에서는 갈필도 허용하기로 해   네 무화과는 에덴에서 났지 부서질 수밖에 없는 향수는 꾸준히 붉고 캔버스의 공간이 여전히 남았는데도 그보다 나는 빨강을 좋아해  

객성을 향하는 붓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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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 고리 [1]

  토성은 고리를 쌓았다 허물없음이 상처입히고 마니까 가장 쓸모없는 존재도 제일 아름다운 형상을 지으면 누구든 직공을 칭찬하고 마니까 또한 흉을 지으게 되니까   토성은 고리를 녹인다 허물이 사람을 외롭게 하니까 가장 많은 고리로 치장했음에도 제일 작은 먼지 덩어리는 꾸준히 남아 폐 한 구석을 어지럽히고 마니까   사실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우주의 티끌이 되는 법 티끌이 모여 별을 이루는 것 토성에 섞이지 않는 법을 알고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법 베틀을 다룰 줄 알아야 망가뜨리기에 쉬우니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잘도 알아서 매여 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토성 고리
/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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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글자 [2]

  A4 용지가 이리저리 굴러 무참히 구겨졌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학원에 한참을 갇혀 있다 일요일에는 보고서를 써야 한다며, 정규 수업은 없지만 겨우 얻은 하루 동안의 휴가였다. 돌아오는 주에는 금요일에 학원을 빼고 남은 일요일에 가려 한다. 금요일에 학원을 뺀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일요일에 정규 수업이 없으니까 가는 게 더 유별난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내 보고서보다는 미래에 빠지게 될 수업을 어느 수로 따라가야 하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금요일에 조퇴를 신청한 이유는 그저 동아리 내 한 부서의 부장이었던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그 자격으로 실험을 진행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구입한 장비를 시험하는[…]

다섯 글자
/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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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이상에게) [2]

    나는 어쩌면 이 세상이 미웠던 걸지도 모른다   하늘을 가르는 몸짓과 물살을 가로막는 수족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남겨진 파편, 깃은 무참히 깨지고 색채마저 잃어가며 그마저 아름답다 다만 세상은 찬사를 보내지 무엇을 바라고 비행을 느껴야 했는가   좁아져야 날 수 있는 폭과 가라앉아 헤엄할 절벽 보통 절박해서는 부족한 격차에서 우린, 걷기도 전에 뛰어오르라 명을 받고 나는 법을 알고서 날으는 법을 배우지 어떤 족쇄를 파(破)해야 떠오를 수 있는가   자고로 시란 일 평 단위의 무수한 수직선 엿듣고 훔쳐 본 무구하며 찬란한 기록 하늘을 떨치고 건물을 가로지른다 그 가게 옥상에도 쇠창살이 있을까[…]

날개 (이상에게)
/ 2019-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