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손 크루소와 그 후예들 [2]

<로빈슨 크루소>는 어떤 이야기일까? “에혀, 그거 초등학교 때 다 읽은 건데… 외딴 무인도에 표류해서 혼자 사는 이야기 아녜요? 다 아는 이야긴데 새삼스레 뭘…”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금 더 아는 독자라면, “그 작품, 식민주의와 백인 우월주의가 심각한 작품이던데, 굳이 다시 읽을 가치가 있을까요?”하며 마땅치 않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쪽이든 일정 정도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 아는 이야기”라고 대답한 사람에게는 정말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는지 묻고 싶다. 십중팔구 ‘아이들을 위해’ 줄거리 위주로 축약해 놓은 책을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축약본을 지도에 빗대면서, 지도만 보고 그 고장을 샅샅이 구경했다고 말할[…]

로빈손 크루소와 그 후예들 [2]
/ 2005-06-29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이현용 이지러지기는 했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에서 학창 시절 왜 유행가는 천편일률적으로 사랑을 노래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 2005-06-28
봄이 왔다 (2) [36]

  2. 봄을 심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공단 지구의 침묵이 콧등을 때렸다. 기계 소음, 불 켜놓은 사무실, 밤새워 달려왔거나 달려갈 트럭들의 으르릉거림 같은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졸린 표정의 경비원이 손전등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후각적으로도 고요했다. 기계 윤활유 냄새나 독한 화공약품 냄새, 어느 외계 행성의 대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냄새들이 없다는 것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 갈피를 못잡는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서있었다. 문득 봄내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흙냄새, 풀냄새, 미세먼지와 화분이 뒤섞인 비릿한 듯하면서도 차분한 냄새가 없었다. 도시에도 그런 냄새를 풍기는 물건들은 많다. 공장[…]

봄이 왔다 (2)
신용목 / 2005-06-08
봄이 왔다 (1) [13]

  봄이 왔다. 타자 이영도 1. 택배가 왔습니다. “너 봄 좋아하냐?” 충격적인 대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상황을 살폈다. 안주인지 그 역한 냄새로 파리를 쫓아내기 위한 살충제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음식물들이 놓여있는 탁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정체 모호한 음식물 주위엔 불도를 수행 중인 소주병들이 두어 개 놓여있다. 좀 더 고개를 들어보자 공단 근처의 허름한 실비집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각은 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야근하는 사람과 기계의 소음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 음울한 고요는 불황을 나타내는 훌륭한 경제 지표다. TV 볼륨을 줄여놓고 드라마를 시청하고[…]

봄이 왔다 (1)
신용목 / 2005-06-08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서 본 성장의 의미 [3]

 헤세의『데미안』은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낯선 이름으로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독자들에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맞먹는 파문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라는 멋진 말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이 성장소설은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대략 열 살에서 스무 살까지 이르며 겪는 내적 방황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통한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지요.                                        빛과 어둠, 두 개의 세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순진무구하게 자란 소년 싱클레어는 세상을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로 나누어 인식합니다. 싱클레어가 파악하는 빛의 세계란 ‘가정’이자 곧 ‘질서의 세계’로서[…]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서 본 성장의 의미
/ 2005-06-08
안도현의 <연어> 중에서 [1]

  이현용 외은빛연어는 배경, 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언젠가, 나의 배경은 턱큰연어야, 라면서 거들먹거리던 연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툭하면 남의 먹이를 빼앗았고, 힘자랑을 일삼았다. 그들은 연어 무리의 작은 법률이라도 되는 듯 행세했던 것이다. 그래서 배경, 이란 늘 무섭고 어두운 거라고 그는 생각해왔던 것이다.“배경이란 뭐죠?”“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감싸고 있는 것, 나는 여기 있음으로 해서 너의 배경이 되는 거야.”“아하!”똑같은 단어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엄청나게 의미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은빛연어는 알았다.(안도현의 『연어』에서)안도현의 『연어』는 ‘은빛연어’를 주인공으로 한 교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동화’ 이다. 이윤 추구의 논리가 개인의 무의식까지 장악한 각박한 시대, 경쟁에 지친 현대인의[…]

안도현의 <연어> 중에서
/ 2005-06-01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2)

 나는 더욱 글에 매달렸다. 때로는 내가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이 되어보기도 하고, 직장의 상사가 되어보기도 했다. 글이란 게 묘해서 화자가 누가 되었든 결국 쓰는 사람 얘기였다. 나는 그렇게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 기계가 되기를 거부하다보니 시를 쓰게 되었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엔 돈 세는 기계가 되기를 거부하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다. 휴가가 끝난 뒤에도 나는 직장에 다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글에만 매달렸다. 처음에는 넋두리도 있고 푸념도 있었지만 차츰 내 글의 방향과 형식이 잡혀갔다. 인생이니 우주니 하는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뜻도 모를 추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2)
고봉준 / 2005-05-23
황혼의 타임머신

 – 재수록을 허락하며-     까마득히 잊었던 아이가 불쑥 나타나, 꾸벅 인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1970녀대초 그 때는 우리도 젊었었는데….. 그 무렵 나는 학생잡지 의 편집부장이었으며, 시를 쓰는 30대의 청년이었습니다. 일제시대인 어릴 적부터 SF, 즉 공상과학소설에 심취하여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학생잡지를 편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그쪽 작품들을 자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로 외국작품들이었지만…..  그런데, 그 때 이라는 잡지가 시인 지기운 씨의 주간으로 발행되어, 당시 과학부장이던 서광운 선생과 아동문학가 오영민 선생을 위시해서 우리 몇 사람이 서툴게나마 연재 혹은 단편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끝내는 우리나라 최초의 SF작가클럽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첫[…]

황혼의 타임머신
/ 2005-05-23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1)

"나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내 청춘을 저주했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사람들도 모두 내 편인 것만 같고, 내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사랑을 잃고 나니 세상을 얻기는커녕 나는 이 세상에선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놈으로 여겨졌고, 사람들도 죄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기만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끝이었다. 내 청춘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패배자로 살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마감 날짜를 이미 넘긴 원고가 있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겨우 원고 쓰기를 마치고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1)
이선우 / 2005-05-22
훈장 (5) 영감땡감과 딸년 [1]

5. 영감땡감과 딸년  날랜 칼로 위아래를 가르고 사지를 활짝 펼쳐 마침내 박스의 배를 갈랐다. W지구당 부위원장 최백규, W지구 경제인 연합 사무총장 최백규, W지구 로터리클럽 회장 최백규, 감사패 최백규, 공로패 최백규 들이 쏟아진다. 영감땡감 입이 쩍 벌어진다. 처첩들이 쏟아져 나온들 저리 좋을까. 단박에 눈에 생기가 돌고 콧잔등에 힘이 담뿍 담긴다.  “어이, 수건 하나 새 걸로 가져오소.“”  “수건은 뭐하게요?”  “보면 몰라. 닦아야지.”           “봤음 됐지 다시 처박아 놓을 걸 뭐 하러 닦고 말고 해요?”  “이 사람이? 아, 빨리 안 갖고 와?”  성질을 내든 말든 그건 영감땡감 사정이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 휑하니 돌아서 나와버렸다. […]

훈장 (5) 영감땡감과 딸년
편혜영 / 2005-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