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7월_산문_비] 물의 정령

비가 온다. 방은 어둡고 빗소리만이 가득하다. 단조로운 소리의 질감이 평면의 색깔로 변하는 순간, 음音에서 선線으로, 선線에서 면面으로 펼쳐지는 순간, 그렇게 어떤 공간이 발생하는 순간. 그러면 다만 거기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된다. 고요히.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 앉아 있는 기분으로. 가고시마 현의 작은 섬. 야쿠 섬 깊은 숲속에는 수령 7200년 된 삼나무가 있다는데. 그 삼나무. 조몬스기를 보러 가고 싶은 그런 날이다.

[7월_산문_비] 물의 정령
/ 2013-08-02
안미린
[7월_시_비] 비(秘) 밀(密)의 균형

    비(秘) 밀(密)의 균형   안미린         여기, 양팔 저울이     있다고 치자 왼쪽에는 다가오는 신(神)을 앉히고     오른쪽엔 얼린 그림자 형광색 포스트잇     물에 젖은 돌을 얹으면 평형을 이루는 저울 위에서     웅크린 신과 그와 같은 중량의 윤곽들이     의외로 부드러운 것들이 단 하나의 비밀이 될걸?     짙은 밤이므로 돌의 물기를 말리면     전부 알아버린 세계의 왼쪽이 기울어지고     모두의 태명을 아마도 휘파람을     얼린 그림자에 새기면 신은 숨죽이며 꼬리를     물음표로 말아 올릴걸? 이름에[…]

[7월_시_비] 비(秘) 밀(密)의 균형
/ 2013-07-15
[7월_단편소설_비] 오렌지카라멜

    오렌지카라멜   전삼혜        저 선배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구나. 다현은 생각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차모래도, 다현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래의 뒷모습은 특별하지 않았다. 다현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다고 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뒷모습이었다.             교장이 서 있는 무대 위에서 아이들이 서 있는 바닥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다현은 눈으로 거리를 어림짐작해 보았다. 10미터? 15미터? 마이크까지 동원해서 이야기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줄의 중간쯤에 서 있는 다현에게도 교장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확실하게 보였다. 월요일 아침조회 시간,[…]

[7월_단편소설_비] 오렌지카라멜
/ 2013-07-15
오도엽
[6월_반_산문] 열다섯 채현이

    열다섯 채현이   오도엽            열다섯 채현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가을이었다. 집을 나온 여성들이 모여 사는 서울의 한 ‘쉼터’에서였다. 채현이는 집을 뛰쳐나왔지만 ‘가출소녀’는 아니다. 홀로 집을 나온 게 아니라 엄마와 동생들도 함께 가출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나는 노숙인 글쓰기 수업에서 강의를 했다. 노숙인 하면 서울역과 함께 지린내 나는 옷과 술에 찌든 얼굴, 초점 잃은 눈동자, 담배를 구걸하는 모습을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노숙인들은 전혀 달랐다. 눈동자는 너무 맑았고, 술은 증오했고, 차림새는 깔끔했다. 그들 가운데 채현이가 앉아 있었고, 얼굴은 너무나 해맑았다.   […]

[6월_반_산문] 열다섯 채현이
/ 2013-06-17
오은
[6월_반_시] 반의반

    반의반   오은         너에게 반을 줄게 나는 나머지 반을 가지면 되니까   나는 반과 반을 합치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너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면 둘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불완전했고 너는 가득 차 있었다   가뭄과 홍수 사이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했다   채울 것이 간절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증식할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었다   반반이었다   너는 반밖에 안 되어서 반나절 만에 그것을 다 써버렸다   터벅터벅 돌아오는 네 몸뚱이는 반으로 쭈그러들어 있었다 두 눈에는 빛이 있었다 빈손에는 여지가 있었다 움켜쥘 것이 아직[…]

[6월_반_시] 반의반
/ 2013-06-15
[5월_별_에세이] 미래의 책

최근에 한 인터뷰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어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인터뷰 기사가 실릴 곳이 온라인 서점이어서 그런지 인터뷰어의 질문들 중엔 유독 ‘책’에 관련된 것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유년기, 청소년기, 문학청년 시절, 그리고 현재까지, 저에게 인상 깊은 책들이나 크게 영향을 끼친 책들에 관해 각각 이야기해달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5월_별_에세이] 미래의 책
/ 2013-05-15
[5월_별_소설] 빙글빙글 돌고

제가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섬나라 스카리니아(Skarinia)의 그라(Goora)산(山)에서 ‘닭 치고’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몇 주일동안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하고, 닭떼를 지키며, 사냥 묘(猫)인 스호쉬 고양이(sfosi cat)를 상대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물론, 스호쉬 고양이는 인간의 말을 못했습니다. 야옹야옹거릴 뿐이었습니다.

[5월_별_소설] 빙글빙글 돌고
/ 2013-05-15
이명현 천문학자(2013)
[4월_빛_에세이] 빛 그리고 빛

유하의 시 「햇빚, 달빚, 별빚」 전문이다. 이강백이 쓴 단막극 중에 <결혼>이라는 작품이 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대학가 연극 무대에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연극이다. 청혼을 하려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어떤 남자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으로 구성된 연극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무뚝뚝한 사내가 말없이 시계를 가리키며 그 남자로부터 물건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간다.

[4월_빛_에세이] 빛 그리고 빛
/ 2013-04-16