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준
[6월_시_문] Whipping boy

  [6월 시_문]     Whipping boy     박성준               각오한 듯 현이는 화장실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동칼이 정육점에서 고기가 동날 때까지 돌아가듯, 현이 앞에서 부드럽게 미닫이문이 열리고 있었다 한 차례 공사를 끝낸 그 화장실은 일 층이었다 모두 미래를 대비한 복지라고 수고롭게들 생각했지만, 현이는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혼자 끄덕여보았다 현이는 이튿날부터 건강한 아이들의 팔짱을 끼고 그곳을 다른 세상처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변기 한 곳에서 번갈아가며 소변을 누었다 때로는 넷 다섯 심지어 여섯 명까지 인원을 늘려가며, 한 쪽에 청소도구들과 비품들을 방치해놓아도 넉넉할 만한 공간에[…]

[6월_시_문] Whipping boy
/ 2014-06-16
조우리
[5월 소설_못] 나사

J는 언제부터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잠들었을까.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고 곤한 잠을 자고 있는 J의 등은 태아처럼 웅크려 자는 버릇 탓에 고래처럼 둥글었다. 손을 뻗어 J의 등에 손바닥을 붙였다. 검지로 척추의 뼈들을 천천히 더듬어보았다. J는 깨지 않는다. 뒤척이지도 않는다.

[5월 소설_못] 나사
/ 2014-05-15
[5월 시_못] 결정학

  [5월 시_못]     결정학     황인찬               무슨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요 사람 몰리는 곳은 너무 싫어요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고 있었다       축제 속에서 그를 놓쳤다 사람들은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너무 신이 나면 울기도 했지만 그게 슬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언제 그를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는 어느샌가 내 곁에 있었는데 그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야 어디 갔었어 그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없다 사람들은 이제 춤을 추고 있다 다신 놓치지 않을[…]

[5월 시_못] 결정학
/ 2014-05-15
[4월 단편소설_맛] 책상

속기사가 한때 유망직종이었다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한때’가 아니라고 반박할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나는 두 해 전에 속기사 자격증을 땄고, 그건 어머니의 선견지명에 의한 것이었는데, 속기사 자격증이 공무원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죠.

[4월 단편소설_맛] 책상
/ 2014-04-25
황종권
[3월 시_몸] 촌년의 은유

  [3월 시_몸]     촌년의 은유     황종권           오직 촌년의 이름으로 저녁이 흘레붙는 몸이었다.   개켜놓은 속옷을 자주 잃어버렸고 곱게 접은 관절 속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다른 몸에 있어도   또 피부가 검어졌다. 그건 도시가 아닌가. 가장 고루한 형식의 체벌이 아닌가. 살갗에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너무 자명한 것을 보면 살 섞는 일에 능란해지고 수돗물을 들이킬 때마다 묽어지는 것을 체위라고 불렀다.   신음이 창궐하는 뻘밭, 주저앉은 섬, 꼽추 등에 언 발을 푸는 물새, 더럽도록 짠물, 뻘배가 지나간 자리, 질퍽한 햇빛   일평생[…]

[3월 시_몸] 촌년의 은유
/ 2014-04-03
채현선
[3월소설_몸] 마쉬 [1]

모니터 앞에 멍청하게 앉아 있는 날들이 몇 달 동안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절망을 한 데 모아 푸딩을 만들고 그걸 한 입씩 떠먹는 기분이었다. 가슴에 무언가가 꽉 들어차 있어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크게, 크게 들이켜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3월소설_몸] 마쉬
/ 2014-03-15
여동현
[2월 소설_맨]얼음이 녹기 전에

달은 해가 지는 순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멋진 존재이고, 가장 비싼 전광판이다. 어릴 적부터 매일 달 광고판을 보고 자란 나는 꽉 막힌 노인들과는 다르게 달 광고판이 그럭저럭 도시 경치와 어울린다고 느낀다. 특히 대형 스크린과 홀로그램 전광판으로 번쩍번쩍한 뉴욕의 야경과는 정말 멋들어지게 궁합이 맞는다.

[2월 소설_맨]얼음이 녹기 전에
/ 2014-02-15
임솔아
[2월 시_맨]꽃들은 오월에 완벽했다

    꽃들은 오월에 완벽했다   임솔아             마을이 테두리부터 쉰 물이 들고 있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떠다니는 민들레 홀씨 하나를 잡았다 손바닥에서 하얀 거미가 터졌다 손바닥을 쥐고 걸었다 그림자들이 숲의 이목구비를 바꿔 그렸다 숲의 머리카락이 길어졌다 껍질이 갈라졌다 긴 머리카락 끝에 둥지를 트는 새들을 보았고 나는 내 정수리를 만졌다       웅덩이에 빠졌던 맨발이 발자국을 만들었다 오월의 맨발이 공원을 만들었다 뭉텅 피어났고 뭉텅 떨어졌던 꽃들 나는 차가운 돌 위에 앉아 고여갔다       바닥에서 끌려 다니던 나뭇잎처럼 돌아오지 않는 검은 조각들이 있었다[…]

[2월 시_맨]꽃들은 오월에 완벽했다
/ 2014-02-15
오현종
[1월 단편소설_말]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3

정의 세상은 오직 칼로 싸우는 자객과 말로 싸우는 이야기꾼의 세상이었다. 칼은 돼지를 잡는 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살을 베고 찌르는 데 쓰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병이 아니라, 늙음이 아니라, 칼이어야 했다. 고모가 건네준 이야기책의 글자들은 진작 닳아 없어졌지만, 정은 이야기를 언제든 줄줄 외워 말했다. 이야기는 완전히 정의 말이 되었다.

[1월 단편소설_말]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3
/ 2014-02-11
문부일
[12월 단편소설_발] 발치

문득 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발을 내딛으며 걸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발이 안 맞아서 손해 본 적도 없고 남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었다. 걸음이 느리다고 야단맞은 적도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정신을 차렸다. 그런 생각은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다른 사람과 똑같이 걷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12월 단편소설_발] 발치
/ 201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